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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ucingRan Oct 13. 2022

찻잔은 비워져도 나는 차로 따스히 채워진다

021. 차 (Tea)



나의 첫 취향은 차를 처음 마셨던 공간. 그리고 그 이후로 차 마실 일이 있으면 부지런히 다녔다. 녹차의 종류가 그렇게 많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고, 차를 마실 때 지켜야 할 순서와 예의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녹차에서 홍차로, 그리고 보이차로, 다시 녹차로 돌아오는 과정을 여러 차례 겪었는데, 그 중간중간 꽃잎차나 과일, 허브같이 다른 블렌딩한 차들도 여러모로 맛보고 즐기면서 지냈다. 하지만 역시 나의 취향은 잎차로 어김없이 돌아오게 되었다.


생각해 보니 조부모와 살던 어린 시절에는 결명자, 보리 등을 끓여서 식수로 마셨으니 ‘차’가 생소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내가 취향으로 꽂혔던 것은 아주 작은 잔에 조금씩 담아 마시는 잎차였던 것이다. 찻잔을 덥히고, 찻잎을 우려서 조금씩 마시면서 느껴지는 차의 향과 온도, 쌉쌀한 맛까지 모두 오감을 즐기는 과정이었다. 열두 살 꼬맹이의 눈에는 작은 잔을 두 손으로 살포시 잡아 올려 입술을 모아 호로록 마시는 어른들이 귀엽고 좋아 보였다. 그리고 어릴 때부터 나는 단맛보다 신맛을, 짠맛보다 쓴맛을 좋아했다. 그러니 반하지 않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조그마한 찻잔 앞에서 나는 비로소 나는 내가 되는 기분이 들었다. 찻잔은 비워져도 나는 차로 따스히 채워진다.


차를 언제 수확했는지에 따라 찻잎 종류가 달라지고, 만드는 온도나 방법, 시간에 따라 또 나뉜다. 색깔도 향도 맛도 모두 다른데, 이것도 알면 알수록 참 신기하고 재밌다. 여러 종류의 차를 경험하면서 자연스레 다기에 푹 빠지게 되었다. 한때는 어딜 가든 찻잔이 보이면 하나씩 사 오기도 했고, 혼자 매일 찻잔을 바꿔가며 다른 차를 마시는 것도 나의 큰 즐거움이었다. 차를 마시면 몸이 뜨끈해지면서 뻣뻣하게 남아있던 긴장이나 스트레스가 확 누그러지는 경험을 자주 한다. 커피를 마시면 카페인 때문에 심장이 재빠르게 달리지만, 차를 마시면 아주 차분하게 심박수도 느려진다. 지금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달리기를 하지만, 아주 오랫동안 차 마시는 시간이 나의 스트레스 해소법이었다.


차를 마시던 순간들은 사진처럼 선명히 기억난다. 차를 어떻게 우렸는지, 누구와 함께 마셨는지, 찻잔은 어떤 형태였는지 하는 것들까지 모두. 가장 좋다고 여겼을 때는 역시나 산사에서 마신 차였다. 해남에 있는 대흥사에서는 스님들이 차를 직접 재배하고 또 덖어서 차를 만든다고 한다. 알고 보니 ‘차의 성지’라 불리는 곳으로 전국의 다도인들이 모이는 행사도 주최하는 곳이었다. 그 귀한 차를 마시며 스님과 대화했던 순간이 오래도록 여운이 남아서 여러 번 해남까지 찾아갔다. 깊은 산속의 작은 암자에서 고즈넉한 산을 마주하며, 풍경 소리를 들으며 마시던 차의 향과 맛은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이 되어버렸다. 차를 좋아하지 않았다면 가질 수 없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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