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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의 힘 (4)

라틴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by Andy강성
Chapter 6 라틴 아메리카
내륙이 텅 빈, 거대한 지리의 감옥에 갇히다
[출처 본문, 구글 이미지]

라틴 아메리카라는 지역은 미국과 맞대고 있는 멕시코 국경에서부터 시작된다. 남쪽으로 장장 11,265킬로미터를 내려가는 동안 중앙아메리카를 지나고 남아메리카를 지난다. 그런 다음 태평양과 대서양이라는 두 대양이 만나는 케이프 혼의 티에라 델 푸에고에 이르러서야 이 대륙은 끝난다.


서쪽에서 동쪽 끝까지, 즉 페루에서 브라질을 횡단하는 최장거리는 5,149킬로미터에 이른다. 대륙의 서쪽은 태평양이고 반대쪽에는 멕시코 만과 카리브해, 대서양이 있다. 해안 지역에는 수심이 깊은 천연 항구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되니 교역 또한 제한적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다.


중앙아메리카는 깊은 계곡들이 산재한 구릉지대인데 가장 너비가 좁은 곳은 193킬로미터에 불과하다. 또한 태평양과 마주하면서 7천 킬로미터를 내달리는 지구상에서 가장 긴 산맥인 안데스 산맥 이곳에서 시작한다.

[중앙아메리카 출처 구글 이미지]

서반구에서 가장 높은 산인 해발 6,960미터의 아콩카과 산도 여기에 있다. 덕분에 산맥지대에서 쏟아져 내려오는 물은 칠레, 페루, 에콰도르, 콜롬비아, 베네수엘라 같은 안데스 권역 국가들의 수력 발전에 적합한 발전원을 제공한다. 라틴 아메리카 동쪽은 브라질과, 나일 강 다음으로 지구상에서 긴 아마존 강이 차지하고 있다.


드물지만 이 지역 국가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것 중의 하나는 라틴어에 기반을 둔 언어다. 이들 국가 대다수가 스페인어를 쓰고 있는 가운데 브라질은 포르투갈어, 프랑스령 기아나는 프랑스어를 쓴다.


광활한 세계의 끝단에서 벌어지는 영토 분쟁


라틴아메리카의 불행의 시작은 1494년 스페인(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과 포르투갈(주앙 2세)이 맺은 토르데시야스 조약(Tratado de Tordesillas)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유럽의 두 거대 해양 세력들은 유럽 밖에서 땅을 발견하는 경우 서로 나누기로 약속했다. 여기에 교황(알렉산더 6세)도 동의했다.

[위: 주앙2세, 페르디난도 2세, 이사벨 1세, 알렉산더 6세, 아래: 토르데시야스 조약과 구분도 출처 구글 이미지]

1800년대 초반 베네수엘라에서는 시몬 볼리바르, 아르헨티나에서는 호세 데 산 마르틴이 이끄는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특히 볼리바르는 남아메리카의 집단의식에 깊이 아로새겨진 인물이다.


볼리비아는 아예 그를 기리는 뜻에서 국호를 그의 이름을 따서 정했으며, 남아메리카의 좌파 성향의 국가들은 미국에 맞서 이른바 <볼리바르주의(Bolivarianism)> 이념으로 느슨하게나마 묶여 있다.

[시몬 볼리바르와 영화<리버레이터 : 자유를 위해> 출처 구글 이미지]

라틴 아메리카 대륙 전체로도 분쟁 중인 국경 지역들이 남아 있지만 민주주의의 성장으로 대부분 소강상태에 머물러 있거나 외교적으로 풀어보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이 가운데 특히 고약한 경우가 볼리비아와 칠레의 관계다. 1879년 태평양 전쟁에서 볼리비아는 국토의 상당 부분을 빼앗겼다. 특히 402킬로미터에 이르는 해안 지역을 칠레에게 빼앗긴 이후 아직도 내륙에 갇혀 있는 신세다(아래 물질의 세계 (2) 제6장 참조).

[칠레-페루-볼리비아의 태평양 전쟁 출처 구글 이미지]


그 기원이 19세기로 올라가는 또 다른 국경 분쟁이 있다. 영국령 벨리즈와 인접국인 과테말라가 그 당사자들이다. 이 두 나라 국경은 반듯한 직선의 모양새로 영국인들이 그린 것이다. 과테말라는 벨리즈 영토 일부를 자국의 영토로 주장하지만 이 사안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이지는 않고 있다.


한편 칠레와 아르헨티나도 비글 해협의 수로를 놓고 감정의 날을 세우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가이아나 절반을 자국 영토라 주장하고 에콰도르는 페루에 대해 역사적으로 감정이 많다.

[남미의 영토 분쟁 지역들 출처 구글 이미지]

20세기 후반기의 중남미는 쿠데타와 군사 독재, 특히 니카라과에서 보듯 대규모 인권 탄압을 동반한 소위 냉전의 대리 전장이었다. 하지만 냉전이 종식되자 많은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향해 걸음마를 시작했다. 그러므로 20세기에 비해 이들 국가들의 관계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편이다.


멕시코, 미국의 그늘 아래에서 살아가야 할 운명의 나라


멕시코의 북쪽 끝은 3,141킬로미터의 국경지대가 미국과 맞대고 있는데 이곳 대부분은 사막지대다. 이 지역은 너무 척박해서 거의 사람이 살지 않는다. 때문에 이곳은 멕시코와 거대 이웃인 미국과의 완충지 역할을 하고는 있지만 이 완충지라는 것도 기술적 격차로 인해 멕시코보다는 미국에게 훨씬 이득이 된다.


1846년에서 1848년까지 치른 미국과의 전쟁 이전에는 현재의 텍사스, 캘리포니아, 뉴멕시코, 애리조나가 멕시코 땅이었다는 것을 모르는 멕시코인들은 없다. 이 분쟁으로 인해 멕시코 땅의 절반을 미국에게 넘겨줘야 했다.

[미국-멕시코 전쟁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이 땅을 되찾으려는 진지한 정치적 움직임이나 두 나라 사이의 긴박한 국경 분쟁은 보이지 않고 있다. 멕시코 정부는 현재의 영토만을 관리하는데도 애를 먹고 있는 형편인데 미래에나 생각해 볼 만한 많은 무언가를 놓고 싸울 입장이 아니다.


미국의 그늘 아래서 살아가야 할 멕시코의 운명은 늘 미국에게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는 역할을 부여한다. 멕시코에게는 멕시코 만을 수호하거나 대서양으로 진출할 만한 해군력이 부족하다. 따라서 자국의 항로가 안전하게 열려 있기를 바라는 멕시코로서는 미국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멕시코에서 중요한 산맥은 나라의 동서를 차지하는 시에라 마드레 산맥이다. 이 사이에 고원지대가 있다. 이곳의 남쪽, 즉 멕시코 계곡 내에 대략 2천만 명이 거주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수도 가운데 하나인 멕시코시티가 있다.

[멕시코 지형도 출처 구글 이미지]

현재 멕시코는 거의 내전과 다름없는 상황에 시달리고 있다. 1990년대 미국이 콜롬비아 마약 카르텔과 전쟁을 벌인 이후 멕시코의 갱단들이 직접 미국에 마약을 공급하고 있다. 이 운반로는 부분적으로 대륙의 남과 북을 잇는 팬 아메리칸 하이웨이(Pan American Highway, 알래스카에서 아르헨티나 남단까지 남북 아메리카를 잇는 길이 2만 7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국제 고속도로)를 따라간다.


역사를 놓고 볼 때 멕시코에 들어선 정권들치고 나라 전체를 확고히 장악한 정권이 없었다. 이제 멕시코의 마약 카르텔들은 협박을 통해 자기들의 영역을 지배하려 한다. 정부는 법의 지배를 실행하는 척할 뿐이고 그 와중에 수백 명의 민간인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가장 최근에 알려진 경악할 만한 과시 행동의 하나는 2014년에 43명의 학생과 교사들이 마약 카르텔에 의해 살해된 사건이었다.

[팬아메리카 하이웨이와 멕시코의 2014년 43명 대학생 살해 사건 출처 구글 이미지]

니카라과 대운하, 거대 중국 자본이 이미 진입했다


1513년 스페인의 탐험가인 바스코 누네스 데 발보아는 대서양을 건너와서 현재의 파나마 땅에 발을 내디딘 지 401년 만인 1914년 미국이 관리하는 80킬로미터의 파나마 운하가 열렸다.


그리하여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가는 선박들은 무려 12,874킬로미터를 절약할 수 있었으며 운하 지역의 경제 성장 또한 따라왔다. 1999년 이후 파나마가 운하의 관리권을 양도받았지만 아직까지도 이곳은 미군과 파나마 해군이 관리하는 중립적인 국제 수로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바스코 누네스 발보아의 경로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런데 중국에게는 이것이 문제이다. 중국이 베네수엘라의 적극적인 원유 수입국으로 등장했다. 그래서 중국과 베네수엘라 두 나라는 파나마 운하라는 통로에 의존하지 않고 중국으로 원유를 보낼 방도를 궁리 중이다.


2020년에 개통 예정인 5백억 달러짜리 이 사업은 니카라과 전체 경제 규모의 네 배에 달한다. 니카라과 대운하는 느리지만 확고하게 미국의 자리를 대신해서 이 지역의 주요 교역국의 지위를 차지하려는 중국의 대 라틴 아메리카 투자의 핵심이랄 수 있다.

* 2018년 4월 이 사업을 추진하던 홍콩 사업가 왕 징의 HKND가 결국 펀딩 부족으로 파산하며 사실상 백지화되었다.

[니카라과 운하 계획 출처 구글 이미지]

중국, 미국과 라틴 아메리카의 벌어진 틈을 공략하다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미국과 자연스러운 친밀감을 형성하지 못하고 있다. 미국과의 관계는 주로 미국의 입장에 좌우된다. 이 입장은 1823년 미국의 먼로 대통령이 연두교서에서 밝힌 먼로 독트린에 의거하고 있다.


또한 1904년의 한 연설에서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서반구에서 먼로주의 입장을 견지하는 미국은 명백히 그릇되고 무능한 경우 어쩔 수 없이 국제 경찰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 이후 여러 혁명과 그 단체들을 무장하는 데 자금을 대거나 군사 훈련관을 제공한 것 등은 제외하더라도, 미국은 1890년대부터 냉전이 종식될 때까지 라틴 아메리카에 거의 50여 차례에 가까운 무력 개입을 했다.

[먼로독트린과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Big Stick’ Policy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러던 중 2001년에 미국은 34개 국가가 참여한 미주기구(Organization of American States, OAS)가 발의한 미주 민주 헌장에 조인했다. 이를 기점으로 미국은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과 경제적인 끈을 맺는 일에 집중했다. 즉 기존의 무역 협정을 북미자유무역연합처럼 보완하고 다른 국가들을 중앙아메리카자유무역협정의 틀 안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2022년 OAS 총회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북쪽의 미국과 남쪽의 라틴 아메리카의 역사적, 경제적 관계가 야기한 호의의 결핍은 결국 중국이 문을 두드리자 잽싸게 문을 열어주게 했다. 중국 정부는 이제 우루과이, 콜롬비아, 칠레, 멕시코, 페루 등지에 무기를 팔거나 기증을 하고 있으며 군사 교류까지 제안하고 있다. 중국은 베네수엘라의 볼리바르주의 혁명 정부가 오래 지속되기를 희망하지만 혹시라도 붕괴됐을 경우를 대비해 베네수엘라와 군사 관계도 맺으려고 시도한다.


또한 건설 사업에 투자하는 것만큼이나 중국은 라틴 아메리카 정부들에도 막대한 양의 돈을 빌려주고 있다. 특히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에콰도르가 주요 고객이다. 대신 중국은 대만을 포함한 영토 분쟁의 경우 유엔에서 이들 나라들이 자기편을 들어주길 기대할 것이다.

[출처 구글 이미지]

브라질, 지리가 자국 내 운송도 막는다


하지만 중국과의 교역을 하거나 안 하거나,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은 지리적 지형 안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 이는 결국 언제나 주연은 미국이 맡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남아메리카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하고 있는 브라질이 가장 좋은 사례다.

[브라질 지도 출처 구글 이미지]

브라질 국토의 3분의 1은 정글 지대로, 사람들이 살 만한 지역으로 개척하려면 엄청난 비용이 든다. 게다가 일부 지역은 합법적으로 개발하기도 어렵다. 아마존 열대우림을 파괴하는 행위는 전 세계에 장기적으로 생태학적 문제를 야기하는 것 이상으로 단기적으로도 브라질에게는 골칫거리다.

[아마존 열대우림과 삼림 파괴 지역 출처 구글 이미지]

아마존 지역 바로 아래, 즉 고지대에는 사바나가 펼쳐져 있다. 위쪽과는 달리 이곳은 토지 이용의 성공 사례로 꼽힌다. 25년 전만 해도 이곳은 농업에 적합하지 않은 지역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브라질의 기술은 이곳을 곡물 생산과 더불어 세계 최대의 콩 생산지 가운데 하나로 탈바꿈시켰다.

[열대사바나(세라도) 지역과 밀 재배 출처 구글 이미지]

사바나의 남쪽은 전통적인 브라질 농업지대다. 이곳은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칠레가 구성하고 있는 이른바 남미 원뿔꼴 지역이다. 상대적으로 넓지 않은 이 지역은 원래 포르투갈 식민주의자들이 살았다.


하지만 브라질 인구의 대다수는 여전히 해안 근처에 거주하고 있다. 브라질의 많은 해안 도시들에는 도심의 양편 혹은 그 뒤편에 거대한 절벽들이 삐죽 솟아 올라와 있는 웅장한 풍경이 흔하게 펼쳐져 있다. 이처럼 거대한 급경사면이 브라질 해안의 상당 부분에 분포하고 있다.


브라질은 인구의 대략 25퍼센트가 악명 높은 파벨라(Favela)라고 하는 빈민촌에 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국민 4명당 1명꼴로 극빈 상태에 놓여 있다는 얘기니 이 나라가 부유해지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브라질이 신흥대국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다. 다만 그 지위가 제한될 뿐이다.

[리우자데네이루의 호시냐(Rocinha) 파벨라 출처 구글 이미지]

성장의 지름길은 소프트파워에서 찾을 수 있다. 그래서 브라질은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하려는 노력에 매진하고 있다. 또한 브라질,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베네수엘라가 느슨하게 맺고 있는 메르코수르(Mercosur, 남미 지역에서의 자유 무역과 관세 동맹을 목표로 결성된 경제 블록) 같은 지역 경제 동맹을 구축하는 것도 병행한다.

[메르코수르 출처 구글 이미지]

라틴 아메리카 최고의 지리적 혜택을 받는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의 잠재력의 근원은 19세기에 브라질과 파라과이와의 군사 대치에서 승리하고 라플라타 강 유역의 농업 지역 지배권을 확보한 것에 있다. 또한 하천을 통한 물류 시스템도 한몫했다. 전체 라틴 아메리카 대륙을 통틀어 이보다 값진 자산은 드물 것이다.

[라플라타강 유역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러나 산업 다각화의 실패, 계층화되고 불공정한 사회, 허술한 교육 제도, 연이은 쿠데타, 게다가 지난 30여 년간의 민주 정부 시대에 주먹구구식으로 남발된 경제 정책 등으로 아르헨티나의 위상은 급속히 추락하고 말았다. 아르헨티나는 이를 바로잡아야 할 필요가 있다. 죽은 소만이 그들을 도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후안 페론 대통령과 에바 페론 출처 구글 이미지]

죽은 소(바카 무에르타)는 이 나라에 퍼져 있는 셰일층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아르헨티나 중부 지역인 파타고니아, 즉 칠레와 맞대고 있는 서쪽 국경지대에 위치하고 있는 이 지역은 벨기에만한 면적으로 나라로 치면 상대적으로 작겠지만 셰일층의 규모로는 꽤 큰 편이다. 현재까지는 잘 진행되고 있다.


남쪽으로 더 내려가면 원유와 가스가 더 많이 매장되어 있는 곳이 있다. 사실 남단은 1833년부터 영국이 지배하고 있는 섬 주변과 그 안쪽의 연안지대다. 영국이 포클랜드(Falkland)라 부르는 이곳을 아르헨티나에서는 라스 말비나스(Las Malvinas)라고 부른다.

[파타고니아와 포클랜드 제도 출처 구글 이미지]

1982년 4월, 영국의 수비가 느슨한 틈을 타 당시 아르헨티나 군부 독재자 갈티에리 장군은 이곳의 침공을 명령했다. 8주 뒤 영국군 기동부대가 들이닥쳐서 아르헨티나군의 짧은 승리를 끝장내고 이 섬을 탈환하기 전까지는 아르헨티나군의 일방적 승리로 끝나는 것 같았다. 결국 이 사태는 독재자를 자리에서 끌어내렸다.

[포클랜드 전쟁 항로와 영국 항모 HMS 에르메스와 영국의 씨 해리어 전투기 출처 구글 이미지]

원유와 가스라는 유혹에도 불구하고 아르헨티나의 포클랜드 재침공은 국내 정세나 국방력을 고려할 때 그 가능성이 희박해 보인다. 하지만 외교전까지 포기하는 건 아니다. 아르헨티나 정부는 포클랜드/말비나스에서 시추를 시도하는 그 어떤 석유 회사에게도 파타고니아의 바카 무에르타 지역의 셰일 가스와 원유 개발권을 내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또한 아르헨티나 정부의 허가 없이 포클랜드/말비나스 대륙붕을 탐사하는 개인들에게는 벌금을 물리거나 구금하는 법을 통과시키기까지 했다. 이 법은 많은 석유 회사들을 위축시켰다. 물론 영국회사들은 상관하지 않았지만, 어쨌든 이 사업은 춥고 매서운 바람, 거센 파도를 이겨야 하는 가장 도전적인 사업이 될 것이다.


Chapter 7 아프리카
유럽인이 만들어 놓은 지정학의 피해자가 되다


[아프리카 지도와 지형도 출처 본문, 구글 이미지]

아프리카는 거대한 대륙이니만큼 여러 다양한 지역적 특성과 기후, 문화를 보이고 있다. 그러면서도 하나같이 공통된 것은 그들 서로는 물론 바깥 세계로부터도 고립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날에도 정도는 덜하지만 과거의 유산은 여전히 남아 있다.


아프리카가 얼마나 큰 대륙인지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도 많지 않다. 이는 우리 대부분이 메르카토르(Mercator) 방식의 지도를 쓰는 데서 비롯됐다. 이 도법은 평평한 면에 지구를 그리다 보니 고위도로 갈수록 면적과 형상이 왜곡된다.

[메르카토르 도법(좌)과 크기를 정확하게 표현한 닐 카예 세계지도(우) 출처 구글 이미지]

지도에서는 비슷해 보이는 미국보다 3배 크고, 그린란드보다는 14배 크다. 미국, 그린란드, 인도, 중국, 스페인, 프랑스, 독일, 그리고 영국까지 다 합쳐도 아프리카 대륙에 모두 집어넣을 수 있을 뿐 아니라 덤으로 동유럽 대부분을 집어넣을 만큼의 공간도 남는다.


지리가 아프리카의 최대 장애물이다


우선 3분의 1을 점하는 상부는 북아프리카의 아랍어 사용 국가들이 차지하는 지중해 연안부터 시작된다. 해안 평야 지역은 미국에 버금가는 크기인데 이내 세계 최대의 건조 사막인 사하라 사막으로 바뀐다.


사하라 사막 바로 아래로 사헬(Sahel, 아랍어에서 해안을 뜻하는 사힐sahil에서 유래했다) 지역이 펼쳐진다. 반건조지대인 사헬은 바위가 산재하는, 모래가 많은 지역이다. 지중해에서 사헬에 이르는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의 대다수는 무슬림이다.

[사헬 지역 출처 구글 이미지]

사헬의 남쪽, 즉 아프리카의 나머지 3분의 2를 차지하는 하부 지역은 거의 전 영역에서 훨씬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토양도 한결 온화해진 덕분에 녹색 식물지대가 나타난다.


그러다가 콩고와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 이르면 정글이 된다. 동쪽 해안인 우간다와 탄자니아에는 대규모 호수들이 있는 반면, 서쪽의 앙골라와 나미비아에는 사막이 훨씬 넓게 펼쳐져 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끝자락에 이르면 기후는 다시 지중해성으로 바뀐다. 상부의 지중해 연안에 있는 튀니지의 최북단에서 거의 8천 킬로미터나 내려왔는데도 말이다.

[아프리카 기후대 출처 구글 이미지]

아프리카 남쪽으로 돌아가 보면 재배할 식물도 별로 없고 동물들조차 많지 않았다. 땅의 상당 부분은 정글과 늪, 사막 혹은 가파른 고원지대다. 더운 기후가 초래한 말라리아와 황열병 같은 악성 질병들은 밀집된 생활환경과 열악한 보건시설로 인해 현재는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는 후천성 면역 결핍증 같은 질병의 타격이 큰데다 특히 모기와 체체파리의 만연으로 인한 문제도 심각하다.


아프리카 대륙의 강들 또한 문제다. 대개 고지대에서 발원한 강들이 가파르게 꺾여 내려오기 때문에 배를 띄우는 것조차 쉽지 않다. 일례로 아프리카에서 네 번째로 긴 장대한 잠베지 강을 보자. 길이만도 장장 2,735킬로미터에 달하는 이 강을 마주한 관광객들은 하얗게 부서지는 급류와 빅토리아 폭포에 매료될 게 분명하지만 정작 이 강은 교역로로서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


이런 약점은 경제 발전에 영향을 미쳤고 대규모 교역 지역의 형성을 막았다. 니제르 강, 콩고 강, 잠베지 강, 나일 강을 비롯한 대규모 하천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 않다.

[잠베지강의 빅토리아 폭포 출처 구글 이미지]
[잠베지강의 빅토리아 폭포 출처 구글 이미지]

그리고 이러한 단절은 인간 요소라고 다르지 않다. 아프리카에는 족히 수천 개가 넘는 언어들이 있으며 비슷한 규모의 지역을 지배할 만한 공통 문화도 자라지 못했다. 사하라 이남의 아프리카에서는 수천 년 동안이나 사상과 기술의 교류가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아프리카 언어와 종교 지도 출처 구글 이미지]

하지만 6세기 이후부터 몇몇 아프리카 제국들과 도시 국가들이 출현했다. 그 대표적 사례가 말리 제국(13-16세기)과 대짐바브웨(Great Zimbabwe) 도시 국가(11-15세기)다. 대짐바브웨 도시 국가는 잠베지 강과 림포포 강 주변 지역에서 형성되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광역 블록들의 형태로 서로 단절돼 있었다.


대략 2천 년 전 즈음 낙타가 도입되었고 7세기 아랍의 정복 이후 사하라 지역에서 중동 및 지중해 지역과의 교역이 이루어졌다. 당시의 교역이란 주로 이 지역에 풍부한 소금을 파는 일이었다.


9세기 무렵 점차 남쪽으로 내려가려 했던 아랍인들은 사하라 사막을 건넜고 11세기에는 현재 나이지리아가 있는 남쪽 지역에 자리를 잡았다. 또 동부 연안까지 내려와서 현재 탄자니아가 있는 잔지바르와 다르에스살람 같은 지역에도 뿌리를 내렸다.

[아프리카 고대 젝국 지도 출처 구글 이미지]

유럽인들이 제멋대로 그려 넣은 국경선


15세기 아프리카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유럽인들은 17세기 이후 아프리카의 대략적인 등고선이 그려진 지도를 펼쳐놓고 그 위에 제멋대로 선(국경선)들을 그려 넣었다. 아니, 그곳에 대한 보다 공격적인 접근을 위해 선들을 그곳에 놓아두었다고 해야겠다. 그들은 이 선들 사이에 중앙콩고라든지 오트볼타(현 브루키나파소) 같은 지명을 적어 넣고 이곳을 나라들이라 불렀다.


현재 아프리카에는 56개 국가들이 있다. 20세기 중반에 불어닥친 독립운동의 열기로 변화의 바람이 일기 시작한 이래로 지도의 선들 사이에 적혀 있던 몇몇 나라 이름들도 고쳐졌다. 이제 로디지아는 짐바브웨로 불린다. 그런데 놀랍게도 국경선들 대부분은 그대로다. 이러한 분할은 유럽의 식민주의가 아프리카 대륙에 남긴 다수의 식민 유산 잔재 중 하나다.


수단, 소말리아, 케냐, 앙골라, 콩고민주공화국, 나이지리아, 말리 말고도 여러 곳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민족 갈등은 유럽인의 지리에 대한 생각이 아프리카의 인구학적 현실과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을 반증하고 있다.

[제국주의 시대 아프리카 지도와 독립 후 지도 출처 구글 이미지]

일례로 리비아의 경우를 보자. 불과 수십 년 전에 (1927년 이탈리아에 의해) 인위적인 구분에서 탄생한 이 나라는 원래 서로 다른 세 개의 지역으로 구분됐던 이전 시대 형태로 다시 돌아간 첫 사례다.


그리스 시대에 리비아의 서쪽에는 원래 트리폴리타니아(그리스어 트리폴리스, 즉 세 도시들)가 있었다. 또 벵가지 시의 중심부이며 차드 국경까지 뻗어 있는 동쪽 지역은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는 공히 키레나이카로 알려졌다. 그리고 이 두 지역 아래, 즉 현재 이 나라의 서남부 끝단이 페잔 지역이다.


트리폴리타니아는 남유럽의 인접국들과 교역을 하느라 늘 북쪽과 북서쪽을 바라봤다. 반면 키레나이카는 항상 이집트와 아랍 땅이 있는 동쪽과 가깝게 지냈다. 심지어 벵가지 지역 해안을 나서면 해류조차 자연스럽게 배를 동쪽으로 데려다줄 정도다. 한편 페잔은 두 연안 공동체들과는 공통점이라고는 찾기 어려운, 전통적으로 유목민들의 땅이었다.

[위: 트리폴리와 키레네의 유적들 리비아 지도 출처 구글 이미지]

콩고민주공화국, 아프리카 세계대전의 현장


유럽인들이 아프리카 대륙 한복판에 그려 넣은 선들 가운데 가장 큰 실수라면 DRC, 즉 콩고민주공화국(Democratic Republic of the Congo)으로 알려진 거대한 블랙홀일 것이다. 영국 작가 조지프 콘래드(1857~1924) 소설 『Heart of Darkness』의 무대인 이 지역에는 여전히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출처 구글 이미지]

이 나라야말로 인위적인 국경선 설정이 어떻게 한 국가를 내분으로 피폐하게 만드는지, 또 외부인들에게 광물자원을 수탈당하면서 동시에 허약하고 분단된 국가로 추락되는지 보여주는 최적의 사례다.


비록 나라 사정으로 정확한 수치를 얻기는 어렵지만 이 나라의 땅덩어리는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넓고 인구 또한 대략 7천5백만 명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 나라 국민들은 적어도 2백 개가 넘는 부족으로 나뉘는데 그 가운데 가장 세력이 큰 부족은 반투족(Bantu)이다.


또한 언어만도 수백 개에 달하며 널리 퍼진 프랑스어가 그나마 그 간극을 조금은 메우고 있다. 프랑스어가 쓰인 것은 벨기에의 식민 통치기(1908-1960년)와 그 이전, 즉 벨기에 국왕 레오폴드가 자신의 주머니를 불리기 위해 이 지역의 천연자원을 착취해서 마치 개인 재산처럼 편취했던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벨기에의 콩고 수탈 출처 구글 이미지]

1960년에 벨기에인들이 떠나자 이 나라에는 서로 뭉쳐서 이룰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결국 기다렸다는 듯 내전이 발발했고 전 세계에 몰아친 냉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은 점점 격화되었다. 킨샤사(콩고민주공화국의 수도) 정부는 앙골라 내전에서 반군을 지원했는데 이는 당시 같은 반군을 지지하고 있던 미국의 관심을 끌었다. 양측이 무기 구입에 쏟아부은 돈만 해도 수억 달러에 달했다.


냉전이 종식되자 당시 자이르(콩고민주공화국의 옛 이름)라 불렸던 지역에 대한 미국과 소련의 관심도 시들해졌다. 나라는 여전히 비틀거렸지만 그나마 천연자원 덕분에 그럭저럭 버텨가고 있었다.


대지구대(Great Rift Valley, 협곡지대)는 남부와 동부에서 콩고 안쪽으로 꺾여 들어오는데 여기에는 막대한 양의 코발트, 구리, 다이아몬드, 금, 은, 아연, 석탄, 망간을 비롯한 다양한 광물들이 매장돼 있다. 특히 카탕가 지역은 광물의 보고라 할 만하다.

[아프리카 대지구대와 콩고 무탄다 광산 출처 구글 이미지]

지금은 수출량의 50퍼센트 이상을 중국이 사가지만 이 나라 국민은 여전히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2014년 유엔인간개발지수에 따르면 콩고민주공화국은 조사 대상 187개국 중 186위에 랭크됐다. 이는 풍부한 천연자원에다 땅 또한 넓다 보니 너도나도 이 나라를 뜯어먹으려고 달려들고 있는 탓이다.

[코발트 광산에서 일하는 콩고인들 출처 구글 이미지]

콩고민주공화국이 차지하고 있는 영토는 아홉 개 나라들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 나라들 또한 하나같이 이곳에 근심거리를 더하다 보니 콩고 내전이 <아프리카판 세계대전>으로 알려진 것도 과언이 아니다. 이 나라의 남쪽에는 앙골라가, 북쪽에는 콩고공화국과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이, 동쪽에는 우간다, 르완다, 부룬디, 탄자니아, 그리고 잠비아가 자리 잡고 있다.


콩고 내전의 기원은 수십 년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중에는 1994년 르완다를 강타한 재앙으로 발발한 내전과 그 후폭풍으로 서부 지역이 전쟁에 휩쓸렸던 최악의 시기도 있었다. 이 전쟁은 아무리 적게 잡아도 줄잡아 10만 명의 인명을 앗아갔고 질병과 굶주림으로 6백만 명을 죽음으로 내몬 결과를 낳았다. 특히 유엔의 추산에 따르면 희생자들의 거의 절반이 5세 이하의 어린이들이라고 한다.

[콩고 내전 출처 구글 이미지]

최근 들어 최악의 전투는 잦아들었지만 이 나라는 제2차 세계대전 이래 최악의 분쟁의 본산이면서 언제 또 발발할지 모를 전면전을 방지하기 위해 유엔의 전면적인 평화 유지 임무가 여전히 요구되는 지역이다. 콩고민주공화국은 한 번도 하나였던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실질적으로 평화롭게 함께할 수 있는 길을 찾을 때까지는 단지 분열 상태를 유지하는 수밖에 없다.


나일 강의 수자원, 축복이자 분쟁의 씨앗 - 이집트


장장 6,671킬로미터라는 지구상에서 가장 긴 길이를 자랑하는 나일 강은 그 유역에 근접한 것으로 여겨지는 부룬디, 콩고민주공화국, 에리트레아, 에티오피아, 케냐, 르완다, 수단, 탄자니아, 우간다 그리고 이집트를 포함한 10개 나라들에 영향을 미친다.


나일 강이 없으면 아무도 없다. 이집트가 거대한 나라이기는 하나 8천4백만 명에 달하는 인구 대다수가 나일 강에서 불과 반경 십여 킬로미터 이내에 살고 있다.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만 보면 이집트는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높은 나라 가운데 하나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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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이집트는 미국의 군사 원조 덕에 아랍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국방력을 갖춘 국가가 되었다. 하지만 이집트의 군사력은 사막과 바다 그리고 이스라엘과 맺은 평화 조약의 제약을 받고 있는 형편이다.


특히 시나이 반도에서 툭하면 터지는 이슬람 봉기를 상대하고, 매일 전 세계 교역량의 8퍼센트가 드나드는 수에즈 운하를 지키면서 8천4백만 명에 달하는 인구를 날마다 먹여 살리느라 고군분투하는 것만으로도 이집트는 여전히 뉴스거리임에 분명하다.

[수에즈운하 개통과 2021년 사고 등 출처 구글 이미지]

이스라엘과 다섯 차례 전쟁을 치른 이집트는 나일 강을 두고 향후 에티오피아와 분쟁에 돌입할 가능성 또한 높아지고 있다. 아프리카 대륙에서 역사가 가장 깊을 뿐 아니라 대규모 군대를 보유한 이 두 나라 사이에 이 지역의 주요 수자원을 두고 한바탕 회오리가 몰아칠 수도 있다.


에티오피아에서 시작되는 청나일(Blue Nile) 강과 백나일(White Nile) 강은 누비아 사막을 거쳐 이집트 내부를 흐르다가 수단의 수도 카르툼에서 만난다. 중요한 것은 물의 대부분이 청나일 강에서 흘러온다는 점이다.


2011년 에티오피아 정부는 수단 국경과 인접한 청나일 강에 중국과 합작으로 거대한 수력 발전용 댐을 건설한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랜드 에티오피아 르네상스 댐(GERD)'으로 불리는 이 사업은 2020년에 이르면 완공될 예정인데(현재 완공되어 가동 중), 에티오피아가 자국민만 쓸 수 있는 물을 보유하려 한다면 이집트로 흘러가는 수량이 급격히 줄어들 가능성 또한 도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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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그리고 보코 하람의 나라 - 나이지리아


1억 7천7백만 명에 달하는 아프리카 최대의 인구와 국토 면적, 천연자원은 나이지리아를 그 지역의 패권 국가로 서게 했다. 나이지리아라는 국가는 여러 고대 왕국들의 영토를 기초로 영국이 들여온 행정 구역으로 형성되었다. 1898년에 니제르 강 영국 보호령이 되었다가 후일에 나이지리아가 되었다.


식민지 시절 영국인들은 대체로 해안선을 따라 남서부 지역에 머무는 편을 선호했다. 이런 탓에 그들의 이른바 문명화 사명은 중부 고지대와 북부의 무슬림 지역까지는 별반 미치지 못했고 덕분에 결과적으로 이 나라의 절반은 남쪽보다 덜 발전한 채로 남아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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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는 사하라 이남에서 가장 큰 원유 생산국인데 이 고품질의 원유는 주로 남부에 매장되어 있다. 북부의 나이지리아 주민들은 석유를 팔아서 얻은 이득이 나라 전체에 골고루 분배되지 않고 있는 데에 불만이 많다.


석유로 거둬들이는 수입의 상당 부분은 이 나라의 복잡한 부족 체제 안에서 유력자들을 매수하는 데 쓰이고 있다. 삼각주 하구의 내륙 석유 산업 또한 니제르 삼각주 해방운동의 위협을 받고 있다. 반면 연안의 유전지대에서는 이런 일이 거의 벌어지지 않아 투자자들이 몰리고 있다.

[나이지리아 유전 지도 출처 구글 이미지]

나이지리아의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단체인 보코 하람(Boko Haram)은 무슬림 지역에 무슬림 왕국을 세우겠다면서 발전이 더딘 나이지리아 북부에 거점지대를 확보하기 위해 불평등이라는 정서를 이용하고 있다. 보코 하람의 전사들 구성을 보면 주로 북동부의 카누리족 출신이 다수를 차지한다.


보코 하람의 수중에 들어간 마을들 대다수는 카메룬을 등지고 있는 만다라 산악지대에 분포하고 있다. 카메룬 정부는 보코 하람을 반기지는 않지만 그들의 시골 지역은 이들이 필요할 때 퇴각할 공간을 제공해 주고 있다.


미국과 프랑스는 수년에 걸쳐 이들의 궤적을 추적해 왔다. 그리고 현재 사헬-사하라 지역에서의 폭력적인 위협과 나이지리아 북부와 연결하려는 시도가 점증하고 있는 것에 대응하기 위해 무인 정찰기를 운용하고 있다. 여러 나라에 걸쳐 확산돼 가는 위협이 경종을 울리고 있는 현실에서 나이지리아, 카메룬, 차드는 현재 군사적으로 미국과 프랑스와 협력해서 군사 활동을 개시한 상태다.

[보코 하람과 정부군 출처 구글 이미지]

앙골라, 내부와 외부의 수탈로 점철되다


더 남쪽, 그러니까 대서양 연안으로 내려가면 사하라 이남에서 두 번째로 큰 원유 생산국인 앙골라가 있다(* 2023년 OPEC 탈퇴). 과거 포르투갈의 식민지였던 앙골라는 지리로 천연 국경이 형성된 아프리카 국가들 가운데 하나다. 즉 서쪽은 대서양이, 북쪽은 정글이, 남쪽은 사막이 자연스레 경계를 만들어 주고 있는 한편, 동쪽 지역은 인구 밀도가 희박한 암석지대로 콩고민주공화국과 잠비아와의 완충지대 역할을 한다.

[출처 구글 이미지, 연합뉴스]

2천2백만 인구의 다수는 물이 풍부해서 농사를 지속적으로 지을 수 있는 서부의 절반에 모여 있다. 앙골라의 유전 대부분 또한 서부 연안에 분포하고 있다. 대서양에 설치된 굴착 장치 대다수는 미국 회사 소유인데 생산량의 절반 이상은 중국에서 소비된다.

[수도 루안다와 칼란두라(Kalandula) 폭포 출처 구글 이미지]

앙골라는 또 다른 이유로 유명세를 탔는데 그것은 바로 내전이었다. 포르투갈이 이 나라에서 손을 뗀 1975년에 독립전쟁은 끝났지만 뒤이어 발발한 내전은 애초에 이념 분쟁을 표방했다가 결국은 부족 간의 분쟁으로 귀결되었다.


앙골라민족해방운동(MPLA) 내의 사회주의자 그룹 전사들 대다수는 음분두족 출신이며 이들과 적대적인 반군들(FNLA와 UNITA)은 주로 바콩고족과 오빔분두족 출신이다. 음분두족은 수적인 이점은 갖지 못했지만 지리적 이점은 가졌다. 수도인 루안다는 이들의 수중에 있었고 유전들과 주요 하천인 쿠안자 강도 가까웠다. 또한 러시아제 무기를 공급하고 쿠바 병력을 지원할 수 있는 나라들의 지지 또한 얻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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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골라민족해방운동의 지도부는 2002년에 승리를 거두자마자 민중을 제물 삼아 제 배만 불린 아프리카 지도자들과 식민주의자들의 긴 목록에 자신들도 포함시킴으로써 그마저도 미심쩍었던 사회주의 신조를 훼손하기 시작했다.


중국의 아프리카 접근, 터를 잡은 이상 쉽게 떠나지 않을 것이다


중국은 원유의 약 3분의 1을(여기서 발견되는 귀금속도) 아프리카에서 들여오는데 이는 곧 중국인들이 일단 아프리카에 들어와서 터를 잡은 이상 쉽게 나가지 않을 거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라이베리아에서는 철광석을 찾아 나서고, 콩고민주공화국과 잠비아에서는 구리를 캐고, 역시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코발트도 캐가고 있다.


또한 중국은 케냐 몸바사 항만 개발 사업을 지원했을 뿐 아니라 이제는 케냐의 석유 자산을 겨냥한 보다 원대한 계획에도 손을 댔는데 이 사업은 상업적으로 가시화돼 가고 있다. 케냐는 중국의 도움을 등에 업고 동부 연안의 경제 강국으로 발돋움하기를 기대하고 있다. 남쪽 국경 쪽에서는 동아프리카의 패권 자리를 두고 탄자니아가 경쟁자로 나섰다. 탄자니아 또한 자국의 사회기반 시설 공사에 중국을 불러들여 수십억 달러에 이르는 계약을 체결했다.

[중국의 탄자니아 도로 공사 출처 구글 이미지]

중국의 접근은 많은 아프리카 정부들에게는 매력적인 제안이 아닐 수 없다. 베이징 정부나 중국의 대형 기업들은 인권이라는 미묘한 문제에는 입도 뻥긋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경제 개혁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일부 아프리카 지도자들에게 국부를 착복하는 행위를 멈추라는 요구도 하지 않는다.


중국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석유, 광물, 귀금속, 그리고 시장이다. 이는 정부 대 정부 관계로는 공평하지만, 대형 공사에 투입되는 지역 주민들과 중국인 인력 간에 긴장이 증가하는 현상 또한 나타날 것이다.


지리적 위치의 혜택을 제대로 보는 남아프리카공화국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경제는 나이지리아에 이어 아프리카 대륙에서 두 번째로 큰 규모다. 경제(앙골라보다 세 배나 큼), 군사, 인구(5천3백만 명) 등 어느 모로 보나 이 나라가 남쪽의 강국인 것은 자명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여타의 아프리카 국가들에 비해 훨씬 빠른 발전을 이룬 데는 대륙의 최남단에 위치하여 양 대양으로 진출하기 수월한 위치도 한몫했다. 또 금과 은, 석탄의 매장량이 풍부하며 대규모 식량 생산이 가능한 기후와 토양을 지닌 덕도 있다.

[국기와 입법수도 케이프타운 출처 구글 이미지]

남아프리카의 대부분 지역에게 바깥 세계와 사업을 한다는 것은 프리토리아나 블룸폰테인, 케이프타운과의 거래를 의미한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자국의 천연자원과 지리적 위치를 이용해서 인접국들을 수송 시스템에 편입시켰다. 이 수송망은 짐바브웨, 보츠와나, 잠비아, 말라위 그리고 탄자니아를 통해 북쪽으로 뻗어 올라가서 콩고민주공화국의 카탕가 지역과 동쪽으로는 모잠비크까지 뻗어나간다.

[남아프리카의 철로 출처 구글 이미지]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에 아프리카민족회의(African National Congress,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흑인 해방 조직)는 앙골라의 앙골라민족해방운동이 포르투갈 식민주의와 싸우는 것을 지지했다. 하지만 공동 투쟁 당시의 열정은 현재 한층 냉랭한 관계로 변해서 각자의 나라를 통제하는 양측은 지역 패권을 두고 서로 경쟁하는 사이가 되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은 남아프리카개발공동체(SADC) 내의 15개국을 통솔하고 있으며 현재 가입하지도 않은 국제대호수지역회의에서 항구적인 지위를 차지하려는 작업도 해오고 있다. 남아프리카개발공동체는 부룬디, 케냐, 르완다, 우간다, 탄자니아가 속해 있는 동아프리카공동체(EAC)와는 경쟁 구도를 형성하고 있는 기구다. 하지만 탄자니아는 남아프리카공화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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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공화국 국방군은 유엔의 지휘를 받는 1개 여단을 콩고민주공화국에 공식적으로 주둔시키고 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그 광물 부국에서 얻어지는 전리품에서 밀려나지 않겠다는 의지를 확인하는 정치적 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행동은 결국 누가 콩고민주공화국에서 주도권을 행사할지를 두고 저마다 생각이 다른 우간다, 부룬디, 르완다와의 경쟁을 촉발시켰다.


지리가 점지한 힘과 싸우기


아프리카는 이제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대도시들은 확장돼 가고 있는 아프리카에게 주어진 선택권이란 긴밀하게 연결된 현대화된 세계를 끌어안는 길뿐이다. 물론 갖가지 문제점들이 목격되기는 하지만 아프리카는 이를 딛고 성큼성큼 나아가고 있다. 교역을 가로막았던 강들은 이제는 수력 발전소로 거듭나고 있다. 대규모 식량 생산을 유지하려 고군분투하던 땅에서는 광물과 석유가 생산되면서 일부 국가들이 부유해지고 있다.


전 대륙에 걸쳐 부패가 만연해 있으며 몇몇 뜨거운 분쟁 지역(소말리아, 나이지리아, 수단 등)에 더해 경제가 거의 마비되다시피 한 몇몇 국가들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프리카 대륙에는 해마다 점점 더 많은 도로와 철도들이 건설되면서 믿기 어려우리만치 다양한 지역들을 연결해 주고 있다.


아프리카가 역사와 자연이 점지한 힘과의 싸움에서 마침내 우세를 점하기 직전까지 도달했다는, 이른바 낙관론이 담긴 글들이 1960년대 이래 10년 주기로 발표되곤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빗나가지 않으리라. 그리고 그래야 한다. 몇몇 예측에 따르면, 현재 사하라 이남 지역 아프리카의 인구는 11억 명인데 2050년이 되면 배가 늘어 24억 명에 이를 것이라 한다.


(지리의 힘 2) Chapter 8 에티오피아
그래도 지리는 에티오피아 편이다


아주 먼 옛날 에티오피아의 아와시 계곡에는 인간과 비슷한 유인원인 호미닌(hominin, 분류학상 인간의 조상으로 분류되는 종족)이 살고 있었다. 그녀는 두 다리로 걸을 수도 있었고 나무도 탈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나무에서 떨어지면서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 * 美 오스틴 텍사스대 연구결과 12m 높이에서 시속 60km로 떨어져 어깨, 다리 등 골절상을 입은 걸로 추정하고 있다.


그 후로 대략 320만 년이 지난 1974년에 그녀의 후손 가운데 하나일 인류학자 도널드 요한슨이 우연히 그녀의 뼈를 발견한다. 학술명은 AL 288-1이지만 '루시'라는 이름이 붙여져 있다.

[도널드 요한슨과 루시의 추락 추정도 출처 구글 이미지]
[프랑크푸르트 'Senkenberg' 박물관의 루시 화석 출처 구글 이미지]

에티오피아 국립 박물관의 포스터에는 “루시는 여러분이 고향에 온 걸 환영합니다(Lucy Welcomes You Home).”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기원의 땅(Land of Origins)〉을 국가의 관광 슬로건으로 내건 나라에게 어울리는 영리한 마케팅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이 나라의 GDP에서 관광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10퍼센트에 이른다. 환상적인 풍광의 고산지대, 열대 밀림, 불타는 듯 뜨거운 사막, 단단한 암석을 깎아 만든 1천 년 된 교회를 포함한 9곳의 세계 문화유산, 그리고 숨을 멎게 하는 웅장한 폭포 등을 보기 위해 해마다 1백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이 나라를 찾아온다.

[에티오피아 국립박물관]
[위: 곤다르의 성, 아래: 게랄타 산맥 절벽에 만들어진 티그레이의 아부나 예마타 교회 출처 구글 이미지]

물은 힘을 주고 협곡과 폭포는 발전을 가로막고


에티오피아의 지정학적 위치와 그 중요도를 규정하는 것은 바로 물이다. 이 나라의 강점이 담수(염분이 없는 보통의 물)라면, 해수는 이 나라의 약점이다. 에티오피아에는 12개의 커다란 호수가 있고 9개의 큰 강이 있다. 덕분에 이웃 나라들 대부분에 물을 공급하고 있다 보니 에티오피아는 그들에 대해 큰 정치적 영향력을 쥐고 있는 셈이다.


반면 이 나라에 부족한 것은 해안과, 직접적으로 해상에 접근할 수 있는 능력이다. 이 지역은 군사 및 경제 전략 못지않게 교역에서 잠재적인 이익을 바라보는 터키, 중국, 걸프 국가들을 비롯한 미국의 관심까지 불러들이고 있다. 따라서 아프리카의 급수탑으로서 에티오피아가 기술과 자원을 현명하게 사용할 수 있다면 그 개혁은 이 나라뿐 아니라 이 지역 모두에게 행운의 여신이 될 수 있다.

[에티오피아의 호수와 강 출처 구글 이미지]

물 다음으로 중요한 지리적 요소를 들라면 바로 이 나라를 통과하는 동아프리카 지구대(East African Rift system, 아프리카 동부를 남북으로 달리는 폭 35-60킬로미터에 달하는 대단층 함몰지대)일 것이다.


그것이 만들어낸 산맥과 계곡들이 에티오피아를 길게 갈라놓고 있어서, 이 나라의 지도자들은 통합을 위해 상징적이든 말 그대로든 그 사이를 잇는 다리를 놓으려고 애써왔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이 나라 한복판에 있는 지구대를 기준으로 산악지대가 많은 고지대가 양쪽으로 갈리면서 흡사 사람의 폐를 연상시키는 광경을 만든다.


그 가운데 더욱 우세한 쪽은 왼쪽 또는 서쪽 폐다. 그들이 실제로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숨을 쉬고 살아가게 해준다. 인구가 가장 밀집된 이곳은 농업의 중심지이기도 하다. 이 나라에서 외화를 가장 많이 벌어들이는 커피 농장들 대다수도 이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 핵심부인 고지대에는 수도 아디스아바바가 있다.

[에티오피아 지형과 커피농장들 출처 구글 이미지]

서부 고지대에는 해발 4,533미터에 달하는 산맥이 버티고 있다. 또 청나일강을 포함한 3개의 강 발원지가 이 나라에 있는데 이 강들은 북서쪽의 수단과 서쪽의 남수단으로 향하는 저지대로 흘러들어 간다. 에티오피아와 북동쪽의 아덴만 사이에 있는 소말리아는 에티오피아가 국경을 맞대고 있는 6개 나라들 가운데 가장 불안정한 이웃이라 할 수 있다.


근 30년을 내전에 시달린 이 나라는 에티오피아와 1천6백 킬로미터에 달하는 가장 긴 국경을 맞대고 있다. 북쪽에는 에리트레아와 지부티가 버티고 있는 바람에 에티오피아가 홍해로 직접 진출하기가 쉽지 않다. 에리트레아 쪽 국경 지역에는 지리상으로 에티오피아에서 가장 낮은 지대인 다나킬 대평원이 자리 잡고 있다(이 지역은 주변에 용암지대가 있어 지구상에서 가장 뜨거운 곳이다).

[다나킬 대평원과 유황 화산 지역, 에트라 알레의 용암 호수 출처 구글 이미지]

식민 지배를 받은 적 없는 이질적인 공동체들의 나라


에티오피아는 드넓은 아프리카의 뿔 지역에서 일찌감치 군사강국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1억 1천만 명이 넘는 이 나라 인구는 2030년에는 1억 3천만 명까지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주변국 인구(약 1억 8천만 명)까지 모두 합치면 아프리카 인구의 5분의 1을 차지한다. 따라서 이 지역에서 패권을 잡는다면 아프리카 정치 테이블에서 상석에 앉을 수 있다.


에티오피아는 지구상에서 가장 문제가 많은 지역 중 한 곳에, 그것도 그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다. 금세기에 수단, 남수단, 소말리아, 에티오피아, 에리트레아는 모두 내전을 겪었다. 케냐는 대규모 민족 분쟁과 더불어 소말리아에 근거지를 둔 알샤바브(소말리아의 극단주의 테러 조직)가 자행하는 테러 공격에까지 시달리고 있다. 그리고 아프리카의 뿔 지역과 중동 국가들 간에는 오래된 문화유산과 교역로가 연계된 장구한 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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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부터 2021년에는 에티오피아 정부와 북부의 티그레이 지역 간에 본격적인 분쟁이 벌어져서 금방이라도 전면적인 내전으로 격화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이 분쟁 또한 티그레이 지역에서 탈출한 수만 명의 난민이 수단으로 몰려가게 하는 원인이 되었다.


사실 에티오피아는 에너지와 식량을 자급자족할 만큼 잠재력이 높은 나라다. 농업은 에티오피아 GDP의 거의 절반을 차지한다. 하지만 주기적으로 가뭄에 시달리고, 삼림의 남벌, 과도한 방목, 군사 독재, 빈약한 인프라 등이 이 나라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 게다가 운항에 적합한 강이 바로강 하나뿐이라는 점도 국내 교역을 어렵게 하는 요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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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정은 변하고 있다. 우선 청나일강, 아와시강, 오모강, 셰벨리강을 비롯한 여러 강에 댐과 발전소를 건설해서 수력 발전에 사용하는 유량을 점점 늘려가고 있다. 청나일강에 건설한 그랜드 에티오피아 르네상스 댐까지 가세하면 이 나라 에너지 수요를 거의 충족시킬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웃 나라들에도 전력을 판매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에티오피아가 식민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은 유명하지만 자체 제국을 건설하면서 이 나라도 그 경계들로 인해 벌어지는 비슷한 문제들을 겪고 있다. 에티오피아에는 9개의 주요 부족이 있다. 또 9개의 행정 구역과 2곳의 자치 도시가 있는데 핵심은 이 모든 게 부족에 근거해서 짜여졌다는 점이다.

[에티오피아 부족 지도 출처 구글 이미지]

이 나라에서 통용되는 언어만 해도 80가지가 넘는데 정부는 대체로 4개의 주요 언어군에서 파생된 이 언어들 모두를 인정하고 있다. 오로모족은 이 나라 인구의 35퍼센트를 차지하는 가장 큰 부족이고 그 뒤를 잇는 암하라족이 27퍼센트, 이어 소말리족과 티그레이족이 각각 6퍼센트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정부가 지정한 공용어인 암하라어는 연방이 정한 선들을 넘어 서로 소통하게 하면서 지방 정부와 수도를 묶어주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인구의 6퍼센트를 차지하는 소말리족은 자신들의 나라인 에티오피아 북단의 티그라이족보다 국경 너머에 있는 소말리아 사람들과 훨씬 공통점이 많다.


현대 에티오피아의 탄생, 독보적인 세력으로 떠오르다


에티오피아에는 모두가 공유하는 유산이자 국민 통합의 근거로 이용되는 특별한 이야기 하나가 전해져 온다. 그것은 바로 시바 여왕과 이스라엘 솔로몬 왕의 이야기다. 14세기에 지어진 에티오피아의 역사서인 『케브라 나가스트(Kebra Nagast, 왕들의 영광)』를 보면 시바 여왕은 솔로몬 왕의 지혜에 매료된 나머지 그를 만나러 이스라엘로 가기로 했다.


메넬리크라는 이름으로 불린 그 아들은 훗날 에티오피아의 솔로몬 왕조와 유대 기독교 전통의 시조가 되었다. 그의 뒤를 이어 1970년대까지 내려온 이 왕조의 권좌는 예루살렘에서 보낸 그 하룻밤의 직계 후손이라고 스스로 주장하는 하일레 셀라시에까지 이어졌다.

[케브라 나가스트 출처 구글 이미지]

현재 에티오피아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무슬림 인구는 주로 외딴 지역, 특히 동부 저지대에 거주하고 있다. 고지대에 주로 거주하는 기독교도들은 이 나라를 〈이슬람이라는 바닷속에 떠 있는 기독교 섬〉으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에티오피아 이슬람 분포도 출처 구글 이미지]

현대 에티오피아가 탄생한 것은 1855년이었다. 국왕 테오드로스 2세*는 여러 왕국을 강제로 통합해서 현대 국가로 만들려고 했다. 재편성된 군대는 신식 무기로 무장했고 유럽에서 들어온 기술자들이 상업에 활력을 불어넣을 신기술을 전수했다. *1868년 영국군에 패해 권총 자결

[사자왕 테오드로스 2세 출처 구글 이미지]

이후 에티오피아는 두 제국의 군대를 물리쳤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으로는 벅찬 적수를 건드렸다는 것을 이내 깨달았다. 그중 한 제국인 이집트군은 1874년부터 2년 동안 지속된 이집트-에티오피아 전쟁에서 두 번에 걸쳐 큰 패배를 당했다. 1896년에는 이탈리아가 6천 명의 인명 손실을 입는 처참한 패배를 당했다. 그 때문에 이탈리아는 에리트레아를 점령하고 있으면서도 에티오피아에 대한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1896 아두와 전투에서 이탈리아를 물리친 에티오피아 오로모족 전사 출처 구글 이미지]

1930년에 라스 타파리하일레 셀라시에 1세, 삼위일체의 황제, 에티오피아 제국의 육군 원수 및 공군 원수 그리고 해군 제독이 된다. 이런저런 거창한 타이틀의 무게가 짓누르긴 했어도 그의 집권 동안 에티오피아는 상당한 발전을 이루었다.

[라스 타파리, 1924년 영국 방문 출처 구글 이미지]

1945년, 황제는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설득해서 당시 이탈리아 식민지에서 해방된 에리트레아가 독립국가로 자립하기 어려우니 자신들의 정부 아래로 들어오게 하려고 했다. 그의 본심은 이를 통해 해양으로 직접 접근하는 길을 확보하려는 것이었다.


이것은 1952년이 되어서야 유엔의 승인을 받게 된다. 물론 동시에 미국이 냉전에 대비해 에리트레아의 수도인 아스마라에 비밀 정보 수집 기관을 설치하고 해안 지역에 해군기지를 세운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한 번도 식민 통치를 받은 적 없는 아프리카의 리더로서 셀라시에는 대륙 전역에 본격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1963년아디스아바바에 본부를 둔 아프리카통일기구(Organization of African Unity, 아프리카 38개 독립국가들이 결성한 국제기구)의 주요 설계자 중 한 사람으로 참여했다. 이 기구는 2002년에 아프리카연합(African Union)으로 발전하지만 본부는 여전히 아디스아바바에 있다.

[OAU 설립과 아디스아바바의 본부, OAU와 AU 깃발 출처 구글 이미지]

쿠데타, 공포정치, 전쟁! 그래도 변화의 바람은 분다


1960년에 일어난 쿠데타 시도에도 불구하고 셀라시에는 살아남았지만 이 사건은 그의 독재 통치와 종족 분열을 에워싼 긴장을 부각시켰다. 1960년대에 들어서자 당시 에티오피아 치하에 있던 에리트레아에서도 봉기가 일어났다.


1974년 9월, 이번에는 군대와 경찰 및 국민방위군조정위원회의 주도로 군사 쿠데타가 발생했다. 쿠데타를 이끈 인물은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 소령이었다. 쿠데타가 발발한 지 30년이 넘은 2006년 대량 학살 혐의로 쿠데타의 주역들이 기소되고 법원 심리가 열렸을 때 황제가 침대에서 목이 졸려 사망한 증거가 제시됐다.


1977년 스스로 중령으로 진급한 멩기스투 소령은 마르크스 레닌주의 정권을 세웠다. 멩기스투가 집권하던 17년 동안 무려 10만 명이 피의 공포정치로 희생되었고 수천 명 이상이 수감되고 고문을 당했다. 미국과의 관계는 깨지고 에티오피아가 다시 소련과 친해지게 되면서 소련제 무기와 군사 고문단이 들어왔다.

[멩기스투 출처 구글 이미지]

1980년대 초반에는 저지대에 심각한 가뭄이 들어서 기근도 찾아왔다. 20세기 최악의 재앙으로 기록되는 이 사태로 집계된 사망자만 해도 대략 1백만 명에 달했다. 냉전의 종식은 소련에 의존하던 나라의 지도자들에게는 게임 종료를 의미했다. 1991년 5월 결국 멩기스투는 챙길 수 있는 한 최대로 챙겨 짐바브웨로 도피했다.


새로 들어선 정부를 티그라이족 출신의 멜레스 제나위가 이끌게 되자 이제껏 주도권을 잡고 있던 암하라족은 불안해졌다. 제나위 정권 아래에서 개정된 헌법은 부족에 따라 나뉘어진 지방 정부에게 권한을 위임하는 연방국을 지향했다.

[한국을 방문한 제나위 총리 출처 구글 이미지]

그 결과 1993년에 에리트레아가 독립된 국가로서 합법적으로 인정받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 한 번의 서명으로 에티오피아는 흥해 연안의 해안선 전체를 잃었고 세계에서 가장 인구가 많은 내륙국이 되고 말았다.


1998년에 바드메라는 분쟁 지역 마을에서 벌어진 일련의 사태들이 결국 전면적인 전쟁으로 격화된 것이다. 2년여에 걸친 전쟁 동안 양측은 수만 명의 인명 피해를 입었고 결국 어느 쪽도 영토를 잃거나 얻지 못한 채 싸움은 막을 내렸다.

[에티오피아-에르트레아 전쟁 출처 구글 이미지]

2000년대에 들어서 에티오피아의 경제는 비교적 견실하게 성장하고 있었지만 국내에서의 탄압은 멈추지 않은 가운데 수천 명의 활동가들과 언론인들이 대개는 말도 안 되는 죄목으로 투옥됐다.


2018년은 큰 변화가 목격된 해였다. 42세의 퇴역 중령 아비 아머드 알리가 등장하면서 총리로 선출됐다. 아비의 등장이 새로웠던 것은 그가 오로미아 지역 출신이라는 점 때문이다. 그의 재임 첫 6개월 동안 눈이 핑핑 돌 만큼 엄청난 변화의 바람이 몰아쳤다. 언론인과 반대파까지 포함된 정치범 수천 명이 풀려났다.


총리는 집권한 지 몇 주 만에 그 자신도 싸웠던 에르트레아와 2년에 걸친 전쟁을 종식시킨 2000년의 합의를 존중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이어 두 나라 간에 평화조약이 체결됐다.

[에르트레아와 평화협정 체결식 출처 구글 이미지]

20년에 걸친 전시 상태가 공식적으로 종식되면서 무역과 외교에서 평화와 협력의 새 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이 노력으로 그는 2019년 이 나라 최초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에 이른다. 그렇지만 두 나라 사이의 진정한 화해는 아직도 진행 중으로 남아 있다.

[2019년 노벨 평화상 수상 출처 연합뉴스]

아직도 끝나지 않은 피를 부르는 종족 간 분쟁


새 정부가 들어서고 초기 몇 주 동안 연방의 9개 접경지역에서 부족들 간에 충돌이 빚어졌다. 몇 달 만에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고 거의 3백만 명의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고 떠났다.


총리는 자신의 개혁을 통해 모두가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거라면서 다른 세력 기반들을 안심시키려 했다. 그래서 그들에게 정치 과정에 참여하도록 촉구했다. 집권 1년 전에 한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에게는 단 하나의 선택지밖에 없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로 합치는 것입니다. 나머지 선택지란 서로 죽이는 것입니다."


에티오피아가 국경 내의 이질적인 지역들을 통제하기 위해서는 늘 일정한 수준의 힘이 필요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다양한 부족 집단들에게 <에티오피아 국민>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군대에 입대하는 이들에겐 <조국>을 지킨다는 확실한 동기를 부여해 주어야 한다.


물론 이 힘은 언제든지 산산이 부서질 수 있는 위험이 상존한다. 2020년 6월 29일 월요일 저녁에 에티오피아에서 가장 유명한 싱어송라이터이자 인권운동가인 34세 하찰루 훈데사가 아디스아바바 교외에서 암살당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오로모족 출신의 슈퍼스타였다.

[하찰라 훈데사 출처 구글 이미지]

이로 인해 오로모족 사이에서 복수의 다짐들이 난무했고 지배층인 암하라족 공동체에서도 오로모족을 공격하겠다는 경고가 흘러나왔다. 그런데 여기서 종교적 정체성도 한몫한다. 암하라족은 주로 기독교이지만 오로모족 대다수는 무슬림이다.


오로모족 청년들이 마체테(날이 넓고 무거운 칼)와 단검 등을 들고 함라라족과 기독교를 믿는 오로모족을 학살하고 건물을 파괴하는 처첨한 사태가 발생했다. 그들은 "이 땅은 오로모의 땅이다."라고 구호를 외쳤다.

[오로모족 시위 출처 구글 이미지]

오로모족은 가장 인구가 많은 부족인데도 권력에서 소외되어 온 것에 줄곧 불만을 품고 있었고, 암하라족은 이 나라 역사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배권을 행사해 온 기억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또 티그라이족은 인구의 6퍼센트에 불과하지만 얼마 전까지도 자신들이 정권을 잡았던 그 시대로 어떻게 하면 회귀할 수 있을지 궁리하고 있었다(2020년에 내전 발생).

[티그라이 내전과 수단으로 피난가는 암하라 주민들 출처 구글 이미지]

학습된 중립성을 유지하며 강대국의 눈치를 보는


1993년 이후 들어선 모든 정권은 하나같이 동일한 지리적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바로 <해양으로의 접근>이 힘들다는 것이다. 살아남고 번영을 이루려면 확실하고 믿을 만한 교역로를 확보해야 한다. 왜냐하면 에티오피아 수출입 상품의 대부분이 이웃 나라의 영토를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중요한 교역로는 비좁은 바브엘만데브 해협을 포함하고 10개국의 해안을 따라 흐르는 연안 무역 병목지대인 홍해를 경유하는 것이다. 에티오피아 수출과 수입의 대략 90퍼센트가 바다를 통해 이뤄지는데 화물 대부분이 지부티의 심해항을 통과한다.

[바브엘만데브 해협과 지부티항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런데 2019년에 시위대가 지부티와 에티오피아 간 고속도로를 봉쇄해 버리자 수도 아디스아바바에서 사용할 연료가 아예 바닥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에티오피아는 지부티 항구의 지분과 소말리아 베르베라항의 지분 19퍼센트, 수단의 포트수단과 케냐의 라무항 지분도 확보하며, 에리트레아의 항구로 가는 도로들도 다시 개통시키고 있다.


중국은 여기서도 주전 선수로 뛰고 있다. 에티오피아 수입의 대략 33퍼센트와 수출의 8퍼센트가 중국과 이뤄지고 있다. 중국은 백 년도 넘어 황폐해진 지부티와 아디스아바바를 연결하는 철도를 대체하는 장장 725킬로미터에 달하는 전기철도도 일찌감치 깔아주었다. 중국 정부가 지부티에 군사기지를 확보한 일이 세간의 이목을 끌기도 했는데 사실 중국은 홍해 연안이라는 격전지에 관여한 여러 나라 중 한 곳일 뿐이다.

[지부티 출처 구글 이미지]

2015년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가 예멘 내전에 개입했을 당시 아랍에미리트에리트레아의 아사브 항구 일부를 임차해서 홍해를 건너 공격을 개시할 공군기지로 탈바꿈시켰다. 또 아사브와 아디스아바바를 잇는 송유관 건설에도 관여했다.


2017년에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는 테러를 지원하고 지역의 안정을 해친다는 이유로 카타르와 관계 단절을 선언했다. 그러자 두 나라의 오랜 라이벌인 터키가 카타르 편을 들고 나섰고, 이어 터키와 아랍에미리트, 터키와 이집트 간 분쟁으로 격화되면서 홍해 전체로 긴장감이 확산되었다.


아랍에미리트는 소말리아 정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소말리아가 카타르와 터키랑 손을 잡자 그 나라에 지원하던 자금을 소말릴란드 자치 지역과 푼틀란드로 돌려서 그곳에 군사기지 한 곳과 항만 두 곳을 건설했다.

[소말리아와 터키 외무장관 회담 출처 구글 이미지]

지리상으로 볼 때 에티오피아는 위에서 언급한 카타르-터키 대 사우디아라비아-아랍에미리트 간의 충돌지점 일부에 들어간다. 하지만 에티오피아는 이제껏 중립을 지키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다. 대신 이 지역의 모든 세력과 힘을 합치려고 노력하면서 그들 중 어느 누구에게도 의존하는 모습으로 비치지 않도록 신경 쓰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는 에티오피아의 에너지 산업, 관광업, 제조업에 투자하고 있다. 또한 자국의 식량 안정도 도모할 겸 이 나라의 농업에 대한 투자금도 늘렸다. 터키도 걸프 국가들 때문에 에리트레아와 관계가 틀어지고 난 뒤로는 에티오피아에 부쩍 공을 들이고 있다. 에티오피아의 학습된 중립성은 터키가 이 나라에서 상당히 큰 경제적 비중을 차지하게 해주었다.


이는 주로 경제 전략에 치중되긴 하지만 에티오피아에게도 잠재적인 외교적 이득이 따라오는 일이기도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에티오피아와 터키 모두 현재 이집트와 매우 냉랭한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에티오피아가 이집트 정부와 큰 논쟁을 벌이는 상황에서 자신들을 지지해 줄 동맹이 필요할 때 이집트에 대한 불신을 공유하는 터키는 에티오피아에게 상당히 유리한 지원군이 될 수 있다. 그 큰 논쟁거리는 바로 에티오피아의 회심의 <그랜드 에티오피아 르네상스> 프로젝트이다.


에티오피아에게는 권력을, 이집트에게는 불안을


그랜드 에티오피아 르네상스 댐 프로젝트는 수년 동안 에티오피아의 국민적 자부심의 원천이 되어 왔으며 그 나라 미래의 중심에 있다. 이 댐에서는 엄청난 양의 전력이 생산될 것인데 에티오피아는 그 여분을 수단에 공급할 예정이다.


에티오피아 정부의 입장은 분명하다. 너무 많은 상류 지역들이 강우에만 의존하는 소위 하늘바라기 농사를 짓다 보니 주기적 가뭄에 수백만 명의 에티오피아인들이 걸핏하면 식량 부족에 시달린다는 것이다.


이집트 정부가 두려워하는 것은 그 물의 10퍼센트만 막아도 몇 년 안에 농부 5백만 명이 일자리를 잃고, 농업 생산물의 절반이 줄어들며, 이슬람주의자들의 반란과 싸우고 있는 이 나라가 혼란의 수렁으로 빠질 거라는 점이다.

[완공된 GERD 출처 구글 이미지]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는 에티오피아, 이집트 양측에 꽤 많은 투자를 하고 있어서 두 나라 간의 분쟁으로 그 가치가 손상되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는다. 또 댐 건설을 지원하고 있는 중국의 입장도 마찬가지다.


수단과 남수단 정부는 이 사태를 신중하게 지켜보는 중이다. 하지만 이집트보다 걱정은 덜한다. 에티오피아가 물이 계속 흐르도록 보장할 것이며 이웃 나라들에 여분의 전기도 공급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대신 에티오피아는 수단과 남수단의 석유를 괜찮은 조건으로 수입할 수 있다.

[2022년 아비 총리와 수단 부르한 군정 지도자 회동 출처 구글 이미지]

에티오피아의 앞길에는 여전히 많은 도전이 놓여 있다. 기후변화는 저지대에 더욱 빈번하게 가뭄을 가져오고 삼림 벌채는 토양의 침식과 사막화를 유발한다. 또 여전히 남수단과 소말리아, 에리트레아로부터 수십만 명이나 되는 난민을 받아들이고 있고, 아프리카의 뿔 지역은 극단주의 단체와 해적들의 본거지가 된 지 오래이다.

[에티오피아의 남수단 난민 출처 구글 이미지]

이러한 문제들에 대처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안정〉이지만 이것이야말로 모두에게 가장 큰 도전이자 과제가 될 것이다. 정계와 재계가 경제를 성공적으로 운용하고 정치인들이 나라를 하나로 묶기 위해 함께 노력한다면 〈아프리카의 성공 스토리〉는 실현 가능한 선택지가 될 수 있다.


<5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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