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카오스토리, 메가 히트의 바통을 이어받다
카카오톡 이용자 수가 1천만 명을 넘어 2천만 명을 향해 달려가던 2011년 6월, 크루들은 주변에서 발견한 이용자 습관을 내부에 공유했다.
“이용자들이 틈 날 때마다 카카오톡 친구 프로필 사진을 찾아보는 것 같아요. 소셜미디어처럼요”
“그렇다면 카톡 친구들과 감정 교류를 좀 더 잘할 수 있도록 우리가 뭔가 해야 하지 않을까요?”
글로벌 소셜미디어들은 당시 빠르게 국내 이용자들을 확보하고 있었다. 이에 대응하는 카카오만의 소셜미디어가 필요하다는 의견은 2010년부터 꾸준히 제기됐기에 발걸음이 빨라졌다. 확산되고 있는 이용자 습관에 집중해 솔루션을 찾아보자는 취지로 ‘프로필 TF’가 꾸려졌다. 몇몇 IT회사에서 기획자로 일하다가 1개월 전 카카오에 합류한 류(Ryu)가 TF장을 맡았다.
TF 구성 당시 카카오는 80여 명이 근무하던 작은 회사였다. 하지만 카카오톡은 파죽지세로 성장하고 있었고, 수익 모델은 뚜렷하지 않았다. 한 번도 경험해 본 적 없는 트래픽을 감당하면서, 한 켠에서는 새로운 사업들을 준비하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연일 투자자 설명회를 진행하는 숨 가쁜 일정이 이어졌다.
한여름을 지나면서 콘셉트가 좀 더 다듬어졌다. 기존에 존재하는 사진 꾸미기 앱이나 비 지인 기반의 소셜 미디어들과는 달리, 카카오톡만의 친구 관계를 기반으로 근황을 나누는 또 다른 방법을 실현해나가기로 했다. 이 과정에서 갑론을박도 있었다. 카카오톡 프로필을 기점으로 발현된 아이디어인 만큼, 톡 안에서 서비스를 구현하자는 의견과 별도의 앱으로 구현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하게 맞섰기 때문이다. 두 의견 모두 설득력이 있었지만, ‘실현하고 싶은 이용자 가치를 가장 빠르게 성취하는데 집중하자’는 방향성을 존중해 별도 앱을 내놓기로 했다.
그해 가을과 겨울을 지나며 알고리듬과 UI/UX가 완성됐다. ‘카카오프로필’과 ‘카카오나우’ 등 후보군과 경합해 ‘카카오스토리’라는 서비스명도 정해졌다. 포스팅에 대한 감정 분류는 ‘좋아요/멋져요/기뻐요/슬퍼요/힘내요’ 다섯 가지로 준비했다.
“당시 상승세를 구가하던 글로벌 소셜미디어에는 ‘좋아요’ 기능만 있었는데, 자연스럽게 반대어로 떠오르는 ‘싫어요’를 넣고 싶진 않았어요. 이용자가 상처 받는걸 원치 않았거든요. 대신 공감의 뜻을 보낼 수 있는 슬퍼요나 힘내요를 넣었죠. 긍정 감정을 세 가지로 넣은 이유는 커뮤니티 전반을 따뜻한 무드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류의 회고다.
많은 사람들이 스마트폰 카메라를 손에 쥐던 시기였다. 하지만 당시 국내 소셜미디어 1위 서비스는 모바일 환경에서 별다른 반응을 얻지 못했고, 글로벌 소셜미디어들은 사용하기 어려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TF 구성원들이 ‘어느 정도의 성공’은 가능하다고 예감했던 이유다.
신중한 성격으로 소문난 백엔드 개발자 다니엘(Daniel)은 출시를 앞두고 수백만 명의 트래픽을 감당할 수 있는 서버를 주문했다. ‘적자 경영’을 하는 회사로서는 무척 과감한 결정이었지만, 담당자의 판단이 가장 존중받는 환경이었기에 누구도 ‘과하다’는 내색은 하지 않았다.
2012년 3월 20일 오전, 앱스토어에 카카오스토리가 첫 발을 내디뎠다. 밤 10시 무렵 가입자 수 1만 명을 돌파했고, 자정이 되기 전 국내 소셜 네트워킹 카테고리에서 카카오스토리는 1위에 올랐다. 모든 크루가 조마조마하게 현황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정작 TF장인 류는 앱스토어 전체 카테고리나 안드로이드 앱 마켓에서 예상보다 반응이 약하다는 생각에 몇몇 크루들이 사주는 ‘위로주’를 마시러 갔다.
폭풍은 출시 다음날부터 몰아쳤다. 3월 21일 밤 10시를 전후해 앱스토어 전체 1위에 오르면서 안드로이드 앱 마켓도 꿈틀댔다. 1분당 가입자 수는 순식간에 천 명 수준을 넘어 2천 명에 근접했다. 다니엘은 “서버 대책을 생각보다 일찍 세워야 할 것 같다”라는 아지트 글을 남긴 지 40분이 지나 “푸시 서버가 못 버텨서 일단 댓글 푸시 막았어요”, “친구 수락 푸시도 막았어요”라고 연이어 썼다.
가입자와 게시글은 동시에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시너지 효과로 카카오톡의 가입자도 함께 늘었다. 카카오톡 고유의 소셜 그래프(Social Graph)와 초대하기 기능이 불러일으킨 폭발력 때문이었다. 엔지니어들은 화장실 갈 시간조차 아끼면서 사흘 동안 회사에 갇혔다.
지금처럼 클라우드 서버를 순발력 있게 확보할 수 있는 시절이 아니었다. 게다가 세계 하드디스크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던 태국에서 2011년 발생한 홍수 피해의 여파가 큰 시점이었다. CFO 딘(Dean)은
“얼마가 들어도 좋으니 서버를 확보하자”는 의사결정을 했고, 크루들은 ‘웃 돈’을 주고 서버를 들여왔다.
서비스 오픈 이틀 반이 지난 3월 22일 정오 무렵, 카카오스토리 가입자 수는 1백만 명을, 6시간이 지나 2백만 명을 돌파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허리 한번 제대로 펴지 못하는 나날을 보낸 지 9일 반이 지나 이용자 수는 천만이 돼 있었다. 이는 국내외를 통틀어 최단기간에 천만 고지를 넘어선 소셜미디어 서비스의 기록이다. (주. 카카오톡은 100만 가입자 확보에 6개월이 걸렸고, 13개월이 지나서야 1천만 가입자를 확보했다)
이로써 카카오스토리는 카카오톡의 메가 히트 바통을 이어받은 두 번째 주자가 됐다. 그간 구성원 수 170여 명 규모로 성장한 스타트업 카카오는 한층 강력한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를 보유하게 됐다. 짬날 때마다 친구들의 프로필 사진을 들여다보는 풍경이 곳곳에서 관찰됐다.
“프로필 사진에 작게 표시된 빨간 N벳지가 호기심을 자극했습니다. 프로필 사진을 더 잘 꾸미고 싶었던 이용자 갈증은 이미 상당했고, 개성을 표현할 수 있는 카카오톡 배경화면 기능도 함께 제공되면서 엄청난 호응이 일어났어요. 카카오스토리 안에서 카카오톡 친구 리스트를 띄워 막힘 없이 초대할 수 있는 간편한 사용법도 한몫했고요”. 당시 주니어 기획자였던 그레이스(Grace)의 기억이다.
각각의 콘텐츠에 ‘친구 공개’와 ‘전체 공개’로 공개범위를 정할 수 있게 한 점이나, 친구 추가 시 허락을 받게 한 점 등 사생활 침해 시비를 차단한 점도 인기의 요인이었다. 확산세는 마른 낙엽에 불붙은 듯했다.
카카오톡의 이용자는 이미 4천만 명을 넘긴 시점. 카카오스토리까지 폭발적인 성장세를 구가하게 된 상황에서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은 비용 부담이었고, 여전히 불분명한 것은 비즈니스 모델이었다. 카카오 내부에선 이 상황을 어떻게 보고 있었을까? 류가 당시를 회상했다.
“어느 누구도 그 상황을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았어요. 경영진에서 확고한 관점을 갖고 있었거든요. 이용자 가치를 제공하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면 자연스럽게 비즈니스 모델은 따라온다는 생각이었죠. 대규모 투자유치 직전 막바지 실사가 진행되고 있었는데, 투자자들도 이러한 플랫폼 성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네트워크 효과에 관해 집중적으로 질문했다고 합니다”
작은 기업이 큰 서비스를 갖게 되면서 부족한 점도 많았다. 당시 담당자들은 8년이 지난 지금 어떤 부분들을 아쉬워할까.
“걱정과 우려가 앞섰기에 이용자가 잘 쓰던 기능을 제한하거나 편의 기능을 늦게 제공한 점이 아쉽습니다. ‘아이 엄마들의 서비스’라는 고정관념과는 달리 10대들이 상당한 트래픽을 갖고 있었어요. 이들은 탈퇴나 재가입을 빈번하게 했고, 닉네임도 수시로 바꾸는 등 예상치 못한 이용 행태를 보였죠. 어뷰징(abousing)을 우려해 이름 변경 횟수를 제한했었어요. 글 수정 기능도 원본 훼손의 우려가 있어서 이용자들이 오랫동안 요구했지만 빨리 제공해주지 않았었고요.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이용자의 목소리에 더 귀 기울일 필요가 있었습니다” _ 그레이스
“일정 친구수를 넘어가면 시스템 수용량이 받쳐주지 못해 초반에 최대 친구수에 제한을 뒀었어요. 글로벌 서비스들이 넉넉한 리소스를 배경으로 피드 구성을 다이내믹하게 해 준 것과 대비되는 측면이었죠. 랭킹 알고리듬을 조합하거나 피드 구성에 변형을 주는 시도를 마음껏 할 수 없어서 정적인 피드를 제공했던 점이 아쉬워요” _ 다니엘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간 관계도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는데, 이런 다이내믹스(Dynamics)를 서비스 초반에 우선순위로 삼았더라면 한결 나은 이용자 경험을 줄 수 있었을 거라는 아쉬움이 있어요. 글로벌 서비스가 될 수 있었던 기회를 놓쳤던 점도 안타까운 기억입니다. 스마트폰 이용자들이 앱 마켓을 자주 들여다보던 시절이었잖아요. 재외동포들이 카카오스토리를 설치하면서 상위에 노출됐고, 외국인 친구들이 덩달아 많이 설치를 했어요. 론칭 당시엔 리소스 문제로 한글판만 준비했었는데, 외국인들이 리뷰에 쓴 구절들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요. ‘1등이라서 설치했는데, 글자를 이해할 수 없어서 사용할 수 없다’는 반응들이요.” _ 류
전성기에 비해 활성화 지표는 낮아졌지만 카카오스토리는 고유의 강점을 토대로 다시 한번 도약할 채비를 하고 있다. 지인 간의 교류보다 정보나 뉴스, 혹은 ‘있는 척’을 자주 접하게 되는 소셜미디어들의 피로감 속에서 친구 간의 편안한 소통이 주는 가치를 높게 사는 팬덤이 공고하기 때문이다. PC 시대부터 공고했던 국내외 소셜미디어들을 단숨에 역전했던 순수 모바일 태생 카카오스토리. 이제는 단 하나 남은 국산 피드(Feed) 형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발걸음에 이목이 쏠리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