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체스카여사
전쟁이 터지자 특권층은 자식들을 해외로 빼돌리기 바빴고, 총리로 임명된 주미대사는 몇 달 동안이나 미국에서 귀국하지 않았다.
전쟁이 난 나라에서 체류하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난중일기에 나오는 이야기다.
이승만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의 6.25 전쟁 일기가 밀레니얼 핑크 표지와 함께 다시 돌아왔다.
북한군이 기습해 내려온 1950년 6월 25일부터 중공군 개입으로 유엔군이 37도선으로 철수한 1951년 2월 15일까지의 상황을 기록한 일기다.
6.25 전쟁에서 가장 혼란스럽고(부산 피난, 1.4후퇴), 가장 어렵고(서울 철수, 낙동강 방어),가장 극적인(인천상륙작전, 중공군 개입) 사건을 통치자의 바로 옆에서 관찰하고 다룬 매우 소중한 자료다.
이승만대통령의 ‘전시통치사료’로 읽힐 만하다.
고위층의 아들들이 병역을 기피하고, 권력층과 부유층이 앞 다퉈 일본행 여권을 신청한다는 당시의 사회상도 담담하게 전해 준다.
그렇게 해외로 도피했던 지도층의 자제들이 유명한 화가도 되고 건축가도 되어 돌아왔구나,라는 착잡한 생각이 들게 하는 기록이다.
입으로는 반미를 외치며 자기 자식들은 하나같이 미국으로 유학을 보내고 있는 현재 좌파 정치인들의 행태도 돌아보게 만든다.
[일기 속의 해당 구절을 인용해 본다]
1950년 9월 8일
한 명의 젊은이, 한 자루의 총이 아쉬운 때다. 그런데 사회 일각에서는 “힘 있고 빽 있는 사람의 자식들은 요리조리 군대를 기피하고 해외로 빠져 나간다”는 비난의 소리가 들린다.
장면(張勉) 당시 주미 대사가 무초 주한 미 대사에게 부탁해 두 아들의 미국 유학 비자를 마련해 주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대통령도 무초 대사로부터 한국정부의 요인들이 자기 아들들의 유학 비자를 부탁해 와서 골치가 아프다는 불평 비슷한 소리를 듣고 몹시 괴로워했다.
대통령은 “이럴 때 우리에게 아들이 있어 군에 입대시켜 직접 모범을 보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한탄했다.
일반 국민들은 나라를 구하려고 죽을힘을 다해 싸우고 있는데, 외무부에는 일본행 여권 신청자 수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정부는 일본으로 밀항하여 해외도피를 꾀하는 자들을 엄중 처벌할 것이며, 제주도 피난도 금지한다고 발표 했다. 해외 여권 신청자들은 대부분 권력층과 부유층 인사들이다. 물론 그럴듯한 여행 이유를 만들어온다.
하지만 외무부에서는 공무 이외의 해외여행은 일체 허가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더욱 굳히고 있었다.
1951년 1월 11일
무초 대사가 와서 장면 총리가 귀국하도록 빨리 전보를 보내라고 대통령에게 재촉했다.
1950년 11월 23일에
총리로 임명된 장면은 49일이 지난 이때까지 귀국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이 일단 미국에 나가면 귀국하려 들지 않았다.
국내가 긴박한 상황 아래서는 그곳이 안전하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2월 2일
드디어 장면씨가 총리직을 수락했다. 신 국방은 장 박사가 총리직을 어쩔 수 없이 수락했다고 말했다.
만일 총리직을 수락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장 박사가 한국체류를 두려워한다고 헐뜯을 염려가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장면
#무초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