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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카오 Oct 20. 2020

카카오 게임하기, 게임이 일상이 되는 세상을 열다

‘판’을 뒤집은 Social Network Game

2011년 초여름, 스타트업 카카오는 분주했다. 신규사업부는 카카오톡 그 이후의 다른 ‘생태계’를 발견하기 위해 리서치를 거듭하고 있었다. 플러스친구(현 톡채널)나 카카오스토리처럼 카카오톡 채팅과 프로필을 통해 레버리지 하는 서비스들이 기획을 시작한 것도 이 시점이다.  


연말에 먼저 선보여 선전하고 있던 선물하기가 있었지만, 2천만 명을 향해 폭발적으로 늘어가던 카카오톡 이용자를 감당할 만큼은 아니었다. ‘로켓 연료’는 소진되고 있었고, 단단한 비즈니스 모델이 절실했다. 토드(Tod)는 신규사업부장을 겸임하던 CEO 제이비(JB)와 함께 몇몇 크루들이 새로운 아이템을 찾느라 여념이 없던 시기라고 당시를 기억한다.



#비주류모바일 게임

그 해 여름을 지나 가을까지, 게임 비즈니스는 ‘검토 대상’인 여러 아이템 중 하나였다. 북미와 일본 등 해외에서 소셜 네트워크 혹은 피쳐폰 기반의 온라인 게임들이 반응을 얻고 있었고, 게임 얼리어답터였던 카카오 크루들 몇몇은 페이스북용 소셜 네트워크 게임을 즐겨하고 있었다. 한편, 비즈니스 검토 과정에서 만난 여러 게임 기업들 역시 카카오톡 친구 목록을 활용한 이용자 확대 전략에 관심을 보였다. 누구도 구체적인 모습을 정의 내리진 못했지만, PC환경과 비교할 수 없는 간결한 인증 절차와 유저 간 커뮤니케이션의 용이함에는 이견이 없었던 것. 


카카오에는 창업주인 브라이언(Brian)을 비롯해 게임 비즈니스에 노하우를 가진 일부 크루들이 있었다. 하지만 당시 막강한 시장 지배력을 갖고 있던 메이저 게임사들은 ‘작은’ 모바일 서비스 기업인 카카오가 게임 비즈니스를 꾸려 나갈 역량을 갖췄는지 의심했다. 여름이 끝나갈 무렵, 카카오는 운영 리소스 등 여러 정황을 고려해 게임사업 관련 권한을 메이저 게임사들에게 임대하는 것으로 사업 방향성을 잡았다.

 

딜(Deal)을 위해 여러 게임회사를 만났지만 간극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토비(Toby)는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출장까지 다니면서 비즈니스 모델을 설명했지만세상에 없던 모바일 소셜 게임이란 것에 관한 공감대가 낮았어요카카오가 필요로 하는 만큼의 금액을 제시해 주는 곳이 없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던 중 당시 중견 게임사였던 위메이드 엔터테인먼트(WeMade Entertainment)가 투자자로 나섰다. 오랜 시간 PC를 중심으로 고착된 게임산업이 모바일 네트워크를 중심으로 요동칠 것에 공감했기 때문. 게임 업계가 가보지 않은 길에 카카오와 위메이드가 손잡고 나아간다고 선언한 뒤, 추가 투자자금도 속속 유입됐다. 이에 힘입어 카카오는 직접 게임 사업에 나서는 것으로 비즈니스 방향성을 바꿨다. 게임 업계 전문가를 영입하며 진영을 갖추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 2011년 가을부터였다.


#우여곡절그리고 출시

카카오가 시장을 살피는 사이, 자본과 인력을 갖춘 회사들이 먼저 치고 나갔다. 당시 메신저와 포털을 서비스하고 있던 다음(Daum)이 국내 메이저 게임사 및 일본 모바일 게임 기업과 손잡고 연이어 플랫폼을 내놨다. 본인 인증 기능 구현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모바일 게임 흥행에 필수적인 네트워킹 효과는 미미했다. 이들이 주춤한 사이, 카카오 게임 TF는 열 명의 인력으로 서비스 출시를 준비했다. 


메신저 플랫폼으로써 파워를 보여주고 있던 카카오였지만, 업계의 분위기는 여전히 ‘갸우뚱’이었다. 모바일에 새로운 기회가 있다는 점에는 공감대가 있었지만, 여전히 PC게임의 기세는 막강했고 ‘업력’이 없는 카카오에 콘텐츠를 공급하겠다는 ‘메이저’는 없었다.

위메이드 엔터테인먼트는 초기 투자자이자 전략적 파트너로 카카오 게임하기의 시작에 함께 했다. 2012년 7월 게임 출시 당시 이미지.


서비스 론칭 전 7개 회사의 10개 게임을 모셔오는’ 수준으로 준비했어요모바일 소셜 게임이 뭔지 우리도 정확히 몰랐고게임사도 몰랐습니다귀사의 게임에 소셜 로그인만 붙여주세요같이 한번 해 봅시다라며 파트너들을 설득해 계약서를 썼어요. 토드의 기억이다.   


출시일인 2012년 7월 30일 이후에도 일주일 넘게 게임 TF의 분위기는 어두웠다. 제대로 ‘터진’ 게임은 나타나지 않았고, 토드는 대책회의에서 우리 망한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토비는 메이저 게임사가 참여하지 않아서인지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지제이비를 비롯한 TF의 크루들은 고민에 빠졌고 우울해했죠라고 회상했다. 안팎의 관심은 이용자 2천만 명을 돌파하며 파죽지세로 커 나가던 카카오스토리에 쏠렸다. 


침울한 분위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출시 9일째에 접어들면서 입점 게임 대다수가 인기 순위 상위권에 이름을 올렸고, 8월 13일에는 애니팡 API 인증 서버에 이상 징후가 생기기도 했다.  8월 18일, 이용자들이 보내는 ‘하트’가 채팅창들을 강타하며 애니팡은 안드로이드 무료 앱 전체 1위를 기록했다. 폭발적인 이용자 반응에 카카오는 애니팡 개발사인 선데이토즈에 주말을 기해 긴급 서버 임대를 하기에 이르렀다. 익명성이 보편적이었고 네트워킹 효과가 제한적이던 기존 게임들과 달리, 현실의 여러 친구와 선물을 주고받으며 게임을 즐길 수 있다는 특유의 이용자 경험이 빛을 발한 것.

주말 서버 폭주에 대응했던 아지트 리포트. 2012년 8월.


소규모 개발사의 게임들이 연이어 흥행 가도에 합류했다. 1인 개발사가 만든 드래곤플라이트가 하루 매출 20억 원을 넘겼다는 입점 업체들의 ‘대박’ 소식은 상징적이었다. 당시 막대한 리소스를 들여 만든 PC게임에서 ‘탑 티어(Top Tier)’임을 증명하는 매출액이 월 100억 원 수준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업계가 받은 충격을 짐작할 수 있다.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파트너를 ‘모셔와야’했던 카카오는 이내 길게 줄을 선 게임들을 ‘심사’ 해야 하는 입장이 됐다.


#안팎의 시선

2012년 하반기, 카카오 게임하기는 철옹성 같던 PC 온라인 게임 중심의 시장에 완전히 다른 방법론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게임과 담쌓고 살던 여러 사람들이 하나 둘 게이머(Gamer)가 됐다. 카카오를 바라보는 게임 업계의 시선은 달라졌을까? 그 해 가을과 겨울, 카카오에 합류한 타일러(Tyler)와 테리(Terry)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저는 계정 연동 등 기술 지원을 하기 위해 합류했어요애니팡 열풍이 불고주변에서 하나 둘 하트를 보내기 전까진 카카오가 게임 비즈니스를 준비하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습니다게임 업계에서 오래 일 해 왔지만제가 카카오에서 일하게 될 줄은 몰랐죠”. 타일러의 얘기다. 


게임 업계에서 사업 기획 일을 오래 해 왔던 테리의 기억도 비슷하다. 애니팡 열풍이 거셌던 가을에 면접을 보고 12월에 합류했어요하지만 게임업계 동료들은 이직을 말리는 분위기였습니다. ‘시장 질서가 굳어져 있는데 카카오가 얼마나 잘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적인 시선이었죠게임 사업에서 잘 안 풀리면 다른 사업에 지원해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카카오에 합류했어요”. 


안팎의 시선은 2013년 들어 확연히 달라졌다. 한 명이 열 명을 초대하면 열 명이 다시 백 명을 초대하는, 기하급수적인 전파 속도가 카카오의 재무제표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카카오는 2013년 2108억 원의 매출과 658억 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전년 대비 각각 3.5배, 8.5배가량 훌쩍 늘어난 수치였다. ‘플랫폼 효과’의 실체와 막강한 힘이 증명되며 게임 사업뿐만 아니라 카카오 전반에 관한 재평가가 시작됐다. 또 다른 도전에 나설 수 있는 확고한 자생력이 갖춰진 것도 이 무렵이다.

2013년 12월 24일 진행된 카카오 게임대상 수상작들


#새로운 출발

‘카카오 게임하기’는 무엇인지 특정할 수 없었던 새로운 기회를 커다랗고 구체적인 성과로 증명하며 모바일 게임 대중화를 이끌었다. 그 결과 대한민국 게임산업에도 15년여 만의 대 변혁기가 왔다. 2010년대 초반까지 국내 게임 인구는 통상 500만 명으로 추산됐지만, ‘카카오 게임하기’  등장 이후  2,000만 명으로 늘었다는 평가가 나왔다.  


생태계도 변했다. 중소 게임사들의 경이적인 성공에 자극받은 ‘연쇄 창업’이 일어났다. 기존 강자들 역시 자본과 경험을 바탕으로 빠르게 모바일 게임 시장에 합류했다. 인재와 자본이 몰리면서 게임 산업의 규모가 급성장했고, 장르 역시 다변화되며 이용자들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한 해 동안 드라마틱하게 성장한 카카오 게임하기


카카오 게임하기는 게임사들에게 일종의 ‘흥행 보증수표’가 됐다. 중소형 개발사들과 대형 게임사들이 각축을 벌이는 가운데 카카오는 과열 경쟁을 막고 공정 경쟁을 돕기 위해 한 회사가 신청할 수 있는 심사 리스트를 제한하는 ‘쿼터제’를 도입하기도 했다. 대형 게임사들이 자체 플랫폼을 강화하거나, 카카오 외 모바일 플랫폼과의 전략적 협업을 적극 모색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1년도 걸리지 않아 ‘대세’가 된 카카오 게임하기를 파트너로만 보기엔 너무 위험하다는 판단에서였다. 


과열된 분위기 속에 부작용도 나타났다. ‘카카오 게임하기’의 핵심 성공 요소였던 프로필 기반 소셜 게임 연동에 대한 이용자들의 피로도가 쌓이기 시작했고, ‘1,000만 다운로드’ 게임들이 연달아 등장하는 가운데 카카오는 운영 정책을 보완해 소셜 메시지를 제한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넷마블의 ‘몬스터 길들이기 for Kakao’(2013.08)의 등장 이후 캐주얼 게임 장르가 주류를 이루던 카카오 게임하기 생태계는 미드코어와 하드코어 장르 중심으로 바뀌어갔다. 기술력과 자금력이 뒷받침되는 대형 게임사들이 모바일 소셜 게임에서도 다시 우위를 점했다. 급기야 2014년 들어 소위 ‘탈카카오’ 현상까지 일어났다. ‘카카오 게임하기’는 전면적인 체질 개선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다.


드라마틱했던 첫 번째 성공과 그 한계를 모두 경험한 카카오는 이듬해인 2015년부터 새로운 출발을 준비했다. 게임 산업 전문가인 남궁훈 당시 엔진 대표를 게임 총괄 부사장으로 영입해 사업 구조를 바꿔나가기 시작했다. 카카오는 수수료 제도를 비롯해 파트너 관련 정책을 유연화한 것을 필두로 2016년 들어서는 직접 게임을 유통하는 ‘퍼블리셔(Publisher)’로 변신하며 체질 개선에 나섰다. 그리고 자회사 다음 게임과 엔진의 합병, 게임 부문 분사를 통해 '카카오게임즈'로서 본격 항해를 시작했다.  이후 2020년 9월 IPO 등의 행보를 통해 ‘for Kakao’를 토대로 ‘by Kakao’의 시대를 열고 있다. ‘게임이 일상이 되는 세상’이라는 비전 아래 카카오의 ‘게임 사업 2막’이 펼쳐지는 것.


#회고

인터뷰를 마치며 카카오 게임하기의 시작과 성장에 함께했던 초기 멤버들에게 소회를 물었다.   


우리나라에서 카카오를 빼놓고 모바일 게임을 이야기할 수 없죠게임 메시지를 어떤 친구에게라도 편하게 보낼 수 있는 플랫폼은 카카오가 유일하잖아요지금도 드래곤플라이트나 애니팡을 즐기는 분들이 많아요서버를 갖추지 않고도 게임을 서비스할 수 있게 해 준 발상 덕택에 중소 게임사들이 많은 이용자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_ 타일러


“‘이 게임 함께 해요라는 메시지를 하트로 표현한 게 흥행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을까요카카오이기에 할 수 있었던 직관적이고 감성적인 표현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_ 토비 

“‘국민게임이라고 하면 고스톱을 꼽았어요이후 카카오 게임하기는 할머니도 엄마도 하게 된 게임을 여럿 탄생시킨 주역이죠사람들의 일상을 즐겁게 바꾼 것에 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요사업 초기에 비해 경쟁 환경이 치열해져서 저자본 국민게임이 탄생하기 어렵게 됐지만저는 국민게임 어게인을 기대해봅니다 _ 테리


종전에 짜인 견고한 판을 흔들고 전혀 새로운 게임 세상을 만든 그때처럼, 게임 업계를 흔드는 테마가 등장하지 않을까요그게 언제일지무엇일지 모르지만 카카오게임즈가 또 한 번 역할을 하리라 기대합니다 _ 토드 


가치 있게 기억되는 것, 그리고 만들어 나가야 할 가치들. 이 모든 것은 ‘가보지 않은 길을 두려워하지 않는 DNA’ 안에 수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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