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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Park Jul 19. 2021

하지 않을 수 있는 힘

고독한 존재들의 초상

조르조 아감벤이라는 이탈리아의 현대 철학자는 <창조행위란 무엇인가>라는 글에서 "예술에 품격을 부여하는 저항"이라는 말로 작가의 '쓰지 않을 수 있는 힘'을 정의했습니다. 이 글의 제목은 1987년에 질 들뢰즈가 파리에서 가진 강연회의 제목과 같습니다. 따라서 모든 창조행위를 무언가에 대한 저항 행위로 규정한 것은 들뢰즈가 먼저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감벤은 들뢰즈가 말한 '저항 행위'라는 게 모호하다는 사실에서 출발해 왜 창조행위가 저항 행위인지 차근차근 설명합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끌어들여 잠재력을 뜻하는 '힘, dynamis'과 행동을 통해 표출된 에너지인 '행위, energeia'를 구분한 뒤, 잠재력을 행동의 유보, 더 나아가 힘의 부재가 아닌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으로 정의합니다. 들뢰즈가 말한 저항 행위는 바로 여기에 연결됩니다.


능력뿐만 아니라 이 저항 행위, 즉 무능력까지 거머쥘 수 있는 힘만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지고한 힘입니다. 만약 인간의 능력이 무언가를 할 수 있는 힘뿐만 아니라 동시에 하지 않을 수 있는 힘까지도 포괄한다면, 이 능력의 실천은 오로지 후자를 어떤 식으로든 행동으로 옮겨와야만 가능해질 테죠.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이 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을 행동으로 옮길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대해 아감벤은 상당히 의미심장한 발언을 합니다.


"저항 행위는 실천을 향해 움직이는 힘의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충동을 멈춰 세우고, 그런 식으로 인간의 능력이 행위를 통해 고스란히 소모되는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비평적 역할을 담당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비평적 역할'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만합니다. 이어지는 문장에서 아감벤은 이를 다시 '취향'으로 바꿉니다. 그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취향으로 인한 시행착오를 통해 분명하게 드러나는 부족함은 항상 '할 수 없음'의 차원이 아니라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의 차원에서 나타나는 부족함이다. 취향이 부족한 사람은 무언가를 멀리하지 못한다."




좋은 취향을 가진 사람, 본인의 취향이 확고한 사람은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새로운 혁신과 자극들이 쏟아져 나오는 이 시대에서 아무런 검열도 없이 새로움을 들이켜는 다수와 달리 비평적 역할, 즉 취향을 가진 이들은 그 세찬 기세로 물미는 홍수 앞에서 자유로이 노다닐 수 있습니다. 자기만의 기준과 취향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들은 자신들만의 고유하고 신밀한 내면의 세계를 가지고 있고, 그 안에서 살아가기에 바깥의 풍파에도 휩쓸리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만의 입맛을 가졌다는 건 수많은 다른 사람들의 입맛에서 독립된, 주체적이고 세밀한 맛의 가치관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경양식 돈까쓰에는 단무지가 아니라 얼갈이김치가, 그것도 양념이 많이 묻지 않고 질깃하게 아삭한 줄기 부분이 더욱 어울린다고 말할 수 있는 힘은 오랜 시간 차근히 쌓인 내면의 단단함에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폭우 뒤에 범람한 강줄기가 휩쓸며 지나가듯, 새로이 등장하는 모든 것들은 기존의 것들을 휩쓸며 지나갑니다. 문학이던, 패션이던, 음악이던, 스포츠던, 본인만의 분명한 스타일을 가진 이들을 보면 문득 궁금해질 때가 있습니다. 저 탁월한 자유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세계란 어떠한 모습일까.


자유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보다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지 않는 것에 더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대중 매체를 통해 선전하듯 들이치는 새로운 문물들과 뒤처진다는 불안에 강박적으로 소비하는 사람들. 그 가운데서도 당당히 NO를 외치며 하지 않을 수 있는 힘을 향유하는 일. 세월을 아끼며 고요하게, 하지만 고귀하게 내면의 세계에 머물며 그 세계를 더욱이 아름다이 함에 정진하는 일. 그 일들에 몰두하는 이들의 모습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아름답습니다.


공자가 논어에서 전했듯, 배움이란 강물과 같아서 끊임없이 전진하지 않으면 떠내려간다고 합니다. 하지만 겨우 제자리에 머무르기 위해 몸서리치며 발버둥 하는 모습보단, 고고히 다리를 꼬고 앉아 강바닥 깊숙이 박아 넣은 나뭇가지같이 얇은 발 하나에 의지하여 앞이 아닌 하늘을 바라보는 새하얀 백로의 모습은 저로 하여금 더욱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저들의 고향도 타향도 아닌 이곳에서 며칠 머물다 다시 바다를 넘고 산을 넘어 떠나버릴 저 존재들에 대해. 그러면서도 짐보따리 지니고 있지 않고 무일푼의 혈혈단신으로 먹을 것과 잠자리를 예비하지 않으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저 홀로 시공을 통과하는 자의 외로움과 강인함으로 빛나는 눈빛을. 그 모습을 닮고 싶습니다.


오랜 시간 전부터 종종 외롭다는 생각을 해왔습니다. 딱히 자의로 선택한 일은 아니었지만 자연스럽게 외로운 취미들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오래된 음악을 찾아 꺼내 듣는 일, 더 이상 아무도 보지 않는 감독의 영화를 발견하는 일, 발걸음이 끊긴 지 오랜 시골 변두리의 국도변을 오래도록 오토바이로 내달리는 일. 비로소 그 취향들이 강점이 되고, 내 자아의 단단한 부분이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지는 오래지 않습니다.


새로운 생각을 해내는 사람은
기존의 믿음 체계로부터 이탈한 독립적 주체입니다.
고독한 존재이지요.
문명의 깃발로 존재하는 철학이나 예술은
다 고독한 존재들이 발휘한 용기에서 비롯됩니다.

최진석, <탁월한 자유의 시선> 중



참조: 김훈, <라면을 끓이며>. 김연수, <시절일기>. 질 들뢰즈, [창조 행위란 무엇인가? (1987)], <사유 속의 영화>, 이윤영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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