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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Dec 05. 2022

축구 이야기 (1)

晩書 홍 윤 기_살아온 이야기 살아갈 이야기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이라고 불리던 전염병의 대 유행으로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던 페스트의 공포에서 벗어난 이래, 고도의 문명이 발달한 21세기에 지구촌은 코로나 팬더믹으로 전 세계를 얼어붙게 한지도 벌써 3년여가 지나가면서 독감처럼 함께 가야할 동반자가 되어버렸다. 그로인한 경제적 손실은 물론 전 인류가 전전긍긍하며 위축되어 지구촌의 질서가 무너져가고, 인심이 흉흉한 가운데 팬더믹이 주춤하는 기회를 기다렸다는 듯, 인류는 팬더믹보다 더욱 강력한 무기로 인간의 면역력을 강화하는 지구촌 축제를 마련했으니 이름 하기를 월드컵이다. 월드컵은 지구촌 최대의 단일스포츠 경기이며 축제인 이른바 축구 전쟁이다.


 기원전 4~5세기경 고대그리스 대리석 벽화에 담긴 축구하는 모습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축구의 역사는 유구(悠久)하다고 할 수 있겠다. 언제 어디서 발생되었는지는 확실한 기록이 없어 학자들마다 그 설(說)이 분분하다. 대표적인 것으로 기원전 6~7세기경 고대 그리스에서 지금의 축구와 유사한 하파스톤(Harpston)이라는 경기에서 유래되었다는 설과 고대 중국에서 그리스보다 먼저 축구를 시작했다고도 하는데 이는 오늘날의 축구와 연결하기엔 미흡한 점이 많다. 근대 축구와 가장 근접한 설은 영국에서 축구가 발상되었으며, 그 시작은 조금은 끔찍하지만 덴마크의 폭정으로 학대받던 영국인들이 덴마크 군을 철퇴시킨 후 전쟁터에서 패잔병들의 두개골을 차며 승전을 축하했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는 설이다.


 이렇게 탄생한 축구는 그 후 14세기 이후에 점차 발전을 거듭하여 성황을 이루었으나 오늘 날과 같은‘골대’가 없고 럭비와 같이 찬 볼이 골라인을 넘으면 득점으로 인정됐다. 오늘날의 축구 형식으로 발전된 것은 19세기 중엽 축구와 럭비를 구별하기 위해 1863년 영국 축구협회를 발족시켜 경기 규칙을 제정함과 동시에 그 명칭을 Association Foot Ball이라 명명했다.1863년10월에The Football Association(영국 축구협회)가 발족됨으로서 실질적으로 현대 스포츠로서 축구가 세계인의 사랑을 받게 된다. 따라서 영국이 축구의 종주국이라는 지위를 갖게 되었다. 


 축구는 세계적으로 가장 널리 그리고 많이 보급된 스포츠의 하나로 국가 간의 대항전은‘대리전쟁’이라고 불릴 정도의 관심사가 되었고, 그 대표적인 대회가 ‘FIFA(국제축구연맹)’가 주관하는 월드컵 대회로 단일 종목으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스포츠 행사이다. 월드컵 대회는 20세기 초 올림픽 운동, 특히 1920년 올림픽 대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어, 올림픽 중간 연도를 택해 4년에 한 번씩 개최되고 있다. 1930년 제1회 FIFA 월드컵의 개최권은 우루과이에 주어졌다. 


 우리나라의 축구의 기록은‘삼국사기’에서 찾아본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서 공차기 놀이가 있었는데 그 명칭이 ‘축국(蹴鞠)’이라고 했으며, 김 유신과 김 춘추가 이 놀이를 했는데 ‘농주(弄珠, 둥근 놀이기구)’를 가지고 놀다가 옷고름이 찢어졌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그러나 축구 종주국 영국에서 시작된 근대 축구가 한국에 전파된 것은 1882년(고종 19년) 제물포에 상륙한 영국 군함 ‘플라잉 피쉬(Flying Fish)’호의 승무원들을 통해서인 것으로 전해진다. 정식 축구의 보급은 1904년 서울의 관립(官立) 외국어학교에서 체육 과목의 하나로서 채택하면서부터이다. 한국 최초의 축구 경기는 1906년 3월에 서울 삼선평(오늘의 삼선교 부근)에서 열린 대한체육구락부와 황성기독청년회 간의 시합이라고 할 수 있지만,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규칙 하에 경기에 필요한 각종 장비를 갖추고 경기가 열리기 시작한 것은 삼일운동이 일어난 이듬해 1920년대부터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1921년 제1회 전(全)조선 축구대회가 개최되고, 이어 1928년 5월 22일 우리나라 최초의 축구 조직인 ‘조선심판협회’(회장 신기준)가 창립되었다. 이어 5년 뒤인1933년 9월 19일 ‘조선축구협회’(회장 박승빈)가 창립됨으로써 한국에 정식으로 축구가 조직화되고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었다.


 축구는 일제 식민지 아래에서 가슴에 쌓인 민족의 울분을 풀어줄 수 있는 유일한 청량제였고 독립의 희망을 키울 수 있는 싹이었다. 이 때를 기점으로 생겨난 영원한 숙적인 일본과의 경기 한일전의 역사도 함께한다. ‘일본에게는 가위, 바위 보도지지 말라.’는 얘기가 그 때 만들어진 것은 아니겠으나, 숙명의 한일전의 전통은 그 때 만들어진 것이 틀림없을 것 같다. 오죽하면 어웨이 경기를 하기 위해 입국(入國)하려는 일본팀의 입국을 거부한 이 승만 대통령은 할 수 없이 적진(敵陣)으로 가는 우리 선수들에게 ‘패(敗)하면 돌아오지 말고 현해탄에 몸을 던져라.’고 했을까? 광복 직후의 우리 민족감정을 나타낸 가장 적절한 표현인지 모른다. 일제 말기 강제로 해산되었던 조선축구협회는 해방과 함께 1948년 9월 4일 대한축구협회로 개칭하면서 새롭게 출범했다. 같은 해 FIFA(국제축구연맹)에 가입했고, 1954년에는 AFC(아시아 축구연맹)의 정식 회원국이 되었다. 1948년 런던 올림픽 본선에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처음으로 세계무대에 발을 내딛은 한국 축구는 1954년 스위스에서 열린 월드컵 본선에 최초로 진출하면서 세계 축구계에 당당한 일원이 된다.


 한국 축구는 1956년 제1회, 1960년 제 2회 아시안 컵에서 연속으로 우승함으로서 아시아 축구 챔피언으로서의 기세를 드높였다. 이어 1960년대 이후 메르데카 컵, 킹스 컵, 아시안게임, 아시아 청소년 축구대회 등 아시아에서 벌어지는 각종 축구대회에서 수많은 우승컵을 차지함으로써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아시아 축구 최강으로 불리게 되었다. 세계무대에서의 도약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한 우리나라 축구는 2002년 일본과 함께 ‘한국-일본 월드컵 대회’를 개최한 바 있는데, 이는 우리나라 축구가 세계적 수준으로 한 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 경기에서 우리나라는 세계 최강의 국가 대표 팀들을 차례로 누르고 4위 성적을 올리는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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