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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의 힘 (2)

미국 - 지리적 축복과 전략적 영토 구입으로 세계 최강국이 되다

by Andy강성
2장 미국
지리적 축복과 전략적 영토 구입으로
세계 최강국이 되다
[미국 지도 출처 본문]

위치. 첫째도 위치, 둘째도 위치. 만약 당신이 복권에 당첨돼서 살고 싶은 나라에 땅을 사고 싶다고 해보자. 부동산 중개인이 가장 먼저 소개해 주는 곳은 바로 미합중국이리라.


그곳은 멋진 동네다. 경치도 좋고 인공 폭포도 몇 개 있다. 교통망도 완벽하게 갖춰져 있다. 이웃들 또한 훌륭해서 전혀 말썽을 일으키지 않는다. 하지만 생활공간을 좀 더 세부적으로 쪼개본다면 그 가치는 심각하게 하락하고 만다. 특히 임차인들이 모두 같은 언어를 쓰는 것도 아니고 임대료도 저마다 다른 통화로 지불한다.


미국에는 50개 주가 있지만 오히려 28개 주권 국가들의 모임인 유럽연합은 결코 이루지 못할 방식으로 하나의 국가가 되었다. 대다수 유럽연합 국가들은 훨씬 강하고 분명한 민족 정체성을 지니고 있다. 반면 미국인은 합중국을 자신과 동일시한다. 이 현상은 미국의 지리적 특성과 통합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해할 수 있다.


흔치 않은 지리적 위치를 확보한 나라


이 방대한 나라의 국토를 동쪽부터 서쪽까지 붓으로 대충 칠해보면 대략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먼저 애팔래치아 산맥 방향으로 향하는 동부 연안의 평원(대서양 연안 평원) 지대다. 이 지역은 길지는 않지만 항해가 가능한 강들 덕에 수원이 풍부하고 토양이 비옥하다.

[미국 전체 지형도 출처 구글 이미지]

좀 더 서쪽으로 목을 빼고 보면 로키 산맥 방향으로 뻗어가는 대평원(Great Plains)이 나온다. 이 지역 안에 거대한 뱃길을 자랑하는 미시시피 유역이 펼쳐져 있는데 이 강은 플로리다 반도와 몇몇 섬들이 호위하는 멕시코 만으로 흘러들어간다.

[출처 구글 이미지]

대규모 산지인 로키 산맥을 넘어가면 사막(*대분지, Great Basin)이 나오고 이어 시에라네바다 산맥, 그리고 좁은 연안 평지가 나온다. 그리고 마침내 태평양의 파도가 눈앞에 펼쳐진다. 남서쪽은 말 그대로 사막이디.

[미국 서부 지역 출처 구글 이미지]

북쪽, 즉 오대호(Great Lakes, 북아메리카 대륙 동부에 있는 거대한 호수군) 위로는 세계에서 가장 넓은 선캄브리아대 암석지구인 캐나다 순상지(楯狀地)(*로렌시아 순상지, Craton-Shield-Platform)가 펼쳐져 있다. 이 지역의 상당 부분은 인간이 정착하기에 어려운 장벽이 차지하고 있다.


캐나다의 면적은(이보다 작은 멕시코도) 어찌 보면 미국에게는 귀한 자산이다. 해양에서 접근하는 적대 세력이라면 상상을 초월하는 긴 보급로를 확보해야 한다. 빤한 얘기지만 비슷한 규모의 육상 부대라도 별수 없다.

[캐나다 순상지 출처 구글 이미지]

17세기에 이 땅에 처음 발을 내딛고 정착을 시작한 유럽인들은 이 처녀지 동부 연안이 천연 항만과 비옥한 토지를 갖춘 곳이라는 것을 금세 알아차렸다. 여기야말로 그들의 모국과는 달리 자유로운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곳이었다. 미 대륙의 지리적 특성이 여느 때보다 많은 사람들을 대서양 너머로 끌어들였다.


1732년 조지아 주를 마지막으로 초기 13개 식민지 주가 성립됐다. 이 13개 주는 차근차근 독립의 열망을 키워가다가 결국 독립전쟁(1775-1783년)을 일으켰다.


이 시기 초반, 조금씩 연결망을 넓혀가기 시작한 13개 주는 북쪽은 매사추세츠에서부터 1천6백 킬로미터, 남쪽은 조지아까지 하나로 묶여 뻗어나갔는데 이곳에 거의 250만 명에 달하는 인구가 모인 것으로 추정된다.

[출처 구글 이미지]

식민주의자들에게는 또 다른 장벽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정치였다. 영국 정부는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 지역에 주민들이 정착하는 것을 금지했다. 교역이나 세금을 확실히 징수하려면 동부 연안을 넘지 않는 것이 편했기 때문이다.


1800년대 초반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자취를 따라가던 일부 탐험가들은 대담무쌍하게 애팔래치아 산맥부터 미시시피에 이르는 길을 돌파했다. 그들은 이 여정을 통해 대양으로 이어지는 물길과, 태평양 연안과, 남서부를 탐험했던 스페인 사람들이 보았던 광활한 땅을 발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신의 한 수, 루이지애나 구입


당시 막 걸음마를 뗀 미국은 안전과는 거리가 먼 나라였다. 또한 경계선 안에서 제약을 받고 있던 터라 강대국이 되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국민들은 애팔래치아 서쪽 오하이오까지 진출했지만 미시시피로 이어지는 지역, 즉 뉴올리언스로 내려가는 서쪽 하구는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었다.


이러한 형세 안에서 아메리카의 프랑스 사령관은 멕시코 만에서 구세계뿐 아니라 현재 미국의 심장부라 할 광활한 서부 지역과도 교역할 수 있었다.

[미국 초창기의 영토 상황 출처 구글 이미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이듬해인 1802년, 토머스 제퍼슨은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에게 꼭 필요한) 지구상에 단 하나의 장소가 있다. 이곳의 소유주는 본래 우리의 적으로, 그곳은 다름 아닌 뉴올리언스다.”


프랑스는 골치 아픈 주인이었다. 그러나 특이하게도 해결책은 전쟁이 아니었다. 1803년, 미합중국은 프랑스(나폴레옹)로부터 뉴올리언스가 있는 루이지애나 지역 전체의 지배권을 사들였다.

[나폴레옹과 루이지애나 출처 구글 이미지]
* 나폴레옹도 원래는 루이지애나를 통치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 식민지인 아이티에서 혁명이 일어나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했다. 또 유럽에서 영국 해군의 위력이 강했으므로 카리브해 식민지에 해군을 파견하기도 어려웠다. 또 루이지애나가 아무리 넓은 땅이라 해도 탐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뉴올리언스를 제외하면 당장 이익을 얻을 만한 것도 별로 없고, 유지비는 많이 드는 상태였다.

나폴레옹이 스페인으로부터 1800년에 되찾은 땅을 3년 만에 팔기로 한 것은 유럽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다. 당시 프랑스가 유럽에서 계속 전쟁을 벌이고 있었으므로 루이지애나를 판 것이 잘한 일이라 평가하기도 한다. 실제로 땅을 팔지 않고 버틴 스페인은 필리핀, 쿠바 등 야금야금 미국에게 땅을 빼앗겨 갔다. 제퍼슨은 루이지애나를 팔겠다는 나폴레옹의 제안에 흔쾌히 응했고 이것으로 미국 땅은 약 2배 크기로 늘어났다.


풍부한 수계의 공급을 받는 미시시피 강은 미니애폴리스 부근에서 발원해서 남쪽으로 약 2,897킬로미터를 흘러 멕시코 만에서 끝난다. 이렇듯 강들은 큰 항구로 이어지며, 수상기를 이용한 운반은 예나 지금이나 육로 운송보다 훨씬 싸게 들어 당시 한창 상승일로이던 교역을 위한 천연 수로 역할을 톡톡히 했다.

[미국 강들 출처 구글 이미지]

루이지애나 구입 못지않게 1819년에 맺은 대륙횡단조약*도 거의 이에 버금가는 가치를 안겼다. 스페인은 미국이 현재 캘리포니아와 오리건의 경계인 북위 42도선 위인 극서부 지역에서 사법권을 행사하는 것을 인정했다. 반면 스페인은 그 아래인 미국 영토의 서쪽을 지배한다는 계약 내용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미합중국은 <태평양>에 이르게 된 것이다.

[대륙횡단조약 출처 구글 이미지]
* 애덤스-오니스 조약(Adams-Onís Treaty, '대륙횡단조약'이라고도 한다)은 1819년에 북아메리카 2개국 간의 국경 분쟁을 끝낸 미국과 스페인과의 역사적인 협정을 말한다.

조약은 당시 신세계에서 스페인의 힘이 약화되어 있었던 영토권에 관한 미국과 스페인 사이의 긴장을 높이는 결과가 되었다. 플로리다를 미국에 주는 것 이외에, 조약은 텍사스의 새바인 강 가의 국경 분쟁을 해결하고, 로키산맥과 태평양까지 제대로 된 미국 영토를 설정했다.


멕시코와의 영토 분쟁, 역사는 미국의 손을 들어주었다


1821년에 멕시코가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자 뉴올리언스에서 불과 32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두 나라가 마주 보는 상황이 되었다. 멕시코는 캘리포니아 북부 끝까지 지배하고 있었다.


미국이 어느 정도 눈을 감고 있었지만 멕시코는 당시에도 루이지애나와 맞대고 있는, 오늘날 텍사스를 포함한 동쪽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당시 멕시코의 인구는 620만 명이었고 미국은 960만 명이었다.

[멕시코 독립 영웅들 중앙 ‘미겔 이달고’ 신부와 오른쪽 서 있는 ‘호세 마리아 모렐로스’ 출처 구글 이미지]

미국은 기존 미국인들과 새 이주민들에게 은근히 멕시코 접경지대 정착을 장려했다. 하지만 이주민의 파도가 주로 서부와 남서부에 치우치다 보니 오늘날의 멕시코에 해당되는 지역에 주민들이 뿌리내릴 가능성이 높지 않았다. 그러자 미국은 그곳의 인구수를 늘리기 위해 동화와 진흥책을 실시했다.


한편 미국은 텍사스 지역에는 지속적으로 침투해 들어가면서도 '먼로 독트린'을 발표했다. 1823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이 이 독트린을 발표한 것은 서반구에서 더 이상 땅 욕심을 내지 말라는 경고를 유럽 세력에게 보내기 위해서였다.


1830년대 중반 텍사스에는 멕시코와의 쟁점을 힘으로 밀어붙일 수 있을 만큼 많은 수의 백인 정착민들이 자리 잡았다. 1835년부터 이듬해까지 벌어진 텍사스 혁명으로 백인 정착민들이 멕시코인들을 몰아냈지만 전세는 대접전이었다. 미국의 돈과 무기, 사상의 수혜를 받은 텍사스가 독립을 선언한 것이다(‘텍사스 공화국’).

[텍사스 혁명의 주역 스티븐 오스틴과 샌 하신토 전투의 샘 휴스턴 출처 구글 이미지]

이후 텍사스 공화국은 1845년 스스로 미합중국에 귀속되었고(텍사스 병합, ‘Texas Annexation’), 1846년부터 2년간 벌어진 멕시코와의 전쟁에서는 미국과 힘을 합쳐 싸웠다. 두 연합군은 남쪽의 이웃을 제압했고 멕시코는 결국 리오그란데 강의 남쪽 제방 모래밭에서 끝나는 영토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미국-멕시코 전쟁으로 인한 영토 변화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21세기에 이르러 원래 히스패닉 땅이었던 남서부 지역의 문화적, 역사적 기억이 다시금 되살아나고 있다. 주민의 주 구성원이 히스패닉계 주민들로 빠르게 교체되고 있으며 이 추세라면 몇십 년 안에 그들이 다수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 어떤 위협도 없던 시대, 괌과 카리브해까지 진출하다


일단 1848년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이제 유럽인들은 떠났고, 미시시피 유역은 지상 공격으로부터 안전했고, 태평양에도 도달했다. 게다가 남아 있는 북미 원주민들을 제압하는 일도 문제없을 것 같았다. 미합중국에는 어떤 위협도 없었다. 바야흐로 돈을 벌 수 있는 시대였다.


1848년부터 이듬해까지 몰아쳤던 캘리포니아 골드러시가 일조한 것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서부로 향하는 이주의 물결은 꾸역꾸역 이어졌다. 1862년에 제정된 자영농지법(공유지 불하법)은 연방 소유 토지 160에이커를 5년 동안 경작하는 이주민들에게 아주 적은 금액만 받고 불하하는 법이었다.

[골드러시 당시 광고 출처 구글 이미지]

1867년, 미국은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사들인다. 이 일은 당시 이 거래를 성사시킨 국무장관 윌리엄 슈어드(William Henry Seward, 1801 ~ 1872)의 이름을 붙여 <슈어드의 미친 짓>이라고까지 조롱을 받았다. 그는 총 720만 달러를 주고 알래스카를 샀는데 1에이커당 2센트를 쳐준 셈이었다.


언론은 이를 두고 눈만 한 보따리 산 꼴이라고 비아냥댔지만 1896년 이 지역에서 금광이 발견되자 그 얘기는 쏙 들어가고 말았다. 그리고 수십 년이 더 흐른 뒤 이번에는 거대한 유전이 발견되었다.

[슈어드와 알래스카 매입 국채, 알래스카 지도 출처 구글 이미지]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869년, 대륙 횡단 철도가 개통됐다. 전 같았으면 미 국토를 횡단하는 일은 몇 개월이나 걸리는 위험천만한 모험이었지만 이제는 일주일이면 가능했다.

[미국의 영토 확장과 횡단 철도 부설 출처 구글 이미지]

이제 미국은 대양 해군을 육성하는 데 눈을 돌렸다. 1898년, 미국은 스페인에 전쟁을 선포했다. 그리고 군대를 파견해 쿠바, 푸에르토리코, 괌은 물론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까지 손에 넣었다. 이 모든 지역이 유용했지만 특히 괌은 필수적인 전략적 자산이었다. 쿠바 또한 강대국이 지배한다면 전략적 위협이 될 소지가 있었다.

[미국-스페인 전쟁의 도화선이 된 메인호 폭발 사건 출처 구글 이미지]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그 위협은 제거됐다. 그리고 1962년, 소련과의 분쟁에서는 소련이 마지못해 굴복함으로써 다시 한번 그 위협은 제거됐다. 1898년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이긴 미국은 쿠바와 플로리다 해협을 확보함으로써 카리브해에 성큼 다가설 수 있었다.

[위: 쿠바에 배치된 소련 핵탄두 아래: 케네디와 흐루쇼프, 소련 선박을 감시하는 미군 비행기 출처 구글 이미지]

미국은 이에 그치지 않고 하와이의 퍼시픽 아일랜드를 합병해서 자국의 서부 해안으로의 안전한 접근을 도모했다. 또한 1903년에는 파나마 운하의 배타적인 권한을 보장받는 조약을 체결했다. 무역 붐이 일어났다.

[파나마 운하 출처 구글 이미지]

막강한 해군력을 내세운 미국의 패권시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어투는 상대적으로 부드러웠지만 핵심은 그가 전 세계를 당당하게 <항해했다(sailed)>는 거였다. 1907년 12월에 대서양 부대의 전함 16척이 미국에서 출발했다. 해군의 평상시 제복 색깔인 흰색으로 선체 전부를 칠해서 <위대한 백색 함대(The Great White Fleet)>라고도 불렸던 이들의 항해는 하나의 강렬한 외교적 시그널이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와 대백색함대 출처 구글 이미지]

백색 함대는 수개월에 걸쳐 브라질, 칠레, 멕시코,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필리핀, 일본, 중국, 이탈리아, 그리고 이집트까지 망라한 전 세계 20여 항구를 방문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일본에 입항한 것이었다. 이는 곧 미국의 대서양 함대가 궁극적으로 태평양까지 나설 수 있다는 의미였다.

[대백색함대의 항로와 기항지 출처 구글 이미지]

미국은 적어도 1941년까지는 “바깥 세계에서는 항구적인 동맹들과도 일정하게 거리를 두라.” 조지 워싱턴의 퇴임 연설에서의 조언대로 되도록 바깥 세계와의 분규나 동맹을 피하고자 신경을 쓴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은 이 국면을 확 바꿨다. 미국은 일본에 경제 제재를 가해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만들었지만 대신 확대일로에 있던 군국주의 일본의 공격을 받아야만 했다. 이제 미국은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전후 세계의 최강 경제 대국, 최강 군사 대국으로서 미국은 세계의 해상 항로를 통제할 필요를 느꼈다. 평화를 지키는 것과 아울러 상품을 시장으로 내보내기 위해서라도 말이다.


1940년 가을에 영국은 더 많은 군함들이 절실했다. 반면 미국에게는 50척 정도의 여분이 있었다. 결국 기지 협상을 위한 구축함들이라는 이름으로 영국은 강대국이 될 수 있을 능력을 전쟁을 계속 수행하게 하는 도움과 맞바꾸어 버렸다. 이렇게 해서 서반구의 영국 해군 기지 대부분이 미국의 손에 넘어갔다(‘Destroyers-for-bases deal’).

[출처 구글 이미지]

동쪽에서 일본을 무릎 꿇린 미국은 위의 시설들을 그들이 어느 정도 소유한 태평양과 괌 전역에 건설할 기회를 잡았다. 이제 미국은 동중국해에서 일본의 오키나와 섬까지 직접 기지를 설치하기에 이르렀다.

[태평양 미군 기지 출처 구글 이미지]

미국은 육지에도 눈을 돌렸다. 미국은 1948년부터 1951년에 이르는 동안 마셜 플랜으로 유럽 재건 비용을 대는 대신 소련이 그 지역을 파괴하지 않고 대서양 연안에도 나서지 않겠다는 점을 분명히 해둬야 했다.


1949년 워싱턴 정부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창설을 주도했다. 이로써 미국은 독일에 잔류하는 서방 군사력의 지휘권을 효과적으로 넘겨받았다. 나토의 민간인 수장은 일 년은 벨기에가, 다음 해엔 영국이 맡게 되지만 군 사령관은 늘 미국인이 맡는다. 지금까지도 나토의 가장 큰 화력 부대는 미국이다.

[1949년 9월 17일 워싱턴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 외무장관 회담 출처 NATO]

나토 창립 멤버인 아이슬란드, 노르웨이, 영국, 이탈리아도 자국의 기지에 대한 미국의 권한과 접근을 보장해 줌으로써 미국은 태평양 뿐 아니라 북대서양과 지중해의 패권까지 쥐게 되었다. 1951년, 미국은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와 동맹을 맺고 남반구에도 세력을 확장했다. 그리고 1950년부터 1953년까지 이어진 한국전쟁 후에는 북쪽으로까지 영향력을 넓혔다.

[출처 연합뉴스]

유렵과 러시아는 과연 미국의 위협이 될만한가


1960년대에 베트남에서 겪은 실패로 신뢰에 타격을 입은 미국은 해외 문제에 개입하는 것에 좀 더 신중한 태도를 갖게 됐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그 패배가 미국의 세계 정책을 크게 바꾸지는 않았다.

[베트남전쟁 반대 시위 출처 구글 이미지]

이 시기 미국의 패권이 도전을 받을 만한 지역은 단 세 곳뿐이었다. 유럽, 러시아, 그리고 중국이었다. 이들 모두가 점점 강력해지겠지만 그중 두 곳은 한계에 봉착하고 말 것이다.


한층 더 가까운 연합으로서의 유럽연합과, 공통적인 대외 및 방어 정책이라는 유럽인들의 두 개의 꿈이 조금씩 사그라지는 현실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다. 그렇잖아도 적은 방위비만을 지출하는 유럽 국가들이다 보니 결국은 미국에 의존한 채로 있을 수밖에 없다. 게다가 2008년 경제 위기로 많이 위축된 유럽 강국들은 해외에서 모험을 시도할 의욕마저 줄어든 상태다.

[브렉시트와 2022년 EU회원국 출처 연합뉴스]

러시아의 경우, 2014년에 오바마 대통령이 러시아를 “지역 강국에 불과하다.”라고 말한 것은 쓸데없이 자극한 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아주 틀린 건 아니었다. 러시아에게는 전 세계의 해상 항로로 진출하는 데 필요한 부동항이 여전히 부족하고 전시에 발트해와 북해 또는 흑해와 지중해를 경유하여 대서양으로 진출할 군사 능력 또한 부족하다.


미국은 2014년 우크라이나의 정권 교체 배후에 부분적으로 관여했다. 민주주의가 전 세계로 확산되기를 기대하는 미국은 우크라이나를 러시아의 영향권에서 끌어내고자 했다. 이는 또한 푸틴 대통령의 힘을 빼려는 의도이기도 했다.

[2014년 당선된 포로셴코와 러시아와의 분쟁 출처 구글 이미지]

중국, 중국, 중국! 그리고 동아시아 태평양 지대


분석가들이 지난 10년에 대해 쓴 것을 보면 대다수가 21세기 중반에 이르면 중국이 미국을 따라잡을 것이며 세계의 최강대국으로 부상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1장에서 부분적으로나마 살펴본 이유로 인해 나는 그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적어도 1세기는 걸릴 거라고 본다.


경제로만 보면 중국은 미국에 견줄 만큼 성장했지만, 그리고 그 덕분에 국제사회에서의 영향력과 주빈석의 한 자리를 사들일 수 있었지만, 군사력과 전략적인 측면에서는 미국에 수십 년은 뒤처져 있다. 그 수십 년을 미국은 자국의 위치를 더욱 확고히 다지는 데 쓸 것이다. 물론 그 간격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는 듯하지만.


미국 정부의 대외전략 전문가들 중 다수는 21세기 역사는 아시아와 태평양이 주도할 것이라는 데 의견을 같이한다. 전 세계 인구의 절반이 이 지역에 거주한다. 특히 인도까지 포함하면 2050년경에는 이 지역이 세계 경제 생산의 절반을 차지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동아시아 지역에 개입하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미국이 점점 더 많은 시간과 돈을 이 지역에 투자하는 것을 볼 것이다. 그 한 예로 미국은 2019년 오스트레일리아 북부에 해병대 기지를 건설했다.

미국이 동아시아에서 진정한 영향력을 행사하려면 적대 행위가 발생했을 때 그들을 구하러 미군이 온다는 점을 우방국들이 확신하도록 제한적인 군사 행동에 투자해야 할 것이다.


미국은 워싱턴 편에 서는 것이 최선의 이익이라는 것을 전 세계에 보여주려 하고 있다. 반면 중국은 반대로 나간다. 따라서 양측은 도전을 받았을 때 서로 응대를 해야 한다. 도전이 닥칠 때마다 미국이 회피하면 동맹국의 신뢰는 떨어지고 경쟁국들의 공포심도 점점 누그러져서 마침내 미국의 동맹 가운데서 진영을 갈아타는 사례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에 태평양에서는 강대국들 간에 이뤄야 할 타협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단기적으로는, 다른 나라들에게 분쟁 지역 내로 들어오기 전에 통지할 것을 요구하며 방공식별구역을 선포한 중국과, 일부러 통지하지 않고 비행을 강행하는 미국 간의 타협 여부가 초기 사례로 부각할 가능성이 높다.

[2023년 중국의 대만 침범 출처 구글 이미지]

일본에 관한 미국의 정책은 중국과 관련해 전략적 이해관계를 공유하면서 일본을 안심시켜 주는 것과 더불어 미군의 오키나와 연장 주둔을 보장받는 데 있다. 미국은 일본이 자위대 전력을 증강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본의 군사력이 태평양에서 미국을 넘볼 만큼 성장하는 것은 제한한다.

[오키나와 미군 기지 이전 계획과 아베의 안보법안 폐기 시위 출처 구글 이미지]

거의 모든 국가들이 복잡한 외교적 퍼즐로 얽혀 있는 이 문제의 지역에서 핵심 국가들은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그리고 싱가포르인 것 같다. 이 세 나라들은 비좁은 말라카 해협에 자리잡고 앉아 있고, 날마다 1억 2천만 배럴의 석유가 좀점 더 목이 마른 중국과 다른 나라로 향하고 있다. 이 세 나라들이 친미 성향을 버리지 않는 한 미국은 핵심적인 이익을 수호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출처 구글 이미지, 연합뉴스]

중국은 정치적으로 이념을 내세우지는 않지만 민족주의를 국민의 단결을 공고히 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 경우 서로 타협점을 찾을 것이나 서로의 입장을 잘못 해석하거나 지나치게 도박을 걸 경우 위험해질 수 있다.


발화점은 대만이 될 수 있다. 중국의 대만 침공을 촉발할 임계점은 미국이 대만을 공식적으로 승인하는 경우나 대만의 독립선언이다. 그러나 아직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아서 이 지역의 수평선에서 중국군이 쳐들어오는 장면은 보기 어려울 것 같다.

[2024년 대만 총통 선거 결과 출처 구글 이미지]

에너지마저 자급자족하게 된 미국, 그들은 중동국가들과 어떻게 관계를 유지할까


연안 해역에서 벌어지는 해양 굴착과 광범위한 지하 시추 작업 덕분에 미국은 에너지 자급자족을 넘어 2020년 무렵에는 에너지 수출 국가가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이 사실의 핵심은 걸프 지역으로부터 원유와 가스 공급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물론 그 지역에는 여전히 미국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존재하지만 그 집중도는 아무래도 전보다는 떨어지게 마련이다.


미국의 관심이 약해지면 걸프 지역 국가들은 새로운 동맹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 한 후보가 이란이고 중국도 또 다른 후보다. 그러나 이 경우는 중국이 그만큼 비중 있는 대양 해군을 구축하고 전개시킬 준비가 되어 있을 때에나 가능하다. 미국 제5함대는 바레인에 있는 기지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 이것도 콘크리트 블록의 한 조각이어서 미국은 섣불리 포기할 생각이 없다.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사우디아라비아와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그리고 카타르의 원유가 미국의 불빛을 밝히고 자동차를 달리게 하는 데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됐을 때 미국 국민과 의회는 물을 것이다. “무엇 때문에 바레인에 기지가 필요한가?” 만약 대답이 단지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서”라고만 하면 이는 논쟁을 불식시키기엔 역부족이다.


중동의 다른 곳에서 단기적인 미국의 정책은 이란이 지나치게 강력해지는 것을 견제하는 데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핵 문제를 비롯한 여타 문제를 일괄적으로 타결하려는 시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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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무장 이슬람주의자들과 수십 년이 걸릴지도 모를 싸움에 착수한 아랍 국가들에 대해서 워싱턴 정부는 제퍼슨식 민주주의의 발현을 장려하려던 낙관적 기대는 접은 것처럼 보인다. 단지 미군 병사들이 사막에 발을 들이는 일이 없기만을 간절히 바라면서 상황을 관리하는 데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무장 이슬람단체 출처 구글 이미지]

이스라엘과의 긴밀했던 관계는 느리게나마 식어갈지 모른다. 미국의 인구 지형도가 바뀌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히스패닉과 아시아계 이민자들이 늘어나면서 미국의 관심은 더는 국익에 필수적이지 않은 중동 끝자락의 작은 나라에서 라틴 아메리카와 극동 아시아로 옮겨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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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아메리카에서의 정책은 파나마 운하의 개방을 연장하고 그 대안으로 떠오른 니카라과 운하의 이해득실을 따지고(중국의 힘을 업고 사업을 주도하던 홍콩 HKND가 2018년 4월에 문을 닫으며 사실상 백지화되었다), 브라질의 영향력을 견제하는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경제적인 면에서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에서의 영향력 확대를 놓고 중국과 경쟁하겠지만 쿠바에서만큼은 카스트로 사후 내지 공산당 이후의 지배권을 확고히 다지려고 갖은 공을 들이고 있다.

[니카라과 운하 계획과 미국-쿠바 국교 정상화 출처 구글 이미지]

아프리카에서도 미국은 천연자원을 찾고 있지만 그 대부분은 중국이 선점하고 있다. 중동 지역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은 북아프리카에서 이슬람주의자들과의 싸움을 관심 있게 지켜보면서도 지상에서 9천 미터 이상을 넘지 않는 선에서 지나친 개입은 피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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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쇠락할 거라는 예측의 유행


해외에 허수아비 정권을 세우려는 미국의 실험은 어느 정도 막을 내린 것처럼 보인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그 외의 지역에서 미국은 약소국들과 부족들의 정신력과 지구력을 과소평가한 감이 있다. 물리적 보안과 통합이라는 자국의 역사 때문인지 미국은 자신들의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논쟁의 힘을 과대평가했다.


그래서 수니파와 시아파, 쿠르드족, 아랍, 또는 무슬림이 됐든 기독교도가 됐든, 타협과 각고의 노력, 심지어 투표를 통해 인간 본연의 뿌리 깊은 타인에 대한 역사적 공포를 이겨낼 수 있다고 믿는다. 사실 많은 이들이 그럴 엄두를 내지 못하거나 경험적으로 떨어져 사는 것을 더 선호하는데도 말이다. 미국의 행동들은 당장은 진실을 밑바닥에 감춘 채 부글부글 끓고 있는 냄비 뚜껑을 열어젖힌 것과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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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30년 동안 미국의 쇠락이 임박했거나 진행 중이라는 예측이 유행해 왔다. 그러나 과거에도 그랬듯 현재도 이 예측은 빗나가고 있다. 여전히 탁월한 경제 대국으로 남아 있으며, 나머지 나토 국가들의 방위비를 합친 것보다 훨씬 많은 액수를 국방력 증강과 발전에 투입하고 있다.


게다가 미국의 인구는 유럽이나 일본처럼 고령화하지 않았다. 2013년 갤럽 조사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 25퍼센트가 이민을 갈 경우 가장 가고 싶은 나라로 미국을 꼽았다.


[미국 인종 및 연령 분포 출처 구글 이미지]

프로이센의 정치가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1세기도 훨씬 전에 이중의 의미가 담긴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다. “신은 바보들과 주정뱅이들, 그리고 미국에게 특별한 섭리를 베푸신다.” 이 말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해 보인다.

[비스마르크와 당시 독일 동맹 출처 구글 이미지]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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