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지리의 힘 (1)

중국, 인도, 파키스탄

by Andy강성

《지리의 힘(원제: Prisoners of Geography)》은 영국 언론인이자 방송인인 팀 마샬(Timothy John Marshall, 1959년 5월 1일)이, 5년 이상 직접 30개 이상의 분쟁 지역을 취재한 뒤, 전 세계를 10개의 지역으로 나눠 ‘지리의 힘’이 21세기 현대사에 미치는 영향을 집중적으로 파헤친 책이다.


이 책은 2015년 7월 영국에서, 10월 미국에서 출간되어, New York Times 베스트셀러이자 #1 Sunday Times 베스트셀러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전 세계적으로 100만부 이상 판매되었다고 하며 우리나라에서는 2016년 10월 경 소개되었다.


최근에는 7년 만에 《지리의 힘》에서 자세히 다루지 못한 오스트레일리아,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영국, 그리스, 터키, 사헬, 에티오피아, 스페인, 우주 등 전 세계 10개 지역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다룬 '《지리의 힘 2(원제: Power of Geography)》'를 출간했다.

[팀 마샬과 저서들 출처 구글 이미지]

마샬은 LBC(종전 명칭 ‘the London Broadcasting Company’)에서 기자로 저널리즘 경력을 시작했고 BBCSky News에서 24년 이상 기자와 편집위원 등으로 근무하면서 12개 전쟁의 사건을 취재하였다.


그는 2004년 이라크 전쟁 보도로 ‘Royal Television Society‘의 뉴스 이벤트 부문에서 최종 후보에 올랐고, 2007년 무자헤딘에 대한 보도로 최종 후보 인증서를, 2004년에는 압둘라 왕세자와 그의 궁전을 독점적으로 방문한 다큐멘터리 'The Desert Kingdom'으로 역시 최종 후보 인증서를 받았다.


특히 Sky News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순간 중 하나는 첫 번째 걸프 전쟁 동안 6시간 동안 끊김 없이 방송한 것이며, 파키스탄의 베나지르 부토가 망명에서 돌아와 암살당하기 전에 그녀를 인터뷰한 마지막 기자이기도 하였다.

[베나지르 부토와 암살 직전 영상 출처 Sky News 구글 이미지]

이후 마샬은 저널리스트, 정치인, 외교 분석가 및 애호가들이 세계 뉴스 이벤트에 대한 견해를 공유하는 사이트인 뉴스 웹 플랫폼 ‘thewhatandthewhy.com‘을 설립하고 편집자를 맡고 있다.

[thewhatandthewhy.com 홈페이지 출처 구글 이미지]

서문

우리 삶의 모든 것은 지리에서 시작되었다


우리의 삶은 언제나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땅>에 의해 형성돼 왔다. 전쟁, 권력, 정치는 물론이고 오늘날 거의 모든 지역에 사는 인간이 거둔 사회적 발전은 지리적 특성에 따라 이뤄져왔고, 선택들은 늘 우리를 제약하는 강과 산, 사막과 호수, 그리고 바다에 의해 어느 정도는 결정된다.


넓은 의미의 지정학(geopolitics)은 지리적 요인들을 통해 국제적 현안을 이해하는 방식을 말한다. 여기에는 산맥 같은 천연의 장애물이나 하천망의 연결 같은 물리적 지형뿐 아니라 기후, 인구 통계, 문화 지역, 그리고 천연자원에 대한 접근성까지 포함된다.


이러한 요인들은 정치, 군사 전략부터 시작해서 언어, 교역, 종교 등을 포괄하는 인류의 사회적 발전에 이르기까지 우리 문명의 여러 국면에 중대한 충격을 가할 수도 있다.


한 나라나 국제 정세에는 개개의 지도자들의 성향과 이념, 기술 말고도 여러 요인들이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그 영향은 일시적이다. 하지만 세대가 바뀌어도 힌두쿠시 산맥과 히말라야 산맥이 만들어낸 물리적 장애물, 우기에서 비롯된 난관들, 천연자원이나 식량 자원에 대한 제한적인 접근 등은 피할 수가 없다. 결국 이념은 스쳐 지나가도 지리적 요소는 오랜 세월이 흘러도 그대로 남는다.


제1장 중국
4천 년 만에 대륙의 나라에서 해양강국을 꿈꾸다


[중국 지도 출처 본문]

2006년 10월, 1천 피트급 미국 항공모함 키티 호크(Kitty Hawk)호가 이끄는 초대형 항공모함 대대가 일본 남부와 대만 사이에 있는 동중국해를 통과하고 있었다. 그때 주목할 만한 사건이 벌어졌다.


중국 해군 송 클래스(Song-class) 잠수함이 아무런 경고도 없이 미 항공모함 군단 사이에서 불쑥 솟아오른 것이다. 이 행동은 마치 펩시콜라의 경영자가 코카콜라 사 회의장 책상 밑에 숨어서 한 시간 반 동안 몰래 엿듣다가 벌떡 일어선 거나 마찬가지인 사태였다.

[키티 호크호와 중국 송 클래스 잠수함 출처 구글 이미지]

미국은 중국의 이 같은 행동에 (한편으론 자신들이 전혀 감지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감탄했지만 화가 난 것도 사실이었다. 미국은 그 즉시 항의했다. 그런데 이 항의의 정도가 너무 심했던지 되돌아온 중국의 대답은 이러했다. “이런! 우리 앞바다라서 별생각 없이 그랬는데 그게 당신네 함대 한복판이었다니, 그런 우연의 일치가 있나요!”


이것이 21세기에 뒤바뀐 외교의 한 단면이다. 지난날 영국이 자국의 의도를 알리려고 약소국의 연안에 군함을 배치했다면, 중국은 자국의 해역에서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어 다음과 같은 뚜렷한 메시지를 날린다. “이제 우리도 해상국가다. 우리의 시대가 왔고, 여기는 우리 영토다."


이제껏 중국은 변변한 해군력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광활한 땅덩어리와 긴 국경선, 그리고 짧은 바닷길 덕분에 굳이 해양 세력이 되어야 할 필요성이 없었다. 게다가 중국은 이념적으로도 거의 팽창을 시도하지 않았다. 중국은 광활한 땅과 14억에 육박하는 막대한 인구를 자랑하는 어디까지나 <육상 병력>의 나라였다.


한족의 탄생에서 군사대국을 꿈꾸기까지


중국 문명의 발원지는 중국식으로 중원(中原)이라 언급되는 북중국평원(North China Plain, ‘화북평원’이라고도 한다)이라고 알려져 있다. 내몽골 아래, 만주 남부, 그리고 황허 안쪽과 주위를 끼고돌아 양쯔강 하부를 지나는, 그 넓이만도 거의 43만 2천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는 평원이 동서로 넓게 펼쳐져 있다. 이곳은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밀집한 지역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북중국평원 출처 나무위키]

북중국평원은 정치, 문화, 인구, 그리고 결정적으로 농업의 중심지다. 이 지역에 무려 10억의 인구가 모여 살고 있다. 면적은 3억 2천2백만 명이 사는 미국의 절반 크기에 불과한데 말이다.


이 심장부의 지형이 정착과 농경생활에 적합했던 관계로 초기 한족 왕조들은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이민족들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용맹한 유목민 전사들을 보유한 몽골은 항상 두려운 존재였다.


만리장성이 처음 축조되기 시작한 것은 진 왕조(기원전 221-207년) 시대였다. 현재 우리가 지도상에서 인정하는 중국이라는 형태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도 이 시기부터지만 오늘날의 국경선이 확정되기까지는 무려 2천 년은 더 걸렸다.

[만리장성 출처 구글 이미지]

18세기에 중국은 남쪽으로는 미얀마와 인도차이나 지역까지 진출했다. 또한 중국 내에서 가장 넓은 지역을 차지하는 서북부의 신장(新疆) 지역을 이 시기에 정복했다.


바위들이 주름져 있는 산악지대와 황량한 사막지대가 대부분인 신장 지역은 그 넓이가 166만 제곱킬로미터로 텍사스 주의 약 세 배에 달한다. 달리 표현하면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네덜란드, 그리고 벨기에까지 몽땅 집어넣고도 덤으로 룩셈부르크와 리히텐슈타인까지 넣을 만한 면적이라고 보면 된다.

[1820년 청의 최대 영토 출처 구글 이미지]

장제스 휘하의 국민당 군대와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당 군대는 1949년까지 중국 땅의 패권을 두고 전투를 벌였다. 결국 공산군에 패한 국민당은 대만으로 퇴각했다. 그 해 베이징 라디오 방송국은 이렇게 발표했다. “인민해방군은 모든 중국 영토를 해방시킬 것이다. 여기에는 티베트와 신장, 하이난, 그리고 대만도 포함된다.”


마오쩌둥은 기존의 그 어떤 왕조도 성공한 적이 없는 권력의 중앙 집중화를 달성했다. 그는 내몽골 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차단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몽골 내에서 베이징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1951년에는 한족 땅이 아니었던 또 다른 광활한 지역 티베트를 합병했다.


1990년대 후반에 이르자 1989년에 벌어진 톈안먼(天安門) 학살의 충격에서도 어느 정도 벗어났고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포르투갈로부터는 마카오를 돌려받았다. 이제 국경선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생긴 중국은 자국의 안보 역량을 가늠해 보면서 세계 속으로 큰 발걸음을 옮기기 위한 계획을 세웠다.

[1997년 홍콩 반환과 1999년 마카오 반환 출처 구글 이미지]

지리의 보호만큼은 확실하게 받는 나라


현대 중국의 국경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효과적인 방어와 교역을 가능케 하는 <지리(혹은 지형)의 보호>를 든든하게 받는 강대국의 형태가 보인다.


먼저 북쪽을 보면 그 길이만도 장장 20,770킬로미터에 달하는 몽골과의 국경선이 눈에 들어온다. 이 국경선을 타고 안쪽에 고비 사막이 들어앉아 있다. 먼 옛날 유목민 전사들은 여기를 넘어 남쪽으로 쳐들어왔다. 그러나 오늘날의 군대는 이곳에 집결하는 것만도 족히 몇 주는 걸릴 것이다.


혹시 중국 쪽 내몽골로 들어간다 해도 심장부에 도달하려면 유난히 척박한 지역을 지나야 하는 상상 이상의 긴 보급로를 확보해야 한다. 따라서 북방으로의 확장은 군사적 경로가 아니라 무역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 예가 몽골의 1차 광물 같은 천연자원을 싹쓸이하려는 시도다. 이로 인해 한족의 몽골 이동은 더욱 속도를 낼 것으로 보인다.

[고비사막 출처 구글 이미지]

다음은 러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으며 태평양을 따라 이어진 동해가 조금은 분할하고 있는 동쪽 국경이다. 그 위는 러시아의 극동 산악지대로 이곳 역시 인구가 희박한 거대한 황무지다.


그 아래가 만주인데 만약 러시아가 중국 심장부로 들어가고 싶다면 여기서부터 밀어붙여야 한다. 하지만 만주 인구는 1억 명에 달하고 현재도 계속 늘어나는 추세인 반면 러시아 극동 지역의 인구는 7백만 명에 불과한데도 늘어날 기미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러시아 국경과 만주 출처 구글 이미지]

러시아 극동 지역 아래 연안을 쭉 따라가 보면 중국 측 황해, 동중국해, 남중국해가 나온다. 태평양과 인도양으로 이어지는 이 지역에는 지난 시절 교역에 요긴하게 쓰였던 훌륭한 항구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이곳의 파도 너머에는 웬만한 섬 크기에 버금가는 난제들이 놓여 있다. 조만간 다루겠지만 그중 하나에 일본도 포함되어 있다.


시계 방향으로 좀 더 내려가 보자. 이제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가 나온다.


베트남은 중국에게는 성가신 존재다. 수세기를 두고 양국은 영토 문제로 으르렁대왔다. 양측 모두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중국의 이 남쪽 국경은 큰 탈 없이 군대가 건널 수 있는 지역이 아니다.


그리고 이는 기원전 111년부터 서기 938년까지 천 년에 걸친 중국의 베트남 정복과 지배, 그리고 1979년에 있었던 국경 분쟁이 부분적으로나마 설명해 준다.

[1979년 중국-베트남 전쟁 출처 구글 이미지]

라오스와의 국경은 언덕이 많은 정글 지대로, 상인들도 건너기 쉽지 않았다. 하물며 군대의 이동이라면 더욱 복잡해진다. 여기서 시곗바늘을 미얀마 쪽으로 움직이면 좀 더 높아지는 정글 지대가 나온다. 이곳의 서쪽 끝단은 무려 해발 910미터에 달하는 산지인데 좀 더 가면 히말라야 산맥에 합쳐진다.


중국은 왜 티베트에 목숨 거는가?


이렇게 하여 티베트에 도달한다. 여기서 중국에게 티베트가 왜 중요한 존재인지 깨닫게 된다. 히말라야 산맥은 중국-인도 국경을 내달리다 하강해서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타지키스탄에 걸쳐 있는 카라코람 산맥이 된다. 히말라야는 중국에게는 훌륭한 <천연의 만리장성>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인도의 뉴델리 쪽에서 봤을 때는 <인도판 만리장성>이기도 하다.

[히말라야산맥과 카라코람산맥 출처 구글 이미지]

세계 최대 인구를 보유한 두 나라는 히말라야를 가운데 두고 정치적, 경제적으로 나뉘어져 있다. 두 나라는 여전히 팽팽히 맞서고 있다. 중국은 인도의 아루나찰프라데시 주를 자국의 영토라 주장하고, 인도 측은 중국이 자국의 악사이친을 무단 점령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중국-인도 영토 분쟁 출처 구글 이미지]

중국에게는 일종의 <지정학적 공포>가 있다. 만약 중국이 티베트를 통제하지 못하게 되면 언제고 인도가 나설 것이다. 인도가 티베트 고원의 통제권을 얻으면 중국의 심장부로 밀고 들어갈 수 있는 전초 기지를 확보하는 셈이 된다.


이는 곧 중국의 주요 강인 황허, 양쯔, 그리고 메콩 강의 수원(산쟝웬, 三江源, Sanjiangyuan)이 있는, <중국의 급수탑>이라고 하는 티베트의 통제권을 얻는 거나 다름없다. 미국에 버금가는 물을 사용하지만 인구는 다섯 배나 많은 중국으로서는 이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

[산쟝웬국립공원 출처 구글 이미지]

중국인들은 티베트 문제를 인권이라는 프리즘을 통해 보기보다는 <지정학적 안보>의 틀에서 본다. 중국인들은 서구인들이 중국의 안보를 침해하려 한다고 믿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중국의 안보가 저해된 적은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설사 티베트에서 한족에 대항하는 봉기가 일어난다고 해도 인구학과 지정학이 티베트 독립에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


1988년 말, 여행 작가인 폴 서룩스(Paul Theroux)는 『철로 만든 수탉을 타고(Riding the iron rooster)』라는 책에서 이렇게 썼다. “쿤룬(*곤륜, 崑崙) 산맥은 라싸로 절대 못 들어가게 하는 보증서다.” 쿤룬 산맥은 신장 지역과 티베트를 분리해 놓고 있는데 서룩스는 이를 천만다행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기어이 해냈다. 어쩌면 그들은 이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어서였는지도 모른다. 2006년 당시 중국 총리였던 후진타오는 티베트 수도 라싸로 들어가는 철도(*칭짱철도, 青藏鐵路)를 개통했다.

[칭짱철도 출처 연합뉴스 구글 이미지]

중국이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전략적 땅, 신장


마지막으로 시곗바늘은 파키스탄, 타지키스탄, 그리고 주로 산악 지형을 이룬 키르기스스탄을 돌아 카자흐스탄과 마주보는 국경에 도달한다. 뒤를 돌아 북쪽의 몽골로 이어지는 지역을 보면 이곳이 과거 중앙아시아 지역의 왕국들과 세계를 잇는 육상 무역의 다리 역할을 했던 고대의 실크로드임을 알 수 있다.

[고대 실크로드 출처 구글 이미지]

이론상으로만 보면 산맥과 사막 사이에 낀 이곳은 중국 방위에서 허약한 지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심장부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 카자흐스탄이 중국을 위협할 입장도 아니고 러시아 또한 수백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다는 이점이 있다.


이 카자흐스탄 국경의 남동부는 평온할 틈이 없는 반(semi)자치구인 중국령 신장 지구로, 이 지역의 원주민들은 터키어와 비슷한 언어를 쓰는 위구르족이다. 신장 지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는 러시아, 몽골,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그리고 인도까지 합해 무려 8개국에 이른다.

[출처 구글맵]

예나 지금이나 신장 지역은 잠잠할 날이 없다. 위구르족은 1930년대와 1940년대 두 번이나 동투르케스탄(East Turkestan)이라는 이름으로 독립국가를 선포한 적이 있다. 이들은 러시아 제국의 붕괴를 목격했고 그 결과로 <-스탄>으로 끝나는 소비에트 시절의 이웃들이 주권 국가로 재탄생한 것도 지켜보았다. 티베트 독립운동에도 자극을 받은 이들은 이제 중국으로부터 독립을 외치고 있다.

[동투르케스탄 독립 시위(위)와 2009년 우루무치 폭동 사건(아래) 출처 구글 이미지]

중국이 이 땅을 포기할 리 없다. 티베트와 마찬가지로 신장에서도 독립으로 향한 창문은 닫혀가고 있다. 두 지역 모두 완충지이며 한 곳은 육상 무역의 주요 통로다. 또한 중요한 것이 비록 소득수준은 낮지만 두 지역 모두 지속적인 성장을 유지해서 대량 실업을 막으려는 중국 정부에게는 상품의 생산지이자 시장으로도 기능한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로 중국 공산당은 민주주의와 개인의 권리에 반대한다. 자유로운 선거권이 주어지면 한족의 단결은 깨어질지 모른다. 더 나아가 지방과 도시 간에 분쟁이 발생할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완충지대 주민들이 과감히 들고일어나기라도 하면 향후 중국의 힘은 꺾일 수밖에 없다.


공산당 간부들과 인민들 간에 체결된 계약은 현세대에게는 아직까지 유효하다. “우리가 당신들을 잘살게 해 줄 테니 당신들도 우리를 따르라.” 경제가 꾸준히 발전하는 한 이 계약은 지속될 것이다. 그러나 발전이 멈추거나 상황이 역전될 경우 이 계약은 종료된다.

[신장인들과 시진핑의 방문 출처 구글 이미지]

땅의 나라에서 해양 강국으로


경제적인 측면에서도 중국은 전 세계를 상대로 그랜드 바겐을 제안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는 값싼 물건을 만들 것이다. 그러니 당신들도 싸게 사라.” 중국 내 노동자 임금이 오를 만큼 올랐다는 사실을 제쳐 두고라도 양적인 면이나 가격 측면에서 중국은 태국과 인도네시아의 추격을 받고 있는 상황이다.


상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자원이 고갈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만약 누군가가 그것들을 선점한다거나 혹은 상품을 들여오거나 내다팔 수 없게 해상이 봉쇄된다면? 해군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드넓은 땅을 평정하느라 혼돈의 4천 년을 써버린 중국은 이제는 대양 해군력을 구축하고 있다. 현재의 경제 발전 속도를 감안해 보면, 중국이 역사상 유례없는 강력한 해상 수송력을 자랑하는 미 해군에 필적할 만한 능력을 갖추려면 30년은 더 걸릴 것으로 예상된다. 하지만 중단기적으로 보면 현재 중국 해군이 대양에서 경쟁자들과 맞닥뜨릴 일이 머지않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제 육상 국경 주변에서 동쪽과 남쪽, 그리고 바다를 바라보는 남서쪽으로 시곗바늘을 돌려보자. 이곳 바다 밑에서 중국은 잠수함을 타고 따라잡기 게임을 펼치고 있다. 중국은 대잠함정(적의 잠수함에 대한 초계, 수색, 공격을 주 임무로 하는 함정)을 도입하는 한편 동중국해와 남중국해에 수중 센서마을 구축하느라 분주하다.


남중국해, 뜨거운 분쟁의 현장


중국과 태평양 사이에는 베이징 당국이 <제1열도선>이라 칭하는 다도해가 펼쳐져 있다. 여기에 이른바 <9단선nine-dash line>이 있는데 2013년에 대만이 추가되어 10단선이 되면서 중국은 이 또한 자국의 영토로 표시하겠다는 입장이다. 2백 개가 넘는 작은 섬들과 암초들을 두고 각축하는 사이 중국과 이웃 국가들의 관계에도 균열이 생기고 있다.


중국은 국가의 자존심을 걸고 이 항로에 대한 통제권을 행사하고자 한다. 사실 지정학적으로도 그럴 수밖에 없다. 여기를 통하지 않고는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남중국해의 대양 항로에 진출할 수가 없다. 전시에는 곧 중국이 봉쇄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출처 구글 이미지]

중국 선박들이 태평양에 자유로이 접근하려면 일단 일본의 방해에 부딪힌다. 황해를 벗어난 중국 선박들은 한반도를 돌아 동해를 지나고 이어 홋카이도 위쪽, 즉 라페루즈 해협을 통과한 뒤에야 비로소 태평양으로 나올 수 있다. 이 지역 상당 부분이 일본과 러시아 수역이라 긴장이 고조되거나 적대적인 상황이 되면 중국으로 가는 길은 막힌다.


혹시 다른 길을 찾으려면 선박들은 홋카이도 북동쪽의 쿠릴 열도를 항해할 수밖에 없는데, 현재 러시아가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이 지역을 두고 일본은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다.

[쿠릴 열도와 러일 분쟁 지역 출처 구글 이미지]

일본은 대만 북동쪽에 있는 중국명 댜오위다오 열도(일본명 센카쿠 열도)를 두고도 중국과 분쟁 중이다. 현재 두 나라 간의 영토 분쟁에서 가장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는 곳이 바로 이곳이다. 만약 중국 선박들이 위에서 언급한 항로들을 피해 상하이에서 출발해서 태평양으로 곧장 나가려고 한다면 오키나와가 포함된 류큐 열도를 통과해야 한다.


그런데 이 지역에는 대규모 미군 기지가 있을 뿐 아니라 섬 끝단에 일본이 다수의 함안 이동 미사일들을 쌓아두고 있다. 일본 정부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너희가 그리로 나가려는 것을 우리가 모를 리 없다. 다만 우리랑 엮이지만 않길 바란다.”

[센카쿠 열도 출처 구글 이미지]

또 다른 잠재적 도화선으로 주목할 곳은 가스전이 발견된 동중국해다. 중국 정부는 이 지역 대부분을 방공식별구역(Air Defence Identification Zone, 영공 침입 방지 등을 위해 설정한 공역)으로 선포하고 이곳을 통과해 비행하려는 자는 그 누구든 사전 통보할 것으로 요구하고 있다. 미국과 일본은 일부러 이를 무시하고 있지만, 언제든지 갈등의 도화선이 될 수 있다.


[출처 구글 이미지]

“미국이여, 대만은 지리적으로 우리와 더 가깝다”


오키나와 아래엔 대만이 위치한다. 중국 해안에서 좀 물러난 이 지역은 동중국해와 남중국해가 갈리는 곳이다. 중국은 대만이 자국의 23번째 성이라고 공공연히 주장하지만 현재 대만은 미 해군과 동맹 관계이며 미국은 대만의 공군까지 단단히 무장해 두고 있다.

미국은 1979년에 맺은 대만관계법*에 의거해 중국이 대만을 침공할 시 대만을 수호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여기엔 단서가 붙는다. 만약 대만이 중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선포하고 중국이 이를 전쟁 행위로 받아들일 경우엔 미국은 대만을 구하러 오지 않아도 된다.

[대만관계법에 서명하는 지미 카터 대통령 출처 구글 이미지]
《대만관계법》(영어: Taiwan Relations Act)은 1979년 4월 10일에 미국에서 제정된 법이다.

미국은 중화민국(중국어: 中華民國)의 주요 수교국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1979년에 중화인민공화국을 공식 승인하고 외교관계를 수립하면서, 중화민국과의 외교관계가 단절하자, 이에 따라 전통적인 우방으로 여겼던 중화민국에 대한 예우의 차원에서, 제한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제정된 국내법으로 대(對) 중화민국 무기수출과 전술 제공, 미국 내 중화민국의 자산에 관한 문제 등이 규정되었다. 국제법이 아닌 한 나라의 국내법임에도 불구하고, 외국의 방위를 보장하는 내용을 담은 이례적인 경우이다.

미국은 1982년, 중국과의 8.17 공동성명 직전에 '6개 보장(Six Points)'을 발표했다. 6개 보장은 《대만관계법》과 함께 미국의 대중국 정책의 기준이 되고 있다.
1. 미국은 대만에 대한 무기 수출에 관해 기한을 정하지 않는다.
2. 미국은 대만에 대한 무기 수출에 있어 중국과 사전 협상을 진행하지 않을 것이다.
3. 미국은 대만 해협 양안 간의 중재자 역할을 담당하지 않는다.
4. 미국은 《대만관계법》을 수정하지 않는다.
5. 미국은 대만의 주권에 대한 일관된 입장을 변경하지 않는다.
6. 미국은 대만으로 하여금 중국과 협상토록 강요하지 않는다.

중국과 대만 양 정부는 서로를 인정하는 문제와 세계 각국에서 상대방이 인정받고 못 받는 문제를 두고 대립하고 있지만 대다수는 베이징의 손을 들어주고 있다. 14억 명의 시장과 2천3백만 명의 시장이 나섰을 때 대부분의 국가들은 길게 생각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중국은 대만을 손에 넣기로 마음을 굳혔지만 아직 무력으로 시도할 만한 능력은 안 된다. 대신 중국은 두 나라 간의 교역과 관광을 늘리는 이른바 소프트파워 전략을 사용한다. 중국은 대만이 다시금 자기네 품에 안기기를 바란다.

[중국-대만 전쟁 시나리오 출처 구글 이미지]

중국의 방공식별구역 선포나 미군 함정 곁에서 불쑥 솟아오르는 것, 그리고 대양 해군 구축 등의 목표는 분명하다. 중국 본토 연안에서 225킬로미터, 그러나 미국 서부 해안에서는 1만 킬로미터 이상이나 떨어진 대만을 방어하려는 미국의 결심을 장기적으로 희석시키려는 심산인 것이다.


수많은 영유권 분쟁, 결코 대양 강국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중국 선박들은 태평양을 향하든 인도양을 향하든, 남중국해를 나서는 순간부터 여전히 난관에 직면한다. 하지만 중국에게 가스와 원유를 수송하는 이 물길이 없다면 중국은 생존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걸프 만의 산유국으로 가기 위해서는 베트남을 지나가야 한다. 주목할 점은 베트남이 최근 들어 미국에 접근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은 미국의 전통적인 우방인 필리핀 근해도 지나야 한다.


그러고 나면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가 마주하고 있는 말라카 해협이 나온다. 이 세 나라 또한 외교적, 군사적으로 미국과 연결돼 있다. 말라카 해협의 길이는 거의 8백 킬로미터에 달하는데 가장 좁은 곳의 너비가 채 3킬로미터를 넘지 않는다. 따라서 이곳은 늘 요충지이자 관문으로서의 역할을 해왔다.

[말라카 해협 출처 구글 이미지]

중국은 여전히 여기에 묶여 있는 취약한 입장이다. 말라카 해협 인접국들, 그리고 중국이 접근하기에 가까운 모든 국가들은 하나같이 중국의 부상을 불안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이들 나라의 대다수가 중국과 영유권을 놓고 다투고 있는 상황이다.

[중국과 남중국해 영해권 분쟁 출처 구글 이미지]

일례로 필리핀과 중국은 미스치프 암초를 놓고 날선 공방을 벌이고 있다. 영유권 다툼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중국은 준설과 간척 사업을 병행하면서 분쟁 대상인 ‘피어리 크로스 리프(Fiery Cross Reef)‘라는 단순한 암초에 항만과 활주로를 건설해서 버젓이 난사군도의 한 섬으로 만들었다. 또 다른 암초에는 아예 포병대를 배치하기도 했다.

[출처 구글 이미지]

중국으로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항로를 지켜야 한다. 자국의 상품들을 시장으로 내보내기 위해서는 물론이고 이 상품들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원자재, 즉 원유, 가스, 귀금속 등을 들여오기 위해서도 말이다. 따라서 봉쇄당하는 경우는 생각조차 할 수 없다.


물론 외교가 하나의 해결책이 될 수 있겠지만 점점 몸집을 불려가는 자국의 해군력 또한 다른 해결책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최선의 보장책은 뭐니 뭐니 해도 파이프라인, 도로 그리고 항구들이다.

[중국의 새 원유 수송로 계획 출처 구글 이미지]

중국은 태평양과 인도양을 아우르는 대양 강국이 되고자 한다. 이 목표를 위해 중국은 미얀마, 방글라데시, 파키스탄, 스리랑카 등지의 심해 항구에 투자하고 있다. 이들 나라와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해서 중국 해군의 주둔이나 통상 라인의 구축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출처 구글 이미지]

또한 인도양과 벵골 만의 항구들은 중국의 미래를 공고히 다지는 보다 큰 계획의 일부분이다. 중국은 미얀마 서부 해안부터 시작해서 벵골 만을 지나 중국 남서부로 들어가는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건설했다. 이는 에너지 공급량의 거의 80퍼센트가 말라카 해협을 통과하는 것에 불안을 느낀 베이징 정부가 그 의존도를 줄여보려고 고안해낸 방법이다.


중국이 몸이 달아오를 수밖에 없는 사정이 얼마간 이해되는 것은 2010년 미얀마 군사정권이 조금씩 바깥 세계를 향해 문호를 개방하기 시작했을 때 이 나라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던 나라들 가운데 중국이 끼지 못했다는 점이다. 반면 미국과 일본은 잽싸게 우호 관계를 수립했다.

[출처 구글 이미지]

중국은 케냐에도 항구를 건설하고 있다. 그리고 앙골라에는 철도를, 에티오피아에는 수력 발전용 댐도 건설하고 있다. 이렇듯 중국은 광물과 귀금속 확보를 위해 아프리카 전역을 샅샅이 훑고 있는 중이다.

[출처 구글 이미지]

이 과정에서 중국의 기업들과 노동자들도 세계 곳곳에 진출하고 있다. 그리고 중국 군대도 슬그머니 그 뒤를 따르고 있다. 현재 족히 1천만 명이 되는 중국인들이 전 세계에 퍼져 있고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는 거대한 중국인 노동자 단지까지 형성돼 있는 상황이다.


전 세계와 상대하는 중국은 인권 문제로 인해 주눅이 들거나 외교적, 경제적으로 휘둘리지 않는다. 중국은 확고한 국경과 중국 본토와 1천 킬로미터 떨어진 제1열도선이라는 끈을 꼭 쥔 채 당당하게 세계를 누비고 있다. 만약 일본이나 미국과의 마찰을 피할 수만 있다면 중국에게 유일한 위험은 중국 자신밖에 없다.


인도
지리적으로 출발부터 유리했다
파키스탄
말썽 많은 아프간과의 국경을 물려받다


[인도 주변국와 지형 출처 구글 이미지]

인도와 파키스탄은 적어도 한 가지 사안에서는 의견을 같이할 수 있다. 누구도 상대방이 근처에 있는 걸 바라지 않는다는 것. 3,057킬로미터에 이르는 방대한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두 나라는 늘 껄끄러운 상대다. 두 나라는 저마다 적대감과 핵무기를 한 보따리씩 안고 있다.


이 두 나라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인도 아대륙'(Indian subcontinent, 혹은 '인도 반도')의 지리적 특성에 서로 묶여 있다. 이곳은 벵골 만, 인도양, 아라비아 해를 각기 남동쪽, 남쪽, 남서쪽에, 그리고 힌두쿠시는 북서쪽에, 히말라야는 북쪽에 두고 있다.


시곗바늘 방향으로 돌려보면 발루치스탄(Balochistan, Baluchistan) 사막이 차근차근 고원으로 올라가다가 보다 높이 솟은 북서 국경을 이루더니 힌두쿠시 산맥이 된다. 오른쪽으로 돌리면 동쪽은 히말라야로 이어지는 카라코람 산맥과 연결된다. 이 지역은 중국과 마주하는 국경선을 따라가다가 미얀마에 이른다. 여기서부터 인도의 땅은 방글라데시를 빙 돌아 벵골 만이 있는 남쪽으로 내려간다.

[출처 구글 이미지]

이런 형태의 땅덩어리 안에 오늘날의 인도와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네팔 그리고 부탄이라는 나라들이 들어가 있다. 네팔과 부탄은 거대한 이웃들인 중국과 인도에 에워싸인 가난한 내륙 국가다. 반면 벵골 만의 바닷물이 야기하는 홍수는 지대가 낮은 방글라데시를 걸핏하면 괴롭힌다. 방글라데시의 또 다른 지리적 문제는 국토의 거의 대부분이 인도에 둘러싸여 있다는 것이다.


인도 아대륙의 분열 그리고 대살육전


우리가 인도 아대륙으로 보는 범위의 지역은 상대적으로 평평한 지형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구심점을 갖기에는 지나치게 넓고 다양하다. 이 지역의 언어적, 문화적 다양성은 히말라야의 북쪽 결빙지대와 대비되는 남쪽의 정글지대와 같은 기후의 차이에도 얼마간은 기대고 있다. 이와 더불어 인도 아대륙에 분포된 하천들과 여러 종교들도 강한 구심점을 형성하지 못하게 하는 이유가 된다.


다양한 문명들이 갠지스, 브라마푸트라, 인더스와 같은 강을 따라 발전했다. 오늘날에도 인구 집중 지역은 이들 강 유역을 따라 점점이 분포돼 있다. 시크교도의 본거지인 펀자브 주나 타밀 나두어를 쓰는 타밀 주처럼 특성이 다른 지역들도 이와 같은 지리적 구분에 근거하고 있다.


[인도의 언어와 종족 분포 출처 구글 이미지]

인도 아대륙에는 수세기에 걸쳐 숱한 세력들이 침입해 왔지만 이곳을 진정으로 정복한 세력은 없었다. 최초의 무슬림 침공은 7세기 초반에 있었다. 당시 우마이야 왕조의 아랍인들은 현재 파키스탄 땅인 펀자브 깊숙한 곳까지 들어갔다.


이후 18세기까지 이런저런 외세가 인도 아대륙을 침공하면서 이슬람을 들여왔다. 그럼에도 인더스 강 동쪽 계곡 지역에 자리 잡은 압도적 다수인 힌두교도들은 교류를 거부했고 이는 궁극적으로 인도를 분리시킨 불씨가 되었다.


영국인들은 인도 아대륙을 드나들면서도 중심부를 지키지 못했고 결국 인도 땅은 여러 개로 갈라졌다. 1947년 포스트 식민주의적 민족주의와 종교적 분리주의는 아대륙을 두 개로 갈라놓았다. 그러더니 다시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라는 커다란 세 조각으로 쪼개었다.


1947년 8월 15일 영국인들이 철수하자 수백만 명에 달하는 무슬림들이 파키스탄이 있는 서부로 가기 위해 인도의 새 국경선으로 몰려들었다. 마찬가지로 수백만 명의 힌두교도들과 시크교도들이 반대편 국경으로 몰려왔다. 이 난장판의 결과는 대살육전이었다. 양쪽 국가 여기저기서 폭동이 발생했다.

이 사태로 적어도 1백만 명이 사망하고 1천5백만 명이 추방되었을 거라고 한다. 결국 서부의 무슬림 다수 지역, 즉 타르 사막과 갠지스 강 유역 서부인 인더스 계곡 지역은 서파키스탄(현재의 파키스탄)이 되었고 콜카타의 동쪽은 동파키스탄(현재의 방글라데시)이 되었다.


출발부터 인도보다 불리했던 파키스탄


두 개의 파키스탄을 유일하게 연결해 주는 끈이라면 이슬람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두 지역조차 원래 하나로 지낸 적이 없었기에 둘이 갈라선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었다. 마침내 1971년, 동파키스탄이 서파키스탄의 주도권에 반기를 들고 일어났고, 양측 모두 많은 피를 흘린 끝에 동파키스탄이 방글라데시가 되었다.


1947년 새로운 파키스탄이 들어서고 대대적인 환호와 밝은 미래에 대한 공약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무함마드 알리 진나(파키스탄 건국의 아버지)를 비롯한 지도자들은 통합된 무슬림의 고향을 건설하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공업지대 대부분과 조세 수입원의 대부분, 그리고 콜카타 같은 항구와 금융 중심지대들은 모두 인도에 포함되었다. 따라서 동파키스탄은 주요 수입원은 물론 바깥 세계와의 연결망도 빼앗긴 셈이 되었다.


파키스탄이 물려받은 것은 분리되기 전에 정부가 지배했던 금융 자산의 17퍼센트뿐이었다. 농업과 취약한 서쪽 국경, 그리고 여러 갈래로 찢겨진 국가가 남겨져 있을 뿐 발전을 추진하는 데 쓸 돈은 없었다.

무함마드 알리 진나는 인도의 독립운동가이자 인도 이슬람교 정치인이다. 파키스탄에서는 콰이드에아잠(우르두어로 '위대한 지도자') 및 바바에카움(또는 바바에쾀, 우르드어로 '국부')이라고 불린다. 인도 독립운동 과정에서 인도 국민회의의 비폭력주의를 비판하였고, 인도 국민회의가 자치권 행사 및 지방의회 구성에서 이슬람 세력을 배제하자 반발, 이슬람 국가 건설 운동에 동참한다.

1947년 7월 12일 파키스탄 독립과 동시에 영국령 파키스탄의 초대 총독이었고, 8월 12일 파키스탄의 독립과 동시에 초대 국회의장에 선출되었다. 현재 파키스탄에서 그의 생일은 공휴일이다. 그의 이름을 딴 국제공항도 존재한다. [출처: 위키백과]


파키스탄(Pakistan)이라는 국호는 '팤(pak)'은 우르두어로 순수를 뜻하고, '스탄'은 땅을 뜻하기 때문에 <순수의 땅>이라는 뜻이 되지만, 머리글자를 따서 만든 또 다른 명칭이 있다. 즉 P는 펀자브, A는 아프가니스탄(아프가니스탄 국경 부근의 파슈툰 지역), K는 카슈미르, S는 신드, T는 발루치스탄처럼 <탄>을 뜻한다.


파키스탄의 공용어인 우르두어는 1947년에 이 나라로 들어와 주로 펀자브 지방에 정착한 인도계 무슬림들의 모국어다. 그런데 나머지 지역에서는 우르두어를 쓰지 않는다.


신드 지역은 펀자브 주가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에 오래전부터 불만이 많다. 북서 국경 지대의 파슈툰족 또한 외부인들이 정해놓은 규칙을 아직까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카슈미르 주는 주민들 대다수가 독립을 원하고 있지만 인도와 파키스탄이 그나마 의견일치를 보이는 것이 바로 카슈미르의 독립을 허용치 않겠다는 것이다.

[출처 구글 이미지]

발루치스탄 역시 독자적인 독립운동을 벌이면서 가끔씩 봉기를 일으킨다. 파키스탄에서 발루치스탄 주가 갖는 의미는 만만치 않다. 이 지역은 파키스탄 전체 면적의 45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상당량의 천연가스와 광물이 매장돼 있다.


또한 파키스탄에서 또 다른 수입원으로 부상하는 것이 이란과 카스피 해의 원유를 중국으로 보내는 파키스탄의 육상 수송로다. 이 특별한 왕관에 박힌 보석이 바로 발루치스탄 주 남부의 과다르(Gwadar)라는 항구 도시다.


2015년 봄, 중국과 파키스탄은 과다르와 중국의 신장을 잇는 2,897킬로미터에 달하는 슈퍼 하이웨이와 철도, 그리고 송유관을 건설하는 460억 달러짜리 계약을 체결했다. <중국‐파키스탄 경제 회랑>으로 명명된 이 공사가 완공되면 중국은 인도양과 그 너머까지 곧장 진출할 수 있게 된다.

[중국-파키스탄 경제회랑 지도와 신장-과다르 연결망 출처 연합뉴스, 구글 이미지]

아직도 끝나지 않은 두 나라의 격돌


이슬람, 크리켓, 정보기관, 군부 그리고 인도에 대한 두려움. 이것들이 현재 파키스탄을 함께 묶어주는 것들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분리주의 세력이 훨씬 강해졌을 때 나라가 찢어지는 것을 막지는 못할 것이다. 실제로 파키스탄은 거대 이웃 인도와 주기적으로 무분별한 전쟁을 치른 이후 10년 이상 내전 상태에 있다.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첫 격돌은 1947년, 분리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카슈미르를 놓고 벌인 싸움이었다. 이 사태는 이듬해인 1948년 아시아의 베를린 장벽이라고 알려진 일명 통제선(Line of Control, 인도와 파키스탄 분쟁의 결과 현재 파키스탄에 속한 아자드 카슈미르와 인도 영토인 잠무 카슈미르를 가르는 길이 1천3백 킬로미터의 분단선)으로 양측이 카슈미르를 분할하면서 끝났다.

[카슈미르 출처 구글 이미지]
카슈미르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독립 당시인 1947년에는 독립 카슈미르 인도 번왕국의 소속이었으며 이 당시 번왕국들은 인도/파키스탄으로 편입, 아니면 독립 존속을 선택할 수 있었다. 당시 카슈미르의 힌두교도 번왕은 카슈미르의 독립을 선택, 인도와 파키스탄 모두의 편입 요청을 거절한다. 하지만 다수 무슬림들은 이 결정에 반대하였고 파키스탄의 지원을 받은 민병대가 카슈미르를 침공하기 시작하자 카슈미르 번왕은 인도에 지원을 요구, 그 대가로 인도로 (파키스탄에 점령당하지 않은 지역들은) 편입되어 인도와 파키스탄이 충돌하게 된다. 그리하여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의 결과 카슈미르는 지금과 같은 인도-파키스탄의 축소판 분쟁지역으로 분단되었다.

현재 카슈미르 지역을 더 많이 영유하고 있는 국가는 인도로 카슈미르 전체의 63%나 차지한다. 하지만 거주 인구 77%가 무슬림으로서 인도의 주들 중에서 무슬림이 힌두교인보다 많은 유일한 주이다. 이 지역의 무슬림들은 파키스탄과의 병합을 원한다. 무슬림 주민들은 틈만 나면 시위를 벌이며 아예 독립을 주장하기도 한다. 당연히 인도 정부가 허용할리가 없기에 주둔 인도군과의 마찰이 심하다.


아프가니스탄, 적의 적이 되게끔 만들다


두 나라가 또 다른 대리전을 수행하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나토군 대부분이 떠나버린 아프가니스탄이다. 파키스탄에게는 동쪽, 즉 인도에서 공격해올 경우 퇴각할 만한 내부의 전략적 깊이가 없다. 파키스탄-인도 국경 지역은 남쪽은 습지대, 북쪽은 타르 사막과 산맥이 포진해 있다. 이 모두가 군대가 지나기에는 지극히 어려운 지역이다.


하지만 이보다 더 쉬운 침공 통로는 남쪽과 북쪽 사이, 즉 보다 우호적인 펀자브 주의 중심에 있다. 그리고 펀자브 지역 안에 파키스탄의 수도인 이슬라마바드가 있다.


인도 국경에서 이슬라마바드까지 거리는 402킬로미터가 채 되지 않으며 지형도 대체로 평탄하다. 대규모 재래식 공격을 가할 경우 인도군은 불과 며칠이면 수도에 들이닥칠 수 있다. 파키스탄에게는 플랜 A와 더불어 위험에 대응하기 위한 플랜 B가 필요하다.


먼저 플랜 A는 인도군의 전진을 펀자브 주에서 멈추게 하고 국경을 넘어서 최대한 반격을 가하면서 인도군의 주요 보급로인 인도 고속도로 1A를 차단하는 것이다. 플랜 B는 만일의 경우 필요하다면 아프가니스탄 국경을 넘어 퇴각하는 것이다.


상대방의 계획을 좌절시키려고 인도와 파키스탄 양측은 아프가니스탄 정부를 제 구미에 맞게 길들이려고 한다. 아니면 아예 카불 정부가 그들 <적의 적>이 되길 바라던가.


19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인도는 외교적으로 모스크바 정부를 지지했지만, 파키스탄은 신속하게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에게 무기와 철도편을 제공했고 아프가니스탄의 무장 게릴라 조직인 무자헤딘이 붉은 군대와 싸울 수 있게 자금도 지원했다.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 오는 소련의 탱크과 아프가니스탄 군의 스팅어 미사일 출처 구글 이미지]

파키스탄과 아프간 탈레반과의 협력 관계는 어느 면에선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탈레반 구성원 대다수가 파키스탄 북서 국경의 다수 민족인 파슈툰족 출신이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경계는 듀랜드 라인(Durand Line)으로 알려져 있는 선이다. 1893년 당시 영국령 인도 정부의 외교장관이었던 모티머 듀랜드가 이 선을 긋자 아프가니스탄의 국왕이 이를 승인했다. 그러나 1949년 아프간 정부는 이 경계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식민시대의 잔재라며 이 조약의 무효를 선언했다.


그날 이후 파키스탄은 아프간 정부가 마음을 바꾸도록 설득해 오고 있지만 아프간은 꿈쩍도 않고 있다. 이 지역의 중심에는 일명 파슈투니스탄이라고도 하는 파키스탄 도시 페샤와르(페르시아어로 <국경에 있는 도시>라는 뜻이다.)가 있다. 이곳은 일종의 탈레반판 군산 복합 도시라 할 수 있다.

[듀란드 라인 출처 구글 이미지]
1893년 아직 파키스탄이라는 나라가 없었던 당시 이 지역 남쪽은 대영제국의 식민지인 인도 제국이었고, 이 국경선은 당연히 영국에 의해 그어졌다. 이 당시 인도 제국의 외무장관 헨리 모티머 듀랜드 경(Sir Henry Mortimer Durand, 1850 ~ 1924)와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친영 국왕 압두르 라만 칸(1840/1844~1901)이 체결한 협정을 기준으로 그어지고 모티머 듀랜드의 이름을 따 명명되었다.

영국령 인도 제국이 러시아 제국과 접하지 않도록 아프간 왕국을 완충지로 이용하기 위해 듀랜드라인의 동쪽 일부는 제국간 인위적 완충지대처럼 희한한 모양을 그리면서 와칸 회랑으로 자리잡혀 있다. 이후 인도 북서부 지역이 파키스탄으로 독립하게 되면서 기존 국경선 구조가 남게되어, 듀랜드라인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의 국경이 되었다.


파키스탄, 탈레반, 그리고 미국


파키스탄에서 결성된 탈레반은 2001년까지 몇 년에 걸쳐 알카에다의 외국 용병들을 들여왔다. 2001년 9월 11일 알카에다는 아프가니스탄에서 작전을 벌이는 동시에 대형 테러를 미국 본토에서 저질렀다.

[출처 구글 이미지, 연합뉴스]

이에 대한 보복으로 미군은 탈레반과 알카에다를 페샤와르에서 몰아냈다. 곧이어 아프간의 반탈레반 북부 동맹군이 남부로 진격해서 영토를 탈환했고 이어 나토 평화 유지군이 들어왔다. 9·11 이후 미국은 파키스탄에게 테러와의 전쟁에 참여하고 테러리즘을 배후에서 지원하는 짓을 그만두라는 외교적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당시 미 국무장관 콜린 파월은 무샤라프 파키스탄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회의 중인 대통령에게 당장 전화를 받으러 나오라고 요구했다. “우리랑 함께 하든가, 아니면 맞서든가, 선택하시오.” 리처드 아미티지 미 차관보 역시 파키스탄 정보부 수장에게 “만약 테러리스트들 편을 들면 파키스탄을 폭격해 석기시대로 만들어 버리겠소.”라고 말했다고 한다.

[무샤라프, 콜린 파월, 아미티지 출처 구글 이미지]

파키스탄은 결국 미국에게 협조를 했다. 정부는 몇몇 민병 조직들을 해체시켰고 극단주의 성향의 종교 단체들의 활동도 금지했다. 2004년 파키스탄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북서 국경에서 활동하는 단체들을 소탕했고, 자국 내에서 행해지는 미군의 무인 정찰기 폭격을 공공연히 비난하면서도 뒤로는 은밀히 허락하기도 했다.


그러자 탈레반은 부족 자치 지역의 몇몇 지역을 접수하는 등 격렬히 반발했다. 무샤라프 대통령은, 비록 실패했지만, 세 번이나 암살 시도의 표적이 되었고 유력 후계자였던 베나지르 부토는 피살당했다. 그리고 폭격과 지상 공격이 이어지는 혼란의 와중에 줄잡아 5만 명 이상의 파키스탄 민간인이 목숨을 잃었다.

_102146771_2e05f8e9-0c56-41f1-bfa4-64de8e5432af.jpg
[유세 중인 부토와 가계도 출처 구글 이미지]

지난 2년 사이에 이 양상은 더 뚜렷해졌다. 탈레반은 완전히 궤멸되지 않았다. 그들은 원래 출신지인 파슈툰족 지역으로 스며들어 갔다. 그리고 현재 자기들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이따금씩 출몰하고 있다.


2006년 영국은 아프가니스탄 남부 헬만드 주의 평화 유지 작전에 참여하기로 했다. 아프간 정부의 영향력이 헬만드 주의 주도인 라슈카르가를 벗어난 먼 곳까지는 미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곳은 아프간 파슈툰족의 핵심 영토였다. 적어도 450명이 넘는 영국 병사들이 목숨을 잃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아무튼 탈레반은 그렇게 영국군과 미군, 나토군의 피를 보았고 나토가 물러가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13년 만에 나토는 아프간에서 철수했다.

[출처 구글 이미지, 연합뉴스]

이 모든 것이 벌어지는 동안 파키스탄 권력의 최고위층들은 소위 <이중 게임>을 하고 있었다. 미국이 자신만의 전략을 가지고 있었다면, 파키스탄은 탈레반이 알고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즉 언젠가 미국은 물러갈 거라는 것 말이다. 파키스탄 군부와 정부 내의 일부 분파는 탈레반을 지속적으로 돕고 있었다.


머지않아 파키스탄의 배신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미국이 파키스탄 정부군 수비대 주둔지인 라슈카르가에 있는, 즉 파키스탄 정부도 훤히 알 만한 곳에 숨어 있는 알카에다 리더 오사마 빈 라덴을 찾아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국도 그 사실을 파키스탄 정부에게 알리지 않았다. 진정한 동맹으로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향후 둘 간의 가장 현실적인 시나리오는, "미국의 관심이 멀어지고 파키스탄에 대한 압력도 수그러지면 파키스탄 정부는 탈레반과 타협을 한다. 그러면 상황은 다시 원래로 돌아간다. 즉 북서 국경 지대는 그대로 남고 파키스탄은 아프가니스탄에서 자국의 입장을 계속 밀어붙인다."는 것이다.


탈레반이 다시는 외국계 지하드 그룹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약속을 조용히 지키는 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에 제한적인 관심만 둘 것이다. 하지만 이것도 파키스탄 정보부인 ISI가 탄생에 관여한 아프간 탈레반이 빈 라덴의 알카에다 같은 외부 아랍인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나 가능한 시나리오다.


미국, 인도의 새로운 동맹국이 되다


인도는 현재 패권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13억 인구를 가진 또 다른 이웃을 관리하는 데도 신경 써야 한다. 현 상황만 놓고 보면 모든 대외정책의 역량을 중국과의 관계에 집중해야겠지만 꼭 그럴 만도 아닌 이유가 있다. 바로 약 2,659킬로미터로 등재되어 있는 기나긴 담장인 히말라야다.


양측이 마찰을 일으킬 만한 사안들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가운데 으뜸이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지역인 티베트다. 주지하다시피 중국은 티베트를 원한다. 인도가 티베트를 손에 넣는 것을 막고 또한 티베트가 독립하게 됐을 때 인도가 그곳에 군사 기지를 설치하고 고지대를 호령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도 있다.


중국의 티베트 합병에 대한 인도의 대답은 달라이 라마에게 거처를 마련해 주고 히마찰 프라데시 주의 다람살라에 티베트 독립운동의 본거지를 허용한 것이었다. 인도 입장에서 이는 장기 보험을 들어둔 거나 다름없다.

[티벳 불교 총수이며 국가원수인 비구 달라이 라마의 1959년 망명 당시와 최근 모습 출처 구글 이미지]

이에 대한 중국의 입장은 네팔에 대한 태도에서 드러난다. 중국은 네팔에서 일고 있는 마오쩌둥주의 운동에 확고한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하고 있다. 인도는 마오쩌둥주의가 지배하는, 궁극적으로는 중국의 조종을 받는 네팔을 보고 싶지 않다. 하지만 중국의 돈과 무역이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사들이고 있다.


두 나라 간의 또 다른 쟁점은 중국 측에서 남티베트라 천명한 인도 남동부의 아루나찰 프라데시 주다.

2000년대 초반, 중국 정부는 아루나찰 프라데시 주 전체를 자기 것이라 주장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1955년 이래 이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해 오던 인도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일이었다.

[중국-인도 국경 분쟁 출처 구글 이미지]

이는 또한 인도가 점령하고 있는 지역들에게 중국이 주기적으로 보내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일례로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에 걸쳐 있는 펀자브 지역의 시크교 국가 건설 운동은 현재는 잠잠해진 상태이지만 언제고 다시 점화될 수 있다. 아삼국가 건설 운동 또한 몇몇 경쟁력 있는 움직임이 있기는 하다.


이처럼 2천1백만 명의 시크교도들과 1억 5천만 명의 무슬림 인구를 포함한 이런저런 독립운동 단체들에도 불구하고 인도에는 <인도라는 강력한 인식>이 있다. 다양성 안에서 통일을 유지하는 것도 이 덕분이다.

[시크교 사원과 신도들 출처 구글 이미지, 국제뉴스]

인도는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넓은 국토와 두 번째로 많은 인구를 보유한 나라다. 또 6개국(아프가니스탄을 포함하면 7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영토 안에는 14,484킬로미터에 이르는 항행 가능한 수로를 보유하고 있으며 물 공급도 나쁘지 않고 경작지도 넓은 편이다. 또한 주요 석탄 생산국이며 원유와 가스도 웬만큼은 매장돼 있다.


하지만 현대 기술의 발전은 양국 모두에게 방대한 양의 에너지원을 필요하게 했다. 지리는 그들에게 그 정도의 부까지는 선사하지 않아서 두 나라 모두 수평선 너머 해양을 바라봐야 하는 입장이 되었다. 그래서 두 나라는 바다에서 맞닥뜨린다.


25년 전 인도는 이른바 동방 정책에 시동을 걸었다. 인도는 증대해 가는 중국과의 무역(주로 수입)을 잘 처리해 가면서 동시에 중국을 자기네 뒷마당으로 보는 식의 전략적 관계를 굳혀갔다. 더불어 미얀마, 필리핀, 태국과의 관계 강화에도 힘쓰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도는 이제껏 적당히 거리를 두고 있던 한 국가를 새로운 동맹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바로 미국이다. 21세기에 들어 한층 자신감을 얻은 인도는 점점 다극화되어 가는 세계에서 미국과도 협력해야 할 이유를 찾았다.


인도는 항공모함을 보유한 것을 비롯해 비교적 잘 조직된 대규모의 현대식 해군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중국이 구상하는 대양 해군과 경쟁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그래서 인도는 여러 관심 사안들을 하나로 묶는 것으로 눈높이를 조정한다.


예컨대 중국 해군이 말라카 해협을 지나 벵골 만을 통과해 인도 끝단에서 아라비아 해로 들어가 중국이 건설한 파키스탄의 우호적인 항구 도시인 과다르로 향하는 것을 막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따라다니며 감시할 수는 있는 것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인도는 파키스탄으로 돌아오고 파키스탄은 인도로 돌아온다.



<2편에 계속>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