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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Park Jul 22. 2021

슬픔을 말하다

희망의 바깥은 없다

최근 들어 부쩍 주변에 가슴 아픈 일들을 겪은 분들이 늘었습니다. 조부모상도 여럿 있었고, 오랜 연인과의 결별, 부모님의 병세가 악화되거나 며칠 전까지 연락했던 사촌 형이 돌연 난데없는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까지도 했습니다. 몇 년 전 사월의 봄이 생각날 만큼 마음 한켠이 무거워집니다. 왜 꼭 가슴 아픈 일들은 봄에 생기는 걸까요


이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 해주려 했으나 차마 하지는 못했던 말을 몇 자 적어보려 합니다.




어쩌면 슬픔을 가진 사람에게 가장 독이 되는 말은 힘내, 라던지 괜찮아진다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큰일을 당한 사람에게 무거운 표정으로 의례적인 인사를 건넵니다. 잠깐 나름대로 위로의 말을 전하고 그 일에서 빠져나와 하루빨리 힘내라고 독촉합니다. 그가 아무 일 없었던 듯, 우리의 여전한 일상에 참여하기를 원합니다. 잠자기 전 양치질처럼 권태롭고 필수적으로 건네는 위로의 말. 사실 위로도 아닌 위로의 껍데기 같은 그 속 빈 말들은 다른 사람의 불행과 우울함에 오래 참여하고 싶지 않은, 아무 일 없었던 사람들의 이기심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쉬이 잊을 수 없는 슬픔을 당한 사람에게, 빨리 잊고 다른 이들의 무사한 일정에 합류하라는 말은 공감이 결여된 자들만 할 수 있는 말입니다. 


혈육을 잃는다든가 불치병에 걸린 큰 슬픔을 당한 사람 앞에서 어떤 위로의 말을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커다란 슬픔을 당한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적절한 위로의 말을 나는 알지 못합니다. 다만 공감해보려 합니다. 물론 모두 공감하지는 못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모든 감각을 동화시켜 같이 슬퍼해보려는 겁니다. 가족을 잃는 사람을 보면, 우리에게 슬픔이 전달되고 그 때문에 마음이 저립니다. 하지만 그게 근본적으로 우리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감각적인 정보가 결여되어 있기 때문에, 고통의 감각이 전달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사람의 입맛, 아이를 잃고 나서 잠들지 못하고 아침을 맞이했을 때 느끼는 감각. 이런 감각을 안다면 "이제 그만해라" 이런 말은 할 수가 없게 됩니다. 타인의 감각을 자신의 것처럼 느끼는 공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다른 사람을 이해한다는 일이 가능하다는 것에 회의적입니다. 우리는 대부분 타자를 오해합니다. "네 마음을 내가 알아",라고 말해서는 아니 됩니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라고 해야 정확합니다. 신촌의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에는 정문과 가장 가까운 곳에 암센터가 있습니다. 그곳 지하 1층의 풍경은 마치 어느 가을 과수원의 사과처럼 항암약물투여실 병상마다 짙은 갈색 차양 봉투를 뒤집어쓴 항암제가 매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거기 암센터 건물을 빠져나와 신촌역 앞 횡단보도에 서 있노라면 수많은 학생들과 젊은이들이 북적입니다. 모태를 벗어나 한 번도 얼굴을 찡그려본 적이 없다는 듯 웃어대며 고통이란 다른 세상의 일이라고 느끼는 그 미성숙함과 순진과 동심을 견딜 수가 없어 분통이 터질 지경입니다. 그들과 마찬가지로 젊고 건강했으나 어느 순간에 되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이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단테는 <지옥> 편을 시작하며 이렇게 노래합니다.


우리 인생길 반 고비에
올바른 길을 잃고서
난 어두운 숲에 처했었네


지옥으로 들어가며 탄식하는 단테의 말은 어쩌면 800년이 지난 지금 똑같이 어두운 숲을 헤매고 있는 이들이 내뱉을만한 동류의 탄식입니다. "아, 이 거친 숲이 얼마나 가혹하며 완강했는지 얼마나 말하기 힘든 일인가!" 이런 단테의 말에 공감하는 이들은 내가 겪는 이 고통이 어쩌면 모든 인류의 삶에서 영원히 반복되는 고통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한다고 믿습니다. 항암약물투여실 병상마다 앉거나 누워 있던 모든 암환자들의 고통이 그렇듯, 나의 고통 역시 개별적이고 구체적이었지만, 또한 바로 그 사실 때문에 이 세상에 널린, 흔하디 흔한 고통이었다고. 제가 희망을 느끼는 건 우리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입니다. 우리는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역설적으로 가장 잘 슬픔을 견디는 방법은 충분히 슬퍼하는 것입니다. 신경숙 작가는 그의 소설 <깊은 슬픔>에서 "슬픔에는 더 큰 슬픔을 부어 넣어야 한다. 그래야 넘쳐흘러 덜어진다. 가득 찬 물 잔에 물을 더 부으면 넘쳐흐르듯이, 그러듯이. 이 괴로움은 더 큰 저 괴로움이 치유하고, 열풍은 더 큰 열풍만이 잠재울 수 있다고."라고 말합니다. 가장 자연스럽게, 안정적으로 슬픔을 대하는 방식입니다. 맞닥친 슬픔을 눈 가리며 피하려는 게 아니라 그 슬픔을 충분히 음미하며 나의 감정에 오롯이 솔직해지는 것입니다. 휘몰아치는 태풍의 언저리에서 발버둥 치며 벗어나려 하는 게 아니라 고요한 태풍의 눈으로 고귀하게 걸어 들어가는 겁니다.


그렇지만 슬퍼하는 이들은 주의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종종 슬픔에 사로잡혀 정작 자기 앞가림도 못하고 무작정 슬퍼하기만 할 때가 있습니다. 슬픔은 인간의 삶에서는 행복만큼 중요한 존재입니다. 슬픔은 내면적인 애정의 반응이며, 가장 자연스러운 감정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과유불급, 지나친 것보다 미치지 못하는 게 낫다고 하죠. 비극을 추구하다간 제 자신도 휩쓸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슬퍼하는 이들은 명심해야 합니다. 바로 슬퍼할 만큼만 슬퍼하는 것입니다. 정혜신과 진은영 작가는 말합니다. "우리가 살다가 너무 슬플 때는 슬픈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 넘어지지 않습니다. 슬퍼야   슬프지 않으려 하면 반드시 넘어지게 되어 있어요. 무너지게 되어 있어요. 마음껏 슬퍼해야 합니다. 슬플   안정적으로,  편안히,  실컷 슬플  있도록 격려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무너지지 않고  빨리 일상으로 돌아올  있어요." 넘어지는 쪽으로 핸들을 꺾어야 넘어지지 않는 것이 이치이지만, 그렇다고 엉뚱한 방향으로 페달을 밟아가는 순간 우리는 궤도를 이탈하게 됩니다. 딱 넘어지지 않을 만큼만 핸들을 꺾기. 그러고선 다시 가려던 방향으로 핸들을 되돌리기. 슬퍼하는 쪽으로 망설이지 않고 충분히 핸들을 꺾기 (쉬어가도 좋다). 그렇다고 너무 오래 머무르지는 않기. 이러한 방향 감각은 충분한 방황을 통해 생겨납니다. 내면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을 알 수 있다면 길을 잃었을 때에도, 지도가 없는 곳에서도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단테가 신곡의 <지옥> 편을 쓸 당시엔 그의 나이가 35살이 된 시점, 인생의 최고 정점에 있었습니다. 피렌체 최고 행정관이 되었고, 세상의 권세와 명예, 부까지 부족할 것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미처 몰랐던 자신의 영적으로 메마르고 피폐해진 내면을 발견합니다. 그는 "죽음도 그보다 덜 쓸 테지만, 거기서 찾았던 선을 다루기 위해 거기서 보아 둔 다른 것들도 말하려 한다. (7-9행)"고 이 글을 쓰려는 의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깥의 찬란한 빛에 의지하려 한 것이 아니라, 도리어 꺼질 듯 점멸하는 내면의 빛을 향해 떠난 단테의 이야기는, 약함을 드러내는 것은 부끄러움이 아니며 오히려 강함의 반증이라고 그와 더불어 어둡고 거친 숲을 지나는 우리게 용기를 전해줍니다. 


희망의 바깥은 없다.
새로운 것은 언제나 낡은 것들 속에서 싹튼다.
얼고 시들어서 흙빛이 된 겨울 이파리 속에서 씀바귀 새 잎은 자란다.
희망도 그렇게 쓰디쓴 향으로 제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지금 인간의 얼굴을 한 희망은 온다.
가장 많이 고뇌하고 가장 많이 싸운 곪은 상처 그 밑에서 새살이 돋는 것처럼
희망은 스스로 균열하는 절망의 그 안에서 고통스럽게 자라난다.
안에서 절망을 끌어안고 뒹굴어라.
희망의 바깥은 없다.

도종환, <희망의 바깥은 없다> 전문



참조: 스티브 도나휴, <사막을 건너는 여섯 가지 방법>. 신경숙, <깊은 슬픔>. 정혜신, 진은영,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 단테 알레기에리, <신곡 - 지옥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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