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번아웃 극복기
해가 바뀔 때마다 그 해의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을 그려보는데 올해는 ‘관대한 사람’ 이었다. 정확히는 업무든 인간관계든 외부에서 오는 데미지에 대해 좀 더 여유롭게 대처하고 때론 허허 웃어넘기는 여유를 갖고 싶었다. 작년에 호주를 두 번이나 다녀왔는데, 그 곳에서 경험한 Chill, Laid-back 한 라이프스타일에 영향을 많이 받았던 것 같다. 여유, 느긋함 같은 기존의 나와는 전혀 다른 키워드를 동경하며 올해는 고질적인 완벽주의를 조금은 내려놓고 삶에 대해 좀 더 느슨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게다가 작년엔 이직이라는 큰 이벤트로 일에만 집중한 삶을 보낸터라 올해는 조금 쉬엄쉬엄해도 되겠단 생각도 있었다
Chill 한 사람이 되겠다는 포부와는 어째 정반대로 7월에 번아웃이 세게 왔다. 커리어 기간 동안 처음으로 겪어 보는 무기력감이었다. 억울한 사실은 내가 그렇게 열심히 일하진 않았다는 것이었다(?). 물리적으로 보면 작년에 비교불가로 더 강도 높게 일했는데 왜 갑자기 물에 젖은 이불 같은 사람이 되어버렸나 억울하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번아웃의 스위치를 켠 건 휴가였다. 6월에 2주 정도 휴가를 다녀왔었다. 장시간 일에서 떨어지니 나 자신과 일상을 줌 아웃해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됐는데 문득 나라는 사람의 구성요소가 일과 커리어를 제외하곤 비어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일을 열심히 했더라?’ 새삼스럽게 불거진 물음표는 삐딱한 마음을 만들었다.
처음 느껴보는 무기력감은 불쾌하고 우울했다. 이 상황을 빨리 해결하고 싶었기에 일에 쏠려 있던 일상에 강제로 각종 취미 활동을 도입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무조건 퇴근 후 일정을 만들어 퇴근을 안 하면 안 되게 만들었다. 원래 하던 저녁 운동과 더불어 평일 영어 스터디에 등록하고, 독서 모임도 신청했다. 나는 한 번 하고자 루틴을 만들면 웬만하면 어기지 않는 관습이 있기 때문에 이런 시간표에 나를 몰아가서 일에만 집중되던 일상을 강제로 바꾸는 전략이었다.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싶어 심리 상담도 시작했다. 상담도 일주일에 한 번씩. 시간은 만들면 생긴다고 믿기에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야지 싶었다. 어느 날은 선생님께 하고 있는 노력들을 쏟아내듯 말하니 ”왜 그렇게 열심히 노력하시는 거예요?"라고 되물으셨다. “극복을 못할까봐 불안해요.” 이 마음에 대해 꺼내니 노력하는 건 좋지만 너무 일처럼 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 번아웃을 지나가는 감기로 볼 수 있지만 회복에 오래 걸리는 독감일 수도 있기에, 힘을 좀 빼고 긴 호흡으로 가는 연습이 필요하다고 하셨다.
“너 번아웃 해결하다 번아웃 오겠다.” 이 상황을 들은 친구가 던진 말은 웃기고 슬펐다. 어떤 문제는 해결되기까지 절대적인 시간이 필요하고, 어쩌면 해결이 안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번아웃 극복마저 노력해 성과를 이뤄내는 업무처럼 생각했던 것 같아 스스로가 어이없었다.
이때부턴 마음을 고쳐 먹고 노력하면 금방 해결될 거란 생각, 나라면 해결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을 내려놓으려 노력했다. 살다 보면 넘어질 수도 망가질 수도 있는데 돌아보니 나는 내가 번아웃이라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 같다. 무기력한 나, 우울한 나를 받아들이기 싫어서 더 과하게 취미 생활을 하고, 빨리 극복해 내! 라며 나를 또 괴롭혔다. 상담에서 나는 오히려 자존감은 높다고 나왔는데, 이게 엉뚱하게 발현되면 부정적인 상황에 대한 면역이 없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됐다. 내가 뭐라고. 늘상 잘 해낼 거란 생각은 오만이었다.
주변 사람들과 근황을 얘기할 때 번아웃을 겪고 있다고 털어놨다. 고맙게도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공감해 주고 걱정해 줬다. 내 입으로 번아웃이 왔음을, 상담을 받고 있음을 말하는 게 처음엔 되게 머쓱했는데 몇 번 하다 보니까 익숙해졌다. "조언 좀 해줄 수 있어?"라는 말도 용기 있게 내뱉어 봤다. 비슷한 상황을 이미 겪어본 지인도 있었고, 다들 진심 어린 조언을 해줬다.
그중 한 친구가 말했다. 단순히 몰입의 대상을 일에서 취미로 옮긴다고 번아웃이 해결되는 게 아니라고. 운동이든, 취미든, 인간 관계든.. 뭐가 됐든 대상은 사실 중요하지 않고 그것을 대하는 나의 마음가짐- '잘 해내고 싶다.'가 바뀌지 않으면 똑같이 지치게 될 거란 거였다.
누구나 행복을 바란다. 그리고 나는 행복을 주로 무언갈 잘 해냈을 때의 성취나 인정으로 만들어왔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행복은 애써서 만들어내는 보상인 게 익숙했다. 번아웃이 어디서 왔는지 조금씩 보이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안해도 행복을 느끼는 조금은 안분지족할 수 있는 마음이 필요했다.
상담 선생님은 소확행을 찾는 연습을 해보라고 하셨다. 성취가 아니어도 소소한 행복 말이다. 꼭 뭔갈 해내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는 마음이 내게도 분명히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턴가 잊고 있었던 것 같다. 마침 서은국 심리학 교수님이 말하는 행복에 대한 유튜브를 인상 깊게 봤다 (최재천의 아마존 - 서은국 연세대 심리학과 교수 인터뷰). 교수님은 행복은 강도가 아니라 빈도라고 하며 "행복은 압정처럼 깔아 둬야 해요. 방에 압정이 뿌려져 있으면 무심코 밟게 되듯 깔려있어야 한다."라는 얘기를 하셨다.
교수님 인터뷰에서 영감을 받아 노트 앱에 '압정 수집'이라는 페이지를 만들어 내가 행복한 순간을 모았다. '소확행'이라는 표현도 필요 없을 것 같았다. 작은 행복, 큰 행복 구분하지 않고 내가 행복하면 그냥 행복이라고 생각했다. 대신 조건을 2만 원 이하로 설정해서 비용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것들로 채워 나갔다. 기록하는 건 워낙 좋아해서 포켓몬 모으듯이 즐겁게 했다.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보여줬는데 보는 사람도 신나서 이것도 추가해 보라며 아이디어를 던져 주기도 했다.
행복압정을 모으며 둔해졌던 행복에 대한 감각도 조금씩 예민해져 갔다. 그리고 어쨌든 번아웃에 영향을 끼친 업무의 양도 줄이려고 노력했다. 일의 양도 줄이고, 일상 전반의 행복에 대한 감각도 살아나며 젖은 이불 같던 마음도 조금씩 산뜻해졌다.
한 없이 가라앉던 7월의 첫 주로부터 세 달이 흘렀다. 그래서 '번아웃을 극복했나요?'라고 묻는다면 그런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일에 대한 무기력에서 시작했지만 지금은 좀 더 거시적으로 나를 돌아보는 과정인 것 같다. 이 이야기는 ‘3개월 만에 번아웃 극복하는 법'은 아니고 그저 누군가 요리조리 자신의 마음을 살펴봤던 기록이다.
연초의 관대한 사람이 되겠단 막연한 목표는 스스로가 만족하는 성취나 외부의 인정 없이도 하루하루를 좋아하는 관대함을 가지자는 것으로 구체화됐다. 관대해야 할 대상이 타인이나 환경이 아닌 '나의 행복에 대한 기준'이라는 걸 이제 안다. 성취나 인정이 없는, 별 것도 아닌 삶도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을 이렇게 배워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