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냥당당 : 호기심 많은 냥이들이 당당하게 살 수 있도록 (1)
* 2023년에 쓴 글입니다 *
지금으로부터 9년 전인 2014년 5월 중순. ‘세월호 참사’라는 한국 사회를 흔든 엄청난 사건이 일어난 이후로 나는 우리를 둘러싼 거대한 시스템에 대한 분노와 절망에 한동안 깊이 빠져 있었다. 웃는 것조차도 사치로 느껴지던 그 시기에 내 관심을 제일 끌었던 이슈가 바로 동물 학대 사건들이었다. 차마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잔인한 범죄들이 일어나고 있었지만 경찰의 처벌은 너무나 미미했고, 그 근거 중 하나가 동물을 ‘생명이 아닌 얼마짜리로 계산할 수 있는 물건’으로 간주하기 때문이었다. 동물 학대의 사례들을 자세히 살펴볼수록 너무 괴로웠지만 한편으로는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지’ 찾아내고 싶은 욕구가 점점 강해졌고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나는 장편 다큐멘터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다큐멘터리 제작의 초기 단계가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기에 어쩌면 이미 나는 한 편의 영화를 만들고 있었던 셈이었다.
차곡차곡 정보를 모은 지 한 달 째. 페이스북 모 그룹에서 나는 시선이 멈췄다. 인형처럼 아주 작은 몸이지만 눈에 띄는 호수 같은 눈망울, 앙증맞게 하얀 덧신을 신은 발… 2~3개월로 추정되는 이 암컷 턱시도 ‘벨벳’은 고양시 화정터미널 주변에 살던 중이었는데 상인 분들의 돌봄을 받으며 자라다가 지역 캣맘 모임에 의해 구조되어 입양을 기다리는 중이었다. 다음 달부터 촬영을 시작하려고 준비 중이던 나는 벨벳의 입양 사진이 자꾸 눈에 아른 거려 도무지 집중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우리 집에서 가까운 화정터미널에서 살았었고 그 곳의 상인 분들로부터 돌봄을 받았었다니!
‘어떡하지? 나, 짝사랑에 빠졌나봐?!
이거… 운명 아닐까?’
노트북에서 문서를 열어 놓은 채 커서는 내 심장이 쿵쾅, 하듯 비슷한 템포로 깜빡였다. ‘입양신청서’. 나는 그 문서의 빈 칸을 입력하기 전에 나 자신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 너는 벨벳을 반려할 자격이 있니?
- 언젠가 작별의 순간이 왔을 때 그 슬픔을 감당할 자신 있니?
- 벨벳이 너의 가족이 된다면 과연 행복할까?
2014년 7월 2일, 벨벳을 만나러 가는 날. 준비하던 다큐멘터리에서 길고양이 이야기도 있었기에 ‘혹시 쓰임이 있을까’ 하여 벨벳을 임시 보호하고 있던 동물병원까지 걸어가는 약 10여분의 길을 스마트폰 영상으로 찍었다. 벨벳은 고맙게도 집에 금방 적응해 호기심이 가득한 반짝이는 두 눈으로 여기저기를 둘러보기 바빴고, 하얀 덧신 신은 발로 아장아장 걸어 다녔다. 비록 지금은 아주 작아서 마치 먼지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나중에 성묘가 되면 너무나 매력적인 암컷 고양이가 될 것 같아서 당시 내 기준에 매력적인 여배우 중 하나였던 줄리 델피에서 따와 이름을 ‘줄리’로 지어줬다. 시간이 흘러 어느덧 노년을 향해 달려가는 줄리 ‘여사’는 나의 부족한 집사 스킬을 무던히 견뎌주며 도시에서 농촌으로의 거주지 이동, 혼자서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다가 몇 년에 걸쳐 3마리가 늘어난 고양이 가족 구성 등의 변화를 겪으며 오늘도 여전히 우아한 여왕으로서 건강히 잘 지내고 있다.
그렇다면, 준비하고 있던 동물 학대 관련 다큐멘터리는 어떻게 됐을까? 이 매력적인 생명체를 ‘감히’ 혼자 둘 수 없던 나는, 그녀의 마법에 단단히 걸려 완성은커녕 본격적인 촬영조차 해보지 못 하고 없던 일이 되었다. 최근 들어 동물학대가 더욱 악랄하고 다양한 방식으로 변하는 걸 보면 ‘그때 완성해서 영화를 통해 더 많은 대중들을 만나고 미리 알렸더라면 어땠을까?’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하지만 줄리를 만난 후 길고양이들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밥을 챙겨주게 되었고, 길 위의 생명들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만나 왔기에 계획과 다른 방식이었을 뿐 동일한 방향으로 지난 10년을 살아오지 않았나 싶다.
남종영 작가님의 책 <안녕하세요, 비인간동물님들!>(북트리거 펴냄)에서 쓰인 구절처럼 비인간동물들의 눈을 마주했을 때의 그 순간, 그리고 감정들. 나에겐 그 처음이자 시작이 바로 줄리였다.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일상에서의 그 눈빛들을 외면하지 말아주시길, 그것이 이 연재를 시작하는 이유이자 2023년의 소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