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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의 힘 (3)

서유럽과 러시아

by Andy강성
Chapter 3 서유럽
이념적 분열과 지리적 분열이 함께 감지되다


[유럽 지도 출처 본문]

근대 세계는 좋든 나쁘든 유럽으로부터 나왔다. 이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서쪽 전초 기지는 계몽주의를 탄생시켰고 이는 산업혁명의 모태가 되어 현재 우리가 일상적으로 영위하는 모든 것을 가능케 했다.


걸프 만(*Gulf Stream?)이 키워준 <기후의 축복>을 받은 이 지역은 대규모 경작에 적합한 강수량과 생육에 좋은 토양을 지녔다. 수확량이 풍부하다는 것은 식량의 잉여분이 발생해 그로 인한 교역이 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교역 중심지가 세워지면 또 이를 중심으로 도시들이 형성됐다.

[Gulf Stream 출처 구글 이미지]

서유럽에는 진정한 의미의 사막이 없다. 빙하는 일부 북쪽 지역에 한정돼 있는 데다 지진이나 화산, 대규모 홍수 또한 드물다. 하천들은 길고 평탄해서 선박을 띄워 교역하기가 좋았다. 여러 바다나 대양으로 흘러들어가는 하천들은 서쪽, 북쪽, 남쪽의 연안지대로 흘러가면서 천연 항구를 여럿 만들었다.


그렇다면 왜 이 지역에 유독 많은 민족 국가들이 존재하는가? 유럽 전체를 놓고 볼 때 눈에 띄게 많은 산맥과 강, 계곡들을 보면 이내 납득이 간다. 유럽의 주요 강들은 서로 만나지 않는다. 대다수 강들이 연결되어 있지 않은 탓에 이 하천들이 천연 국경 역할을 했다. 그리고 저마다 권리에 따라 경제적 영향권을 형성했다.

[유럽의 산맥 지형과 주요 강들 출처 구글 이미지]

그 길이가 2,858킬로미터로 유럽에서 두 번째로 긴 다뉴브 강은 이를 적절히 보여주는 사례다. 다뉴브 강은 독일의 블랙 포레스트(Black Forest, 독일 남서부 삼림지대)에서 발원해서 남쪽으로 흘러 흑해로 간다.


이 여정을 거치는 동안 무려 18개 나라에 영향을 주는 다뉴브 연안은 그 자체로 천연 국경을 형성한다. 슬로바키아와 헝가리,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세르비아와 루마니아, 그리고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의 국경선이 그것들이다.


이 경로는 서로 이어지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오스만 제국의 천연 국경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제국들의 세력이 약해지는 틈을 타 각 민족들이 부상하더니 마침내 여러 작은 민족 국가들을 형성하였다.

[다뉴브강 연안 지도 출처 구글 이미지]

지리의 축복을 받은 서유럽 vs. 지리의 차별을 받은 남유럽


서유럽 국가들은 일부 남유럽 국가들에 비해 훨씬 부유하다. 북쪽이 남쪽보다 일찍 산업화를 이룬 덕분에 경제적인 성공도 그만큼 크게 이루었다. 서유럽 국가들 상당수가 유럽의 심장부를 이룬 덕분에 부자 이웃들 간에 서로 교역 라인을 지속하기도 훨씬 수월했다. 이와 달리 스페인 같은 경우는 교역을 하려면 피레네 산맥을 넘거나 포르투갈과 북아프리카 같은 제한된 시장을 바라봐야만 했다.


프랑스


북유럽평원 지역에 속한 나라들 가운데 지리적 이점을 가장 많이 누리는 나라는 프랑스일 것이다. 유럽에서 북쪽과 남쪽을 전부 아우르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유일한 강국이다. 프랑스에서 서유럽에 면한 지역에는 광대하고 비옥한 대지가 펼쳐져 있고 상당수의 강들이 서로 연결돼 있다.

[프랑스 지형도 출처 구글 이미지]

이탈리아


남쪽과 서쪽을 들여다보면 적지 않은 나라들이 유럽의 권력 지형도에서 제2선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는 얼마간은 이들의 지리적 위치에 연유한다. 그 한 예가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북부에 한참 뒤처져 있는 이탈리아의 남부다.


중공업과 관광업, 금융의 중심지인 북부는 오래도록 높은 생활수준을 누려왔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남부에 대한 국고 보조금 삭감을 주장하는 정당들이 창설되더니 아예 남부와 분리하자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이탈리아 지도와 북부와 남부 경제격차 출처 구글 이미지]

스페인(*지리의 힘 2 통합)


스페인은 늘 지리적인 어려움을 겪어왔다. 연안 평야는 토질도 형편없는 데다 규모도 작았고 하천들의 길이도 짧은 탓에 국내 시장 곳곳으로 접근하기도 쉽지 않았으며, 고원 분지인 메세타 센트럴은 아예 내륙 일부 시장과의 연결을 막아 버렸다. 서유럽 지역과의 교역은 피레네 산맥이 버티고 있는 바람에 더욱 험난했다.

[스페인 지형도 출처 구글 이미지]

1500년대에 국가의 틀을 갖춰가기 시작한 스페인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국가 중 하나이면서도 중앙 권력 주변에 있는 지역들을 하나로 합치려고 힘겹게 씨름하고 있는 나라이기도 하다.


이 나라의 산악지형과 면적(영국보다 2배나 큰!)은 늘 교역과 강력한 정치적 통치력을 행사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으며, 각 지역마다 자신들만의 독특한 문화적 및 언어적 정체성을 그대로 간직할 수 있게 한 요인이 되었다.


이런 상이함이 낳은 복잡다단함과 열정은 아직도 스페인의 국가(國歌)에 가사가 없다는 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무슨 내용을 넣어야 할지 서로 동의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 들어서도 최북단의 바스크 극단주의자들이 저지르는 테러를 수반한 분리 독립운동부터 동일한 목표를 갖고 있는 카탈루냐의 정치 운동에 이르기까지 여러 형태로 남아 있다.

[출처 중앙일보]

스페인은 대다수 서유럽 국가들에 비해 인구밀도가 훨씬 낮다. 마드리드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대도시는 해안선을 따라 형성돼 있다. 바르셀로나, 발렌시아, 빌바오가 그 좋은 예다. 메세타 같은 내륙 지역은 종종 〈텅 빈 스페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해안의 도시로 향하는 이주가 가속화됐기 때문이다.


유럽의 남서쪽이라는 스페인의 위치는 고대부터 카르타고와 로마, 즉 북아프리카와 유럽 양쪽에서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히스파니아(고대 로마제국 시대의 이베리아 반도를 일컫는 말)는 6백여 년 동안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서고트족이 잠깐 지배하다가 서기 711년 5월, 이슬람군의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지브롤터에 상륙한 뒤 몇 년 내에 이베리아 반도 전체를 장악하게 되면서 알 안달루스(Al Andalus)라 이름 붙였다. 수도 코르도바에는 도서관들이 세워졌고 문학, 과학, 건축이 꽃을 피웠다. 스페인어에는 아랍어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지야드의 군대와 이슬람의 침입 경로 출처 구글 이미지]

1469년으로 가보자. 우리는 그해에 무슬림 통치의 종말이 시작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라 공주가 아라곤 왕국의 페르디난도 왕자와 결혼을 하고, 가톨릭 군주로 알려진 이 부부는 그라나다에 대한 공격을 개시한다. 1492년 마침내 그라나다가 항복을 선언하고 카스티야에 합병된다.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 출처 구글 이미지]

이후 스페인은 대략 1500년부터 1681년에 이르는 황금기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즈음 남아메리카의 금광과 은광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막대한 양의 부가 국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켜 주었고, 덕분에 군사력도 확충되었고 건축, 문학, 회화 분야에서는 눈부신 걸작들이 탄생했다.


하지만 1600년대 중반에 이르자 스페인은 해상 항로 지배권을 잃어가고 있었다. 1588년 스페인의 펠리페 2세는 영국해협으로 전함 130척을 투입해서 영국 함대를 박살내려고 했으나 결국 칼레 해전에서 영국 해군에게 패하고 북쪽으로 도주하다가 북대서양에서 부는 폭풍우에 함대가 휩쓸려 버린 것이다. 이로써 거의 1만 5천여 명의 수군들과 함께 세계 최강의 해군력이라던 스페인의 명성 또한 사라지게 되었다.

[펠리페 2세와 칼레 해전 출처 구글 이미지]

19세기 후반 들어 영국, 독일, 프랑스가 눈부신 발전을 이루는 것을 본 스페인도 산업혁명을 쫓아가 보려고 했으나, 발전이 더딘 철도와 도로망으로 경제를 하나로 묶으려다 보니 여전히 북쪽에 있는 나라들의 뒤를 쫓아가기도 벅찬 형편이었다. 게다가 국론은 분열돼 있고 국가보다는 지역에 더 충성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후 심각한 내전을 거쳐 1939년부터 프랑코 총통이 독재 정권을 수립해 36년간 지배하였다.

[히틀러와 프랑코, 내전 당시 공화파 수병 출처 구글 이미지]
[스페인 내전을 그린 피카소의 게르니카 출처 구글 이미지]

독재자 프랑코 총통이 1975년 사망하고 난 후 민주 국가로 거듭나 1986년에 유럽연합에 가입하였고,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나머지 서유럽 국가들을 따라잡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 나라에 내재한 지리적, 재정적 취약성은 지속적으로 발목을 붙잡았다. 결국 경제개혁, 재정확대 등으로 인한 과잉 지출 문제가 심화되더니 급기야 중앙 정부는 통제권을 상실하기에 이르렀고, 2008년 금융위기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은 나라들 중 하나가 되었다.

[스페인 경제 요약-주스페인대사관과 유럽국가들의 2008년 이후 GDP 양상 출처 구글 이미지]

바스크와 카탈루냐의 독립 시도와 지브롤터 분쟁


바스크는 1512년에 스페인과 프랑스가 갈라졌을 때 생긴 7개의 전통적인 지역들로 이뤄졌다. 많은 바스크인들은 바스크를 에우스칼 에리아(Euskal Herria)라고 부르면서 하나의 나라로 여긴다. 이들 인구의 4분의 1이 쓰는 언어인 에우스카라어는 인도-유럽 어족보다 오래된 언어로서 그 어떤 언어와도 관련이 없다고 한다.


1630년대에 바스크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은 마드리드 왕실이 전쟁 자금을 마련하는 과정에서 촉발됐다. 마드리드는 빌바오의 방직공장에 세금을 부과했고 대형 소금가게들을 징발했다. 그런데 이 일은 왕실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반란은 3년 동안이나 지속됐고 진압을 위해 군대가 투입되기까지 했다. 바스크인들은 이 일을 두고두고 잊지 않고 있다.


1989년에 바스크 지역에서 <바스크의 조국과 자유(Euzkadi ta Askatasuna, ETA)>라는 과격 단체가 폭탄 테러를 일으키고 1997년에는 지방의회 의원을 살해하는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결국 대중들이 등을 돌리자 2018년 ETA는 해체를 선언했다.

[바스크 독립 시위와 무장단체 ETA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이런 민족적 정체성으로 인해 여전히 바스크는 자치권을 요구하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평범한 바스크인으로 살면서 평생 스페인이라는 국가를 접할 일은 딱 세 번입니다. 운전면허증, 여권, 연금 받을 때. 나머지는 우리 바스크 기관들이 제공합니다."


1640년에 스페인은 프랑스에 대한 군사 작전을 카탈루냐에서 개시했는데 여기에는 카탈루냐도 전쟁에 동참할 수밖에 없게 하려는 의도도 깔려 있었다. 그러나 카탈루냐 지도자들은 국경을 넘어온 프랑스 측에 합류했다. 그 둘은 힘을 합쳐 스페인군을 무찔렀다. 그런데 1648년에 프랑스 군대가 철수하고 1652년에 심한 기근이 들자 마드리드는 카탈루냐에 식량 공급을 끊으면서 다시금 지배권을 획득했다.


카탈루냐(바르셀로나도 이 지역에 포함)는 방직업으로 부를 쌓아왔지만 현재는 중공업과 관광업 등으로 경제를 다변화시켜 가고 있다. 금세기에 들어서면서 이곳의 독립 지지자들은 카탈루냐가 스페인한테 받는 것 이상으로 스페인의 금고에 더 많이 기여하고 있다는 말을 서슴지 않고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8년 경제 위기가 닥쳤을 때 분리 독립을 내세우는 측에서는 중앙 정부가 카탈루냐의 세금을 불공정하게 쓴다는 해묵은 불만을 부추겼다. 그러다 2014년에 비공식적으로 독립에 대한 찬반투표가 행해졌고 이어 2017년에도 실시된 투표를 카탈루냐 의회는 승인했지만 스페인 대법원은 인정하지 않았다.

[카탈루냐 독립 시위 출처 구글 이미지]

스페인은 가만히 앉아서 카탈루냐를 잃을 생각이 없다. 스페인 역사를 돌이켜보면 북쪽의 침략자들은 대개 피레네 산맥 양측에 좁게 펼쳐진 나지막한 땅을 통해 이 나라로 진입했다. 그곳이 바로 북서부의 바스크 땅과 북동부의 카탈루냐 땅이다. 북쪽에서 스페인이 펼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어는 이 통로를 봉쇄하는 것이다.


18세기 초반에 영국한테 지브롤터를 빼앗긴 스페인은 줄곧 그곳을 돌려받고 싶어 한다. 영국은 지브롤터 주민들의 의견을 따를 것이라고 공공연하게 말한다. 2002년에 지브롤터 주민들을 대상으로 스페인 영토로 돌아가고 싶은지를 묻는 조사를 실시한 적이 있는데 99퍼센트가 “됐네요(No, thank you).”라고 대답했다.

[출처 구글 이미지, 연합뉴스]

이제껏 저지른 여러 실수와 문제점을 안고 있음에도 오늘날 스페인은 성공 스토리를 쓰고 있다. 이 나라는 2008년 경제 위기에서도 살아남아 유럽의 경제 강국 중 하나라는 지위를 되찾았다. 또 훌륭한 인프라를 보유하고 있으며 유럽에서도 최고의 기대수명을 가진 사람들이 활동하는 활기찬 도시들을 보유하고 있다.


1500년대 하나로 합쳐졌던 이 왕국은 가까운 미래를 위해 여러 지방 정부가 모인 하나의 민족국가와 거기서 야기되는 긴장감을 균형 있게 유지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프랑코 시대에 흔히 들었던 “스페인은 유럽이 아니고 유럽이었던 적도 없다.”라는 정서가 이 나라에서 덜 타당하게 여겨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스 (*지리의 힘 2 통합)


발칸 반도의 남동쪽 끝에 자리 잡고 있는 이 나라는 북쪽으로는 알바니아, 북마케도니아*, 불가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북동쪽으로는 터키(퀴르키예)와 접하고 있다. 국경 길이는 총 1,180킬로미터에 이르지만 대부분의 국경은 해안선이 차지하고 있다.

* 그리스 내 마케도니아 지역과 이름이 중복되면서 그리스와 갈등을 겪어오다 2019년에 국명을 변경했다.


그리스의 해안은 가파른 벼랑들이 주로 차지하고 있는 데다 농사를 지을 만한 연안 평야도 거의 없다. 내륙은 가파르기가 훨씬 더하고 하천들 또한 수송에 적합하지 않으며 폭이 넓고 토양이 비옥한 골짜기도 드물다.


그리스 북쪽에 있는 산들은 그 방향으로 교역을 하는 데는 방해가 되지만 육로를 통해 지상으로 공격해 오는 적의 위협을 막아주는 데는 좋은 방벽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그리스가 안정과 번영을 구가하려면 에게해의 제해권을 장악해야 한다. 즉 해양 강국이 돼야 한다.

[출처 구글 이미지]

그리스 본토는 에게해, 지중해, 이오니아해에 둘러싸여 있는 형국이다. 에게해는 그리스 본토와 터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부터 마르마라해를 지나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들어가서 곧장 가면 러시아 영향권에 있는 흑해에 도달한다. 따라서 에게해는 그리스 안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리스 지형도와 터키와 분쟁 중인 연안 해역 출처 구글 이미지]

고대 그리스 시대가 막을 내린 이후 2천 년에 걸쳐 로마, 비잔티움, 오스만, 영국, 그리고 러시아까지도 그리스가 스스로 운명을 책임지면서 지정학적 게임의 장으로 귀환하는 것을 끊임없이 방해해 왔다. 이들 나라야말로 하나같이 에게해와 지중해 동쪽을 지배하려고 했고 쇠약해진 그리스는 이 목적에 딱 들어맞았다.


1453년은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게 함락된 해였다. 이후 200년 동안 오스만 제국이 섬들과 본토 주위의 바다, 게다가 본토 일부를 지배하는 동안 그리스는 확실히 주변부로 밀려났다. 심지어 국민 대다수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니고 있음에도 정작 그리스는 그리스도교를 주로 믿는 유럽으로부터도 소외되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과 오스만 제국의 영토 출처 구글 이미지]

17세기 중반 이후 발칸반도에 대한 오스만 제국의 지배력이 약해지면서 그리스는 독립전쟁(1821~1829년)을 벌여 결국 1832년에 열강들은 그리스의 주권을 인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이 협상에 관여하지도 않았고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인구의 3분의 1도 안 되는 사람들만이 새로운 그리스 국경 안에 포함되었다.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전한 시인 바이런과 그리스의 독립 출처 구글 이미지]

이후 열강들은 그리스를 영토가 제한된 군주제 국가로 만들었다. 그들의 결정에 따라 덴마크의 빌헬름 왕자가 요로요스 1세로 등극하였고, 올림픽이 중단된 지 1천6백 년만인 1896년에 아테네에서 다시 개최되어, 마라톤에서 지방의 목동 출신인 그리스의 스피리돈 루이스가 우승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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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로요스 1세와 제1회 아테네 올림픽 포스터(위), 스피리돈 루이스(아래) 출처 구글 이미지]

1920-1930년대는 지속되는 분열과 불안정 그리고 파시즘과 손발을 맞추는 군사 통치의 시대였다. 그리스는 독재자 이오안니스 메탁사스 장군의 지휘 아래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는데, 이탈리아 침공에서 고배를 마신 뒤 독일에 항복했고 이후 독일과 이탈리아, 불가리아 군대에 의한 가혹한 점령기를 보내게 된다.


1944년 10월, 우여곡절 끝에 독일군이 철수하자 영국군이 군중의 열광적인 환영을 받으며 아테네로 입성했지만 이후 내전(정부군과 공산당)이 발생했고, 1950년대와 1960년대는 스스로 국가의 수호자일 뿐 아니라 정치의 수호자로 자처하는 군부 독재의 시기였다.


내전의 후유증으로 경제 발전을 이루지 못한 그리스는 나머지 유럽 국가들보다 훨씬 뒤처지게 되었고, 민주주의가 다시 찾아오는 것을 보려면 1974년까지 기다려야 했다.

[좌: 내전 당시 공산주의 레지스탕스 ELAS 대원들, 우: 군부 독재 출처 구글 이미지]

이렇게 군부 독재 국가가 됐음에도 그리스는 1952년에 가입한 나토 회원국의 지위를 여전히 유지했다. 이는 외부 세력에게는 이 나라의 지리적 위치가 여전히 전략적 중요성을 갖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1981년 그리스는 나중에 EU가 되는 EEC에 가입했고, EEC 가입은 그리스 경제에 큰 보탬이 되었다.


최근에 들어와 그리스는 발칸 루트를 통해 부자 나라들로 가려는 이주민과 난민 행렬에 대해 EU는 물론 다른 회원국들의 지원이 없는 것에 불만이 많았다. EU 파트너들이 책임을 분담할 생각이 없는 상황에서 난민들을 앞으로도 수년씩이나 자신들 국가의 열악한 캠프에 수용해야 할지 모르는 현실이 난감할 뿐이다.


이에 대해 EU는 2016년 이주민들이 바다를 건너는 것을 좀 더 적극적으로 막고 그리스에서 되돌아온 이들을 받아주도록 터키를 회유하였다. 그 대가는 수십억 유로에 달하는 난민 지원 기금과 터키 시민들의 EU 국가 무비자 여행이었다. 그러자 바다를 건너는 이들의 수는 극적으로 줄어들었다.

[그리스 이주민 경로와 캠프 출처 본문, 연합뉴스]

그리스의 큰 문제는 건너편에 잠재적인 거대 적수인 터키가 버티고 있다는 것이다. 두 나라 간 역사적인 전투는 1071년 동터키 지방에서 비잔티움의 그리스인들이 셀주크 투르크와 대결했던 만지케르트 전투와 현대로 들어와서는 그리스 독립전쟁1919년부터 1923년까지 벌어진 그리스-터키 간 전쟁이 있었다.


최근에는 터키와 키프로스(Cyprus) 문제를 놓고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그리스는 여전히 키프로스의 수호자로 자처하고 있는데 이곳은 동부 지중해의 주요 항로로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오스만 제국의 통치가 종식되자 1878년부터 영국은 이 섬을 행정적으로 책임지다가 1914년에는 아예 통합해 버렸다.


1960년에 이룬 키프로스의 독립은 다수의 그리스계 주민과 소수의 터키계 주민 간에 정파적인 폭력사태를 불러일으켰다. 사태가 벌어지자 유엔은 양측 사이에 그린 라인(두 적대 지역 사이의 경계선)을 치고 평화 유지군을 파병해서 감시했다.


1983년, 북부 지역이 북키프로스터키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나섰다. 이를 인정하는 나라는 단 두 곳, 바로 터키와 그들 자신뿐이다. 따라서 키프로스는 현재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있는 상황이다. 유엔은 터키의 점령하에 있는 이곳을 여전히 키프로스공화국의 영토로 인정하고 있다.

[출처 구글 이미지]

최근 키프로스 주변의 동부 지중해에서 대규모 가스전들이 발견되면서 가뜩이나 갈등의 소지가 많은 그리스와 터키 사이를 더욱 복잡하게 꼬이게 하고 있다. 자국 수역에서 에너지를 뽑아내지 못하는 것에 초조해진 터키는 사이프러스와 그리스 영해 주변을 정찰하고 있으며 리비아와는 시추 협정을 맺었다.


2020년 6월, 터키는 로도스와 크레타섬까지 포함한 곳에서 시추를 개시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터키의 움직임에는 자국을 위한 자원 확보 못지않게 그리스의 안정을 해치려는 의도가 다분히 담겨 있다. 구제 금융을 받는 그리스에게는 군사적으로 대응할 자금이 부족하지만 나토의 두 회원국인 이들의 힘은 아직은 막상막하다.

[그리스와 터키의 키프로스 분쟁 및 터키의 시추선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그리스는 주변국들과 계속 부딪히는 터키와 달리 이웃 친구들을 두고 있다. 2019년 그리스는 이집트, 팔레스타인, 이스라엘, 사이프러스, 요르단, 이탈리아와 함께 카이로에 본부를 둔 동지중해가스포럼(EMGF)을 설립하는 데 힘을 보탰다(2021년 프랑스도 합류).


그리스와 터키가 분쟁에 돌입했을 때 포럼의 다른 멤버들이 누구에게 도움을 줄지는 분명하다. 이집트와 터키는 일찍이 리비아 같은 다른 지역적 이슈들로 갈등을 빚은 바 있고, 프랑스도 최근 터키와 관계가 급속히 악화된 상태다.

[2019년 EMGF 설립 모임 출처 구글 이미지]


그리스는 최근 전략적으로 의미가 있는 크레타섬의 수다만에 이미 미군의 해군기지를 유치했고 2020년에는 군사 훈련, 급유, 게다가 결정적으로 응급상황 시에 그리스의 군부대에 접근할 수 있는 권한을 미군에 부여한다는 데까지 합의했다.

[크레타섬에 도착한 미 해군 '허셜 우디 월리엄스(USS Hershel Woody Williams)' 함과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 출처 구글 이미지]

위기 상황에 처한 러시아 해군이 흑해에서 탈출해야 할 때 그리스는 2차 방어진지가 될 수 있다. 또한 그리스는 유럽의 난민 위기 최전선에 있는 데다 동부 지중해에서 나오는 가스 파이프라인의 핵심 경로가 될 운명으로 보인다. 이 세 가지 이슈 모두 가까운 장래에 전략적 사고를 차지할 가능성이 높다.


그리스 위기, 유럽의 이념적 분열과 지리적 분열로


2008년 유럽을 강타한 재정 위기에 이어 유로존 내에서 <이념적 균열>이 진행되는 지금, 유럽 역사에 깊이 뿌리내린 분열은 여전히 그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2012년 그리스를 디폴트 위기에서 구하고 유로화 사용국에 계속 붙잡아두기 위해 유럽에서는 구제금융이 실시되었다.


기증자와 요구자는 북쪽 국가들이었고, 수령인과 탄원자는 남쪽 국가들이었다. 독일인들은 물었다. “우리가 왜 그래야 하는가?” 이에 대한 답변으로 돌아온 “아플 때도 있고 건강할 때도 있다.”라는 그리스인들의 말은 그들의 불만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독일은 이른바 긴축안이 전제된 구제금융을 제시하며 이끌었고 그리스는 이에 반발했다. “어째서 독일인들이 우릴 통치해야 하는가? 유로화로 인해 우리보다 더 큰 이득을 보는 게 그들인데 말이다.” 이처럼 그리스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는 북쪽이 부과한 긴축정책을 주권에 대한 침해로 보고 있다.

[그리스 구제 금융 출처 구글 이미지]

그리스의 중심부는 섬들은 1천4백여 개에 이른다(에게 해를 벗어난 여러 암초들까지 넣으면 6천 개는 된다). 냉전기간 동안 에게해와 지중해에서의 소련을 영향력을 의식한 미국과 영국의 일부 지원을 받았지만 이제 그 지원마저 끊긴 상태에서도 그리스는 여전히 해군력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방위비를 지출하고 있다.


2010년부터 부채 위기로 고통받고 있는 그리스에게 국방비는 경제적 및 사회적 측면에서 악몽이나 다름없는지라 결국은 삭감할 수밖에 없었다. 1981년에 GDP의 5.7퍼센트를 차지했던 그리스의 국방 예산은 나토 유럽 동맹국들 가운데서는 필시 가장 높은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2000년에 그 비중은 3.6퍼센트로 내려갔고 2018년에는 2.4퍼센트까지 줄었다.


국내로 눈을 돌려봐도 해묵은 지리상의 분열은 여전하다. 아직도 아테네를 마뜩잖게 바라보는 여러 지역들이 있고 현대 국가의 평범한 일상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곳들도 남아 있다. 그러나 그리스를 만들었던 그 상수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바로 산과 바다 말이다.


동쪽에서 일어나는 균열과 긴장의 조짐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세대는 평화를 규범으로 여기며 성장했다. 그러나 두 차례 세계대전에서 얻은 트라우마, 그 뒤 이어진 70여 년간의 평화, 그리고 소비에트 연방의 붕괴를 목격한 많은 유럽인들은 서유럽이 <포스트 분쟁 지역>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폴란드


유럽인들과 러시아인들 간의 긴장은 언제 갈등을 유발할지 모른다. 그 적절한 예가 역사와 지리적 형태 바꾸기라는 망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폴란드의 대외정책이다.


북유럽평원의 통로는 북으로는 폴란드의 발트해 연안과 남으로는 카르파티아 산맥*의 초입 사이, 즉 가장 좁은 곳에 위치한다. 러시아군의 편에서 보면 방어선을 구축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지점은 없다. 또 공격자들의 입장에서는 러시아로 진격하기 전에 병력을 바짝 집결할 수 있게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폴란드 지형과 카르파티아 산맥 출처 구글 이미지]

폴란드인들은 이 나라의 동과 서를 휩쓸며 지나간 군대들을 보아야 했고 국경선이 수시로 바뀌는 것도 경험했다. 폴란드는 대략 서기 1000년경에 처음 출현하는데 20세기말 현재의 형태로 정착될 때까지 국토의 형태가 바뀌거나, 나라가 사라지거나, 다시 나타나는 것이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다.*


* 폴란드의 영토 변화 역사

[좌: 1635년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최대 영역 우: 1772~1795 폴란드 분할(러시아, 프러시아, 오스트리아) 출처 구글 이미지]
[좌: 1919년 독립 직후의 폴란드 아이보리색 우: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소의 분할 출처 구글 이미지]

유럽연합 내에서 독일과의 균형추로서 영국과 폴란드와의 관계는 1939년의 뼈아픈 배신에도 불구하고 어렵지 않게 회복되었다. 당시 영국과 프랑스는 폴란드가 독일로부터 침공을 당할 시 지원을 약속하는 조약에 서명했다. 하지만 막상 공격이 시작되자 독일의 전격전에 대한 응답은 교착전, 소위 앉은뱅이 전쟁이었다.


1989년 새로이 해방된 폴란드가 찾아 나선 주요 동맹국은 미국이다. 미국은 폴란드를 두 팔 벌려 끌어안는가 하면 그러지 않을 때도 있다. 이 모두 러시아를 염두에 두고 있는 까닭이다. 1999년 폴란드가 나토에 가입하자 나토 동맹국들은 모스크바에서 불과 644킬로미터 앞까지 다가오게 되었다.


발칸 지역


발칸 지역 국가들 역시 소비에트 제국으로부터 해방됐다. 이 지역의 산악 지형은 많은 소규모 국가들을 탄생시켰다. 유고슬라비아로 알려진 남슬라브 연합과 같은 최선의 노력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요인들은 통합을 저해하는 작용을 했다.

[발칸지역 지형도와 국가들 출처 구글 이미지]

1990년대의 전쟁 기억을 뒤로하고 과거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구성했던 나라들은 이제 서방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있다. 그러나 동쪽의 주요 세력인 세르비아만은 정교회와 슬라브 민족의 정서가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다. * 마케도니아는 2019년에 북마케도니아공화국으로 국명을 변경했다.

[구 유고연방과 1차 세계대전 전의 발칸 형세 출처 구글 이미지]

이 지역은 지금 유럽연합과 나토, 터키, 러시아가 너도나도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경쟁을 벌이는 <경제적, 외교적 각축장>이 되었다. 슬로베니아를 비롯해 알바니아,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루마니아는 나토와 유럽연합 체제 편입을 선택했다. 다만 나토 회원국인 알바니아만이 아직 유럽연합 멤버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


이 긴장감은 저 위 북쪽의 스칸디나비아 반도까지 뻗어 올라간다. 덴마크는 이미 나토에 가입했고, 최근 스웨덴에서는 근 2세기 동안 이어온 중립국의 지위를 포기하고 나토에 가입하는 문제를 두고 논쟁이 벌어졌다.


하지만 이런 사건에도 불구하고 스웨덴에서는 나토 가입에 반대하는 입장이 여전히 우세하다. 이 논쟁이 진행되는 와중에 모스크바는 스웨덴이든 핀란드든 어느 쪽이든 나토에 가입할 경우 응분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발언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두 나라 모두 2023년 가입).

[스칸디나비아반도 국가들과 2023년 나토 가입 상황 출처 구글 이미지]

이러한 도전에 직면한 유럽연합과 나토 동맹국들에게 필요한 것은 통일된 전선의 수립이다. 하지만 프랑스와 독일이라는 유럽연합 내의 핵심 관계가 손상되지 않고 존속되는 한 러시아가 도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프랑스는 독일을 두려워하고, 독일은 프랑스를 두려워한다


프랑스는 현재 독일 땅이 된 북유럽평원의 평야지대로 인해 지리적으로 완전히 보호받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사실 독일이 단일 국가가 아닐 때는 이것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런데, 독일이 통일되고 말았다.


원래 독일은 일종의 개념으로만 존재해 오고 있었다. 1806년 신성로마제국이 와해된 뒤 1815년 비엔나 의회에서 39개 소규모 주들의 연합체가 독일 연방이라는 이름으로 모였다. 이는 북독일 연방의 결성으로 이어졌고, 독일의 승전부대가 파리를 점령하면서 보불전쟁이 끝나자 1871년 마침내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1871년 독일의 통일 출처 구글 이미지]

독일의 통일 선언은 프랑스를 무릎 꿇리고 난 직후 파리 베르사유 궁에서 행해졌다. 이로써 프랑스의 방어선에서 가장 취약한 지점이었던 북유럽평원이라는 틈을 메우기는 더 어려워졌다. 그로부터 70년 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이런 일이 한 번 더 일어난다.

[좌: 베르사이유 궁정에서의 통일 선언, 우: 빌헬름1세와 비스마르크 출처 구글 이미지]

독일은 독일대로 북유럽평원의 평야지대는 독일이 발 뻗고 잘 수 없는 이유 두 가지를 안겨주었다. 서쪽에는 통일 강국 프랑스가 오랫동안 버티고 있으며, 동쪽에는 러시아라는 거대한 곰이 웅크리고 있었다. 독일에게 최악의 상황은 이 둘이 통로인 북유럽평원을 건너 한꺼번에 침공해 오는 것이다.


프랑스는 독일을 두려워하고, 독일은 프랑스를 두려워한다. 1907년 프랑스가 러시아, 영국과 손을 잡고 3자 동맹을 맺었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당시 영국 해군은 필요할 경우 독일의 북해와 대서양 접근을 차단할 수 있는 범위를 추가했다. 그래서 독일의 해결책은 또다시 프랑스를 선제공격하는 것밖에 없었다.

[출처 구글 이미지]

제2차 세계대전의 공포 이후 실제로는 수세기에 걸친 전쟁을 뒤로하고 유럽이 이에 대한 해답으로 삼은 것은 유럽 땅에서 유일한 압도적인 세력, 즉 나토 설립을 주도하고 향후 유럽연합의 태동을 가능케 한 미국이라는 존재를 인정하는 거였다.


유럽연합 안에서 감지되는 지리의 복수


유럽연합의 설립에는 프랑스와 독일이 더 이상 서로에게 주먹을 날리지 못하도록 서로를 꼭 끌어안게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이 생각은 멋지게 들어맞았고 이윽고 세계 최대의 경제권을 아우르는 드넓은 지리적 공간이 태어났다.


보다 긴밀한 유럽연합의 28개 회원국 가운데 19개국의 주도로 마침내 1999년 단일 통화 체제인 유로화 체제가 출범했다. 덴마크와 영국을 제외한 회원국 모두는 요건이 충족되면 단일 통화 체제에 가입하기로 했다.

[유럽연합의 확대 출처 구글 이미지]

유로존 국가들은 그리스가 강조하듯 <아플 때나 건강할 때를> 막론하는 경제적 혼인을 맺었지만, 정작 2008년 위기가 터지자 부유한 나라들이 구제금융을 지원해야 할 상황에 처하면서 부자 국가들 내부에서 격렬한 반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배우자들은 아직도 서로 으르렁대며 상대방에게 접시를 던지고 있다.


독일인들은 유럽이 분열되면 자신들에 대한 해묵은 공포가 다시금 고개를 들 것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실패한 유럽연합은 독일 경제에도 좋을 것이 없다. 하지만 비경제적 영역에서는, 독일은 거의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재무장을 했으며 그나마 갖고 있는 무력을 사용하는 것조차 꺼린다.


2014년에 당시 우크라이나 대통령 야누코비치를 끌어내리는 교묘한 술책에 관여한 독일은 이 사태가 있고 나서 곧장 크림 반도를 합병한 러시아를 강력하게 비난했다. 하지만 러시아로부터 공급받는 가스 파이프라인을 의식한 베를린 정부는 에너지 의존도가 훨씬 덜한 영국에 비해 현저히 낮은 수준의 제재안을 지지하였다.

[출처 구글 이미지]

유럽연합과 나토를 통해 독일은 서유럽에 닻을 내릴 수 있었지만 폭풍우 심한 날에는 이 닻 또한 다른 쪽으로 내릴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독일 정부는 필요할 경우 초점을 동쪽으로 맞추고 모스크바와 훨씬 가까워질 수 있는 지리적 위치에 있다.


영국, 영광스러운 고립? (* 지리의 힘 2 통합)


대서양을 마주 보는 대륙에서 벌어지는 이 모든 술수들을 지켜보는 영국은 때론 유럽 대륙에 발을 들이밀기도 하고 때론 <영광스러운 고립(splendid isolation)>을 택하면서 향후 유럽에서 자기들보다 더 강한 세력이 부상할 수 없음을 입증하는 데 열중하고 있다.


영국의 서쪽에는 단단한 바위가 많은 고지대인 레이크 지역, 캄브리아 산맥, 다트무어 같은 황야지대가 펼쳐져 있다. 반면 동쪽은 보다 평평하고 바위들도 마치 분필처럼 좀 더 잘 부서지는 무른 지형이다.


이런 특색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도버의 화이트 클리프(White Cliffs, 영국해협과 접해 있는 높이 250미터의 절벽)다. 이 같은 분리는 영국의 서쪽이 동쪽보다 더 포근하고 비도 더 자주 내리는 이유를 설명해 준다(Gulf Stream의 영향).


북쪽과 남쪽을 가르는 특징도 있다. 산은 주로 섬의 서쪽 절반에 대부분 있다. 하지만 북쪽으로 올라갈수록 지대도 점점 더 높아진다. 스코틀랜드에서도 고지대의 대부분은 북서쪽에 치우쳐 있다.


상대적으로 온화한 날씨, 평평한 강, 농사에 적합한 토양, 수도와 가까운 것 등은 남부가 북부보다 더 발전한 이유가 된다. 스코틀랜드의 인구를 전부 합쳐도 잉글랜드의 5천6백만 명에 한참 못 미치는 550만 명에 불과하며 웨일스는 3백만, 북아일랜드는 2백만 명을 밑돈다.


지리적 영국의 조건은 훌륭한 편이다. 질 좋은 농지, 훌륭한 하천들, 최적의 해양 접근성, 유럽 대륙과 교역하기에 부족함 없는 어획량이 있다. 게다가 섬나라 민족이라는 덕도 본다. 유럽의 이웃들이 전쟁과 혁명의 소용돌이에 휩싸이는 동안 영국은 그 지리적 조건에 고마워했던 때가 수차례 있었다.

[영국의 지형도와 화이트 클리프 출처 구글 이미지]

원래 잉글랜드는 바다를 가로질러 북쪽으로 표류하던 ‘아발로니아(Avalonia)’라는 자그마한 대륙에 붙어 있었다. 그즈음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는 ’로렌티아(Laurentia)’ 대륙의 일부였던 스코틀랜드가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 두 대륙의 충돌 이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경계를 따라 달리는 체비엇 힐스(cheviot hills)라는 구릉지대를 탄생시켰다. 이후 기원전 1만년경 해수면 상승으로 아일랜드가 브리튼에서 분리된다. 이때 지금의 브리튼과 유럽 대륙 사이의 땅도 물에 잠기면서 브리튼을 섬으로 만들어 버렸다.

[브리튼 섬의 형성과 채비엇 힐스 출처 구글 이미지]

서기 43년 로마는 잉글랜드 남부를 정복하였다(Roman Britain, 현재의 웨일스와 스코틀랜드 지역은 정복하지 못했다). 그들은 루드게이트 힐과 콘힐 위 단 두 군데에만 도시를 건설했다. 이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론디니움(Londinium), 즉 런던이다. 최초의 런던 브릿지를 건설한 사람들도 로마인이었다. 이곳은 그들이 브리타니아(Britannia, 브리튼섬에 대한 고대 로마시대의 호칭)라고 부르는 곳으로 들어가는 교두보가 돼주었다.


300년 후 로마 군단이 떠나면서 팍스 로마나가 사라지자 다른 침입자들이 밀고 들어오기가 한층 쉬워졌다. 처음엔 덴마크와 독일 북부 방향에서 앵글족, 색슨족, 주트족이 들어왔다. 서기 600년까지 앵글로색슨족은 몇 개의 왕국들을 세우는데 그때 아일랜드의 스코티 부족이 서부 스코틀랜드 지역을 침공하면서 그곳에 정착하게 된다.


남부에서는 평화왕 에드가(재위 959-975년)가 출현하기까지 에드먼드, 에드레드, 에드위그 왕이 그 뒤를 이었고 1301년 웨일스를 복속시켰다. 1606년 훗날 정복자 윌리엄이라는 호칭을 얻게 되는 노르망디의 대공 윌리엄이 영국해협을 건너와서 남쪽 해안에 상륙했다. 그는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잉글랜드 군대를 물리친 뒤 런던으로 진군하여 스스로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다.


이어지는 몇 세기 동안 잉글랜드는 스코틀랜드, 프랑스, 그리고 자기들끼리 전쟁을 벌인다. 이후 엘리자베스 1세의 뒤를 이어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의 제임스 6세)가 등극한 후 마침내 1707년 잉글랜드와 웨일스는 스코틀랜드와 통합을 이룬다.


1801년에는 아일랜드가 연합법에 따라 공식적으로 영국의 일원이 되었다. 잉글랜드는 250여 년간 아일랜드를 실질적으로 지배해 오고 있었지만 이 법이야말로 공식적으로 그레이트브리튼및아일랜드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었다.

[출처 구글 이미지]

1698년 다섯 척으로 구성된 함대가 파나마에 ‘New Caledonia’라는 식민지를 건설하기 위해 스코틀랜드를 출발했다(“The Darien Scheme“). 당시 열렬한 국민적 호응에 힘입어 국민 모금으로 마련한 원정길이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이로 인해 스코틀랜드는 잉글랜드와의 통합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이 안타까운 사연의 흔적은 현재 파나마의 지도에 푼타 에스코세스(Punta Escocés, 스코티시 포인트)로 표현되어 있다.

[Scottish Point 출처 구글 이미지]

영국의 해상에서의 지리적 입지는 영국에게 여전히 일정한 전략적 이점을 보장해 주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그린란드(Greenland)-아이슬란드(Iceland)-영국(UK)을 잇는 해상 항로의 요충지인 이른바 GIUK 갭이다.


벨기에, 네덜란드, 프랑스까지 포함한 유럽 해군이 대서양으로 진출하려 할 때 대체로로 삼을 수 있는 것이 영국 해협을 통과하는 것인데 도버 해협은 너비 33킬로미터에 불과할 정도로 좁은 데다 철저히 방어되고 있다. 또한 북극해에서 출발하는 러시아 해군 함정도 이 GIUK 갭을 통과하지 않고는 대서양으로 나갈 수가 없다.

[GIUK갭 출처 구글 이미지]

2014년에 실시된 스코틀랜드 독립을 묻는 투표에서 결과가 독립 찬성으로 나올 가능성을 두고 영국 정부가 공포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여러 이유들 가운데 하나도 이 GIUK 갭이었다. 북해와 북대서양에서 주도권을 상실한다는 것은 영국에게 무엇이 남아 있든 간에 전략적 타격이자 위신의 손상이기 때문이다.

[2014년 스코틀랜드 독립 투표 출처 구글 이미지]

한쪽 발은 미국에, 한쪽 발은 EU에(그러나 깊지는 않게) <지리의 힘 2>


2차 대전 이후 영국이 지불한 대가 중 일부는 다름 아닌 바로 자신들의 제국이었다. 재정적으로만 무릎을 꿇은 것이 아니라 전투에 사용할 함선을 얻는 대가로 해군기지 대다수를 미국에 넘겨준 것이다. 미국으로서는 금상첨화였다. 선박도 넉넉한 데다 이제는 기지들까지 잔뜩 얻었으니 말이다. 힘의 균형추는 대서양을 건넜고 대영제국을 지속할 능력은 무너지고 있었다. 영국은 이제 새로운 역할을 찾기 위해 세 가지의 플랜을 세웠다.


플랜 A는 효과가 없었다. 즉 영국은 우선 미국의 최고 우방이 됨으로써 제국을 지킬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미국의 생각은 달랐다. 미국은 대영제국을 좋아한 적도 없었으며 함께 싸워야 할 냉전시기에도 그들이 별반 유용할 거라고는 여기지 않았다.


1956년 수에즈 운하를 점령하려고 이집트에 부대를 상륙시켰을 때, 영국은 사전에 미국에 알리는 것을 생략했고,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아이젠하워 당시 미국 대통령은 당장 영국군을 철수시키도록 했다.


그렇다면 플랜 B는 어떤가?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 미국의 최고 우방으로 남는다. 하지만 제국의 몫은 없다. 이 또한 잘 풀리지 않았다. 1962년 미국 행정부 내 특별 고문인 딘 애치슨“영국은 제국을 잃었지만 자신의 역할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라는 유명한 발언을 했다. 뼈아픈 지적이다.

[애치슨과 1950년 애치슨라인 출처 구글 이미지]

플랜 C는 다음 애치슨 연설에 나온다. “별도의 권력 역할, 즉 유럽과는 다른 역할, 미국과의 특별한 관계에 기초한 역할, 정치적 구조나 연합 또는 힘도 없는 영연방의 수장이 되는 것에 바탕을 둔 역할은 이제 그 영향력이 다해가고 있다.” 애치슨은 영국이 유럽 대륙에 전념할 때가 왔다고 믿었다.


영국의 새로운 역할은 일종의 이종 혼합, 즉 한쪽 발은 미국 진영에, 다른 한쪽 발은 EU의 전신에 담는 것으로 이 역할은 40년 이상 지속된다. 훗날 1973년 EU에 관여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면서도 영국은 미국과는 별개로 나토의 그 어느 회원국보다 월등히 앞선 국방력을 구축해 갔다. 영국은 미국이 부를 때면 언제든 동등한 비중으로 국방력을 쓰겠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2008년에 발생한 금융 위기는 세계화 문제와 다국적 기업들이 얻는 수익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촉발시켰다. 대다수 나라에서 EU 가입 협상은 평화 유지를 위한 것만 빼면 경제적 번영과 주권을 맞바꾸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많은 영국 국민들이 보기에 만약 번영을 누리지 못한다면 EU 가입과 주권을 맞바꾸는 것은 훨씬 가치가 덜한 일이었다.


영국을 유럽연합의 바깥쪽으로 자꾸 내모는 두 가지 쟁점은 서로 연결돼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주권>과 <이민자 문제>다.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몰려오는 경제적 이민과 난민의 물결 속에서 영국에 오기를 희망하는 이민자들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반유럽연합 정서 또한 더욱 거세지고 있다.


[출처 구글 이미지]

브렉시트 이후 영국은 본능적으로 미국을 바라보고 있다. 미국의 정치적, 경제적 힘을 감안하면 이해가 간다. 하지만 현재 이런 행보는 20세기에 그렇게 했던 것과는 그 이유가 다르다. EU와 더불어 막대한 구매력을 가진 전 세계 3대 시장 가운데 하나인 21세기의 중국은 중요하다. 그러므로 워싱턴과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베이징과도 훈훈한 정치적 및 경제적 관계를 위한 문을 열어두려면 새로운 혼성 전략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


[출처 구글 이미지]

또한 영국은 미국, 캐나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와 더불어 ‘파이브 아이즈’라는 기밀 정보 공유 공동체의 일원이다. 범위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어디에도 이만한 조직이 없으며, 각 회원국에게는 필요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는 엄청난 수준의 권한이 부여된다.


[출처 매일경제]

유럽은 과연 20세기 초로 회귀할까?


나토와 유럽연합 두 기구 모두 무용지물이 되거나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유럽은 주권을 가진 민족 국가들의 형태로 회귀해서 세력 시스템의 균형 안에서 자국의 이익에 부합하는 동맹을 찾는 모습을 보일 것이다.


그때엔 독일인들도 자신들을 에워싸고 있는 러시아와 프랑스라는 존재에 불안해할 것이고, 프랑스 또한 자신보다 더 큰 이웃에 부담을 가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 다시 20세기 초반의 세계로 돌아간다. 베를린 정부가 유럽의 상황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프랑스가 고분고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향후 유럽연합의 힘은 약화될 위험이 있다. 반대로 프랑스가 독일의 주도권을 인정한다면 그땐 프랑스 자신의 힘이 줄어들게 된다.


냉전이 종식되자 대다수 유럽 국가들은 방위비를 감축하고 군대의 규모 또한 줄였다. 그러나 2008년 러시아와 조지아*의 전투, 그리고 2014년에 러시아에 의한 크림 반도 합병은 충격 그 자체였다. 그리고 이는 유럽에서 해묵은 전쟁 가능성을 다시금 부각했다.

* 조지아 정부는 대한민국을 비롯한 주변 국가에 러시아어 그루지야 대신 영어 이름 조지아(Georgia)로 자국 국명을 표기해 줄 것을 공식 요청하였으며, 대한민국 외교통상부는 2010년 이 요청을 적극 수용하여 현재는 '조지아'라고 부르고 있다.

* 러시아-조지아 전쟁(남오세티야 전쟁): 2008년 8월 8일 미헤일 사카슈빌리 정부하에 친서방 행보를 보이기 시작한 조지아가 러시아가 지원하는 미승인국인 남오세티야를 '수복'하기 위해 공격하자 남오세티야를 지원하는 러시아가 군사적으로 전면 개입하면서 발발한 전쟁이다. 같은 해 8월 12일 나흘 만에 러시아의 일방적인 승리로 종료되었다.
[출처 구글 이미지]

현재 러시아는 유럽의 대공 방어망을 체크하려는 목적으로 정기적인 탐지 활동을 벌이는 한편 남오세티아, 아브하지아, 크리미아, 트란스니스트리아, 그리고 동우크라이나 등과의 통합을 부지런히 모색하고 있다. 러시아는 이처럼 발트해 지역에서 러시아계 주민들과 유대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칼리닌그라드 같은 비지(飛地, 한 국가의 지배하에 속하는 영토로서 다른 국가의 영토에 둘러싸여 존재하는 영토)를 여전히 두고 있다.


[칼리닌그라드 출처 구글 이미지]

역사학자 로버트 케이건『미국 VS. 유럽(Of Paradise and Power)』에서, 서유럽인들은 낙원에서 살고 있지만 일단 그들이 권력의 세계로 이동하고 나면 더 이상 그 낙원의 법칙에 따라 운영하려 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1998년에 헬무트 콜이 독일 총리직에서 물러나면서 했던 경고도 이런 의미를 담고 있었다.

“특히 전쟁 시절을 겪어보지 않고 현재의 위기를 맞은 이들은 유럽의 통합이 무슨 이득을 가져다주는지 의문을 갖는다. 하지만 유럽은 지난 65년 이상 유례없는 평화의 시기를 누려왔다. 비록 우리 앞에는 여전히 극복해야 할 문제와 난관이 있지만 해답은 그것밖에 없다. 평화 말이다.”
[출처 구글 이미지]


Chapter 4 러시아
가장 넓은 나라지만 지리에게 복수의 일격을 당하다

[러시아 지도 출처 본문]

러시아는 넓다. 가장 넓다. 아니 넓다 못해 광활하다. 면적이 무려 1천7백9만 제곱킬로미터에 달하며, 표준시간대(time zone) 또한 무려 11개나 되는 지구상에서 가장 넓은 나라다. 이 나라의 숲과 호수, 얼어붙은 툰드라, 스텝, 타이가, 산맥 또한 마찬가지로 넓다.


동서남북 어디를 둘러봐도 러시안 베어(Russian Bear)가 산다. 그러고 보면 이 광활한 나라의 상징이 곰이라는 것은 순전한 우연이 아니다. 이 땅에 웅크리고 앉은 곰은 겨울잠을 자기도 하고, 때로는 위엄 있게 그러나 험악하게 으르렁거리기도 한다.

[러시아 지형도 출처 구글 이미지]
[러시아 지형도 출처 구글 이미지]

1939년에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러시아를 관찰하고 나서 이런 말을 했다. “러시아라는 <수수께끼>는 <미스터리>라는 포장지로 여러 겹 싸매져서 <불가사의> 안에 있다.” 이 말을 한 지 7년 뒤에 처칠은 이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로 본인의 답을 사용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단언했다. “확신하건대, 강인함만큼 러시아인들이 경외하는 것은 없으며 나약함보다 경시하는 것은 없다. 특히 군사력에서 말이다.”


[1945년 얄타회담의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 출처 구글 이미지]

러시아를 지켜주는 건 지리였건만


북유럽평원은 프랑스에서부터 우랄 산맥까지 남북으로 장장 1천6백 킬로미터나 뻗어 있어 자연스럽게 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경계가 되고 있지만 그 폭은 482.8킬로미터에 불과하다.

[북유럽평원 출처 구글 이미지]

러시아 입장에서 이는 <양날의 칼>이다. 폴란드는 러시아가 군대를 이동시켜야 할 때는 상대적으로 좁은 통로지만, 반대로 적군이 모스크바로 진격하는 것을 저지시킨다. 모스크바로 접근하면 적군은 길어질 대로 길어진 보급로를 감당키 어려울 것이다. 1812년에 나폴레옹, 1941년에는 히틀러가 이 실수를 되풀이했다.


러시아의 극동 지역에서도 러시아를 지켜주는 건 지리다. 일단 아시안 러시아 내로 군대를 이동시키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끝도 없는 눈벌판 말고는 달리 공격할 대상도 없으니 적은 저 멀리 우랄 산맥까지도 갈 수 있다. 물론 지나치게 길어진 보급로와 러시아군의 반격 가능성이라는 악조건을 견딜 수 있다면 말이다.

[시베리아 출처 구글 이미지]

이런 지리적 여건에서도 지난 5백 년간 러시아는 서쪽으로부터 몇 차례 침략을 받았다. 1605년에 폴란드가 북유럽평원을 건너 들어왔고 1708년에는 카를 12세 치하의 스웨덴이 침공해 왔다. 또 나폴레옹의 프랑스가 1812년에, 그리고 독일도 1914년과 1941년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 러시아를 침공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될 즈음 러시아는 중동부 유럽을 독일로부터 빼앗아 점령하고 훗날 이 지역을 소비에트 연방의 일부에 포함시켰다. 이를 기점으로 러시아는 과거 러시아 제국에 버금가는 영토를 확장해 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을 시작으로 아예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냉전 시대 유럽 지도 출처 구글 이미지]

연방 붕괴 이후 러시아는 나토에 가입하지 않기로 약속한 나라들과 협력을 다지는 한편으로 나토의 접근을 초조하게 지켜보았다. 하지만 1999년의 체코공화국에 이어 헝가리와 폴란드, 2004년에는 불가리아,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그리고 2009년에는 알바니아까지 나토에 가입한다. 이런 현실로 인해, 또 러시아가 밟아온 역사에 의해 모스크바 정부의 입장은 더욱 굳건해졌다.


무궁무진한 영토 확장, 미국에 대적할 초강대국이 되다


러시아라는 개념이 성립된 시기는 9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우크라이나인 드네프르 강 연안의 도시들과 키예프 공국으로 알려진 동슬라브 부족들의 느슨한 연합 형태가 그 기원이다.


신생국 러시아는 이반 대제(Ivan the Great, 이반 3세) 아래서 조심스레 확장의 발걸음을 내디뎠다. 1533년 권좌에 오른 이반 대제는 확장의 속도를 부쩍 높였다.


러시아는 동쪽의 우랄 산맥지대와 남쪽의 카스피 해, 그리고 북으로는 북극권 한계선까지 잠식해 갔다. 카스피 해에 대한 접근 권한을 획득한 것을 시작으로 흑해까지 손을 뻗었고, 이윽고는 몽골 제국을 부분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캅카스 산맥을 활용할 수 있기에 이른다.

[이반대제와 몽고의 서신을 찢는 장면 출처 구글 이미지]

다음 세기에도 러시아의 확장은 멈추지 않았다. 러시아 군주들은 우랄 산맥 쪽으로 밀어붙이고 시베리아 쪽으로도 파고 들어가더니 마침내는 저 멀리 동쪽 태평양 연안의 모든 땅을 손에 넣었다. 18세기에 들어서자 러시아 제국을 설립한 표트르 대제에 이어 1721년 예카테리나 여왕(표트르 대제의 두 번째 황후)이 즉위했다. 이제 비로소 러시아는 서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표트르대제와 예카테리나 여왕(1세) 출처 구글 이미지]

이제 보다 안전해지고 강력해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점령하고 카르파티아 산맥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현재 발트해 국가들인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를 손에 넣었다. 그리하여 육로는 물론이고 발트해 방면의 침략으로부터도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게 되었다.

[출처 구글 이미지]

20세기에 공산주의 러시아는 소비에트 연방을 결성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라는 구호 뒤에 있는 소비에트 연방은 러시아 제국 그 자체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뒤에도 러시아는 태평양부터 베를린까지, 북극에서 아프가니스탄 국경에 이르기까지 확장을 꾀했다.


한쪽 발은 유럽에, 다른 한쪽 발은 아시아에


우랄 산맥으로 유럽 대륙과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러시아는 유럽의 강대국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하지만 카자흐스탄, 몽골, 중국, 북한은 물론이고 일본과 미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들과 해상 경계선을 마주하고 있음에도 아시아의 맹주로 간주되지는 않는다.


우랄 산맥의 드높은 지점 한 곳에는 유럽이 끝나고 아시아가 시작되는 점을 표시하는 십자 이정표가 우뚝 솟아 있다. 그런데 이 이정표가 고작해야 이 나라에서 4분의 1 들어간 지점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우리는 러시아가 얼마나 큰 나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우랄산맥 아시아와 유럽 경계 오벨리스크 출처 구글 이미지]

러시아가 아시아의 맹주가 아닌 이유는 꽤 있다. 먼저 이 나라 영토의 75퍼센트는 아시아 지역에 속하지만 그곳에는 인구의 22퍼센트만이 거주하고 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상당량의 광물 자원과 원유, 가스가 매장된 시베리아는 러시아의 보물상자임이 분명하지만 일 년에 수개월은 얼어붙어 있고, 타이가(침엽수 삼림지대)는 광활한 삼림, 부족한 경작지, 드넓은 습지대가 펼쳐져 있는 혹독한 땅이다.


또 서부에서 동부로 가는 철도는 시베리아 횡단 철도와 바이칼 아무르 철도 단 두 개뿐이다. 게다가 북과 남을 잇는 운송로는 전무하다시피 하니 러시아로서는 현대의 몽골이나 남쪽인 중국 내륙에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기 위해 필요한 인력이나 물자 보급선 모두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출처 구글 이미지]

부동항의 부재, 러시아의 지리적 아킬레스건


20세기 후반 감당할 수 있는 수준 이상의 돈을 쏟아부었기만 했지 인민을 위해 고안된 것이 아닌 복마전 경제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패배는 결국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이어졌다. 유럽 경계선은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벨로루시, 우크라이나, 조지아, 아제르바이잔에서 종결됐고 공산주의 이전 형태로 위축되었다.


1979년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반공산주의 무슬림 게릴라들을 소탕하려는 당시 아프간 공산 정권의 지지하에 이뤄졌지만 정작 아프간 국민들에게 마르크스-레닌주의의 희열을 알게 해주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소련 아프카니스탄 전쟁 당시 출처 구글 이미지]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한편으로는 러시아군의 오랜 숙원을 이룰 절호의 기회이기도 했다. “인도양의 따뜻한 물에 군화를 씻을 수 있을 것”이라는, 극렬 민족주의자였던 블라디미르 지리노브스키의 말마따나 이제껏 한 번도 이뤄보지 못했던 꿈이 성취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다시 고개를 든 것이다.

[아프카니스탄을 침공하는 소련군 출처 구글 이미지]

종종 러시아가 아프가니스탄에서 겪은 힘겨웠던 경험을 두고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서 겪은 경험에 빗대어 아프가니스탄을 <러시아의 베트남>이라고들 하는데 실은 그 이상이었다. 칸다하르 평원과 힌두쿠시 산맥은 아프가니스탄이야말로 제국의 무덤이라는 법칙을 증명했다.


대양으로 바로 접근할 수 있는 <부동항의 부재>는 늘 러시아에게는 아킬레스건이었다. 북유럽평원만큼이나 전략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일찍이 1725년에 표트르 1세가 후손들에게 다음과 같은 충고를 남긴 이유도 납득이 간다.


“할 수 있다면 콘스탄티노플과 인도로 가까이 접근하라. 누가 되든 그곳을 통치하는 자야말로 세계의 진정한 통치자가 되리라. 그러므로 꾸준히 싸움을 도발하라. 터키뿐 아니라 페르시아에서도! 할 수 있는 한 페르시아 만 멀리 침투할 것이며, 할 수 있는 한 인도의 안까지도 깊숙이 들어가라.”


친서방 국가, 친러시아 국가, 그리고 중립 국가


붕괴된 소비에트 연방은 15개 국가들로 나뉘어졌다. 소비에트 이념이 지리에게 복수의 일격을 당한 뒤 보다 논리적인 지도가 등장했다. 이 지도는 사람들이 어디에 사는지, 어떻게 분리되는지, 어떻게 저마다 다른 언어와 문화를 발전시켰는지를 산과, 강과, 호수와 바다를 통해 알려준다.


그런데 이 지리적 법칙에도 예외가 있으니 바로 타지키스탄처럼 이른바 이름이 <-스탄>*으로 끝나는 국가 집단이다. * ‘스탄’은 구역, 땅. 나라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인도 고대어, 범어[梵語])에서 나온 말이다.

[출처 이코노미조선]

이들 국가들은 세 가지 성격으로 구분할 수 있다. 중립 성향, 친서방 그룹, 그리고 친러시아 진영이다.


먼저 중립 성향의 국가들로는 우즈베키스탄, 아제르바이잔과 투르크메니스탄을 꼽을 수 있다. 이 나라들에는 러시아나 서방과 손을 잡을 명분이 별로 없다. 에너지를 자급자족하고 있으며 안보나 무역을 위해 굳이 어느 편의 신세를 질 일이 없기 때문이다.


친러시아 진영에는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벨로루시, 그리고 아르메니아를 넣을 수 있다. 이 나라들의 경제는 동우크라이나처럼 러시아와 상당 부분 맺어져 있다. 이들 가운데 가장 큰 카자흐스탄의 경우 외교적으로 러시아에 기울어 있으며 이 나라에 살고 있는 꽤 많은 러시아계 소수 민족 집단과의 통합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 러시아는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 아르메니아에도 군대를 배치해 두고 있다.


[출처 구글 이미지]

다음은 친서방 성향의 국가들로, 바르샤바조약 체제의 일원이었다가 현재는 나토나 유럽연합에 가입한 나라들이다. 폴란드,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에스토니아, 체코공화국, 불가리아, 헝가리, 슬로바키아, 알바니아, 루마니아가 여기에 해당된다. 이 나라들이 소비에트 압제 시절 큰 고통을 받았던 것은 우연이 아니다.


서방에도 추파를 던지고 모스크바의 당근도 받으려는 우크라이나


빅토르 야누코비치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양측을 오가는 게임을 하고 싶어 했다. 그는 서방에 추파를 던지면서도 모스크바에 경의를 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야누코비치 대통령이 유럽연합과의 대규모 무역 협정에 서명을 앞두고 조만간 유럽연합 회원 가입으로 이어질지 모를 상황이 되자 푸틴은 나사를 조이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외교 정책 엘리트가 보기에 유럽연합 가입은 나토 가입의 위장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을 일종의 레드 라인(red line, 불화나 협상 시 한쪽 당사자가 양보하지 않으려는 쟁점이나 요구)을 넘는 행위로 본다.


푸틴은 야누코비치를 압박하는 한편으로 도저히 거절하기 어려운 당근을 제시했다. 그러자 야누코비치는 기존 협상을 깨고 모스크바 쪽과 협정을 맺으려 했다. 결국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야누코비치 대통령의 사임으로까지 몰고 갔다. 독일과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반정부 시위를 지지했다.

[출처 구글 이미지]

2014년 2월 중순에 이르자 리비프를 비롯한 여타의 도회 지역들에 더 이상 정부의 통제가 미치지 않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결국 키예프에서 수십 명의 사망자들이 발생하자 2월 22일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급히 피신했다. 이어 친서방파와 파시스트파가 주축을 이루는 반러시아 파벌들이 우크라이나 정권을 장악했다.


크림반도, 신이 러시아에게 선사한 지리적 패


러시아에게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은 단 하나밖에 없는 진정한 부동항이다. 그렇지만 흑해를 나서서 지중해로 진출하려면 1936년 몽트뢰 협정으로 보스포루스 해협의 관리를 위임받은 나토 회원국 터키의 간섭을 받을 수밖에 없다. 거기를 통과했다 하더라도 지중해에 도달하려면 에게 해도 건너야 한다.


마찬가지로 대서양에 도달하려면 지브롤터 해협을 통과해야 한다거나 인도양으로 나가려면 수에즈 운하로 내려가는 것까지 허락받아야 하는 규정이 여전히 유효하다. 게다가 러시아가 발트해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북해를 연결해 주는 스카게라크 해협과 북해에 있는 GIUK 갭과 다시 마주쳐야 한다.


2014년 당장의 승리에 우쭐해진 우크라이나 과도정부는 경솔하게도 미련한 성명들을 발표했다. 그중에는 여러 지역에서 제2의 공용어로 사용하고 있는 러시아어의 지위를 폐지하겠다는 사항이 들어 있었다. 그 지역들에 러시아어 사용자들의 대다수가 살고 있고 친러시아 정서 또한 강하다는 점과 실제로 크림 반도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이 성명이 반발을 불러올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반정부 데모를 지원하면서 동시에 러시아어를 제1언어로 쓰는 주민들까지 포함해서 러시아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해군 기지로 활동폭이 제한된 러시아 병력을 결국 거리로 내보낼 수밖에 없게끔 우크라이나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시민들과 러시아군 양쪽 모두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던 우크라이나 군대는 결국 재빨리 철수해 버리고 말았다. 크림 반도는 또다시 러시아의 실질적인 영토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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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를 무기로 도박을 하는 러시아


우크라이나가 벨기에나 미국의 메릴랜드에 버금가는 영토를 잃었는데도 아무도 도와주러 달려오지 않았고, 유럽연합은 러시아에 대해 제한적인 제재만을 가했다. 이 제제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독일을 포함한 여러 유럽 국가들이 겨울용 난방 연료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2014년에 푸틴 대통령은 <노보로시야(Novorossiya, 새로운 러시아!)>라는 표현을 살짝 언급한 적이 있다. 그곳은 18세기 후반 예카테리나 여왕 치하에서 오스만 제국을 제압하고 빼앗은 땅이었다. 예카테리나 여왕은 이 지역에 러시아인들을 지속적으로 정착시키면서 러시아어를 제1언어로 쓰게 했다. 노보로시야는 1922년에 이르러서 새로 건국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양도되었다.


푸틴은 이 연설에서 카르키프, 루한스크, 도네츠크, 헤르손, 니콜라예프, 그리고 오데사에 이르는 우크라이나의 여러 지역을 열거하면서 덧붙였다. “러시아는 이런저런 이유로 이들 지역을 잃었다. 하지만 러시아 민족은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다.” 수백만 명에 이르는 러시아 민족이 한때 소련이었던, 그러나 지금은 러시아 바깥인 땅에 남아 있다.


이런 배경에서 러시아가 크림 반도를 점령하자마자 우크라이나 동부 공업지대 중심부인 루한스크와 도네츠크에서 친러시아 봉기를 부추겼던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당시 러시아는 키예프를 흐르는 드네프르 강의 동쪽 제방으로 어렵지 않게 군대를 밀어붙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하느라 골치를 썩일 필요가 없었다.


보다 중요한 것은 그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해야 할 입장인 자들이 오히려 상대에게 확실한 증거를 요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서방의 많은 정치인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우크라이나가 나토 회원국이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인지. 만약 그랬다면 또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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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반도 합병은 옛 소련 연방국들이라 부르는 곳에서 러시아가 국익을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군사 행동도 서슴지 않을 거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자국의 능력 밖에서는 함부로 개입하지 않는 러시아에게 크림 반도는 해봄직한 <합리적인 도박>이었다.


나토 vs. 러시아, 그리고 발트해 국가들


현재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는 물론 다른 어느 곳과도 관계를 단절하지는 않고 있다. 조지아를 제외하고는, 자국이 위협받는다고 느끼지 않는 한 러시아가 발트해에 군대를 파견할 가능성은 높지 않다. 하지만 2008년에 조지아와의 전쟁에서 러시아가 보여준 행동은 어디까지나 나토의 접근에 대한 경고의 성격이 짙었다.


발트해 3국(에스토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에 대한 나토의 입장은 분명하다. 이 나라들이 동맹국으로 있는 한 러시아의 어떠한 무력 공격에도 나토의 창립헌장 5조가 발동된다. “유럽 혹은 북미의 하나 혹은 그 이상의 나토 회원국에 대한 무력 공격은 모든 회원국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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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는 그곳에 기갑 사단을 보내 영향력을 행사할 필요는 없지만 혹시 그럴 일이 생긴다면 먼저 그 지역의 대규모 러시아인 공동체에 대한 차별적 대우에 대응한다는 구실을 댈 것이다.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인구의 4분의 1이 러시아계이며 리투아니아의 경우 전체 인구의 5.8퍼센트를 러시아계 주민이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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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해 지역에서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주민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의 처지를 바꾸려는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이 지역에는 이들을 대표하는 정당들도 이미 조직돼 있다. 또 러시아는 발트해 지역의 가정용 난방 공급권을 쥐고 있다. 러시아는 주민들이 매달 지불하는 난방비 가격을 조정할 수 있고 맘만 먹으면 파이프라인을 닫아버릴 수도 있다.


모스크바는 가까이 있고, 워싱턴은 멀리 있다


모스크바는 또 다른 잠재적인 완충국을 주목한다. 이때 크렘린의 눈에 띈 곳이 바로 몰도바다. 러시아는 왜 그토록 몰도바에 눈독을 들이는 것일까? 카르파티아 산맥이 굽이쳐 돌아가는 남서부는 이른바 트란실바니아 알프스를 형성하고 있고, 남동부는 흑해로 내려가는 평야지대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트란스니스트리아에는 러시아어나 우크라이나어를 사용하는 친러시아 성향의 주민들이 적어도 50퍼센트는 된다. 그러나 1991년에 몰도바가 독립하자 러시아어 사용 주민들이 봉기를 일으켰다. 현재 이곳에는 2천 명의 러시아 병사들이 주둔하고 있다.


물론 러시아군이 몰도바로 밀고 들어갈 가능성은 높지 않다. 그러나 몰도바 정부가 유럽연합이나 나토에 가입하지 못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하려고 트란스니스트리아 사태 같은 상황을 조장하거나 자국의 경제력을 이용할 수도 있다. 실제로도 그렇게 하고 있다.

[몰도바와 트란스니스트리아 출처 구글 이미지]

몰도바에서 흑해를 건너면 또 다른 와인 산지가 펼쳐진다. 바로 조지아다. 그러나 조지아는 두 가지 이유로 러시아의 통제 지역 목록 상위에 올라와 있지 않다. 첫째, 2008년에 벌어졌던 전쟁으로 조지아 영토의 상당 부분이 러시아 군대에 점령당했다. 현재도 아브하지아와 남오세티아 전역은 러시아 군대의 통제하에 있다.


둘째, 조지아는 캅카스 산맥 남쪽 지역이고 러시아는 인접한 아르메니아에 부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모스크바로서는 여분의 완충지를 더 늘리고 싶겠지만 굳이 조지아의 나머지를 취하지 않고도 견딜 수는 있다. 다만 조지아의 나토 가입 가능성이 높아진다면 지금의 형국은 달라질 소지가 있다.


2013년 조지아 국민들은 새 정부를 구성하고 러시아에 회유적인 기오르기 마르그벨라슈빌리를 신임 대통령으로 뽑았다. 우크라이나와 마찬가지로 조지아 국민들도 이웃이 인정하는 자명한 진리를 깨달은 것이다. 워싱턴은 멀리 떨어져 있고, 모스크바는 가까이 있다는.

[조지아 출처 구글 이미지]

가스와 석유, 지리를 이용한 경제 전쟁


세계 최대 천연가스 공급 국가인 미국에 이어 제2의 천연가스 생산국인 러시아는 유럽 내의 가스와 원유 수요의 평균 25퍼센트를 공급하는데 러시아와 사이가 좋으면 좋을수록 연료비를 절약할 수 있다. 이는 곧 그 나라의 대외정책 선택지가 축소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유럽의 러시아 가스 의존도 출처 구글 이미지]

러시아 바깥으로 몇 개의 주요 파이프라인들이 동과 서를 가로지르며 달리고 있는데, 발트해를 경유하는 북쪽의 노르트스트림 라인은 독일과 직접적으로 연결돼 있다. 그 아래, 즉 벨로루시를 뚫고 지나가는 야말 파이프라인은 폴란드와 독일에 에너지를 공급한다. 남쪽의 블루스트림은 흑해를 경유해 터키에 가스를 공급한다.

[러시아 가스관 출처 구글 이미지]

미국은 유럽 국가들과의 윈윈 전략을 통해 나름의 이익을 챙기고 있다. 유럽 국가들은 미국으로부터 액화천연가스인 LNG를 받아서 가스 형태로 되돌리려면 유럽 연안에 터미널들과 부두들을 건설할 필요가 있다. 워싱턴은 일찌감치 수출될 설비들에 대한 면허를 승인했으며 유럽 또한 보다 많은 LNG 터미널을 건설하려는 장기 프로젝트에 착수한 상태다.

[미국의 LNG 수출 추이와 폴란드 시비노우이시체 LNG 터미널 출처 구글 이미지]

물론 LNG가 러시아산 가스를 완전히 대체할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가격 협상이나 대외정책 측면 모두에서 위축된 유럽에 힘을 불어넣을 것만은 분명하다. 이처럼 잠재적인 가스 판매 수입 축소에 대비해서 러시아는 아예 파이프라인을 남동쪽으로 보내서 중국에 대한 판매를 늘릴 계획도 세우는 중이다.

[러시아-중국 가스관 연결 계획 출처 중앙일보]

2014년 유가가 배럴당 50달러 밑으로 추락하자 러시아는 큰 고통을 겪었다. 유가가 1달러씩 떨어질 때마다 러시아 수입은 대략 20억 달러씩 줄어든다고 보는데 예상대로 러시아 경제는 타격을 입었고 특히 일반 서민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었다. 하지만 국가 자체가 붕괴될 것이라는 예측은 빗나갔다.


러시아는 대규모로 방위비를 증액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는 가운데 최근 몇 년간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는 세계은행의 예측에도 불구하고 경제는 조금씩이나마 성장하고 있다. 북극의 카라 해에서 거대한 유전이 발견되었고 원유를 육지로 끌어올 수 있게 되면 좀 더 안정적으로 성장할 거라는 전망도 있다.

[러시아의 중국 가스관 계획과 카라해 유전 개발 출처 구글 이미지]

군사협력까지 가능한 러시아와 중국의 밀월 관계


러시아는 자국의 심장부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특히 베네수엘라처럼 미국과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남아메리카 국가라면 어느 나라와도 친하게 지내려고 한다. 또 이런 흐름을 중동에서도 읽고 있는 러시아는 적어도 참견할 권리 정도는 확보하려고 애쓰고 있다.


이와 더불어 북극에 주둔하는 군대에도 막대한 비용을 쏟아붓고 있다. 특히 향후 영유권을 주장하기 위해 그린란드에 지속적인 관심을 두고 있다.

[출처 구글 이미지]

러시아와 중국이라는 두 거대 공룡들은 경쟁 관계이긴 하나 다양한 차원에서 협력도 이어가고 있다. 2018년부터 러시아는 한 해에 380억 세제곱미터에 달하는 가스를 향후 30년간 4천억 달러에 공급하는 계약을 중국과 체결했다.


두 나라는 공산주의 이념의 리더십을 두고 경쟁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점 때문에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지자 군사적 차원의 협력까지 가능했다. 이 흔치 않은 사례가 바로 2015년 5월에 두 나라가 지중해에서 실시한 합동 군사 훈련이었다.

[2023년 러시아-중국-이란 합동 군사 훈련 출처 연합뉴스]

러시아는 자국 내에서도 많은 도전들에 직면하고 있는데 특히 심각한 것이 인구 문제다. 가파른 인구 감소는 어느 정도 잡은 것 같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 있다. 러시아인의 평균 수명은 65세 이하로 193개 유엔 회원국들 가운데 하위권에 머물고 있다. 크림 반도를 제외한 러시아 인구는 현재 1억 4천4백만 명 정도다.


모스크바 대공국을 시작으로 표트르 1세, 스탈린, 푸틴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지도자들은 한결같은 문제들에 직면했다. 항구들은 반드시 얼어붙었고 북유럽평원은 여전히 평지로 남아 있는 것이다. 민족 국가들의 국경선이 다 지워진 오늘날, 푸틴은 이반 4세가 마주했던 것과 똑같은 지도를 보고 있다.


<4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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