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아찔한 경험이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이었다. 짐작하기론 대여섯 살이지 않았나 싶다. 어렸지만 또렷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그만큼 충격적이었다는 거다. 사촌 집에 놀러 갔었다. 한참 잘 놀다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혼자 집에 가겠다며 길을 나섰다. 집에 가려면 시장을 지나가야 했다. 바글거리는 사람들이 어린 눈에는 정신없어 보였다. 순간 공포가 느껴졌고 길을 잃었다.
다음으로 기억나는 건, 파출소 장면이다.
어떻게 파출소에 있었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길거리에서 혼자 울고 있던 아이를 누군가가 파출소에 데려다준 듯하다. 정확한 기억은 없다. 날은 어두워졌고, 파출소 문을 박차고 들어온 사람이 보였다. 아버지였다.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있던 나는 스프링에 튕겨 나가듯 달려갔다. 아버지는 큰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며 달려간 나를 꼭 안아주셨다. 가끔 이날 생각이 나는데, 생각날 때마다 소름이 돋는다. 그때의 아찔한 기억 때문이 아니다.
만약에…
내가 길을 잃었을 때 누군가가 나를 파출소로 데려다주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어떻게 됐을까? 누군가가 길 잃은 아이라며 어딘가로 데려갔다면, 나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파출소에 있었어도 아버지가 나를 찾지 못했다면, 나는 어디로 갔을까? 등등. 내가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지 못했다면 어땠을지 생각하니 소름이 돋는 거다.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았을 거다. 더 좋은 삶을 살았을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다. 그렇게 생각된다.
잃어버릴뻔한 삶을 되찾았다.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뻔했다. ‘만약’이라는 변수가 하나라도 적용됐다면 말이다. 섬뜩한 경험 하나가 더 있다. 차에 치일뻔한 일이다. 초등학생 때로 기억한다. 밤이었다. 졸음에 취해 걷다가 건널목을 건넜는데, 끼익 소리와 동시에 정신을 차리니, 내가 차 바퀴 바로 앞에 누워있었다. 차가 조금만 더 나아갔더라면, 내 몸 상태가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다. 잃어버릴뻔한 삶을 되찾았다.
두 가지만 봐도 명확한 사실이다.
이 외에도 떠오르는 몇몇 사건(?)이 있다. 두 가지보다 무게감은 덜 하지만, 이들 또한 지금과는 다른 삶으로 안내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생각만 하면, 지금 모든 순간이 감사하다. 불평하는 순간에도, 밋밋하다고 여기는 순간에도 감사하다. 아무 일 없다는 말이, 제일 감사한 말인지도 모른다. 삶을 돌아보면, 소소하게라도, 자기 삶의 방향이 어긋날뻔한 일이 떠오른다. 그런 일이 없을 순 없다. 기억하지 못할 뿐이다.
기억하면 되찾은 삶에 감사하게 된다.
잃어버렸던 삶을 되찾았거나 잃어버릴뻔한 삶을 되찾았으니 말이다. 잃어버렸던 물건을 되찾아도 기쁜데 그렇지 않겠는가? 잃어버리지 않고 간직하는 방법은 감사하는 거다. 그 마음이 일어나면 행동도 자연스레 변한다. 표정도 변한다. 마음에 감사가 가득한 사람의 표정이 안 좋을 리 있겠는가? 마음이 갑갑하거나 잘 풀리지 않는다면, 되찾은 삶을 떠올려보자. 지금의 마음 상태를 고이 접어 날려 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