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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다정 Nov 17. 2018

강원도에서 디자이너로 일할 수 있을까?

서울 디자이너 강릉 체험기


노트북과 와이파이만 있다면


디지털 노마드란 말은 더 이상 우리에게 낯선 단어가 아니다. 가끔은 사무실 책상 대신 카페 창가 테이블에 앉아서 커피 냄새와 적당한 백색소음 속에서 일할 때 더 큰 퍼포먼스를 내기도 한다는 건 많은 이들이 경험해 본 일일 것이다.


나아가 요새는 아예 서울이 아닌 곳에서 리모트 워킹을 하는 사람들도 종종 볼 수 있다. 실제로 직종 특성상 리모트 워킹이 어렵지 않은 IT 업계 종사자에게 발리, 치앙마이, 방콕 같은 동남아 도시는 디지털 노마드들의 천국으로 각광받기도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노트북과 와이파이만 있다면 장소에 상관없이 일할 수 있다.


 우리는 어디에서든 일할 수 있다. 사진은 강원도 속초의 어느 카페에서 일하는 나(....)
원래도 어디서든 일하던 나...


강릉과의 만남


나도 나름의 리모트 워킹 경험이 있다. 바로 지난 7개월 간 강원도 강릉과 서울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일한 것이다. 올 초에 다니던 회사를 나오고, 지금의 회사에 이르기 전까지 강원도 강릉의 더웨이브컴퍼니라는 회사에서 백업 디자이너(?)로 일했었다. 친분이 있던 팀원에게 개인적으로 회사를 소개받았고 처음에는 읭? 웬 강릉? 싶었다. 들어보니 그 팀에서 하는 첫 번째 프로젝트가 웨이브라운지라는 오프라인 문화 공간을 만드는 것인데 그에 필요한 작업을 해줄 디자이너가 필요하다고 했다. 한 번도 오프라인 공간 작업을 해본 적이 없는 내게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강릉에서 일하면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드넓은 바다와 하늘을 볼 수 있고 바닷물에 전자파를 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연이 되어 웨이브라운지를 시작으로 강원도 크리에이터 커뮤니티인 공삼삼033, 강원창조경제혁신센터 LCA(Local Creator Acceleration)와 강릉지역서점 브랜딩 작업까지 하게 되었다.


강릉 있는 동안 바다는 정말 원없이 봤다
동해는 초록-파란색 그라데이션이 너무 아름답다



어딜 가든 집과 차는 중요하다


처음부터 '리모트'를 하려고 한건 아니었다. 원래는 정말로 강릉에 가서 살려고 했다. 치앙마이, 뉴욕에서도 한 달 사는데 강릉에서 한 달 사는 건 그에 비하면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용기는 필요 없어도 돈은 필요했다. 원룸을 찾아보니 생각보다 지방이라고 해서 저렴하진 않았다. 보증금 제외한 월세 자체는 서울과 거의 비슷했다. 그리고 강릉은 버스 배차가 적고(대신 택시는 정말 잘 잡힌다)노선이 많지 않아서 차가 없는 나에겐 불리했다. 마트 같은 데 가려면 무조건 차를 타고 나가야 되는 데 매번 택시를 탈 수도 없었다. 언덕도 차도 별로 없어서 운전하긴 정말 좋은데 지금 생각하니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면허를 따서 바이크를 타는 것도 괜찮은 선택일 것 같다. 현실적인 문제로 리모트 워킹으로 타협을 봤지만 그래도 한 달에 한두 번은 꼭 강릉에 갔다.


나의 손길이 닿은 공간. 강릉 포남동의 웨이브라운지.
오픈 하기도 전인 2월 사진(왼)과 11월 현재 모습(오).


제한적인 디자인 자원


처음에는 앞서 말했던 오프라인 공간 작업을 진행했다. 공간의 간판을 만들어야 하는데 간판 자체에 약간 빈티지한 텍스처를 넣고 싶었다. 그러려면 부식 페인트를 써야 하는데 강릉 업체에 레퍼런스를 보여주니 강릉에는 이런 종류의 페인트가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겨우 찾은 다른 업체에선 서울의 두 배 이상의 가격을 불렀다. 그래서 결국엔 서울의 업체에 맡겼고 그 간판은 영동 고속도로를 타고 강릉까지 넘어오는 대장정을 할 수밖에 없었다. 지방의 인프라가 제한적이라는 게 작업에서 처음 현실로 와닿는 순간이었다.


영동고속도로를 타고 온 간판. 저렇게 얼룩덜룩한 빈티지 색감을 내고 싶었다.


이후 인테리어 작업을 할 때도 비슷한 이슈가 계속 있었다. 내부에 붙이는 포스터를 출력하러 강릉 시내의 출력소에 갔는데 일단 내가 찾는 두께의 종이가 없었고 두번째론 너무 비쌌다. 모든 규격 종이 출력이 서울에 내가 평소에 자주 가던 출력소의 딱 두 배 가격이었다. 그래서 아주 급한 건 아니면 웬만한 건 다 온라인으로 주문했다. 소량 주문해도 온라인으로 시키는 것이 시내 출력소보다 훨씬 쌌다.

(+사실 강릉은 모든 게 비싸다. 음식도 마찬가지.)


내 이야기는 아니지만 회사 팀원 중 한 명이 맥북에 커피를 쏟았는데 강릉에 맥북을 세척할 수 있는 곳이 없어서 1분 1초를 다투는 그 순간에 용산까지 택배를 보내야 했던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다(다행히 추후 맥은 고쳐쳤다).


사실 강릉 일을 시작한다고 했을 땐 가장 먼저 바다가 보이는 창문이 있는 스튜디오를 1분 정도 상상했지만.. 이런 현실적인 문제가 더 크고 피할 수 없다는 걸 말하고 싶다.

내가 강릉에서 처음 찾은 출력소....* 다행히(?)도 더이상 영업하지 않는 곳이었다


32일간의 여정


글을 쓰는 지금 내가 지난 7개월 동안 강원도에 있었던 날을 세보니 총 32일이었다(물론 그 중 논 날도 많았다.). 한 달이 넘는 기간 동안 강릉, 양양, 속초 등 강원도를 체험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건 '기회가 많다.'는 점이었다. KTX 개통으로 접근성이 좋아지면서 관광객을 대상으로 하는 공간이 계속해서 새로 생기고 있고 그에 따른 디자인 수요도 내가 잡으려면 잡을 순 있다. 디자인 인력 자체가 많지가 않기 때문에 자기 어필을 잘 해서 입지를 다진다면 경력에 비해 큰 프로젝트를 맡을 수 있는 기회도 많다.


하지만 반대로 '기회가 없다.'는 것도 뼈저리게 느꼈다. 나는 원래는 UI/UX, product design 을 하는데 IT쪽 인력은 전무하다시피해서(예 : 프로그래머) 이쪽으로 커리어를 쌓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그래픽이나 브랜딩 쪽이라면 앞서 말했듯이 재밌는 프로젝트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려 있다.


그리고 지역에선 정말 커뮤니티의 힘이 커서 그 지역 사회 자체에 녹아들지 못하면 말 그대로 일을 하기가 어렵다. 작은 도시인지라 관계가 정말 중요하고 나의 평판이 구전으로 쉽게 퍼진다. 또, 앞서 말했던 현실적인 디자인 인프라 문제가 크고 디자인 커뮤니티의 미비로 인해 생기는 외로움이 있을 수 있겠다. 하지만 근래 들어 더웨이브컴퍼니를 비롯한 몇몇 곳에서 로컬 크리에이터들의 생태계를 조성하려는 움직임이 있으니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메뉴판, 슬리브, 소소한 일러스트 작업
시트지에 들어가는 문장까지 하나하나 고민했다


바다로 떠나는 사람들


리모트 워커에게 강릉의 매력은 뭐니 뭐니 해도 바다다. '탈서울' 지역으로 가장 사랑받는 지역이 제주도인 것도 마찬가지 이유일 것이다. 참고로 제주도에는 제주 창조경제혁신센터 같은 코워킹스페이스도 자리 잡고 있다(참고 : 제주에서 일하면서 한 달 살기 https://brunch.co.kr/@dongkang/5 ). 푸른 파도와 높고 넓은 하늘은 하루 종일 디스플레이를 보는 사람들에게 절대적인 매력이다. 내내 창문을 열면 바다가 보이는 곳에 있었던 건 아니지만 사무실에서 작업을 하다가 답답하면 택시 타고 안목 커피거리에 있는 할리스나 스타벅스에 갔는데(뷰는 할리스를 더 추천) 거기선 정말로 창밖으로 바다를 보면서 작업할 수 있었다! 게다가 강릉은 KTX로 2시간이면 올만큼 접근성이 굉장히 좋다. 강릉에 있을 때 가끔 디자이너 친구들도 불러 같이 작업 하고 놀기도 했는데 모든 친구들이 '생각보다 가까워서' 놀라던 기억이 난다.


안목 스타벅스 작업 뷰


나는 이제 서울-강릉 왔다 갔다 생활을 마무리하고 평범한 회사 생활로 돌아왔지만 운 좋게도 리모트 근무가 가능한 팀이어서 앞으로도 다른 지역에서 일할 기회가 있을 것 같다. 아직 체험해보지 못한 지역들도 궁금하다.


꺼지지 않는 각종 여행 프로그램의 유행을 보면 알 수 있듯이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떠나고 싶어할 것이다. 만약 당신이 노트북과 와이파이만 있다면 어디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강릉을 적극 추천하는 바이다. 반짝이는 초록바다가 당신을 기다리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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