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홍수>는 3개의 챕터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수해 재난물, 2부는 게임물(혹은 회귀물), 3부는 휴머니즘 드라마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이 영화를 수해 재난물이라는 기대감으로 시청하는 것 같고 1부가 끝나자마자 목적을 잃은 채 떠도는 지루한 반복을 보면서는 지금 내가 소비하는 영화에 대한 분노를 느끼는 것 같다. 그러다가 종국인 3부가 시작했을 때 '어쨌건' 결론에 도착해야만 하는 이 영화는 그것을 향해 숙명처럼 달려간다. 그리고 이 순간 모종의 K-재난영화의 (CJ 영화스러운) 공식이 상기될 때 시청자의 분노는 최고조에 이른다.
내가 이 영화의 '재난적 만듦새' (퀄리티)에 대해 말하는 것은 좀 어렵다. 재난 영화를 좋아하지 않아서 웬만해서는 안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재난적 만듦새라는 표현은 내가 이런 류의 영화를 보지 않는 이유를 완전하게 대변한다. 영화는 본격적인 구경거리가 되기 위하여 수많은 재미 요소를 동원하는데 그중에는 재난도 있다. 현실의 재난은 두려움이지만 스크린(화면) 속의 재난은 즐거움이다. 영화는 얼마나 재난을 어마무시하게, 공포스럽게 묘사할 수 있는가? 반면에 재난 앞에 서있는 인간은 얼마나 왜소하고 무력하게 축소할 수 있는가? 21세기 넷플릭스 영화는 개인적이고 협소한 스크린 디바이스에서도 그 긴장감이 온전히 와닿도록 재난과 인간 사이의 차력 대결을 휴지 구간 없이 열중한다(휴지 구간이 많았다면 이 영화는 지금보다 더 많은 시청자들이 중도 이탈했을 것이다). 자연의 힘은 크고 거대하고 위압적이지만, 이것이 차력으로 현현되어 버리면 속은 텅 비어 버린다.
영화 속 차력 대결은 끝끝내 어느 쪽이 이기는가? 당연히 대자연이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이다. 결국 <대홍수>의 인간은 육체적으로는 완패한다. 그런데 정신적으로는 승리한 것처럼 영화를 마무리 짓는다. 이런 결론은 말 그대로 '정신승리'처럼 보여서 쉽게 동의하기는 어렵다. 게다가 결론에서 두 모자가 (영화 초반 나누었던 대사인) '30초 잠수하기 게임'을 다시 한번 반복한다는 점은 진보보다는 퇴행 전략을 보여준다. 이 대사는 아름답지도 않으며 포근하지도 않다. 게다가 아들은 겨우 이 정도 말로 현실에 눈 감고 동화 같은 환상에 뒤덮이는 철부지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스스로 만들어낸 이 소박하면서도 거룩한 수미쌍관이라는 구조적 순환에 스스로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대홍수>는 재난, sf, 회귀와 같은 장르적 물질성에 대한 지고지순한 영상 탐닉을 하고 있다. 여기서 지고지순이라는 표현은 이 영화보다 앞서서 나온 다수의 레퍼런스 영화 영상에 대한 베껴 쓰기의 다른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장르적 물질성들이 영화 안에 좀처럼 녹아들지는 않는 느낌이다. 물질도 이러할진대 그 이면에 있는 비물질적인 것(이야기, 인물의 감정)들이 조화롭기는 더욱 요원하다. 서사와 캐릭터가 말이 안 된다, 억지다라는 의견이 나오는 게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런 식으로 전시되면서 소모될 필요가 있나 싶은 인간 본성과 근원에 대한 메타포 조연들의 아케이드식 나열(연구소 수석, 빈집털이범, 마지막을 준비하는 노부부, 출산하는 임산부 등)은 시간 낭비라는 느낌도 준다. 하지만 이런 문제는 필요 없는 장면과 녹아들지 않는 요소를 제거하면 해결되는 문제다. 그래서 이 영화의 진짜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이 영화는 일견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의외로 나이브한 태도로 찍힌 영화는 아니다. 촬영에 있어서만큼은 분명한 자의식과 욕망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이상한 점은 바로 여기에서 출발한다. 자연과 인간, 이 둘을 유려하게 넘나들면서 장르적으로도 충실하고 인본적으로도 충실하게 찍고 싶은 욕망이 만들어내는 고민. 그런데 이 고민을 제대로 마치지 못하고 카메라는 영화 안에 일단 들어와 버린다. <대홍수>의 카메라는 인간의 감정과 재난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은 채 완전히 헤매고 있다. 물론 장르 영화의 관습적인 앵글과 편집(점)은 관객의 어느 정도는 관객의 기대만큼 규칙적으로 채워져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의외로 영화 스스로가 무엇을 찍고 싶은지 장르 규칙 바깥의 욕심을 분명히 드러낸다. 주체의 욕심이 분명하게 드러나기에, 실패 역시 분명하게 드러난다.
<대홍수>의 카메라는 무엇을 찍고 싶어 하는가? 홍수도 아니고 아파트도 아니다. 재난도 아니고 회귀 게임도 아니다. 바로 배우의 얼굴이다. 이 영화는 정말로 배우가 보여주는 감정을 절실하게 보여주고 싶어 한다. 이건 주인공이 '엄마'이기 때문에 그가 표현하는 모성애를 절절하게 보여주기 위함은 아니다(의외로 모성애에 대한 처리는 '뒷부분에서 명쾌하게 할 것'으로 완전히 분리해 두었다). <대홍수>의 주인공인 엄마, 아들, 연구소 요원은 모두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지금의 삶을 떠받치면서 버텨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지금 삶이 매우 고통스럽고 불안한데도 이것을 인간의 초극적인 생존 본능으로 버텨내지 않는다. 대신에 과거에서 지금까지 축적되어 온 그동안의 기억을 되짚으면서, 지금 이곳에 내가 올 수밖에 없는 이유와 기어이 무언가를 내 눈으로 봐야만 하는 이유를 존재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면서 버텨낸다. 이것은 지금 내가 이 삶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이자 그다음을 지속해야 하는 근거로 작동한다.
하지만 이 경제적인 영화는 주인공들의 기억의 책장을 다 꺼내서 일일이 보여줄 수는 없기 때문에, 그리고 아무래도 후반부에 가장 요긴하게 펼쳐질 '플래시백 시퀀스'가 클라이맥스로 예정되어 있기에 자잘한 플래시백을 수시로 조미료처럼 쓰는 것은 과감히 단념한다. 대신에 기억의 시간을 완전히 압축해서 내재하고 있는 대리 표상을 찍는 것에 집중한다. 이것은 얼굴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카메라는 자꾸만 재난의 풍경 혹은 게임의 풍경에 페티시즘적으로 열중하다가도 지금 이 인물의 순간과 감정을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을 자각할 때 주인공의 얼굴을 뒤늦게 따라간다. 문제는 영화가 자꾸 얼굴을 따라가면서 찍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 영화의 빈곤함이 발생한다.
<대홍수>의 관객은 사건이 펼쳐질 때마다 혹은 반복될 때마다 주인공의 반응 쇼트를 맞이하게 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재난의 강도가 저점에서 고점으로 순차 상승하는 영화가 아니다. 재난은 계속 동어반복적으로 이어지기에 주인공의 반응 곡선도 고저 없이 지루하게 연쇄된다. 물론 이 동어반복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건은 순환 반복이지만 인간의 감정은 시간에 따라 축적되고 여물어 가기 때문이다. 문제는 이러한 시간의 버텨냄을 얼굴의 심도를 가지고 연출하지 않았다는 점에 있다(그런데 이 말이 배우가 연기를 못했다는 말은 아니다. 여기서 문제 삼는 것은 어떤 시점에 어떠한 심도의 얼굴을 그려낸 후 이것을 영화 안에서 몽타주화하는가의 문제이다). 이 비현실적인 시공간 안에서 인물들이 기이한 반복 운동을 할 때 우리는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할 수 없는 인간의 성찰이나 각성의 얼굴을 이들을 통해서 보고 싶어진다. 하지만 이 영화는 아직 그 방법을 발견하지 못한 채 무작정 표층 찍기에 돌입한다. 이런 상황에서 카메라가 할 수 있는 일은 부지런하게 주인공의 얼굴을 찍어내고 담아내는 것 밖에는 없다. 이 영화에 나온 수많은 김다미의 얼굴 클로즈업의 편집 배열을 바꾼다고 했을 때, 현재 편집본과 비교한들 큰 차이를 기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얼굴 클로즈업 쇼트는 길을 잃어버리지는 않았지만 애초에 길이라는 선형 위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다.
이런 상황에서 더욱 촬영의 입장을 난처하는 것은 '재난'이라는 장르다. 영화의 카메라 바로 그 자신은 사실 '재난'을 찍어야 하기 때문이다. 판단에 기로에 놓였을 때 이 영화의 카메라는 다소 엉망인 리듬감으로 인물과 재난 사이를 오가며 자기 주변의 피사체를 바라본다. 그래서 때때로 카메라는 인물의 감정의 깊이와 속도에 맞춰 침잠하듯 심취하다가도, 갑자기 크레셴도처럼 커지는 해일의 광경이나 소리가 들려올 때에는 갑자기 태도를 바꿔버린다. 이 영화는 소용돌이치는 해일의 광경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지 않지만 영화의 카메라는 무언가 중심을 잃은 채 소용돌이 속에 빠져든 것처럼 촬영의 시공간을 수 없이 헤맨다.
<대홍수>가 가지고 있는 카메라의 욕망은 좋다고 생각한다. 영화가 찍고 싶은 게 과연 무엇인지 분명하게 느껴진다면 관객 역시 이리저리 헤맬 필요 없이 그것을 길잡이 삼아 믿고 따라가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짜 좋은 영화가 되기 위해서는 제대로 찍어야만 한다. <대홍수>는 기대에 어긋나는 영화라고들 많이들 평가한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도 있다. <대홍수>는 영화 스스로가 기대하는 것을 제대로 찍어내지 못해 더욱 안타까운 영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