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진 자객이 등장하는 무협의 이미지 <영웅본색>

by andrei

머릿속 영화 이해 장치가 망가진 게 아닌가 의심될 정도로 나는 어떤 영화들에 한해서는 그 안에서 맺어진 플롯의 재배열을 온전히 해내지 못한다. 이런 영화는 죽도록 보아도 내게 남는 잔상이란 조각난 수십 개의 ‘이미지’를 초과하지 못한다. 말이나 글로 형용하는 일을 무력화할 만큼 거대한 정념을 가진 영화 이미지들에 매번 찬란하게 압도당하기 때문일 것이다. 오우삼의 <영웅본색>도 이런 영화에 속한다. 내용은 매우 간단해서 줄거리 설명은 어려운 게 아니지만, 많이 본 것 치고는 씬과 씬 혹은 시퀀스 사이의 선후 관계를 온전히 암기할 수 없고 설명해 낼 수도 없다.


묘사 가능한 단위는 쇼트나 씬 정도가 최선이다. 위조지폐에 담뱃불을 붙이는 마크(주윤발), 광둥어 버전 ‘희나리’가 들리는 술집에서 그다음 임무를 논의하는 마크, 대만의 철길 건널목을 건너는 마크, 풍림각에서 예술적으로 총구를 겨누는 마크, 절름발이가 되어 나타난 마크, 주차장에서 송자호와 해후하는 마크, 홍콩의 야경을 찬탄하는 마크, 운명을 만드는 내가 바로 신이라고 말하는 마크, 동료를 돕기 위해 뱃머리를 돌리는 마크, 자고로 형제는! 하면서 송자걸(장국영)한테 한마디 하려다가 수십 발의 총알에 난자당하는 마크(이야기하다 보니 거의 다 마크-주윤발이다). 나 스스로의 영화 역사를 생각해 보면, 영화는 서사가 아니라 이미지라는 것을 최초로 배우던 때에 내 앞에는 수많은 동아시아 영화들이 등대처럼 도착했었다. 그리고 그 목록의 상단에는 왕가위, 허우샤오시엔, 주성치, 가끔은 오우삼이 있다. 이런 처지이다 보니 나는 영화 이미지에 빠져들기 시작한 시기를 함께한 영화들에게 논리적인 플롯 암기력을 100%로 발휘하기에는 좀 난감한 측면이 있다.



다시 시작(시청)해야만 하는 <영웅본색>


다소 거창한 이야기로 시작하였는데, 오랜만에 <영웅본색>을 극장에서 다시 보았다. 이 영화를 처음 본 시기는 2001년 쯤으로 기억한다. 통탄스럽게도 21세기가 되어서야 <영웅본색>을 만났지만 아직 존재하는 장국영을 생각하면서 그의 기념비적인 필모그래피를 밟았다는 것에 그나마 다행을 느낀다. 전술하다시피 <영웅본색>은 이미 많이 봤다. 많이 봤음을 증명하는 한 가지 증표로서 나는 <당년정>의 가사를 광둥어로 대충은 부를 수 있고, 중국 영화를 보기 위한 목적으로 중국 표준어를 배운 덕택에 광둥어 한자 가사에 광둥어 음절을 대조해서 읽고 듣는 것도 약간은 가능하다. 하지만 오랜만에 본 <영웅본색>은 역시나 처음 보는 무언가였다. 어떤 씬들은 아예 처음 보는 수준이었고 몇 가지 플롯의 선후는 새롭게 조립되고 있었다. 그리고 예전에는 착란적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의식하지 못했던 간혹의 어설픈 만듦새 역시 눈에 띄었다. 나는 이럴 때마다 영화에 대한 심각한 이해력 부족 혹은 건망증을 자주 의심하게 된다.



스크린샷 2025-10-22 오후 12.41.10.png
스크린샷 2025-10-22 오후 12.40.24.png



<영웅본색>에서 여전히 발생하고야 마는 인지의 망각, 붕괴 현상. 또다시 벌어질 것을 알고 있는 플롯의 해체 그리고 재인식의 과정에서 내가 <영웅본색>을 오랜만에 보며 새삼 발견한 존재는 대만에서 홍콩으로 복귀한 시점의 송자호(적룡)이다. 대만에서 3년의 형기를 마치고 돌아온 그는 다시 마크를 만나기 위해 조직의 본부 건물에 도착한다. 그리고 3년 전과는 전혀 다르게, 형무소에 부쳐진 편지와도 전혀 다르게 마크는 조직에서 완전히 팽당하여 담성(이자웅)의 발 밑에서 허드레 일을 하고 갈기갈기 찢어져 있다. 찢어진 마크의 모습이 송자호의 눈에 비친다. 그러니까 주윤발의 찢어진 모습이 스크린에 등장하면서 관객 앞에 현현되고, 동시에 적룡 눈동자 안의 피사체로 새겨진 후 곧이어 튕겨져 나와 개별 관객인 나의 눈에도 반사되기에 이른다. 이때 적룡의 시선은 나의 시선과 정확히 겹쳐졌다. 그렇게 초점 맞춰진 마크의 절름발이 걸음에서는 최근 동안 허름하게 찢긴 나 자신의 모습도 보였다. 보이는 대상과 그것을 응시하는 대상 두 지점에 모두 나 자신을 투영하는 찰나, 나는 <영웅본색>에서 그동안 눈치채지 못한 협객의 외로움과 비애를 비로소 바라보게 되었고 정확히 이 순간에 내가 <영웅본색>을 보는 태도가 이전과 달라졌음을 느꼈다.


열여섯 즈음에 처음 보았던 <영웅본색>은 암흑가 조직원의 비극적인 멋들어짐이 용암처럼 분출하여 뜨겁게 타오른 후 기어코 맞이한 죽음까지도 아름답다고 찬미할 수 있는 홍콩 누아르 캐릭터의 동음이의어였다. 이건 당시의 내가 홍콩 누아르 영화를 소비하는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그동안 수 없이 많이 <영웅본색>을 보면서 나는 이 영화 안에 나를 충분히 던졌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던져진 위치는 어디까지나 히어로를 향한 시청각적 숭배와 우상화, 아름답다고 포장할 수 있는 의리와 우애를 향한 가까스로의 동일시 수준이었지 그 이상을 넘어선 적이 없었다. 이때까지 내가 쳐다본 <영웅본색>의 아름다움이 나부끼는 곳은 슈퍼맨의 망토를 닮은 마크의 바바리코트에 가깝기 때문이다. <영웅본색>을 처음 만나던 그 시절에는 주윤발의 쌍권총질과 분노 어린 삿대질, 그러니까 암흑가의 일원으로서 행하는 수많은 행동을 기존의 수많은 영웅본색 영화 감상문들이 가르치는 대로 따라갔고, 당시 10대인 나를 둘러싼 세계에서도 의리와 우정, 도리가 번뜩이는 순간들은 나름대로 충만했기에 영화를 둘러싼 외피와 내피의 거창한 명제들로 <영웅본색>의 추구미와 지향점을 따라가는 일은 충분히 벅찬 일었다.


하지만 다시금 열어 본 <영웅본색>에서 마크를 바라보는 송자호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마주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영웅본색>은 높고 화려한 순간뿐만 아니라 낮고 비참한 순간, 감추고 싶은 순간 역시도 '무협'의 방식으로 찍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즉시 이 영화를 수식하는 단어의 우선순위를 수정하게 되었다. <영웅본색>은 ‘영웅’을 뽐내는 영화가 아니라 현대인을 위한 ‘무협’ 정신의 현대적 거울이다. 영웅은 위태로울 때 어떻게든 이 순간을 탈피하기 위한 해결책을 촉구하지만 협객은 위태로울 때 그 자신의 위태로운 마음을 잠시 대나무 숲에 은둔해 놓고 후일을 도모한다. 오우삼은 샘 페킨파 혹은 장 피에르 멜빌에 가까운 영화를 찍은 게 아니다. 오우삼은 장철에 가까운 영화를 찍고 있다.



마크는 어떤 심정으로 3년을 버텼나


하지만 여전히 파고들지 않은 빈틈이 있는 것 같다. 마크가 조직의 핵심 자리를 박탈당해 완전히 내팽개쳐진 그 처절한 시간들, 그는 왜? 혹은 어떻게? 3년이라는 시간을 혼자 버틴 것일까. 부재하는 동료와의 의리나 우정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결과론적인 답변을 붙이는 건 아무래도 충분하지 않다. 자리를 지킬 수 없게 된 송자호가 마크에게 어떻게든 버텨야 한다는 부탁을 했다거나 미완성의 책무를 부여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질문과 답변을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 채 나는 긴 시간 <영웅본색>에 휩쓸렸던 것 같다. 절름발이가 된 외로운 마크가 뭔가를 ‘박탈당해 버린' 불행한 상태에 가슴 찢어지게 공감은 할 수 있어도, 박탈당한 것의 실체 그리고 그것의 회복이 왜 마크에게 중요한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이 박탈과 회복에의 의지를 제대로 바라봐야만 나의 지금의 찢긴 상태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크의 3년은 어떤 심정으로 채워져 있는 걸까?


영화를 볼 때마다 상실의 실체와 무의식 속의 불만족을 하나하나 캐묻고 이해하려는 건 어찌 보면 영화를 영화 이상의 것으로 접근하려는 잉여의 시도이다. 대중적으로 장르 영화는 그런 것들을 엄밀하게 캐묻지 않아도 되는 적당한 합의점이 '장르' 영화라는 속성에 있다. 그래서 인물 각자가 지닌 개별 인생에 은폐된 무언가에 대하여, 대체 저 작자는 무엇을 추구하길래 저렇게 죽을 각오로 전쟁을 치르며 때로는 극단적으로 목숨까지 내던지는지에 대한 질문을 사실적으로 하지 않아도 되는 편의성이 주어진다. 물론 이런 질문이 기어코 발생할 때에 써먹을 수 있는 간편한 논리가 있기는 있다. ‘돈의 논리’는 가장 납득하기 쉽고 보편적인 이데올로기라서 인간 사회 내 다양한 명분에 소환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영웅본색>이 돈 문제를 다루는 게 아니라는 건 영화를 본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게다가 '위조지폐'를 다루는 영화에서 점층적으로 돈에 대한 집착을 주제화하는 건 역시나 시시하고 얄팍한 방식일뿐더러, 막말로 돈은 히어로 숭배에서 가장 멀어지는 수단과 방식이 아니겠는가? 사실 <영웅본색>은 복잡한 영화가 아니다. 영화 속에서 살고 있는 마크와 송자호, 송자걸 중 누구를 주시하더라도 상실의 실체와 복권에 대한 사유의 스토리텔링을 읽어낼 수 있다.


나는 다시 <영웅본색>을 보게 되었을 때 그동안 무시하고 지나쳤던 표지판을 쳐다보게 되었다. 강호의 의리 혹은 도리는 아무래도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 대한 것일 수밖에 없는데, 관계에 투신하는 과정에 있어 관계 이전에 '나'가 우선 존재한다. <영웅본색>에서 발생하는 의리의 문제 혹은 관계의 균열은 ‘나’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길 바라다가 사실은 어떤 정체인지 탄로 나고, 궁극적으로는 진정한 나의 정체를 회복하고자 하는 욕망의 부정교합에서 발생한다. 이건 비단 조직의 보스인 사실을 내내 감추고 살다가 탄로 난 송자호에게만 해당하는 문제는 아니다. 장국영에게도 유사한 목적의식은 존재하며 주윤발은 바로 그 홍콩의 야경을 찬탄하는 장면에서 참을 수 없는 분노로 내가 죽을 각오로 이래야만 하는 이유를 '나'를 중심축으로 하여 외치고야 만다. 거대하기만 한 강호의 명분이 <영웅본색>을 장식하는 사이에 '나'라는 존재는 완전히 대의에 미립자처럼 착색되어 버려 제대로 가려내어 볼 기회를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외침은 사실상 내가 그동안 이 영화를 반복적으로 보던 와중에 깊은 생각을 놓치고 있었던 '나'를 밝히는 설명이었다. "난 3년 동안 기회를 기다렸어. 날 과시하려는 게 아니라, 그저 내가 잃은 걸 돌려받고야 마는 사람이란 걸 보여주고 싶어." 마크가 잃은 게 정확하게 무엇인지는 서사를 토대로 하자면 이 역시 장르적으로 명확할 수는 있다. 그러나 나는 <영웅본색>의 관객으로서 가장 중요한 기분과 공감을 장르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영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저 마크가 혹은 주윤발이, 왜 저 이야기를 성치 않은 몸으로 피를 토해가며 외치고 있는지를 이미지로 봐야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영웅본색>의 수많은 이미지 중 하필이면 지금 이 시점의 나에게는 그 이미지가 가장 나의 심금을 울렸다.


KakaoTalk_Photo_2025-10-22-12-46-04 001.jpeg
KakaoTalk_Photo_2025-10-22-12-46-05 002.jpeg


영화를 두 번 이상 본다는 말은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시간 차를 보고 다시 재생한다는 말과 같다. 그리고 그 시간 차(사이)에는 당연히 보는 사람의 내면 혹은 속사정 혹은 인생의 변화가 덧입혀져 있다. 이것은 곧 영화를 보는 관점과 태도의 변화를 뜻하고 (거창하게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지만) 가치나 윤리의 지표를 그 영화 안에서 2차, 3차로 발견할 수도 있다는 것을 뜻한다. 다시 보게 된 <영웅본색>에서 마크는 죽는다. 이 사실은 변하지 않기 때문에 두 번 이상 본 관객은 언제나 준비된 애도로 영화의 결말을 마주할 뿐이다. 하지만 이번에 다시 <영웅본색>을 바라보며 나는 이 애도를 준비하기가 조금 어려웠다. 마크가 잃어버린 걸 되찾지 못한 채 죽는 것을 바라봐야만 하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하지만 '잃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나의 오해를 다시 교정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래도 <영웅본색>은 무협 영화이기 때문에 잃어버림의 정체를 무협스럽지 않은 것으로 대치하는 건 영 아닌 것 같다. 나의 인생은 영화가 아니고 무협도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가장 위태로울 때에는 무협의 정조를 떠올리면서 나의 찢긴 순간을 돌보고 싶다. 그게 바로 다시 보게 된 <영웅본색>에서 내가 발견한 인생의 한 이미지이다.







작가의 이전글영화관이라는 상상의 공동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