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거장 열셋 - 인도로 떠나다
“일상의 어느 순간이 운명처럼 다가온 때가 있었습니다. 오래전부터 신들이 미리 계획하고 준비해놓은 사건, 내 삶의 모든 방향이 송두리째 바뀌는 그런 사건이었죠. 생의 궤적에 선명한 자국을 남기는 그런 순간들과 조우하면서 생이란 신의 선물에 감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의 표정은 어느새 삶의 질곡을 다 겪어낸 어진 현자의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인도 여행이 4개월째로 접어들었을 때였습니다.”
마치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기로 작심한 듯 그가 인도에서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1983 봄 리시케시
델리와 뭄바이를 거쳐 발길 닿는 대로 마음 내키는 대로 목적지 없이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는 인도 여행에 지칠 대로 지쳐버리자, 한 곳에서 머물며 몸과 마음을 다스릴 수 있는 아쉬람을 찾아 나섰다. 아그라에서 바라나시로 내려가던 도중 15시간 넘는 기차여행이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아 중간에 행선지를 틀어 리시케시로 바꾸었다. 오래전부터 들어 낯익은 리시케시는 갠지스 강 상류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60년대 비틀스가 그들의 스승을 따라 이곳을 방문하면서 서방에 널리 알려진 인도의 대표적인 힌두 수행지이다.
서북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버스 여행은 지루함으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끔찍했다. 몸이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진동 없는 비행기의 일등석에서 조차 제대로 잠을 못 자는 내가 덜컹거리는 버스 안에서 단잠을 잔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했다. 게다가 언제 탔는지 내 옆과 앞 좌석에서 쉴 새 없이 영어로 떠들어대는 서양 여자들의 수다 속에서 달콤한 휴식이란 메마른 모래사막에서 오아시스의 녹원을 찾는 것보다 더 힘들게 느껴졌다. 잠결에 얼추 들어보니 캐나다에서 온 여행객들이다. 앞자리의 금발 머리와 빨강 머리는 캐나다 출신이지만 딴 나라에서 직장 생활을 하는 듯했고, 바로 내 옆에 앉은 은발 머리의 아줌마는 빨강머리의 언니인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들을 애써 무시한 채 온몸을 뒤척이며 계속 선잠을 청했다. 새벽 5시쯤 마지막으로 버스를 다시 갈아타기 위해 내렸다. 피곤과 배고픔이 겹쳐 머릿속이 무거운 자갈들로 채워진 듯하다. 그 자리에 주저앉으면 스산한 새벽어둠 속에 묻혀버릴 듯싶다. 최후 비상식량으로 아껴놓았던 컵 라면을 뜯어 허겁지겁 몇 젓가락 떼고 있는데 금발 머리가 저쪽에서 달려와 마구 손짓하며 내게 소리쳤다.
“빨리 와. 지금 버스 떠난다. 서둘러.”
그 소리에 놀란 내가 먹던 컵 라면을 팽개친 채 서둘러 그녀의 뒤를 따랐다. 가까스로 버스에 오르자, 자리에 앉아있던 빨강 머리가 마구 웃으며 "너 이 버스 놓쳤으면 꼼짝없이 이틀을 기다려야 했을 것"이라며 엉뚱하게 자기가 생색을 냈다. 금발 머리의 배려에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하고 나니 자연스럽게 이들과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빨강 머리의 이름은 리즈, 내 옆자리에 앉은 만만치 않은 몸집의 조앤은 리즈의 언니이고, 웃을 때 앞니 사이가 약간 벌어진 것이 매력적인 그날의 구세주가 케이시였다. 세 사람은 캐나다 동부 뉴펀들랜드 섬의 수도 세인트 존스 출신이라고 했다. 조앤은 그곳에서 '라이트하우스'란 해산물 전문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고, 빨강머리 리즈는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서부 캘리포니아로 내려와 버클리 졸업 후 법률회사에서 근무한 지 5년 째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케이시는 프랑스, 케냐, 일본, 태국을 거쳐 세계 여행 중인데 지금은 카다르에서 영어교사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한 동네에서 자매처럼 함께 자란 세 사람은 성인이 되면서 뿔뿔이 흩어졌고, 그동안 여러 차례 벼르다 어렵게 시간을 맞춰 3주간 함께 인도를 여행 중이라고 했다. 리즈는 이번 여행이 얼마나 어렵게 이루어졌는지 설명하느라 샌프란시스코에서 살인적인 변호사 업무에 관해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그녀가 맡았던 고용 계약 사기 사건과 대형 호텔의 성차별 관련 노동법 위반 사례는 주요 등장인물의 흉내까지 내가며 무려 30분 가까이 1인 극에 가까운 공연(?)을 펼쳤다. 수다스러운 리즈에 비해 케이시는 버스 여행에 지친 탓인지 창백하고 여위긴 했지만 줄곧 미소를 잃지 않았고 마흔이 훨씬 넘어 보이는 조앤은 푸근한 시골 아줌마처럼 털털했다. 대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단연 리즈가 주도했다. 안면을 트고 나니 수사관이 용의자 탐문하듯 그녀가 내 신상에 관해 이것저것 캐묻기 시작했다.
‘인도는 왜 왔느냐?’부터 ‘4개월 넘게 여행하는데 무슨 특별한 사연이 있느냐 ‘ '한국에서 무슨 일을 하느냐' '동양인들은 나이를 어림잡기 어려운데 도대체 몇 살이냐' '결혼은 했느냐' '아이들은 있느냐'는 등등 외국인들이 쉽게 화제 삼지 않는 개인적인 질문을 거리낌 없이 퍼부었다. 보다 못한 조앤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동생 대신 사과했다. 어쨌거나 리시케시로 가는 6시간의 버스 여행이 리즈 덕분에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리시케시가 가까워질 무렵, 리즈가 다시 폴싹 나서며 놓칠 뻔했던 버스를 타게 해 주었으니 케이시에게 뭘 해줄 거냐며 채근 댔다. 난감해하는 케이시는 아랑곳없이 등 떼다 밀다시피 하는 리즈의 성화가 계속되었다. 결국 리시케시에서 세 사람에게 근사한 저녁을 사기로 약속했다. 예약한 숙소가 이들이 다닐 수련원과도 그리 멀지 않았다. 이를 알게 된 리즈가 기왕이면 자기네가 예약한 아쉬람, 요가 니케탄으로 아예 옮기라고 제안했다. 여러 수련원을 돌아보고 결정하려던 당초 계획을 바꿔 그 자리에서 선뜻 응했다. 외로운 여행자의 일상을 계속해야 하는 나로선 방랑자의 고독, 그 궁상과 꾀죄죄함에 넌덜머리가 나던 차였다. 이렇게 해서 리시케시에서의 체류는 뜻하지 않게 캐나다에서 온 세 명의 친구들과 함께 하는 2주간의 즐거운 모험으로 바뀌었다.
“이봐요, 수. 지금에야 일어났어요?”
‘수’는 맨수(조앤) 먼서(리즈) 문수(케이시)등 각자 내키는 대로 마구 불러대는 내 한글 이름 대신 리즈가 붙여준 내 영어 이름이다. 며칠밖에 되지 않았지만 수다쟁이 리즈 덕에 아쉬람에서 각종 잔심부름을 도맡아 하는 11살짜리 꼬마 부핀더를 포함해 모두 날 그렇게 부른다. 꼬마 부핀더를 우린 ‘바피’라는 애칭으로 불렀다. 늦은 아침 부스스한 얼굴로 정원에 나온 나를 보더니 바피가 ‘아침 명상 땡땡이친 거 다 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지나갔다.
리시케시에서의 체류는 절제와 파격을 오가는 모험 그 자체였다. 처음엔 정해진 일과, 즉 오전 5시 기상, 새벽 명상과 요가, 아침식사, 힌두 철학 강의, 점심, 오후 요가와 명상, 저녁식사, 오후 9시 30분 취침까지 시간표를 따르며 수행에 정진했다. 술은 물론, 아쉬람에서 제공하는 채식 외에는 아무런 군것질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이 일주일이 지날 무렵부터 사정이 완전 딴판으로 바뀌었다. 우리 넷은 명상을 수시로 빼먹고 다른 아쉬람에서 열리는 음악회 또는 댄스 공연을 보러 가거나 단골이 된 독일 카페 ‘하이델베르크’에서 스파게티를 먹으며 오후 내내 와인에 흠뻑 젖어 난상토론을 벌이기가 일쑤였다.
우리가 발 디디고 있는 땅이 인도이다 보니 소재는 윤회, 카르마(업보), 존재의 의미 등 무거웠지만 토론 자체는 활기차고 진지했다. 리즈 조앤 케이시 각자 뚜렷한 주관을 가졌지만 자신의 믿음이 옳다고 누구에게도 강요하지 않았다. 그 보다 다른 사람의 의견을 ‘뭐, 그럴 수도 있겠다! 고 인정하고 필요한 부분을 수용하는 식이었다.
“우리의 생이 스스로 저지른 업보 때문에 윤회한다면 생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 윤회에서 벗어나는 것일 거야. 현생이 하나의 커다란 시험이라면 그 시험을 통과해야 다음 생에서 또 다른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 거지.” (케이시)
“흥미로운 관찰인데, 그렇다면 시험을 통과할 때까지 윤회를 계속해야 하는 건가?” (조앤)
“난 시험 싫어. 다만 다음 생에선 이번보다 아름답고 부자로 시험을 치렀으면 좋겠어. 가슴은 C사이즈로 커지고 허리는 3인치쯤 날씬하게 줄면 좋을 텐데.”(리즈)
“그런 미인은 꼭 돈 많은 대머리 뚱보 아저씨랑 결혼하더라.” (조앤)
“시험을 꼭 치러야 한다면 난 반드시 높은 점수를 받아 통과해야지. 과연 어떻게 하면 될까? 좋은 일을 많이 하면 되나?” (케이시)
“혹시 여러 남자들이랑 섹스를 많이 하는 건 아닐까? 호호호.”(리즈)
“배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 실수를 통해서 깨닫고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거지.” (케이시)
“나누고 베풀면 되지 않을까?” (조앤)
“베푼다는 말 자체가 자신을 위한 것으로 들려. 이만큼 베풀었으니 난 착한 일 할 만큼 했다는 자기만족이지. 자신에게 절실하게 꼭 필요한 것을 포기하고 주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나눔일 거야.” (케이시)
“그런 일을 하는 착한 사람들이 항상 손해 보더라.” (리즈)
“윤회를 받아들인다면 결국엔 모두 공평하지 않을까 싶어. 자신이 하는 만큼 되받게 되는 거지. 현생에서가 아니면 다음 생에서 말이야. 그래서 업보라는 것이 대대로 이어지는 것일 거야.” (케이시)
“맞아. 케네디가의 저주처럼 말이야? (리즈)
“참으로 공평하지 않아. 조상 잘못으로 비명횡사와 정신질환까지 업보로 물려받다니.” (조앤)
“이승에서의 불공평함을 저승에서는 벗을 수 있다는 게 윤회의 매력이지. 그러니 선을 많이 베풀, 아니 나누어야 해.” (케이시)
“돈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삶의 괴로움도 많이 줄어들 것 같아. 인도에서 제일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No Money, No Problem이잖아.”(조앤)
“No Men, No Problem이 더 맞는 말 같은데.”
남성 편력이 심한 리즈의 농담에 모두가 깔깔 웃어 댔다.
리시케시도 샅샅이 훑었다. 갠지스 강 위를 배로 건넜고 유명한 락시만 줄라나 램줄라 다리도 건너 봤다. 틈 날 때마다 향신료나 마사지 오일을 사고, 가끔씩은 동네 길가에 즐비한 원숭이들에게 콜라병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함께 장난을 치기도 했다. 갠지스 상류의 고아 비치로 나들이도 갔다. 그곳에선 ‘노 비키니’ 표지판 옆에서 세 여자 모두 비키니 차림으로 버젓이 선탠을 했다. 누군가의 일방적 편의에 맞춰 만들어 놓은 ‘하지 말라’는 규칙 따위를 깨는 것도 ‘일상의 자유’라는 리즈의 주장에 나도 전적으로 동의했다.
“바라나시로 다시 내려가 볼까 해.”
카페 하이델베르크에 앉아 망고 라씨를 마시고 있던 우리 세 사람에게 케이시가 불쑥 말했다.
“난 거기 음산하더라. 그 가트라는 화장터, 시체를 태운 강물에서 목욕하고 그 물을 마시는 사람들, 타다 남은 시체를 먹으려고 화장터를 어슬렁거리는 개들까지. 아휴, 소름 끼쳐.”
리즈가 어깨를 부르르 떨며 진저리 쳤다. 내가 슬쩍 나섰다.
“죽은 시신의 태운 재를 갠지스 강으로 흘려보내면 윤회에서 벗어나 영원한 해탈을 얻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야. 시험이 끝나는 거지. 그것 때문에 가트가 강가 하류인 바라나시에 있는 것이고.”
“얼마나 더 머물 계획인데?”
조앤이 걱정되는 듯 물었다.
“이곳에 그냥 주저앉을까 봐.”
앞니가 드러나게 활짝 웃으며 케이시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왜 기왕이면 아예 강가에 네 재를 뿌리고 해탈까지 하시지?”
수다스러운 리즈가 능청스럽게 농담을 던지자마자, 조앤이 정색하며 화를 냈다.
“너 무슨 그런 말을 함부로 해!”
“참, 언니는 별 뜻 없는 농담인데 왜 오버하고 그래.”
어안이 벙벙해진 리즈를 보며 케이시가 괜찮다는 표정으로 밝게 웃었다. 그때는 몰랐다. 나중에 돌이켜 생각해 보니 조앤은 우리가 몰랐던 뭔가를 이미 알고 있었던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