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레일리아, 북극, 우주
오스트레일리아
지리적 위치와 면적이 강점이자 약점이 된다
“혼신의 힘을 다해 거칠게 경기하라. 아예 상대를 갈아서 먼지로 만들어 버려라.”
- 돈 브래드먼(오스트레일리아 크리켓 선수)
오스트레일리아는 '아무데도 아닌 곳'의 한복판에 있다가, 매우 중요한 어딘가가 되더니, 이제는 중심 무대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렇다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이른바 〈다운 언더(down under)〉(유럽에서 보면 아래쪽에 있다는 의미로 여기서는 오스트레일리아를 뜻함)라는 땅은 섬이다. 하지만 보통 섬이 아니다. 이 섬은 무엇보다 엄청나게 크다. 얼마나 큰지 무성한 아열대 우림지대와 타는 듯이 뜨거운 사막지대, 완만한 사바나 지대와 눈 덮인 산맥까지 품고 있을 정도다.
아무데도 아닌 곳의 중심에 있다 보니 브리즈번에서 태평양 너머 북동쪽을 바라보면 미국은 1만 1천5백 킬로미터, 남아메리카는 동쪽으로 1만 3천 킬로미터 떨어져 있고, 아프리카는 퍼스에서 서쪽으로 인도양을 8천 킬로미터나 건너야 도달한다.
하지만 지정학적인 측면에서 진목면을 보려면 북쪽을 바라봐야 한다. 그 위에는 바로 지구상에서 군사적, 경제적으로 가장 강력한 독재 국가라 할 중국이 있다. 이 모두를 종합해 볼 때 하나의 국가이면서 대륙이기도 한 오스트레일리아를 인도-태평양 지역의 중심에 위치한 21세기 경제 강국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이야기는 영국이 죄수들을 되도록 멀리 떨어진 곳으로 추방해서 이들과 모든 관계를 끊어 버리겠다는 결정을 내린 것에서 시작한다. 이 장을 시작할 때 인용한 오스트레일리아 크리켓 영웅 돈 브래드먼의 말은 〈지리로 다져진〉 이 나라 국민 기저에 뿌리내리고 있는 심리의 표현이기도 하다.
흔히 평등주의, 직설적 화법, 단순명료함, 불굴의 투지 등으로 표현되는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의 특성은 광활하지만 타는 듯이 뜨거운 땅, 많은 곳이 사람이 살 수 없는 악조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 사실상 단일 문화라 할 수 있었던 이곳이 지구상에서 최고로 다양한 문화를 가진 현대 사회로 번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제 오스트레일리아는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그런데 이 고민이 외교 정책과 국방 문제에 이르렀을 때 이 나라의 출발점은 "무엇을 〈하고 싶은가〉"가 아니라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가 된다. 그리고 이것은 자주 그러했듯 지리적 조건의 제약을 받는다. 오스트레일리아에게 그 나라의 면적과 위치는 강점이자 약점이 된다.
세계에서 6번째로 큰 나라, 그러나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3분의 1도 안 되는
면적이 족히 7억 7,412만 2천 헥타르에 달하는 오스트레일리아는 세계에서 6번째로 국토가 넓은 나라다. 가장 큰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주는 이 대륙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퀸즐랜드,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뉴사우스웨일스, 빅토리아, 태즈메이니아섬 순이다.
국토의 70퍼센트를 차지하는 대부분은 이른바 아웃백(Outback)이라 알려진, 사람이 살 수 없는 지역이다. 게다가 내륙의 대평원과 사막의 여름 기온은 대체로 38도에 육박하는 데다 물조차 귀하고 피난처도 없어서 그 광활하고 먼 곳에서 조난을 당한다면 도움의 손길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1848년에는 독일의 지리학자이자 탐험가인 루드비히 라이히하르트(1813~1848)가 이끄는 탐사팀이 대륙의 동쪽 끝(브리즈번)에서 서쪽 끝(퍼스)까지 내륙으로 횡단을 시도하다가(1845년에는 브리즈번에서 북쪽 포트에싱턴까지 탐사 성공) 실종되기도 했다. 오늘날에도 그의 자취를 찾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원주민들이 아웃백에서 워크어바웃(walkabout, 아웃백에서 혼자 지내도록 하는 일종의 통과의례) 의식을 치르던 시절에 유럽에서 온 정착민들은 주로 해안 쪽으로 모였다. 인구 분포는 동부 해안의 중간 지점에 있는 브리즈번에서 시작해서 초승달 형태를 띠고 있다.
즉 시드니, 캔버라, 멜버른을 거쳐 남쪽 해안의 애들레이드로 내려가면서 해안을 빙 두르고 있는 모습이다. 이 나라 인구의 거의 50퍼센트가 시드니, 멜버른, 브리즈번 등 3대 도시에 몰려 살고 있다. 이들 도시가 머리-달링(Murray-Darling) 강 유역에 위치한 것도 우연은 아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알프스(Australian Alps, 오스트레일리아 그레이트디바이딩 산맥의 남단을 이루는 산맥)의 눈이 녹아 형성된 머리강은 끊어지지 않고 남부 해안까지 내리 2천5백 킬로미터를 달릴 만큼 충분한 수량을 보유하고 있다.
그중 일부 구간은 선박도 다닐 수 있어서 머리-달링 강은 이 나라에게는 왕관에 박힌 보석과도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머리-달링 수계는 여러 세대에 걸쳐 이곳 사람들을 먹여 살리고 물을 대어준 비옥한 땅을 품고 있다. 그것이 없었다면 초기 정착민들은 아예 해안지대를 벗어나는 건 꿈도 못 꾸었을 것이다.
미국의 경우 처음 비옥한 동부 해안에 정착한 뒤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자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수계인 미시시피아 강 유역에 위치한 매우 비옥한 지역을 만나게 되면서 더욱더 확장해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오스트레일리아에는 운송, 농업, 영구적인 정착을 뒷받침할 장치가 전무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국제 무역 시스템에서도 미국에 비해 한층 고립된 처지였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영국까지도 1만 9천 킬로미터를 가야 하는데, 나중에 미합중국이 되는 13개의 식민지는 유럽에서 5천 킬로미터만 떨어져 있을 뿐이었다.
미지의 남쪽 땅을 노린 낯선 이방인들, 그리고 그들에게 자신들의 땅을 빼앗기는 사람들
흔히 잘못 알려진 사실은 1770년에 영국의 쿡 선장이 이 대륙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발견이라는 문제 많은 단어를 제쳐두면, 기록으로 남겨진 최초의 상륙은 1606년 네덜란드인 빌럼 얀스존과 그의 선원들이 두이프겐호를 타고 이 대륙의 북쪽 해안에 발을 디딘 것이다.
쿡 선장의 출현으로 전설로만 여겨지던 이른바 테라 아우스트랄리스 인코그니타(terra australis incognita)가 제대로 발견된 것은 분명하다. 〈미지의 남쪽 땅〉이라는 뜻을 가진 이 말은 서기 150년경 그리스의 천문학자이자 지리학자인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의 발상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그는 지구가 둥그렇다면 그 꼭대기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땅(유럽)이 있고 지구가 넘어지지 않으려면 그 아래를 다른 (무거운) 따이 받쳐주고 있어야 한다고 추론했다. 일부 일리가 있긴 하다. 유럽에서 보면 오스트레일리아는 여전히 <아랫쪽(down under)>에 있으니 말이다.
쿡은 이 대륙의 동쪽 해안에 상륙한 최초의 유럽인이 되었다. 그는 현재 시드니의 일부인 보터니만으로 가서 7일 동안 머물렀다. 이것은 역사적인 일이었고 뒤따라올 사건들의 전조가 되었다.
1787년 5월 13일, 마침내 최초의 수인 선단이 영국의 항구 도시 포츠머스에서 새로운 대륙을 향해 출발했다. 그리고 1788년 1월 24일, 선단은 보터니만에 닻을 내렸다. 11척의 배에는 1천5백 명이 타고 있었는데 570명의 남자와 160명의 여자로 이뤄진 730명의 기결수들을 제외한 나머지는 주로 영국 해군 관계자들이었다.
당시 이 땅의 전체 인구는 대략 25만 명에서 50만 명 사이였을 거라고 하는데, 시드니 주변으로 정착촌이 자리 잡자 멜버른, 브리즈번, 태즈메이니아 등지의 정착촌도 성장해 갔고, 훗날 소위 '개척전쟁'(Frontier Wars, 1788–1934년)으로 불린 영토 전쟁으로 적어도 원주민 수만 명은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10년부터 학살에서 살아남은 원주민 가운데 아이들은 가족과 떨어진 채 백인 가정이나 국가 시설에 맡겨졌다. 두 경우 모두 강제적인 흡수와 동화가 그 목적이었다(실제로는 노예처럼 부려졌다고 한다). 이 정책은 197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중단됐는데 그때까지 이렇게 강제로 맡겨진 아이들, 소위 〈도둑맞은 세대〉가 10만 명 이상을 헤아렸다.
원주민들이 총선 투표권을 얻은 건 1962년인데 정식으로 오스트레일리아 국민으로 인정받은 것은 그보다 5년 뒤인 1967년에 이르러서였다. 정부는 국민투표를 통해 그들을 인구 조사에 편입시키고 국가 자원에 그들이 더 많이 접근하도록 헌법을 개정했다.
최근 원주민들에 대한 태도도 일부 의미심장한 움직임들로 인해 차츰 변하는 분위기다. 에어즈락(Ayers rocks)이라고 알려진 녹빛 바위산의 명칭이 1990년대에 에어즈록/울룰루(Uluru)로 바뀌었다가 2002년에는 아예 울룰루/에어즈락으로 바뀌었다. 이곳을 성스럽게 여겼던 아난구족이 원래 부르던 이름을 인정한 것이다.
2008년에는 2백 년이 넘는 대대적인 파괴, 탄압과 방치에 대한 책임을 통감한다면서 원주민들을 고통으로 몰아넣었던 잔학 행위에 대해 케빈 러드 총리가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
유색 인종은 거부하는 백호주의 정책
1825년경에 몇몇 탐험가들은 건너기 불가능한 장벽이라 여겨지던 시드니 서쪽의 블루 마운틴 산맥을 돌파하고 그 너머에 광활한 아웃백이 펼쳐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인구는 5만여 명 정도였는데 1851년에는 45만 명으로까지 늘었다.
그즈음부터 죄수들의 수는 뚝 떨어진 것에 반해 신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찾고 싶었던 이민자들의 수가 늘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 대륙에 초기 골드러시 광풍이 불기 시작하던 때에 들어왔다. 대다수는 영국에서 왔지만 중국이나 북아메리카, 이탈리아, 독일, 폴란드를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들어왔다.
이 황금 세대 덕분에 1870년대 초반에 인구는 170만 명으로 폭발했을 뿐 아니라 점차 민족학적으로나 문화적으로 훨씬 풍부한 다양성을 띠게 됐다. 흔히 재기발랄함, 할 수 있다는 자신감, 친밀감 등으로 알려진 오스트레일리아인의 기질을 만든 이들은 다른 누구보다 젊은 금 채굴자들이라는 이론이 있다.
1899년 연방 형태로 여러 지역을 묶는 내용에 대한 국민투표가 시행되었고 적지 않은 반대 속에서도 통과되었다. 이듬해인 1900년 7월 5일 영국 의회는 오스트레일리아 연방 헌법을 통과시켰고 나흘 뒤에 빅토리아 여왕이 서명했다.
그즈음 인구는 3백만 명을 넘어서면서 이른바 도시 사회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시드니와 멜버른의 인구도 저마다 50만 명을 바라보게 되었다. 여전히 대다수 이민자는 영국에서 왔는데 다른 나라에서 왔다 해도 거의 백인들이라고 보면 됐다.
새 정부가 초기에 통과시켰던 법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소위 〈백호주의 정책(White Australia Policy)〉(1901년부터 1978년까지 지속되었던, 백인 이외 여러 유색 인종의 이민을 배척하던 백인 우선주의 정책)으로 알려진 이민 제한법이었다.
당시의 정계나 일반 국민들의 지배적인 정서는 경계 없는 벌판은 백인들, 특히 영국 출신의 백인들이랑 나누자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법은 대개 중국인, 일본인, 인도네시아인들과 저임금 노동자들뿐 아니라 오스트레일리아의 인종적 순수성을 해칠 수 있는 다른 이웃 나라 출신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다문화 국가 현대 오스트레일리아의 탄생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이른바 10파운드 이민(Ten Pound Poms) 정책을 통해 많은 영국인들이 이 나라로 몰려왔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여전히 노동력이 부족했던 터라 당시 돈으로 10파운드만 내면 영국인들은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오스트레일리아행 배에 올라탈 수 있었다. 정상 요금은 120파운드, 즉 보통 노동자들의 6개월치 급여와 맞먹었다.
전후 침울한 분위기 속에서 엄격한 계급사회였던 영국으로서는 이 제안을 거절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배경에서 1947년부터 1982년 사이에 150만 명이 넘는 영국인들이 기회와 태양빛을 찾아 새로운 대륙 오스트레일리아로 향했다.
이곳에서는 그들과 그 외 이주민들을 폼스(poms)라고 한다. 이는 오스트레일리아 속어인데, 이민을 뜻하는 immigrant라는 단어와 발음이 비슷해서 가끔 pommygrant라고도 쓰는 pomegranate(석류)의 축약어라고 한다.
1900년대 후반부터는 이탈리아, 독일, 그리스 등에서 온 이주민들이, 1956년의 혁명에서 피신해온 헝가리인들이, 이어 1968년의 소련 침공 이후에는 체코인들이, 그리고 남아메리카와 중동 지역에서는 주로 정치적 박해를 피해 이곳을 찾는 이들이 많았다. 1970년대에는 수천 명의 베트남 보트피플이 들어올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1990년대에는 유고 내전 난민들도 들어왔다.
이는 결과적으로 본래 브리티시 또는 앵글로-켈틱 사회가 다문화 국가로 변모되는 뚜렷한 문화적 변화를 불러왔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190개 국가의 유산을 지닌 국민들이 만든 현대 오스트레일리아로의 급속한 변화였다. 2016년 인구 조사에서 이 나라로 이민 온 인구 비중이 26퍼센트를 차지했다.
너무 인기가 많다 보니 어떻게 해서라도 이 나라로 가고 싶은 이들에게 때론 좌절을 안겨주기도 한다. 금세기에 들어서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불법 이민자들에게 철퇴를 가하는 가혹한 법들을 잇달아 제정했다.
2001년, 오스트레일리아 해군은 난민이나 불법 이주자들이 타고 온 배들을 단속하기 시작했다. 그 선박들은 되돌려 보내지거나 제3국으로 방향을 틀기도 했다. 또 상륙이 허가되는 경우에도 멀리 떨어진 나우루와 마누스의 섬들로 옮겨졌다.
풍부한 천연자원, 하지만 부족한 물과 기후변화
그들이 이렇게 오는 이유는 대다수에게 현대 오스트레일리아가 여전히 〈행운의 나라lucky country〉이기 때문일 것이다. 원래 1964년에 도널드 혼이 동명의 책에서 처음 사용한 것으로 알려진 이 말은 애초에는 약간 비꼬는 의도가 있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긍정적이고 일리 있는 표현으로 고착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곳 중 하나이며 앞으로도 그 지위를 유지할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 땅에는 전 세계에 내다 팔기 좋은 천연자원이 풍부하게 있다. 양모, 양, 육류, 밀, 그리고 와인 산업은 세계에서 선두를 유지하고 있으며, 우라늄은 전 세계 매장량의 4분의 1을 차지하며, 아연과 납은 세계 최대 매장량을 보유하고 있다. 또 텅스텐과 금의 주요 생산국이며, 은과 석탄도 만만치 않은 매장량을 자랑하고 있다.
현재 오스트레일리아는 화석 연료가 촉발한 기후변화를 여실히 느끼고 있는 중이다. 기록적인 고온과 물 부족으로 2019년과 2020년에 이 나라를 휩쓴 산불의 주요 원인은 지구온난화였다. 2020년 1월 4일 시드니는 세계에서 가장 더운 곳 중 하나가 되었다. 당시 시드니 기온은 섭씨 48.9도라는 어마어마한 고온을 기록했다.
사정이 이러하니 사람들은 계속 해안가를 고수할 가능성이 높고 해수면 상승에도 불구하고 도시로의 집중은 점점 심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일부 지역은 해안에서 조금씩 뒤로 물러나게 해야 하며 위험도가 낮은 지역에 장기적인 건설 계획을 세우는 등의 대처가 필요하다.
오스트레일리아에는 잠재적 에너지원인 태양광은 풍부하지만 부족한 것이 있다. 바로 물이다. 강물이 흐르는 곳의 지형이 대개는 평평하고 유량도 일정치 않다 보니 수력 발전에는 적합하지 않다. 그나마 테즈메이아니 지역이 예외이지만, 물 부족은 어쩌면 가장 최우선적인 문제가 될 수도 있는 사안이다.
이 논의에는 석탄도 포함될 것이다. 웬만한 주마다 석탄 광산이 있고 수만 명을 고용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하건대 오스트레일리아가 이 696억 달러짜리 석탄 산업을 조정하는 일은 녹록치 않을 것이다. 에너지에 대한 접근은 이 나라의 위치와 지리를 감안할 때 곧 안보 이슈와 직결되는 중요한 사안이다.
해상 봉쇄에 속수무책이 되는 나라
현대의 오스트레일리아는 경제적으로 그 지리적 위치와 더 밀접하게 연결돼 가고 있다. 이 나라 정치인들은 자국이 아시아 태평양 공동체의 일부라고 공공연히 주장하고 있지만 그 공동체가 그렇게 여길지는 의문이다. 가까운 이웃 국가한테는 서구의 옛 식민지이자 동맹인 이 강대국이 존경은 받지만 사랑을 받고 있지는 않다.
전략적으로 오스트레일리아가 집중하고 있는 곳은 주로 북쪽과 동쪽이다. 1차 방어선으로는 남중국해 지역을 바라보고 그 아래로는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를 두고 있다. 그리고 파푸아 뉴기니와의 사이에는 바다를 두고 있다. 또 동쪽으로는 피지와 바누아투 같은 남태평양 섬들에 집중하고 있다. 이런 지리적 조건이 몇 가지 이점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침공하기에 어려운 곳이다.
그런데 이 나라가 봉쇄와 차단에 속수무책이 될 경우가 있다. 대부분의 수출입 상품들이 북쪽의 해협들을 통해 드나들고 있는데 혹시 분쟁이라도 벌어진다면 그곳이 봉쇄돼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말라카 해협, 순다 해협, 롬복 해협이 여기에 해당한다. 만약 이들 해협에 대한 봉쇄가 성공적으로 이뤄진다면 오스트레일리아도 순식간에 에너지 위기에 처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방위 전략은 부분적으로 이 시나리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래서 원유 수송선을 호위할 용도로도 이용할 수 있을 전함과 잠수함들, 그리고 원거리 해상 초계기들을 확보해 두고 있다. 그러나 이 나라의 크기와 인구, 중위권 정도의 경제 규모를 감안하면 자국의 해안으로 접근하는 모든 세력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이다.
가장 중요한 동맹국은 영국, 미국, 아니면 중국?
오스트레일리아는 해군력에 막대한 비용을 쏟아붓는 것 못지않게 동맹을 신중하게 고르는 등 외교력에도 힘을 모으고 있다. 이 나라 정부는 누가 과연 해상의 주도권을 쥐고 있는지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그것이 영국일 때는 오래된 제국주의 세력이 그들의 가장 중요한 동맹이었고, 미국으로 그 힘이 넘어가자 새로운 정치적, 군사적, 전략적 최우선 순위로 누구를 선택해야 할지 명확해졌다.
1941년 12월, 진주만 공격 발발 후에 당시 존 커틴 총리는 「우리 앞에 놓인 과제」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오스트레일리아 정부는 태평양 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분쟁을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가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 계획이라는 방향으로 모든 힘을 모아야 하는 최우선 과제로 보고 있다. 어떠한 방해도 없다면, 나는 우리가 미국을 바라봐야 한다고 분명히 밝힌다. 영국과의 전통적인 관계 또는 연대에 급격한 충격을 주지 않으면서 말이다.”
1942년 2월 19일, 10주 전에 진주만을 공격했던 것과 동일한 일본 공군 소속 항공모함 그룹이 다윈항의 연합군 진지에 무차별 폭격을 가했다. 그보다 한 달 전에 일본군은 현재 파푸아 뉴기니와 인도네시아 일부를 아우르는 뉴기니를 침공한 뒤 그 넓은 섬의 북부를 속전속결로 장악했다.
그런데 파푸아 뉴기니의 수도인 포트모르즈비로 상륙한다는 일본의 수륙양용 계획은 코럴해 전투(Battle of Coral Sea)에서 입은 피해로 좌절됐다. 이로써 연합군을 겨냥한 일본군의 계획은 수정됐고 맥아더 장군은 뉴기니를 발판으로 삼아 향후 일본을 패배로 몰고 가는 군사 작전의 일부가 된 필리핀 수복 작전을 펼쳤다.
1943년 중반쯤엔 15만 명이나 되는 미군이 오스트레일리아에 배치됐다.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퀸즐랜드에 사령부를 설치했다. 미 해군 소속 군함들이 시드니와 퍼스에 정박했고 〈메이드 인 아메리카〉가 오스트레일리아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때 이후로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관계는 영국과 맺었던 관계와 비슷한 양상을 띠어갔다. 오스트레일리아는 군사력(특히 잘 훈련된 특수부대) 일부를 제공하고 있고, 미 해군은 국제 해상 항로를 열어두게 하면서 오스트레일리아에 핵우산을 제공하고 있다.
2020년 초반에 보다 심각한 경고등이 켜지기 시작했다. 중국은 파푸아 뉴기니의 다루섬에 대규모 어업단지를 건설하기로 합의한 후 그 지역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 섬은 오스트레일리아 본토에서 불과 2백 킬로미터 남짓 떨어져 있는데, 그 주변 바다는 수산업의 잠재적 가치로 명성이 높다기보다 오히려 중국의 저인망 어선들이 자주 정찰선으로 이용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국에 대해서라면 오스트레일리아는 경제적 이해, 방위 전략, 그리고 외교 사이에서 힘겨운 줄타기를 해야 한다. 중국이 단연코 오스트레일리아의 최대 교역 상대국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지역에 대한 중국의 보다 큰 관심사는 영유권 주장과 영향력 확장이어서 오스트레일리아의 이해와 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중국과의 관계, 관리 자체가 쉽지만은 않은
현재 오스트레일리아는 중국이 궁극적으로 지역 거부권을 행사하는 지역을 더욱 확대해서 인도네시아 남부와 필리핀까지 포함시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를 하고 있다. 만약 그렇게 되면 이 범위 안에 반다해와 파푸아 뉴기니 해안까지 포함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남진은 갈 수 있는 한계점까지 영토 주권을 확장하려는 야욕으로 비쳐질 수 있는데, 그 한계는 분명 코럴해(산호해라고도 함)의 북쪽이 될 것이다.
그 경우 이 지역의 유일한 강대국, 즉 오스트레일리아와 맞닥뜨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스트레일리아는 중국이 남중국해를 지배하는 것을 현실적으로는 막을 수 없겠지만 남태평양에 관해서라면 중국 정부가 제한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그치게끔 할 수는 있다.
싸움은 시작되었다. 오스트레일리아는 태평양에 있는 여러 섬들에 가장 많은 원조를 제공하는 나라다. 그런데 2020년 4월 구호 물자를 실은 오스트레일리아 공군기는 바누아투의 포트빌라 공항에 접근하던 순간 코로나19와 관련된 개인 보호 장비와 구호 물품을 실은 중국 비행기 한 대가 활주로에 도착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중국이 바라는 것은 어업 수역 접근권, 자국의 함대를 위한 항구들, 그리고 해저 채굴 가능성이다. 그런데 여기서 자주 간과되는 다른 무엇이 있는데 바로 유엔과 다른 국제기구에서 영향력을 발휘하는 이곳 나라들의 투표권이다. 이런 배경에서 2019년,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의 강력한 로비에도 불구하고 키리바시와 솔로몬 제도가 타이완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중국과 수교한 일이 있었다.
2018년, 오스트레일리아는 피지에 군사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자금을 대려는 중국의 시도를 격퇴한 적이 있다. 그리고 바누아투와 상호 안보 조약을 맺고 몇몇 섬들에 21대의 신형 군용 경비정을 제공했다. 또한 원조 예산을 활용해 오스트레일리아와 솔로몬 제도, 파푸아 뉴기니를 잇는 이른바 코럴해 케이블이라고 불리는 해저 고속 통신망을 구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특히 피지, 쿡 제도, 통가 등지에서 이런저런 개입을 시도하고 있다.
2020년 여름 오스트레일리아의 모리슨 총리는 코로나19의 발원지를 조사하는 데에 전 세계가 참여해 주기를 요청했는데 베이징 당국은 이를 중국에 대한 공격으로 보았다. 이에 대해 중국 세관은 며칠 안에 오스트레일리아산 소고기의 라벨 표시를 문제 삼으면서 유통과 수입을 금지했다.
그런데도 오스트레일리아가 끄떡도 하지 않자 보리와 철광석을 걸고넘어지더니 《환구시보》(중국 공산당 기관지가 발행하는 일간 신문)의 영문판인 《글로벌 타임스(Global Times)》를 통해 일종의 위장된 협박을 은근히 가했다.
그 6개월 전에 오스트레일리아는 정부 기관 및 교육, 보건을 비롯한 주요 기반시설에 대한 지속적인 사이버 공격으로 고통을 당한 바가 있었다. 모리슨 총리는 공격 주체를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우리나라에서 이런 행위에 가담할 수 있는 인원은 많지 않다.”라고 말했다. 그의 말이 누구를 의미하는지는 분명했다.
코로나19는 오스트레일리아로 하여금 적기 공급 경제 시스템의 한계를 여실히 깨닫게 해 주었다. 다른 많은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오스트레일리아도 중국에 의존하면서 민감한 주요 인프라 사업에 중국의 참여를 확대하던 중 5G 통신망 구축에서 화웨이를 퇴출시키는 등 강력한 조치를 취했다.
어쨌거나 운 줄타기를 해야 하는
지금까지 오스트레일리아는 최고 우방들과 밀착 관계를 유지해 오고 있다. 미국, 영국, 뉴질랜드, 캐나다가 가입한 지구상에서 가장 효율적인 정보 수집망인 파이브 아이즈(Five Eyes)의 회원국이며, 전 세계 미국 정보 수집 시설 중 하나인 파인 갭(Pine Gap) 군사기지를 자국의 앨리스 스프링스 부근에 설치하도록 허락했다.
또한 오스트레일리아와 일본은 공군과 해군의 합동 훈련이나 상호 군사 방문 협정 등을 포함한 군사 협력 관계를 발전시켜 가고 있다. 두 나라 모두 에너지 자급자족이 어렵고 만에 하나 공급 루트가 봉쇄될 시에 발생할 위험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있다.
보다 넓혀서 인도-태평양 지역의 모든 나라는 국제 해상 교역로는 당연히 열려 있어야 한다는 데 입장을 같이하고 있다. 이는 중국이 남중국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거나 그 지역에 섬들을 만들어 놓고 자신들의 소유라고 말할 때마다 이에 반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과 오스트레일리아는 그와 같은 상황을 막기 위해 미국도 참여하고 있는 쿼드(Quad) 안에서 인도 해군과 협력하고 있다. 쿼드는 동맹체라기보다는 미국, 인도, 일본, 오스트레일리아 등 4개 나라의 해군이 태평양에서 협력하는 전략적 협의체라는 측면이 더 강하다.
인도는 자국의 해군력이 성장해 감에 따라 인도-태평양 지역을 오스트레일리아와 함께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하나의 공간으로 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고 있다. 현재는 뉴질랜드, 한국, 베트남까지 포괄해서 더욱 확장시킨 쿼드 플러스(Quad Plus)라는 구상까지 언급되는 상황이다.
서쪽으로는 인도양을, 동쪽으로는 태평양이라는 거대한 두 수역 사이에 자리 잡은 오스트레일리아는 북쪽으로는 중국이라는 거대 세력을 두고 있다. 현재로서는 경제적인 측면에서 베이징과 건설적인 대화를 이끌어가고 미국과는 방위를 비롯한 여러 연결고리를 유지하는 데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겠지만, 어쨌거나 힘든 경기를 치러야 할 것임은 분명하다.
북극
21세기 경제 및 외교의 각축장이 되다
기나긴 북극 탐험의 역사
북극, 즉 arctic이라는 단어의 어원인 아르크티코스(arktikos)에는 그리스어로 <곰 근처>라는 뜻이 담겨 있다. 이는 곧 마지막 별 두 개가 북극성을 가리키고 있는 큰곰자리를 말한다.
북극해의 넓이는 1,409만 제곱킬로미터다. 이 정도면 아주 작은 대양 정도의 넓이지만 그래도 러시아만큼 넓으며 미국보다는 1.5배가 크다. 하지만 해저에 잠겨 있는 대륙붕은 그 어떤 대양에 비교해도 넓은 공간을 차지한다. 주권이 미치는 지역에 대한 일관된 의견 일치가 어려운 것도 이 때문이다.
기록으로 남은 이곳에 대한 최초의 탐험은 기원전 330년에 그리스 마살리아(지금의 마르세이유)의 뱃사람인 피테아스가 신기한 땅을 발견해서 툴레(Thulé)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구절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지중해의 고향으로 돌아와서 온통 하얀 땅과 얼어붙은 바다, 거대한 흰곰을 비롯한 희한한 생물들에 대한 놀라운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나 누구도 믿지 않으려 했다.
그 이후 1607년 헨리 허드슨(뉴욕 허드슨강 발견), 1827년 윌리엄 에드워드 페리(William Edward Parry), 1848년 존 프랭클린 선장 등이 모두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가는 북서항로에서 북극점을 찾아보려다가 실패한 이후, 1905년에 위대한 노르웨이 탐험가 로알 아문센은 프랭클린보다 훨씬 작은 배에 겨우 다섯 명의 대원들만 데리고 그 길을 돌파할 계획을 세웠다. 아문센은 킹 윌리엄 섬을 지나 베링 해를 통과해서 태평양 쪽으로 들어갔다(로버트 피어리가 먼저 북극점을 탐험했다는 소식을 듣고 포기하고 남극점 탐험에 성공하였으나 1996년 피어리도 북극점에는 도달하지 못한 걸로 확인됨).
20년 뒤 아문센은 이번에는 북극점 상공을 비행하는 최초의 인간이 되기로 결심했다. 빙산 위 약 90미터 상공에서 노르웨이, 이탈리아, 미국 국기를 투하했다(물론 그 행동이 21세기에 영유권에 대한 법적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일본인 카자마 신지 또한 인상적인 모험으로 영웅적 행렬에 가세했다. 1987년 그는 오토바이를 타고 북극점에 도달한 최초의 인간으로 기록되었다.
얼음이 녹으면서 바닷길도 열리고
위성사진을 보면 지난 10여 년 동안 북극의 얼음의 양이 현저히 줄어들고 있는 것이 확인된다. 베링 해와 러시아의 추크치 해안가엔 벌써부터 마을들이 다시 들어서고 있다. 이 바람에 해안선의 침식이 가속화되고 동물의 사냥터도 줄어들고 있다. 이른바 생물학적 재편이 진행 중인 것이다.
물고기들의 이동으로 인한 어획량의 변화뿐만 아니라, 몰디브, 방글라데시, 네덜란드 등은 얼음이 녹아 해수면이 상승하면서 발생하는 홍수로 인해 피해를 입을 위험 또한 높아져 가고 있다. 이렇기 때문에 온난화는 북극 지역에 한정된 이슈가 아니라 전 지구적 사안이 될 수밖에 없다.
얼음이 녹고 툰드라가 바닥을 드러내면서 두 가지 일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졌다. 일단 빙원(지표의 전면이 두꺼운 얼음으로 덮여 있는 극지방의 벌판의 노화가 가속화된다. 이른바 <알베도 효과Albedo effect>이다.
또한 빙원이 녹다 보니 캐나다 다도해의 북서항로를 통한 운항이 여름 몇 주간 가능하게 되었다. 그리고 유럽에서 중국으로 갈 때 걸리는 시간도 적어도 일주일은 단축할 수 있게 됐다. 한편 북동항로 또는 러시아식으로 북해항로는 시베리아 해안을 품고 있는데 이 항로 또한 현재 일 년에 수개월 동안 열리면서 <해양 고속도로>로서 그 인기가 날로 높아지고 있다.
북극을 둘러싼 치열한 각축
얼음이 녹으면서 또 다른 잠재적 부도 드러나고 있다. 북극에 숨겨져 있어서 이제껏 드러나지 않았던 천연가스와 유전에 대한 접근이 가능해진 것이다. 2009년 미국의 지질조사국은 북극 지방에 천연가스는 약 1,669조 입방피트, 천연 액화가스는 440억 배럴, 그리고 원유는 900억 배럴이 매장돼 있을 걸로 평가했다.
북극에 대한 영유권 주장은 탐험가들이 꽂은 깃발에 근거를 두지 않고 유엔해양법협약(UNCLOS)을 기반으로 한다. 이 협약에 서명한 국가는 자국의 해안부터 370킬로미터까지 (이것이 다른 나라의 경계와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 한) 배타적인 경제적 권한을 얻는 동시에 배타적 경제 수역을 선언할 수 있다. 따라서 그 지역의 원유와 천연가스는 그 국가의 소유다.
북극 지방의 얼음이 녹아가자 북극이사회(Arctic Council)의 8개 회원국(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덴마크, 아이슬란드, 캐나다, 미국, 러시아)들은 더욱 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지정학(geopolitics) 토론이 지극학(geopolarctics)으로 변모해 가는 양상이다.
북극 접경 국가인 이른바 북극연안 5개국(Arctic Five)은 캐나다, 러시아, 미국, 노르웨이, 덴마크(그린란드를 책임지고 있으므로)를 말한다. 여기에 아이슬란드, 핀란드, 스웨덴이 합세해 북극이사회가 탄생했다. 그리고 북극권 국가들의 자주권, 주권, 재판권을 인정하는 정식 옵서버(의결권을 가지지 않는 참가 자격) 12개국이 더해진다.
현재 북극해의 귀속을 둘러싼 법적인 논쟁만 해도 9개나 된다. 러시아와 노르웨이는 바렌츠 해를 두고 특히 곤란한 상황에 놓여 있다. 노르웨이는 바렌츠 해 아래에 있는 가켈 해령을 자국의 배타적 경제 수역의 연장이라 주장하고 있는데 러시아는 이에 반발하고 있다. 이 두 나라는 또 인간이 정착해 사는 지구상 가장 북쪽 지점인 스발바르 제도를 두고도 강하게 대립하고 있다.
2015년 봄, 스티븐 하퍼 당시 캐나다 수상은 국방비 증액을 발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캐나다는 북극에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해야 할 때 선택권이 있다. 우리는 이를 이용해야 하며 그렇지 못하면 우리의 권리를 잃게 될 것이다.” 덴마크 또한 북극 대응 전력을 편성해서 러시아의 세력 과시에 대응하고 있다.
한편 러시아는 러시아대로 북극 부대를 창설하고 있다. 여섯 개의 기지를 새로 건설 중이며 그간 묵혀두었던 노보시비르스크 제도에 있던 몇몇 냉전시대 시설들을 다시 가동하는가 하면 간이 활주로도 재정비하고 있다. 또한 스노모빌과 공기 부양선을 갖춘 두 개의 기계화 보병 여단을 포함하여 적어도 6천 명에 이르는 전투병들을 러시아 북서부의 무르만스크 지역에 대기시켜 놓고 있다.
현재 무르만스크(러시아의 부동항)를 러시아의 북쪽 에너지 관문으로 부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이런 배경에서 푸틴 대통령이 에너지 공급과 관련해 한 말이 있다. “연안의 유전지대, 특히 북극에 있는 유전들은 과장하지 않고 21세기를 대비하는 우리의 예비 전략이다.”
러시아 경제가 둔화되면서 많은 정부 부처들의 예산이 삭감됐지만 국방비만은 증가했다. 그리고 이는 부분적으로 북극 주둔 군사력을 강화시키는 데 투입할 것이다. 러시아 정부는 미래를 위한 구상과 지난 시대의 인프라, 게다가 유리한 위치를 갖고 있다. 미국 해안 경비대 함장인 멜리사 버트는 워싱턴 D. C. 소재 국제전략문제연구소에서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는 북극에 도시들을 갖고 있지만, 우리는 겨우 마을들이나 구성하는 수준이다.”
위 사례들은 여러 면에서 냉전시대 러시아의 북극 정책이 여러 방식으로 현재 진행 중이거나 적어도 조만간 부활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러시아는 나토가 스카게라크 해협(덴마크의 유틀란드 반도와 노르웨이 사이에 있는 해협)을 봉쇄해서 자국의 발트해 함대를 묶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대서양으로 나가려면 이 좁다란 해협을 통해 노르웨이 해로 내려와서 갑옷이나 마찬가지인 대서양 요충지 GIUK 갭을 지나야 한다. 냉전시대에 나토는 이 지역을 킬 존(Kill Zone)이라 불렀다. 그만큼 소련 함대가 나타나는 족족 나토의 비행기, 선박, 잠수함들한테 들키고 말았기 때문이다.
북극 전략 없는 미국, 북극의 최강자 러시아
미국은 나토 동맹국인 아이슬란드에서 병력을 철수하기까지 했다. 아이슬란드가 사실상 무장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의 이런 조치를 두고 아이슬란드 정부는 근시안적인 행동이라 비판했다.
쇄빙선 한 척을 건조하는데 10억 달러의 비용과 10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된다. 미국 해안 경비대가 발간한 2013년판 리뷰만 봐도 러시아는 총 32척의 쇄빙선으로 구성된 세계 최대의 쇄빙선 함대를 보유한 선도적인 북극권 국가인 것이 확실하다. 그 가운데 6척은 전 세계에서 유일한 핵추진 쇄빙선이다.
그 반면 미국 해양 경비대 소속 폴라 스타 호는 1960년대에 미국이 보유했던 여덟 대의 쇄빙선 중에 남아 있는 한 대인데 미국은 또 다른 쇄빙선을 건조할 계획을 갖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 미국에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유엔해양법협약을 비준하지 않은데다가 배타적 경제 수역을 선언하지 않아서 실질적으로 북극의 해저 영토 20만 제곱킬로미터를 고스란히 포기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미국은 연안 지역의 석유 탐사권과 캐나다 다도해로 진출하는 사안을 두고 캐나다와 언쟁을 벌이고 있고, 베링 해, 북극해, 북태평양을 두고 러시아와 마찰을 빚고 있다.
이 외에도 엘즈미어 섬과 그린란드를 분리해 주는 네어스 해협에 위치한 한스 섬을 두고 캐나다와 덴마크가 다투고 있다. 인구가 5만 6천 명인 그린란드는 자치 정부를 수립하고 있지만 아직은 덴마크 지배하에 있다.
북극에서의 게임은 달라야 한다
이제 북극권 국가들과 거대 에너지 기업들은 이 변화를 어떤 방식으로 처리할지, 또 북극 지방의 환경과 주민들에게 얼마만큼 관심을 쏟아야 할지를 놓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 에너지에 대한 갈망은 '뉴 그레이트 게임(New Great Game)'*이라 불렀던 경주가 불가피하게 이곳에서도 이뤄질 수 있음을 예상케 한다.
* 19-20세기 초 영국과 러시아가 중앙아시아 내륙의 주도권을 두고 벌였던 패권 다툼인 그레이트 게임에서 유래된 표현으로, 21세기에 영토 분쟁과 자원 분쟁을 두고 벌이는 새로운 양상의 패권 경쟁을 뉴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부른다.
북극에서의 게임은 규칙과 공식 그리고 결정을 내리기 위한 협의가 있다. 북극이사회 대다수는 성숙한 국가들로 구성돼 있고, 영토 분쟁과 환경오염, 해양법과 소수 민족의 처우에 대한 문제를 조절하는 국제법도 갖춰져 있다. 또한 분쟁 중인 영토 대다수도 19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처럼 무단으로 점령하는 일도 없다.
북극권 국가들은 거친 이웃이 살고 있는 것을 안다. 이는 서로 편을 나눠 다투기 때문이 아니라 지리에서 야기된 도전 때문이다. 북극해의 면적은 1,409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른다. 이곳은 깜깜해질 수도, 위험해질 수도, 죽음의 지역이 될 수도 있다. 친구 없이는 살아나가기 어려운 곳이다.
이곳에서 잘 살아가려면 협조가 필요하다. 어획량, 밀수, 테러리즘, 수색과 구조, 환경 재앙과 같은 사안에 있어서 특히 그렇다. 인간 본성의 탐욕스러운 부분을 극복한다면 우리 모두에게 득이 되는 <그레이트 게임>을 할 수 있다.
우주
또 다른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가 될 수 있다
우리가 지구의 대기권을 뚫고 나가서 무한대 속으로 1밀리미터쯤 파고 들어갈 수 있게 된 뒤로 우주 공간은 정치적 각축장이 되었다. 이 이슈의 중심에는 달이나 화성 같은 물리적 영토를 주장하는 것만 있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앞선 세기에서 보아왔듯 그곳으로 가는 데 필요한 연료 보급소와 병목지점들 또한 주요 이슈다.
만약 그것들의 사용에 관한 규칙과 우리가 도달할 영토를 관리할 법적인 틀을 합의하지 못한다면 지구 위에서 인류의 역사 내내 벌였던 꼭 그대로의 싸움으로 귀결될지도 모른다.
미국, 일본, 아랍에미리트, 이탈리아, 영국, 캐나다, 룩셈부르크, 오스트레일리아는 2020년 10월 아르테미스 협정(Artemis Accords, 2024년까지 달에 유인 우주선을 착륙시키고 2028년에는 달 남극 부근에 기지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협정)에 서명한 첫 번째 우주 탐사국이었다.
그런데 러시아나 중국은 이 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다. 두 나라 모두 이 계획에는 미적지근한 입장을 보인다. 사실 그들은 참여하고 싶다고 해도 배제됐을 것이다. 모두가 동의하지 않은 상황에서 밀어붙이는 것을 두고 러시아 항공우주국 국장인 드미트리 로고진은 “달을 또 다른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로 만들 수 있다.”라고 비유한다. 이 말은 한 번 겨뤄보자는 뜻이다.
미국과 소련의 달 탐사 경쟁
우주 경쟁에는 늘 군사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 개척자 중 한 사람인 로켓 공학자 베르너 폰 브라운은 우주 비행에 너무도 집착한 나머지 1930년대에 나치 독일에 협력하기까지 했다. 1944년에 최초로 우주 공간에 쏜 발사체가 된 V-2는 수직 이륙 후 고도 176킬로미터까지 날아올랐다. 종전 후 폰 브라운과 120명의 과학자들은 문제의 V-2와 함께 미국으로 옮겨가서 미국의 우주 프로젝트를 착수했다.
러시아에서는 20세기 초반, 독학자이자 은둔형 과학자로 알려진 콘스탄틴 치올코프스키는 우주 비행에 관한 이론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우주 공간에 도달하기 위한 중력권 탈출 속도는 초속 8킬로미터가 돼야 하며 액체 연료와 다단계 로켓을 사용하면 가능하리라는 가설을 처음으로 세웠다. 또한 그는 우주 정거장과 에어록, 산소 시스템의 청사진을 설계하기도 했다. 그의 논문들 다수가 비행기가 최초 비행을 하기도 전에 출판됐다. 그가 우주여행의 아버지라 불리는 이유도 부분적으로는 여기에 있다.
소련인들은 치올코프스키의 연구를 기반으로 작업했다. 1957년 소련은 처음으로 대기권을 벗어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발사했고 스푸트니크 위성을 쏘아 올렸다. 같은 해 스푸트니크 2호가 발사됐다. 이번엔 개까지 싣고서 말이다! - <지리의 힘 2>, 팀 마샬 - 밀리의 서재
1961년 4월 12일 소련 우주비행사 유리 가가린이 처음으로 지구라는 속박에서 벗어나서 시인 존 길레스피 마기가 “비할 바 없이 드높은 우주의 신성함”이라고 묘사한 가장 높은 단계로 진입했다. 그것은 인류 역사에서 그야말로 경이로운 순간이었다. - <지리의 힘 2>, 팀 마샬 - 밀리의 서재
가가린의 성공이 있은 지 딱 6주 뒤에 케네디 대통령은 이렇게 천명한다. “미국은 이번 10년이 끝나기 전에 인간이 달에 착륙하고 안전하게 지구로 귀환하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 최선을 다할 것이다.” 1969년 7월 20일, 마침내 달 표면에 발을 디딘 닐 암스트롱은 인간이 달에 머물면서 가장 길게 말한 시간으로 알려진 8초 분량의 문장을 말했다. “이것은 한 명의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거대한 도약이다.”
우주 탐사라는 사업은 무엇보다 돈이 많이 든다. 결국 미국은 달 착륙 장비를 챙겨서 집으로 돌아갔다. 닉슨 대통령은 마지막 아폴로 계획 3개를 폐지했고 NASA는 목표를 수정했다. 그들은 아폴로 계획 시절의 남은 조각들을 그러모아 만든 2층짜리 실험실을 궤도에 쏘아 올렸다. 이 스카이랩(Skylab, 유인 우주 실험실)은 각종 실험을 수행하고 인간이 우주 공간에서 오랜 기간 머무를 수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인간의 지식을 향상시키는 데에 기여했다.
환상적인 전망을 자랑하는 우주의 집, 국제 우주 정거장 건설
다음 사건은 1975년에 이뤄진 소련의 소유스(구소련 시절 개발된 이래 시리즈로 제작되는 러시아의 유·무인 우주선) 모듈과 미국의 아폴로 우주선의 상징적인 도킹이었다. 이것은 냉전기에 양대 강국 간의 긴장 완화를 보여주는 획기적 사건이기도 했다. 이 사건은 언론의 헤드라인을 장식하면서 우주에서 각국의 협력이 이뤄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각시켰다.
많은 국가들이 이미 다국적 위성통신 기구인 인말새트(Inmarsat, 국제해사위성기구)와 인텔샛(Intelsat, 국제통신위성기구)을 설립하는 협정을 체결했다. 소유스-아폴로의 도킹은 인류가 힘을 합쳤을 때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시각적으로 뚜렷하게 보여준 것이다. 또한 그것은 국제 우주 정거장의 건설로 이어지게 하는 떠다니는 징검돌이었다.
1998년 11월, 러시아가 국제 우주 정거장의 첫 번째 조각을 쏘아 올렸다. 2주 뒤에 미국의 유인 우주 왕복선 엔데버호가 두 번째 조각을 싣고 발사됐다. 두 번째 조각은 첫 번째 조각에 연결됐다. 이 작업은 흡사 우주 공간에서 모형 장난감 세트를 조립하는 것과 같았다. 단지 로켓 과학을 사용한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그로부터 2년 내에 최초의 우주 거주자들이 입주할 만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국제 우주 정거장 내에서 또는 그것을 위해서 수행한 연구는 로켓 과학이 인류에게 혜택을 가져다줄 수 있는 수십 가지 사례들을 제공하고 있다. 요컨대 수분 회수 시스템을 위해 개발된 기술은 역으로 지구에서 깨끗한 식수가 부족한 지역의 정수 시스템을 개발하는 데 이용되고 있다.
또 우주 정거장의 미세 중력 환경은 의료 처치에서 사용될 인간 단백질의 복잡한 결정 구조를 배양하는 데 최적의 환경이다. 그리고 로봇팔 기술은 지구에서 외과 수술을 비롯한 여러 분야에 도입되고 있다.
"6백만 달러가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습니다"
이제 우주여행은 더 이상 강대국만의 전유물이 아니게 됐다. 지구 밖으로 나가는 데 점점 돈이 덜 들게 되면서 민간 기업들도 접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일례로 페이팔의 공동 창업자이자 테슬라의 실세인 일론 머스크는 재활용 로켓을 이용해서 비용을 줄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6백만 달러가 하늘에서 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붙잡아야 하지 않겠어요?”
머스크는 이 분야에서 민간 기업이 정부보다 앞서가면서 NASA와도 협력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본보기다. 그가 세운 회사인 스페이스 X는 수년간 국제 우주 정거장에 화물을 실어 나르고 있으며 2020년에는 두 명의 NASA 소속 비행사들을 싣고 가기도 했다.
머스크가 상업적인 우주 기업을 이끌고 있다면, 아마존의 창업자 제프 베이조스는 자신의 블루 오리진 컴퍼니를 통해 머스크의 뒤를 쫓고 있다. 이 회사가 내세우는 비전은 수백만 명이 우주에서 살고 일할 수 있는 미래다. “우리의 손자들과 그 손자들을 위해, 그리고 우리 고향인 지구를 보존하기 위해, 우리는 무한한 자원과 에너지를 찾아 우주로 떠나야 합니다.”
국가 차원에서는 2020년 12월에 중국의 우주선이 달의 반대편에 착륙해서 그곳에 중국의 국기인 오성홍기를 꽂고 암석들을 파기 시작한 일이 있다. 하지만 민간 기업의 측면으로만 보자면 그 길을 선도하고 있는 것은 주로 미국 기업들이다. 더 확대해 보면 우리는 이미 화성, 금성, 목성으로 무인 우주선을 보내는 임무를 개시했다. 심지어 토성의 위성인 타이탄에 착륙선을 보냈고 명왕성은 근접 비행을 하기도 했다.
점점 힘을 잃어가는 우주조약과 달조약
아르테미스 협정은 우주 개발 과정에서 유발되는 법적, 정치적, 군사적 어려움을 보여주는 사례다. 아르테미스 협정에 관해 러시아와 중국이 특히 우려하고 있는 조항은 달에서 한 나라가 작업하고 있는 지역을 보호하기 위해 서명국들이 안전지대를 건설할 수 있도록 허용한 부분이다.
그들이 1967년에 만들어져 이미 구닥다리가 돼버린, 대중에게는 우주조약(Outer Space Treaty, 달 및 천체를 포함한 외기권의 개발과 사용을 규제하는 국제 조약)으로 알려진 그 조항으로 돌아가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이 조약에서는 “우주 공간은 주권 주장, 그 사용이나 점령 또는 다른 수단에 의한 것일지라도 한 국가가 전용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우주조약은 달을 오직 평화적인 목적으로만 이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물론 그 평화적이라는 것의 세부 사항을 정확하게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 현재의 기술 발전 수준을 감안해 보면 이 조약은 다시 쓰여야 할 필요가 있다. “달의 개발은 모든 나라에게 이익과 혜택이 돌아가는 측면에서 진행되어야 하며 모든 인류의 영역이 되어야 한다.”라는 정신과 약속은 지키면서 말이다. 하지만 현재도 지구가 어디서 끝나고 우주는 어디서 시작되는지조차 합의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런 안건들을 다루기 위한 유엔우주업무사무소가 있다는 점이다. 비엔나에 자리 잡은 이 기구 산하에는 외기권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위원회(COPUOS)가 설치돼 있어서 유엔총회의 제4위원회에 보고를 하면 여기서 우주 공간을 평화적으로 이용하는 국제 협력에 관한 연례 결의안을 채택한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편안히 잠을 이룰 수 있는 것이다.
1979년의 달조약(Moon Treaty, 달 탐사 및 이용은 모든 국가의 이익을 위해 수행되어야 하며 달의 천연자원을 인류의 공동 유산으로 규정하는 조약)을 살펴보자. COPUOS가 우주조약에 근거해서 작성한 이 조약은 유엔총회에서 채택됐다. 그런데 이를 비준한 나라들은 몇몇 나라에 그쳤고 소련이나 미국, 중국까지도 이에 서명하거나 비준하지 않았다.
데니스 호프라는 한 미국인은 그 상황에서 빈틈을 찾아냈다. 1980년 그는 유엔을 상대로 달 소유권을 주장했다. 그런데 유엔이 반응을 안 보이자 암묵적인 동의로 받아들인 그는 달의 토지를 1에이커당 25달러에 팔기 시작했다. 이 돈을 내면 멋진 달 소유권 증명서를 받게 된다. 호프는 자기가 판매한 달 토지만 해도 6억 1,100만 에이커에 달한다고 주장한다.
저궤도, 우주전쟁의 출발점
강대국들이 상업적, 군사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 우주 공간을 점할 것이라는 가정을 내세운 입장이 있다. 이것이 바로 우주 공간의 현실 정치인, 이른바 〈우주 정치학〉이다. 우주 정치학 이론가인 에브렛 돌먼 교수의 말을 빌리면 우주를 “중력의 산과 골짜기를 담은 풍요로운 풍경, 자원과 에너지가 넘치는 바다와 강”이라는 이해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군사 우주 전략가들은 이 이슈 한복판에 있는 지형을 4개의 범주로 구분하려 한다. 대체로 돌먼이 나눈 범주가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먼저 지구를 뜻하는 테라(Terra)가 있다. 지구와 그에 가까운 영공, 비행체가 연료를 재공급받지 않고 지구 주위의 궤도로 들어갈 수 있는 한계까지를 말한다. 그 위에 지구우주(Earth Space)가 있고, 그 위로 달의 궤도를 말하는 달우주(Lunar Space)가 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태양계로 들어간다.
향후 몇십 년 내에 미래의 우주 탐사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바로 지구우주, 특히 저궤도다. 통신위성과 군사 분야로 확대돼 가고 있는 우리의 위성들이 자리 잡은 곳도 여기다. 이 벨트를 통제하는 나라들이야말로 지구 표면 전체에서 거대한 군사적 이점을 얻어갈 것이다. “저궤도를 지배하는 자가 지구 근처 우주를 호령한다. 지구 근처 우주를 통제하는 자가 테라를 지배한다. 테라를 지배하는 자가 인류의 운명을 결정짓는다.”
저궤도는 우주선이 달 너머로 갈 때 연료를 재급유할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지구에서 화성까지는 달보다 수백만 마일이 더 먼데 지구 중력의 경계를 벗어나려면 엄청난 노력이 요구되기 때문에 저궤도에서 화성으로 가는 것보다 지구 표면에서 달로 가는 것이 훨씬 많은 에너지가 소요된다. 그런데 어떤 강대국이 이 통로를 전면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면 이 나라는 일종의 문지기가 되는 것이다.
게다가 상업적인 고려도 무시할 수 없다. 만약 엄청나게 커다란 패널로 태양광을 모아 발전을 위해 지구로 보낼 수 있을 만한 기술이 개발된다면 이 기술을 저궤도에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공간은 장거리 여행을 위한 주유소이기도 한 만큼 혹시 채굴 목적으로 운석에 접근하고자 하는 측은 문지기 국가에 소정의 통행료를 지불해야 할 수도 있다.
또한 우주선들이 더 먼 곳으로 진입하기 위해 지구의 중력을 이용해 가속할 때 따라갈 수 있는 특별한 경로가 있는 곳도 이곳이다. 한편 지구 가까이에는 5개의 칭동점(‘라그랑주 점’)들이 있다. 그곳은 지구와 달의 중력 효과가 서로의 힘을 상쇄해서 그곳에 정박한 물체들이 연료를 쓰지 않고도 제위치에 머무를 수 있는 곳이다.
경쟁은 이 지점들에서 벌어질 것이다. 그 가운데 특히 두 곳은 위성들이 있는 벨트를 내려다볼 수 있는 조망권을 제공할 수 있다. 또 하나는 달의 뒤편에 있는 L2로 알려진 곳이다. 중국이 기지 건설을 고려하고 있는 그 어두운 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보려고 일찌감치 그곳에 위성을 올려둔 것도 순전한 우연은 아니다.
우주공간의 군사화
2019년에 미국이 우주군(Space Force)을 창설함에 따라 러시아와 중국도 군 조직에 변화를 꾀하고 있다. 한편에서는 이 행위가 우주조약을 위반한다는 우려가 일었다. 하지만 그 조약은 핵미사일 같은 대량살상 무기를 “궤도나 천체에 설치하거나 어떤 다른 식으로라도 놓아두면 안 된다.”는 내용만 명시하고 있을 뿐이다.
우주군의 창설을 두고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우주에서 미국의 우위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주군은 공격을 단념시키고 궁극의 고지대를 통제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우주 탐사와 그에 수반된 군사적 차원 양쪽에서 최첨단에 있는 것은 역시 빅3 국가(미국, 중국, 러시아)다. 이제 이들 세 나라는 〈전 영역에서 우세〉라는 군사 개념에 우주를 포함시키고 있다. 저궤도부터 달까지, 궁극적으로는 그 너머까지 말이다.
1980년대에 미국은 전략방위구상을 통해 이러한 이득을 얻기 위한 초기의 제한적인 시도를 했다. 다시 말해 핵공격으로부터 미국을 방어하기 위한 미사일 방어 시스템 개발을 시도한 것이다. 미국이 검토했던 옵션들 가운데 하나가 우주를 기반으로 한 무기의 범주를 다양화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스타워즈라는 이름을 붙인 것도 우주 군사화의 전조였다.
이제는 음속보다 20배 이상 빨리 날아가는 극초음속 미사일 개발이 이 분야에서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기존의 대륙간탄도미사일과는 달리 극초음속 미사일은 포물선을 그리며 비행하지 않고 방향과 고도도 변환할 수 있다. 이것이 발사되면 목표가 된 나라는 이 미사일의 타격지점을 계산할 수도 없으니 요격 미사일의 좌표도 찍을 수 없다.
이 도전에 맞서기 위해 우주 공간에 대對극초음속 미사일 방어 레이저 시스템을 설치해서 아래쪽을 향해 쏠 수 있는 가능성을 검토하는 나라들이 있다. 어쨌거나 우리는 이미 우주 군비 경쟁에 뛰어든 셈이다.
각국의 인공위성을 파괴하는 킬러 위성까지 개발
2020년 7월 러시아의 코스모스 2542 군사 위성이 미국 위성인 USA 245를 스토킹하던 중 상당히 가까운 거리라 할 수 있는 150킬로미터 이내까지 접근했다. 그러고 나서 그 안에 있던 미니 위성인 코스모스 2543을 발사했다. 미군은 이것을 러시아 인형이라 부르곤 한다. 이 아기 코스모스는 러시아의 세 번째 위성을 향해 이동하기 전에 미국의 우주선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미행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것이 마치 시속 7백 킬로미터로 움직이는 고속 발사체를 발사한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크렘린궁은 이에 대해 단지 위성의 상태를 점검한 것뿐이라고 밝혔지만 영국과 미국 국방부 모두 이것이 무기 실험의 형식을 띠고 있다고 믿고 있다.
이제 인공위성은 더 이상 전화나 TV 방송을 중계하는 데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위성은 일상생활뿐 아니라 현대전에서도 필수적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위성을 떨어뜨리거나 방해하면 자동차의 GPS 시스템이 먹통이 되고 신용카드가 작동되지 않을 수 있다.
군사적인 차원에서 모든 선진국은 정보와 감시 활동을 위성에 의지하고 있다. 어떤 나라의 군사 위성이 타격을 입는다면 그 나라의 최고사령부는 그 즉시 그것을 지상 공격의 전조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 경우 핵공격 조기 경보 시스템도 망가질 수 있어서 차라리 먼저 공격을 감행하자는 결정을 촉발시킬 수 있다. 비록 기존 방식의 싸움이 남아 있더라도 상대편은 적을 정밀 타격하고 눈에 띄지 않게 군사력을 이동시키는 데 유리할 것이다.
이미 러시아, 중국, 미국, 인도, 이스라엘 등은 위성들만 콕 집어 파괴하는 특수한 우주 무기인 킬러 위성 시스템을 개발해 오고 있다. 또 레이저를 쏘아서 위성을 떨어뜨리는 기술, 위성을 교란시켜서 통신을 방해하거나 화학물질을 분사하는 기술, 아예 위성을 들이받는 기술까지도 개발되고 있다.
미국 정부는 록히드 마틴 사와 함께 스페이스 펜스(Space Fence)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이것은 지상에 설치된 레이더로 위성과 그 궤도 내 잔해들을 추적하는 일종의 감시 시스템이다. 현재 미 국방부는 대략 2만 개 이상을 추적할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은 이 능력을 10만 개까지 늘리고 위성을 표적으로 발사되는 레이저의 출처도 정확히 밝혀낼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지구우주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불러온 또 다른 문제가 있다. 바로 궤도 주위를 돌고 있는 엄청난 양의 우주 쓰레기들이다. 이 잔해들이 궤도 내로 돌진해서 각국의 위성 기반시설을 파괴하거나 지구 경제를 초토화시킬 수도 있다. 현재 수명이 다한 3천 개의 위성과 적어도 10센티미터에서 그보다 더 작은 것들이 포함된 3만 4천여 점의 우주 쓰레기들이 지구 궤도를 돌고 있다.
미래의 우주는 어떤 모습일까
NASA 소속 우주비행사인 카렌 나이버그는 “만약 내가 모든 지구인이 지구 한 바퀴를 돌게 할 수 있다면 세상은 좀 더 다르게 흘러갔을 텐데.”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녀는 환경주의 차원에서 얘기했지만 이는 실질적으로 더 나은 외교 협력을 위한 호소이기도하다.
만약 모든 나라가 미국의 국가우주정책의 정신에 부응해서 “우주 공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 서로 협조함으로써 인류의 안녕을 증진시키려는 헌신“에 공감한다면 현재 우리가 향하고 있는 것과는 매우 다른 미래를 꿈꿔볼 수 있다.
10년 이내에 국제 우주 정거장은 〈인터내셔널 머스크 스페이스텔(International Musk Spacetel)〉로 탈바꿈한다. 객실 20개를 갖춘 별 10억 개짜리 호텔 말이다. 그곳에서는 2028년경에 알츠하이머병의 치료법을 찾아낼 수도 있다. 신생 달 기지와의 영상 통화도 가능해진다. 그로부터 20년이 더 지나면 우주선은 저궤도에서 연료를 재급유하고 광대한 우주를 가로지르는 장거리 여행을 떠날 준비를 한다. 예전에 귀하게 여기던 금속이 12퍼센트나 함유된 거대한 마이다스 운석이 발견된 뒤로 금값은 붕괴되고 말았다.
2060년경이 되면, 화성에서는 100개의 유능한 다국적 팀들이 진지하게 화성의 테라포밍(terra forming, 행성을 개조하여 인간의 생존이 가능할 수 있게끔 지구화하는 과정) 작업을 수행한다. 그보다 앞선 2054년으로 돌아가 보면 과학자들이 마침내 지구의 온실가스를 방출하는 공식을 알아낸다. 작업의 핵심은 온실가스를 지구에 남은 대량의 프레온 가스와 결합시키고 가둬둔 태양의 열기로 연쇄반응을 일으켜서 화성의 대기를 변화시키는 것이다.
더 빠른 속도를 이루기 위한 여러 다른 이론들이 있다. 그 가운데는 컴퓨터 칩 크기의 작은 무인 우주 탐사선을 쏘아 보내는 것도 있다. 그것은 지구에서 발사된 레이저로 추진을 해서 운항을 이어갈 수 있다. 민간 기업인 스타쇼트는 이미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이 계획을 실현하는 데 도사린 많은 걸림돌 가운데 하나가 강력한 레이저인데 문제는 현재까지 이것을 만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주는 특정 국가의 소유물이 아니다
우주 탐사가 아직은 걸음마 단계에 있다 보니 우리로서는 어느 방향으로 발을 딛고 싶은지 결정할 필요가 있다. 각 국가들은 상호 인정한 영토에 주권을 행사하는 시스템의 실패한 역사를 지겹도록 보여준 우주판 베스트팔렌 개념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우리의 보편적 인간성과 우주여행에 도사린 도전을 인정하고 지구라는 집을 벗어나 저 멀리 모험을 감행하는 하나의 국민처럼 행동하는 단계로 나아갈 것인가?
이제는 지구에서의 모든 분쟁과 부당함에도 불구하고 전 지구적 차원에서 우리 모두가 서로에 대한 책임을 폭넓게 받아들여야 할 시점에 도달했다. 바로 기후변화가 그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우주 탐사 국가들이 서로 협력하고, 지식과 이익을 나누고, 자신들이 얻은 이익 일부를 다른 모두에게 넘겨준다는 구속력 있는 협정을 성문화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우주 공간에서 〈창백한 푸른 점(pale–blue dot, 우리 지구)〉을 돌아보는 것이야말로 태초부터 우리를 감염시켜 〈우리〉와 〈그들〉로 갈라놓게 한 바이러스를 이겨내는 길이다. 우주는 그 무한대 속으로 우리 인간의 정신이 뻗어나갈 기회를 주고 있다. 서로 힘을 합친다면 훨씬 빨리 도달할 수 있다. 우주에는 한계가 없으니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