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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사의 몫 Oct 05. 2020

어둠 속에서 와인 마셔보기

촛불 켜고 벽난로 앞에서 와인 시음했던 날

올여름 프랑스는 비도 많이 안 오고 내내 더워서 일부 지역은 심각하게 가물 지경이었는데, 9월 이후에는 또 몇 주 연이어 비가 계속 오고 흐리고 하여 일부 지역은 침수되기도 하였다. 어쩜 이렇게 날씨가 중간이 없지, 원래 9월은 비가 가끔 오고 바람이 많이 불기는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생각하다가, 와이너리 근무 시절 천둥 번개를 동반한 비바람이 불던 날 전기가 정말 나가버렸던 일이 생각이 났다.


다른 유럽 국가도 아마 비슷하겠지만 프랑스는 특히 오래된 건물일수록 이런 일이 잦아서, 회사의 경우에는 발전기를 별도 시설로 갖고 있기도 한다. 내가 근무하던 와이너리도 비슷했는데, 다만 문제는 발전기 위에도 번개가 내려쳐서 발전기까지 같이 고장이 나버린 것이었다. 다른 일반 사무를 보는 직원들은 매뉴얼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하다가 오전 근무만 하고 퇴근해버렸고, 와인 시음을 하러 오기로 했던 예약 손님을 기다려야 하는 나와 사수만 그대로 남았다. 물론 혹시 발전기를 고치러 사람이 올지도 모르니 비상연락처까지 함께 쥐어주면서 말이다.


으레 날이 쨍하고 햇살이 좋은 날보다는 날이 흐리고 비까지 보슬보슬 오는 날 와인 시음 고객이 많은 편이었다. 프로방스의 가장 큰 장점은 새파란 하늘과 따사로운 날씨인데, 비가 오고 날이 흐리면 야외활동을 할 수 없으니 실내에서 가능한 액티비티를 찾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날은 예약 없이 오는 손님들도 많았다. 물론 저 날도 예외는 아니었는데, 다행히도 단체 예약 하나는 취소가 되었고 소규모로 3-4 건 있던 예약 손님맞이를 위해서 곳곳에 촛불을 켜 두었다. 와이너리에서 대대로 사용하고 있는 17-18세기 촛대에 초를 꽂아 불을 켜며 만약 내가 이 촛대를 망가뜨리면 월급에서 까시려나 이게 얼마짜리일까 걱정하기도 했다. 혹시 손님들이 추우실까 봐 5월임에도 불구하고 벽난로도 지폈다. 그 덕에 아이 동반 손님들은 아이들을 편하게 벽난로 앞에서 놀도록 두고, 본인들은 편하게 시음에 집중할 수 있었다. 만약을 대비해 얇은 철망이라고 하나 보호막을 하나 쳐 두고, 그래도 바닥이 차가우니까 담요를 깔아 두었더니 서로 모르는 아이들끼리 불 앞에서 손그림자 놀이를 하며 놀기 시작했다.

18세기에 쓰던 촛대에 초를 꽂아 보았다


오래된 빈티지를 드셔 보고 싶다고, 원래는 사전 예약을 해야만 가능한데 굳이 비용을 지불하고 현장에서 디캔팅까지 해서 드셔 보고 싶다는 손님이 있어서, 영화에서나 봤던 석유등을 켜고 지하 꺄브로 내려가 해당 빈티지의 와인을 찾아오기도 했다. 핸드폰 램프를 켜서 다녀올 수도 있었지만 충전도 안 되는 마당에 배터리를 아껴야 했기 때문이다.


전날 시음을 하고 나서 남아 있던 치즈와 쏘시쏭 조각이 있었는데 와인만 연이어 마시기가 속이 불편하다는 분들이 있어서, 한국에서 꼬치구이를 먹던 생각이 나서 퐁듀용 꼬치에 빵이랑 치즈랑 함께 끼워서 벽난로 불에 살짝 그을려서 접시에 내드렸다. 정말 임기응변으로 했던 것이고 불에 직접 그을려서 너무 까매졌는데도 불구하고 다들 맛있어하셔서 금세 동이 났다. 특히 빈티지 와인을 찾으시던 분이 신기한 경험이었다고 너무 좋아하시며 팁을 두둑이 주시기도 했다. (프랑스는 보통 팁을 주는 문화가 아니다) 아이들까지 관심을 보이며 어른들의 꼬치를 한 입씩 맛보는 바람에, 입가가 까맣게 된 아이도 있었다.


시음 고객이 계속 물샐틈없이 들이닥쳐서 밥을 먹을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밥을 먹으면 화장실에 가고 싶어 질까 봐 먹을 수가 없었다. 화장실 수세식 변기 등 상수도 펌프가 역시 전기로 작동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볼일을 보고 물을 내리기는커녕 다른 그릇에 물을 담아서 변기에 버릴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점은 손님들께도 양해를 구하고 화장실이 고장 났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의외로 쿨한? 손님들이 자연에서 노상방뇨 오랜만에 해 본다며 포도밭 깊숙이 들어가시기도 했다. 남자아이들은 혹시 빈 생수병을 쓰는 게 어떻겠냐고 권해보았는데, 나를 오히려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문화 차이인 걸까, 이 점은 아직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아침 10시에 정전이 된 이후, 쉬는 시간도 없이 오후 6시 30분까지 시음 업무를 보았다. 이날은 평소의 3배에 달하는 매출을 달성하기도 했다. 목이 너무 마른데 화장실에 가고 싶은 마음을 더 자극할까 봐, 차에 올라타서는 물을 한 모금 머금고 가글 하며 뱉은 후 집까지 운전을 했다. 집에 가는 길에, 내일 오전에 발전기 수리 및 전기 시스템을 복구하러 오겠다는 연락이 왔다. 비는 이미 그쳐서, 마을은 언제 그랬냐는 듯 평화로웠다. 다시는 겪기 힘든, 진짜 이상한 하루였다.


언제 그랬냐는듯 멀쩡해진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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