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때문에 웃고, 사람 때문에 웁니다.
무인도에서 혼자 살면 아무런 문제가 없겠지만 생각해 보면 그건 또 내키지 않아요.
지지고 볶고 울고 웃어도 사람들 사이에 사는 것이 더 좋은 게 확실한 것 같습니다.
인간사,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이 관계에서 시작되고 관계로 귀결되는 것이 당연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관계란 서로에게 어떤 존재인가로 결정되는 것이겠죠.
퇴근시간즘 되면 아이들한테 전화가 옵니다.
“아빠 언제 와?”
“아빠 오늘 늦어, 저녁 먹고 늦게 늦게 갈 거 같아.”
“그래~? 알겠어~! 일찍 와~!”
나중에 할머니의 귀띔으로 알았습니다.
그렇게 아빠가 언제 올지 확인하고 나면 아이들은 해야 할 공부를 뒷전으로 밀어놓고 자유를 만끽한다는 것을요.
어느새 아이들에게 아빠는 늦게 왔으면 하는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어버렸나 봅니다.
많은 생각이 들더군요.
좋은 관계가 좋은 존재로 나타나는 것일까?
좋은 존재여야 좋은 관계가 지속될 수 있는 것일까?
답도 안 나오는 생각들을 해보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이 지점에서 나와 관계가 있는 모든 사람들을 떠올려 봤습니다.
가까이에 아내부터, 부모님, 형제들, 친구들, 그리고 함께 일하는 직원들, 거래처의 관계자들까지…
언젠가 아내가 건강검진을 하면서 위내시경을 할 때였습니다.
첨 해보는 내시경검사여서 먼저 해보고 그 고통을 알고 있는 제가 수면을 적극 권유했습니다.
아시죠~!
수면마취 상태는 의식이 없이 깨어 있는 가수면 상태라는 것을요.
내시경 검사를 마치고 침대에 누운 채로 나와 회복실 한쪽에 자리 잡고 있는 아내는 아직도 가수면 상태였습니다.
이런 순간이 다시 오기 어려울 것 같아 짓궂은 장난기가 발동이 됐습니다.
아내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응?”
눈을 감은채 대답을 하더군요.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평상시 물어보면 핀잔만 들을 질문을 해봤습니다.
어떤 대답이 나올까 궁금해하며 입을 열길 기다렸습니다.
입가에 배시시 웃음이 돌더군요.
그리고 나온 대답이 “오빠가 젤 좋아, 세상에서 오빠가 젤로 좋아~~”
깨어난 후 얘길 해줬는데 그럴 리 없다고 딱 잡아떼더군요. 오히려 제가 거짓말을 한다고 뒤집어 씌웁니다.
촬영을 했어야 했나 봅니다.
십 년을 훌쩍 넘겨 살면 대부분은 왠수로 분류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렇게 정신줄 놓은 상태에서도 내가 제일 좋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어 진심 행복했습니다.
관계에는 서로에 대한 존재감의 무게만큼이나 다양한 모양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존재감의 무게란 그 사람에 대한 바람의 크기와 다르지 않을 테고요.
그 바람의 무게가 서로 균형이 맞으면 바람직한 관계일 테고 한쪽으로 치우치면 누군가에겐 부담스러운 관계일 테죠.
갑자기 관계들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글의 제목을 관계설정이라고 잡은 이유이기도 합니다.
상대에 대한 바람의 무게가 크던 작던 그에 맞는 올바른 관계란 무엇일까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싶더라는 거죠.
관계설정
설정한다는 말 그대로 의도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의도함이 있다면 그 의도에 맞는 노력도 있어야겠죠.
관계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가 생각납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태복음 7장 12절)
예수님의 이 말씀은 네가 원하는 상대방에 대한 관계의 무게만큼 너도 그 정도의 무게를 갖추라는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문제는 나는 그 누군가에 대한 존재감의 무게를 가볍게 생각하고 있으면서 정작 그가 왜 나를 가볍게 여길까 하는 것이겠죠.
그래서 혼자 상처받고 기분 나빠하더라는 것이죠.
병원에 입원했을 때 문병 한 번은 와줄 줄 알았는데 문병은 고사하고 연락 한번 안 한 그 누구겠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엄청난 부담을 안겨주는 경우요.
수년간 연락 한번 없었고 그걸로 그와 나의 관계가 서로의 합의 하에 정리되었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청첩장을 보내와 ‘뭐지?’ 싶게 만드는 사람이죠.
그런데 관계란 일방적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서로의 상호작용 가운데 형성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관계설정은 내가 설정한다고 무조건 그가 그 설정에 맞추어야 하는 것도 아닌 겁니다.
관계라는 저울 한쪽에 내가 무게를 조금 올려놓고 상대방도 그만큼 올려주기를 기다리고, 반대로 그가 조금 무게감을 덜어내더라도 상처받기보다는 내가 부담스럽게 한 것은 없는지 나도 한 발짝 물러서서 살펴볼 줄 아는 상호작용. 이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글로 관계에 대해서 정리해 보는 가운데도 어렵게 생각되는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 아이들과의 관계입니다.
부담스러워하는 것을 알면서도 계속 다가갈 수 밖에는 없는 것인지?
아니면 애타는 마음만 부여잡고 무게를 맞춰야 하는 건지 이건 정말 모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