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기와 작은 승리의 경험이 쌓여 발휘된 픽코마의 저력
‘만화 종주국에서 웹툰으로 돌풍을 일으키는’, ‘전 세계 만화 앱 매출 1위’, ‘1년 새 매출 2배 껑충’. 모두 카카오재팬의 ⟪픽코마(ピッコマ, Piccoma)⟫에 관해 설명하는 최근의 기사 제목들이다.
콘텐츠 대국 일본에서 후발주자로 진입한 카카오재팬은 어떤 과정을 거쳐 오늘의 성과를 일궈냈을까? 도전과 실패, 피보팅(Pivoting)과 혁신, 그리고 새로운 시장을 만나기까지 그들이 걸어온 길을 살펴봤다.
일본인들은 2011년 3월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을 계기로 ‘피쳐폰 메일’ 일변도에서 벗어나고 있었다. 재난 상황에서 이동 통신망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데이터 통신망을 쓰는 카카오톡 등 모바일 메신저가 비상 연락 수단이 됐기 때문이다. 카카오재팬은 그해 7월에 설립됐다. 카카오톡이 국내외 이용자 수 2천만 명을 향해 커 나가던 시기였다.
카카오재팬은 카카오톡 활성화를 위해 2012년 10월 야후!재팬과 합작 법인을 설립하고 이듬해 500억 원이 넘는 광고선전비를 집행했다. 하지만 2개월 빨리 진출한 경쟁 메신저와의 격차를 좁히지 못한 채 2014년 11월 야후!재팬과 결별하기에 이르렀다. 조직은 활기를 잃고 낙담에 빠졌다.
2015년 1월, 한국 인터넷 기업의 일본 현지 법인 크리에이티브 센터장으로 근무하던 제이(현 카카오재팬 CEO)에게 일면식 없던 한 사람이 보낸 이메일이 날아들었다. 발신자는 당시 카카오 전략지원실장 존(John). 긴히 상의하고 싶은 사안이 있으니 도쿄 시내 한 호텔에서 주말 조찬 미팅을 하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만남을 약속한 아침, 호텔 식당에는 한 사람이 더 나와있었다. 브라이언(Brian)이었다. 카카오재팬의 새로운 대표가 돼 달라는 두 사람의 요청에 제이는 “일본에서 어떤 일을 하고 싶으신 거죠?”라는 역 질문을 던졌다. “지금부터 구상을 하고 싶다”는 브라이언의 대답이 돌아왔고, 옆에 앉은 존은 “뭘 하면 좋을까요?”라고 말했다. 현지 전문가인 제이에게 모든 걸 일임하겠다는 열린 제안이었다.
“일종의 발버둥이었습니다. 메신저 플랫폼으로는 일본에서 승부하기 어렵다는 판단이 섰고, 조인트 벤처를 해산하면서 법인의 70%가량을 차지하던 현지 인원들은 야후!재팬으로 복귀했죠. 대표이사도 사직 의사를 표명한 상태였고요. 메구로 사무실이 휑한 상태였습니다. 새 대표는 사업을 피보팅(pivoting)하면서 법인의 분위기를 되살려야 했죠. 현지 문화를 잘 아는 한국인이면서 일본 IT업계에서 마케팅력과 기획력을 증명한 제이가 적임자였습니다.” 그 날의 만남과 대표직 제안에 관한 존의 기억이다.
제이가 다니던 회사는 도쿄의 랜드마크에 자리 잡고 있었다. 멋진 사무 공간, 250여 명의 동료 직원들, 순항하고 있는 비즈니스 등 이직 결정을 주저하게 하는 요인은 다양했다. 그에 비하면 카카오재팬은 작고 초라한 오피스, 10분의 1도 안 되는 직원 수, 한차례 큰 실패를 겪고 앞으로 정해진 것이 없는 사업 영역 등 부족한 것 투성이었다.
제이는 “첫 미팅 후 한 달 뒤 존을 또 한 번 만났고, 합류를 결정하기까지 총 3개월 동안 고민을 이어갔어요. 주저하게 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안정적이고 그럴싸한 현재의 환경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작은 회사지만 CEO로서 비즈니스를 진두지휘 할 수 있는 기회를 잡아 보기로 했어요. 업계에서 존경받는 리더인 브라이언이 이끄는 카카오 공동체라는 점도 선택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라고 말했다.
제이는 첫 출근한 2015년 5월 1일 카카오재팬의 분위기가 예상보다 심각했다고 기억한다. 서비스 기획자는 모두 이탈한 상태였고, 주니어급 디자이너 한 명과 5명의 개발자, 서비스 제휴 등 사업 담당자 10여 명이 구성원의 전부였다. 4년 된 회사였지만 제도적 장치도 미비했다. 카카오의 수평 문화나 자율성을 차용하고 있던 카카오재팬이었지만, 제대로 된 평가 시스템이 없어서 인센티브나 급여 인상을 기대하기 어려운 구조였다. 열심히 일하는 사람은 손해 본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뒤쳐진 사람은 묻어가기 좋았다. 유연 근무제는 활력 잃은 조직을 더욱 어수선하게 하고 있었다. 되는 일은 없었지만 누군가는 아침 8시에, 또 다른 누군가는 11시에 출근했고, 작은 조직이 다 함께 얼굴을 맞대는 시간은 적었다.
당시 일본의 많은 기업들은 전년 단행된 소비세 인상의 여파로 일괄 급여 인상을 하고 있었다. 제이는 일괄 급여 인상 결재를 거절하고 새롭게 도입하는 평가 제도를 토대로 연말에 차등적 인상을 진행한다고 발표했다. 일본 기업들처럼 연차 외 여름휴가를 별도 부여하는 안건도 나중으로 미뤘다. 출퇴근 시간은 ‘전원 10 to 7’으로 전환했다. 대신 보통의 일본 기업들처럼 잘하거나 못 하거나 간에 중간 등급의 평가를 부여하는 경향성은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80년대 교실 급훈 액자에 담겨 있을 법한 ‘근면’, ‘성실’이라는 두 단어가 IT서비스 기업의 새 CEO가 제시한 방향성이었다. 허리띠를 동여매고 과실이 열리면 나누자는 선언에 남아 있던 소수의 구성원 중 절반이 퇴사했다.
법인에 남은 돈이 없었다. 새로운 도전을 위해 증자가 필요했다. 제이는 만화 콘텐츠 사업을 하겠다는 계획을 갖고 판교로 왔다. 판교 오피스의 크루들은 카카오재팬이 철수하는 것 아니었냐, 새 CEO가 선임된 건 어쩐 일이냐며 술렁였다.
카카오의 최고 의사결정 기구인 CXO팀(CEO 및 각 분야 책임자로 구성된 최고경영진 협의체)에서는 갑론을박이 일어났다. 일본에서 만화 콘텐츠 사업을 후발 주자가 전개하는 건 무리수라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두 시간의 격론에 마침표를 찍은 것은 “현지 전문가로서 면밀하게 분석하고 일을 하려는 것이고, 안 될 것 같은 일에 시간을 투여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라는 제이의 각오였다.
콘텐츠 회사로서 카카오재팬의 첫걸음이 떨어졌다. 2015년 중반 일본에는 디지털 만화 서비스가 100여 개에 달했다. 라인이나 코미코 등 IT기업의 서비스들이 2013년도부터, 현지 대형 만화 출판사들이 2014년도부터 시장을 이끌고 있었다. 가장 중요한 콘텐츠 수급 측면에서 공급자 우위의 시장 질서가 공고했던 것. 카카오재팬은 스마트폰에 최적화된 이용자 경험을 제공해 새 시장을 열어야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다. 당시 시장의 주류는 출판 만화를 스캔한 ePub(Electronic Publication. 개방형 자유 전자서적 표준)를 권 단위로 판매하는 방식이었다.
제이는 공급자 네트워크 관리 노하우에 중요성을 두고 직접 출판사 영업에 나섰다. 만나는 출판사들마다 “카카오, 너희는 너무 늦게 이 시장에 진입했어”라고 반응했다. 우여곡절 끝에 두 곳의 작은 출판사와 공급 계약을 맺고 80여 개 작품을 수급했다.
1년여간 각고의 준비 끝에 2016년 4월 20일 서비스를 시작한 픽코마의 매출은 한 달이 지나서도 iOS에서 나온 2백 엔이 전부였다. 안드로이드 OS를 통해서는 매출 제로. 동시 접속자 수는 13명을 기록했다. 엄중한 상황이 계속됐고 긴 터널을 벗어나는 경험이 필요했다.
픽코마는 서비스 기획단계부터 한국의 카카오페이지의 부흥을 이끌었던 ‘기다리면 무료’ 비즈니스 모델을 현지화 하자는 방향성을 세웠다. 한국과 달리 유료 콘텐츠 수용도가 높은 일본이었기에, 여러 출판사들은 이 사업 모델에 공감하지 못했다. 어렵게 <텐 프리즘>이라는 한 작품을 수급해 ‘마테바 ¥0 (待てば ¥0. 기다리면 공짜)’ 상품으로 선보였다. 꼼짝 않던 지표가 꿈틀대기 시작했다. 하루 열람자 수가 3천 명 까지 올라갔다.
오랜 시간 부재했던 작은 성공의 경험이 카카오재팬에 스며들었다. 하지만 두 달 뒤인 7월 말까지 일 열람자 수를 만 명까지 끌어올리자는 제이의 말에 선뜻 고개를 끄덕인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거짓말처럼 7월 27일 하루 열람자는 만 명을 넘어섰다. 이후 지표가 두 배를 넘어서는 데는 열흘밖에 걸리지 않았다. ‘일이 재미있다! 신난다!’는 분위기가 사무실을 지배했다. 도전과 성취의 경험이 스노 볼 효과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일 이용자 수 1만 명, 2만 명을 기록할 때까지 성공 가능성을 의심하던 판교에서 “이러다 픽코마가 DAU(Daily Active User. 일일 이용자 수) 10만 명을 찍겠다”는 말이 나왔다. 10월 들어 ‘혹시’는 ‘역시’가 됐다. 이후 연평균 2.5배 이상 성장세를 기록한 픽코마는 2020년 연간 판매 금액 4천억 원을 넘어섰다. 2021년 3월 현재 최고 일 열람자 수는 390만 명을 돌파했다.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메신저 플랫폼의 도움 없이, 90여 명이 서비스하는 만화 앱 후발주자가 만화 왕국에서 단일 앱으로 매출 1위에 올랐다는 사실에 모두가 놀랐다. 이제는 일본의 거의 모든 디지털 만화 플랫폼들이 픽코마의 비즈니스 모델을 크고 작은 부분에서 모방하고 있다. 초창기 하나 섭외하기도 힘들었던 마테바 ¥0 작품은 현재 1만 4천 개를 넘어섰다.
“픽코마가 상승세를 타면서 언론 인터뷰를 많이 하게 됐는데, 그때마다 성공 비결을 물어보십니다. 비즈니스 모델이나 특정 콘텐츠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대답을 기대하시더라고요. 물론 그것들이 무시할 수 없는 역할을 했지만, 저는 조직이 함께 쌓은 성공의 경험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일이 없어서 웹서핑을 하는 직원인들 마음이 편했겠습니까. 같이 도전할 과제를 만들고 성취하다 보니 신나게 여기까지 올 수 있었죠.”
지금의 픽코마를 있게 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제이가 내놓은 대답이다.
‘일본 전자 만화 판매금액 1위’라는 수식어만 보면 앞으로 픽코마가 어떤 것에 도전할지 선뜻 짐작하기 어렵다. 하지만 일본의 거대한 콘텐츠 시장과 픽코마가 만든 생태계를 살펴보면 갓 성장판이 열린 소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렇다.
첫째, 경쟁자들과 다른 이용자 층을 겨냥했고 새로운 시장을 만들었다. 모두가 만화 애호가들을 겨냥할 때, 픽코마는 ‘스마트폰에서 콘텐츠를 가볍게 소비하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한국형 웹툰뿐만 아니라 출판 만화를 스캔한 형태인 ePub까지, 화(episode) 단위 분절 판매를 시도해 누구나 간편하게 즐길 수 있는 ‘스낵 콘텐츠’로 포지셔닝했다. 유튜브를 좋아하는 사람도, 소셜 미디어를 즐기는 사람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만화 앱이 됐다는 의미다.
둘째, 아직 디지털화되지 않은 영역이 훨씬 더 크다. 만화에 관심 없는 한국인도 알고 있는 일본 작품이 한 두 개 정도는 있을 만큼 일본 만화 시장의 저변과 규모는 세계적이다. 일례로 카카오페이지의 <나 혼자만 레벨업>은 픽코마에서도 하루 110만 명이 넘는 열람 수를 기록하며 대 성공을 거둔 사례로 꼽히지만, 출판 시장에는 10배 넘는 매출을 기록한 작품이 수두룩하다. 고단샤, 카도카와 등 픽코마의 파트너인 탑 출판사들도 디지털화에 눈을 뜨기 시작한 만큼 모바일 만화 시장은 큰 성장 잠재력을 품고 있다. 모바일 콘텐츠 수용도가 높은 Z세대의 지속 유입과 코로나19 확산에 기인한 비대면 경험의 보편화도 이 같은 흐름을 더 빠르게 하고 있다.
끝으로 ‘작품 First’ 철학으로 대변되는 픽코마의 작가 우선주의 경영이다. 일본에서 일부 서비스는 무료 작품을 대거 제공하며 플랫폼 광고를 주 수익원으로 삼는다. 반면 픽코마는 콘텐츠 판매가 주 수익원이다. 픽코마에서 히트한 작품은 속도감 있게 애니메이션이나 종이책 등으로 ‘원 소스 멀티 유즈’ 된다. 이에 힘입어 창작자들은 픽코마를 ‘제 값 받고 판매하는’, ‘여러 가능성을 품고 있는’ 플랫폼으로 인지하고 강한 연대감을 느낀다. 양질의 작품이 지속 유입되고 이용자들은 광고 없는 쾌적한 열람 환경에 만족하는 선순환 구조가 갖춰지는 배경이다.
제이는 일본에서 비즈니스를 하면서 현지 속담인 “요코즈나는 요코즈나의 씨름을 해야 한다”는 말을 자주 떠올린다고 말한다. 한국의 천하장사에 해당하는 스모 일인자 요코즈나는 꼼수를 부리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다. 모두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던 사업 초기부터 탁월한 성과를 내는 지금까지, 픽코마가 콘텐츠 기업답게, 선두 주자답게 뚜벅뚜벅 나아가는 바탕이다.
“한국인의 스피드와 일본인의 디테일을 조화시키면 세상에 없던 막강한 기업이 나올 수 있어요. 한일의 사람과 콘텐츠를 융합해 세계 무대에 펼쳐 보이고 싶습니다. 그 길을 많은 창작자들과 함께 걸어가려는 참입니다.” _ 제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