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샤느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답하겠는가?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고 말하지 않겠는가? 우리가 하는 모든 행동은 행복하기 위한 과정이다. 일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운동을 하고 사람을 만나고 음식을 먹고 그밖에 좋아하는 취미 활동을 하는 것은 모두 행복하기 위함이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얻어야 하고 가져야 한다. 그리고 누려야 한다. 너무 당연한 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집에 웅크려있거나 먹지 않고 움직이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을 거다. 소유하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와 반대되는 상황을 제안하는 책이 있다. <람 다스의 바가바드 기타 이야기>이다. 소유는 집착을 불러오고 집착은 고통을 불러온다고 한다. 즉 행복하기 위해서는 소유를 내려놓아야 한다고 말한다.
‘아쉬타바크라 기타'는 이렇게 말했다.
"집착이 없는 성자는 세상 속에서도 고통을 겪지 않는다." p198
여기서 말하는 집착은, 물건이나 기타 보이는 것에 한정되어 있다고 여겨지지 않는다. 정말 없애야 할 집착은 따로 있다. 원하는 상황을 고집하는 집착이다. 마음이 불편할 때를 생각해보면 안다. 내가 원하는 상황으로 흐르지 않을 때 예상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상황이 전개될 때 마음이 불편하다. 짜증이 나고 화가 난다. 이런 불편한 마음을 버리기 위해서는, 원하는 상황의 집착을 내려놓아야 한다. 이것이야 말로, 이 책에서 제안하고 강조하고자 하는 마음의 평화가 아닐까 싶다.
최근 많은 부분이 원하지 않는 상황으로 흘렀다.
안 좋은 일은 연속해서 일어난다는 말이 있다. 얼마나 버티나 시험하는 것처럼, 그렇게 몰아친다. 얼마만에 이런 일이 있는지 돌아보니 10년 정도 된 듯하다. 이 정도면 오히려 감사해야 하는 게 아닌지 생각하게 된다. 10년만에 이런 상황이라면 그렇지 않은가? 아무튼. 몰아치는 상황에 대한 반응은 두 가지로 나뉜다. 견디어내거나 흘려보내는 것과 무너지거나 휩쓸리는 거다. 우리는 당연히 전자를 택하고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 그게 세상을 살아내는 힘이 아닌가? 그렇다면 원하는 상황으로의 집착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어떤 것이 있을까?
이 또한 책에서 명확하게 제시한다.
["너의 일을 하되, 집착 없이 하라." 이것이 처방의 첫 부분이다. 아직 집착을 어떻게 멈춰 세우는지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목표라고 말하고 있다. 집착 없이 일하는 것, 그것은 결과에 대해 걱정하지 않고 행위하는 것을 뜻한다. '행위의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은 카르마 요가의 주요 가르침 중의 하나다. "가슴으로 일하라. 그 보상에는 마음쓰지 말라. 보상에 개의치 말고, 부단히 너의 할 일을 하라."] p109
'보상'을 '결과'라고 대치해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되 결과는 알 수 없는 것. 그러니 결과에 집착하지 말라는 거다. 그 결과가 원하는 것이라면 크게 개의치 않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마음에는 불평과 불만이 가득하고 이루어지지 않은 결과에 집착하느라, 이후에 다가오는 기회 혹은 행복한 순간을 놓칠 가능성이 있으니 말이다. 막지 말고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바로 몰아치는 상황을 흘려보내서 이겨내는 지혜가 아닐까 싳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이 책에서는, 도덕경을 빌려 설명한다.
[도덕경은 이렇게 말한다. "내맡기면 모든 일이 스스로 되어간다. 세상은 내맡기는 사람의 편이다. 애쓰고 발버둥칠수록 세상을 얻기는 요원해진다. 차 한 잔을 제대로 끓이려고 한다면, 차 한 잔을 제대로 끓이려고 열심히 '애써서는' 안 된다. 소기의 결과를 위해 열심히 애쓰는 동안에는 마음이 차를 끓이는 일에 가 있지 않기 때문이다. 두 가지 일을 한꺼번에 할 수는 없다.] p115
하는 것, 그 행위에 집중하라는 말이다.
왜 그래야 할까?
‘온전히’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다. 모든 것은 ‘온전히’ 이루어져야 한다. 온전히 머물러야 하고, 온전히 행해야 한다. 온전히 최선을 다해야 하고 온전히 다가가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온전할 수 있다. 그 자체로 만족하고 감사하는 상태가 된다.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길 바라거나 결과에 얽메이지 않는다. 흘러가는대로 받아들인다. 참 평화에 이른다는 말이다. 이 책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은 이것이다. 참 평화에 이르기 위한 방법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