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 나라는 ‘이미’ 왔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어제, 미사 시간에 신부님 강론 말씀 중 한 대목입니다. 이 대목에서 방점을 찍는 곳은, 두 곳입니다. ‘이미’와 ‘아직’인데요. 하느님 나라는. 먼 나라 이웃 나라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 삶 안에 이미 존재한다고 합니다. 완성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어주신 이야기가 있는데요. 그 이야기에서 강조한 것은, 희생과 배려 그리고 사랑이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죠? 희생과 배려 그리고 사랑의 노력 없이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이 어렵다는 의미로 해석됩니다.
이 세 가지는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마음에서 갑자기 훅하고 올라와 행동하게 될까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이를 잘 설명해 줄 만한 이야기를 ‘가톨릭평화신문’에서 발견했는데요. 그 문장을 인용해 보겠습니다. “누가 인내를 달라고 기도하면 그 사람에게 인내심을 주실까요? 아니면 인내를 발휘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까요? 용기를 달라고 하면 용기를 주실까요? 아니면 용기를 발휘할 기회를 주실까요? 가족이 좀 더 가까워지게 해달라고 기도하면 뿅 하고 묘한 감정이 느껴지도록 할까요? 아니면 서로 사랑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실까요?”
영화 <에반 올마이티> (2007)에 나온 대사라고 합니다.
대사가 너무 마음에 와닿아서, 영화를 검색해 봤는데요. 가족이 다 함께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대사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무엇일까요? 원하는 그것을 주시는 게 아니라, 발휘할 기회를 주신다는 겁니다. 자유의지를 발휘할 기회를 주신다는 거죠. 인내와 용기 그리고 사랑 모두요. 우리가 얻는 것은 발휘할 기회입니다. 기회를 활용할지 외면할지는 본인이 선택하는 겁니다. 공평하지 않나요?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주는 것이 아니라, 공평하게 다 주는데 그 선택을 본인 스스로 하게 하니 말이죠.
희생과 배려 그리고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세월까지 가지 않아도 됩니다. 지난주, 아니 어제 일을 떠올려봐도 세 가지 중 하나는 발휘할 기회가 있었을 겁니다. 타인을 위해, 하고 싶지 않지만 하는 것을 희생이라고 하죠? 내가 먼저가 아닌,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행동하는 마음을 배려라고 하죠? 타인의 모든 것을 품는 것을 사랑이라고 하죠? 어떤가요? 이 질문을 받는데, 딱 하고 떠오르는 장면이 있지 않나요? 자유의지로 실천한 모습이 떠올랐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고 외면했던 모습이 떠올랐을 수도 있습니다.
자유의지의 중심에는, 타인이 있습니다.
타인을 위해 자유의지를 발휘하는 것이, 희생이고 배려고 사랑입니다. 나를 위한 희생과 배려 그리고 사랑이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타인이 바라는 대로 해야 진짜라는 겁니다.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하면서, 희생했다고 하고 배려했다고 하고 사랑했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중심에 타인이 아닌 자기가 있는 거죠. 배부르다고 하는데 계속 음식을 권하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자기가 먹어보고 맛있어서 주는 건 알겠지만, 배부른 상태에서는 어떤가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라도, 고문이지 않을까요?
희생과 배려 그리고 사랑에도 경청이 필요합니다.
경청은 잘 듣는 것만을 의미하진 않습니다. 상대방이 진정 바라는 게 무엇인지 살피는 마음과 행동이, 진정한 경청이라 여겨집니다. 경청하는 사회가 되어야 합니다. 경청하지 않으면, 좋은 의도라고 해도 강요가 되고 폭력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도 득이 되지 않습니다. 해가 됩니다. 참 안타까운 모습인 거죠. 관심과 열린 마음으로 경청하면, 불통이 아닌 소통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