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과 터키, 북아프리카
Chapter 8 중동(Middle East)
인위적인 국경선이 분쟁의 씨앗이 되다
무엇의 중간(Middle)인가? 어디로부터의 동쪽(East)인가? 이 명칭은 유럽인들이 세계를 보는 시각을 그 바탕에 깔고 있다. 말하자면 유럽인들 자신이 결정한 모양으로 만들어진 지역을 바라보는 그들 자신의 시각인 것이다. 그들은 잉크로 지도 위에 선을 그었다.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그 선들은 유례없이 인위적인 국경선들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를 다시 그으려는 시도가 피를 불러오고 있다.
보다 넓은 중동(“The Greater Middle East”)는 서쪽 지중해부터 동쪽의 이란 산악지대에 이르는 1천6백 킬로미터 지역에 펼쳐져 있다. 그리고 오만의 아라비아해 연안부터 시작해서 저 멀리 흑해에서 끝나는 남북의 길이는 3천2백 킬로미터에 이른다. 이곳에는 강들(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사이의 땅, 즉 메소포타미아로 알려진 비옥한 지역도 있다.
하지만 가장 압도적인 지형은 뭐니 뭐니 해도 광활한 아라비아 사막과 그 중심부의 관목지대일 것이다. 이스라엘 일부와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 쿠웨이트, 오만, 예맨 그리고 공허의 4분의 1(Empty Quarter)이라는 뜻의 이름을 가진 룹알할리(Rub’ Al-Khali) 사막까지 포함해서 사우디아라비아에까지 닿는 이 지역은 지구상에서 모래사막들이 가장 넓게 이어지는 지역으로 프랑스 면적에 버금간다.
이 지역 주민 대다수가 외곽에 거주하는 것도, 또 유럽의 식민 통치 이전까지는 지역 내 대다수 주민들이 민족 국가나 법적으로 정해진 국경선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지형 때문이었다.
서구가 잉크로 그려서 만든 국경
오스만 제국(1299-1922년)은 이스탄불의 통치를 받았다. 제국의 전성기 때는 영토가 비엔나의 초입에서 아나톨리아를 건너 아라비아로 내려가 인도양에까지 이르렀다. 그러는 동안에도 대부분의 지역에 이름이 없다고 해서 이름을 붙이려는 수고를 딱히 하지도 않았다.
그러다 1867년 오스만 제국은 빌라예트라고 하는 행정 구역 제도를 신설했다. 이는 현재 이라크 북부에 있는 쿠르드족이나 시리아와 이라크 일부의 부족 연합 등 주로 그곳에 살고 있는 부족을 근거로 분할한 것이다.
오스만 제국이 붕괴되기 시작하자 영국과 프랑스는 서로 다른 생각을 품었다. 1916년, 영국 외교관인 마크 사이크스(Mark Sykes) 대령은 펜을 들고 중동의 지도 위에 쓱쓱 선들을 그었다. 이 선은 현재 이스라엘 땅인 지중해의 하이파에서 이라크 도시인 북동쪽의 키르쿠크까지 포괄했다.
그리고 이 선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만 제국을 무너뜨리는 3국 협상이라는 일종의 동맹 관계에서 영국 측의 마크 사이크스와 프랑스 측의 협상 상대인 프랑수아 조르주 피코(Francois Georges-Picot)가 비밀리에 맺은 사이크스-피코 협정*의 근간을 제공했다. 이 밀약에서는 그 선의 북쪽은 프랑스 통치하에, 남쪽은 영국의 지배 밑에 두기로 했다.
이후 사이크스-피코 협정은 20세기 초반에 서구 열강들이 아랍 부족 지도자들에게 한 약속들을 뒤집은 여러 조약들을 대표하는 용어가 되기에 이른다. 그전에는 (보다 넓은 의미에서) 시리아 국가나 레바논, 요르단,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는 물론 팔레스타인도 따로 없었다.
수니파, 시아파, 그리고 그 안의 또 다른 수많은 분파들
중동의 지배적인 종교는 이슬람이지만 이 안에도 여러 분파들이 있다. 이슬람에서 가장 중요한 분파는 이 종교의 역사만큼이나 그 내력이 길다. 수니파와 시아파 무슬림의 역사는 서기 632년 예언자 무함마드가 사망하자 후계 자리를 놓고 벌어진 분쟁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632년, 이슬람 공동체 지도자였던 선지자 무함마드가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 채 숨을 거두었다. 다수인 수니파는 선출된 칼리파(대표자)가 후계를 이을 수 있다고 본 반면,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사촌이자 사위인 혈통, 알리를 계승자로 여겼다. 4대 칼리파였던 알리는 쿠데타 세력에게 암살당했고, 그러자 알리의 추종자인 시아파는 '무함마드의 혈족인 알리 만이 칼리파의 자격이 있다'면서 새 지배자들에게 저항했다.
수니(Sunni)라는 명칭은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인 알 순나(Al Sunna)에서 왔다. 예언자가 죽자 훗날 수니파가 되는 이들은 아랍 부족의 전통을 지키는 사람들 중에서 후계자가 선택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들은 스스로를 정통 무슬림으로 자부하고 있다.
한편 시아(Shia)라는 이름은 시아 알리(Shiat Ali), 말 그대로 <알리의 추종자>로, 예언자 무함마드의 사위와 관련된다. 알리의 두 아들인 하산과 후세인은 둘 다 암살당했다. 따라서 시아파는 자기들의 것이라 여기는 이슬람 공동체를 이끌 정통 권리를 거부당하는 셈이 되었다.
수니파, 시아파 모두 여러 분파가 있다. 대표적으로 수니파에는 카타르와 사우디아라비아가 섬기는 한발파(9세기 이라크 학자 아흐마드 이븐 한발의 이름을 땀)가 있으며, 시아파에는 열두 이맘(이슬람 교단의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12인(Twelvers)파>, 그중 다섯 번째 이맘의 혈통을 두고 논쟁을 벌이는 자이드파, 주류에서 파생된 알라위파, 드루즈파 등이 있다.
영국이 난장판으로 합쳐 놓은 곳, 이라크
유럽 식민주의는 아랍인들을 민족 국가의 형태로 묶어서 그들의 통치자들이 자신의 출신 부족과 자신이 속한 이슬람 종파에게만 호의를 베풀게 하는 유산을 남겼다. 이들 독재자들은 유럽인들이 그어둔 인위적인 선들 사이의 영토 전체를 자신들이 통치할 수 있는 위임장을 보장받기 위해 국가라는 구조를 이용했다.
오스만 제국의 통치자들이었던 투르크인들은 암벽 투성이 산악지대에는 쿠르드족이 장악하고 있고, 바그다드로 향하는 평지(현 시리아 서쪽)에는 대다수 거주민들이 수니파 아랍인들, 그리고 이라크 남동부 바스라 시에서는 대다수가 시아파 아랍인들인 것을 보게 되었다.
그들은 이런 상황에 따라 이라크 지역을 모술, 바그다드, 바스라라는 세 개의 행정 구역으로 나누어 다스렸다. 이는 보다 오래 전인 고대에도 이 지역들은 이 구분과 대체로 부합했는데 당시는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수메르라는 명칭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영국인들은 같은 지역을 보면서 원래 분할돼 있던 세 곳을 자기들 멋대로 하나로 합쳐 버렸다. 많은 분석가들은 오직 강력한 인물만이 이 세 지역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이라크에는 강력한 인물이 차례로 등장했다. 그러나 현실은 국민들이 전혀 통합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두려워서 얼어붙은 것이었다.
이에 반발하여 맨 먼저 떠난 것은 쿠르드족이었다. 이라크 내에 거주하는 5백만 명의 쿠르드족은 대개 북부와 북동부인 아르빌, 술라이마니야, 그리고 다후크 외곽지대에 몰려 있다. 독가스를 분사한 1988년의 알 안팔 작전 등을 포함해 정부군에 의해 줄잡아 10여만 명의 쿠르드족이 살해당했고 그들이 거주하던 마을의 90퍼센트가 지도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90년 사담 후세인이 쿠웨이트를 침공했을 때, 걸프전 말미 등에 계속해서 그들은 계속 저항하면서 쿠르디스탄(Kurdistan, 쿠르드족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터키 남동부, 이란, 이라크, 시리아 접경지대를 총칭) 국가 건설을 실현시킬 기회로 엿보고 있다.
쿠르디스탄은 주권을 인정받는 국가는 아니지만 그에 걸맞은 특성들을 제법 갖고 있다. 그리고 현재 중동에서 진행되는 양상은 국제법의 틀 안에서 쿠르디스탄에게 정식 명칭을 부여할 가능성을 더해주고 있다. 하지만 인접국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문제이며, 또한 그들 자체도 오랫동안 서로 경쟁해 온 이라크 내 두 파벌로 분열돼 있고, 시리아의 쿠르드족은 로자바라는 자치 정부를 설립하려 하고 있다.
요르단, 골치 아픈 곳을 싹둑 잘라내 만든 나라
제1차 세계대전 동안 여러 아랍 부족들은 오스만 제국에 맞서 영국을 도왔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면 영국이 보상하기로 한 약속 가운데 특히 두 가지가 있었다. 그러나 불운하게도 요르단과 사우디아라비아 모두 같은 것을 약속받았는데 바로 <아라비아 반도의 지배권>이었다. 그래서 영국은 다시 몇 개의 선들을 그려 넣었다. 그러면서 사우디 부족의 수장이 한 지역을 통치하고 하시미테 부족이 다른 지역을 통치할 수 있도록 했다.
깐깐한 영국 관리들은 하시미테 부족이 통치할 지역을 요르단 강 건너편이라는 말을 줄여 트랜스요르단(Transjordan)이라고 불렀다. 이윽고 암만이라는 먼지 풀풀 날리는 작은 동네가 트랜스요르단의 수도가 되었다. 1948년 영국인들이 떠나버리자 이 나라의 이름은 그냥 요르단으로 바뀌었다.
요르단 내 암만 지역의 원주민들은 주로 베두인족이었다. 하지만 현재 요르단 인구의 다수는 팔레스타인인이다. 1967년 이스라엘이 요르단 강 서안을 점령했을 당시 많은 팔레스타인인이 그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한 유일한 아랍 국가였던 요르단으로 피신해 왔기 때문이다.
그들 중 다수는 스스로를 현 압둘라 왕의 충실한 국민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이 문제에 더해, 요르단이 받아들인 1백만 명의 이라크와 시리아 난민들은 가뜩이나 자원이 부족한 이 나라에 커다란 부담을 안겨주고 있다.
산맥 이름이 나라 이름이 된 곳, 레바논
20세기가 될 때까지 아랍인들은 이곳을 레바논 산맥과 바다 사이에 있는 시리아의 한 지방 정도로 여겼다. 그런데 1차 세계 대전 이후 위세가 현저히 약해진 프랑스가 이곳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이 지역의 아랍 기독교도(‘마론파 기독교’)들과 오랫동안 동맹 관계를 맺어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인연으로 1920년대에 이곳에 등장한 프랑스인들은 그들을 그 지역의 주 지배 계층으로 만들어 주었다. 당시 이곳을 특징지을 만한 확실한 명칭이 없었기에 프랑스인들은 근처에 있는 산맥 이름을 갖다 붙였다. 이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바로 레바논이다.
레바논에서는 오랜 기간에 걸쳐 지역 종파들 간에 마찰이 있어 왔다. 일부 역사가들이 제1차 레바논 전쟁이라 부르는 분쟁은 1958년 마론파 기독교도들과 당시 이들보다 약간 수가 많았던 무슬림들 간에 발생했다. 이후 현재는 1989년 타이프 협정에 따라 종파에 따라 삼권분립이 이루어지고 있다.
수도인 베이루트 일부와 남부 대부분은 시아파 무슬림들의 전용 공간이다. 이곳에서 시아파 종주국 이란의 지원을 받는 시아파 헤즈볼라(Hezbollah) 그룹이 득세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또 다른 시아파 근거지는 베카 계곡으로, 이곳은 시리아 정부를 지원하는 헤즈볼라가 시리아 내로 진입하기 위해 식량을 얻는 정기 기착지로 이용한다. 다른 도시들은 주로 수니파 무슬림의 영향 아래 있다.
레바논은 얼핏 통일된 국가로 보이지만 실은 지도상에서나 그렇게 보일 뿐이다. 수도의 남부에서는 공공연히 헤즈볼라 민병대가 정찰을 보고 있으며, 여러 내전 와중에 대부분의 병사들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지역 민병대에 가입하는 바람에 레바논 군대는 실질적으로 와해된 상태다.
시리아, 소수파가 다수파를 지배하는 긴장감이 감도는 곳
시리아는 또 다른 다신앙, 다종파, 다종족 국가다. 그것들을 묻는 순간부터 파가 나눠지는 전형적인 분열 국가인 이 나라 주민의 다수는 70퍼센트를 차지하는 수니파 무슬림들이지만 다른 신앙을 섬기는 소수파들도 꽤 있다.
원래 시아파의 지파인 알라위파는 시리아 사회 계층 구조에서 맨 밑바닥을 차지하는 후방 언덕의 주민들이었다. 프랑스인들은 그들을 데려다가 경찰과 군대에 보냈다. 하지만 그로부터 수십 년이 흐른 오늘날, 그들은 이 땅의 주 지배 계층으로 올라섰다.
시리아 대통령 바샤르 알 아사드는 아사드 일족의 출신, 즉 이 나라 인구의 12퍼센트에 불과한 알라위파다. 1970년 아버지 하페즈가 쿠데타로 권력을 잡은 이후로 계속 대를 이어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1982년 하마에서 수니파 무슬림 형제단이 봉기를 일으켰을 때 하페즈 대통령은 단 며칠 만에 3만 명을 학살하면서 봉기를 진압했다. 무슬림 형제단은 이 일을 결코 잊지도, 용서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2011년 시리아 전역에서 봉기가 일어났을 때 당연히 무자비한 보복전이 벌어졌다.
시리아 역시 레바논처럼 외부 세력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이용하는 지역이 되고 있다. 러시아, 이란, 레바논의 헤즈볼라는 시리아 정부군을 지원하고 있다. 반면에 미국, 유럽 및 아랍 국가들은 반군을 지원하고 있는데 문제는 서로 다른 나라들이 제각각 서로 반목하는 그룹을 지원하고 있다는 데 있다.
IS, 죽음의 게임을 펼치다
급진 수니파 무장 단체인 이슬람 국가(Islamic State, 일명 ‘IS’)는 2000년대 후반에 ‘알카에다’에서 떨어져 나온 일종의 <프랜차이즈 집단>이라 할 수 있다. 시리아 내전이 한창일 무렵 알카에다에서 떨어져 나온 이 그룹은 알카에다 수뇌부 잔당들에게 명목상으로만 통제를 받는 입장에서 스스로 이름을 다시 지었다.
초기에 외부 세계에 알려진 이들의 이름은 ISIL(Islamic State of Iraq and the Levant, 이라크와 레반트 이슬람 국가)이었다. 그러다가 레반트(그리스, 시리아, 이집트를 포함하는 동부 지중해 연안 지역)의 아랍어가 알 샴(al-Sham)인 까닭에 차츰 ISIS가 되었다. 그러다 2014년 여름, 이들은 이라크와 시리아의 넓은 지역에서 독립을 선언하면서 <IS>로 자처하기 시작했다.
식민 제국주의에 대한 굴욕감을 부추기며 이슬람제국의 부활을 외치는 IS는 순식간에 수천 명의 해외 무슬림들에게 명분을 주면서 지하드 전사 집단의 선봉으로 부상했다. IS는 또한 인터넷 시대에 점점 중요성이 확대되는 영역, 즉 심리적 공간을 파고들었다. 그들은 알카에다가 먼저 쌓아둔 소셜 미디어의 기반 위에서 극도의 세련됨과 잔인함을 새로이 보탰다.
이런 활동을 비난하며 2015년 지역 언론을 포함한 중동 전역의 많은 아랍인들은 IS를 다른 이름으로 부르고 있었다. 많은 보통 사람들이 그 조직에 대해 얼마나 혐오감을 갖고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이 단어는 바로 <다에시(DAESH)>다. 이 단어는 정직하지 못하고 올바르지 않은 사람을 의미하는 <다에daes>와 멍청이라는 뜻의 자헤시(jahesh)가 합쳐진 것으로 보이며, 파히시(fahish, 죄인)처럼 부정적인 단어들과 운이 같다.
2015년, 이라크 곳곳에서 벌어진 이라크 정부군과 IS의 전투는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거듭했다. 이른바 ‘수니 삼각지대’에서 티크리트 시를 탈환하지만 라마디를 잃는 등 이라크 정부와 IS는 계속해서 싸워야 했다. IS에게 티그리트보다 중요한 곳은 라마디였다. 라마디는 이라크 내 수니파의 본거지라 할 안바르 지방에 있으며 시리아 국경을 통해 연결되고 있다. 따라서 여기를 손에 넣어야 <국가(state)>라는 선언에 힘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수니 삼각지대 내에는 수니파 독립기구를 지탱할 만한 경제적 다양성도 충분하지 않은 상태다. 역사는 이라크에 석유를 남겨주었지만 사실상 이 나라가 분리돼 있는 상황에서는 석유 대부분이 쿠르드족과 시아파 차지가 된다. 유전지대와 가장 가까운 곳은 시아파 지역이다.
2015년 8월은 미국이 이라크와 시리아 두 곳의 IS에 대해 처음으로 공습을 개시한 지 일 년이 되는 때였다. 페르시아 만의 항공모함인 조지 H. W. 부시 호와 칼 빈슨 호에서 출격한 미 공군기들은 수천 회에 이르는 공습을 단행했다. 일부 지역을 탈환했지만 여전히 수니파 지역 대부분은 IS의 수중에 있다.
지하디스트(성전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인데,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조직들은 자신들을 지하디스트라고 부른다)는 살라피 이슬람이 전 세계를 지배하는 꿈을 꾼다. 물론 여전히 포악하긴 하지만 그래도 좀 더 명철할 때는 한층 제한된 목표, 즉 중동 전역을 칼리파 국가로 만들기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이를 위해 싸운다.
유럽의 30년 전쟁(1618-1648년)의 아랍 판이 될지도 모를 이 문제와 규모를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게다가 이는 단지 중동에만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여기서 살아남은 여러 국적의 지하드 전사들이 유럽, 북미, 인도네시아, 캅카스, 방글라데시 등지로 돌아가서 평온하게 정착할 리가 없다.
이스라엘, 그리고 팔레스타인
중동 지역에서 아랍의 미래를 놓고 벌어지는 싸움이 확대되는 형국이다 보니 이스라엘과 아랍 간의 분쟁은 상대적으로 관심을 덜 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이 연계된 비극은 현재 진행형이다. 이 조그만 땅덩이에 대한 강박적 집착이 불러올 분쟁의 뇌관은 언제고 터질 수 있다.
오스만 제국은 요르단 강 서안부터 지중해 연안을 시리아 땅의 일부로 보았다. 그들은 이 지역을 필리스티나(Filistina)라 불렀다. 제1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영국의 위임 통치 아래서 이 지역은 이후 팔레스타인(Palestine)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1948년 무렵까지 천 년 이상을 이 땅에서 산 절대 다수는 아랍 무슬림들과 기독교도들이었다.
1967년의 <6일 전쟁>(Six-Day War, 1967년 6월 5일-6월 10일 사이에 치른 제3차 아랍-이스라엘 전쟁) 동안 이스라엘은 예루살렘과 요르단 강 서안 그리고 가자 전역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다. 2005년에 이스라엘은 가자에서 철수했지만 수십만 명에 달하는 이스라엘 정착민들은 여전히 요르단 강 서안 지역에 남아 있다.
요르단은 동예루살렘을 포함한 요르단 강 서안 지역을 점령했다. 이집트는 자국의 영토 확장의 일환으로 가자 지역을 점령했다. 그러나 양측 누구도 그곳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시민권은 물론 팔레스타인이라는 국가의 지위를 인정할 생각은 없었다. 한편 그 지역 전체를 보다 확장된 자국 영토의 일부로 여기던 시리아는 팔레스타인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을 시리아인으로 여겼다.
이스라엘이나 팔레스타인 모두에게 예루살렘은 군사적으로 전략적 위치라기보다는 종교적으로 양보할 수 없는 신성한 장소이다. 장소에 대한 이념적 요구가 그 위치보다 훨씬 중요해지는 경우다. 따라서 예루살렘을 지배하거나 그곳에 접근하는 것은 타협만으로 쉽사리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템플 마운트는 서안지구의 예루살렘 내 종교 성지(聖地)가 모여 있는 언덕을 부르는 이름이다.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 3개 종교의 성지들이 몰려 있다. 유대교에서는 솔로몬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지었던 이곳을 세계의 중심이라 믿어왔다. 기독교로선 예수가 못 박혀 죽은 뒤 부활한 성분묘교회가 있다. 이슬람에서는 이곳 황금색 지붕의 '바위돔(Dome of the rock)'에서 창시자 무함마드가 승천했다고 믿어, 사우디의 메카·메디나에 이은 이슬람의 3대 성지로 여기고 있다.
그에 비하면 가자(Gaza) 지구는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양보하기가 훨씬 쉽다. 이스라엘은 가자 지역에서 날아온 로켓포가 이스라엘 영토 깊숙한 곳에 도달하지 못하게 그 위력을 제한하려 하고 있기 때문에 가자 지구 주민들은 경계선으로부터 일정한 거리 내에서만 건설 활동을 할 수 있다.
요르단 강 서안(West Bank)은 가자 지구에 비하면 일곱 배는 넓지만 암석지대라는 문제가 있다. 군사적인 시각에서 이스라엘은 인구의 70퍼센트가 거주하는 연안의 평야지대에 중화기가 발사될 가능성이 상존하는 한 반反이스라엘 세력에게 고지대 지배권을 허락할 수 없는 입장이다.
이스라엘은 요르단 강 서안의 팔레스타인인들은 물론이고 그 어떤 집단도 자국의 존립을 위협할 만큼 강력해지는 것을 막으려 한다. 아직까지 이집트, 요르단과의 평화협정이 유효해서 대규모 전쟁의 위험이 크지 않지만, 최근 팔레스타인(하마스)과의 가자 지구 분쟁 사태를 빌미로 레바논의 헤즈볼라가 한층 강력하고 사정거리가 긴 로켓을 이스라엘 국토 깊숙이 발사한다면 그 대응 또한 확대될 수밖에 없다.
보다 심각한 위협은 레바논보다 더 큰 인접국인 시리아로부터 온다. 만약 바다에 이르는 길이 봉쇄될 경우 시리아 입장에선 골란 고원을 지나 지중해 방향 갈릴리 호수 주변의 구릉지를 따라 내려가는 방법을 대안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런데 골란 고원은 1973년 전쟁 당시 시리아의 공격을 받은 뒤부터 이스라엘이 점령하고 있어 이스라엘 주민들의 주요 거주지로 이어지는 연안 평야지대를 돌파하려면 대규모 반격에 부딪힐 것이다.
(지리의 힘 2) 이란
전 세계와 기싸움을 벌이며 신의 과업을 수행 중이다
이란의 가장 널리 알려진 빵은, 난 에 바르바리(Nan-e barbari, 바르바르인들의 빵이라는 뜻으로 바르바르라고도 부름)라는 것인데, 바닷소금으로 간을 하고 참깨와 양귀비씨를 뿌려서 주로 아침에 먹는 빵이다. 모양은 대체로 기다란 타원형이고 안쪽에는 위에서 아래로 평행선 몇 개가 그어져 있다. 공교롭게도 이란 사람들은 자신들이 자주 만들어 먹는 이 빵의 외관이 자신들 나라의 모양과 닮았다는 얘길 자주 듣는다.
이란은 두 가지 지리적 특징에 의해 정의된다. 하나는 국경지대 대부분을 이루고 있는, 딱딱한 빵의 가장자리 같은 형태의 산맥(남부 자그로스산맥과 북부 엘부르즈산맥)이고, 다른 하나는 평행하듯 달리는 저지대 언덕을 따라 이어지는 내륙의 평평한 소금사막이다.
산맥은 이란을 일종의 요새로 만들어 준다. 어느 각도로든 이 나라로 접근하려고 하면 느닷없이 떡하니 가로막는 고지대와 맞닥뜨리게 된다. 이는 곧 이 나라의 많은 곳이 통과하기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산악지대가 카비르 사막과 루트(Lut) 사막(루트는 페르시아어로 물이 없고 식물이 자라지 않는 척박한 땅을 가리킨다)이라는 내륙의 황무지를 에워싸고 있는 형국이다.
적이 침공하기도 힘들지만 국민을 통합시키기도 어려운 지형
역사의 대부분 동안 이 땅은 페르시아로 알려져 있었다. 이 나라의 지형은 미래의 침략자와 정복자에게는 엄청난 장애물이라는 얘기다. 산맥이라는 장벽을 뚫기 위해 치러야 할 부담을 깨달은 침략자는 차라리 집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페르시아, 곧 이란이 그 기나긴 역사에서 이 지리적 조건으로 모든 적을 포기시켰던 것은 아니다.
이에 굴하지 않고 꿋꿋이 진격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었다. 그러나 기원전 323년 그가 사망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페르시아는 다시 지배권을 가져왔다.
한참 지나 서기 1200년대와 1300년대에는 몽골족이, 이어 티무르(칭기즈칸을 존경하고 평생 그의 길을 따르려 했던 티무르 제국의 건설자)가 광활한 중앙아시아 스텝 지대를 건너와서 이 땅을 파괴하고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학살했지만 페르시아 문화에 의미 있는 발자취를 남길 만큼 이곳에 오래 머무르지는 못했다.
또 1500년대부터 오스만 제국이 수차례에 걸쳐 자그로스 산맥을 넘어오는 모험을 감행했지만 그들도 이 나라의 가장자리만 슬쩍 훑고 간 정도였다. 러시아인들과 영국인들도 이 땅으로 들어왔지만 그들은 소수 민족 집단 중 일부를 끌어들여 돈으로 자신들의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고 여겼다.
이러한 지리는 역으로 이란의 힘을 제약하는 조건이 되기도 한다. 페르시아 제국은 산악지대에서 내려와 주변으로 세력을 넓히기도 했다. 그렇지만 역사의 대부분 동안 산악지대에 머물러 있었다. 나라 안을 들여다보면, 대다수 이란 사람들이 어째서 산악지대에 몰려 살고 있는지 그 황량하고 혹독한 풍경을 보면 이해가 된다.
산을 가로질러 오가며 교류하는 것이 쉽지 않은 탓에 인구가 밀집된 산악지대들은 저마다 각기 다른 문화를 발전시켜 온 경향이 있다. 그래서 소수 민족은 자신들만의 정체성을 고수하면서 흡수 통합에 반발하고 있다.
일명 파르시(Farsi)라고도 하는 페르시아어는 이란 국민의 60퍼센트가 사용하는 공식 언어다. 그러나 쿠르드족, 발루치족, 투르크멘족, 아제르바이잔인(아제리족), 아르메니아인 모두 각기 고유 언어를 따로 가지고 있으며, 아랍인, 체르케스인, 그리고 반유목 생활을 하는 루르족 같은 여러 소수 집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특히 쿠르드족이나 아제리족처럼 비교적 큰 집단에 존재하는 이러한 다양성 때문에 이 나라 역대 통치자들은 늘 강력한 중앙 집권과 억압적인 통치를 행사할 수밖에 없었다. 소수 집단을 통제해서 어떤 지역도 떨어져 나가거나 외부 세력을 끌어들이는 일이 없도록 해야 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수니파인 쿠르드족은 이 나라 인구의 10퍼센트를 차지하는 대략 850만 명 정도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 이들 대다수는 이라크와 터키의 쿠르드족 정착촌과 인접해 있는 자그로스 산맥 지역에 주로 거주하는데 그들과 마찬가지로 이들 또한 쿠르드 독립국가를 건설하겠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아제리족은 인구의 16퍼센트를 차지하며,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에서 멀지 않은 북쪽 국경지대에 모여 살고 있다. 투르크멘족은 터키 국경과 가까운 곳에, 그리고 160만 명 정도 되는 아랍인들은 이라크 건너편 샤트알아랍강 근처와 페르시아만의 작은 섬들에 주로 모여 산다.
대다수 이란 사람들은 산비탈을 따라 지어진 도시 지역에 모여 사는데 그나마 이 지역도 국토의 3분의 1 정도에 집중돼 있다. 카스피해에서 시작해서 서쪽으로 테헤란을 지나 샤트알아랍강까지 이어지는 선을 그려보면 대다수 인구가 그 왼쪽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수도인 테헤란은 엘부르즈 산맥 아래에 있다. 물이 부족한 탓에 많은 도시들이 산자락에 자리를 잡고 산비탈에 터널을 파서 작은 수로로 물을 끌어들인다. 이러한 고질적인 물 부족은 이란의 경제 발전을 저해하는 몇 가지 요인 중 하나로 지목된다. 이 나라는 국토의 10분의 1 정도만 경작지로 쓸 수 있는데 그나마 물을 댈 수 있는 곳은 그중 3분의 1 정도에 불과하다.
이란에는 큰 강이 3개 있는데 물자를 실은 선박이 운항할 수 있는 강은 카룬강 하나뿐이다. 이런 까닭에 국내와 해외 무역에서 항공 비중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현재 이란에는 테헤란, 반다르아바스, 시라즈, 아바단, 이스파한에 국제공항이 있다.
양날의 검, 호르무즈 해협
이란이 세계에서 4번째로 원유 매장량이 많고 천연가스도 2번째로 많은 사실만 두고 보면 이 나라는 굉장히 잘 사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1980년에서 1988년까지 이어진 이란-이라크 전쟁 동안 아바단의 정유시설이 거의 파괴되었고 최근 들어서야 전쟁 이전의 생산량을 겨우 회복한 상태다.
이란에게 가장 중요한 수출 상품은 뭐니 뭐니 해도 에너지다. 주요 유전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쿠웨이트, 이라크와 맞닿은 지역에 있고, 좀 더 작은 유전들은 내륙의 콤 근처에 있으며, 가스전은 주로 엘부르즈 산맥과 페르시아만 쪽에 집중돼 있다.
따라서 호르무즈 해협을 통해 오만(Oman)만으로 들어가는 것이 주요 수출로 중 하나가 된다. 이곳이 이 나라가 개방된 해양 항로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인데 가장 좁은 곳은 너비가 34킬로미터에 불과하다. 그리고 어느 방향에서든 선적 항로의 폭은 3킬로미터를 겨우 넘는 정도고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그 사이에 3킬로미터의 완충지대를 두고 있다. 이란에게 이곳은 양날의 검이라 할 수 있다.
우선 대양으로 쉽게 진출하기가 어렵다는 그 하나의 이유 때문에 이 나라는 해양의 패권을 쥐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동시에 호르무즈 해협의 좁은 폭은 이란이 다른 모든 국가에게 그곳을 폐쇄하겠다고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란군은 고속 공격정 수십 척을 동원해서 동시다발적으로 대형 선박을 공격하는 훈련을 자주 실행하고 있다. 특히 2018년에 원유 수출에 지장이 생기자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우리는 호르무즈 해협을 누구나 이용할 수 있거나, 아니면 아예 아무도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을 적들이 깨닫도록 할 것이다.”
그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 미국은 심각한 분쟁이 발발한 지 몇 시간 안에 이란의 공격력을 최대한 무력화시킬 수 있는 계획을 수립했다. 또 걸프 국가들(페르시아만 연안 8개국)은 원유와 가스 파이프라인을 홍해로 향하게끔 설치해서 그곳에서 유조선들이 인도양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하고 있다.
페르시아 제국에서 시아파 이슬람 국가가 되기까지
오늘날의 이란은 문제가 많은 나라이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장구하고 위대한 역사를 지닌 나라이기도하다. 페르시아 제국은 고대 문명을 이끈 나라였다. 페르시아의 기원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4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부족들에서 시작된다.
기원전 550년에 페르시아 통치자인 키루스 2세는 민족적으로 뿌리가 비슷한 메디아 왕국을 점령해 페르시아 제국에 합병했다. 이는 세계 무대에 아케메네스조 페르시아 제국의 탄생이 선포된 순간이었다. 키루스 2세는 메소포타미아(현대의 이라크와 시리아)를 지나 그리스까지 이어지는,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그런데 키루스 2세는 기원전 529년에 스키타이의 토미리스라는 이름의 여왕 손에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그녀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여왕이었는데 키루스 2세는 그녀의 아들을 포로로 삼을 정도로 그 땅에 눈독을 들였다. 그러자 그녀는 다음과 같은 경고를 보냈다. “내 아들을 당장 풀어주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 나는 태양을 두고 맹세한다. 만약 거절한다면······ 네가 피를 뒤집어쓰게 될 것이다.” 이후 벌어진 전투에서 키루스의 군대는 대패했다(*이 이야기는 역사적으로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헤로도투스는 '역사'에서 이 이야기가 가장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고 기술했다).
이후 다리우스 1세와 크세르크세스 1세 모두 그리스와 전쟁을 했다 패했고 그들의 제국은 역사적으로 이들보다 더 위대한 인물, 즉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파괴되었다. 기원전 331년 알렉산드로스는 페르시아군을 섬멸한 뒤 수도인 페르세폴리스를 잿더미로 만들어 버렸다.
차기 페르시아 제국이 일어서기까지는 거의 100년이 걸렸다. 파르티아(고대 이란의 왕국)는 메소포타미아 지배권과 오늘날 터키와 아르메니아인 북쪽을 통해 로마가 페르시아로 진입하는 것을 막기 위해 로마제국과 싸웠다. 이런 노력 끝에 마침내 그들은 승리를 쟁취했다.
로렌스 올리비에가 출연한 유명한 영화 「스파르타쿠스Spartacus」(1960년)의 처참한 결말의 배경이 바로 이것이었다. 로마제국의 크라수스 장군은 패배한 노예군에게 어떤 인물이 스파르타쿠스냐고 물었다. 그런 다음 장군은 모두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다. 하지만 뿌린 대로 거두는 법. 기원전 53년, 그는 파르티아군과 싸우다가 패했다(‘카레전투’). 페르시아인들은 그를 게걸스럽고 탐욕스럽다고 여겨 금물을 녹여 그의 목구멍에 부었다.* (*이 이야기도 정설은 아니다. 아래 로마인이야기 4권 (3) 크라수스 참조).
그로부터 대략 5백 년이 흐른 뒤 파르티아인들은 내부의 사산 왕조에게 권력을 빼앗겼다. 사산 왕조도 로마와 계속 맞섰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에게 힘을 다 써버린 사산 왕조는 서쪽에서 부상하는 새로운 세력, 즉 〈이슬람교를 믿는 아랍인들〉이라는 도전에 속수무책으로 남겨지게 됐다.
7세기 사산 왕조의 패망은 눈 속에 신의 빛을 담은 적에게 완패한, 전례 없는 정치적 나약함의 결과였다. 결국 아랍인들은 패했지만 이슬람교는 이겼다. 조로아스터교가 탄압을 받고 그 사제들이 죽임을 당하면서 이슬람교가 지배적인 종교로 자리 잡았다. 페르시아는 칼리프 왕국에 통합되었다.
15세기말 사파비 왕조의 탄생은 이란 역사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된다. 1501년 이스마일 왕은 〈시아파 이슬람〉을 국교로 선포했다. 이스마일 왕은 사파비 왕조를 그들의 최대 숙적이라 할 수니파의 오스만 제국과 맞서는 나라로 규정할 필요가 있었다.
시아파로의 개종은 페르시아에 대한 깊은 적대감을 불러일으켰다. 이 일은 민족주의적 정체성과 강력한 중앙 집권 정부뿐 아니라 수세기에 걸쳐 소수 민족 집단들에 대한 불신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파비 왕조는 1736년에 현장의 성직자들에 의해 전복됐다. 학문을 한 이슬람 성직자만이 나라를 통치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이들도 한 아프가니스탄 군벌에 의해 차례로 축출되는데, 그들은 종교가 종교를 통제할 수는 있지만 과세와 입법 권한은 정치가들에게 있다고 주장했다.
외부세력에게는 먹잇감이 되고, 내부에서는 쿠데타와 시위가 만연하고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1909년) 이곳에서 대규모 유전이 발견되자 영국은 이 유전에 대한 독점적인 채굴권과 판매권을 확보했다. 훗날 윈스턴 처칠은 “행운이 우리의 가장 거친 상상을 넘어서는 동화의 나라로부터 보상을 가져다주었다.”라고 썼다.
1909년에 유전 개발을 위해 영국과 이란의 합작으로 ‘앵글로-페르시안 오일 컴퍼니(APOC)‘가 설립되었고 영국은 이 회사의 대주주로 참여했다. 이 회사는 1935년에 '앵글로-이란 오일 컴퍼니(AIOC)'로, 1954년에 'British Petroleum(BP)'로 이름이 바뀌었다.
한편, 1921년 레자 칸은 1천2백 명의 군인을 이끌고 테헤란으로 진격해서 곧장 정권을 탈취했다. 1925년 이란 의회는 당시 국왕을 폐위시키고 새롭게 팔라비 왕조를 세운 레자 칸을 새로운 국왕인 레자 샤 팔라비(Reza Shah Pahlavi, 샤는 국왕이라는 의미다)로 책봉했다.
2차 세계 대전 후 반식민주의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APOC'를 국유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빗발치는 가운데 1951년, 열렬한 국유화 지지자인 모하마드 모사데그가 총리 자리에 오른다. 이란산 원유에서 나온 돈은 이란으로만 들어오게 하겠다는 공약의 결과로 법안은 일사천리로 통과됐다.
이에 대해 서양의 반발이 곧장 터져 나왔으나 이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에 1953년 런던과 워싱턴은 M16과 CIA를 보내 군사 쿠데타를 사주했고 다시 이탈리아로 망명했던 모하메드 레자 샤 팔라비(레자 샤 팔라비의 아들)가 귀국했다. 이 쿠데타는 성공한 것처럼 보였지만 결국 이 나라에 기나긴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1979년, 호메이니 그리고 이란 혁명
군사 쿠데타에 대해 국왕은 모든 부분에서 즉각적인 반발에 부딪혔다. 보수적인 종교 단체들은 그가 비이슬람교도에게 투표권을 주자 분개했다. 국왕 퇴위의 서곡이 된 시위들에는 세속적인 단체들, 공산주의자들, 노동조합, 그리고 아야톨라 호메이니(Ayatollah Khomeini)를 중심으로 한 종교 단체들까지 섞여 있었다.
호메이니는 일찍이 이란인들 사이에서는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다. 1964년에 그는 “샤가 이란 국민들을 미국의 개보다 못한 수준으로 끌어내렸다.”라고 격렬하게 비판했다. 이후 그는 문제적 인물로 낙인찍혀 이라크로 추방되었다가 당시엔 프랑스에 머물고 있었다.
1979년 1월 모하마드 레자 샤 팔레비는 결국 국외로 망명했고, 몇 주 뒤 1979년 2월 호메이니는 백만 명이 넘는 인파의 환영을 받으며 드디어 테헤란에 입성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때는 알지 못했다. 왕관이 〈터번〉으로만 바뀌었다는 사실을.
이슬람 혁명 세력은 곧장 메스를 잡았다. 테헤란에 입성한 그날, 호메이니는 국민들 앞에서 이렇게 선언했다. “지금부터 내가 정부의 이름을 짓겠다.”라고. 이 조직은 살인과 폭행을 일삼으면서 반대파를 겁박했다. 머지않아 이란혁명수비대는 이 나라에서 가장 위압적인 군사 조직으로 올라선다.
새 정권은 여성의 자유를 억압하는 데도 필사적이어서 남녀공학을 금지하고 결혼생활에서 여성의 지위를 보장하는 장치를 축소하면서 이슬람혁명위원회 추종자들이 거리를 누비면서 여성에게 히잡 착용을 강요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자유주의 성향의 중산층은 황급히 짐을 쌌고 그 결과 수십만 명의 두뇌 유출이 벌어졌다. 이들 중에는 6만 명에 달하는 유대계 인구가 포함돼 있었다. 1979년의 혁명 후 이스라엘을 가장 맹렬하게 증오하는 적으로 삼으면서 뿌리 깊은 반유대주의에 근거한 비판의 칼날을 세웠기 때문이다.
새로운 지도자들은 이란을 국제 사회에서 따돌림받는 나라가 되게 만들었다. 국내에서는 국민을 탄압하고 해외에서는 테러 공격을 자행했으며, 악명 높은 파트와(fatwa, 이슬람법에 따른 결정이나 명령)는 영국 작가 살만 루시디가 쓴 『악마의 시(The Satanic Verses)』라는 작품을 문제 삼기도 했다.
8년에 걸친 이란-이라크 전쟁
한편 옆나라 이라크에서는 세속적인 독재자 사담 후세인(이라크 내 소수 종파인 수니파 출신)이 이웃 나라인 이란에 시아파 이슬람 공화국이 세워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호메이니가 아랍 국가들에게 이슬람 혁명을 호소하는 것에 깜짝 놀란 후세인은 이라크 내 다수 시아파에 대한 탄압의 고삐를 더욱더 조였다.
그러더니 1980년 9월 아예 이란 침공을 감행했다. 사담 후세인은 이란 혁명기의 혼란을 틈타 샤트알아랍강의 동쪽과 원유 생산지이자 민족적으로는 아랍계가 주로 거주하는 이란 남서부의 후제스탄을 손에 넣을 계획을 세웠다.
그는 속전속결로 승리를 거머쥘 걸로 기대했지만 결과적으로 1백만 명 이상을 죽음으로 몰고 간 처참한 계산 착오를 저지른 것이다. 8년 간 서로 뺏고 뺏기는 상황이 반복되다가 결국 1988년에 양쪽은 유엔의 중재를 받아들였고, 다시 전쟁 전의 위치로 철수하였다.
종교를 빙자한 억압과 그에 분노한 시민들
최고지도자 호메이니는 이듬해인 1989년에 사망했고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가 그 자리를 물려받았다. 경제 발전은 더딘데 이슬람 성직자들은 국민들 삶의 모든 영역에 이슬람 혁명 정신을 심겠다는 각오로 여전히 사회 전반에 철권통치를 행사했다.
이런 가운데 1997년, 상대적으로 온건한 종교학자인 모하마드 하타미가 압도적인 표 차이로 대통령에 당선되자 강경파들은 충격에 빠졌다. 하타미의 재임 동안 성직자들은 제출된 법안의 3분의 1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극보수주의자들은 여전히 반혁명주의 분자들을 괴멸시키기 위한 공포 조장 행위들을 포기하지 않았다.
결국 2005년 하타미는 전 이란혁명수비대 출신의 마흐무드 아흐마디네자드(그는 1979년 '미대사관 인질사건'을 주동한 것으로 의심받는 과격주의자였다)에게 자리를 내준다.
이후 2009년 재선 과정에서 야당의 개혁주의 성향의 미르 호세인 무사비가 강력한 후보로 떠올랐지만, 선거 부정과 이에 항의하는 시위를 힘으로 탄압한 아흐마드네자드의 권력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하지만 인구 구성이 점점 젊어지고 변화를 바라는 청년층이 성장해 감에 따라 단층선은 매년 더 확대될 뿐이었다. 이러한 정서를 반영한 것은 2013년 선거였다. 온건한 성직자인 하산 로하니가 아슬아슬하게 승리를 거두었다. 기득권층은 추세를 되돌리기엔 너무 멀리 왔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다.
로하니는 2017년 재선에 성공하지만 보수 강경파는 2020년에 총선 몇 개월을 앞두고 선거에 대비해서 모종의 묘책을 실행했다. 헌법수호위원회가 자신들의 위력을 발휘해서 거의 7천 명에 달하는 국회의원 후보자들의 자격을 박탈해 버린 것이다.
1979년 이후 가장 낮은 투표율을 보인 이 총선의 결과는 강경 보수파의 압승이었다. 이 메시지는 분명했다. 어찌 됐든 아야톨라파(시아파 성직자들과 그들을 지지하는 자들)와 이란혁명수비대는 권력을 내놓을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수니파 국가들에 둘러싸인 시아파 국가
이란의 지도층은 자신들의 국가가 적들에게 포위된 〈고립된 나라〉라는 인식을 강하게 견지하고 있다. 요컨대 미국의 사주를 받는 사우디아라비아 같은 나라들이 이슬람 혁명의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 안팎에서 모략을 꾸미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은 이란을 침공했던 이라크 수니파 정권(사담 후세인 정권)을 갈아치웠다. 이제 다시 한번 메소포타미아 평원은 이란 전면에서 완충지가 되면서 잠재적 적대 세력을 저지하고 무력을 투사할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라크 내 시아파는 매 단계마다 이란의 도움을 받았다. 이란은 미군의 침공 이후 발발한 이라크 내전에서 여러 시아파 민병대를 지원함으로써 이라크에서 외세를 몰아내는 데 힘을 보탰다.
이 상황은 많은 아랍 국가들과 싸움을 수행하는 이란에게는 중대한 진전이었다. 역사의 파도가 드나들기를 거듭하면서 많은 아랍 국가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레바논, 예멘 등에 적지 않은 시아파 소수 그룹을 남겨두었고, 시리아,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에는 상당히 큰 규모의 시아파 공동체가 있다.
시아파가 장악한 이란은 그 지역들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있어 이와 같은 현실을 이용하고자 했다. 일례로 예멘 내전에서 이란은 사우디아라비아가 뒤를 봐주는 수니파 세력에 맞선 시아파 후티의 편에 섰다.
또한 이란 정권은 지중해로 통하는 길목을 만들고 확보하는 데 20년을 썼다. 이를 통해 대양으로 접근도 하고 그들의 대체 세력인 헤즈볼라(Hezbollah, 레바논의 이슬람 시아파 무장세력)도 지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란이 수니파 나라들과 삐걱대고는 있지만 가장 경멸하는 나라라면 아무래도 이스라엘일 것이다. 사실 이란은 1979년 혁명 이전에는 이스라엘과 잘 지내왔고 반유대주의 성향도 대놓고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혁명 이후 4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이스라엘이라는 국가에 대해서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유대인이라는 존재에 대한 증오 캠페인도 함께 펼쳐오고 있다.
일찍이 1960년대 초반에 호메이니는 유대인을 악마로 비유하면서 이들을 일컬어 〈불순한 생명체〉라고 했다. 그는 유대인들의 얼굴에서는 “타락, 빈곤, 비참, 비굴함, 굶주림, 그리고 역겨움이 읽힌다······. 이는 무엇보다 그들의 내적 빈곤과 타락에서 기인한 것이다.”라고까지 말했다.
호메이니의 뒤를 이은 아야톨라 알리 히메네이도 “이스라엘은 도려내야 할 암 덩어리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렇게까지 비난이 이어지는 것은 종교에 뿌리박은 병적인 증오심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미국과의 정략결혼은 계속 이어질까?
이란의 강경파는 자신들의 지역에서 미국의 역할이란, "무슬림의 부를 훔치고 무슬림에 맞서는 모든 악랄한 계획을 등 뒤에서 꾸미는 사악한 시온주의자들을 지키기 위해 타락한 악마 정권을 무슬림 세계의 한복판에 유지시키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2002년, 이란의 반정부 단체는 테헤란 정부가 우라늄 농축 단지와 중수 처리 시설을 짓고 있다고 폭로했다. 이 둘 모두 핵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될 수 있는 것이었다. 이란 정부는 즉각 자국의 핵활동은 오로지 평화적 목적으로만 행해지고 있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국제 사회에서 이 해명을 받아들이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러자 로하니 대통령은 이란의 핵프로그램에 대한 국제 사회의 동의를 얻어내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2015년 각국의 지도자들과 협의에 나서려고 했다. 심지어 1979년 테헤란 미대사관 인질 사건 이후 40여 년 만에 오바마 대통령에게도 연락했다.
만약 ISIS가 이라크 시아파 정권과 시리아의 아사드까지 전복시킨다면 지중해로 가는 길은 막힐 수밖에 없다. 한편 더는 손해를 보고 싶지 않은 미국으로서는 이란으로 하여금 이라크에서 ISIS와 싸우도록 할 수도 있다.
그리하여 이란은 고농축 우라늄의 98퍼센트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단기적인 문제를 푸는 정략결혼이 어떻게 깊고 깊은 차이들을 뛰어넘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하지만 이후 트럼프는 핵협정에서 탈퇴했고 이란에 대한 경제 제재를 재개했으며 유럽계 기업들을 다그쳐서 이란과 거래하는 기업들을 떨게 했다. 그런 가운데 긴장을 더욱 고조시키는 일련의 사건들이 벌어졌다.
호르무즈 해협 근처에서 유조선 2척이 어뢰 공격을 받았다. 의혹의 눈길이 곧장 테헤란으로 쏠렸다. 하지만 누구의 소행인지, 또 이란이 연관되었는지 등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는 없었다.
그러다가 2019년에 이란은 너무 나간 것 같은 행동을 저질렀다. 미군의 무인 정찰 드론이 격추된 것이다. 이에 미 공군은 공습을 준비했다가 막바지 몇 분 전에 취소했다.
그럼에도 이란은 미국이 함부로 이란을 공격하기 어렵다는 점을 잘 알고 있기에, 미국의 부당한 침략에 대해 확실하지만 그러나 애매한 수위까지 밀어붙이는 도박을 할 수 있다.
자국의 혁명가들을 비웃는 국민들
하지만 이런 사정이 이란에 대한 제재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한다. 경제는 곤두박질쳤고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이 치솟는 가운데 2019년 겨울이 다가오는데 이란 정부는 연료 가격을 올렸다. 이는 전국에 걸쳐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게 하는 방아쇠를 당긴 셈이었다.
노동자 계급과 1979년 혁명의 주축이었던 이들까지도 정권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거리에 나온 것이다. “하메네이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고 대중은 이란의 대외정책을 소리 높여 비난했다. “가자도, 레바논도 아닌, 이란에서의 내 삶을.” 그리고 “시리아로부터 손을 떼라.”라는 구호가 터져 나왔다.
그러는 와중에 2020년 초, 민병대 리더를 만나려고 바그다드 공항에 도착한 이란혁명수비대의 정예군인 쿠드스군의 사령관 가셈 솔레이마니를 미국이 암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국민적 영웅이었다.
하지만 긴장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이란의 미사일이 하필 테헤란 공항을 출발하던 우크라이나 민간 여객기를 맞히는 바람에 176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결국 이로 인해 이란은 나라를 통합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러다가 코로나19가 찾아왔다. 정부에 대한 존경은 또 다른 타격을 입는다. 로하니 대통령의 행정부는 바이러스 위험을 계속 경시했다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자 확진자 수를 숨기고 공중위생 메시지를 서툴게 관리했다.
게다가 종교학자인 아야톨라 하셈 바타에이 골파이가니는 코로나 양성이 나왔지만 이슬람식 처방을 써서 스스로 나았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틀 뒤에 사망했다. 다양한 밈과 농담, 만화 등으로 성직자들을 조롱하는 소셜 미디어는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온 나라에 퍼져 갔다.
왕관에서 터번으로, 터번에서 부츠로
그렇다면 중산층과 지식인층 그리고 예술가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이 나라에서 대안적인 시민문화를 지탱하기 위해 낮은 단계의 캠페인을 꾸준히 벌이고 있고, 왕족과 종교 세력으로부터 권력의 통제를 떨쳐버리려고 수세기 동안 투쟁해 온 자들이기도 하다.
2022년 9월 히잡을 쓰지 않았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폭행을 당하고 의문사한 ‘Mahsa Amini’ 사건 이후 이란의 여성들은 히잡에 대해 심하게 저항하고 있으며, 젊은 여성이 기념비 위에 올라서서 머리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를 벗어 휘날리며 이를 말리려는 경찰에 항의하는 모습은 가히 놀랍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들이 본격적인 반혁명 운동으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2020년에 들어서자 새로운 말들이 들리기 시작했다. 권력이동을 빗댄 〈왕관에서 터번으로〉에 비견되는 〈터번에서 부츠로〉라는 말이 흘러나온 것이다. 부츠는 바로 군, 특히 혁명수비대를 뜻한다. 이란의 국회는 전직 혁명수비대 출신들로 채워져 있고 대기업들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혁명수비대는 아예 자체 미디어 기업까지 소유하고 있다. 여기에는 신문, TV, 라디오 방송국, 소셜 미디어 매체와 영화 제작사까지 수십 개가 망라돼 있다. 일단 바시즈 민병대와 혁명수비대에 자발적으로 지원하는 젊은이들이 아직도 많다.
혁명수비대와 관련된 기업들에서 그래픽 디자이너나 각본가로 일하고 있거나 그곳에서 영상 편집 및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 교육받은 청년들이 줄을 서고 있다는 사실 또한 지적해야 한다. 무엇보다 이 기업들은 보수가 두둑하다. 이것이 혁명수비대와 정부가 연합하는 방식이다.
신의 과업을 수행하고 있는 나라
신권 정치는 이 나라의 기본 원리이며 스스로 기반이 약화되지 않는 이상 변하지 않는다. 이란에서 〈인간에 대한 신의 계획의 선언〉이라는 신념을 가진 아야톨라파가 큰 악마(미국)와 타협하고, 성적 자유를 허락하며, 다른 종교로 개종하고, 진정으로 다원론적 정치 체제를 선언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다.
1979년의 혁명 이후 모든 미국 대통령들은 이란이라는 이슬람 공화국과 그랜드 바겐, 즉 일괄 타결을 이루기 위해 채찍과 당근 전략을 번갈아 써왔다. 문제는 이 목표를 어떻게 달성할지에 대한 기본 틀 자체가 양측의 강경파와 서로에 대한 불신으로 지속적으로 훼손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체제 아래에서 이란은 소위 진퇴양난의 상황에 처해 있다. 정권을 여전히 지지하고 있는 수백만 명이 있기 때문에 그들의 정통성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체제 완화를 시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젊은 세대는 날이 갈수록 21세기보다는 16세기에 더 어울려 보이는 체제에 점점 더 환멸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여러 카드가 있다. 핵 이슈는 아직도 살아 있고 호르무즈 해협은 여전히 비좁다. 또한 정치와 테러리즘 영역에서 써먹을 다양한 대역 배우들을 그들이 부를 수 있는 지역에서 보유하고 있다. 그들은 이렇게 〈신의 과업〉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지리의 힘 2) 사우디아라비아
한 가문의 성이 나라 이름이 되다
1740년 중앙 아라비아 네지드의 일부 지역은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Muhammad ibn Saud)라는 토호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그러다가 1930년대에 이르러 그의 직계 후손 가운데 하나가 영토를 더 넓힌 뒤 가문의 이름을 따서 ‘사우디아라비아(Saudi Arabia)’라고 국명을 지었다.
이처럼 국가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행위는 곤란한 상황을 낳는다. 역사적으로 사우드 가문이 자신들이 통치하던 네지드의 일부 지역을 자신들 가문의 이름으로 부르라고 주장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나머지 아라비아의 다른 국가들은 어떨까?
이 이야기는 아라비아 반도의 표면 아래 흐르는 긴장감을 보여주는 것이다. 통치하는 왕가가 권력을 유지하려면 중심이 외곽을 품어야 하는 법이다.
8개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모래의 나라
최근까지도 이 나라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 많다. 어쨌거나 강이 없는 나라 중에서 이만큼 큰 나라도 없고 내륙은 두 개의 광활한 사막이 장악하고 있다.
네푸드라고 하는 북쪽은 보다 작고 좁은 사막의 통로를 통해 남쪽의 엠프티 쿼터(Empty Quarter, 〈공백의 지역〉이라고도 한다) 지역과 연결된다. 남부 끝인 이 지역을 공식적으로는 ‘룹 알 할리(Rub’ Al Khali)‘라고 한다.
사우디아라비아는 8개의 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북쪽에는 요르단과 이라크, 쿠웨이트가 있다. 동쪽으로는 페르시아만과 마주하고 있는 바레인, 카타르, 아랍에미리트가 있다. 그리고 남쪽에는 오만과 예멘이 있다. 특히 사우디아라비아 국경과 가장 길게 맞대고 있는 예멘은 전 세계에서 정세가 가장 불안한 지역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고지대는 전부 서쪽의 절반에 몰려 있다. 홍해 쪽의 해안 평야지대는 상대적으로 좁은데 일련의 언덕과 산들의 거의 전체가 해안선과 나란히 하면서 내륙을 향해 뻗어 있다.
메디나로 이어지는 고지대에는 틈이 있고 옛 카라반들은 엠프티 쿼터 지역을 통해서는 교역에 나설 수 없었기 때문에 아프리카, 홍해, 페르시아, 인도와의 교역을 위해서는 위의 세 도시(제다, 메카, 메디나)가 중요하다.
이제 동쪽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일단 헤자즈 산악지대를 넘어서 북서쪽으로 가면 동쪽의 페르시아만까지 가는 내내 평지를 볼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수니파 무슬림이 우세한 나라라고는 하지만 시아파 무슬림도 꽤 있다.
주로 동쪽에 몰려 사는 그들 대다수는 바하르나족 출신이다. 이 지역은 적대적인 외부 세력의 침입에 가장 취약한 곳이다. 게다가 석유와 가스를 나르는 파이프라인 수백 개가 통과하고 있어서 방해 공작의 목표가 될 가능성도 크다.
국토의 중심부로 향하면 수도 리야드와 네지드 지역이 있다. 비록 수도는 가장 큰 도시이고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치적 심장부이긴 하지만 다른 인구 밀집 지역들과는 꽤 떨어져 있다. 이러한 현실은 그 지역 거주자들이 국민 대다수가 지나치게 극단적인 형태의 이슬람이라고 여기는 것을 믿는 현상을 얼마간 설명해 준다.
사우드 가문의 본거지였던 네지드는 사막 3개가 에워싸고 있고 산악지대가 북서부의 헤자즈와도 분리시켜 놓아서 외따로 고립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네지드는 물조차 귀한 후미진 곳이었다.
그러던 네지드의 운명이 바뀌기 시작한 것은 1700년대 중반, 알 사우드라는 야심만만한 소수 씨족원 수백 명이 아드 디리야의 오아시스 주변 대추야자 숲을 장악하고부터였다. 지역 족장이었던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는 이곳을 번화한 시장이자 정치적 거점으로 탈바꿈시켰다.
두 세력의 연합, 한쪽은 정치를, 한쪽은 종교를
유력 가문으로 성장해 가면서 사우드 가문이 와하브(Wahhab)파와 다져온 전략적 관계는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1744년에 종교학자인 무함마드 이븐 압둘 와하브는 사우드 가문의 무함마드 이븐 사우드에게 바야(bayah), 즉 충성 맹세를 했다. 두 측의 합의에는 사우드 가문은 정치를, 종교적 측면은 와하비파의 영역이라는 입장이 담겨 있었다.
1765년경 네지드를 통치하고 있던 그들은 메카, 메디나를 포함해서 전방위로 세력을 확장해 갔다. 그 과정에서 특히 시아파 주류 지역을 겨냥해서 성지를 파괴했다. 와하비파는 시아파를 두고 라피다(Rafida), 즉 〈거부자들〉이라고 일컬었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이 이집트를 통해 군대를 보낸 1818년에 이 구도는 무너졌다. 오스만군은 헤자즈를 다시 점령한 데 이어 네지드로 진격해서 아드 디리야를 장악하고는 도시의 상당 부분을 초토화시켰다. 당시 국왕이었던 압둘 알라 사우드는 포로가 되어 이스탄불로 이송돼서 만인이 보는 앞에서 참수당했다. 첫 번째 왕국은 이렇게 무너졌다.
2년 뒤 오스만은 병력 대부분을 철수했고 대학살에서 살아남은 사우드 가문의 투르키 이븐 압달라는 제국과 가문을 재건하는 일에 착수했다. 그리하여 1824년에 두 번째 왕국의 효시라 할 리야드 수복이 이뤄졌고 이 왕국은 1891년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그동안에도 오스만은 물론이고 네지드의 산악지대 샴마르족 출신으로 사우드 가문에 인접한 라시드 가문이 꾸준히 왕국을 압박했다.
라시드 왕국은 네지드 북쪽의 샴마르 토후국을 통치하던 왕국이었다. 사우드 가문과 라시드 가문은 아라비아 내륙의 지배권을 놓고 수십 년 동안 다투는 중이었다. 그 싸움은 1890년 리야드를 잃고 이듬해에 쿠웨이트로 도주한 사우드 가문의 처참한 패배로 막을 내린다.
무력으로 탄생한 나라
흔히 사우디 2왕국의 이븐 사우드(현재 사우디아라비아의 초대 국왕인 셈)라고 알려진 그의 대가족이 1890년 라시드 가문에 패해 쿠웨이트로 탈출했을 때 그의 나이는 15세였다. 그곳에서 그는 리얄(riyal,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의 화폐 단위)이라는 거창한 이름에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10대 시절을 보낸다. 1901년, 20대 중반이 된 그는 부친의 뒤를 이어 사우드 왕조의 수장이 되면서 네지드의 술탄이라는 칭호도 물려받는다.
이듬해인 1902년 달조차 숨은 1월의 어느 날 밤, 그는 단 20명의 전사를 이끌고 네지드로 잠입했다. 그들은 리야드의 성곽을 넘어 들어가 라시드의 총독을 살해하며 그 도시를 재탈환했다. 이제 젊은 이븐 사우드는 1평방킬로미터 도시를 다스리는 술탄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1914년 즈음에 이븐 사우드는 이제 네지드의 술탄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나머지 영토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현재 시리아와 요르단 지역, 헤자즈 왕국(메카와 메디나를 포함한), 그리고 페르시아만의 해안지대 일부 등 아직 손에 넣지 못한 땅에 대해 은근히 욕심을 내고 있었다.
그는 우선 라시드 왕국으로 눈을 돌렸다. 그들이 오스만 제국과 손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이븐 사우드는 자연스레 영국 쪽으로 기울었다. 영국은 그에게 라시드와 싸울 자금과 무기를 제공했다.
이때 이븐 사우드가 주로 의지한 것은 이크완(Ikhwan)이라는 10여만 명의 최정예 와하브 별동대로 구성된 군사 조직이었다. 1920년, 이븐 사우드 휘하의 중무장한 부대가 라시드 왕국을 향해 진군했다. 그로부터 2년에 걸친 승전으로 이븐 사우드의 왕국은 두 배나 커졌다(이크완은 1927년 이븐 사우드와 결별하고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하고 그 잔당은 사우디아라비아 국민위병의 전신이 되었다).
그러자 그는 또 다른 숙적에게로 눈을 돌렸다. 바로 헤자즈 왕국을 통치하는 하심 가문이었다. 결국 1925년에 메카와 메디나가 이븐 사우드의 수중에 떨어졌고 하심 왕가는 이라크와 요르단으로 피신하게 된다.
1927년에 이븐 사우드는 영국과 협정을 맺게 된다. 영국이 그를 네지드와 헤자즈의 왕으로 인정해 주는 대가로 그는 헤자즈의 북부를 요르단에게 양도하며 요르단 동부 일부 지역에 대한 권리 주장도 포기하기로 했다. 또 선지자 무함마드의 탄생지이며 가장 성스러운 도시로 추앙받는 메카와 메디나에 있는 〈성스러운 2대 사원의 수호자〉라는 타이틀도 얻게 된다.
1932년에 이븐 사우드는 다시 한번 자신의 타이틀을 변경한다. 이번에는 아예 자신의 성이 나라의 이름이 되었다. 이제 그는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왕이 된 것이다. 그리고 이 통합을 공고히 하려고 자신이 굴복시킨 부족과 고위 성직자 가문의 딸들과 결혼했다. 그리하여 그는 20여 명이나 되는 아내를 거느리게 되어 엄청난 <가족 네트워크>가 형성되었다.
이 논의가 중요한 것은 사우드 왕가의 지배력은 그 정통성에 대한 인정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 몇십 년 이래 풍부한 에너지 자원으로 얻은 막대한 부 덕분에 국민들 삶이 개선되면서 이 정통성은 더욱 힘을 받고 있다.
석유, 돈 그리고 미국
1932년 이전 수십 년 동안 이란, 바레인, 이라크 등지에서 유전들이 속속 발견되자, 영국은 사우디에게도 석유 시추를 제안했다. 하지만 이븐 사우드는 영국 석유 회사들을 미심쩍어했다. 식민주의 성향을 버리지 못한 영국 정부가 과도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라는 우려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1933년, 미국의 스탠더드 오일 컴퍼니 오브 캘리포니아(SOCAL)가 계약을 따낸 것은 이런 배경에서였다. 1935년, 드디어 시추가 시작됐다. 그리고 1938년, 마침내 석유가 나왔다. 그해 담맘(Dammam) 제7광구에서 검은색 원유를 퍼올리기 시작했다. 변화가 시작된 것이다.
이어 세계 최대 매장량의 가와르(Ghawar) 유전이 발견되고 바야흐로 석유와 돈이 흘러오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대부분의 돈이 SOCAL에게 갔지만 해가 갈수록 사우디아라비아 측이 점점 많은 양보를 얻어내면서 차곡차곡 합작법인의 지분을 획득해 갔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아람코(Aramco, 사우디아라비아의 국영 석유 기업)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사우디아라비아는 중립을 지키면서도 은근히 연합국 편을 들었다. 이후 1945년 2월, 이븐 사우드와 루스벨트는 수에즈 운하에 정박해 있던 미군 전함 위에서 만났다. 두 사람은 나이가 비슷했고, 둘 다 나라의 수장이었으며, 둘 다 보행에 불편을 겪고 병마에 시달리고 있었으니 서로 뜻이 통할 만도 했다.
그들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석유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미국에게 보장해 주기로 뜻을 모았다. 그리고 사우디아라비아인들은 자신들의 국경 안에 머물 것이며 미국은 그런 사우디아라비아의 안전을 보장해 주기로 했다. 루스벨트가 귀국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사우디아라비아는 독일과 일본을 상대로 선전포고를 했다. 이렇게 해서 사우디는 새로 창설된 유엔에서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븐 사우드는 1953년 78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우드 왕세자가 그의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새 국왕이 주로 자기 자신을 위해 혈세를 펑펑 써버린 탓에 교육이나 보건 사업에 쓸 돈이 부족하게 되었다. 재위 초기 몇 년 동안 사우드 왕은 국내외에 있는 거의 모든 가문의 구성원들과 사이가 틀어졌다. 1964년, 마침내 그는 원로 성직자들의 파트와에 의해 쫓겨나 사우드는 그리스로 피신했고 파이살이 왕궁에 입성했다.
새 국왕의 재위 동안 석유 수익은 무려 1천6백 퍼센트 이상 증가했다. 덕분에 통신 및 운송망을 건설하고 후한 복지제도도 마련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이 발발했을 때 파이살은 아랍연맹과 뜻을 달리하여 비밀리에 미 해군에게 석유를 공급했고 이것은 레드 라인을 넘은 것이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 현대화를 저지시키다
1965년에 첫 방송을 앞두고 있는 텔레비전 방송국 앞에서 이슬람교단의 보수주의자들은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텔레비전에서 코란을 읽어주는 방송을 하고 있는데도 말이다. 국왕의 조카 한 명은 아예 방송국 스튜디오에 대한 공격을 이끌다가 나중에 치안부대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그들을 달래기 위해 파이살은 이집트와 시리아의 세속주의 정권으로부터 도망친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이 사우디아라비아로 들어와서 제도권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허용했다. 21세기에 준동하는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의 많은 지하디스트들은 이때 들어온 극단적 원리주의자 학자 세대에서고 배운 바가 컸다.
1975년, 결국 파이살의 과거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십여 년 전에 텔레비전 개국 반대 시위에서 목숨을 잃은 조카의 형제가 쏜 총에 맞아 목숨을 잃고 만 것이다. 이후 새로 권좌에 오른 국왕은 파이살의 이복형제인 할리드 왕자였다.
1979년 11월 20일,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인 무장한 반정부 인사 수백 명이 메카의 그랜드 모스크(Grand Mosque, 사우디아라비아에서 2번째로 큰 이슬람 사원)로 들이닥쳤다. 반란의 주모자 자하이만 알 우타비는 1920년대부터 사우드 집안을 위해 싸워왔던 이크완 와하비 전사의 후손이었다.
왕실의 요청에 따라 극도의 비밀 유지 속에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당시 프랑스 대통령은 프랑스의 최정예 대對테러 부대인 GIGN의 요원 세 명을 파견해서 사우디아라비아 특수부대를 훈련시키는 임무를 맡겼다. 반란 주도자 중 63명이 생존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그들은 여러 도시의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참수당했다.
이 사건의 여파는 컸다. 이란의 혁명 지도자인 호메이니는 탈환 작전의 배후로 미 제국주의와 국제 시오니즘을 지목하며 맹렬하게 비난했다. 이 문제에 대한 그의 해답은 무엇이었을까? 더욱더 종교에 기대는 것이었다. 이슬람교 말이다.
학교와 대학은 보다 더 많은 이슬람 성직자를 채용해서 와하비즘만이 진정한 이슬람이라고 젊은이들에게 가르쳤다. 그러니 훗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한 무신론자 소비에트 공산주의자들과 싸우기 위해 수만 명의 사우디아라비아 청년들이 그리로 달려간 것도 놀랄 일은 아니다. 그러므로 이들이 귀국하고 나서도 국제적인 지하드 운동을 명분으로 군사 기술을 쓰고 싶어 했을 것은 당연하다. 그들 가운데 오사마 빈 라덴이 있었다.
알카에다, 사우디 왕국과 결전을 불사하다
그즈음 할리드 왕이 세상을 떴고 이복형제인 파흐드 왕세자가 권좌를 물려받았다. 1990년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침공했고 사담 후세인의 다음 공격 목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유전일 거라는 전망이 나왔다.
그러자 왕국 바깥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던 오사마 빈 라덴이 조국을 지키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에서 훈련받은 자기 휘하의 무자헤딘(아프가니스탄의 무장 게릴라 조직)을 투입하겠다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왕은 그 제안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미국 쪽으로 눈을 돌렸다.
미국인들은 왔고, 보았고, 이겼다. 사우디아라비아군을 포함한 연합군이 사담 후세인의 군대를 쿠웨이트에서 밀어낼 때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미국인들은 사우디아라비아에 눌러앉았다.
이후 1995년 미국이 운영하는 훈련 센터 폭발 사고, 1996년 미국 민간인 주재 아파트 폭탄 테러 등이 발생했고 급기야 2001년 9월 11일, 빈 라덴이 이 상황을 끊어 버렸다. 그런데 너무도 세게 쳐버린 바람에 미국은 전쟁을 일으켰고 사우드 왕가는 큰 충격에 휩싸였다. 19명의 9·11 테러 주동자 가운데 15명이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이었다.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빈 라덴도 사우디아라비아 출신이었다.
그 후 미국이 아프가니스탄에서 수행하는 전쟁을 놓고 사우디아라비아 국내 여론은 갈라졌다. 하지만 정부는 미국의 지휘 및 통제 작전을 위해 자국의 공군기지 사용을 조용히 승인했다. 이제 빈 라덴과 그의 추종자들에겐 왕국 내에 있는 미군을 쫓아내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 자체와 싸우고 있었다.
2003년, 미군은 철수를 발표했지만, 그해 5월, 외국인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리야드의 복합단지 3곳이 무장괴한에게 기습 공격을 당했다. 범인들은 십자가와 소 숭배자들, 즉 기독교도와 힌두교도를 찾아내려고 이 집 저 집을 뒤지고 다녔다. 결국 39명이 목숨을 잃고 100명 이상이 다쳤다.
알카에다의 전략이 확연히 드러났다. 혼란을 조장하고 보상을 얻어내는 것이다. 영국과 미국의 정보에 따르면 고숙련 외국인 노동자들의 20퍼센트 정도가 사우디아라비아를 떠났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당국은 강경하게 대응했다. 1990년대 중반의 탄압을 넘어서는 강한 탄압이 재개됐고 다시 정보기관이 상황을 장악했다.
중동의 패권을 위한 31세 젊은 왕세자의 행보
2017년 살만 국왕은 31세 된 아들인 모하메드 빈 살만을 왕세자로 지명했다. 국왕은 빈 살만의 군대 경력이 미천한데도 2015년에 이미 국방부 장관 자리에 앉혔는데 많은 국민들, 특히 왕가에서 볼 때 차기 국왕 예정자의 승진은 너무 빠른 것이었다. 약칭인 MBS(Mohammad Bin Salman의 머리글자를 땀)로 알려진 그는 왕세자가 된 뒤 왕국을 둘러보니 온갖 분야에서 문제점이 한둘이 아닌 걸로 보였다. 그는 곧 행동을 개시했다.
2015년에 사우디아라비아는 카타르에 대한 경제 봉쇄를 단행했다. 또한 카타르가 이란의 편을 든 것뿐 아니라 무슬림형제단이나 하마스(Hamas, 이슬람 원리주의를 신봉하는 팔레스타인의 반反이스라엘 과격 단체) 같은 단체를 지원했다고 비난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또 자신들의 왕조를 무너뜨리려 하는 무슬림형제단을 오랫동안 눈엣가시로 여겨왔다. 그러던 차에 2013년 이집트에서 군부 쿠데타가 발발하자 무슬림형제단의 리더이자 선출된 대통령이었던 무함마드 모르시를 밀어내고 시시 장군이 그 자리를 차지하는 데 힘을 보탰다. 또 리비아 내전에서는 터키가 지원하는 국민합의정부GNA에 맞서는 리비아 국방군을 지원했다.
MBS는 이에 그치지 않고 대다수 걸프 국가들과 연합한 이른바 〈단호한 폭풍 작전〉을 통해 예멘에 대한 군사 개입을 승인했다. 이 연합은 이란이 받쳐주고 있는 시아파 계열의 후티 반군과 싸우고 있었다. 2019년 후티 반군은 사우디아라비아로 장거리 미사일을 날리고 드론을 띄워 석유시설과 공항, 심지어 민간인 거주 지역까지 공격했다.
MBS의 대외정책은 충동적이고 공격적으로 보였다. 그 한 예가 2017년 말에 벌어진 희한한 사건이다. 당시 레바논의 총리였던 사드 알 하리리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리야드를 방문하고 있는 동안에 돌연 감금되고 이어 총리 사임을 발표했다. 레바논 연립 정권을 붕괴시키고 연정에 참여한 헤즈볼라의 힘까지 약화시키려는 MBS의 노림수라는 의혹이 일었다. 그는 외국정부의 개입으로 귀국한 후 사 임할 의사가 없었노라고 바로 밝혔다.
폭정과 개혁을 동시에
2018년에는 자말 카슈끄지의 살해 사건이 세간의 큰 이목을 끌었다. 그는 그동안 터키에 거주하면서 왕세자의 행동방식을 비판하면서 정권과 사이 가 매우 틀어졌다. 그해 10월 2일 카슈끄지는 터키 국적 약혼녀와의 혼인 신고를 위한 서류 준비차 터키 주재 사우디아라비아 영사관에 들어갔다가 살해당했다.
애초에 왕세자는 개혁가의 면모를 부각시켰는데 이 사건으로 그의 이미지는 크게 실추됐다. 여러 나라가 그와 개별적으로 관계 맺는 것을 꺼렸다. 하지만 국가 차원에서는 평소처럼 비즈니스가 진행되었다.
또 하나의 사건은 열한 명의 왕자들과 경찰, 군대, 경제계의 고위 엘리트 수십 명을 호텔에 감금하고 숙청한 사건이다. 그 가운데는 정규군에 버금가는 병력을 가진 국가방위부의 수장이자 왕세자의 사촌인 미텝 빈 압둘라 왕자도 있었다. 이들은 부패 혐의로 유죄를 인정받았고 정부는 그 체포가 부패척결의 일환으로 행해진 것이었음을 연신 강조했다.
한편으로는 왕세자는 진정한 개혁가이기도 하다. 그의 주변에는 젊은 조언자들이 포진해 있는데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그 못지않게 성급해 보인다. 물론 그들의 연령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 결정적으로 그들은 변화에 훨씬 개방적이다.
석유에서 벗어나려는 도박
2014년부터 2020년 사이에 유가는 반토막이 났다. 그 간극을 메우려고 애쓰는 사이 사우디아라비아의 외환 보유고 또한 7,370억 달러에서 4,750억 달러로 줄어들었다. 유가 변화와 한정된 화석 연료의 미래가 말해 주는 것은 이 나라가 당장 변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변화는 장기적인 계획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 계획이 바로 〈비전 2030〉이다.
비전 2030을 위한 비용 절감은 대규모 사업의 진척 속도를 늦춘다든지 소규모 프로젝트를 축소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더불어 노동력의 사우디아라비아화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초대형 프로젝트들은 예정보다 느리게 진행되고 있다. 왕세자가 요란하게 발표한 프로젝트 가운데 신도시 개발 계획인 네옴NEOM 프로젝트가 있다.
코로나19는 메카로의 순례객 감소 등으로 예산 투입에 차질을 주었지만, 팬데믹 상황에서 일시적인 경기 부양책 덕분에 전 세계에서 석유 수요가 증가하면서 원유 가격도 상승했다. 중단기적으로 이 나라가 에너지 시장에서 우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 위치를 잘 잡아야 한다.
또한 사우디 정부는 재생 에너지에 투자하고 있다. 이른바 분산 투자를 시작한 것이다. 일례로 사우디아라비아는 테슬라 지분의 5퍼센트를 소유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전기자동차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제너럴 모터스를 비롯하여 전 세계 수십여 개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투자하고 있다.
경제적으로는 또 다른 균형화 조치가 행해지고 있다. 요컨대 석유에서 탈피해 산업을 다각화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석유에서 얻는 수입으로 지불하는 보조금을 급격하게 철회해서 국민들이 경제적으로 곤란을 겪지 않게 하면서도 나라의 장부를 맞추는 게 관건이다.
미국, 중국, 이스라엘과의 관계
전략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는 향후 몇 년간은 미국에 밀착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미국이 그들과 관계를 끊지 않는 한 말이다. 미국이 안보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면 이곳의 해상 방위는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
이스라엘과 관해서는 최근 들어 다시 미래를 내다보면서 언어 폭탄 공격도 잦아들고 향후 양국 간의 관계 정상화를 전제로 한 비즈니스 실무 접촉도 조용히 강화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 속에서 사우디아라비아는 더 이상 팔레스타인 국가 창설을 우선순위로 두고 있지 않다.
그는 이스라엘과 국교를 정상화한 아랍에미리트의 실질적 지도자인 모하메드 빈 자이드 왕세자와도 매우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데, 이란의 위협을 늘 피부로 느끼고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로서는 이스라엘의 아이언돔 미사일 방어 시스템이 여간 탐나는 게 아니다. 또 사막에 꽃을 피우는 기술도 자신들 국가의 농업에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중국과의 경제적 끈은 더욱 단단해질 것 같다. 중국은 이곳에 중거리 탄도미사일을 팔았으며 지난 몇 년간 이 나라의 원유 수입을 급속도로 늘렸다. 또 사우디아라비아는 화웨이가 중동 지역에서 성사시킨 12건의 5G 계약 가운데 한 건에 서명했다. 미국과는 달리 중국은 자국과 거래하는 나라들의 인권 문제는 크게 신경 쓰지 않는다.
사우디아라비아는 범아랍 민족주의(모든 아랍 민족들 간의 통일을 추구하는 운동)에 대해서도 냉철하고 실용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이 나라의 관심사는 중동 지역에 느슨한 형태의 경제 및 정치 포럼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1981년에 무역을 간소화하려는 구상으로 만든 걸프협력이사회의 6개 회원국 가운데 핵심 창설 멤버가 되었다.
석유 시대의 종말, 이 나라의 운명은?
왕세자는 국민들에게 새로운 사회 계약을 제시하고 있다. 국민들은 부패가 덜하고 보다 덜 관료적인 나라, 석유시대가 슬슬 종말을 고하는 상황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경제, 현대 세계의 대다수가 누리는 여가생활을 자유롭게 즐길 나라를 얻게 될 것이다.
와하비즘의 수출 역시 축소될 수 있다. 만약 사우디아라비아가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덜 중요해진다면 세계는 부분적이나마 빈 라덴 또는 ISIS를 배출한 그 이념을 마냥 용인해 줄 수만은 없을 것이다.
왕세자가 제시하는 새로운 21세기형 모델에서는 오일 머니의 역할이 한층 축소될 것이다. 이 나라의 지도자는 새로운 사회, 새로운 경제, 그리고 유능한 군대를 건설해야 한다. 아직은 그 검은 물질로 세계 경제의 바퀴가 잘 돌아가도록 미국이 사우디아라비아를 위해 싸워줄 수 있겠지만 이곳의 태양광 패널을 지켜주기 위해 싸워줄 리는 만무하다. 그리고 그 순간을 향해 우리는 점점 더 다가가고 있다.
(지리의 힘 2) 터키(튀르키예)
목 좋은 곳에 자리 잡았지만 친구는 별로 없다
터키에는 마르마라해를 중심으로 서쪽 끝단에는 다르다넬스 해협이 있는데 이곳을 통해 에게해로 진입할 수 있다. 반대로 동쪽 끝단에는 가장 좁은 곳의 폭이 1킬로미터도 채 되지 않는 보스포루스 해협(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보스포루스 대교 설치)이 있다. 터키에게 이 두 관문의 지배는 방어의 측면에서 엄청난 이점이 된다.
이곳처럼 목 좋은 곳은 늘 외부 세력들이 호시탐탐 탐욕스러운 시선으로 눈독을 들이기 마련이다. 특히 동, 서, 남, 북, 사방팔방으로 향하는 무역선들이 최종 목적지로 가려면 이곳을 통과해야만 했으니 그들로부터 꽤 많은 세금을 징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가 이곳을 지배했을 때 가졌던 입장이며 로마, 비잔티움, 그리고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형태로 있던 투르크도 예외가 아니었다.
멀리 몽골에서 와 오스만 제국을 세우기까지
터키의 서쪽에서 동쪽까지는 1천6백 킬로미터에 이르며 북쪽에서 남쪽까지는 5백에서 8백 킬로미터 정도다. 또 국토의 약 97퍼센트는 아시아에 속해 있고 그 가운데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나톨리아 고원이다. 오늘날 터키는 그리스, 불가리아,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이란, 이라크, 시리아 등 8개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들은 일찍이 오스만이 제국 건설을 착수했을 때 만났던 이웃이다.
대략 9세기경 유목민이었던 투르크계 부족들은 현재 몽골인 이스턴 스텝 지대를 돌아다니다가 알타이 산맥을 넘고 지금은 카자흐스탄 땅인 웨스턴 스텝 지대를 건넌 뒤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중앙아시아를 지나 카스피해까지 도달하는데 여기서 비잔티움 제국과 딱 마주치게 된다. 그즈음 이들은 페르시아 주변 지역에서 이슬람교를 접하면서 이교도 신앙에서 개종을 했다.
1037년에는 비잔티움 영토와 맞닿은 현재 아르메니아 지역에 셀주크 제국을 건설했다. 서기 1071년 비잔티움 군대와 셀주크 군대는 지금의 터키와 이란 국경에서 120킬로미터 떨어진 반 호수 근처인 말라즈기르트에서 맞닥뜨린다(‘만지케르트 전투’). 이 전투는 비잔티움에게는 무엇보다 뼈아픈 패배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10년 안에 콘스탄티노플 근처까지 밀고 들어왔다. 그리고 이 새로운 영토를 일컬어 룸 술탄국(Sultanate Rum)이라 했다.
1200년대 후반에 아나톨리아 북서부 지역에 건설된 여러 토후국 가운데 오스만 가지(Osman Ghazi), 즉 〈전사 오스만〉이라고 불린 자가 세운 나라가 있었다. 1326년경 오스만 토후국은 이번에는 그들의 시야 안에 들어온, 콘스탄티노플에서 남쪽으로 150킬로미터쯤 떨어진 부르사를 장악했다. 오스만은 꾸준히 주변 지역으로 세력을 넓혀 갔고 1453년 마침내 비잔티움 제국이 무너졌다.
최전성기를 보내고 유럽의 병자로 몰락하다
1480년대에 현재 우크라이나 땅인 흑해의 항구들을 장악했고, 천천히 세력을 키우는 러시아를 그들의 향상된 해군력을 이용해 묶어둘 수 있었다. 이제 오스만은 서쪽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오스만은 세 차례에 걸쳐 비엔나 정복을 시도했다. 그리고 세 번째 원정에서는 비단 철문의 북쪽뿐 아니라 마르마리아의 북쪽, 남쪽, 동쪽, 서쪽까지 포함시켰다. 1500년대에 이르자 오스만은 발칸 지역 대부분을 장악했고 비엔나가 있는 북서쪽까지 내리 진출하더니 현재의 헝가리까지 손에 넣었다. 또 북쪽으로는 흑해를 호령했고, 남쪽과 동쪽으로는 오늘날 시리아,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알제리에 이르는 지역까지 지배했다.
오스만 제국 식민지의 아랍인 이슬람교도들의 삶은 상대적으로 수월한 편이었다. 그런데도 정복당한 지역의 주민들에게 그들의 우두머리가 누구인지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오늘날 다시 아랍 세계로 밀고 들어가려는 터키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오스만 제국의 통치자들에게 그 시대는 로마제국에 비견할 만큼 빛나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최전성기를 찍고 나서 1683년에 비엔나 초입에서 합스부르크 제국에게 패배를 당한 이후 그들은 제국의 붕괴로 가는, 길지만 확실한 몰락의 길을 밟기 시작한다.
1912년부터 1913년까지 이어진 발칸 전쟁에서 콘스탄티노플이 불가리아에 거의 함락될 지경에 이르렀을 때 이 〈유럽의 병자〉가 얼마나 병들어 있는지가 자명해졌다. 그리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잘못된 편을 선택했을 때 그들 자신의 사망 확인서에 서명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1918년의 휴전 협정에 따라 제국의 수도는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군에게 점령당했고, 결국 1922년 오스만 제국은 해체되었으며 술탄 체제는 폐지됐다. 이 와중에 터키어를 쓰는 일부 주민들은 새로운 국경 바깥에, 즉 그리스와 사이프러스에 남겨졌다. 마찬가지로 백만 명이 넘는 그리스인들은 터키 안에 남겨지게 되었다.
1919년부터 1922년까지 이어진 그리스-터키 전쟁에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장군이 이끄는 터키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터키는 그럼에도 그리스가 터키 연안의 섬들 대다수를 지배하게 된 것과 시리아에 있는 쿠르드족 땅과 아랍 영토를 잃게 된 조약을 그때도 인정하지 못했고 현재도 받아들일 생각이 없다.
터키공화국의 탄생, 그러나 영 마음이 편치않은
아타튀르크는 1923년에 창건한 신생 터키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앙카라가 수도로 선택되었고 콘스탄티노플의 명칭은 공식적으로 이스탄불로 바뀌었다. 아타튀르크는 15년에 걸친 집권기 동안 나라를 획기적으로 개혁했다. 그는 〈현대화는 곧 서구화〉라는 결론하에 일련의 급진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일례로 남자들의 경우 전통적인 페즈(테두리 없는 터키식 모자)를 쓰는 것을 법으로 금했으며, 여자들 또한 베일로 얼굴을 가리지 못하게 했다. 또 서양식 달력(그레고리력) 체계가 도입되었고 읽고 쓰는 문자도 아랍어 대신 라틴 알파벳으로 교체했다(직접 지방 학교를 다니면서 알파벳을 지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터키화 과정에는 1915년부터 1923년 사이에 행해진 기독교계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집단 대학살을 부인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었다. 많은 터키인들은 오스만 제국 내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자신들의 언어와 문화를 고수한다는 사실에 분노하면서 그들을 내부의 적으로 간주했다.
대다수 역사학자는 그 사건이 치밀하게 계획된 대량 학살 행위에 해당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터키 당국은 그러한 잔혹 행위들이 저질러진 것은 인정하면서도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을 말살시킬 의도는 없었다고 주장하면서 계획적인 대량 학살이었다는 것만은 강력히 부인하고 있다.
비록 터키가 유럽과 중동의 가교라 하지만 이 다리는 병자가 죽어가는 동안 그 유용함도 훨씬 줄어든 터였다.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새로운 해상 교역로가 열렸고, 많은 유럽 상인들에게 훨씬 매력적인 시장으로 미국이라는 대량 소비 사회가 부상한 것이다.
1920년대에 아타튀르크가 산업화를 시작했고 1929년부터 1938년 사이에만 터키의 공업 생산이 무려 80퍼센트나 늘었다고는 하나 그래도 터키는 여전히 상대적으로 농업의 비중이 큰 사회에 머물러 있었다. 하지만 1929년 미국 대공황의 여파로 농산물 가격이 급락하면서 터키에도 경제 위기가 촉발됐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터키 정부는 1945년 2월까지 중립적인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다 소련 군대가 베를린으로 접근하고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터키는 잽싸게 독일과 일본을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 비록 약은 행동이었을지라도 어쨌거나 현명한 결정이었다. 덕분에 터키는 전후 세계 질서를 확립하기 위해 소집된 일련의 회담들에서 한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나고 터키는 나토 회원국이 된다. 그것은 일종의 정략결혼이었다. 나토의 입장에서는 냉전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가까운 미래에 터키가 도박을 걸거나 모스크바에 의지하는 것을 막는 동시에 동맹의 남쪽 측면을 든든하게 지킬 수 있을 터였다. 1952년에 그리스도 같은 이유로 나토 회원국이 되었다.
터키의 해군에게는 흑해에서 소련을 묶어두는 역할이, 육군에게는 불가리아 국경지대에서 소련 지상군을 묶어두는 역할이 주어졌다. 1990년대에 터키는 이라크와 카스피해에서 시작해 아나톨리아를 통과해 유럽으로 석유와 가스를 공급하는 송유관을 건설한 뒤 주요 교역로라는 위치를 되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리하여 자국을 둘러싼 세계를 가늠하는 한편으로 나토 내에서도 가장 크고 효율적인 군사력으로 신뢰를 얻고 있었다.
하지만 그즈음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인한 이라크 쿠르드족의 인입,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젠의 영토 분쟁, 코카서스와 중앙아시아에서의 러시아와 이란의 영향 확대 등에 대해 점점 더 불안함을 느끼고 있다.
이 지점에서 여전히 서구 지향적인 터키는 EU 가입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세기로 들어서면서 터키 정부가 그 클럽에 초대받을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져 가고 있었다. 일단 경제적으로 터키는 EU 가입 요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며 인권지수 또한 그 요구 조건에 한참 떨어진다.
게다가 EU 내에 수치화할 수는 없어도 인식 가능한 어느 정도의 편견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터키가 충분히 〈유럽답지 않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터키는 새로운 지도자 아래에서 조금씩 다른 쪽으로 방향을 틀기 시작했다.
오스만 제국의 부활을 꿈꾸지만 친구는 없는
다른 방향이란 미래를 설계하기 위해 〈과거〉로 눈을 돌리는 것이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이 새 지도자는 종교적 민족주의와 신오스만주의의 화신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이다. 에르도안에 대해서는 그가 이슬람의 급진적 해석이 정치를 이끌고, 또한 개입해야 한다고 믿는 이슬람주의자가 아닌가 하는 논쟁이 있다.
그는 정의개발당(Adalet ve Kalkınma Partisi)을 창당한다. 그 머리글자를 딴 AKP에서 ak는 흔히 터키어에서 흰색 또는 깨끗함을 의미하는데 이는 다른 정치 집단과 구별되는 선명성을 나타내는 데 유용했다. 이 당의 뿌리는 이슬람 복지당에 있었다.
과거 전력으로만 보면 그가 이슬람주의자라는 증거는 딱히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민주주의에 대한 존중이 결여된 공공연한 민족주의자라는 데는 다음의 발언에서 보듯 의심의 여지가 없다. “민주주의는 마치 버스를 타는 것과 같다. 일단 내가 내려야 할 정류장에 도착하면 내리면 된다.”
현대 터키 역사에서 AKP의 집권은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이 나라는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를 기반으로 설립된 나라였다. 그런데 이제는 나토에 대해 미온적이며 이전의 오스만 제국 땅에서 영향력을 상실한 것에 분노하는 이슬람 이념에 뿌리를 둔 정당이 이끌어가는 나라가 되었다.
1990년대는 터키가 힘을 키워가던 시대였다. 그런데 2001년 9·11 테러 이후의 세계에서 터키는 신중을 기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따라서 2000년대 초반 터키의 대외정책 기조는 “이웃들과 절대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라는 수사로 대표된다. 그리하여 터키는 서방 강대국들과 친한 사이를 유지하는 동시에 무역과 소프트파워, 외교력을 이용해서 발칸 지역과 중동에 서서히 영향력을 확대해 나가는 것으로 10여 년을 보냈다.
하지만 금세기의 두 번째 10년이 시작되면서 부드럽고도 부드러운 접근법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2011년 아랍의 봉기가 촉발되자 아예 올이 다 드러날 정도가 되었다. 〈이웃과 문제가 없는〉 정책은 이제는 〈친구가 없는〉 쪽에 더 가까워졌다.
이웃 나라들과 끊임없이 충돌하다
그즈음 20년 동안 잘 지내고 있던 터키와 이스라엘 간의 사이가 틀어졌다. 사실 두 나라는 아랍 국가들과 이란에 대한 공통된 우려에 기반을 두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AKP의 정치적 지지층에는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다수가 포함돼 있지 않아서 2008년에 벌어진 이스라엘의 가자 침공은 두 나라 관계를 냉각시킬 그럴듯한 핑곗거리가 됐다. 그리고 몇 년 안에 양국의 합동 군사 작전이 취소됐다. 이어 하마스 지도자들이 수도 앙카라에서 환대를 받았고 에르도안이 반유대주의적 발언을 쏟아내는 동안 터키 텔레비전에서는 반이스라엘 영화들이 방영됐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늘 무슬림형제단과 긴밀한 관계를 맺어오고 있었다. 무슬림형제단이라면 세계적으로 이슬람법이 지배하는 칼리프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세포와도 같은 조직들을 통해 가동하는 다국적 수니파 이슬람주의 단체다. 아랍의 국가들은 이를 알고 있는 만큼 그래서 무슬림형제단을 꺼린다.
1920년대에 이집트에서 창설된 무슬림형제단은 수년 동안 심한 탄압을 받은 끝에 아랍의 봄으로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이 축출되고 치러진 2012년 이집트 선거에서 마침내 승리를 거머쥐었다. 그런데 이듬해 수개월에 걸친 반정부 시위가 벌어지면서 이집트의 무슬림형제단 정부가 군사 쿠데타로 전복되고 만다. 에르도안이 이 사태를 맹비난하자 결과적으로 이집트의 새로운 지도자가 된 시시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가 되고 만다.
두 나라 사이의 이념과 전략적 상이함은 결국 리비아에서 부딪히면서 동부 지중해에서 경쟁에 돌입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2011년에 발발한 시리아 내전 동안 또다시 불편한 관계가 된다. 여러 다양한 이슬람 조직들이 비수니파인 시리아의 아사드 대통령에게 반기를 든 수니파 봉기를 이용하자 터키 정부는 잽싸게 그들을 지원했다.
그러던 중 2016년에 터키군이 시리아 북부를 침공했고 2018년과 2019년에 또다시 침공하자 이집트에서는 이 행동을 두고 “아랍이 신오스만주의자들의 새로운 위협에 직면하고 있다.”라는 말이 돌았다. 터키가 시리아를 급습한 것은 그 지역에 쿠르드족 자치구가 형성돼서 터키 내에 있는 쿠르드계가 다수인 지역과 힘을 합치는 것을 미연에 막아야 할 필요 때문이었다.
에르도안은 유럽 국가들이 자신이 많은 난민을 받아들인 것을 충분히 인정해 주지 않는 것과 나토가 향후 있을지 모를 러시아의 공격을 단념시키려고 리투아니아에 추가 병력을 파견한 사실에도 분개했다. 그러면서 터키가 ISIS의 테러 위협을 막기 위해 시리아로 들어갔던, 정작 터키가 필요하다고 느낄 때에는 도움의 손길을 내밀지 않았던 것에 대해 공개적으로 섭섭해했다.
"마비 바탄, 우리는 푸른 바다를 지배할 나라다!"
에르도안에 반기를 들고 2016년에 벌어진 터키의 유혈 쿠데타 이후 나토 내에서 터키의 고립은 더욱 심화됐다. 당시 소규모 군인 그룹이 이스탄불의 교량들과 텔레비전 방송국을 점거했다.현 정권은 이 쿠데타는 “미국이 뒤를 받쳐준 거대 음모”라고 비난했다.
터키 군부 내에서 마비 바탄(Mavi Vatan), 즉 〈푸른 조국〉이라는 개념을 지지하는 이들은 대체로 나토 회원국이라는 지위를 회의적으로 본다. 그들은 그리스가 동조하는 미국의 책략의 도구가 되는 것은 터키가 이 세계에서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로 올라서는 것을 막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푸른 조국이라는 관념에는 터키가 자신들을 둘러싼 주변 3개 바다인 흑해, 에게해, 동부 지중해를 지배할 것이라는 세계관이 담겨 있다. 쉽게 말하면 에게해와 동부 지중해에서 터키 정부의 대對그리스 정책을 의미하는데, 1974년에 있었던 터키의 사이프러스 침공 이후로 그리스와 터키가 대립하고 있는 바로 그 지역이다.
에르도안과 푸틴의 브로맨스?
과거 오스만 제국의 영토였던 크림 반도로 눈을 돌려보면 터키 정부로서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많지 않다. 터키는 흑해에 비교적 작은 함대를 두고 있을 뿐이다. 반면 2014년에 크림 반도를 병합한 러시아는 수년째 군사력을 키우는 데 힘을 쏟고 있다. 따라서 터키 해군은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체스판이 돼버린 탓에 이웃들의 심한 저항에 부딪힐 수 있을 지중해 동부와 에게해에 주로 집중하는 편이다.
그런데 2020년에 벌어진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간 분쟁에서 터키는 인종적으로 투르크계에 가까운 아제르바이잔 편에 섰고 둘이 힘을 합치면서 아제르바이잔은 승기를 잡았다. 그러던 차에 러시아가 느닷없이 밀고 들어와서 우격다짐으로 싸움을 멈추게 했다.
푸틴과 에르도안 사이에는 이른바 브로맨스가 형성돼 왔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지정학에 대한 냉철한 이해와 무자비한 상대방에 대한 상호존중을 넘어서는 수준의 브로맨스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2020년 터키는 시리아,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이스라엘, 이란, 아르메니아, 그리스, 사이프러스, 그리고 프랑스와도 사이가 틀어진다. 바로 S-400 신형 지대공 미사일을 러시아로부터 들여오기로 하면서 모든 나토 동맹국들의 원성을 산 것이다. 미국 또한 신뢰를 저버린 행위라고 분노했다.
이웃 나라와의 물 전쟁, 국내에서는 쿠르드족과의 전쟁
인접한 이웃 나라들과 터키 정부와의 관계는 터키가 국내에서 직면하고 있는 두 개의 중요한 이슈들의 영향을 받는다. 바로 아나톨리아의 발전과 쿠르드족과의 끝나지 않는 전쟁이다.
터키는 대부분이 낙후되고 가난한 시골 지역을 마르마라해 주변의 핵심 지역과 통합해야 하는 험난한 과제를 안고 있다. 그러나 험한 지형 때문에라도 이 작업은 쉽게 마무리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아나톨리아가 특히 동쪽에서 강력히 원하는 것은 바로 물이다. 그것도 아주 많은 물을.
1960년대 후반에 터키는 두 강을 따라 댐들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하류 지역 나라들로 흘러 들어가는 수량이 줄어들게 되면서 으레 그렇듯 그 지역에서의 긴장감이 높아졌다. 이 상황은 지금도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현재는 세계에서 가장 큰 댐 가운데 하나라는 아타튀르크 댐을 포함해 족히 수백 개의 댐이 건설돼 있는 상태다. 당시 터키 대통령이던 투르구트 오잘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언제 아랍인들이 자기네 석유 가지고 뭘 하는지에 대해 왈가왈부한 적이 있던가. 따라서 우리가 우리 물을 가지고 뭘 하든 그들의 의견을 들을 필요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강들의 수원이 쿠르드족의 주 본거지인 아나톨리아 일부 지역에 있다는 것이다. 쿠르드계 주력 무장단체인 PKK(쿠르디스탄 노동자당)는 댐들로 가는 길목에 폭탄을 설치하거나 화물차에 불을 지르고 건설 현장의 인부들을 납치하는 등 댐과 관련해 숱한 공격들을 감행하고 있다.
터키 내에 거주하는 쿠르드족은 대략 1천5백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이는 이 나라 총인구의 18퍼센트를 차지하는 숫자다. 이들 대다수는 이란, 이라크, 시리아와 마주보는 동부 아나톨리아 산악지대에 살고 있다.
흔히 쿠르드족을 〈나라가 없는 가장 큰 민족〉이라고들 한다. 7천5백만 명쯤 되는 인도와 스리랑카의 타밀족을 고려한다면 그 전제는 옳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들이 2백 년 가까이 독립 쿠르드 국가를 세우기 위한 운동을 해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아나톨리아의 쿠르드족은 오스만 제국의 통치자들과 충돌했고 현재도 터키공화국에 지속적으로 저항해 오고 있다.
쿠르드족이 거주하고 있는, 터키, 이란, 이라크, 시리아의 4개국 모두가 두려워하는 것은 자국의 영토를 손해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곳과 다른 세 나라의 쿠르드족 거주 지역들이 연계해서 독립국가를 세워 여러 방식으로 자신들의 나라에 도전을 가할지 모른다는 점이다.
터키는 이른바 〈분열되지 않은 나라〉를 만들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면서 그 과정에서 자국 내 쿠르드족의 언어와 고유문화를 억압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을 강제로 동화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나 휴전은 불발로 돌아갔고 이는 새로운 폭력사태의 시위를 당겼다. 한술 더 떠 시리아 내의 쿠르드족이 터키 국경을 따라 반자치구를 형성해 나가자 PKK는 더욱 대담해졌다.
민주주의로 가려다 방향을 바꾸다
다극화된 세계에서 터키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 질서를 무너뜨리는 수많은 배우들 가운데 주역으로 올라서고 있다. 이러한 변환의 시대에서 터키의 역할이 가장 두드러졌던 상징적인 순간이 2020년 7월 12일에 찾아왔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1934년 아타튀르크 대통령이 제정한 법을 뒤집고 아야 소피아(튀르키예어: Ayasofya) 박물관을 원래 용도인 이슬람 사원으로 되돌릴 것이라고 발표했다.
에르도안의 결단은 누가 봐도 전 세계 무슬림들에게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것이었다. 이것을 기념하는 연설에서 에르도안은 오스만/터키 역사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네 개의 전투도 다시 끄집어냈다. “아야 소피아의 부활은 바드르로부터 만지케르트까지, 니코폴리스부터 갈리폴리에 이르는 우리 역사의 좋은 시절에 대한 충만한 기억을 상징한다.”
나토 동맹국이자 가치 있고 믿을 만한 현대 민주국가로서의 터키는 지난 얘기인가? 거의 그렇다고 봐야 한다. 21세기에 들어설 때까지 이 나라의 정치 및 사회는 마르마라 지역의 자유주의 성향의 지식인층과 상인 계층이 지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나톨리아 지역의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면서 신앙심이 깊고 문화적으로 보수적인 사람들이 도시로 대거 유입되었다. 그들은 AKP 당에도 힘을 실어주었다.
그러나 세대가 흐를수록 이 새로운 도심지 주민들의 다수는 자유주의적 성향을 띄어가고 있다. 그리하여 이 나라의 가슴과 정신, 세계 안에서 자신들의 국가 역할을 둘러싼 양측의 힘겨루기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살벌한 동네 한복판에서 살아가기
외교 전선에서 터키는 점점 더 고립으로 치닫고 있으며 신뢰 또한 잃어가고 있다. 터키 정부는 스스로 유리한 패를 쥐고 있다고 믿고 있다. 물론 나토의 남측 지역의 주요 수호자이며 인시르리크에는 미 공군기지를 유치했고, 이즈미르에는 나토의 지상 기지가 있으며, 이 나라 한복판인 쿠레시크에는 조기 경보 레이더 시스템까지 설치해 두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하다.
오늘날의 터키는 탈냉전과 9·11 이후의 세계를 〈경쟁자들이 바글거리는 정글〉로 보고 있다. 그 세계의 맹수들 가운데 하나가 자신들임은 말할 것도 없다. 터키는 무기의 국산화를 모색해 왔고 세계 최고의 무기 수출국이 되고픈 희망을 품을 만큼 성공적으로 방위 산업을 구축해 왔다.
현재는 터키군의 장비와 설비 가운데 70퍼센트가 자국 내에서 생산되고 있고, 탱크와 장갑차, 상륙용 주정(병력, 보급 물자, 장비 따위를 육지로 나르는 날쌔고 작은 배), 드론, 저격용 소총, 잠수함, 소형 구축함까지 생산한다. 그리고 2020년에는 공격용 헬리콥터와 무장한 드론을 실어 나를 수 있는 경항공모함을 처음으로 진수시키기에 이른다.
오스만 제국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알았던 아타튀르크 초대 터키 대통령은 서구화에 중심을 맞추면서 터키를 20세기로 끌어들였다. 반면 에르도안의 터키는 지난 10년간 수평선을 360도 골고루 둘러본 뒤 보다 남쪽과 동쪽을 향해 천천히 초점을 움직여 가고 있다. 현재도 이 여정은 그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터키가 아무리 멀리 가려해도 늘 그 여정을 제한하고 있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이 나라의 지리다.
(지리의 힘 2) 사헬
테러와 폭력의 악순환에 시달리는 갈등의 한복판에 있다
사헬이 해안이라면(사헬Sahel이라는 단어는 해안 또는 해변을 뜻하는 아랍어에서 나왔다), 사하라는 바다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해안에서 모래바다를 건너 또 다른 해안, 즉 유럽으로 가려고 한다. 그들은 지구상에서 가장 혼란스럽고, 가난하고, 열악한 환경을 떠나고 싶어 한다.
이 지역의 무력 분쟁과 급속한 기후변화가 초래한 이 같은 상황은 한층 더 악화되고 있다. 알카에다와 ISIS라는 맹금들이 자신들의 보다 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여러 다른 집단의 고통과 희생을 먹잇감으로 삼고 있다면, 이 지역을 근거지로 한 집단들은 세력을 더 키우기 위해 그들의 브랜드를 빌려오고 있다.
유엔 사무총장인 안토니우 구테흐스는 이런 경고를 한 바 있다. “우리는 폭력 앞에서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2020년에 사헬 지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폭력이 증가하는 곳이었다. 유엔은 그 테러 공격의 수위가 “유례없이 파괴적”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곳 사헬은 아프리카 대륙을 동서로 가로질러 홍해와 대서양까지 연결되는 장장 6천여 킬로미터에 달하는 경로를 형성하고 있다. 여기서는 낭만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팀북투(말리의 중부에 위치한 도시)나 카르툼(수단의 수도) 같은 큰 도시도 볼 수 있지만, 세계 시장으로 팔려가는 광물에 생계를 의지하는 작고 지저분하고 후미지고 파리가 들끓는 동네도 만날 수 있다.
사막, 낙타, 교역로 그리고 이슬람
대략 1만 5백 년 전, 갑자기 기나긴 우기가 시작되자 사하라 사막이 푸르른 사바나 지역으로 변하면서 현재의 사헬 지역까지 내려왔다. 사막 지역이 줄어들자 사냥과 채집을 할 수 있는 지역이 대폭 늘었다. 목축과 농법도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느닷없이 약 5천 년 전쯤 비가 뚝 그치더니 사막이 다시 돌아왔다. 따라서 왕년에 녹색 사하라였던 곳에 살던 많은 정착민들은 지중해의 습한 해안가를 찾아 북쪽으로 올라가거나 사헬의 마른 해안가가 있는 남쪽이나 더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2천 년 전에 출현한, 규모는 작지만 선구적인 낙타 행렬은 보다 긴 교역로를 열게 해 주었다. 낙타에 물품을 싣고 먼 곳을 다니는 대상 무역은 점점 몸집을 키우게 되는데 그 규모가 1만 2천 마리까지 헤아린 경우도 있었다고 하니 오늘날로 치면 해양을 떠다니는 초대형 유조선에 비할 만하겠다.
단봉낙타 한 마리는 말보다 4배나 많은 짐을 진 채 하루에 50킬로미터를 이동할 수 있다. 게다가 물 한 방울 마시지 않고도 2주 이상을 버틸 수 있다. 체중의 25퍼센트 정도까지 탈수를 견뎌내는 것이다. 또 발굽 사이의 거친 피부 덕분에 뜨거운 모래의 열기도 견딜 수 있다. 모래가 얼굴에 부딪히면 콧구멍을 닫을 수 있으며 흡사 바람막이 같은 기다란 속눈썹을 깜박거려서 먼지 조각을 씻어낸다.
이슬람이 사헬에 들어온 것은 8세기 초반이었다.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가는 교역 중심지들은 머지않아 세네갈강(아프리카 서부를 흐르는 강), 차드호 유역, 니제르 굴곡 등과 연결되었고 새로운 교역로들도 꾸준히 활성화됐다. 교역로들은 번영을 불러왔다. 덕분에 사헬 지역에서는 8세기에서 19세기까지 여러 제국과 왕국이 출현했다.
사람들은 포획한 노예들과 상아와 금 등을 낙타 행렬에 실어 팀북투(말리) 같은 무역항들에서 북쪽으로 날랐다. 노예들은 아랍국가로 팔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마라케시(모로코의 도시), 튀니스(튀니지의 수도), 카이로와 같은 북쪽 도시들에서 온갖 사치품이 들어와서 남쪽 제국들의 상류층에게 전해졌다. 사헬에는 당시에 귀했던 소금이 풍부하게 있었다. 오늘날에도 투아레그족이 거대한 소금판을 낙타등에 싣고 말리까지 나르는 여정을 하고 있다.
1400년대에는 유럽의 무역선들이 사헬에 여러 변화를 몰고 왔다. 이제 아프리카 노예 무역상들은 두 번째 시장과 교역로를 얻게 되었는데 그곳은 여자 노예보다 남자 노예에 대한 수요가 더 컸다. 또 금광에 손을 대는 사람들이 사업을 키우기 위해 자리를 잡았던 지역에 유럽인들은 잽싸게 황금해안(Gold Coast)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다. 이제 해안 지역과 내륙 일부도 유럽산 상품들에 직접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산과 강에 따라 국경을 나눴지만 그 산과 강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른다
1884년부터 이듬해까지 열린 저 악명 높은 베를린 회담에서 유럽의 열강들은 아프리카 지도에 멋대로 선을 그어 임의대로 대륙을 쪼갰다. 당시만 해도 유럽인들이 발을 들여놓지 않은 곳들도 있었지만 강대국들이 원한 것은 명확했다. 바로 영토와 부였다.
당시 영국 총리였던 솔즈베리 경은 몇 년 뒤에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우리는 산과 강과 호수들을 서로 나누었다. 유일하게 어려웠던 것은 그 산과 강과 호수들이 정확히 어디에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헬의 많은 지역은 프랑스의 지배 밑에 들어갔다. 현재로 보면 대략 말리, 니제르, 부르키나파소, 차드, 모리타니, 세네갈, 기니, 베냉, 코트디부아르 등이 해당될 것이다. 이전 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프랑스 지배하에 있던 알제리까지 뭉뚱그려서 ‘프랑스령 서아프리카’로 알려진 지역이었다. 이 지배는 아름답지 않았다(1898년 폴 불레와 쥘르엥 샤느완의 잔혹한 탐험 사건).
이 시기에 영국이라고 성인군자처럼 자비로웠던 것은 아니다. 영국 또한 이집트, 수단, 영국령 소말릴란드(Somaliland, 소말리아를 포함한 동아프리카 해안 지역)에서 힘을 굳히거나 세력을 넓혀가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리비아 대부분을 차지했고 스페인은 오늘날 서사하라 지역인 스페인령 사하라에 자리 잡았다.
1964년에 아프리카연합의 전신인 아프리카통일기구의 회원국 수장들은 지역의 안정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기존의 국경선을 고수하는 게 낫다는 데 마지못해 합의했다. 하지만 국경을 지도 위에 표시할 때는 잘 지켜지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기후변화, 지하디스트, 지역 내 식민지 이전의 분열주의 등이 결합하여 〈갈등의 시대〉를 만들면서 이 지역은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다.
국제 테러 단체의 지원을 받는 반군 세력(말리-투아그레족)
그 가장 적절한 예가 말리일 것이다. 말리의 국경은 1960년에 프랑스령 서아프리카에서 떨어져 나와 훗날 부르키나파소가 되는 오트볼타 국경과 거의 동시에 형성되었다. 그런데 말리 사람들은 특히 광물이 대규모로 매장돼 있을 것으로 추정된 동부 지역의 경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1974년에 전쟁이 벌어졌고 1982년에도 다시 벌어졌다.
말리에는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 구분되는 두 개의 지역이 있는데 대체로 나이저강을 중심으로 나뉜 남쪽 지역과 북쪽 지역이 그에 해당한다. 개략적으로 말하면, 북쪽이 훨씬 건조한데 특히 사하라 사막이 시작되는 지점과 근접한 지역이 그렇다. 그곳은 북아프리카 베르베르족의 한 분파인 투아레그족과 전통적으로 알제리, 니제르, 모리타니와 연계된 유목민들이 지배하는 땅이다. 가장 큰 도시는 가오와 팀북투인데 두 곳 모두 나이저 강가에 있다.
독립을 이룬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말리의 많은 엘리트들은 여전히 ‘타인’을 ‘우리’로 받아들이길 꺼린다. 새 정권이 들어서면 항상 훨씬 흰 피부를 가진 북쪽의 투아레그족 분파들을 탄압하려고 한다. 그런데 유목민이 다수를 차지하는 투아레그족은 자신들이 인정하지 않는 나라로 일거에 내던져진 것에 분개하고 있다. 1960년에 최초 봉기가 일어났고, 이제 투아레그족 운동은 '아자와드'라 부르는 독립국가를 창설하자는 데까지 이르렀다.
2012년 아자와드민족해방운동이라는 단체 소속의 투아레그족 전사들이 말리를 상대로 반정부 투쟁을 개시했다. 이제 그들은 국제 테러 단체들의 지원을 받는다. 알카에다와 연계된 무장 테러 단체인 안사르 다인과 알제리 중심의 서아프리카통일지하드운동과 손을 잡은 것이다. 이 단체 모두 이슬람 마그레브 알카에다(AQIM, 2007년 알제리에서 결성된 알카에다 조직)와 연계되어 있다.
금세기 초반 10년 동안 말리 출신 투아레그족 수천 명이 리비아군에 자원했다. 그러다 2011년에 카다피 정권이 붕괴하자 그의 투아레그족 용병들은 이슬람 부대에서 약탈한 중화기들을 지닌 채 귀환했다. 돌아온 전사들은 팀북투를 비롯한 북부 도시들을 습격해서 프랑스 땅보다 넓은 영토를 장악했다.
333명의 성인들의 도시이자 성지 순례와 교육의 도시로 알려진 팀북투를 장악한 이슬람주의자들은 주민들이 이제껏 겪어보지 못한 엄격한 이슬람법을 강요했다. 심지어 15세기에 지어진 시디 야흐야 모스크의 정문도 떼어내 버렸다. 세상이 끝날 때까지 그 문은 닫혀 있을 거라는 전설이 반이슬람적인 우상 숭배라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코로나 팬데믹에도 내전은 계속된다
프랑스 정부는 이 지역을 주도하는 세력으로서 안전과 이주민, 원자력을 포함한 경제적 이해관계가 위협받는다면 마냥 지켜볼 수만은 없을 것이다. 금세기 들어 프랑스는 10여 건의 테러 공격으로 고통을 받았는데 범인들 가운데 다수는 이중 시민권을 가지고 과거 식민지에서 프랑스로 쉽게 들어올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2013년경 지하디스트들이 말리의 수도 바마코로 접근하자 곧바로 프랑스 전투기들이 출격했고 특수부대도 신속하게 움직였다. 그러자 지하디스트들은 북쪽으로 퇴각했고 뒤이어 말리 정부의 요청으로 작전명 서발(Serval, 아프리카 살쾡이)이 개시됐다. 그들은 단시간 내에 반군을 진압했지만 반군 병사들은 죽거나 흩어져 버린 것이지 괴멸된 것은 아니었다.
2013년 5월, 이웃한 니제르에서 〈피로써 서명한 이들〉이라는 이름을 내건 새로운 단체와 관련된 테러 공격이 발생했다. 이들을 이끈 자는 AQIM 지휘관 출신인 모크타르 벨모크타르였다. 나중에 그는 자기 휘하의 그룹과 또 다른 그룹을 합쳐서 알무라비툰이라는 단체를 결성한다.
2014년 무렵까지 대략 4천5백 명의 프랑스군이 이 작전에 동원됐다. 이 작전은 나중에 사하라 모래지역의 초승달 모양의 둔덕을 뜻하는 바르칸 작전으로 그 이름이 변경된다. 바르칸은 장기적인 군사 개입을 목표로 구상되었으며 작전 지역도 말리는 물론 부르키나파소, 차드, 모리타니, 니제르까지 확대된다.
2014년 무렵부터 반군은 말리 북부에서 작전을 재개했고 2015년경에는 중부 지역까지 전선을 확대했다. 그 이듬해가 되자 그들은 니제르 서부와 부르키나파소까지 활동 반경을 넓혔다. 2018년에는 북아프리카와 아프리카의 뿔(에티오피아, 소말리아, 지부티가 자리 잡고 있는 아프리카 북동부 지역)의 지하디스트 단체들과도 접촉하며 나이지리아의 보코하람(2002년 결성된 나이지리아의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 조직)과도 연계하기에 이른다.
2019년 12월에 최악의 사태가 발생했다. 니제르에 있는 군기지에 대한 공격으로 71명의 군인이 사망했다. 이듬해인 2020년 1월에는 또다시 89명이 사망했고 3월 말, 그러니까 세계의 관심이 온통 코로나 팬데믹에 쏠려 있을 때 보코하람이 차드호 부근에 있는 차드군 야영지에 매복 공격을 가했다. 7시간의 전투 끝에 보코하람은 적어도 92명의 중무장한 정부군을 사살했다. 이는 차드군이 당한 가장 처참한 패배였다.
이러한 상황에 자극받은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020년 1월에 개최된 회담에서 국제적 관심을 호소했다. 사헬 지역의 남쪽 국가들이 붕괴돼서 수백만 명의 난민들이 유럽으로 몰려오는 것을 막으려면 이 지역이 EU의 새로운 방어 전략에 포함돼야 한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초기에 마크롱은 큰 지원을 얻지 못했지만, 결국 유엔 임무단, 즉 말리 주둔 다차원통합안정화임무단(MINUSMA)이 2013년에 시행되었는데 2백 명의 평화 유지군이 목숨을 잃은 전 세계에서 사상률이 가장 높은 임무였다. 마크롱 대통령은 알제리가 이 전쟁터에 잘 조직된 그 나라 민중 국민군대를 투입해 주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지만, 식민지 역사를 감안하건대 알제리가 자국의 부대가 실질적으로 프랑스의 명령을 받는 상황을 달가워할 리가 없다.
강대국의 눈치와 부족 갈등 사이에서
현재도 현지 및 외국을 망라해서 군대를 비롯한 각종 조직들이 이 지역의 안정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다. 2017년에 프랑스, 독일, EU, 유엔개발계획, 세계은행, 아프리카개발은행이 주축이 돼 '사헬연맹'이 결성됐는데 이후 영국, 이탈리아, 스페인 등도 가세했다.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도 이란을 견제하기 위해 지역 개발 계획에 자금을 투입했다. 국제 사회에서는 특히 MINUSMA, 말리 주재 유럽연합기술지원단, 그리고 사헬 G5 등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현지 주민들의 꾸준한 지지를 얻는 것도 중요하다. 열강들의 여타 활동들을 신식민주의 계획으로 보고 못마땅해하는 분파들도 있다. 2020년 마크롱 주재 정상회담이 열리기 직전에 말리인 수백 명은 바마코에서 반프랑스 시위를 벌이면서 프랑스 국기를 불태우기도 했다.
사실 사헬 국가들의 입장도 난처하다. 책임을 지는 자세뿐 아니라 강대국의 의견을 무시하지 않는 모습도 자주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부족들 간 해묵은 긴장도 다뤄야 한다. 일부 나라들에서는 정부 보안군이 특정 부족의 민간인들을 대량 학살한다는 비난이 일었다.
대테러 작전의 대부분은 프랑스와 미국이 담당하고 있다. 프랑스는 주로 말리와 사헬 서부 지역을, 미국은 차드 호수 연안에 힘을 집중하고 있지만 합동 작전을 수행하거나 정보를 공유하기도 한다.
프랑스와 미국은 드론을 투입하거나 특수부대 작전을 광범위하게 펼치고, 지역의 현지 부대들과 공동으로 반군 단체들의 활동을 저지하고, 국경을 넘어 무기를 들여오는 것을 막는 작전 등을 펼치고 있다.
가장 가난한 나라의 가장 가난한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항 운동
니제르는 미국은 물론 프랑스에게도 핵심적인 전략적 가치가 된다. 사헬 중심부에 떡하니 들어앉아 있는 이 나라는 문제 많고 탈 많은 북아프리카 국가들과 나이지리아의 보코하람뿐 아니라 접경한 7개 나라에 흩어져 있는 여러 이슬람 무장단체들을 감시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고 있다.
니제르는 이슬람주의자들의 테러에 시달리고 있는 나이지리아, 부르키나파소, 말리, 알제리, 리비아, 차드에 에워싸여 있다. 니제르는 서구 세력을 반겼으며 사헬 G5 가운데 지역 협력 활동을 가장 활발히 펼치고 있는 나라라 할 수 있다.
군대와 경찰에 적절히 예산을 사용하고 있으며 한정적이나마 소수 민족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는 데도 자원을 쏟고 있다. 이들 가운데 풀라니족이 있다. 풀라니족도 나라가 없는 민족이다. 적어도 2천3백만 명 정도가 사헬, 서아프리카, 그리고 저 멀리 남쪽의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까지 흩어져 살고 있다.
부족 대다수가 유목생활을 했지만 오래전에는 풀라니 제국들이 존재했다. 이들은 늘 이 지역을 자신들이 호령하는 하나의 전체로 보았지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할 때마다 종잇조각을 보여줘야 하는 나눠진 국가들로 보지 않았다. 자신들이 이 지역을 지배했다는 사실은 그들의 집단기억 속에 깊이 각인돼 있다.
게다가 그들이 세운 마시나 제국(Macina Empire, 1818-1862년)은 영광스러운 황금시대를 구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이슬람을 받아들인 최초의 아프리카인들 가운데 하나였다. 마시나 제국이 건국되기 전에 풀라니족은 다른 제국들의 속국으로 지냈는데 이들은 이 사실을 절대 잊지 않는다.
하지만 반대로 다른 정착민 공동체들의 집단기억 속에서 풀라니족은 매우 호전적인 사람들로, 힘이 있을 때 다른 이들을 노예로 부렸다는 사실로 각인돼 있다. 풀라니족에게서 지하디즘이 부상하는 현상을 그들의 제국을 다시 세우고 기독교도들을 강제로 개종시키려는 의도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2012년 말리에서는 프랑스가 주도하던 공세가 수그러들자 마시나해방전선이라는 단체가 등장했다. 말리의 한 도시 이름을 딴 이 단체의 수장은 50대의 종교 교사인 아마두 쿠파였다. 중동의 수니파 무슬림들 사이에 단단히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살라피스트(Salafist), 즉 〈가장 순수한 이슬람 해석을 따르는 신자〉들로 여긴다. AQIM에게 아마두 쿠파는 굴러들어온 호박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AQIM은 그들이 자신들과 연계된 것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국내파 운동처럼 보이게 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풀라니족이야말로 이런 의도에 딱 들어맞았다.
2018년 말, 말리 당국은 프랑스군 공습으로 아마두 쿠파가 사망했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이듬해인 2019년 3월, 쿠파는 한 영상에 등장해서 자신이 죽었다는 보도는 극히 과장된 것이라고 말했다. 약해빠진 국가와 불의에 대한 인식이 풀라니족 주민들을 무장단체에 가담케 했다.
기후변화, 사막화, 폭력의 악순환
최근 들어 갈등 양상은 풀라니족 거주 국경지대를 넘어 부르키나파소, 니제르, 나이지리아 일부 등 사헬의 다른 지역에까지 퍼져나가는 추세다. 폭력사태가 벌어질 때마다 따라다니는 주제들이 있다. 일단 가뭄으로 땅이 말라서 소나 양을 치기 어려워지면 유목민들은 새로운 도시나 시골을 찾아 들어온다. 여기서 그들은 〈외부인〉으로 취급받고 그 지역 농민들과 이해가 충돌하면서 여기저기서 폭력사태가 발생한다.
20세기 후반에 전 세계 어디서도 이런 최악의 경험을 한 곳은 없었다. 유엔식량농업기구에 따르면 이 지역 전체에서 3천만 명이 식량 불안 상황에, 1천만 명가량이 기아의 위험에 처해 있다고 한다. 비가 오더라도 거세게 퍼붓는다면 가뜩이나 얇아진 표층의 흙은 거의 쓸려나갈 것이다. 게다가 지구온난화 때문에 땅 위의 물은 한층 빨리 증발해 버릴 것이다.
이 지역의 17개국 모임은 향후 10년 동안 기후변화에 대응해서 4천억 달러를 투입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이 자금의 대부분은 해외 원조에서 나온다. 그레이트 그린 월(Great Green Wall)이라는 대규모 나무 심기 프로젝트도 진행되고 있다. 2007년부터 시작된 이 작업은 사헬의 해안선을 따라 길이 8천 킬로미터 너비 16킬로미터의 녹색 장벽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런데 이 프로젝트는 이내 난관에 부딪혔다. 모든 자금이 마련된 것도 아니었고 장벽 대부분이 사람이 살지 않는 지역이다 보니 묘목을 돌보지 못해 결국 대부분의 나무가 죽고 말았다. 하지만 이 계획에서 진전을 이룬 부분도 있었다. 더 큰 문제는 사하라 사막이 남쪽으로 내려가는 게 아니라 사헬 지역에서 수십 년간 땅을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부각된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이 지역 전체를 푸르게 하는 쪽으로 진행 중이다.
풍부한 자원, 테러리스트들의 돈줄
아프리카는 지구상에서 가장 빠른 인구 통계학적 변화가 진행되는 곳이다. 지금부터 2050년까지 이 대륙의 인구는 12억 명에서 24억 명으로 곱절이 늘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사헬이라고 다르지 않다. 니제르의 경우 그 기간에 2,330만 명인 인구가 6,550만 명까지 늘 것으로 예상된다.
보건과 성교육이 현재의 열악한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있겠지만 한정된 정부 예산으로는 그 수요를 감당키 어렵다. 하지만 주변에 돈이 아예 없는 건 아니다. 선진국들만큼 대규모는 아니겠지만 보다 공평하고 투명하게 분배될 수는 있다.
지구상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이 알고 보면 천연자원 측면에서는 엄청난 부자다. 니제르에는 우라늄과 원유와 인산염이, 모리타니에는 철광석과 구리가, 차드에는 석유와 우라늄이, 부르키나파소와 말리에는 금광이 있다. 하지만 그 나라 모두에는 통치 구조와 부정부패, 불투명한 자금 운용, 산업의 경제적 모델에 대한 우려(원자재 가공을 직접 하지 못하고 현지의 다국적 광산 기업에 대한 세금에 의존한다) 또한 있다.
니제르는 세계 4위의 우라늄 생산국이지만 정부는 프랑스 국영기업인 아레바와 여전히 불평등한 계약에 매여 있다. 그들은 알제리 국경에 인접한 아를리트에 광산 두 곳을 소유하고 있는데, 이 두 광산 가운데 한 곳이 앞서 언급한 2013년의 테러 공격의 목표가 되었다. 그러자 정부 통제 하에 보안조치가 강화됐다.
그런데 부르키나파소의 금광은 늘 이런 사례에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2009년에 금은 면화를 누르고 부르키나파소의 가장 주요한 수출품목이 되었다. 덕분에 이 나라는 아프리카에서 4번째로 큰 금속 생산국이 되었고 이 점이 이슬람 무장단체들의 관심을 끌었다.
2018년에 부르키나파소 정부 관리들이 지하디스트들이 운영하는 24곳의 광산을 방문했다. 정부는 매년 채굴된 금의 가치가 3천4백만 달러 정도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적은 비율만 점검했지만 이 광산들에서 거둬들인 세금만으로도 지하디스트들은 충분히 다량의 무기를 구입하고 조직원을 모집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는 국가에 도전만 하지 않는다면 지역 무장단체들이 광산을 장악하고 비공식적인 경찰력이 되는 것을 아예 용인해 준다. 하지만 뇌물 수수죄, 고문에 의한 자백과 투옥들이 일상적으로 벌어지고 있다.
중국, 사헬에 견고한 대국을 건설하다
상황을 더 꼬이게 하는 또 다른 자원은 희토류다. 희토류는 지표면 밑에 있는 17개의 원소를 총칭하는데 탁월한 내열성과 자성 및 인광성이라는 특징을 지니고 있는 이 광물을 찾아내서 채취하는 것은 쉽지 않다. 세계 모든 강국의 기술과 방위 산업의 핵심 부품에서 이것들이 사용되지 않은 예가 없다.
아직은 사헬에 이 광물들이 풍부하게 매장돼 있다고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보고 있다. 그것들이 어디에서 발견되든지 간에 중국은 희토류 매장량 대부분을 자신들이 통제하려 할 것이며 다른 측은 그 통제력을 차단할 궁리를 할 것이다.
중국은 전 세계 희토류 매장량의 30퍼센트가량을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해외에서 계속 희토류를 사들이는 중이다. 중국은 다른 어느 나라보다 많은 희토류 가공시설을 보유하고 있으며 다른 나라들에 희토류를 이용한 생산품을 팔고 있다.
수십 년 동안 중국이 추구해 온 이른바 '힘을 숨기고 때를 기다리는' 정책은 이곳에서는 견고한 대국을 건설하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사헬 지역에 자신들의 군사력을 증강하는 것도 이 과정의 일환이다.
중국 기업들은 기니와 세네갈의 항만들과 말리의 내륙 지역을 연결하는 철도를 개설하느라 바쁘다. 이 현장에는 수십만 명의 중국인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만약 사헬 지역에 희토류가 매장되어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 이것은 저주가 될까 축복이 될까? 현재까지의 사례로는 그리 낙관만 할 수는 없다.
발을 빼고 싶은 미국, 발을 넣을 기회만 기다리는 중국과 러시아와
외부 세력은 사헬에 과연 얼마나 많은 시간을, 피를, 재원을 쏟아부을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일까? 일단 미국은 발을 빼고 싶어 한다. 이는 프랑스군 장교들과 외교관들을 잠 못 이루게 할 것이다. 만약 미국이 병력을 줄인다면 프랑스와 다른 유럽 국가들은 어려운 선택을 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 병력을 증강하든가, 현 수준을 고수하든가, 아니면 아예 본국으로 돌아가든가.
사헬의 G5 국가들은 프랑스군과 다른 외국 군대가 그대로 머물러 있어 주기를 바란다. 폭력사태가 자기들 쪽으로 번지는 것을 바라지 않는 서아프리카 해안 국가들도 같은 입장이다. 만약 프랑스나 유럽 국가들이 손을 뗀다면 중국이나 러시아가 그 기회를 엿볼 것이다. 말리와 차드 같은 나라들은 이념적으로 유럽이나 미국과 결혼한 사이는 아니다.
지역적 차원에서 스페인, 이탈리아, 프랑스는 사헬 지역 사태로 그들의 국내 정치가 영향을 받을 수 있음을 알고 있다. 1백만 명에 이르는 난민과 이주민이 유럽으로 몰려왔던 2015년 이후에 이들 나라에서는 정치적 대립이 심화되었고 극단주의 성향의 정치 세력 목소리가 더욱 커지는 것이 목격되었다.
지금까지의 사헬 지역의 정부들은 능력이 안 되었거나 또는 자비심 부족으로 부족들 간에 전면적이고 공평한 협상을 통해서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우려는 의조조차 보이지 않았다. 정부의 엘리트와 기업들은 자신들과 그 부족의 이득에만 신경을 쓰고 있다. 민족성이라는 지리가 국경선보다 훨씬 강하게 작용하는 것이다.
외국 세력이든 지역 세력이든 그곳에 주둔하는 한 그 충돌 상황에서 빠져나오기 어려워진다. 이런 상황에서 지하디스트들은 국가를 무너뜨리려고 무력을 행사할 것이다. 지난 수년간 사헬에서는 많은 것들이 변했다. 그럼에도 이곳은 여전히 타협이 어려운 곳으로 남아 있다.
<6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