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Iron)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뼈대>
Part 3 철(Iron)
<인간 사회를 구성하는 뼈대>
철이 없으면 나라도 없다
2022년 2월 24일 우크라이나 마리우폴, 아조우스탈 제철소(Azovstal Iron and Steel Works)의 총지배인 엔비르 츠키티슈빌리(Enver Tskitishivili)는 되도록 피하고 싶던 지시를 내려야만 했다. 바로 그날 새벽, 러시아 포병대가 도시에 폭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전쟁에서 가장 필사적이 되는 공성전이 될 공격이 시작되고 있었다.
다음 날 러시아군은 인근 해안에 상륙하고 동쪽에서는 탱크와 보병이 밀고 들어오는 등 더욱 거센 공격을 퍼부었다. 그 후 몇 주간 수만 명의 사상자가 나오고 도시 전체가 파괴되었는데, 그러는 와중에 아조우스탈 제철소는 우크라이나 저항군의 중심지가 되었다.
아조우스탈 제철소는 전설적인 명성을 가진 곳인데, 2차 세계 대전 당시의 일로 그 이름이 더 유명해졌다. 당시 우크라이나는 세계에서 손꼽을 정도로 빠르게 성장 중인 제철 강국이었는데, 1941년 히틀러가 침공했을 때, 그는 특히 우크라이나의 풍부한 천연자원에 눈독 들였다.
나치 돌격대가 마리우폴에 접근하니, 지역 주민들이 아조우스탈 제철소를 무용지물로 만들기 위해 해체 중인 모습이 보였다. 나치가 제철소를 다시 가동하려고 하자 노동자들이 은밀하게 사보타주를 벌였다. 시설에 불을 지르는가 하면 우연을 가장한 폭발 사고를 일으켜 용광로를 못 쓰게 만들어 생산을 방해했다.
1943년 독일군은 마리우폴에서 철수하면서 아조우스탈 제철소를 복구할 수 없도록 완전히 해체해 버렸다. 한때 콘크리트 저장고와 창고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던 자리에는 앙상한 뼈대만 남았다.
그러나 1년도 채 되지 않아 용광로는 다시 가동되었다. 1945년 무렵에는 전쟁 전의 생산량에 근접했다. 아조우스탈 제철소는 이런 곳이었고, 마리우폴 시민들은 이런 사람들이었다. 소비에트 시대와 탈냉전 시대에 마리우폴과 두 개의 제철소(북부 일리치와 남부 아조우스탈)는 물질 세계에서 중요한 공급원이 되었다.
세상 모든 것이 강철로 만들어지진 않지만, 세상의 거의 모든 것이 강철로 제작한 기계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부유한 선진국에서는 제철소를 폐쇄하고 국내 생산을 줄이는 추세이며, 탄소 배출이 덜 문제시되는 나라에서 완제품을 수입한다.
그러나 우리가 철과 강철(철과 탄소의 합금)을 얼마나 많이 사용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생각인지 금방 알 수 있다. 철과 강철은 세상의 거의 모든 금속을 구성하는 물질이므로 '궁극적인 금속'이라 할 수 있다.
콘크리트와 돌은 금이 가거나 부서지기 쉬운 반면, 금속의 원자 구조는 신축성과 단단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철과 강철을 주조하고 망치질하여 다양한 형태로 가공할 수 있는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도구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이다.
철은 우리 사회의 뼈대이다. 다리와 건물을 짓고, 강화 콘크리트를 만들고, 자동차를 생산하고, 데이터센터를 건설한다. 인류는 이미 수 천 년 전에 철로 도구와 장비를 만들었는데 그건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철만큼 강도, 내구성, 가용성을 모두 갖춘 유용한 금속은 없다.
철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심지어 우리 몸을 흐르는 적혈구 속에도 있다. 지구의 핵을 구성하는 주요 원소이고, 지각을 구성하는 두 번째로 많은 원소이다(알루미늄이 지각의 8퍼센트, 철이 5퍼센트이다).
해마다 지표면을 파고 폭파해서 퍼올리는 물질들의 순위를 살펴보자. 모래와 자갈이 430억 톤, 석유와 가스가 81억 톤, 석탄이 77억 톤, 철광석이 31억 톤이다. 팬데믹 사태로 2020년에는 잠깐 하락했었으나 2021년 전 세계 철광석 생산량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철과 강철은 어떻게 다를까
대부분의 철은 강철(steel)로 가공된다. 강철이라는 이름이 붙긴 했지만, 본질적으로는 단순히 철의 여러 종류 중 하나일 뿐이다. 철의 종류를 판가름하는 단서는 탄소 함량이다.
철이라는 스펙트럼의 한 극단에는 주철(cast iron) 혹은 선철(pig iron)이 있다. 선철의 영문명 ‘피그 아이언'은 철물을 거푸집에 붓는 모양이 어미의 젖을 먹고 있는 새끼 돼지들을 닮아서 붙은 이름이다. 선철은 탄소 함량이 약 3~4퍼센트로, 부서지기 쉬운 금속이다.
철 스펙트럼의 반대쪽 극단에는 연철(wrought iron)이 있다. 연철은 망치로 두드려서 펼 수 있을 정도로 부드러운 성질을 갖고 있으며, 극소량의 탄소를 함유한 매우 순수한 금속이다.
선철과 연철의 중간에는 강철이 있다. 강철은 일반적으로 2퍼센트 미만의 탄소 함량을 보인다. 아조우스탈 제철소에서 생산하기도 했던 연강(mild steel)은 대부분 탄소 함량이 1퍼센트 미만이다.
이제 우리는 재료과학의 경이로움 덕분에 탄소 함량의 미세한 차이가 어떻게 그토록 커다란 차이를 만들어내는지 잘 안다. 강철의 경우, 탄소 원자들이 철 원자들 사이에 가지런히 자리 잡아서 단단하고도 요지부동인 격자를 만든다.
탄소가 너무 많으면 격자 구조가 불완전해서 금속이 쉽게 부서진다. 주철이 그런 경우다. 반대로 탄소가 너무 적으면 큰 저항 없이도 철 원자들이 서로 미끄러질 수 있다. 연철의 경우 그렇다.
일반적인 상식과 다르게, 철은 '거의' 순수해야지 '완전히’ 순수해서는 안 된다. 장인들이 세대를 거쳐 기술을 전수하면서 때로는 자신만의 노하우를 추가하기도 했지만, 철공의 역사가 시행착오로 가득한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볼품없는 주철을 두드려서 강력한 강철검을 만들 줄 아는 홀륭한 장인은 어느 왕국에서나 귀중한 대우를 받았다. 지금의 우리는 철을 두드리면 탄소를 제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말이다.
고대 히타이트족은 금속 세공으로 명성이 자자했고, 일본 교토의 일본도 장인과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무기 장인도 유명했다. 특히 다마스쿠스 검은 매우 미세한 강철 결정을 갖고 있어서 오늘날까지도 이 검의 복제법을 알아내지 못했다.*
* 예부터 전해지던 철과 강철의 제작법 중에는 아주 괴이한 내용도 있었다. 11세기 문헌에 나오는 철을 담금질하는 법(강도를 높이는 법)은 이러하다. “세 살짜리 흑염소를 구해서 사흘간 실내에 가두어 놓고 먹을 것을 주지 마라. 나흘째 되는 날, 고사리 말고는 아무것도 주지 마라. … 바닥에 구멍이 뚫린 통 안에 흑염소를 가두고 그 밑에 튼튼한 용기를 받쳐서 소변을 모아라. 이런 식으로 2~3일 밤 동안 소변을 충분히 채취하고 통을 정리한 뒤, 그 소변에 당신의 도구를 담금질하라. 철제 도구들은 그냥 물보다 붉은 머리를 가진 어린 소년의 소변에 담금질하면 더 단단해지다.
19세기 중반 헨리 베서머(Henry Bessemer)는 전로(轉爐, converter)를 이용해 강철을 대량생산하는 제강법을 고안했는데, 용해된 철에 공기를 불어넣어서 탄소 등 불순물을 제거하는 방법이었다(그의 이름을 따 '베서머 제강법'이라고 한다).
이 방법을 사용한 좋은 예가 파리의 에펠탑과 스코틀랜드의 포스교다. 둘 다 1889년에 완공되면서 당시 기준으로 에펠탑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구조물로, 포스교는 세계에서 가장 긴 캔틸레버(Cantilever) 구조를 사용한 다리로 신기록을 세웠다.
다른 공통점도 있다. 두 구조물 모두 부식을 막기 위해 주기적으로 철제 프레임을 페인트 칠해주어야 했다. 차이점도 있다. 포스교는 강철을 사용했지만, 에펠탑은 연철로 만들어졌다. 베서머 강철이 나온 지 이미 수십 년이 지났는데도 건축가 귀스타브 에펠(Gustave Eiffel)은 강철을 믿지 못했다.
그 결과 에펠탑은 강철로 만들었을 때보다 더 짧은 기간 동안 훨씬 많은 철을 사용해야 했다. 에펠탑은 현재도 높은 편에 속하지만 강철을 사용했다면 지금보다 더 높이 올릴 수 있었다. 실제로 포스교의 주요 구조물 안에는 에펠탑 여섯 개가 너끈히 들어갈 정도다.
가장 평범한 도구 중 하나인 쟁기를 살펴보자. 인류 문명사는 대부분 식량 이야기와 이어진다.
노동 시간당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할수록 밭에서 일해야 하는 사람은 더 적어지고 다른 일을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은 더 많아진다. 여기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도구의 개량이다. 그중에서도 쟁기만큼 중요한 도구가 없다.
쟁기의 술바닥에 끼운 넓적한 삽 모양의 쇳조각이 보습이고, 보습 뒤쪽에 비스듬하게 덧댄 쇳조각이 볏이다. 보습이 흙을 잘게 갈면 볏이 그 흙을 한쪽으로 뒤집는다.
역사의 상당 시간 농부들은 나무 막대기로 쟁기질하다가 19세기 초에 이르러서는 주철 쟁기가 목제 쟁기의 자리를 대체했다. 이것은 획기적인 변화였다.
강철 쟁기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주철 쟁기가 갈 수 없었던 바위땅을 뚫고 들어갔다. 유지 관리도 덜 필요했다. 이를 최초로 대량생산한 존 디어(John Deere)는 이후 농기구 사업 어디서나 볼 수 있게 되었다.
존 디어의 비결은 쟁기의 한쪽 날을 더 매끈하게 만들고 그 주변에 단단한 강철판을 층층이 덧댄 것이다. 이렇게 하면 땅을 갈다가 돌과 부딪히더라도 주철 쟁기처럼 부서지는 것이 아니라 충격을 흡수할 수 있었다. 그 결과는 즉각적이었다.
1800년 뉴잉글랜드의 평범한 농가에서 주로 목제 농기구를 사용해서 1킬로그램의 곡물을 생산하는 데 7분 조금 넘는 노동력이 소요되었다. 1850년에는 주철 농기구로 같은 일을 하는 데 3분도 걸리지 않았다. 1900년에 이르러 강철 농기구를 사용하자 킬로그램당 30초도 필요하지 않았다.
농업은 그 시작일 뿐이다. 모든 분야에서 이런 발전이 일어나는 모습을 상상한다면, 강철이 얼마나 중요한지 보일 것이다. 강철로 만들 수 있는 것뿐만 아니라 강철이 만들 수 있게 해 준 것 또한 우리에게 유용했다. 이 싸고 강하고 믿음직한 금속은 빠른 속도로 세계 곳곳에 자리 잡았다.
녹슨 강철, 재활용 강철, 고철을 모두 포함하면 약 320억 톤의 강철이 전 세계에 분포되어 있다. 이것은 꽤 많은 양이다. 만약 이 전부를 사용해 건물의 철골에 들어가는 무거운 아이빔(I-beam)을 만든다면 지구를 33회나 감쌀 수 있으며, 지구와 태양 사이에 고속철도 선로를 7개나 부설할 수 있다.
지구의 모든 사람에게 나누어주면, 1인당 약 4톤의 강철을 소비할 수 있다. 선진국에서 이미 1인당 15톤의 강철을 소비하고 있는 반면 오늘날 중국의 1인당 평균 강철 소비량은 약 7톤에 불과하며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는 1인당 1톤 미만의 강철을 소비한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또 다른 문제를 안겨준다. 강철 생산 과정에서 전 세계 온실가스의 약 7~8퍼센트가 배출된다. 만약 모든 사람이 선진국처럼 1인당 15톤의 강철을 소비하기를 바란다면, 이 합금의 전 세계 재고를 1200억 톤으로 늘려야 하고, 심각한 온실가스 배출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강철이 곧 국력이다
강철은 여느 물질과 같지 않다. 인류가 수천 년 간 발전하고 더 부유해지기 위해 사용해 온 기초 자원이기 때문이다. 일부 통치자에게 강철은 무기를 만들고 방위를 구축한다는 의미다. 그러나 때로는 공장, 기계, 터빈을 만든다는 의미가 된다.
2018년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는 미국과 미국 노동자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수입 강철에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트위터에 발표했다. 그는 평소처럼 대문자로 글을 써서 그 뜻을 강조했다. "IF YOU DON'T HAVE STEEL, YOU DON'T HAVE A COUNTRY! (강철이 없다면, 국가가 없다!)'
1950년대 후반, 마오쩌둥은 철강업에 과도하게 집착하여 생산 증가라는 명목으로 중국을 파국으로 몰고 갔다. 그는 중국의 산업적 기량을 자랑할 때 종종 강철 생산에 관해 늘어놓았다. 중국은 3년 안에 영국의 강철 생산을 추월할 것이다! 10년 안에 미국을 추월할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어려워지자 지역마다 작은 용광로를 설치하여 농민이 고철로 강철을 직접 생산하는 토법고로 정책을 시행했다. 취사용 냄비와 솥, 농사용 도구와 쟁기, 붙을 나르는 수레와 양동이 둥 모든 고철이 용광로 속으로 사라졌다. 집들을 허물어서 나온 나무와 짚은 연료로 사용해 없앴다. 숲을 마구잡이로 베어낸 결과 수십 년간 홍수가 이어졌고, 수백만명의 농민들이 논밭을 떠나 용광로를 돌봐야 했다.
마오쩌둥이 대약진 운동이라고 부른 이 정책 덕분에 확실히 중국의 철 생산량이 증가했다. 하지만 마오쩌둥이나 조언자들은 철과 강철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했고, 토법고로에서 생산한 철은 강철이 아니라 부서지기 쉬운 품질이 형편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경악했고, 여기에 막대한 비용을 쏟아부은 일은 비극적 결과를 불러왔다.
그 후 몇 년간 중국은 역사상 최악의 기근을 겪어야 했으며, 1958년부터 1962년까지 수천만 명이 기근과 과로로 사망했다. 최종 사망자 수는 논쟁의 여지가 있지만, 아무리 보수적으로 잡아도 1700만 명에서 3000만 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굶주림을 참지 못하고 인육을 먹은 사람도 있었다.
독재자이든 민주적 지도자이든 모두가 강철에 집착한다. 강철이 모든 물질 중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기 때문일 수도 있고, 거의 모든 제조 공정에 강철이 들어가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혹은 타국의 강철로 자국의 무기를 만드는 걸 선호하는 지도자는 아무도 없기 때문일 수도 있다.
바로 이 세 번째 이유가 우크라이나 철강업의 기원이다. 19세기 중반,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에 치욕적 패배를 당하고 니콜라이 1세가 사망한 직후, 새로운 차르 알렉산드르 2세가 서구를 따라잡기 위해 야심찬 개혁에 착수했다.
당시 러시아 제국의 일부였던 우크라이나 도네츠강 유역은 철강업 단지를 만들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도네츠강 유역의 돈바스에는 석탄과 철광석이 풍부했지만, 제철소 건설에 필요한 인력이 당시 러시아에는 없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결국 외부에 도움을 청하기로 했다.
그러던 중 웨일스 남부 출신의 턱수염을 기른 사업가 존 제임스 휴스(John James Hughes)가 나타났다. 휴스의 아버지는 웨일스 머서티트빌의 제철소에서 수석 엔지니어로 일했고, 그 영향으로 휴스 역시 런던의 밀월 제철소(Milwall Iron Works)에서 일했다.
1870년 그는 돈바스에 도착해서 2년 만에 제철소를 세워서 가동을 시작했다. 수십 년 뒤 이 용광로 단지는 러시아 제국에서 가장 큰 제철소가 되어 있었다. 인근 정착촌은 그의 이름을 따서 유조프카(Ywzowka: Hughes-ovka)라고 명명되었는데, 오늘날 우크라이나 산업의 심장부 도네츠크(Donetsk)가 되었다.
이것은 한 국가가 산업 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해외에서 지식과 장비를 수입해 온 최초의 사례도 아니고 최후의 사례도 아니다. 조지 레이븐스크로프트가 베네치아에서 영국으로 유리 장인들을 몰래 데려온 일이나 19세기 후반 앤드류 카네기(Andrew Carnegie)가 베서머 전로를 미국에 들여온 일 등이 그 사례들이다.
2000년대 초반, 어느 중국 기업이 독일 도르트문트에 있는 티센크루프(ThyssenKrupp)의 제강소를 매입한 뒤 공장 시설을 하나하나 분해하여 양쯔강 하류의 부지로 실어 날라서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하지만 중국은 인류가 철을 만드는 법을 처음 발견한 이래로 러시아와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해왔던 일을 따라 한 것뿐이다. 그것은 바로 기술을 수입해 와서는 그 위에 제국을 건설하는 일이었다.
실제로 이렇게 해서 사강그룹의 본거지인 상하이 북부에 다시 세운 공장은 세계 최대의 제철소로 우뚝 올라섰다. 사강 제철소의 용광로 13기는 업계의 패자 티센크루프보다 두 배나 많은 철을 생산한다(미국의 제철소들도 많아 봤자 용광로 4기를 보유하고 있다).
중국이 지난 10년간 생산한 철은 미국이 20세기 초부터 현재까지 생산한 철의 총량보다 더 많다. 중국은 물질 세계의 다른 분야에서 그랬던 것처럼, 철강업에서도 역시 정점에 오르면서 거의 전적인 지배력을 가졌다.
중국이 부상하기 전까지 최대 제철소는 러시아의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Magnitogorsk Iron and Steel Works)였다. 용광로 8기를 보유한 이 거대한 제철소 단지는 1932년에 이오시프 스탈린의 구상으로 건설되었다.
이 지역 매장 철광석이 어찌나 많은지 새들이 산 위를 날지 않았고, 나침반도 작동하지 않았다. 마그니토고르스크는 이 '자석산'을 따라 계획된 사회주의식 대도시였는데, 도시의 건축물과 거리는 독일인 건축가가 설계했고, 제철소는 그때까지 세계 최대 규모였던 US스틸 공장을 모델로 했고, 건설도 미국 엔지니어들이 맡았다.
그러나 이곳에는 철광석 매장량은 풍부했지만 너무 오지에 있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몇 년 뒤, 차기 대형 제철소의 부지를 선정할 때 소비에트 관리들은 우크라이나 동부에 마음이 끌렸다. 그들은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 단지의 설계도를 가져와서 새로이 아조우스탈 제철소를 지었다.
1990년대에 이르자 석탄과 강철이 지배하던 우크라이나 동부가 소련 산업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이곳은 모두가 탐내는 먹잇감이 되고 말았다. 우크라이나 독립 후 과두 재벌인 을리가르히가 출현했는데, 그중 리나트 아흐메토우(Rinat Akhmetov)가 가장 유명하다.
그는 아조우스틸과 일리치를 비롯하여 수많은 제철소를 사들였다. 물론 제철소들이 사유화돼있다고 해서 그렇게 많은 것이 달라지진 않았다. 제철소들은 계속해서 엄청난 양의 강철을 생산했다.
아조우스탈의 거대한 강철 전로는 베서머가 발명한 전로의 후예인데, 철 혼합물에 공기 대신 순수한 산소를 불어넣는다는 점이 다르다. 아조우스탈의 전로는 대량의 산소를 소비하는데, 수많은 회사가 그 공정 중에 발생하는 폐가스를 이용하기 위해 마리우폴로 몰려들었다. 이렇게 하여 우크라이나는 아주 우연히도 전 세계 최대의 네온(neon) 생산국이 되었다. 이 비활성 기체는 발광형 표지판뿐만 아니라 반도체 제조에도 사용된다.
런던의 최고층 빌딩 더 샤드, 맨해튼의 허드슨 야드, 키이우(우크라이나 수도)의 올림픽 경기장, 제노바의 산조르조 다리(2018년 모란디 다리가 붕괴되고 지어졌다) 모두가 마리우폴 강철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지금, 러시아군이 마리우폴의 지척에 와 있었다. 츠키티슈빌리는 80년 전 나치의 침략 때 그의 전임자들이 했던 일을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공장을 폐쇄해야만 했다.
아조우스탈 최후의 날
제철소 폐쇄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철광석을 금속으로 탈바꿈하는 용광로를 비롯하여 핵심 공정 대부분은 제철소가 탄생하는 순간부터 은퇴하는 순간까지 영구적으로 가동되도록 설계되어 있다. 그러나 주변에 포탄이 떨어지는 상황에서는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제철소에서 일어나는 폭발보다 더 치명적인 산업재해는 없다. 츠키티슈빌리는 먼저 석탄을 건류하는 코크스로를 멈추었고 그 안을 액상 유리로 채워서 위험한 가스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막았다. 용광로들을 천천히 냉각시켰고 쇳물의 아랫부분은 용광로 바디의 슬래그로 굳혔다.
러시아군은 몇 주 만에 마리우폴을 점령했지만, 아조우스탈 문제는 만만치가 않았다. 츠키티슈빌리는 몰랐지만 3,000명 정도의 우크라이나 전사들이 아조우스탈의 피난처로 숨어들었다. 이 거대한 공장 위로 폭탄이 쏟아지는 모습이 전 세계에 보도되었다.
전 세계 철강업계는 아조우스탈의 종말과 충격을 빠르게 흡수했다. 아조우스탈은 대형 제철소이긴 했지만, 세계 최대 규모는 아니었다. 한국과 중국에는 더 큰 용광로가 있고, 러시아에서는 여전히 마그니토고르스크 제철소에서 수백만 톤의 강철을 제련한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일도 있었다. 아조우스탈을 비롯한 우크라이나 제철소들이 전 세계 네온의 절반을 공급하고 있던 것이다. 츠키티슈빌리의 폐쇄 조치 뒤, 전 세계에서는 네온 부족이 발생했고, 이는 반도체 생산에도 영향을 미쳤다. 곧 대만, 대만, 한국 등의 반도체 제조사들이 네온 부족사태를 우려하여 가스를 비축하기 시작했다. 물질의 세계는 이런 식으로 돌아간다.
러시아는 일단 공장단지를 점령하고 나서는 아조우스탈이 너무 많이 파괴되어 복구가 어렵다고 발표했다. 아조우스탈을 차라리 해체해서 그 자리에 공원을 만들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러나 츠키티슈빌리는 용광로, 산소 변환기, 코크스로를 폐쇄한 뒤 공개한 짧은 영상에서 이것이 아조우스탈의 끝은 아니라고 힘주어 말했다.
겉보기에 우크라이나 전쟁은 드론과 SNS로 싸우는 듯 보인다. 1945년에 미군이 오키나와를 침략했을 때 일본인들이 철의 폭풍이라고 부를 정도로 포탄이 쏟아지던 것과는 다른 형태의 전쟁인 것 같다.
그렇지만 착각해서는 안 된다. 21세기 전쟁에서도 여전히 총, 포탄 장갑 등 강철로 싸운다. 이 특별한 물질을 당연시하는 풍조 때문에 그동안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을 뿐이다. 철은 현재에도 여전히 중요하며 강철 없이는 미래를 건설할 수 없다.
화석연료와 산업혁명
우리는 웨일스 포트텔벗 제철소의 제4고로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제4고로는 굴뚝과 비계로 이루어졌고 검게 그을린 탑처럼 생겼다. 고로 쪽을 힐끗 보니 어뢰(torpedo)가 막 적재되는 중이었다. 마치 잠수함처럼 생긴 이 어뢰의 정체는 운반차인데, 철물을 담아서 용광로에서 제강소까지 약 1킬로미터 거리를 오간다.
선명한 황적색 선물이 철로 위의 플랫폼으로부터 빛나는 어뢰의 입속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꼭 용암 같군요!" 문득 떠오른 생각을 큰 소리로 말했다.”용암이기는 합니다." 가이드가 말했다. 이건 강철의 낭만적 면모이자 경이로움이었다. 우리는 강철을 만드는 과정에서 암석을 녹이는데, 이것이 바로 인간이 만드는 용암인 셈이다.
강철을 만들기 시작하고 수천 년의 시간이 흐른 오늘날에도, 극도로 정제된 공정을 갖춘 최고의 시설에서도 이 금속의 생산에는 여전히 원시적인 점이 있다. 우리는 불과 대장간의 신 헤파이스토스(Hephaestus)와 함께 신화 속 화산에 들어와 있었다. 사방에서 불꽃이 튀고, 표면에는 먼지와 그을음이 덕지덕지 뭍어 있었다.
이러한 감각적 자극들은 용융로에서 쇳물을 내는 순간 최고조에 달한다. 용광로의 하단에 점토로 막아놓은 구멍을 뚫으면 쇳물이 밖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그전까지 나는 이런 일에 사람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최근에 폐쇄된 아조우스탈을 비롯하여, 미국의 수많은 제강소, 여기 포트탤벗까지 대부분의 용광로에서 이 공정은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
용광로 옆에 섰더니 방열복 차림의 노동자가 리모컨을 놀렸다. 그러자 대형 크레인이 용광로의 구멍 쪽으로 180도 회전했다. 맨 앞의 드릴이 점토를 뚫기 시작했고, 갑자기 용광로 바닥의 저장실로부터 열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침내 쇳물이 모습을 드러냈다. 용광로에서 나온 뜨거운 쇳물이 수로를 타고 콸콸 흐르면서 대기 중이던 토페도카로 들어갔다. 약 4~5퍼센트의 탄소를 함유한 용융된 선철이 흘러나왔다. 이것은 앞으로 이어질 여러 차례의 변모 중 최초의 것이었다.
용광로에 들어가는 원광석은 알갱이 혹은 덩어리 상태인데, 융제 역할을 하는 코크스와 돌로마이트 덩어리를 함께 넣는다. 유리를 만들 때 융제가 그랬던 것처럼, 이들이 녹는점을 낮추어 불순불을 제거한다.
석탄들은 여기 웨일스의 용광로에서 코크스로 구워졌다. 용광로 온도가 섭씨 1,400도까지 올라가는 동안, 혼합된 원료들은 용광로 밑으로 가라앉으면서 가열되고 용해된다. 용광로의 외부, 그리고 내벽의 내화벽돌을 넘어서 철은 최고 온도까지 가열되는 중이었다.
석탄을 놓고는 철과 강철에 대해 논할 수 없다. 용융된 선철 1톤을 얻으려면 1톤 이상의 철광석과 1톤 미만의 석탄이 필요하다. 석탄 대부분은 용광로 상단에서 투입되지만 일부는 용광로 측면에서 알갱이 형태로 투입된다.
철광석을 금속으로 탈바꿈하려면 산소와 철을 분리해야 한다. 이 거대한 용광로가 여기 있는 궁극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철광석에서 분리된 산소와 석탄에서 나온 탄소가 결합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이다.
왜 영국에서 가장 먼저 산업혁명이 일어났을까
철은 화석연료의 산물이다. 철을 얻기 위해서 해마다 전 세계 수천 개의 용광로에 10억 톤 이상의 석탄이 투입된다. 철의 생산 과정에서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가 발생하는데, 전 세계 이산화탄소 배출 총량의 약 7~8퍼센트에 해당한다.
철의 이야기는 최초의 용광로가 생기기 훨씬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 투탕카멘 무덤에서 멋진 유리풍뎅이가 발견되었을 때 그 옆에는 단검이 놓여 있었다. 온통 보석으로 휘감긴 화려한 황금 손잡이가 달려 있는 단검이었다. 단검의 철제 칼날은 3,000년 세월이 무색하게 전혀 녹슬지 않았다. 이 칼날을 만든 금속은 원래 유성의 일부였다. 철, 니켈, 코발트의 천연합금이 우주에서 벼려지고 하늘에서 떨어진 결과물이었다.
고대 히타이트족은 지금의 튀르키예와 시리아 지역을 점령하고 있었다. 기원전 1400년경 히타이트족은 철을 제련하여 강철 무기를 만드는 법을 알아낸 것으로 보인다. 이 기술이 아시아와 유럽으로 널리 퍼진 결과, 인류학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철기시대'가 시작되었다.
중국인들이 최초의 용광로를 개발한 것은 기원전 5세기였고, 중세시대에 이르러서야 그 기술이 유럽에 전파되었다. 영국 서식스에 선철을 생산하는 용광로가 만들어진 것은 1500년경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웨일스 남부에도 용광로가 들어섰다.
이 용광로들에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바로 목탄을 연료로 사용했다는 점이다. 폭탄은 나무를 공기 중에 노출하지 않고 구워서 만든 거의 순수한 형태의 탄소 덩어리이다. 매우 뜨겁고 청결한 열을 뿜어내기 때문에 제철 작업뿐만 아니라 제련 작업이나 맥주 양조, 직불 염색에도 이상적인 재료였다.
그러나 목탄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면서 원료 공급에 대한 엄청난 압박이 가해졌다. 나무는 집을 지을 때도 필요했고 특히 영국에서는 해군 함선과 돛대를 만드는 중요한 재료였다.
1559년 우스터부근의 목재용 나무가 우려할 수준으로 줄었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세번강 23킬로미터 이내에서 철 생산을 위한 벌목을 금지하는 법률이 만들어졌다. 기업가들은 환경 대참사가 임박했다는 두려움을 안고 다른 곳을 찾아 나섰다. 그리하여 제철 작업뿐만 아니라 현대사에서 아주 획기적인 전환이 일어났다.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기업가들이 나무 대신 화석연료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이야기는 산업혁명으로 이어진다. 산업혁명이 어째서 유럽의 다른 나라나 아시아, 아메리카 대륙이 아니라 영국에서 시작되었는지는 오늘날까지도 연구 주제로 남아 있다. 인구 통계, 지리, 정치적 제도적 배경, 노동 시장의 특성, 이전부터 꾸준히 축적된 혁신, 제조업자들이 더 저렴하고 풍부한 연료를 열성적으로 찾아다니게 만든 건축 환경의 압력 등이 원인으로 제시된다.
영국은 매우 특이한 지질학적 이점을 가진 나라였다. 풍부한 철과 석회석부터 주석, 아연, 구리, 규사처럼 덜 유명한 금속까지, 이렇게 작은 나라에서 이토록 다양한 광물이 풍성하게 발견되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게다가 스코틀랜드 중부, 잉글랜드 북동부, 요크셔, 미틀랜드, 켄트, 글로스터, 웨일스 남부의 골짜기에는 무한에 가까워 보이는 석탄(대부분이 양질의 무연탄이었다)이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었다.
16세기 이후부터 목재 공급에 대한 걱정이 커지면서 초창기 기업가들이 실험을 시작했다. 양조업자, 염세업자, 벽돌공 도공 등은 16세기에서 17세기로 넘어가는 사이에 석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도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다. 목탄같이 순수한 고탄소 연료는 깨끗하게 연소하지만, 석탄은 지저분하고 냄새가 났다. 석탄을 사용했더니 벽돌들은 검게 물들었고, 맥주에서는 해로운 악취가 풍겼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몇몇 양조장에서는 이런 사실도 알아냈다. 나무를 태워서 목탄을 만드는 것처럼, 석탄을 미리 구워 놓으면 지저분한 오염 물질을 덜 함유한 더 순수한 형태의 석탄인 코크스를 얻을 수 있었다. 코크스와 석탄은 곳곳에서 빠르게 받아들여졌다.
유리 제조에 필수가 되었고, 영국 북동부와 체셔의 소금업자들까지 널리 사용했다. 뉴캐슬과 선덜랜드에서 채굴된 석탄은 런던으로 운반되어 양조장에 공급되었다. 석탄선(collier)은 타인사이드의 유리 산업을 위한 규사, 그리고 독특한 화물을 신고 북부로 귀환했다.
그 당시 빠르게 성장한 사업 중 하나가 명반 생산이었다. 명반은 옷이 빠르게 염색되도록 돕는 화학물질로 명반석은 볼비 근처 요크셔 북부의 절벽 지대에 많았다. 이 귀중한 입석을 정제하려면 소변에 넣고 끓여야 했다. 현지에서 그만큼의 소변을 구할 수 없었으므로 결과적으로 복잡한 공급망이 생겼다.
영국의 전설적 탐험가 제임스 쿡(James Cook)이 소변을 운반하는 이 뱃길을 다니며 선원으로 잔뼈가 굵어졌다는 설도 있다. 뉴캐슬에서 출발한 석탄선은 런던의 공중화장실에서 모아 온 악취 나는 소변을 실고서 북부로 돌아갔다. 놀림을 당한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황당한 이 이야기 때문에 “오줌을 가지고 가다(take the piss)’라는 말이 놀리다”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
냄새나는 혼합물을 끓이기 위해서 명반 생산업자들은 석탄에 불을 붙였다. 이후 몇 세기에 걸쳐 석탄은 서서히 영국에서 가장 중요한 연료가 되었다. 철은 이 파티에 비교적 늦게 참가한 편이다. 이렇게 저렴하고 풍부한 연료로 철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아무도 몰라서가 아니라 그 과정이 매우 까다로웠기 때문이다. 석탄을 대체하려고 시도할 때마다 철이 유황 때문에 엉망이 되어서 아무 쓸모가 없었다.
미들랜드 출신의 사업가 에이브러햄 다비(Abraham Darby)가 마침내 해결책을 찾아냈다. 그는 양조장에서 일했던 경험이 있었기에 코크스를 사용할 때의 이점을 잘 알고 있었다. 1709년 다비는 여러 번의 실패 끝에 목탄 대신 코크스로 용광로에 동력을 제공한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그 후 헨리 코트(Henry Cort)가 다비의 공장에서 나온 선철을 목탄 없이도 더 순수한 연철로 바꾸는 방법을 고안하면서, 철과 나무의 연결고리가 완전히 끊어졌다.
석탄은 나무보다 에너지 밀도가 훨씬 높은 연료였으므로, 용광로에서 석탄을 사용할 수 있게 되자 영국의 제철 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이는 또 다른 혁신을 촉발했다. 석탄과 철을 더 많이 사용할수록 더 많이 채굴해야 했고 더 깊이 땅속을 파고 들어가야 했다.
그러려면 탄광의 갱에서 물을 더 많이 퍼내야 했는데, 이것이 증기기관의 발명을 촉진했다. 처음에는 토머스 세이버리(Thomas Savery)와 토머스 뉴커먼(Thomas Newcomen)이 만든 원시적 기계를 사용해 물을 퍼냈으나 이후 제임스 와트(James Watt)가 더 정교한 증기기관을 만들어냈다.
이를 기점으로 석탄은 단순히 화학물질, 유리, 철을 만드는 데 쓰이는 것만이 아니라 움직이는 바퀴에도 연료를 공급하기 시작했다. 증기기관은 광산에서 물을 퍼내는 것만큼이나 쉽게 기관차를 달릴 수 있게 만들었다. 석탄과 철은 산업혁명의 탄생을 도왔다.
석탄은 기계에 연료를 제공해고 철은 기계를 만드는 원료가 되었다. 이 둘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과거에도 서로 긴밀히 얽혀 있었다. 예를 들어, 제임스 와트의 증기엔진은 존 윌킨슨(John Wilkinson)을 만나면서 비로소 빛을 보았다.
철에 미쳤던 윌킨슨은 철제 책상에서 일하고, 철교를 발주했으며, 철로 배를 만들었다. 심지어는 자신이 죽으면 철로 만든 관에 넣어달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 와트는 철이 기계 내부의 엄청난 압력을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물질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월킨슨의 도움을 받아 완벽에 가까운 철 실린더와 피스톤을 만들고 나서야 비로소 엔진을 제대로 작동시킬 수 있었다.
19세기 초가 되자 영국의 산업 전반이 석탄에서 동력을 얻었다. 이것은 매우 특이한 사건이다. 1800년 시점에 영국이 사용한 에너지의 95 퍼센트가 석탄에서 나왔는데 같은 시기 프랑스는 에너지의 90퍼센트 이상을 나무를 태워 얻고 있었다. 그리고 이 무렵 이전까지 프랑스와 비슷한 수준이었던 영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폭등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초 영국은 프랑스보다 80퍼센트 더 부유했다.
이러한 에너지 전환이 얼마나 중요한 사건인지 설명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보는 것이다. 만약 용광로에 석탄과 코크스 대신 나무와 목탄을 투입하는 과거의 방식으로 돌아간다면 우리의 생활은 어떻게 될까? 브라질 같은 일부 국가에서는 여전히 코크스 대신 목탄을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러나 실제 수치를 갖고 이를 따져보면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된다.
세상은 지루한 도약으로 발전한다
이제 토페도카는 300톤의 선철로 가득찼다. 우리는 토페도카가 덜커덩거리면서 제강소를 향해 가는 길을 따라갔다. 이곳도 아조우스탈처럼 광대한 부지를 자랑한다. 코크스로, 공장, 용광로, 강철전로, 압연 공장등 각각의 구역이 거대한 광역 도시 안의 개별 자치구 같아 보인다.
다음 목적지는 산소 전로였다. 다소 따분한 이름이긴 하지만, 이곳에서는 굉장한 공정이 진행된다. 바로 철이 강철로 변모하는 것이다. 용광로에서 나온 선물은 거대한 국자 모양의 레이들(laddle)로 들어가서 남아 있는 유황 성분을 제거한다. 액체 금속을 답은 이 거대한 검은색 용기는 매우 튼튼해 보이는 크레인에 실려서 산소 전로 쪽으로 옮겨져다. 빨갛게 달아오른 액체가 60톤의 고철과 함께 배 모양의 도가니인 전로에 부어졌다.
용광로와 비교해 보면, 제강 공정은 훨씬 간단하고 놀랍도록 빠르다. 금속 랜스가 전로 안으로 내려와서는 용암 속에다가 순산소를 초음속으로 분사한다. 20분 남짓의 불꽃놀이가 끝난 뒤. 들어갈 때는 탄소 함량 4퍼센트의 선철이었던 것이 0.4퍼센트의 용강(molen steel)이 되어 나온다. 이 모든 작업이 얼마나 신속한지 경이로울 지경이다. 수백 톤의 선철이 순식간에 강철이 되는 것이다.
베서머가 전로를 발명하기 전에는 몇 주나 걸리던 작업이었지만 이제는 몇 분 안에 끝낼 수 있게 되었다. 베서머 전로의 후손을 눈앞에서 보고 나니 그 발명이 얼마나 대단하지 실감했다. 베서머의 발명은 영국을 넘어 전 세계의 삶을 극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전로 덕분에 강철을 구하기 쉬워졌고 그만큼 값도 저렴해졌다.
강철이 저렴해지면서 쟁기, 엔진, 건물 골조, 서로를 연결하는 못 등 어디에나 두루 사용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콘크리트 때와 같은 교훈을 만난다. 무엇이 강철을 불질 세계의 주축으로 만들었는가? 그 이유는 강철의 기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동시에 가격이 저렴하기 때문이다.
사실 현대 사회는 이런 지루한 도약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강철은 놀라운 물질적 진보였지만 대량생산기술 같은 따분한 것, 표준 설정 같은 더 지루한 것에 의존해서 삶 속으로 파고든 것이다.
새롭게 주조된 강철은 여전히 붉은색으로 뜨거웠고 몇 분 전에 봤던 용암과 다를 바 없어 보였다. 그러고는 다른 용기에 담겨 새로운 여정을 시작했다. 이곳은 복잡한 작업이 시작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평범한 강철이 저마다 독특한 특성과 전문성을 가진 수백 가지 합금으로 변하는 순간이다.
약 1.7퍼센트의 망간을 첨가하면 단단한 연성강(ductile steel)이 되는데, 철로를 만드는 최적의 재료이다. 실리콘을 첨가하면 전기 강판(electrical steel)되는데, 모터나 변압기에서 구리와 함께 사용한다. 녹슬지 않는 스테인리스강(stainless steel)은 크로뮴(chromium) 12퍼센트를 함유하는데, 강도를 높이기 위해 니켈을 첨가한 때도 있다.
항공기 착륙 장지에는 몰리브데넘, 실리콘, 바나들을 첨가하여 만든 강하고 연성이 크고 단단한 합금을 사용한다. 오늘날에는 수백 가지 강합금이 존재하지만 그 시작은 모두 같다. 부글부글 끓는 뜨거운 금속 가마솥에 특별한 성분을 약간씩 넣는 것이다.
철광석은 비교적 구하기 쉬운 편이지만, 이런 특별한 첨가물 중 일부는 그렇지 않다. 희토류 원소인 니오븀은 제트 엔진, 핵심 파이프라인, 초전도 자석, 교량과 마천루의 골조에 사용할 강철을 강화하는데, 브라질의 한 광산에서 전 세계 니오뷰 생산량의 70퍼센트를 책임진다..
다음으로 우리는 합금용 첨가물이 들어간 용강이 턴디시(tundish)라고 불리는 거대한 수조에 부어진 다음, 바닥의 구멍으로 흘러가는 것을 보았다. 여기서 강철은 급속하게 냉각되어 방금까지 액체였던 것이 갑자기 고체로 변모했다. 물론 고체라고 해도 김이 모락모락 나고 시뻘겋게 달아 있는 상태의 강철이라 구부릴 수도 있지만 무겁고 단단했다.
컨베이어벨트 위에 올라탄 강철은 덜커덩 소리를 내면서 다음 공정으로 향했다. 압연 공장에 도착한 강철은 거대한 금속 롤러를 통과했는데, 단 몇 분 사이에 강철 슬래브가 1~200밀리미터 정도로 압축되었다. 들어갈 때는 9미터 길이였던 슬래브가 1킬로미터 길이의 얇은 강판이 되어 나왔다.
오래된 전기 쿡탑처럼 붉게 빛나는 강관들이 코일 모양으로 돌돌 말려서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아래쪽에서 대기 중인 로봇에 전달되고 로봇은 코일 위에 특별한 코드를 써넣었다. 강철의 종류, 최종 고객의 정보를 기록한 코드였다.
침몰선 잔해를 훔치는 사람들
자동차 산업, 특히 어느 자동차 제조업자를 놓고는 강철에 관해 제대로 이야기했다고 할 수 없다. 그 주인공은 바로 ‘헨리 포드’이다. 20세기 초 자동차의 대량생산을 선도한 그의 이야기는 곧 강철의 역사이기도 하다.
포드 공장의 기계들, 조립 라인에서 사용한 도구들 자동차 그 자체가 모두 강철로 만들어졌다. 포드는 강철의 야금술에 집착한 인물이었다. 그 유명한 자동차 '모델T'에 사용할 합금을 고르기 위해 몇 달에 걸쳐 조사를 벌였고 마침내 바나듐강(vanadium steel)을 최종 낙점했다.
이 가볍고 강력한 합금이 없었더라면 모델T는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포드와 그의 동료들은 제철업자들을 설득하여 오하이오주에 제철소를 세우도록 해 필요한 대량의 바나듐강을 무사히 확보할 수 있었다. 바나늄강에 힘입어 모델T는 경쟁자들을 따돌리고 멀찍이 앞서 나갔다.
포드의 바나듐강에 필적할 만한 현대의 기술로는 자동차 회사들이 초고장력강(Advanced High-Strength Steel, 이하 AHSS)이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AHSS는 고강도에 저중량 기준을 충족하는 합금으로, 망간 실리콘, 알루미늄, 그리고 때에 따라서는 바나듐을 첨가해서 만든다.
오늘날의 자동차는 수십 년 전의 자동차보다 훨씬 무거운 편이다. 그 이유는 강철 때문이 아니라 자동차에 추가된 기능 때문이다. 최근 몇 년간 자동차 제조사들은 더 가벼운 차를 만들기 위해 더 가벼운 금속을 사용하기보다는 차를 더 크게 만들고 더 많은 기능을 추가하여 오히려 더 무겁게 만드는 중이다. 이것이 바로 경제학에서 말하는 '제번스의 역설(Jevons’s paradox)'다.
19세기의 경제학자 윌리엄 스탠리 제번스(William Stanley Jevons)는 엔진과 기계를 아무리 효율적으로 만들더라도 우리는 전과 같거나 더 많은 석탄을 소비하기 위해 새로운 핑계를 찾는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간에 차체 무게를 줄이려는 경쟁(그것이 다른 부품으로 같아끼우는 의미일 뿐이라도)은 제철업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오늘날 대부분의 제강 공장에서 생산하는 '평범한' 강철은 불과 몇십 년 전에 생산된 동급의 강철에 비해 훨씬 뛰어난 품질을 자랑한다. 강철의 강도, 전기적 성능, 부식을 견디는 내식성은 50년 전보다 10배 이상 향상되었다.
강철의 품질과 관련하여 가장 유명한 사례는 아마도 1912년의 타이태닉호 침몰 사고일 것이다. 타이태닉호는 당시에 가장 강력하고 단단한 강철로 건조되었다. 그러나 최근에 타이태닉호의 선체를 분석한 결과, 지금이라면 절대 검사를 통과하지 못할 등급의 강철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오늘날 선박 등급의 강철은 회복력이 훨씬 강하고, 수천 가지 등급 중에서도 상위 등급에 속한다. 이 등급에는 잘 구부러지는 강철, 뻑뻑한 강철, 나무 몸통보다 두꺼운 강철, 주방 포일보다 얇은 강철, 장갑을 두른 스웨덴 강철, 착륙 기어를 만드는 셰필드 강철, 3D 프린터용 분말 강철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런 강철들을 만드는 일이 늘 쉽지만은 않다. 최근까지만 해도 중국산 강철 대부분은 품질이 상당히 형편없었다. 중국산 강철로 만든 철근 콘크리트는 종종 부식을 일으켰고 교량이나 고속도로의 구조적 결함으로 이어졌다.
2015년 당시 중국 총리였던 리커창이 세계경제포럼에 참석했다가 볼펜 하나를 집어 들고는 망연자실했다. 그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어째서 중국은 이렇게 부드럽게 잘 써지는 펜 하나를 만들지 못하는가? 대답은 강철에 있다.
중국이 경이로운 양의 강철을 생산하고 전 세계 펜의 80퍼센트를 만들고 있음에도, 그 펜의 주요 기술인 자그마한 강철 볼 베어링과 소켓을 생산하는 능력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발언 뒤, 펜 제조사들과 강철 제조사들은 텔레비전에서 줄소환되었고, 결국 2년 뒤 국영철강회사 중 한 곳에서 고급 펜촉을 만드는 데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강철은 실리콘과 별반 다르지 않다. 불, 그리고 탄소 구름 속에서 벼려진 또 다른 물질이 여기 있다. 21세기의 수많은 강철 변종 중에는 결정 구조가 너무 완벽해서 컴퓨터 칩을 만드는 실리콘 덩어리를 닮은 것도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름이 덜 알려진 강철은 아마도 저배경 강철(low-background steel)일 것이다. 저배경 강철은 핵에너지의 한 종류인 방사성동위원소에 전혀 오염되지 않은 금속이다. 방사능 측정 장비인 가이거 계수기나 의료 기기처럼 민감한 장비를 생산하는 데 필수 재료이기도 하다.
오늘날 저배경 강철을 생산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최초의 원자폭탄이 터진 이후로, 지구의 대기는 코발트 60 같은 동위 원소의 핵 오염 물질을 극소량이지만 계속 포함하고 있다. 그러므로 저배경 강철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1945년 핵실험 전에 이미 존재했던 금속들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오래전에 침몰한 전함이 인기가 많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스코틀랜드 북부의 스캐파플로에서 침몰한 독일 함선들의 잔해에서 나온 강철 일부는 의료 장비로 다시 태어나기도 했다. 호주 전함 HMAS 퍼스호는 인도네시아 자바섬 북서단의 반텐만에서 1942년에 침몰했는데, 최근 들어 선체 60퍼센트를 도둑질당했다. 물질 세계에서는 이런 일이 계속된다.
폭발음 속에 사라지는 것들
지구상에 호주 필바라 같은 곳이 또 있을까? 기온은 섭씨 45도를 넘는 게 일상이고, 도로 표지판은 가장 가까운 주유소가 수백 킬로미터 떨어져 있다고 경고한다. 유칼립투스와 여러 관목으로 뒤덮인 이 뜨거운 땅은 형형색색의 만화경 같은 모습이다.
필바라 토양이 녹처럼 보이는 이유는, 실제로 그 흙이 녹이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토양은 철분을 함유하고 있으나 필바라처럼 거대한 땅 전역에 철분이 농축되어 있는 곳은 찾아보기 힘들다.
필바라의 바위를 자르면 굉장히 놀라운 단면이 드러난다. 마치 원주민들의 공예품처럼 보이기에 지질학적 태피스트리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철, 처트(chert), 셰일, 실트암, 돌로마이트(dolomite)로 이루어진 연속적인 층이 시간의 흐름을 따라 꿈틀거린다.
지질학에서 이보다 매력적인 장면은 좀처럼 만나기 힘든데, 이 단층은 지구 역사에서 가장 빠른 시기인 선캄브리아기에 있었던 해양 활동의 흔적이다. 피를 뜻하는 그리스어 하이마(haima)에서 이름을 따온 적철석(hematite)은 우리 정맥 속에 흐르는 피처럼 산화 상태의 철 원자를 함유한다.
호수 뉴먼 외곽의 웨일백산(Whaleback Mountain)을 보자. 이 산은 현대 광산의 위대한 아이콘 중 하나이다. 웨일백산 자체는 오래전에 사라졌고 길이 6킬로미터 너비 3킬로미터의 구멍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여기서 채굴된 철광석들은 상하이의 마천루, 도쿄에서 오사카를 연결하는 고속철도의 선로가 되었다. 21세기 아시아는 필바라 지역의 철로 건설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호주는 세계 최대의 철광석 매장량과 생산량을 자랑한다. 매년 경쟁국인 브라질보다 두 배 이상, 중국보다 세 배 이상 많은 양을 채굴한다. 여기에는 절대 작지 않은 의미가 있다. 1990년대 이래로 베이징의 주료 전략 목표 중 하나가 세계 최고의 철광석 산업국이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도 철광석만큼은 호주에 상당 부분 의존한다. 중국의 철광석 매장량은 필바라에 대적하지 못한다.
폭발음 속에 사라진 것들
지질학자들은 필바라에 상당히 많은 철광석이 매장되어 있으리라고 오래전부터 추측했다. 1890년 호주의 지질학자 해리 페이지 우드워드(Harry Page Woodward)는 이런 의견을 냈다. "그 위치만 찾아낸다면 전 세계에 공급할 충분한 철광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1952년 11월, 그 이야기는 현실이 되었다. 랭 행콕(Lang Hancock)이 아내 호프와 함께 퍼스로 돌아가는 길을 찾던 중에 벌어진 일이었다.
열성적인 조종사였던 행콕은 쌍발엔진 비행기로 해머즐리산맥을 넘어오던 중 폭풍우를 만나 고도를 낮춰 협곡 사이를 요리조리 통과하다가 엄청난 광경을 목격했다. “단단한 철벽처럼 보였어요. 녹이 슨 듯한 색을 보고 있자니 마치 자기가 산화철이라고 소리 지르는 것 같았죠." 훗날 호주 방송에 나와서 행콕이 한 말이다.
1960년 행콕은 런던의 광산기업인 리오틴토(RioTinto)를 설득하여 헤머즐리산맥에서 채굴 작업에 착수하도록 했다. 리오틴토는 이곳에서 생산되는 철광석 1톤당 2.5퍼센트의 로열티를 행곡에게 지불하기로 약속했다. 철광석 채굴량이 어마어마하다 보니 로열티 규모도 상당했다. 그 결과 행콕은 호주 최고 부자 중 한 사람이 되었다.
1970년대까지 호주 채굴기업들은 수백 제곱킬로미터의 땅을 밀어버리고 조상 대대로 살아온 사람들을 쫓아냈다. 미국 네바다주의 쇼쇼니족을 생각해도 그렇고, 이것은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용납될 수 없는 행위였다.
성지를 무분별하게 파괴하는 행위는 1972년에 '원주민 유산법'이 통과되면서 종식되리라 여겨졌다. 원주민 유산법에 따르면, 리오틴토와 다른 광산기업들은 원주민을 이 땅의 전통적 소유자로 인정해야 한다.
그래서 광산기업들은 채굴에 대하여 원주민과 협의해야 했고, 중요한 문화석 역사적 가치를 지닌 것은 그 무엇도 파괴해선 안 되었다. 이제 이야기의 무대는 브록만 4광산(Brockman 4)으로 옮겨간다.
광산의 확장 범위에는 주칸 협곡이 들어갔다. 주칸 협곡은 필바라의 지류 중 하나로 평소에는 무척 건조한 곳이다. 우기가 시작되면 펄리쿠티 개울로 물이 흘러가는데, 이곳에서 살던 사람들은 물길에서 이름을 따서 푸투쿤티쿠라마(Puutu Kund Kurama)라는 부족명을 지었다.
매우 오랜 세월 동안, 푸투쿤티쿠라마 부족은 개울과 계곡을 걸으며 약초를 했고 때로는 근처 동굴에 몸을 숨겼다. 주칸 협곡에는 이런 동굴이 두 개 있었다. 뱀의 머리 모양을 한 바위 사이에 락풀(rock pool)도 있었는데, 부족의 전설에 따르면 아주 오래전에 불뱀이 이곳을 지나가면서 바위 사이에 불웅덩이가 생겼다고 한다.
고고학자들은 가능한 이곳이 보존되어야 한다고 보고했다. 리오틴토는 고고학적 유적지를 우회하는 세 가지 대안을 검토했다. 하지만 그 대안들을 실현하려면 약 1억 3500만 달러의 가치를 지닌 810만 톤의 철광석을 포기해야 했다.
결국 2013년 말, 리오틴토는 동굴들을 건드리는 행위에 대한 정부 허가를 신청했고, 두 달 뒤 허가가 떨어졌다 리오틴토가 해야 하는 일이라곤 동굴을 건드린 지 60일 이내에 원주민 유적지에 미친 영향만 다시 보고하는 것뿐이었다. 서류 수속은 끝났고 시곗바늘은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고고학자들이 더 깊이 파고 들어가자 더 많은 보물이 발견되었다. 그중에는 최초의 발굴물들보다 더 오래된 유물들도 있었는데, 연대가 4만 년 이상이었다. 숫돌 돌의자, 캥거루 뼈를 깎아서 만든 창, 사람의 머리카락을 꼬아서 만든 벨트가 나왔다. 벨트의 머리카락에 남아 있던 유전자는 푸투쿤티쿠라마 부족의 것과 일치했다.
그런데 하필 이 동굴들의 천장, 그러니까 고대 원주민들의 피난처 지붕에 있는 철광석이 바로 리오틴토가 찾던 것이었다. 고고학자들이 보고서를 제출한 뒤에도 리오틴토는 동굴의 고고하적 중요성이 낮거나 중간 정도라고 계속 폄훼했다. 그들은 정부 허가가 떨어진 순간부터 동굴들을 파괴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2010년 9월, 브록만 광산은 주칸 협곡에서 44킬로미터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2015년 무렵에는 고작 300미터 이내에 있었다. 2019년 11월에는 120미터 거리였다. 한때 계곡에 그늘을 드리웠던 산은 이미 정수리가 벗겨졌다.
2019년 말, 채굴기가 계곡 입구까지 다가왔고 고고학자 헤더 빌스(Heather Buils)가 원주민 공동체 구성원들과 함께 이곳을 한 번 더 조사했다.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에 따르면 주칸 2동굴은 4만 6000년 전에 만들어진 곳으로, 필바라에서 가장 오래된 동굴이었다. 주칸 협곡은 사람들에게 피난처일 팬만 아니라 조상들의 영혼이 쉬어가는 곳이기도 했다.
2020년 초, 이 정보를 전달받았을 때 리오틴토는 막 개발 준비 작업을 시작한 참이었다. 4월, 동굴들 위쪽으로 11미터의 구멍이 뚫렸다. 5월 초, 바위를 산산조각 낼 중간 속도의 충격파를 만들기 위해 질산암모늄 폭약으로 구멍을 채웠다.
원주민들과 부족 대표들이 발파를 막으려고 애쓰던 며칠 동안 공포와 혼란의 시간이 이어졌다. 그들은 리오틴토에, 정부에, 변호사들에게 호소했다. 그러나 리오틴토는 너무 늦었다고 답할 뿐이었다. 폭약은 이미 설치가 끝났다. 폭약 제조사는 설치로부터 14일 이내에 발파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리오틴토는 발파를 며칠 미루기는 했지만 결국 2020년 5월 24일 발파 버튼을 눌렀다.
주칸 1동굴은 산산조각이 난 바위와 자갈 더미로 뒤덮였지만, 지붕과 동굴 벽의 윤곽은 살아남은 듯했다. 그러나 주칸 2동굴은 그렇지 못했다. 4만 6000년 전에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있고, 발굴을 기다리는 보불들이 많이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되던 주칸 2동굴은 완전히 파괴되었다. 지붕, 벽, 입구가 사라져 버렸다.
그 뒤에 일어난 소동은 광업 역사상 가장 큰 기업 위기를 촉발했다. 호주 의회의 조사 결과, 리오틴토가 폭약을 제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원주민들에게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폭약 일부를 회수한 것으로 드러났다.
리오틴토는 이 사태를 사과했지만, 이후 몇 달 동안 내부 비리가 드러나면서 고위 간부들이 줄사퇴를 시작했다. 최고 경영자와 경영진 두 명이 사임했다(물론 그들은 퇴직금을 두둑이 받았다). 회장도 곧 뒤따라 사임했다. 리오틴토는 외부 감사단에게 내부 조사를 맡겼고, 그 결과 인종차별, 성차별, 괴롭힘, 성폭력이 만연해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푸투쿤티쿠라마 부족민들은 나중에 의회 조사단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큰 충격을 받았어요. 조상들의 영혼이 안식처를 원했다는 생각에 공포, 불안, 무력감을 느낍니다" 고령의 어느 푸투쿤티쿠라마 여성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다행스러운 일도 있었다. 락풀은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었다. 몇 달 뒤 락풀 안에서 비단뱀 한 마리가 발견되었는데, 원주민들에 따르면 영성과 신성함이 계속 이어진다는 증거였다. 동굴에서 나온 유물들은 선적용 컨테이너에 보관 중이었지만, 필바라의 다른 곳에서 벌어진 일을 보건대 아무도 유물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화약 폭발은 21세기 필바라의 심장 박동이다. 필바라에서 한동안 머물다 보면 멀리서 쿵 쿵 쿵 하고 들려오는 폭발음에 끝 익숙해진다. 이것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되고 아름다운 철광석 지층을 폭파하여 돌덩어리로 파쇄하는 소리이다. 리오틴토에서만 매년 100만 개의 구멍을 발파하는데, 30초당 구멍 하나를 발파하는 셈이다.
필바라의 값싼 철광석은 국가 간 1인당 강철 불평등을 점차적으로 바로잡는 중이다. 하지만 그 대가로 필바라에서 거대한 산과 계곡을 깎아내고, 문화 유적지를 훼손하고, 엄청난 양의 이산화탄소를 배출한다는 사실을 그냥 넘길 수는 없다. 그래서 선진국들이 강철 재활용에 나서기 시작했다.
고철의 시대가 온다
강철은 비교적 재활용이 쉬운 편이다. 대부분 철분으로 되어 있어 자성을 띠므로 다른 쓰레기들로부터 쉽게 분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십 년간 사용한 철골 대들보나 강철 플레이트를 재활용하거나 재사용하지 못할 까닭이 없다. 실제로 이미 우리는 이런 곳에서 상당한 양의 강철을 얻고 있다.
요즘은 전통적 용광로보다 미니밀(mini-mill)에서 강철을 더 많이 생산하는데, 전기 아크로에 고철을 녹여 강철을 만드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오래된 고층 빌딩과 자동차가 새로운 철근이나 강철 플레이트로 재생되면서, 현재 미국 내 강철의 3분의 2 이상이 고철에서 탄생하고 있다.
현재 추세에 따르면, 21세기 후반에는 철광석보다 재활용 고철에서 더 많은 강철을 얻을 것이다. 필바라의 심장박동은 점차 느려지고, 중국은 자기 너무 많은 용광로를 갖게 될 것이다. 중국이 지난 수십 년간 독일과 미국에서 공장을 벽돌 하나까지 통계로 수입했던 것과 비슷하게 앞으로는 아프리카로 제강 공장들이 옮겨질 것이다.
재활용 강철을 생산하는 미니밀이 친환경에너지에서 전력을 얻는다. 이것이야말로 그린스틸(green steel)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적어도 앞으로 몇 세대 동안은 용광로가 필요하지 않을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고철을 재활용하는 능력을 얼마나 향상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용광로와 탄소 배출 없이 새 강철을 만드는 방법도 있다. 직접환원 제철은 포트텔벗에서처럼 석탄을 잔뜩 투입하지 않고, 이산화탄소 배출도 없이 철광석을 가공해 철을 만드는 기술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째, 이러한 그린스틸을 만드는데 필요한 그린수소(green hydrogen)를 만드는 공정은 비용이 매우 많이 든다. 둘째, 지금의 용광로에 집어넣는 것보다 훨씬 높은 등급의 펠릿(pellet)이 필요한데, 펠릿은 철광석을 빻아서 구슬 형태로 가공한 원료이다.
고급 철광석의 새로운 매장지를 찾으려는 작업이 전 세계 곳곳에서 한창이다. 가장 유력한 후보지는 브라질의 파라에 있다. 1960년대에 US스틸 브라질 지사 소속의 2인용 헬리콥터가 이 지역의 산 위에 긴급 착륙해서 급히 볼일을 봤는데, 땅이 이상한 색으로 바뀐 것을 알아차렸다. 주변의 돌들도 같은 색깔이었다. 망치로 돌을 때리자 짝 갈라지면서 선명한 붉은색 표면이 드러났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순수한 철광석이었다.
이런 경위로 발견된 카라자스 광산(Carajás)은 단일 규모로는 세계에서 가장 큰 철광석 광산이다. 오늘날 광산업계에서 탐사 지질학자이게 가장 중요한 덕목은 작은 방광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떠도는 이유이다.
또 다른 선택지는 자철석 매장지를 찾는 것이다. 철광석의 또 다른 종류인 자철석은 적철석보다 순도가 떨어지긴 하지만, 철광석 펠릿을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스웨덴 북부의 키루나 광산(Kiruma mine)에서는 오랫동안 채굴 작업을 해왔으나 순도 높은 철광석이 아직도 꽤 묻혀있다. 오늘날에도 스웨덴은 그린스틸 개발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다.
마지막으로, 철의 이야기는 다시 시작점으로 돌아간다. 러시아 마그니토고르스크의 자석산은 나침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정도로 자력이 강하다. 도시가 건설된 지 100여 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고급 철광석이 채굴된다. 우크라이나 크리비리흐 광산(Kryvyi Rih)은 풍부한 자철석을 보유한 곳으로 한때 아조우스탈제철소에 상당한 양의 광석을 공급했다.
철이 이토록 혼해진 시점은 언제일까? 삼림을 벌채하는 대신 화석연료를 이용하기 시작한 때부터이다. 그 결과 탄소시대가 열리긴 했지만 말이다. 강철이 세상을 바꾸기 시작한 순간은, 수천 년 전 처음 발견되었을 때가 아니다. 헨리 베서머가 몇 시간이나 며칠이 아니라 몇 분 만에 강철을 만드는 제강법을 개발하면서부터이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의 세계, 즉 강철로 만들어진 세계가 완성되었다.
강철에 대적할 만한 금속이 하나 있긴 하다. 이 금속을 채굴하려면 훨씬 먼 거리를 가서 어떤 금속을 채굴할 때보다 더 많은 토양을 파헤쳐야 한다. 인류가 지금껏 철을 얻기 위해 파낸 구멍과 광산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많다. 그러나 물질 세계의 다음 주인공을 손에 넣기 위해 들이는 노력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4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