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6대 포도 품종 시리즈 그 첫 번째
쉬라즈 혹은 시라라고도 불리는 이 포도 품종 이름을 저는 사실 노래 가사에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신예원 님의 'It was in Shiraz'죠. 테라스에 앉을까 실내에 앉을까 고민하게 만드는 선선한 가을날, 카페에 들어갔다가 문득 '어디서 많이 듣던 멜로디인데?' 싶었더니 윤상 님의 '이별의 그늘'이 원곡이더라고요. 가사 중에 '모든 루비를 바칠 수도 있었죠'라는 부분이 있는데, 그로부터 한참 나중에 쉬라즈 와인을 마셔보고는 깨달았습니다. 그 루비가 이 루비를 말하는 것이었구나. 혹시 궁금하신 분은 들어보시겠어요? 어쩐지 와인이 생각나는 노래입니다.
실제로 쉬라즈는 이란 남부 지역에 위치한 꽤 규모가 큰 도시 이름이기도 합니다. 보통 장미 하면 영국을 떠올리는 분이 많지만, 사실 쉬라즈야말로 약 2천 년 전부터 장미를 본격적으로 재배해 온 장미의 원산지예요. 와인을 좋아하던 불멸의 시인 하페즈의 고향이기도 해서, 이란인들은 쉬라즈를 시와 장미와 와인의 도시로 부른다고 합니다. 이란인들의 시에 대한 사랑은 남다르기로 유명한데, 그중에서도 4대 시인 중 한 명으로 손꼽히는 하페즈의 무덤에 가보면 장미 넝쿨이 새겨져 있고 묘를 참배하는 사람들 역시 장미를 바친다고 해요. 하페즈가 시인으로 활동하던 때만 해도 이란에서는 와인을 즐겨 마셨었는데, 붉은 장미가 가득 핀 정원에서 와인을 마시며 시를 쓰곤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16세기 이후 시아파 이슬람교가 이란의 국교로 자리 잡으며 서서히 금주를 권장하기 시작했고, 1979년 이란 혁명 때 아예 금주법을 선포하고 나서는 이제 이란의 쉬라즈에서 만든 와인을 만날 길은 없어져 버렸습니다.
쉬라즈라는 이름 뒤에는 온갖 전설과 신비가 숨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한데요. 로마인들이 시라쿠스(Syracuse)라는 이탈리아 도시에서 가져온 포도 품종이라는 설이 아마도 가장 오래된 것으로서, 페니키아 왕조 시절 대 플리니우스가 vitis Syriaca라는 시리아 품종을 언급했고 이것이 쉬라즈의 기원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란의 도시 쉬라즈에서 와인을 만들던 품종이 1095년과 1291년 사이에 론 밸리 지역으로 전해지며 쉬라즈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설도 있죠.
하지만 이 모든 가설은 1998년 DNA 검사 결과가 발표되며 모두 허구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아는 쉬라즈/시라라는 품종은 그르노블의 이제르(Isère)에서 암나무인 몽두스 블랑슈(Mondeuse blanche)와 수나무인 두레자(Dureza)를 교배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판명이 난 것이지요. 이 DNA 테스트를 통해 쉬라즈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비오니에의 의붓자매이자, 피노누아, 피노그리 등과 증손녀이기도 하다는 것도 밝혀졌습니다. 정말 신기하지 않나요?
쉬라즈는 세계 6대 포도 품종에 속하기도 하는데요. 전 세계적으로 총 18만 6천 헥타르의 쉬라즈 밭이 있습니다. 프랑스가 9만 헥타르로 선두를 달리며, 호주가 3만 7천 헥타르로 2위, 아르헨티나와 남아공이 각각 만 2천 헥타르와 9천 헥타르로 3, 4위에 등극되어 있어요. 이밖에도 미국, 칠리, 이탈리아, 뉴질랜드, 스페인, 그리스 및 스위스에서도 재배하는 품종입니다. 이 국제적인 명성과 인기에 힘입어, 전 세계 각국에서 만든 쉬라즈 와인을 평가하는 콩쿠르도 있습니다. 시라 뒤 몽드라는 경연으로, 올해로 14회째를 맞이하는 행사예요.
쉬라즈 생산량 2위에 랭크된 호주에서는 1832년부터 쉬라즈를 경작하기 시작했는데, 쉬라즈로 만든 레드가 처음부터 호주에서 환영받은 건 아니었다고 합니다. 당시만 해도 호주 사람들은 화이트 와인을 더 선호했다고 해요. 지금처럼 바로사 밸리 하면 호주 쉬라즈를 떠올리는 명성을 쌓는 기반이 시작된 건 1980년대부터로, 호주 연방 정부에서 쉬라즈를 재배하면 지원금을 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로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호주 쉬라즈 와인이 성공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죠.
시라/쉬라즈로 빚는 와인은 파워풀한 바디와 짙고 깊은 석류 색을 띠는 루비 컬러가 인상적입니다. 매콤한 후추 향과 잘 익은 과일 아로마가 특징으로, 와인이 상대적으로 영할 때 나는 제비꽃 아로마는 와인이 성숙해감에 따라 머스크, 트러플 버섯, 가죽, 모카 등의 스파이시한 아로마로 변모합니다. 그래서 보통 오래 킵할 수 있는 와인을 만드는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으며, 자연스레 오크 숙성한 쉬라즈를 더 많이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이름 때문에 어쩐지 시라 하면 프랑스를, 쉬라즈라고 하면 호주를 떠올리시는 분들도 많을 거 같아요. 제가 마셔본 프랑스 시라와 호주 쉬라즈 차이점을 들자면, 프랑스의 시라는 보통 서늘한 지역에서 자라기 때문에 포도가 느린 속도로 천천히 익습니다. 그만큼 당도는 낮은 대신 산도는 상대적으로 높고요. 신선한 과실 향 아로마가 뚜렷하고, 탄닌이 단단하고 무게감이 있어 아직 숙성이 충분하게 되지 않았을 때는 맛이 조금 러프하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습니다. 특히 블렌딩이 아닌 단일 품종일 경우 더더욱 숙성이 필요하죠.
반면 호주 쉬라즈는 상대적으로 따뜻한 기후에서 자라며, 잘 익은 베리류 아로마가 풍성하게 느껴집니다. 입에 머금었을 때 감초 맛도 조금 더 나고 탄닌도 매끄러운 것이 특징입니다. 프랑스 시라에 비해 당도가 높다 보니 알코올 도수도 조금 더 높고, 어린 빈티지라 하더라도 비교적 편하게 마실 수 있죠.
레퍼런스:
Cépages & vins ces raisins qui font les bonnes bouteilles, Livre de François Collombet
https://www.vitisphere.com/index.php?mode=breve&id=76255&print=1
https://beautiful-iran.com/index.php/places/shiraz
http://wayfarerscompass.com/shiraz-city-of-roses-a-photo-essay/
https://boisdejasmin.com/2016/10/hafez-persian-poetry-rose-and-a-wine-cup.html
https://www.bbc.com/news/world-middle-east-18504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