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훈표 지음
이 책은, “경제학의 역사가 ‘개인의 자유의 가치를 증명해 온 역사’“라는 관점을 가지고, 근대 경제학의 시초인 애덤 스미스에서부터 최근 행동(행태)경제학의 대니얼 카너먼까지 경제학의 주요 역사와 흐름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한 책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경제학의 역사와 개인의 자유라는 개념과의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역사를 보는 데에는 ‘관점’이 필요하다. 어떤 관점을 갖고 역사를 보느냐에 따라 역사를 다르게 설명할 수 있다. 보름달을 가리키는 사람이 있으면 보름달을 보는 게 정상인데 E. H. 카는 반대로 “보름달을 보지 말고 손가락을 보라”고 했다. 그만큼 ‘관점’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기본적으로 경제학은 각각의 개인이 모두 동등한 자격으로 거래에 참여할 수 있는 ‘시장’이라는 걸 전제로 한다. 개인들이 서로 동등하지 않았던 봉건시대에는 약탈과 착취가 기본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경제학의 시작부터가 근대시대의 '계몽주의'와 함께였다. 즉, 인간 개개인에게는 소중한 인권이 있다는 믿음, 그렇기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고 자유로워야 한다는 믿음이 바로 경제학의 시작이다. 개인들이 평등해지고 자유로워지는 과정이 시작되었기에 화폐와 시장과 교환행위가 지속적으로 유지될 수 있게 되고 이를 분석하고 현실에 적용할 필요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기에 경제학은 기본적으로 ‘개인의 자유’를 존중할 수밖에 없고, 경제학자들은 자유를 보편적으로 확대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며 이를 위해 사람들을 ‘모두 다 잘살게’ 하고 싶어 한다.
1 개인의 탄생
새로운 시대의 도래
유럽의 중세는 ‘암흑시대’라고 불릴 만큼, 오직 신만 바라보며 살아간 시절이었다. 신의 섭리가 엄연히 존재하는데, 굳이 세상의 진실을 탐구하는 수학이나 과학을 연구할 필요가 없었다.
그러던 차, 예루살렘이라는 ‘신의 땅’을 되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1096년부터 200년이나 계속된 십자군 원정을 통한 '다른 세계'와의 만남이 유럽에 가져다 준 충격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고대 그리스 수학, 과학기술의 유럽세계로의 유입과 향신료 등 유럽과 동방의 교역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교역의 증가는 천 년 동안 굳건하던 신분 체계를 흔들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것이 이탈리아 메디치 가문의 성장이다. 물론 그 영향이 이탈리아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프랑스나 영국, 스페인 등에도 무역의 영향으로 신흥 부유층이 다수 생겨났다.
상업이 발달하면 자연히 이를 노리는 존재가 생기기 마련이다. 서로의 부를 빼앗으려는 전쟁이 잇따라 터지기 시작했다. 1337년부터 1453년까지 프랑스와 영국이 벌였던 백년전쟁은 겉으로는 왕위 계승권을 둘러싼 시비였지만 실제로는 모직과 포도의 중요한 산지였던 플랑드르와 기옌 지방을 점유하려는 싸움이었다.
이렇게 오래 전쟁이 지속되면 자연히 기존의 봉건적 군대 체제는 한계에 이르게 된다. 이 오랜 체제가 흔들리면서, 새로운 질서를 뒷받침할 새로운 사상과 새로운 학문이 절실히 필요해졌다. 마키아벨리(1469~1527)의 『군주론』이 1513년에 발표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과거의 봉건국가가 국민국가로 재편성되는 시기에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 군주의 덕목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갑자기 커다랗게 ‘국민’이라는 개념을 만들기 위해서는 국민 간의 동질성을 찾아내어야 한다.
이때 찾아낸 개념이 바로 ‘민족’이었다. 민족에 대한 개념이 이때에 이르러 최초로 등장했다. 이렇게 시작된 유럽 민족국가의 왕들은 점점 늘어나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두 가지 방법을 찾았다. 바로 관료제와 상비군이다.
이 두 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예산이 소요된다. 새로 급부상한 상인 계급이 힘을 빌려줬다. 왕과 상인, 두 계층의 이익이 서로 맞아떨어진 셈이다.
결국 독점을 옹호한다거나 무역에 대해 높은 관세를 매기는 등 상인들의 이익을 보호하는 정책을 왕은 발표했다. 그 대가로 상인들이 왕에게 많은 세금을 낸 것은 물론이다. 결국 상인들의 부를 증대시켜 국가의, 즉 왕의 부도 증대시킨다는 상호의존 관계가 성립됐다.
중상주의와 중농주의
이러한 당시의 경제 상황을 지지했던 사상을 현대에는 싸잡아 중상주의(mercantilism)라고 부른다. 사실 당시 중상주의라는 말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애덤 스미스가 루이 14세(1638~1715)의 재상이었던 콜베르(1619~1683)의 경제 정책을 비판하면서 사용한 ‘the commercial or mercantlie system’이라는 말에서 ‘중상주의’라는 말이 유래됐다는 게 정설이다.
대체적으로 중상주의는 국내 산업의 보호와 금‧은의 획득을 위한 높은 관세를 경제활동의 주된 목적으로 한다. 결국 상인들에게 최대한의 이권을 보장해 주는 사상에 다름 아니다.
흔히들 절대왕정의 가장 대표적 상징으로 꼽히는 루이 14세 역시 강력한 중상주의 정책을 펼치며 상인층의 절대적 지지를 받은 인물이다.
이후 2세기 반 동안 유럽을 호령했던 중상주의도 서서히 몰락의 길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중상주의가 한계를 보이기 시작한 가장 큰 이유는 왕가의 재정에 서서히 부담이 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자연히 일반 백성들에 대한 핍박과 착취가 더욱 늘어났다.
이런 배경에서 중농주의가 18세기 중후반 유럽을 풍미하기 시작했다. 기존의 경제사상으로는 더 이상 사회가 유지되지 않는다는 위기감의 표현이었다.
중농주의자들은 모든 가치가 결국은 농업에서 나온다고 생각했다. 당시 파멸적 상태에 이르렀던 농업에 대한 일종의 구제책이자 나름의 존경이었던 셈이다.
중심 인물은 프랑스의 케네(1694~1774)라는 사람이다. 이들의 주장은 역사상 최초로 경제 현상을 분석한 이론이라고 알려진 ‘경제표(tableau économique)’라는 것에서 알 수 있다(당시 이를 완벽하게 이해한 사람은 그뿐이었다는 여담이 있다).
한 나라의 3계급, 농민과 장인, 소유자들의 재화와 용역 순환 과정을 지그재그로 표현한 것이다. 중농주의자들의 이론은 결국은 너무 현학적이고 지적 허영, 자기 과시적인 측면이 있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주장 상당 부분이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에게 영향을 준 것도 사실이다. 이들은 이런 주장에 근거해 규제 철폐와 정당한 세금 부여 등을 촉구했다.
계몽의 시대
이 당시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던 정치사상은 바로 계몽주의였다. ‘자연의 빛을 다방면에 미치도록 하는 것으로 구습을 타파하자’는 계몽적 사상이 유럽인들에게 널리 인기를 얻고 있었다.
계몽주의자들로는 몽테스키외(1689~1755), 볼테르(1694~1778), 루소(1712~1778) 등이 있다. 계몽주의는 필연적으로 인간 각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강조하게 된다. 자유라는 개념이 드디어 등장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회계약설도 나온다. ‘이성에 의한 합리적 계약’(루소)이든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홉스)이든 결국 왕이라는 권력이 신이 내려 주신 게 아니라 모두의 동의에서 생긴 것이라는 생각은 당시로서는 혁명적이기 이를 데 없는 사상이었다.
볼테르가 1734년 발간한 후 ‘구체제(앙시앵 레짐)에 던져진 최초의 폭탄’이라고 평가받는 책 『철학 서간』을 프랑스 정부가 금서로 지정한 이유도 이런 배경에서다. 애덤 스미스가 평생을 두고 사귀었던 친구 데이비드 흄(1711~1776)의 『인성론』이 교회의 대학에서 금서로 꼽힌 것도 마찬가지 맥락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많은 왕들의 행태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금과 은을 축적하는 데에만 집중했고 과거의 영광에 몰두해 살았다. 자연히 민중들의 삶은 척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왕이 없는 나라 미국의 탄생
1765년 영국은 식민지였던 미국에 인지조례를 내라고 알려 왔다. 인지조례란 영국 본토 내의 신문, 카드, 공문서 등 각종 법률 문서에 부과해 오던 세금이었는데 이를 영국이 일방적으로 미국으로까지 확대한다고 ‘통보’한 것이다. 이때 등장한 유명한 구호가 ‘대표 없이 세금 없다’이다.
결국 1773년 보스턴 차 사건으로 미국의 독립운동이 심화되기 시작했고 1776년 7월 4일 제3차 대륙회의에서 미국은 독립을 선언한다. 미국의 독립이 당시 유럽에 끼친 충격은 상당한 것이었다.
당시 영국에서조차 미국 독립에 대한 반응은 천차만별이었다. 물론 대부분은 미국 독립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자국의 식민지가 없어진다는데 좋아할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에드먼드 버크나 애덤 스미스 등 일부 지식인들은 비난을 무릅쓰고 미국 독립을 지지했다. 그것이 ‘더 옳기 때문’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2 이기심은 어떻게 모두의 이익이 되나 - 애덤 스미스
“우리가 저녁 식사를 기대할 수 있는 건 정육점 주인이나 양조장 주인, 빵집 주인의 자비심 덕분이 아니라, 그들이 이기심*, 즉 돈벌이에 더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 애덤 스미스, 『국부론』
* 애덤 스미스가 사용한 용어는 ‘이기심(selfishness)’이 아니라 ‘자기이익(self-interest)’이었다.
이기심은 인간의 본성
역사에 남은 모든 훌륭한 사상가들이 그렇듯, 애덤 스미스(Adam Smith, 1723~1790) 역시 인간의 경제활동에 관한 자신의 논리를 펼치기 위해 철저한 기초 작업을 했다. 바로 인간 본성의 정립이었다. 이는 훌륭한 선택이었다.
스미스가 전제한 인간 본성의 기본은 다음 두 가지이다. 첫째, 모든 인간은 잘살기를 원한다. 둘째, 모든 인간은 교환의 습성을 갖는다. 이 두 전제를 결합하여 생각해 보면 다음과 같다. “잘살기를 원하는 인간들은 교환이라는 행동을 통해 목적을 이루어 간다.”
『도덕감정론』에서 애덤 스미스는 이 두 가지 본성이 어떻게 인간의 도덕적 행동을 유발하고 사회가 유지되는지 분석했다. 그리고 『국부론』에 이르러서야 가치의 발생과 그 흐름을 추적하는 것이다.
애초 애덤 스미스는 『도덕감정론』에서부터, 인간이라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수밖에 없지만 마땅히 그 이익은 다른 사람과의 공존을 통해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환과 분업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을 발표한 것은 1776년 3월이다. 루이 15세가 죽은 지 약 2년이 지나서였고 미국 독립선언 4개월 전이었다. 중농주의 시대는 『국부론』의 등장과 함께 종말을 고했다.
“책이 잘 팔리지 않을 것”이라는 흄의 안타까움 섞인 우려에도 불구하고 『국부론』은 날개 달린 듯 팔려나갔고 유럽 국가들의 지대한 관심을 받았다.
주목해야 할 바는 『국부론』의 원제가 "An Inquiry into the Nature and Causes of the Wealth of Nations"라는 점이다. 즉, 애덤 스미스는 한 국가(nation)의 부를 탐구한 것이 아니라 국가들 공동(nations)의 부를 탐구했다.
그 이유는 스미스가 결국 부가 발생하는 기본 원인을 ‘교환’으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착취하면서 부를 얻는 것이 아닌, 두 나라가 상호 교류하면서 같이 발전하는 것. 이것이 『국부론』이 지향하는 세계일 것이다.
교환행위를 통해 가치도 발생한다. 유럽과 동방 세계와의 교역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당시 상인들은 무역을 통해 상당한 이윤을 쌓았다고 했다. 이도 역시 교환을 통해 가치가 생긴다는 말의 직접적 예가 될 것이다.
가치와 가격은 다른 말이다. 예를 들어 물이 없으면 우리는 살 수가 없다. 가치가 높을 수밖에 없다. 반면에 가격은 ‘현실적으로 발견된 경험적 척도’라고 하자. 우리가 그 물건을 얻기 위해 지불할 용의가 있는 화폐의 양이다.
애덤 스미스가 말한 대로 교환행위야말로 인류의 가장 기본적 습성 중 하나라 할 만 하다. 이런 이유로 스미스는 개개인들의 자유로운 교환행위를 보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역은 자유로워야
국가와 국가 간에도 이러한 교환의 원칙이 적용된다. 다만 무조건 자유무역을 도입하면 부작용도 있을 수 있다. 국내 산업 기반이 충실하지 못한 상황에서 무조건 시장을 해외에 열어 버리면 경쟁력에서 애초에 밀려 버릴 수가 있는 것이다.
18~19세기 영국이나 프랑스, 미국 모두 다 마찬가지였다. 애덤 스미스도 산업발전 초창기 국가들이 보호무역을 채택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정했다. 다만 장기적으로 보호무역이 계속되는 것에 대해서 우려를 표현했다.
장기적으로 관세에 익숙해진 국가, 보호에 익숙해진 기업은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없다. 모든 국가의 모든 시장이 다 개방된 자유로운 시장 경제 체제, 이것이 애덤 스미스가 궁극적으로 바란 세계일 것이다.
결국 애덤 스미스는 국가의 역할을 굉장히 작게 볼 수밖에 없다. 『국부론』에서 그가 필요하다고 인정한 국가의 역할은 국방, 법치, 공공시설 관리, 군주의 존엄 유지 네 가지에 불과하다. 야경국가다.
분업의 마술
또한 애덤 스미스는 분업이라는 작업 방식을 설명하면서, 『국부론』에서 핀 공장을 예로 들었다. 핀을 혼자서 만드는 노동자는 아무리 노력해도 하루에 20개 정도 만드는 정도인데, 열 사람이 각각의 역할을 맡아 나누어 진행하면 한 사람이 평균 하루에 4,800개나 되는 핀을 생산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추구하는 자기이익에 대한 성찰로 흔히 얘기되는 위 표제의 말에는 나아가 분업 행위에 대한 성찰도 담겨 있다. 각자가 각자의 일을 하는 것, 이것이 결국 각자의 생존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일이 이렇게 간단해지니 그 간단한 일을 정확하게 해내는 기계를 발명할 필요도 생긴다. 증기기관으로 촉발된 산업혁명은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태동했는데 『국부론』의 발간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애덤 스미스는 단순한 작업만 계속 하게 되는 분업 환경에서는 인간의 정신에 악영향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그가 생각한 대안은 ‘공교육’이었다. 그는 노동자들에게 교육을 제공해서 삶을 풍요롭게 즐길 수 있게 하고 새로운 일자리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왜 다시 스미스인가
최근 애덤 스미스가 다시 주목받는 이유는, 국가이기주의에 빠져 관세 장벽을 높히는 등 보호무역이 팽배하고 식민지 쟁탈을 벌이던 시절이 지나고 다시 자유주의 무역의 바람이 불어 전 세계적인 번영과 풍요를 추구하는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3 부자와 빈자가 함께 윈윈하려면 - 리카도와 맬서스
혁명시대의 두 친구
18세기 후반이야말로 정치병이 온 유럽을 휩쓸고 지나간 시대일 것이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자유, 평등, 박애’를 꿈꾸며 거리로 나선 이 시절은 그만큼 낭만적 시절이기도 했겠지만 또 그만큼 이념에 취한 발광이 민중들에게 오염된 시절이기도 하다.
‘자유, 평등, 박애’라는 구호는 숭고한 이념이긴 하지만 이를 실현하는 방법론에선 다양한 논쟁이 있기 마련이다. A라는 방법을 주장하는 사람과 B라는 방법을 주장하는 사람이 서로 대립하다가 감정이 상하면 상대방을 “혁명의 이념에 거스르는 행동을 한다”고 공격하게 된다.
영국 작가 찰스 디킨스(1812~1870)는 『두 도시 이야기』에서 혁명 당시의 프랑스 상황을 묘사한다. 그 속에서는 목소리가 큰 마을 사내가 완장을 차고 권력을 휘두른다. 인민재판이 예사로 일어나 ‘여론’만으로 귀족들을 단두대에 올린다.
집단 최면에 빠진 민중들이 결국 선택한 것은 나폴레옹(1769~1821)이었다. 나폴레옹은 유럽 경제의 주도권을 영국에서 프랑스로 가져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패한 나폴레옹은 결국 1806년 대륙 봉쇄령을 내린다. 유럽으로부터 영국을 소외시키자는 의도였다.
대륙 봉쇄의 여파
그 격동의 시기에도 다행히 산업과 농경에 있어서의 기술 발전은 멈추지 않았다. 항상 식량이 부족해서 만성적 기근에 시달리던 영국에선 1750년대부터 식량의 해외 수출이 이루어졌다. 대혁명기의 프랑스에서도 농작물 생산만큼은 꾸준히 증가해 두 나라의 교역은 상당 수준 성장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발효된 대륙 봉쇄령은 영국 경제의 왜곡을 가져왔다. 영국의 농작물 가격이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끝내 몰락하고 1814년 대륙 봉쇄령이 해제되기에 이르렀다. 화수분처럼 거의 ‘돈이 샘솟는’ 시장을 독차지하고 있던 지주들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곡물 가격이 하락하기 시작했고 지주들은 이에 대해 “대책이 필요하다”고 나섰다.
로비에 당한 걸까. 영국 의회는 1815년 일명 「곡물법(Corn Law)」을 통과시켰다. 일정 가격 이하로 곡물을 수입하는 것을 금지하는 내용으로 명분은 영국 내 농업의 보호였다. 그러나 곡물 가격이 비정상적으로 높으면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임금 역시 오를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로 산업가들은 곡물법을 찬성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 1772~1823) 역시 곡물법에 격렬히 반대했다. 그러면서 리카도는 『정치경제학 및 과세의 원리』라는 책으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했다. 리카도는 이 책을 통해 경제학사에 굉장한 기여를 하게 되는데 그중 핵심이 바로 ‘비교우위론’이다.
비교우위와 종속이론
각자 ‘비교적으로’ 잘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것은 서로에게 이익이 된다. 아무리 큰 나라라고 해도 혼자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는 법이다. 하나에 최선을 다해서 그것을 다른 나라로까지 수출하고, 대신 다른 나라는 다른 분야에 최선을 다해 서로 교역하는 것. 이것이 결국은 서로 이득이라는 게 비교우위론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유다.
비교우위론이 아무리 ‘이성적으로’ 옳은 이론이라 해도 여기에 심리적 거부감을 느끼는 사람도 꽤 된다. 이런 거부감을 체계화한 가장 대표적 이론이 바로 종속이론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남아메리카 학자들이 주로 주장했는데 그들 자신의 저발전에 대한 이유 찾기였다. 이들은 당시 남아메리카 상당수 국가들이 채택하던 수출주도형 성장에 반발해 수입대체형 성장을 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그렇다면 “잘하는 것만 잘하다 보니 평생 신발이나 만들어 팔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어떨까? 한 나라가 잘하는 것은 영원히 그것에 고정되지 않는다. 국민들의 노력과 창의적 발상으로 나라는 얼마든지 새로운 산업에서 비교우위를 점할 수 있다. 이것이 경제 체제의 진화 과정이다.
식량주권 등의 문제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외국이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우리나라의 식량을 팔지 않겠다”고 갑자기 엄포를 놓을까? 그래도 문제는 없다. 중국이 쌀을 안 팔면 인도나 미국 쌀을 구입하면 된다.
결국 잘살기 위해서는,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는 노력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자유는 숭고한 것이다. 경제학의 역사는 곧 자유 발전의 역사라고 말했다. 자유롭기 위해선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흔히 그 대가를 ‘피를 흘려 싸우는 것’이라고만 생각하지만 자유를 누리기 위해 필요한 대가는 그것만은 아니다. 자유롭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노력하고 성찰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다른 사람의 자유를 충분히 존중할 줄도 알아야 한다.
미래는 과연 어두운가
자유주의자들은 대부분 낙관적인 사람들이다. 충분한 자유가 주어지면 결국 세계는 발전하고 진화해 온 인류를 풍족하게 할 것이라고 믿는다.
아무튼 리카도도 낙관적인 사람이었다. 재주가 뛰어나 스스로 큰돈을 번 사람인만큼 미래는 점점 더 발전하고 나아질 거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모든 사람과 모든 국가에 충분한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평생을 친구였지만 사사건건 리카도와 논쟁했던 맬서스는 정반대의 인물이다. 『인구론』에 잘 나온 바와 같이, 그의 미래 전망은 어둡고 불길하기 짝이 없다.
맬서스의 전망은 흔히 이렇게 설명된다.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는 데 반해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는 것이다. 이게 다는 아니다. 노동시장에 대해서도 꽤 암울한 전망이 있다.
노동자들의 임금이 올랐다고 하자. 돈이 많아진 그들은 더 많은 아이를 낳을 것이다. 그러면 결국 그 아이들이 다 자라서 취업을 할 때가 되면 인구가 너무 많아진다. 노동의 공급이 많아지는 것이다.
결국 임금은 다시 떨어질 것이다. “월급은 적어도 됩니다. 제발 일을 해서 먹고살게 해 주세요”라고 말할 사람들이 많아진다는 것이다. 이들은 아이를 별로 낳지 않을 테고 그러면 수십 년 후 노동시장에서 임금은 다시 오른다. 결국 돈이 많아도 아이를 많이 낳지는 말자는 주장이 되었다.
맬서스는 공공정책이나 국책사업 등 정부 개입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했다. 어찌 보면 케인스의 아버지뻘 되는 사람이라고 봐도 될 정도다. 실제로 케인스는 맬서스를 ‘역사에서 정당하게 평가받지 못한 인물’이라고 했다.
신(新)맬서스주의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1968년 로마클럽 보고서이다. 인구는 늘고 산업은 발달하는데 자원은 부족해지고 사람들은 고통에 처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현대의 환경주의자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제7장에서 볼 제레미 리프킨(1945~ )도 『엔트로피』에서 꽤 암울한 세계 전망을 내놓는다. ‘엔트로피 증대의 법칙’이란 이 무질서도가 계속 늘어난다는 얘기이다. 우리가 쓸 수 있는 에너지는 계속 줄어든다는 말이다. 그러니 에너지를 아끼고 살자, 이것이 리프킨이 주장하는 요지다.
4 자본주의의 저격수인가 예언자인가 - 마르크스
공상적 사회주의에서 과학적 사회주의로
20세기 인류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상가는 누굴까? 여러 이견이 있을 수 있겠지만 나는 서슴지 않고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1818~1883)를 꼽겠다. 그 이유는 다른 무엇보다도 그 사상의 영향력이 끼친 범위에 있다.
당시는 프루동(1809~1865) 등에 의한 공상적 사회주의가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다 잘살고 잘 먹었으면 좋겠다’는 식이다.
마르크스는 평생을 자본주의를 공격하며 살았지만, 그의 싸움 대상에는 공상적 사회주의자들도 있었다. 이상만으로 세상이 바뀌지는 않는다. 마르크스는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이론적, 철학적 토대를 만들고 싶어 했고 이는 결국 『공산당 선언』과 『자본론』 등으로 이어졌다.
대전제 : 착취
첫 번째로 변증법을 설명해 보자. 철학자 헤겔이 맨 처음 써먹은 변증법은 변화의 논리다. 그에 비해 연역법, 귀납법 등은 정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고정된 상태에서 어떤 명제를 끌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인류의 역사가 변증법에 의해서 발전한다고 생각했다. 헤겔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으로 본 것은 사상이나 인간의 정신과 이념이었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보기에 중요한 것은 결국 경제, 즉 먹고사는 문제다.
마르크스의 두 번째 전제가 바로 이것이다. 유물론이라고 부른다.
마르크스가 보기에 우리 인류의 초창기 경제상태는 원시 공산사회였다. 그러다 기술은 계속 발전하고 (변증법에 의해) 결국 노예제에서 농노제로, 농노제에서 자본주의로 경제구조는 변한다.
세 번째 전제는 노동가치설이다. 모든 가치가 노동에서 나온다는 입장이다. 최초로 노동가치설을 언급한 사람은 리카도라고 하지만, 사실 리카도는 이를 진지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단지 가설의 하나 정도로 인식했을 뿐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에게 노동가치설은 모든 논의의 기초가 되어 버렸다.
자본가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고 이익을 챙기는 셈이 된다. 그들은 단지 생산수단을 소유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부당한 이득을 취한다. 이것이 바로 착취다.
기술은 계속 발전하는 것이고 노동자들은 점점 거리로 내몰린다. 경제 공황이 몇 차례 찾아온다. 임금은 점점 최저생계비 수준으로 떨어진다. 심지어 경쟁에서 패배해 파산한 자본가들도 노동자 대열로 합류한다. 빈부격차는 점점 심해지고, 자본가들은 그 수는 줄어들지만 더욱 거대한 부를 차지하게 되고, 노동자들은 그 수는 늘어나지만 생계는 피폐하기 이를 데 없다.
결국 극소수의 자본가들과 대다수의 노동자 계급만 남을 것이다. 극소수의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법도 자기 마음대로 바꾸고 사회제도도 마음껏 주무른다.
그러다가 노동자들은 피폐함을 견디지 못하게 되고 결국 혁명을 일으킨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다. 자본가들에게서 생산수단을 빼앗아 부를 함께 나누고 드디어 평등사회를 이룩한다. 이제 모두가 풍요로운 사회다.
세상에 모순이 있는 걸 몸으로 느끼는 노동자들과 그 모순을 머리로 아는 지식인들이 직접 나서지 않고는 그 모순을 박살 낼 수 없다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입으로만 떠드는 지식인들을 ‘룸펜’이라고 경멸했다.
마르크스의 관점에서 자본주의는 공산사회로 나아가기 위해 필수적으로 거쳐야 하는 단계였다. 게다가 그는 자본주의 하에서 생산력이 굉장히 발전하고 전 국민적으로도 사는 형편이 나아졌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지만 실천을 중요시하는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이상을 실현시키기를 원했다.
제국주의
‘제국주의(imperialism)’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870년 6월 8일이다. 영국의 <데일리 뉴스>라는 신문에서 나폴레옹 3세의 몰락을 보도하면서 이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비운의 여성 혁명가 로자 룩셈부르크(1871~1919)는 『자본축적론』을 통해 제국주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서구는 18세기 후반부터 산업혁명 등으로 자본주의가 절정에 달했지만 성장의 한계에 도달했다. 그러니 자본은 새로운 팽창 지점을 찾아 돌아다니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비자본주의 지역으로의 침투라는 것이다.”
당시에도 이런 논리에 대한 반박 논리도 있었다. 오스트리아학파의 대부격인 조지프 슘페터가 대표적이다. 그는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산물이 전혀 아니라고 주장했다. 오히려 근대사회에 남아 있는 과거의 봉건적 요소의 악영향이 제국주의라는 것이다.
이 당시의 경제 정책은 주로 보호무역주의에 기초한 것이었다. 본국과 식민지가 똘똘 뭉친 경제 벨트 사이의 거래는 그럭저럭 문제가 없었지만 타국은 그 벨트 안에 접근할 수조차 없었다.
자본가들 사이에 경쟁이 일어나 많은 자본가들이 노동자로 전락하고 분배가 점점 악화된다고 보았다. 자본가들의 경쟁이 심해지고 기술이 발달할수록 상품의 생산량은 점점 많아지지만 그들이 상품의 판매에서 얻는 이윤율은 점점 떨어진다. 모든 가치는 오직 노동에서만 나오는데 기술이 발달할수록 기계가 노동을 대체하는 비중이 점점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가들은 전쟁을 획책한다. 전쟁이야말로 모든 물자가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소비되는 시기이다.
전쟁이 마무리되면 패전국은 승전국의 식민지나 다름없게 되고, 승전국의 자본가들은 패전국 자본가들의 몫을 야금야금 빼앗아 간다. 이런 식으로 세계에 존재하는 자본가들의 수는 지속적으로 감소한다. 이 말은 즉, 노동자들의 비중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결국 자본가들의 비중은 극도로 작아지고 노동자들의 비중은 극단적으로 커지게 된다. 세계는 빈부격차 불균형의 끝으로 간다.
5 과학이 경제학을 춤추게 하다 - 마셜
위대한 경제학자 앨프리드 마셜(Alfred Marshall, 1842~1924)의 방법론도 역시 마찬가지로 엄밀한 과학적 사색의 과정을 거쳤다.
오히려 마셜은 그 이전 경제학계를 지배하던 ‘수리경제학’ 풍토를 경멸했다. “일반인에게 설명할 수 없는 경제이론을 도대체 어디에 써먹겠느냐?”는 정도의 마음가짐이다.
경제학계에서 최초로 장기와 단기의 구분을 시도한 것도 바로 앨프리드 마셜이다. 그만큼 그는 시간의 흐름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첫술이 가장 배부르다 - 한계효용 체감의 법칙
마샬은 최초로 '수요법칙'을 발표하였다. 수요법칙을 이끌어 낸 중요한 도구 중 하나가 바로 '한계'이론이다. 경제학에서 '한계'란 '최후의 증가량'을 말한다. '경제학에서 '효용'은 '소비행위를 통해 얻는 즐거움'을 말한다. '한계효용'이란 소비를 할 때마다 추가로 얻는 즐거움, 즉 미분 개념을 도입한 것이다.
욕망은 무한하다 - 한계이론
한계이론은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양한 영감을 줬다. 수요 행태뿐 아니라 공급 측면에도 여러 이론이 있다. ‘한계수확 체감의 법칙’ ‘한계비용 체증의 법칙’ 등에서 만들어지는 공급곡선은 우상향한다. 즉, ‘가격이 오르면 재화의 공급이 더 늘어난다’는 것이다.
한계이론을 생각하면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 ‘역동성’이다. 한계이론은 앞서 잠시 말했듯 경제 주체의 움직임을 설명하기에 아주 적합한 개념이다. 단지 어떤 고정된 상태 그것만을 염두에 두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소비자 혹은 공급자는 유연하게 자신의 소비 혹은 공급 행태를 한 단위 한 단위 고려해서 결정한다. 가격 변동에 유연하게 반응하기도 하고, 소비량 혹은 생산량을 늘렸다가 다시 줄이기도 한다. 마셜이 상정한 ‘경제 체제의 진화’에 딱 맞는 이론이 아닐 수 없다.
왜 마셜인가
<죽은 경제학자의 살아있는 아이디어>로 유명한 하버드대 경제학자 토드 부크홀츠는 마셜의 경제학에 미친 영향력의 원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첫째, 가장 명확하고 포괄적으로 한계 분석을 경제학에 도입했다. 둘째, 오늘날 미시경제학을 지배하고 있는 한계 전통이라는 것을 수립했다. 셋째, 존 메이너드 케인스, 후생경제하자 아서 세실 피구, 여성 경제학자 조앤 로빈슨을 포함해 20세기의 저명한 경제학자들을 다수 가르쳤다. 넷째, 그의 인생은 앞서 살펴본 존 스튜어트 밀과 완전히 정반대였는데, 그는 당대의 지적 동향뿐만 아니라 한계주의 정신을 가장 잘 대변하는 인물이다."
마셜은 한계이론 외에 '탄력성'이라는 개념도 도입했다. 여기에는 '대체재와 보완재'의 개념이 적용된다. 탄력성의 분석은 경제 주체들에게 중요하다.
수요곡선이 아래로 불룩한 것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높은 가격대에선 비탄력적이고(기울기가 크고) 낮은 가격대에선 탄력적이 되는(기울기가 낮은) 보통 재화의 수요곡선은 자연스럽게 원점을 향해 불룩해진다.
모든 수요곡선이 다 그렇게 생긴 것은 아니다. 상품에 따라 예외가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들이 바로 명품들이다. 일단 명품이라고 입소문이 나면 비살수록 더 잘 팔리는 경향이 있다.
한 백화점에서 5만 원에 팔던 속옷이 하도 안 팔려서, 기존 태그를 다 떼어 내고 새로 50만 원 가격표가 붙은 태그를 붙였더니 날개 돋친 듯 팔렸다는 풍문이 있다. 이를 경제학에선 ‘베블런 효과’라고 부른다.
제도경제학파의 창시자 소스타인 베블런(1857~1929)이 1899년 발표한 저서 『유한계급론』에서 최초로 이런 특이한 사례를 언급했다. 불합리한 소비 행태의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다.
마셜이 특유의 엄밀함과 정교함으로 다져 놓은 중요한 개념들은 경제학의 거대한 기초를 이루고 있다. 그런 면에서 마셜이야말로 현재 경제학이 우리 주위에서 춤추게 한 원조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6 정부의 역할은 어디까지 - 케인스
앨프리드 마셜 이후 최고의 ‘스타’ 경제학자는 누굴까? 이 질문에는 모범답안이 준비되어 있다. 거의 반박할 여지도 없다. 바로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1883~1946)이다. 케인스가 불러일으킨 경제학의 패러다임 변화는 그야말로 혁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1차 세계 대전 이후 미국만 호황이었으니 미국의 성장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토지와 주식 투기가 엄청나게 늘었다. 포드 자동차나 라디오 등 수많은 새로운 제품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새로운 사업에 투자만 하면 배당이 엄청났다. 불로소득이 많아진 것이다.
미국 내의 자본이 해외로 뻗어 나가질 않고 미국 내에서만 돌기 시작했다. 경기가 과열되는 것이다. 부동산 가격이 치솟고 (개츠비 같은) 벼락부자들이 늘어났다.
당시 미국 연방준비위원회(FRB)는 미국 사회의 뿌리가 흔들릴까 걱정됐다. 그래서 이자율을 올리기로 결정했다. 2퍼센트대였던 이자율이 순식간에 6퍼센트로 치솟았다. 높아진 미국의 이자율 때문에 유럽의 자금이 갑자기 미국으로 유입되기 시작했다.
결국 오스트리아와 독일 등의 여러 은행들이 급격한 예금 인출로 인해 파산을 겪게 되었다. 그나마 프랑스는 괜찮은 편이었지만 영국엔 외환위기가 찾아왔다. 이러한 위기는 곧 유럽 사람들의 구매력 하락으로 이어졌다.
특히 미국의 농업시장에 심각한 과잉공급 현상이 나타났다. 전쟁으로 낮아졌던 유럽의 농업 생산량이 서서히 회복되면서, 그럭저럭 유지되던 농산물 가격이 급속히 떨어졌다. 전 세계적으로도 마찬가지여서 거의 모든 국가에서 금융 및 소비가 위축되고 재고가 누적되는 형편이었다. 재앙이 다가오고 있었다
1929년 10월 24일 ‘검은 목요일’ 하루 동안 1,290만 주의 주식이 거래되었다. 주가가 폭락했고 11명의 주식투자자가 자살했다. 그러나 1929년 당시 부의 감소효과는 10퍼센트 미만에 불과했다. 즉, 검은 목요일은 꽤 큰 위기이긴 했지만 세계 전체를 혼란에 빠뜨릴 정도는 아니었다.
1930년 6월 17일이었다. 리드 스무트(Reed Smoot) 상원의원과 윌리스 홀리(Willis C. Hawley) 하원의원에 의해 ‘스무트 홀리법(Smoot-Hawley Tariff Bill)’이 추진됐다. 주된 내용은 수입 품목에 대한 관세 인상이었다.
당시 다우지수는 꽤 회복된 형편이었고 개인 소비와 기업 투자도 어느 정도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실제로 후버는 1930년 5월에 “공황은 끝났다”고 선언했다.
스무트 홀리법이 발효돼 철강 등 2만 개 품목의 관세가 100~400퍼센트 급등했다. 다른 나라라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 33개 나라가 미국에 공식 항의를 했다. 자유무역이 급격히 위축되었다. 세계시장에 블록이 생겨났다.
불과 1년 만에 미국의 해외 수출이 1929년(52억 4,100만 달러)보다 30퍼센트 이상 감소해 버렸다. 기업의 실적이 눈에 띄게 나빠졌으며 이 기업들에 돈을 꿔주었던 은행 대출도 급속히 부실화됐다.
뉴딜 정책을 가장 강력하게 이론적으로 지원한 게 바로 케인스이다. 그의 가장 유명한 책은 1936년에 발표한 『고용, 이자 및 화폐의 일반이론』이지만 실상 1923년 『화폐론』과 1930년 『화폐개혁론』에 이미 그의 사상이 대부분 정립되었다고 보는 게 맞다.
케인스는 경기 침체의 원인을 유효수요 부족에서 찾았다. 유효수요란 실제로 벌어지는 수요를 말한다. 왜 만들면 팔린다는 세이의 법칙이 틀린 것일까? 케인스에 따르면 그것은 저축 때문이었다.
상당수 사람들은 일정 정도 저축을 하거나 돈을 묻어둔다. 이는 곧 소비의 유보를 뜻한다. 전체적으로 소비될 것이라 기대됐던 양보다 더 적은 돈이 시장에 풀리는 것이다. 이렇게 실제로 시장에 풀리는 돈의 총량이 곧 유효수요이다. 결국 이 차이가 재고 과잉으로 이어지고 공황으로 귀결된다고 보았다.
여기서 케인스는 “소비가 미덕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하게 된다. 하지만 소비가 미덕이라고 아무리 말해도 대부분 사람들은 어느 정도 저축을 하거나 하면서 소비를 유예한다. 이 지점에서 정부의 개입이 필요해진다고 케인스는 보았다.
케인스에 따르면 뉴딜 정책은 유효수요를 국가가 나서서 창출하는 과정이다. 이 돈은 국채를 발행하는 식의 재정정책을 통해확보한 다음 이 돈으로 커다란 공공사업을 한다거나 시중에 수요를 강제로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케인스의 대공황 해법이었다.
케인스는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죽는다"고 말했다. 이 말은 곧, 고전경제학이 추구하는 장기적 전망은 보통 사람들에겐 너무 먼 나라 일이라는 얘기이다.
케인지언들은 보통 다음의 두 명제를 따른다. 첫째, 민간경제는 완전고용에 도달하지 못할 수 있다. 둘째, 정부 지출은 완전고용과 불완전고용 사이의 간극을 메꿀 수 있다. 여기에 대해 자유주의(혹은 그 흐름이라고 볼 수 있는 통화주의, 합리적 기대 가설, 항상소득 가설)는 계속 반박을 멈추지 않고 있다.
케인스 경제학의 가장 큰 공로는 무엇보다 미국, 유럽 사회에 공산주의가 유행하는 것을 막았다는 점이다. 당시에는 소련의 시스템을 동경하며 경제를 그냥 시장에 맡기는 것보다 국가 주도로 풀어 가는 게 맞지 않겠냐는 의구심이 서양 사회에 꽤 퍼져 있었다.
1930년대는 소련이 탄생한 지 10여년이 지났을 때이고 소련에 대한 환상이 아직 많을 때였다. 심지어 1950년대까지도 장폴 사르트르 등 소련에 대해 헛된 낭만을 품었던 유럽의 철학자들과 간첩들 때문에 소련으로 망명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대공황을 지켜보며 미국식 자본주의에 대한 의구심을 가질 법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케인스의 방법론은 자본주의가 스스로를 지키는 데 꽤 적절한 해법이었다. 미국이나 유럽의 정부들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1950년대 이후 케인스 경제학을 실제로 여기저기 적용해서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7 기업은 어디까지 혁신시키나 - 슘페터, 커즈너, 리프킨
창조적 파괴와 혁식
본 대학교 교수를 거쳐 하버드 대학교 교수를 지낸 조지프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 1883~1950)는 진화경제학의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받는 경제학자다.
슘페터의 가장 유명한 저서는 1942년에 발표한 『자본주의, 사회주의, 민주주의』인데 이 중 민주주의에 대한 연구는 당시로서는 굉장히 독보적이고 선구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슘페터는 자본주의의 강력한 능동성을 강하게 확신하면서도 정치인들의 무책임한 선동성 공약 등으로 인해 “결국 자본주의는 무너지고 사회주의가 도래할 것이다”라고 예측했다.
하지만 현대에 슘페터를 가장 유명하게 한 것은 시대를 앞서갔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위대한 발견 때문이다. 바로 ‘기업가 정신’이다.
일단 시장에 균형이 맞춰져 있다고 해 보자. 이 상황에서는 새로운 기술이 개발될 일이 없다. 균형 상태에서 공급자도 일정 정도 이득이 있고 소비자도 일정 정도 이득을 본다. 이른바 ‘생산자 잉여’와 ‘소비자 잉여’이다.
여기에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 바로 기업가이다. 열린 마음과 리더십, 통찰력 등을 가진 기업가는 혁신(innovation)을 통해 새로운 이윤을 찾아낸다. 기업가는 이러한 혁신을 통해 이윤을 얻는다. 자본주의의 가장 중요한 성장 동력은 바로 기업가들이다.
슘페터가 강조한 기업가 정신은 자본주의 체제에 내재하는 혁신의 요인이다. 즉, 경제발전의 동력이 체제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체제 자체에 내재한다는 것이다.
창조적 파괴의 과정은 다음 세 단계를 따른다. 발명을 위한 연구, 혁신을 위한 개발, 상품화의 세 단계이다. 뒤의 단계로 갈수록 더 많은 비용이 든다는 것이 슘페터의 분석이다. 따라서 아무리 뛰어난 발명을 했더라도, 아무리 뛰어난 혁신이 가능하다 하더라도 ‘상품화’를 시작할 만한 자본이 없으면 창조적 파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불황에 대한 슘페터의 분석도 무척 아름답다. 일단 한 시장에 혁신이 이루어지고 (특허권 만료 등의) 일정 시간이 지나면 많은 다른 기업들이 몰려들 것이다. 그러면 지나친 경쟁이 벌어지고 가격이 떨어져 이윤도 적어진다. 불황이 찾아오는 것이다. 한번 불황이 닥치면 내실이 없는 기업들은 저절로 정리될 것이다. 결국 불황은 시장에 방만하게 쌓인 자원 낭비가 스스로 해소되는 과정이다.
커즈너 "불균형이 정상이다"
슘페터 이후 기업가 정신은 한동안 잊혔다가 1970년대에 들어 다시 되살아났다. 1973년에 『경쟁과 기업가 정신』을 쓴 이즈리얼 커즈너(Israel Kirzner, 1930~ )에 의해서였다.
커즈너가 기업가 정신을 경제학에 도입한 계기도 슘페터와 비슷하다. 시장 균형 분석 이론이 너무 이상적이고, 기업가들의 기여를 고려하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 인식이다.
슘페터는 시장에 균형이 '실재'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기업가가 창조적 파괴를 통해 기존의 균형을 해소하고 새로운 시장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커즈너(를 비롯한 오스트리아학파, 진화경제학자)는 시장에 균형 따위는 있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균형은 사실 아주 이상적 상황이다. 유토피아와 같다는 말이다.
여기서 기업가의 기민함이 발휘된다. 커즈너 이론에서 자동차의 등장은 슘페터 이론이 말하듯 균형 상태에 있는 마차 시장을 파괴하고 새로운 창조를 불러온 그런게 아니다. 그보다는 기존 시장은 마차 시장에 심각한 자원 집중이 이뤄지는 불균형 상태였고, 이는 오직 기업가들만이 발견할 수 있는 불균형이었으며, 기업가들은 이를 해소하고 이윤을 얻기 위해 자동차라는 혁신적인 상품을 시장에 내놓은 셈이다.
리프킨의 협력적 공유사회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 1945~ )은 꽤 다작을 하는 학자이다. 그중 한국에 번역이 된 것만도 『엔트로피』를 비롯해 『노동의 종말』 『소유의 종말』 『육식의 종말』 『한계비용 제로 사회』 『3차 산업혁명』 『공감의 시대』 『유러피언 드림』 『수소혁명』 『바이오테크 시대』 등으로 꽤 많다.
리프킨의 주된 작업은 자본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고 새로운 '협력적 공유사회'를 만들어 가자는 주장을 하는 데 있다.
그에 따르면 자본주의 하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던 과거의 산물들은 사회가 고도화될수록 점차 사라져 간다. 전자동으로 물건들이 생산되기 때문에 우리 인간들이 힘들게 노동을 할 일이 없다. 이게 가능하려면 일단 자원이 무제한으로 공급되어야 한다.
던칸 존스 감독의 2008년도 영화 <더 문>이 이런 세계에서의 삶에 대해 묘사하고 있다. 달에서 캐 오는 거의 무제한의 자원으로 인류는 궁극의 풍요를 경험하는 상태에 있다. 리프킨이 꿈꾸는 미래에 기계가 대신할 수 없는 인간 영역에서의 노동은 명예로운 일로 대덥받는 일이 될 것이다.
리프킨은 사유재산 제도 자체가 점점 무의미해질 것이라고 주장한다. 마르크스처럼 "자본주의를 혁명과 폭력으로 뒤엎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설득력을 완전히 잃는다.
8 문제는 자유야, 바보야 | 미제스, 하이에크, 프리드먼
집단주의 대 자유주의
르네상스 이후 인류의 지성사는 줄곧 개인의 자유를 더욱 존중하는 쪽으로 발전해 왔다. 그런데 전체주의나 공산주의는 개인보다 ‘전체’와 ‘계급’을 강조하는 사상이니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반동’일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이 진짜 옹호하는 것은 대기업이나 자본이 아니다. 그들이 옹호하는 것은 자유로운 시장에서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교환할 수 있는 권리이다. 이를 위해서 결국 중요한 것은 개인의 자기이익이 보장되는 사유재산 제도의 존재이다.
자유주의자들이 애타게 외치는 것은 사회적 준칙을 모두가 준수하는 가운데 모두가 각자의 영역을 존중하는 사회이다. 만약 기업이 사회적 준칙을 어긴다면 이 역시 엄정한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미제스 “질투는 나의 힘”
자유주의자들에게 투표를 시켜서 가장 위대한 자유주의자 한 명을 꼽으라면 루트비히 폰 미제스(Ludwig von Mises, 1881~1973)가 가장 많이 꼽힌다고 한다.
우선 미제스의 불평등 이론부터 보자. 미제스에게 있어 불평등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어쩔 수 없이 모두에게 주어지는 차이이기 때문이다.
미제스에 따르면 이런 차이들이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경제성장의 원동력을 제공한다. 바로 분업의 가능성이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능력과 똑같은 처지에 있다면 분업의 가능성이 사라질 것이다.
미제스가 남겨준 것이 불평등에 대한 마음가짐만은 물론 아니다. 놀라운 점은 그 생각 방식의 일관성이다. ‘사람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많은 규제와 억압에 대해 공격해 나간다. 심지어 그는 사회의 발전을 저해할지도 모르는 파괴적 가르침이나 의견까지도 자유주의자들은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이에크와 시장의 자생적 질서
프리드리히 하이에크(Friedrich Hayek, 1899~1992)도 그의 스승 미제스처럼 일찍부터 자유주의 사상가로서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다. 하이에크는 대공황에 대해 케인스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었다. 1931년 런던 정경대가 그를 교수로 초빙해 케인스의 개입주의 물결을 막아 보고자 노력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케인스의 승리처럼 보였다. 온 세계 경제학계는 케인스의 정책 처방에 따라 재정 정책을 시행했고, 그것이 효과가 있다고 확신했다.
1974년이 되어서야 하이에크가 노벨상을 받음으로써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했다. 시대가 하이에크를 다시 선택한 이유는 케인스 경제학의 처방이 슬슬 한계에 부딪혔기 때문이었다. 스태그플레이션이 전 세계를 뒤덮은 것이다.
스태그플레이션의 원인은 단순한 총수요-총공급 선상의 문제가 아니다. 바로 원가 상승(이 당시 불어닥친 세계적인 석유 파동이 원가 상승의 큰 원인이다)이나 임금 상승(이 당시 영국의 강성 노조는 아주 유명하다), 정치 계산에 따른 정책 집행 등이 원인이다.
이런 시기에 유효수요를 늘린답시고 공공지출을 늘리거나 하면 어떻게 될까? 오히려 원가 상승 요인이 심해져서 경기 침체가 심해질 것이다. 이런 경우 정부는 가만히 있는 것이 낫다.
하이에크는 우리의 윤리와 도덕이 결코 이성의 산물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만들어 온 우리의 윤리와 도덕은 결국 긴 시간 인류가 생존해오면서 쌓은 경험의 산물, 진화의 결과물이다.
하이에크의 말대로 ‘본능과 이성 사이’에 존재하는 자생적 질서가 도덕만은 아니다. 시장경제 체제나 언어나 각종 관습이다. 자생적 질서로 생겨난 산물들이다.
하이에크에게 윤리와 도덕은 두 가지 층으로 구별된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도덕은 소규모 공동체 시절부터 다 함께 만들어 온 규범이다. 하지만 현대로 이를수록 우리는 그런 소규모 공동체보다는 ‘익명성의 사회’에서 살아가야 한다. 이런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우리에게 필요한 도덕규범의 내용이 전혀 달라진다.
이런 곳에서는 ‘익명성의 도덕’이 필요한 것이며 그것은 곧 법과 제도를 잘 준수하면서 자기이익을 최대한 지켜 가는 것이 된다. 잘 발전된 익명성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기이익을 추구한다는 것은 곧 교환행위를 통해 남에게도 좋은 것을 제공해야 한다는 뜻으로, 교환행위는 곧 남을 해치지 않는 올바른 도덕행위가 된다.
이런 것에 대해선 미처 생각해 보지도 않은 누군가가 “이렇게 하면 좀 더 좋은 세상이 올 거야”라고 착각하면서 세상에 이런저런 필요 없는 정책을 강요하는 일은 ‘치명적 자만’이 되고 만다.
대처리즘과 레이거노믹스의 설계자 프리드먼
대처와 레이건 정책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했다고 흔히 언급되는 경제학자가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Milton Friedman, 1912~2006)이다. 특히 프리드먼의 가장 큰 업적은 화폐이론이라고 얘기된다.
프리드먼은 “화폐가 고용과 성장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전제하고 논의를 시작한다. 화폐수량설이다. 화폐의 유통 속도가 일정하다는 가정에 기초한 논의이다. 반면 케인스에게 화폐수량설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프리드먼은 케인스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프리드먼은 흔히 통화주의자로 분류된다. 통화주의자와 통화이론은 아주 다른 이론이다. 통화주의자들은 고전적 통화이론을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통화이론은 경기에 따라 통화량을 늘렸다 줄였다 하는 것을 중시하지만 통화주의자들은 이런 정책은 단기적으론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로는 물가만 올려놓을 뿐이라고 지적한다.
프리드먼에게 있어 소비 또는 소비 행태는 정부의 정책과 아무 상관없이 안정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프리드먼은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일 뿐”이라는 유명한 인식을 하고 있다.
물가의 변화는 실질구매력에 아무 영향도 못 미친다는 인식이다. 인간은 물가 변화에 따라 소비 행태를 바꾸는 게 아니라 자신의 예정 소득에 따라 소비 행태를 바꾼다.
그에 따라 통화량 조절은 장기적으로 아무 효과도 보이지 못한다. 결국 정부는 일정한 준칙에 따라 통화량 공급을 일정하게 유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즉, 경기가 안정적이건 불안하건 간에 3~4퍼센트 정도로 통화 공급량 증가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와 IMF사태
미제스와 하이에크, 프리드먼의 사상은 결국 국가의 개입을 최소로 해야 한다는 고전경제학과 그 궤를 같이하게 된다. 간혹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에 대해 ‘신자유주의’ 사상가들이라고 하면서 경멸하는 경향이 있는데, 이런 명명도 참 기괴하다.
신자유주의란 것은 새로운 사상이 아니다. 단지 케인스 경제학 이후 고사할 뻔했던 자유주의가 다시 부활했다 해서 ‘신’이라는 글자를 붙여 준 것뿐이다. 실제 사상이나 정책적 내용은 거의 흡사하다. 아니, 그냥 같다고 봐도 된다.
자유주의자가 생각하는 복지란 ‘복지를 없애는 복지’이다. 즉, 복지 혜택을 받는 사람이 이를 기반으로 자립성을 길러서 결국 복지 혜택을 받지 않아도 스스로 살아갈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진정한 복지의 목표라는 인식이다. 그러하기에 자유주의자들은 보편적 복지보다는 선별적 복지를 추구한다.
우리나라의 1997년 IMF 사태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당시의 저환율 정책이었다. 여기에 부차적 원인으로 ‘4고(고임금, 고금리, 고지가, 고물가) 3저(저기술, 저능률, 저부가가치)’가 결합되었고 당시 김영삼 정부의 안이한 대처도 한몫 했을 것이다.
시장의 평가와 다른 고정 저환율로 인해 많은 개인이나 기업이 해외로 달려갔고 수입을 늘렸다. 수출 경쟁력은 점점 떨어져 갔다. 1996년 우리나라의 경상수지 적자가 당시 사상 최대였던 점은 당연한 일이다.
수입이 계속 늘고 수출이 계속 줄면 결국 외화가 바닥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가 가진 달러도 계속 줄어들었다. 외화도 많이 빌렸다. 쌌기 때문에. 이렇게 많이 빌린 외화를 장기 시설투자와 증권투자에 탕진했다. 돈이 묶여 버린 것이다.
자유주의는 진화한다
마르크스도 지적한 바 있지만, 빠르게 움직이는 경제 체제라는 하부구조에 비해 상부구조인 법률과 제도와 정신은 세상의 변화에 그리 유연하지 못하다. 변하려면 오래 걸린다. 그래서 균열이 생기고 마찰이 생긴다.
미제스의 말처럼, 물리학이 “영구운동이란 없다”고 증명하고 생물학이 “모든 생물은 반드시 죽는다”고 증명해 주더라도 물리학이나 생물학 그 자체에 죄가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단기적으로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해악을 최대한 사회적 합의를 통해 극복해 나가야 한다. 그렇게 결국 장기적으로 안정과 번영을 추구하도록 유도 하는 것이 경제학자들의 신성한 의무일 것이다.
9 성장의 열매를 공유하려면 - 카너먼
풍요의 시대, 호혜적 인간
미국 경제가 1984년 초부터 드디어 경기가 회복세로 돌아섰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긴 호황을 맞았다. 주가도 상승하면서 미국의 GDP는 연평균 4.2퍼센트씩 성장하기 시작했으며 물가상승률도 불과 3~5퍼센트에 불과했다.
우리나라도 이 당시 3저(저유가·저금리·저환율) 호황 덕에 빠른 경제성장을 달성할 수 있었다. 특히 반도체와 자동차, 산업용 전자 분야 등 기술집약형 산업에서의 우위를 확보하는 데 성공하면서 이들 산업이 우리나라 경제의 성장을 주도했다.
미래가 더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현재를 미래에 투자할 수 있는 사람이다. 이들에게 현재는 더 밝고 희망찬 미래를 만들기 위한 준비 기간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공동체는 소중하다. 자신의 후세를 생각해야 하니, 당연히 자신과 후세가 살아갈 공동체에 대한 마음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
경제학에도 흥미로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한다. 경제학자들도 “인간의 행동을 결정하는 게 꼭 자기이익 추구일 뿐일까?”라는 의문을 본격적으로 갖기 시작했다. 인간의 내면 깊은 속에 대해서 더욱 궁금해 하기 시작한 것이다. 흔히들 학계에서 ‘행태경제학’의 원년을 1979년으로 간주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행태경제학 - 심리학과 경제학의 만남
행태(행동)경제학을 세상에 끌어낸 대표적 학자로 대니얼 카너먼(Daniel Kahneman, 1934~ )을 꼽는다. 2002년에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그는 1934년 이스라엘의 텔아비브에서 출생한 유대인이다.
그의 개인적 에피소드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극히 적지만 그가 본래 경제학자가 아니라 심리학자라는 부분은 흥미롭다. 그는 경제학에 심리학을 제대로 접목시키고 이를 대중에 알린 (거의) 최초의 학자이다.
물론 인간의 심리는 원래부터 경제학의 영역이었다.그러나 고전경제학은 인간의 심리를 너무 ‘자기이익 추구’로만 한정한 측면이 있다. 애덤 스미스 이후에도 케인스, 하이에크, 조지 카토너, 허버트 사이먼 등이 심리학적으로 탁월한 견해를 경제학에 반영해 왔지만 주류로 편입되지 못한 측면은 여전하다.
이를테면 ‘코스의 정리’를 보자. 1991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로널드 코스(1910~2013)가 이론적으로 증명한 이 정리는 흔히 “경우에 따라서는 시장 기능이 외부효과의 비효율성을 해소할 수 있다”는 이론으로 얘기된다.
이를테면 폐수 배출권 같은 것이다. 비누공장이 강 옆에 새로 들어섰다. 이 공장에서는 필연적으로 폐수가 흘러나오게 되어 있다. 폐수를 정제하는 시설을 도입할 수도 있지만 그러면 공장주 입장에서는 도저히 수지가 맞지 않는다. 그의 입장에서는 폐수를 방류하는 게 이익이다. 이는 강 옆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치명적 피해가 될 것이다.
이런 경우 피구 등의 경제학자들이 주장한 견해는 정부가 개입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반대로 코스는 “소유권이 잘 확립되고 거래비용이 없을 때에는 당사자들끼리 합의해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즉, 폐수 배출권을 공장주와 주민들이 서로 거래하여 합리적 합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폐수 배출이 가져오는 피해의 가치에 대해 그들이 모두 합리적으로 잘 판단하고 있다는 전제에 기초한다. 즉, 코스의 정리는 인간이 백 퍼센트 자기이익을 추구하는 합리적 존재라는 가정 위에 세워진 가설이다. 많은 자유주의자들이 ‘시장의 완벽성’을 얘기할 때 흔히 거론하는 정리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일이 가능할까? 행태경제학은 이에 대해 단호히 부정한다. 왜냐하면 양측의 합리적 가격에 대한 견해 차이가 너무 크기 때문에 애초에 합리적 합의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동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고 복잡다단하기 때문에 하나의 동력(자기이익 추구)으로 모든 것을 설명한다는 것은 애초에 들어맞는 얘기가 아니라는 게 행태경제학의 기본 인식이다.
새로운 지평 - 프로스펙트 이론
행태경제학을 이해하기 위해 먼저 필요한 두 가지 개념은 바로 ‘휴리스틱’과 ‘바이오스’이다. 이를 우리말로 해석하면 ‘직감’과 ‘편향’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았지만 역사적, 문화적으로 배우는 많은 교훈들에서 영향을 받는다. 또한 인간은 합리적이기보다는 직관적인 동물일 수 있다. 바이오스란 ‘편향’을 말한다. 이를테면 홀짝 게임을 할 때 홀이 세 번 연속 나오면 다음에는 짝이 나올 것이라고 믿는 식이다.
인간이 그렇게 합리적인 존재만은 아니라는 가정 하에 카너먼이 자기 주장에 도입한 가장 핵심적 이론이 바로 ‘프로스펙트(Prospect, 전망)’ 이론이다. 이 이론은 기대효용함수의 대체 이론으로 고안된 것이다. 경제학의 효용함수에 대응하는 ‘가치함수’와 확률의 체감도에 따른 ‘확률가중함수’로 구성된다.
가치함수란 인간이 느끼는 가치가 꼭 수량에 비례하지는 않는다고 얘기한다. ‘사람은 이득을 좋아하기 보다는 손실을 더 싫어한다‘ ‘내가 가진 것을 지키고자 하는 습성‘인 ’보유효과‘로 나타난다.
확률가중함수란 인간이 느끼는 확률이 정확한 확률이 전혀 아니라고 얘기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작은 확률은 더 크게 느끼고 큰 확률은 더 작게 느낀다.
행태경제학은 이런 인식에 기초하여 인간의 경제행위를 새롭게 분석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인간은 이기적 존재야”라는 기존 경제학의 인식에도 많은 변화를 주고 있다.
많은 실험들을 통해 행태경제학은 인간이 이기적 존재이면서 동시에 호혜적 존재일 수도 있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인간은 이성적, 합리적 존재이면서도 감정을 갖고 있는 존재이고, 또 감정이라는 게 있기 때문에 오히려 불합리해 보이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이런 과정을 통해 행태경제학자들은 기존의 많은 경제학 이론들을 반박하고 있다. 이를테면 ‘합리적 기대 가설(인간은 완전히 합리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어떤 정책을 써도 결국 무용지물이라는 가설)’ 같은, 실상 그 스스로 무용지물인 가설을 논박하는 데 유용하다.
행태경제학자들은 아직 주류경제학에 제대로 편입하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이론은 기존 경제학처럼 수학으로 멋지게 증명되지도 않고 사실 일관성도 별로 없다. 너무나 ‘우발적’인 요소에 의존하는 측면이 강하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사실 생각해 보면 행태경제학의 문제 제기는 전혀 새로운 인식만은 아니다. 애초에 언급했듯이 애덤 스미스 같은 진짜 고전경제학자들이 관심을 가졌던 분야는 인간의 도덕성이기 때문이다. 결국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일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