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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질의 세계 (2)

소금(Salt) <세상을 변화시키는 마법의 물질>

by Andy강성


Part 2 소금(Salt)
<세상을 변화시키는 마법의 물질>


4장 생명의 물질

- 소금길에서 시작된 인류의 문명


영국의 볼비(Boulby), 우리는 절벽과 바다가 맞닿은 잉글랜드 동부 해안의 가장 높은 지점에서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서 있었다. 이곳에는 움푹 꺼진 지형이 많았다. 명반(alum)과 철을 채굴하던 광산의 흔적이었다. 하지만 스티브 셜록(Steve Sherlock)은 우리가 서 있는 곳, 바로 발밑에 더 관심이 많았다.

[볼비 절벽 출처 구글 이미지]

그는 들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에 철기시대 유적지가 있어요. 과거 로마식 건축물들이 있던 곳이죠. 고대인들은 여기서 도자기를 빚었고 제트(jet, 흑옥)로 보석을 만들었어요. 여기 화석화된 칠레 삼나무들이 있네요. 이건 지질학적 현상입니다.“ 그는 유령들을 보고 있었다. 정학하게 말하자면 시간을 거슬러 과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는 1979년부터 이곳을 40년 넘게 오갔다. 이 일대는 영국 고고학에서 가장 흥미진진한 현장 중 하나이다.

[볼비 지역 맵과 스티브 셜록 출처 구글 이미지]

스트리트 하우스(Street House)는 스티브의 팀이 앵글로-색슨족의 공동묘지를 발견했던 2006년 처음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묘지에서는 높은 신분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The Saxon Princess’라고 불린다)의 시신 한 구를 원형으로 둘러싼 시신들이 발견되었다.

[The Saxon Princess 안내문과 전시장 출처 구글 이미지]

땅속을 깊게 파고들수록 더 많은 것을 발견했고 더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갔다. 앵글로-색슨 공동묘지(630~670년) 아래에는 로마식 건축물(70~140년)이 있었고, 그 밑에는 철기시대 정착촌(기원전 200~기원후 1년)이, 더 아래쪽에는 신석기시대 유적지(기원전 3800~3700년)가 있었다.


다양한 시대의 유물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은 바로 소금이었다. 사람들은 로마시대와 철기시대, 그리고 신석기시대에 이미 소금을 만든 것으로 보였다. 어째서 소금일까? 왜 이곳에서 만들어졌을까?

[5,800년 전 영국 최초 소금 유적 발굴 출처 구글 이미지]

인간의 역사와 현재는 소금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이는 생물학적 특성 때문인데, 우리 몸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해마다 수 킬로그램의 소금(염화나트륨)이 필요하다. 소금은 우리 몸의 신경, 근육, 인대가 원활하게 돌아가도록 해주고 우리 몸에 생체 전류가 흐르도록 돕는다.


냉장고가 발명되기까지 소금은 식량을 보존하는 역할을 해왔다. 소금에는 박테리아를 죽이는 방부 기능이 있어 고기를 소금으로 절이면 부패를 막을 수 있다. 그래서 지상의 소금은 ‘생명의 물질’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모래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보잘것없는 물질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소금을 당연시하는 태도는 뿌리가 깊다. 모래의 경우 현대 경제에서 반도체의 중요성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다. 반면에 소금은 다들 사소하게 여긴다.


그러나 소금이 ‘생명의 물질’이라는 말은 로마시대에도 진실이었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 음식뿐만이 아니라 위생과 제약 분야에서도 핵심 물질이다. 당신의 주방 싱크대 아래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몇 가지 물품을 생각해 보자. 요리용 베이킹소다, 청결을 위한 락스, 심지어 오수를 흘려보내는 배수관까지 모두 소금에서 시작된다. 이 보잘것없는 알갱이가 여전히 화학 산업의 기초를 이루는 것이다.


대만의 첨단 실리콘 파운드리에서 서브팝의 파이프를 타고 클린룸으로 올라오는 가스와 염산도 땅에서 캐내거나 바닷물을 말려서 얻은 소금 결정에서 시작되었다. 이 물질을 무시하면 안 되는 또 다른 이유는 자본주의와 권력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이어지는 내용에서 정치, 압제, 전쟁 등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 나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미싱링크를 찾아서


최근의 발굴 작업에서 스티브는 이전보다 훨씬 오래된 토기와 불에 그을린 석기를 발견했다. 방사선 연대 측정에 따르면 이 유물들의 생성 연대는 대략 6,000년 전이다. 염소의 흔적도 찾아냈는데 이곳에서 소금을 만들었다는 강력한 증거였다. 이렇게 북부에서 발견된 것은 처음이었다.

[볼비 유적 발굴 장면 출처 구글 이미지]

발굴물을 정밀 조사해보니 지방도 검출되었다. 사람들이 유제품을 만들었다는 증거였다. 이것이 영국에서 치즈를 만들었다는 가장 오래된 증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체더치즈 같이 단단한 치즈를 만들려면 다량의 소금이 필요하다).


더 깊이 파고들자 가마가 연달아 나오면서 점차 이곳이 평범한 정착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급자족 생활을 하는 농부들이 사는 소규모 공동체의 표준적 이미지에는 부합하지 않았다. 이곳은 공장, 즉 생산 라인이었다.


석기시대 말, 잉글랜드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아직 금속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고 이제 겨우 수렵 채집에서 농업 생활로 옮겨가던 중이었다. 그런데도 소금공장이 세워져 운영되고 있었고, 소금과 치즈뿐 아니라 다른 제품들도 만들어냈다.


이 정착촌은 농업혁명과 그 뒤에 벌어진 사건을 연결하는 미싱 링크(missing link)였다. 유럽 대륙, 아마도 프랑스 지역에서 건너와 이곳에서 일했던 사람들은 천연자원을 가공하는 법을 알았고, 그 지식으로 상품을 만들어서 판매하거나 교역했을 것이다.


선조들이 가족과 친지를 한데 불러 모아 함께 일하며, 소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팔거나 거래하기 위해 물건을 만들어낸 이 순간 역시 역사의 중요한 분수령이다. 비교적 최근까지도 제염은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지중해의 이비사섬과 마요르카섬에서는 페니키아시대부터 소금을 만들어왔다. 밀물 때 수로와 수문을 열어 연못과 웅덩이에 바닷물을 가둔 다음, 햇볕으로 말려 농축된 소금 용액에서 최종적으로 소금 결정을 얻는다.

[이비사섬과 마요르카 출처 구글 이미지]

프랑스에서는 플뢰르 드 셀(fleur de sel, 소금의 꽃), 스페인에서는 플로르 데 살(flor de sal)이라고 부르는 이 결정들은 최상급 소금으로 평가받는다. 주방장들은 고운 입자의 소금을 부라타 치즈와 모차렐라 치즈 요리에 즐겨 뿌린다.


[출처 구글 이미지]

천일염이 비싼 이유는 소금이 오랫동안 가장 귀한 물질 중 하나였던 까닭과 같다. 소금을 얻는데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에는 바닷물에서 물을 증발시키는 태양에너지와 소금을 채취하는 노동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북부 지방에서는 지중해의 따뜻한 날씨를 기대할 수 없으니, 도자기 그릇에 바닷물을 넣은 뒤 가마에서 끓여서 증발시켰을 것이다. 마침내 그릇을 깨트려 귀한 백염(white salt) 한 덩이를 얻는다.


역사가들은 인류 문명이 해안 지대에서 시작된 이유가 소금을 손쉽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라는 이론을 오랫동안 견지해 왔다. 볼비의 절벽 꼭대기에 있는 들판에서 스티브는 그 이론을 뒷받침하는 객관적인 증거들을 최초로 발견했다.


이 절벽 지대에서 수천 년 전에 만들어진 소금, 절인 고기, 치즈 등은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그 물품들을 찾아 멀리서 온 사람들에게 팔렸을 것이다. 오늘날 이 들판은 헤더 야생화, 월굴나무, 이탄지 지원의 들플로 뒤 덮인 자갈색 풍경의 노스요크 무어스 국립공원(North York Moors National Park)과 맞닿아 있다.

[노스요크 무어스 국립공원 출처 구글 이미지]

모든 힘을 염전에 쏟아라


옛 소금길을 따라가다 보면 잉글랜드 전역을 누빌 수 있다. 소금이 생산되는 곳에서 소비되는 곳까지 이 소중한 물질을 날랐던 것이다. 영국인들이 로마식 도로라고 부르는 길도 원래 소금길이었는데, 로마인들이 영국을 정복했을 때 단지 그 길을 포장한 것뿐이었다.

[영국의 소금길 출처 구글 이미지]

중세 유럽에도 이런 도로가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베네치아에서 트리에스테, 트리에스테에서 빈,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잘츠부르크(Salzburg, 소금의 도시라는 뜻), 그리고 뤼네부르크의 염천(brine spring)과 독일 북부 해안의 뤄백 항구를 잇는 가장 유명한 도로에 이르기까지 도로들이 두루 연결되어 있었다. 뤄백에서 배에 선적된 소금은 발트해 노르웨이, 심지어 대구를 소금에 절여 먹는 셰틀랜드 제도까지 보내졌다.

[중세 독일과 영국의 salt route 출처 구글 이미지]

심지어 미국에서도 들소 떼나 다른 동물 떼가 염천 사이를 이동하며 미리 다져놓은 길을 따라서 상당수의 현대식 도로들이 건설되었다. 이런 장소들을 따라 마을이 생겨났다. 뉴욕주 북부의 시러큐스(Syracuse)는 정착민들이 인근 오논다가에서 염천을 발견한 후 미국의 주요 도시 중 하나로 급부상했다.

[시러큐스 소금 공장 출처 구글 이미지]

로마에서 포르토 다스콜리까지 이탈리아 전역을 가로지르는 SS4 고속도로는 실제로 고대 로마의 비아 살라리아(Via Salaria, 소금길이라는 뜻) 위에 건설되었다. 이곳은 지난 수천 년간 위대한 소금 제조의 허브 중 하나였다.

[SS4 Via Salaria 출처 구글 이미지]

중세시대 이래로 베네치아 소금은 포강(Flume Po) 연안의 모데나, 파르마 등지로 운반되어 햄과 치즈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파르메산 치즈는 소금물에 20일 동안 담갔다가 1년 동안 숙성시켜서 소금이 중심부까지 서서히 스며들도록 하기 때문에 독특한 맛이 난다.

[파르메산 치즈 출처 구글 이미지]

베네치아는 소금 경제가 움직이는 도시였다. 523년, 한때 서로마 제국의 땅이었던 지역을 동고트족이 다스리던 무렵이었다. 동고트 왕국의 행정관 카시오도로스(Cassiodorus)가 베네치아 사람들에게 이런 편지를 써서 보냈다.


모든 정력을 염전에 쏟도록 하라. 그대들의 번영이 그 밭에 달려 있고, 그대들이 갖지 못한 물건을 사들일 힘이 그 밭에서 나온다. 금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있을 수 있겠으나 소금이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은 목숨을 부지하지 못하리라.
[파피루스에 쓰여진 카시오도로스 편지 출처 구글 이미지]

일찍이 베네치아 사람들은 아드리아해 연안에서 생산되는 소금 대부분을 장악했고, 인근의 경쟁자들과 자주 전쟁을 벌여 소금공장을 빼앗았다. 그러나 이들은 곧 소금을 생산하는 것만이 아니라 교역을 통해 더 큰돈을 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중해에서 생산된 소금이 베네치아로 운반되었고, 이탈리아 전역과 그 바깥의 시장으로 팔려나갔다. 소금 교역에 손을 대서 큰 부자가 된 상인들은 그 부를 바탕으로 인도와 극동으로 항해를 감행하여 향료 무역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베네치아의 소금청(Camera Salis)은 공화국 전체 수입에서 7분의 1 이상을 담당하면서 국가 재무를 총괄하는 중추 기관이 되었다.

[베네치아 무역로 출처 구글 이미지]

여기까지 오니 일정한 패턴이 보인다. 볼비의 절벽 지대에서 소금은 공동체 사람들에게 대량생산에 대한 영감을 주었다. 소금 덕분에 농부와 어부들은 인근 지역만이 아니라 저 멀리 바다 너머에서까지 자신들의 상품을 교역할 수 있었고, 소금을 이용해 독특한 맛을 더했을 뿐만 아니라 보관 기간을 늘려 시간을 벌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소금 부족 사태를 겪지 않고 있다. 만약 바다에서 염화나트륨을 모두 추출하여 땅 위에 골고루 살포한다면 약 152미터 두께의 소금층을 형성할 수 있다. 지하에 매장된 엄청난 양의 소금은 포함하지 않은 수치인데도 이 정도다.


스티브가 발굴 중인 볼비 들판의 지하 수백 미터에는 소금의 순수 결정질로 이루어진 거대한 판이 존재한다. 우리는 그 존재를 최근에야 발견했다. 이를 알지 못했던 신석기시대 사람들은 절벽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바닷물을 실어 날라야 했다.


사람들이 이토록 힘든 작업을 감수했다는 사실은 당시 소금의 가치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잘 보여준다. 그들은 소금을 판매할 시장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곳에 가마를 걸고 세계 최초의 생산 라인을 세웠던 것이다.


고대 세계에서 소금은 부의 상징이었다. 아프리카에서 상인들은 소금을 금과 교환하거나 일종의 통화로 사용하였다. 2차 세계대전 시기에 나이지리아가 식량 부족으로 굶어 죽을 위기에 빠지자 북부 마을들에서는 소금을 통화로 사용했다. 그중에서도 영국산 소금이 가장 높은 교환가치를 인정받았다.


고대 로마에서는 병사마다 정량의 소금을 배급받았는데(현금으로도 봉급을 받았기 때문에 건강 관리의 의미가 더 짙었다) 여기에서 봉급(Salary)이라는 말이 나왔다. "자기 몫의 소금은 번다(earn one's salt)" 혹은 "자기 몫의 소금값은 한다(worth one's salt)"라고 표현한다면, 고대 로마의 전통을 따르는 것이다.

[출처 유튜브]

전쟁이 일어나면 소금은 무기로 탈바꿈한다. 미국 독립전쟁 시기에 영국군은 미국의 항구들을 봉쇄하고 대서양 연안의 소금공장을 목표로 삼았다. 미국 남북전쟁 동안에 북부군은 남부군이 소금을 확보하지 못하도록 제염소를 찾아 파괴하고 펌프를 망가트렸다.

[남북전쟁 출처 구글 이미지]

소금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


통치자가 존재한 이래, 그들은 소금을 이용해 통치하고 통제하고 규제하고 과세하면서 권력을 강화하려 했다. 가장 뚜렷한 증거가 바로 중국이다. 중국의 오랜 역사 속에서 줄기차게 일관성을 유지한 것이 바로 소금 전매권이다. 통치자가 소금 무역을 통제하고 과세해야 한다는 통치 원리의 기원은 한나라가 건국되기도 전인 기원전 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로마 제국 건국 전이며, 알렉산드로스 대왕,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출현하기 전에 중국에서는 현실정치를 논한 최초의 책 ⟪관자⟫(제나라의 군주 환공을 섬긴 재상 관중이 쓴 책)에서 부분적으로 소금 문제를 다루었다.

[관중과 저서 '관자' 출처 구글 이미지]

관중은 이렇게 말한다. "어른이나 아이에게 인두세를 부과하겠다고 하면 백성들은 불평하면서 반대할 것이다. 그러나 소금에 과세하겠다는 정책을 발표하면 통치자가 거둬들이는 수입이 100배나 증가할 뿐 아니라 백성들은 이를 피하지 못한다. 이것이 이른바 재정관리이다."


SF 소설 ‘듄(Dune)’의 작사 프랭크 허버트(Frank Herbert)의 말을 빌리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겠다. "소금을 지배하는 자가 세상을 지배한다.('Dune'에서의 원문은 "He who controls the spice controls the universe")" 고대 중국의 황제들은 관중의 조언을 귀담아들었고 국가가 소금의 전체 공정을 통제했다. 3세기 무렵, 소금은 국가 수입의 약 90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었다.

[프랭크 허버트와 'Dune' 출처 구글 이미지]

소금은 온갖 심층적인 정치 문제도 끌어냈다. 권력을 어느 정도 가져야 과도한 권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국가의 역할은 어디까지이고 시민의 역할은 어디서부터 시작할까? 개인의 자유가 국가 안보보다 우선할 수 있을까? 중앙정부는 어떤 상황에서 민간 기업을 통제할 수 있을까?


이는 매우 현대적인 질문들로 보이지만, 실은 기원전 81년 중국의 궁정에서 뜨겁게 논의되었던 문제들이라고 초기 정치학 명저인 ⟪염철론⟫*(전한(前漢) 소제(昭帝)(기원전 81년)에 있었던 염철회의에 관한 자료를 선제(宣帝) 때에 환관(桓寬)이란 유자(儒者)가 정리하여 편찬한 책)에 기록되어 있다.


보수주의자들은 국가의 염철(소금과 무쇠) 생산 독점은 군대와 정부 같은 국가기구를 유지하는 데 필수라고 주장한다. 반면에 공자의 제자들인 개혁주의자들은 중앙정부의 통제를 끝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왜 국가가 백성들과 경쟁하나?'라는 의문을 제기한다.
[염철론 출처 구글 이미지]

21세기의 소금 독점은 국가 통제나 세수보다는 공공 보건의 목적이 더 컸다. 지난 수년간 중국은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소량의 요오드(iodine, 아이오딘)가 함유된 소금을 보급하는 데 집중한 결과 2010년 중국 보건 당국은 오지를 제외한 중국 전역에서 요오드결핍증을 몰아냈다고 발표했다.


2016년 중국 정부는 소금 전매제를 폐지했고, 이로써 2,000년에 걸친 소금 독점이 종식되었다. 하지만 중국의 소금 산업은 여전히 국영기업인 중국염업총공사가 지배하고 있으므로 실제로는 독점 상태가 유지되고 있는 셈이다.


여러 문명권에서 소금 판매에 과세했지만 프랑스보다 악명 높은 곳은 없었다. 프랑스의 염세인 가벨(gabell)은 매우 큰 액수였을 뿐만 아니라 지역에 따라 임의적이기까지 했다.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던 가벨이 사태의 핵심에 있었다는 사실은 그리 놀랍지 않다.


프랑스혁명에 이르기까지 수년간 세율은 점점 높아졌고 기아와 영양 결핍에 시달리는 가구가 늘고 있었다. 어떻게든 소금 소비를 줄이려고 애쓴 사람들도 가벨을 피할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이 1년에 7킬로 그램의 소금을 사야 한다는 의무가 부과되었기 때문이다.


루이 14세의 재무장관 장 바티스트 콜베르(Jean Baptiste Colbert)는 다음과 같은 말로 유명하다. "과세의 요령은 가능한 한 야유를 적게 받으면서 거위의 깃털을 많이 뽑아내는 데 있다." 그러나 정작 콜베르의 가벨 개혁안은 야유만 잔뜩 받았다.

[루이 14세에게 설명하는 콜베르 출처 구글 이미지]

가벨은 프랑스혁명의 유일한 원인은 아니지만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시기에 행해진 억압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1790년 혁명가들이 왕정을 폐지한 뒤 가벨은 빠르게 사라졌고 소금 밀매나 조세 포탈로 투옥되었던 사람들은 모두 석방되었다. 하지만 이 세금은 1806년 나폴레옹이 집권하면서 부활했다.


독일의 식물학자 마티아스 야코프 슐라이덴(Marthias Jakob Schleiden)은 1875년에 펴낸 ⟪소금(Das Salz)⟫이라는 책에서 염세와 전제주의 사이에 명백한 연관이 있다고 했다. 인간의 생존에 필수적인 귀중한 물질로 세수를 올리려는 나라는 불공정이 만연한 곳이고 백성들은 엄청난 괴롭힘을 당하기 때문이다.

[슐라이덴과 저서 출처 구글 이미지]

슐라이덴의 이론이 가장 분명하게 증명된 나라가 인도이다. 인도인들은 수천 년간 해안지대에서 바닷물을 증발시켜 소금을 만들었는데, 인도를 정복한 영국이 뱅골에서 인도의 소금공장들을 몰수하여 국가 독점 사업으로 만든 뒤 인도 소금의 판매를 금지하고 영국 소금만 판매해야 한다고 강제했다.


그러자 밀매가 성행했고 식민 정부는 이를 불법으로 단속했다. 그리고 뱅골주 전역에 세관 검문소를 설치한 뒤, 주의 경계 부근에 가시가 많은 배나무, 인도자두나무, 아카시아를 심어서 산울타리를 빙 둘렀다. 히말라야산맥 기슭부터 오디샤의 소금공장까지 3,870킬로미터에 달하는 산울타리('The Great Hedge')였다.

[The Great Hedge 출처 구글 이미지]

소금 통제에 대한 분노는 인도인들 사이에서 점점 커졌다. 현지의 소금 생산이 제한되면서 밀물처럼 몰려오는 영국 소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는데, 식민 정부가 재정적 착취를 더욱 강화하고자 세금까지 부과했다. 영국은 중국식 전매제의 가장 나쁜 점과 프랑스식 가벨의 소비 의무를 종합한 소금 정책을 펼쳤다.


1930년 마하트마 간디(Mahatma Gandhi)가 영국의 지배에 항거하면서 소금을 꼬집은 것은 충분히 수긍할 만한 일이었다. 간디는 당시 인도 총독이었던 어윈 경(Lord Irwin)에게 다음과 같이 공손한 어조로 편지를 보냈다.


인간의 삶에 필수인 소금에도 아주 무거운 세금이 부과되면서 부담이 큰 인도 농민의 어깨 위에 더 무거운 짐이 지워집니다. 잔인하게도 매우 공평한 과세를 실시한다고 하면서 부담을 주는 겁니다. 소금은 가난한 사람들이 개인으로나 집단으로나 부자들보다 더 많이 소비하는 상품입니다. 이 사실을 고려하면, 염세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훨씬 더 부담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나는 이 세금이 가장 불공정하다고 생각합니다.


총독에게 자신의 계획을 통보한 간디는 사바르마티(Sabarmati)에서 출발하여 해안 지대까지 386킬로미터의 행진을 벌였다. 마침내 그는 24일간의 도보 여행 끝에 서부의 해변 마을 단디(Dandi)에 도착해서 바닷물을 한 움큼 자신에게 끼얹고 증발되고 남은 소금 결정을 집어 들었다. 인도인들이 가장 분개했던 법률 중 하나가 이렇게 무너졌다.

[간디의 Salt March 경로 출처 구글 이미지]

간디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나는 대영제국의 기반을 이렇게 뒤흔들고 있습니다. 권력과 맞서는 정의의 싸움에 온 세상이 동참하기를 바랍니다." 간디가 단디 해변에서 소금 결정을 집어 든 순간부터 1949년 인도 독립까지에는 분명히 이어지는 선이 있다. 소금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물질이다. 소금은 경제적 교역의 기반이고 권력의 수단인가 하면 저항의 아이콘이었다.


5장 소금의 산업화

- 소금이 일으킨 일상의 혁명


영국 워밍햄 체셔(Cheshire) 지방 한가운데 개간지로 들어가면 파이프 여러 개가 지상으로 2미터 정도 비쭉 솟아 있다. 이 들판의 지하 200미터 지점에 크고 작은 동굴이 있는데, 여기서 수백만 톤의 소금이 채굴되고 있다. 어떤 동굴은 그 크기가 대성당만하다.

[체셔 지방 위치와 소금 동굴 출처 구글 이미지]

소금을 만드는 방법은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오로지 햇볕과 바람만으로 바닷물의 수분을 증발시키면서 소금을 생산하는 방식이다. 수천 년 전 볼비에서 신석기시대 사람들이 활용했다. 그 외에 바닷물의 염도를 높여 끓여 소금을 만드는 자염법 등도 있다.

[바다 염전 출처 구글 이미지]

두 번째 방법은 땅에서 암염을 캐내는 것이다. 바로 파키스탄의 케우라(Khewra) 소금 광산이다. 케우라 소금은 오늘날 ‘히말라야 핑크솔트’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케우라 소금 광산은 실제로 히말라야산맥 기슭에서 322킬로미터나 떨어진 지점에 있으므로 이런 식의 뻔뻔한 이름을 붙여선 안될 것이다.

[파키스탄 케우라 소금 광산 출처 구글 이미지]

오스트리아 북서부 할라인 소금 광산(Hallein Salt Mine)도 암염 광산으로 유명하다. 수천 년 전 매몰되었던 고대 켈트족 광부의 유해가 발굴된 아주 오래된 광산인데, 요즘에는 더 이상 암염을 채굴하지 않고 케이블카를 타고 깊숙이 들어가서 소금 동굴의 지하 호수 위를 작은 배로 건너간다. 폴란드 크라쿠프(Krakow)비엘리치카 소금 광산(Wieliczka Salt Mine)에서는 소금으로 만든 조각상과 예배당을 볼 수 있다.

[위: 할라인 소금 광산 아래: 비엘리치카 소금 광산 출처 구글 이미지]

세 번째 방법은 지하로부터 일종의 소금물을 추출하는 것이다. 일반적인 바닷물의 염도는 3% 정도인데, 이 소금물의 염도는 무려 30%이다. 광부가 직접 들어가서 소금을 채굴하는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다. 단지 굴착기나 다이너마이트 대신 원격호스를 사용하여 압축된 물을 퍼올린다는 점만 다를 뿐 여전히 같은 암염층을 채굴한다.


이렇게 퍼올린 소금물이 정화 탱크 안에서 빙빙 도는 동안 마그네슘과 황산이 제거되고, 아주 뜨겁고 거대한 용기 안에서 소금물의 수분을 증발시키면 젖은 모래 같은 소금만 남는다. 이 소금을 다른 가마로 보내면 반짝거리는 순수한 소금 결정이 생겨난다.


이 소금 결정을 정제형으로 압축하면 물을 부드럽게 만드는 연수기용 소금이 되고, 좀 더 거친 결정들은 식기세척기용으로 사용된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소금은 업계 용어로 PDV 소금(Pure Dried Vacuum Salt), 통칭 식염(table salt)인데, 체셔 들판에서 나온 소금 결정에 라벨을 붙인 상품일 가능성이 크다.


대영제국의 자랑이었던 체셔 소금


농장 지하에 있는 암염층의 기원은 2억 년 전 트라이아스기(Trias era)로 거슬러 올라간다. 트라이아스기 동안 이 일대는 내해로 덮여 있었으나 그 후 땅이 북쪽으로 융기하면서 바다와 분리되었다. 이 일대의 바닷물이 증발하면서 생긴 거대한 소금호수는 서서히 이회암으로 덮였다.

[2억 2000만 년 전 제흐슈타인해 출처 구글 이미지]

미들위치(Middlewich), 노스위치(Northwich), 낸트위치(Nantwich), 레프트위치(Leftwich)에서 염천 주위로 켈트인과 로마인의 정착촌이 차례로 들어섰다. 시간이 흐르면서 위치(wich)로 끝나는 이름의 마을은 소금 생산지로 알려졌다.


영국은 원래 프랑스와 독일에서 소금을 수입했지만 한 세기 남짓 지나자 세계 최대의 소금 수출국이 되었다. 리버풀 항구와 이어지는 머지강을 체셔의 소금공장들과 연결하기 위해 운하도 팠다. 곧 리버풀은 브리스톨과 함께 노예무역의 주축 항구로 부상했다.


소금을 가득 심고 리버풀을 떠난 배들은 아일랜드, 로테르담, 발트해 국가들을 향해 떠났고 돌아오는 길에는 철, 목재, 삼, 아마 등을 싣고 왔다. 리버풀의 배들은 프러시아, 네덜란드, 캐나다, 러시아로도 갔다. 온 세상이 체셔 소금, 일명 '리버풀 소금'에 중독되기 시작했다.


1844년 러시아 차르 니콜라이 1세가 영국을 국빈 방문했을 때, 윈저성과 버킹엄 궁전에서 환영 행사를 거친 뒤 체셔의 올드 마스턴 소금광산(Old Marston Salt Mines)으로 안내받았다. 차르 일행은 지하 150미터 지점까지 내려갔다.


영국의 소금 산업이 호황을 맞이하면서 체셔 지역의 대기는 소금공장에서 뿜어져 나오는 유해 연기로 뒤덮였다. 게다가 수백 군데의 비공식 암시장 채굴업자들까지 체셔로 몰려들어 땅에서 몰래 소금물을 퍼올리는 바람에 도로와 건물이 갑자기 커다란 구멍으로 가라앉아 버렸고 그 자리에는 소금물이 차올랐다.

[소금 채굴로 침하된 지반 출처 구글 이미지]

설상가상으로 초창기 소금 광산의 일부 동굴에는 천장을 떠받치는 기둥들이 너무 적어 추가 붕괴가 일어났다. 1850년 타운젠드 암스(Townshend Arms)라는 술집(현지인들은 '마녀와 악마(Witch and Devil)'라는 이름으로 불렀다)이 가라앉기 시작하자 주인은 1충을 포기하고 계단 위 2층에서 장사를 이어갔다. 이 술집을 1915년 마침내 완전히 땅속으로 가라앉아버렸다.

[타운젠드 암스(Townshend Arms)와 가라앉은 건물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러나 체셔의 소금 호황은 비참한 종말을 맞이했다. 물품의 공급이 과도해지면 종종 그렇듯이, 소금 생산량이 늘자 가격이 기하급수적으로 폭락해 버린 것이다. 1888년 체셔의 소금 생산업자들은 대폭락을 막겠다며 함께 모여서 소금 조합(Salt Union)을 결성했다. 소금 가격과 생산량을 담합하는 단체였다. <이코노미스트>는 소금 조합에 이렇게 일침을 가했다.


물론 우리는 소금 생산업체의 소유주들이 단결할 권리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잘못된 해결책을 사용하고 있다. 소금 매매를 둘러싼 무분별한 경쟁의 자연적 치유는 가장 취약한 생산업체부터 서서히 도태되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그 외의 해결책은 반드시 실패한다. 그러나 소금 조합의 생각이 다르다면 어디 한번 실험해 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 많은 소금은 어디에 쓰일까


오늘날 산업의 지형을 살펴보면 소금 산업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 체셔는 19세가 후반의 전성기보다 훨씬 더 많은 소금을 생산하고 있다. 연간 200만 톤에서 400만 톤 사이를 오가는 규모의 생산량이다.


그 많은 소금은 어디에 쓰일까? 감자칩에 뿌리는 소금은 시작에 불과하다. 이 책에서 염화나트륨을 6대 물질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소금이 오늘날 화학 산업과 제약 산업의 기반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체셔에서 퍼올린 소금물 중 일부만 식염으로 사용되고 나머지는 우리의 생존을 돕는 제품들로 변신한다.


소금물은 클로르알칼리(chlor-alkali) 공정을 거치게 되는데, 먼저 체셔의 들판에서 퍼올린 소금물이 파이프를 타고 런콘 공장으로 운반된다. 소금물은 맨체스터 선박 운하의 제방에서, 강력한 전류가 흐르며 수백 개의 전해셀 (electrolysis cel)로 가득한 런콘의 방까지 파이프를 타고 간다.


이런 작업이 필요로 하는 전력 규모는 어마어마한데, 전해셀로 가득한 이 방 하나가 리버풀보다 더 많은 전력을 소비한다. 또한, 거대한 자기장을 발생시키므로 심장박동기를 단 사람은 근처에 접근해서는 안 된다. 전자기력의 특이한 점은 인체에 감지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크릴 스크린 너머에서 전류가 소금물을 원자 단위로 분해하고 있었다. 낮게 웅웅거리며 액체가 철버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한쪽 전극에서는 염소 가스와 소금물이 뒤섞인 노란색 혼합물이, 다른 전극에서는 수소 가스와 수산화나트륨(sodium hydroxide, 가성소다)이 나왔다.

[클로르알칼리 공정 출처 구글 이미지]

전부 평범해 보이지만 현대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화학물질이다. 수산화나트륨은 종이와 알루미늄 생산을 비롯해 무수한 산업 공정에 활용되고 있으면 특히 비누와 세정제를 만들 때 반드시 필요하다.

[수산화나트륨 출처 구글 이미지]

염소는 우리가 마시는 물을 정화하는데 쓰이기도 하며, 다양한 의약품을 만들어내는 화학적 기초이기도 하다. 리브리엄 같은 진정제, 발륨 같은 항우울제, 포도상구균을 죽이는 반코마이신 같은 항생제, 클로로퀸 같은 말라리아 특효약이 모두 염소에 기반한다.


클로르알칼리 공정의 과실 덕분에 우리는 깨끗한 식수와 청결한 생활을 누릴 수 있다. 지난 200년 동안 값싼 비누와 위생 제품의 보금은 그 어떤 혁신보다 우리의 기대 수명을 늘려주었고, 이러한 변화의 중심에 소금이 있다.


소금은 오늘날에도 핵심 물질이다. 사람들에게 자국의 주요 기반 시설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런콘 공장의 전해셀로 가득한 방을 언급하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사실은 원자력발전소나 군사기지 못지않게 중요한 곳이다. 바로 이곳에서 영국 수돗물 정수에 사용되는 염소의 약 98퍼센트가 생산되기 때문이다.


클로르알칼리 공정은 시작일 뿐이다. 문명의 여명기부터 유리를 만들 때 융제로 사용했던 소다회(탄산나트륨)를 살펴보자. 이 놀라운 알칼리 물질을 용광로에 넣으면 실리카 모래의 녹는점이 낮아진다. 기름이나 지방과 섞으면 비누를 만들 수 있고, 종이를 만들 때도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하지만 소다회는 채취와 정제가 어려워서 산업혁명 전까지 희귀한 물질이었다. 1783년 루이 16세가 그 답을 알아내는 이에게 상을 내리겠다고 했다. 마침내 이 난제를 해결한 사람이 나타났는데, 니콜라 르블랑(Nicolas Leblanc)이라는 프랑스 의사였다. 그는 2단계에 걸친 방법을 고안했다. 먼저, 소금과 황산을 반응시키면서 석탄과 석회석으로 구웠다. 이렇게 흑회(black ash)를 물속에 담그면 완성이었다.

[르블랑과 소다회 채취를 위한 르블랑 공법 출처 구글 이미지]

1791년 르블랑은 이 2단계 공정을 수행하는 공장을 세웠으나 공을 인정받지 못했다. 그의 발견이 프랑스혁명과 시기적으로 겹치는 바람에 공장은 혁명가들에게 몰수당해서 신속히 공매 처분되었고, 그가 특허를 내려했던 소다회 제조법은 공적 재산으로 공개되었다. 1806년 르블랑은 자살했다.


막대한 양의 소금과 석탄을 삼키고 엄청나게 큰 굴뚝으로 하늘을 향해 해로운 검은 연기를 뿜어내는 르블랑 공장들은 근대 화학 산업의 출발점이었다. 마침내 산업화에 필요한 만큼 소다회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진 것이다.


벨기에의 에르네스트 솔베이(Enest Solvay)가 처음으로 고안한 솔베이 공정(Solbay process)은 소금(이 경우 소금물)을 알칼리로 전환하는 더 깨끗한 방법을 제시했다. 오늘날에도 솔베이 공정을 통해 소금을 소다회로 변환하고 있는데, 이렇게 만들어진 소다회가 전 세계의 산업 현장에서 사용된다.

[탄산 나트륨과 솔베이 출처 구글 이미지]

소금과 건강은 로마인들에게 같은 말로 통했다. 그래서 건강의 여신에게도 살루스(salus)라는 이름을 붙였다. 소금과 건강 사이의 상호 관계는 지금도 여전하다. 현대의 바이오테크 산업과 화학 산업은 여전히 소금에 의존하고 있다.


화학제품의 발달은 강철의 대량생산보다 우리 생활을 더 많이 바꾸어 놓았다. 화학혁명은 더 많은 목숨을 구했고, 식수를 정화했으며, 주택을 청결하게 했고, 박테리아와 세균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해 주었다. 세균이 왜 위험한지 그 본질을 제대로 깨닫기도 전에 말이다.


화학혁명의 업적에는 아주 지저분하고 수치스러운 이야기가 따라붙는다. 글래스고의 높은 굴뚝들은 르블랑 공정에서 나오는 유독성 유황 가스를 성충권 높이 뿜어냈다. 클로르알칼리 공정 초창기 수은을 사용해 유독성 폐기물이 나왔는데, 이를 호수와 하천에 방류하는 바람에 근처 야생동물들을 위협하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회복의 기미를 보이는 곳들도 있다. 오논다가호는 오랜 노력 끝에 마침내 깨끗하게 정화되었다. 오늘날의 화학공장들은 과거에 비하여 환경에 해악을 덜 끼친다. 대다수 선진국에서 수은 전기분해를 금지했고, 클로르알칼리 공정에서 나오는 폐기물 취급을 받던 수소는 친환경 연료로 재활용할 수 있게 되었다.


바닷물에서 하수도까지, 암염의 여정


지표면 아래에서 용해채굴법으로 채굴 중인 이 거대한 구멍 내부를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방법은 소금 광산을 직접 방문하는 것이다. 미들위치의 브리티시 솔트 바로 옆에 있는 윈스퍼드 광산(Winsford mine)은 체셔에 마지막으로 남은 지하 소금 광산이다. 현재 윈스퍼드 광산은 미국의 컴퍼스 미네랄(Compass Minerals)이 소유하고 있고, 일반인들에게는 개방되지 않는다.

[윈스퍼드 광산 출처 구글 이미지]

요즘에는 귀중한 예술품들과 보관 기한이 지난 정부 기록물을 소금 광산의 빈 공간에 보관한다. 복잡한 미로 같은 광산의 다른 부분에는 유독성 폐기물을 안전하게 보관하는 공간도 있다.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자 유럽에서 비상용 가스를 저장한 장소도 이와 비슷한 소금 동굴들이었다. 미국 에너지부는 '전략 비축유'를 텍사스주와 루이지애나주 지하의 오래된 소금 동굴에 원유를 보관한다. 자연에서 포집한 이산화탄소를 저장하고 대기 중 온실가스를 지하에 집적하는 공간도 있다.


지구 반대편에서는 전혀 다른 종류의 소금이 지상에서 추출된다. 이 소금은 의약품이나 도로 살포용이 아닌 완전히 다른 화학물질로 탈바꿈한다. 한때 매우 귀중한 물질로 평가받았기 때문에 역사상 가장 파급 효과가 큰, 전쟁을 일으킨 소금이다.


제6장 화약, 전쟁의 도화선

- 생명을 죽이고 생명을 구하는 소금


칠레 아타카마의 황량한 언덕 그늘에 자리 잡고 있는 안토파가스타(Antofagasta)의 오래된 기차역은 그토록 어색해 보일 수 없었다. 마천루, 쇼핑몰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한편으로는 판자촌의 알록달록한 판잣집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안토파가스타 출처 구글 이미지]

이곳에 위치한 FCAB(Ferrocarril de Antofagasta a Bolivia, 안토파가스타&볼리비아 철도) 본사는 철도 시스템에서 꽤 많은 역할을 맡고 있다. 오늘날 FCAB 노선은 더 이상 승객들을 운송하지 않으며, 기차들이 마을을 통과하더라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그러나 이 노선은 작지만 나름의 역할을 해왔다. FCAB 노선은 한때 세계에서 가장 지대가 높은 곳을 운행했다. 해발 수천 미터 지점까지 올라가서 메마른 사막을 통과하고, 플라밍고들이 노니는 혹한의 소금사막들을 지나 안데스산맥으로 들어가는 노선이었다.

[FCAB 출처 구글 이미지]

FCAB는 사막에서 나오는 특별한 화물을 항구까지 수송하기 위해서 부설되었다. 그 화물은 소금의 일종인 질산칼륨(altpeure, 초석)인데, 두 가지 의미에서 폭발적이었다. 질산칼륨을 뿌리면 식물이 건강하고 빠르게 자란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화약(fire drug)의 핵심 성분이 바로 질산칼륨이라는 사실이다.

친차 제도에서 벌어진 새똥 쟁탈전


이 물질을 처음 발견한 사람들은 중국인이었다. 그들은 바위와 벽돌에서 톡 쏘는 맛의 하얀 소금을 채취하여 불을 붙였고 엄청난 폭발력을 목격했다. 이 하얀 소금이 바로 '질산칼륨'이다.

[질산칼륨 분말과 현미경으로 확대해서 본 결정 출처 구글 이미지]

중국인들은 이 소금을 불의 약, 즉 '화약'이라고 불렸다. 서양에서는 '돌의 소금'이라는 뜻의 라틴어 '솔트피터(saltpetre)'로 알려졌는데, 질산칼륨이 오래된 지하실이나 지하 보관실의 돌벽에 들러붙은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질산칼륨에 약간의 유황(sulphur)과 목탄 가루를 섞으면 화약이 된다. 질산칼륨의 문제점은 발견이 대단히 어려운 물질이라는 것이다. 수백 년 동안 질산칼륨의 주요 원천은 부패한 유기물, 특히 썩은 고기와 소변이었다.


1626년 영국의 찰스 1세가 백성들에게 본인과 가축들의 소변을 왕실에 제출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 혼합물을 숙성시키는 질산칼륨 농장에서 나온 것이든 혹은 완제품 그 자체든, 일단 들판에 뿌리고 나면 농촌 지역은 영구적으로 분뇨 냄새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다가 인도의 갠지스강 진흙에서 풍부한 퇴적물을 발견하면서 인도 점령에 탄력이 붙였다. 그로부터 수십 년 뒤 질산칼륨은 영국 동인도회사의 가장 중요한 거래품 중 하나가 되었다.


19세기 중반, 미국과 유럽은 이 모든 것을 뿌리째 뒤흔드는 페루 해안가 섬들의 소식을 들었다. 친차 제도(Chincha Islands)는 원래 부비새, 가마우지, 펭귄 등 주로 새들이 사는 바위섬이었다. 수천 년에 걸친 새들의 배설물이 바위에 쌓인 구아노(guano)는 그 두께가 30미터를 넘을 지경이었다.

[친차섬 사진과 그림 출처 구글 이미지]

새들의 배설물은 인산염(phosphate)과 질소 화합물(nitrogen compound)을 풍부하게 함유한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천연비료였다. 물론 새들의 배설물은 전문적인 관점에서 봤을 때 중국의 지하실이나 갠지스강의 진흙에서 발견된 질산칼륨과는 다르지만, 질소를 함유한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질소는 식물의 성장에 필요한 핵심 요소로 식물들이 광합성할 수 있도록 엽록소를 만드는 일을 돕는다. 탄소, 수소, 산소와 함께 단백질을 만드는 아미노산의 핵심 원소이기도 하다.


친차 제도 소식을 들은 영국인과 미국인은 이 마법의 물질이 사라지기 전에 자기들이 손에 넣겠다면서 채비를 서둘렀다. 페루 정부는 섬들을 국유화하고 구아노를 채취하여 선적하는 면허를 발급했다. 수많은 배가 섬들로 모여들었고 노동자들은 열악한 조건에서 냄새나는 흙을 채취하기 위해 열을 올렸다. 돈이 계속 흘러들어 왔고 한동안 페루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될 것 같았다.

[구아노 채취 작업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러나 이 골드러시는 시작과 마찬가지로 갑작스레 끝나버렸다. 최초의 배들이 도착한 지 20년도 채 지나지 않은 1850년대 후반에 친차 제도의 구아노가 바닥을 드러낸 것이다.


하지만 페루 사람들은 본토에 비밀 병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페루가 지배하는 아타카마 사막 북부에는 현지인들이 칼리치(caliche)라고 부르는 독특한 소금 지층으로 덮인 지역이 있었다.

[아타카마 사막과 칼리치 출처 구글 이미지]

칼리치는 케추아족 언어로 소금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 카치(cachi)에서 유래했는데, 칼리치가 처음에 발견된 계기는 오래전 페니키아인들이 해변에서 유리를 만드는 방법을 찾아낸 이야기와 매우 비슷하다.


유럽인들이 남아메리카에 도착하기 훨씬 전인 14세기, 한 무리의 사람들이 안데스산맥 기슭을 출발하여 태평양 쪽으로 여행을 떠났다. 그들은 아타카마 사막을 지나던 중에 하룻밤 묵어가기 위해 캠프를 설치했다.


모닥불을 피우자 바닥에 있던 바위에 불꽃이 튀며 불이 붙었다. 일행은 그 기이한 불에 놀라서는 사악한 귀신들을 만났다며 혼비백산하며 달아났다. 곧 '악마의 돌'에 대한 소문이 널리 퍼졌다. 사람들은 이 돌들이 엄청난 폭발력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땅에 버려두면 주변을 특히 비옥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칼리치는 전통적인 질산칼륨과는 약간 다르다. 질산칼륨이 아닌 질산나트륨(sodium nitrate)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친차 제도가 흥망성쇠를 쥐고 얼마 지나지 않은 19세기, 화학자들은 질산나트륨을 이용하여 중국식 화약의 변종을 더 폭발적으로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로부터 질산나트륨은 질산, 니트로글리세린(Nitroglycerine), 다이너마이트로 탈바꿈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고성능 폭약 덕분에 알프레드 노벨은 세계 최고의 부호 대열에 합류할 수 있었다. 친차 제도의 구아노 무역이 종식되고 수십 년간 남아메리카의 질산염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원료 중 하나가 되었다.


남아메리카를 뒤흔든 질산칼륨 전쟁


다시 안토파가스타 이야기로 돌아가자. 안토파가스타에서 처음으로 기차를 운행했던 곳은 안토파가스타 질산염 철도회사(Antofagasta Nitrate and Railway Company)였다. 1870년대에 영국의 자금으로 설립된 회사로 칼리치의 채굴과 정제, 수송을 담당했다.


그즈음 크림 전쟁,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보어 전쟁 등 유럽 국가들이 계속 전쟁을 벌이자 폭약 수요도 점점 커졌다. 수백만 명의 유럽인이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하면서 토지의 생산력운 높여 더 많은 곡식을 생산해야 한다는 압박도 덩달아 커졌다.


총과 식량, 이 두 가지가 질산염이 대한 수요를 폭발시켰다. 안토파가스타 질산염 철도회사가 발족할 무렵, 안토파가스타는 볼리비아에 속했다. 실제로 안토파가스타는 볼리비아에서 가장 중요한 항구 중 하나였다.


칼리치 매장지는 대부분 페루와 볼리비아 영토에 있었지만, 칼리치 개발의 주역은 칠레 이민자들이었다. 이들이 칼리치를 발견하고 채굴 작업을 담당했으며, 자금을 댄 영국 및 독일의 자본가들과 연결고리를 형성했다. 만약 1870년대 중반의 안토파가스타 거리를 걸었다면, 아마도 칠레 이민자들만 보였을 것이다.


페루와 볼리비아 사람들은 아타카마 사막에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돈이 굴러들어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1874년 볼리비아는 광물 개발에 세금을 부과하지 않겠다는 조약에 서명했다.


그러나 4년 뒤 볼리비아가 안토파가스타에서 수출하는 질산염에 100파운드당 10센트의 소급 적용된 세금을 부과하자 갈등이 폭발했다. 안토파가스타 질산염 철도회사의 관리자 조지 힉스(George Hicks)는 콘월주 출신으로 구레나룻을 길게 기르고 매우 다혈질인 사람이었는데, 볼리비아의 세금 부과를 거부했다.


결국 볼리비아 정부는 철도회사의 재산을 볼수하고 힉스를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힉스는 해안 근처에 정박 중이던 칠레 전함으로 피신했고, 몇 주 뒤 칠레 군대가 안토파가스타에 상륙해 신속하게 이 항구 도시를 점령했다. 이렇게 해서 칠레와 페루-볼리비아 동맹 사이에 5년 전쟁이 시작되었다.

[조지 힉스 출처 구글 이미지]

전쟁은 대부분 바다에서 벌어졌다. 칠레가 곧 볼리비아를 정복했고, 그 뒤 페루와 칠레의 함선들이 서로 포탄을 뿜어댔다. 이 전쟁에는 '태평양 전쟁(War of the Pacific)'이라는 이름이 붙있는데, '10센트 전쟁(Ten Cents War)' 흑은 '질산칼륨 전쟁(초석 전쟁)'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칠레의 젊은 장교 아르투로 프라트(Arturo Prat)가 자신의 몸을 내던지며 페루의 강력한 함선인 우아스카르호(lago Huáscar)를 상대로 용감한 공격에 나섰던 전투가 가장 유명하다. 프라트는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고, 칠레 전역에서 그의 이름을 기념했다.


이 해전에서는 페루가 승리했지만, 결국 페루-볼리비아 동맹은 전쟁에서는 졌다. 그것도 완패였다. 질산칼륨 전쟁은 결국 칠레의 대승으로 끝났다. 1881년 1월, 칠레 군대는 리마를 점령했으며, 1884년 휴전 조약을 맺고 북쪽의 드넓은 땅을 차지했다.

[태평양전쟁 이키케(Iquique) 해전, 칠레가 점령한 지역, 아르투로 프라토(Arturo Prat)대령 출처 구글 이미지]

안토파가스타, 볼리비아의 모든 해안, 페루의 광대한 칼리치 지역 등이 모두 칠레의 손에 들어갔다. 칠레는 아타카마의 질산염뿐만 아니라 구리와 리튬의 세계 최대 매장지를 보유하게 되었다. 이 전쟁으로 칠레는 자원 강국의 자리에 올랐지만 볼리비아는 모든 해안을 빼앗기고 말았다.


이후 칠레의 질산염은 온 세상의 식량과 무기 생산을 지원해 왔다. 세계대전 때 참호 위로 쏟아져 내린 연합국 포탄들은 모두 칠레의 질산염으로 만들어졌다. 질산염을 수출하여 번 돈으로 칠레 정부는 도로, 철도, 전기 시설과 배관 등을 건설했고 칠레는 남아메리카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되었다.


칼리치의 유망한 미래에 매혹된 사람 중에는 미국의 유명한 재벌 총수인 대니얼 구겐하임(Daniel Guggenheim)도 있었다. 그는 질산염 사업에 너무 몰두한 나머지, 그때까지 회사의 주력이던 추키카마타 구리 광산(chuquicamata)을 매각하고 칠레 칼리치에 투자했다.

[대니얼 구겐하임 출처 구글 이미지]

20세기에 접어들면서 과학자들은 칠레에서 공급하는 질산염만으로는 세계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리라고 경고했다.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 그 전망은 더욱 분명해졌다. 문제는 아무도 그 방법을 알아내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1차 세계대전에 소금이 미친 영향


질산염 문제는 영국인도 미국인도 칠레인도 아닌 독일인이 해결했다. 돌이켜 보면 그리 놀랍지 않은 일이다. 독일은 칠레의 질산염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수입하는 나라로 토양을 비옥하게 하고 폭발물을 제조하기 위해 화약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1차 세계대전이 벌어졌을 때 그 어느 나라보다 더 위태로운 상항을 마주했다. 독일과 영국 함선의 첫 교전이 칠레의 태평양 연안에서 벌어졌고, 독일은 1차 세계대전 내내 칠레 칼리치와 단절된 상태로 싸워야 했다. 폭발물을 만들 자원이 막힌 상태에서 군사적 참패와 기아로 갑자기 취약해진 독일 정부는 필사적으로 해결책을 찾았다.


야심만만하지만 문제가 많았던 유대인 화학자 프리츠 하버(Fritz Haber)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그는 고열과 압력을 조합해 대기 중 질소를 분리하여 수소 가스와 결합하는 데 성공했고, 1909년 화학공학자 카를 보슈(Carl Bosch)와 협업하면서 실험실에서의 연구를 산업화했다.


1913년 무렵, 보슈가 일하던 화학회사 바스프(BASF)는 비료와 폭약을 만들 수 있는 물질인 암모니아(질소와 수소의 화합품)를 오과우 공장에서 제조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버-보슈 공정(Haber-Bosch process)이 정립되었다.

[하버-보슈 공정 출처 구글 이미지]

이는 과학과 산업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발견으로, 수십억 인구에게 식량을 제공하는 길을 마련했다. 20세기에 인류가 성취한 커다란 업적 중 하나는 그전까지 만연했던 기아와 기근을 퇴치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합성 질산염을 개발한 초기에는 주로 독일군에서 사용할 포탄을 제조하는 데 활용되었다. 프랑스와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은 칠레 질산염으로 만든 포탄을 독일에 퍼부었고, 독일을 비롯한 동맹국은 합성 질산염으로 만든 포탄으로 응수했다.


하버-보슈 공정은 칠레의 질산염 산업에 치명타를 날렸다. 대니얼 구겐하임의 도박은 처참한 역효과를 냈다. 대기 중에서 질산염을 얻게 되자 생산량에 한도가 사라졌다. 그 후 칠레의 질산염 전초기지들은 대부분 폐쇄되었다.


하지만 칠레에는 여전히 아타카마 사막의 돌로 질산칼륨을 생산하는 몇몇 회사가 남아 있다. 화학회사 SQM(sociedad Quimica y Minera de Chile), 칠레 화학 광물 회사로 현지에서는 소키미치(Soquimich)라고 부른다)이 대표적인데, SQM의 탄생은 칠레 질산염 산업의 쇠퇴와 궤를 같이한다.


1960년대 들어 질산염 광산이 합성 질산염 회사에 밀려 줄줄이 도산하자 칠레 정부가 개입해 마지막으로 남은 칼리치 회사 두 곳을 국영화했다. 이러한 조치의 배경에는 경제적 이유와 더불어 지정학적 이유가 있었다.


칠레 정부는 아타카마 사막이 방치된다면 볼리비아와 페루가 과거 질산칼륨 전쟁 때 잃었던 영토를 되찾으려 할 것을 우려했다. 결국 1971년 살바도르 아엔데(Salvador Allende) 정부가 칼리치 산업뿐만 아니라 구리 산업까지 국유화했다.


그러다가 몇 년 뒤에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et)의 독재 정부가 SQM을 훌리오 폰체 레루 (Julio Ponce Ierou)에게 매각하면서 민영화되었다. 폰체 레루는 피노체트의 사위였다. 오늘날 SQM은 칠레에서 매우 중요한 회사로 자리매김했고, 폰체 레루는 칠레에서 손꼽히는 부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피노체트와 폰체 레루 출처 구글 이미지]

프리츠 하버의 발견으로부터 한 세기가 흐른 지금, 세상은 무제한에 가까운 질산염 공급이 불러온 부작용을 잘 알게 되었다. 농경지가 흑사당해 토질이 나빠졌고, 필수 영양분도 잃고 말았다. 세계 영양 위기의 해결책이 이제는 토양 위기를 초래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던 중 영국 북부의 해안에서 일하던 광부들이 이 사태에 도움이 될 만한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것은 이전까지 많은 양이 발견된 적 없는 마법의 물질이었다. 이 특별한 물질은 또 다른 소금인 ‘폴리할라이트’이다.


질산칼륨이 농작물의 성장을 돕는 유일한 물질은 아니다. 비료의 성분 중 가장 중요한 요소는 질소이지만, 인과 칼륨도 빼놓을 수 없다. 셋의 머리글자를 따서 ‘NPK’라고 부르며, 이를 가리켜 비료의 3요소라고 한다. 이렇게 만든 비료를 온 세상의 들판에 뿌려서 80억 인구를 먹여 살릴 농작물의 성장을 돕는다.

[질소, 인, 칼륨 출처 구글 이미지]

클리블랜드 탄산칼륨 광산의 칼리암염 지층 바로 밑에는 이전까지 대량으로 발견된 적이 없는 '폴리할라이트(polyhalite)'의 층이 있었다. 폴리할라이트는 황, 마그네슘, 칼슘을 함유한 단단한 돌로 이루어진 결정으로 글자 그대로 '많은 소금'이라는 뜻이다.


폴리할라이트의 성분은 모두 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성분이었다. 또한 덩어리를 갈아서 비료처럼 땅에 뿌리기만 해도 뛰어난 효과를 발휘했고 폐기물이 줄어 토양 손상을 줄일 수도 있다. 게다가 제조가 필요없기 때문에 매우 적은 탄소 발자국을 남긴다.

[폴리할라이트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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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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