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답사 일번지, 예산 수덕사와 가야산 주변
이런저런 책을 읽다 보면 주로 서양 과학과 경제, 지리 등에 관한 내용의 책들이 대부분이다. 그런 때 문뜩 귀소본능처럼 우리나라의 문화와 역사에 관한 책이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그때마다 손이 가장 먼저 가는 책이 유홍준 현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좌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다.
첫 권이 나온 게 벌써 30년도 넘는 1993년 5월이다. 창작과비평사에서 간행된 1권 <남도답사 일번지>는 100만 권이 넘게 팔리는 스테디셀러가 되었고 곧이어 출간된 2권, 3권도 연이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1990년대 중후반에 국내 답사 붐이 일 정도였다고 한다.
유홍준 교수에 관해 일부 비판적인 기사나 글도 있지만 그래도 이어령, 도올 김용옥과 더불어 조선의 '교육방송파' 3대 구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입담과 표현력이 좋은 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의 첫머리가 남도 여행인 이유에 대해 저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우리나라의 국토를 수도권 중심, 특히 서울 중심으로만 생각하기 때문에 수도권에서 가장 먼 곳에도 아름답고 의미있는 장소들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강진・해남
국토의 최남단, 전라남도 강진과 해남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제1장 제1절로 삼은 것은 결코 무작위의 선택이 아니다. 강진과 해남은 우리 역사 속에서 단 한 번도 무대의 전면에 부상하여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아본 일 없었으니 그 옛날의 영화를 말해주는 대단한 유적과 유물이 남아 있을 리 만무한 곳이다.
그러나 월출산, 도갑사, 월남사터, 무위사, 다산초당, 백련사, 칠량면의 옹기마을, 사당리의 고려청자 가마터, 해남 대흥사와 일지암, 고산 윤선도 고택인 녹우당, 그리고 달마산 미황사와 땅끝〔土末〕에 이르는 이 답삿길을 나는 언제부터인가 ‘남도답사 일번지’라고 명명하였다.
거기에는 뜻있게 살다간 사람들의 살을 베어내는 듯한 아픔과 그 아픔 속에서 키워낸 진주 같은 문화유산이 있고, 이름없는 도공 이름없는 농투성이들이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는 꿋꿋함과 애잔함이 동시에 느껴지는 향토의 흙내음, 무엇보다도 조국강산의 아름다움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산과 바다와 들판이 있기 때문이다.
남도의 들판과 황토, 반남고분군
광주 시내를 빠져나와 나주 나평들판을 지나면서 우리는 비로소 남도땅으로 들어선 기분을 갖게 되었다. 나주평야의 넓은 들 저편으로는 완만한 산등성의 여린 곡선이 시야로 들어온다. 나는 이곳을 지날 때마다 마치 길게 엎드려 누운 여인의 등허리 곡선처럼 느슨하면서도 완급의 강약이 있는 리듬을 느낀다.
달리는 차창 밖 풍경이 산비탈의 과수밭으로 펼쳐졌을 때, 누런 황토가 아닌 시뻘건 남도의 황토를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것 자체가 시각적 충격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갑오농민전쟁의 현장 전라북도 고창땅 황토현을 가본다면 더욱 실감할 남도의 붉은 황토는 그날따라 습기를 머금은 채 검붉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어느새 우리의 버스는 영산포를 지나 반남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나는 마이크를 잡고 해설을 시작했다.
“모두들 창 오른쪽을 보십시오. 여기는 나주군 반남면(潘南面). 반남박씨의 본관지입니다. 저 안쪽 들판은 대단히 넓은 곡창지인데 곧장 뻗으면 영산강 줄기와 맞닿습니다.
그래서 이 땅의 풍요를 바탕으로 일찍부터 토호들이 성장하여 백제시대에도 하남·공주·부여의 문화와는 다른 지방적 특성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반남고분군의 독무덤입니다.
반남면 신촌리, 대안리, 덕산리에는 일고여덟개씩의 큰 무덤들이 떼를 지어 있는데 그 무덤에서는 커다란 독 두세개를 포개서 만든 옹관(甕棺)이 나옵니다.
그리고 이런 옹관묘는 삼국시대에 오직 영산강 일대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무덤형식인 것입니다. 지금 광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무지하게 큰 옹관은 신촌리에서 수습된 것입니다.
그런데 신촌리 제9호 무덤에서는 다섯개의 옹관이 한꺼번에 나오면서 그 가운데 옹관에서는 금동관이 출토되었습니다. 이것은 공주의 무령왕릉이 발굴되기 이전에 유일하게 백제지역에서 출토된 금동관으로, 백제의 금관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금동관의 주인공은 누구일까요? 그것이 고고학과 역사학계에서 매우 흥미로운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데, 대체로 마한의 마지막 족장이 아닐까 추정되고 있습니다.“
월출산
영암에 거의 다 닿았을 때 육중하게 다가오는 검고 푸른 바위산의 준수한 자태에 탄성을 지른다. 완만한 곡선의 산등성이 끊기듯 이어지더니 너른 벌판에 어떻게 저러한 골산(骨山)이 첩첩이 쌓여 바닥부터 송두리째 몸을 내보이고 있는 것일까? 신령스럽기도 하고, 조형적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대단히 회화적이다.
도갑사(道岬寺)
월출산의 대표적인 절인 도갑사의 정취는 아침나절 산안개가 걷힐 때 가장 아름답다고 기억된다. 매표소에서 돌담을 끼고 계곡을 따라 조금 가다보면 비스듬히 출입문이 나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해탈문(解脫門)은 국보 제50호로 일찍부터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도갑사 경내는 아주 조용하고 정갈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다. 남도의 산사들은 소담스런 분위기가 있어서 더욱 정감이 간다. 지금은 이층 대웅보전이 들어서는 등 큰 불사를 하여 호젓한 산사의 정취를 느낄 수 없다.
도갑사 관음32응신도
도갑사에는 조선시대 불화의 최고 명작이 봉안되어 있었다. 지금은 일본 쿄오또(京都)의 대찰인 지온인(知恩院)에 소장되어 있는 「관음32응신도(觀音三十二應身圖)」다. 임진왜란 또는 그 직전 이 일대에 빈발하던 왜변(倭變) 때 왜구들이 약탈해간 것으로 추정된다.
높이 2.3미터, 폭 1.3미터의 비교적 대작인 이 두루마리 탱화는 화려한 고려불화의 전통과 조선전기의 산수화풍이 어우러진 둘도 없는 명작으로 1550년 인종 왕비인 공의왕대비(恭懿王大妃)가 돌아가신 인종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이자실(李自實)에게 그리게 하여 이곳 도갑사에 봉안했던 것이다.
'관음32응신도'란 『묘법연화경』의 「관세음보살 보문품(普門品)」에서 관세음보살이 서른두가지로 변신하여 그때마다 다른 모습으로 중생을 구제한다는 내용을 그림으로 풀어낸 것이다. 이 그림을 그린 이자실은 「송하보월도」를 그린 노비 출신의 화가인 학포 이상좌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도선국사비
미륵전에서 내려와 다시 산 위쪽으로 몇걸음 더 올라가면 도갑사를 일으킨 도선(道詵)과 중창한 수미(守眉)선사 두 분의 공적을 새긴 높이 4.8미터의 거대한 비석을 볼 수 있다. 이 비석을 받치고 있는 돌거북은 아마도 우리나라 비석거북 중에서 가장 큰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 거대한 모습이다.
게다가 고개를 왼쪽으로 틀게 하여 생동감도 표출하였고 흰 대리석 비의 용머리 부분도 아주 정교하여 볼 만한 물건인데 겨우 지방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을 뿐이다. 글을 지은 분은 삼전도비를 쓴 바 있는 영의정 이경석(李景奭, 1596~1671)이고, 글씨는 한석봉의 제자 오준(吳竣, 1587~1666)이 썼다.
영암 월출산이 내세우는 또 하나의 인물, 백제 왕인(王仁) 박사의 유허지가 도갑사 남쪽 성기동(聖基洞)에 있는데 한 번은 가볼 만하다. 왕인 박사는 백제 고이왕 52년(285)에 일본에 한문(천자문)을 전해주어 일본의 문명이 발전할 수 있는 인프라를 제공했던 백제인이다.
일본 토오꾜오의 우에노공원을 거닐다가 길가에 세워진 왕인 박사 추모비를 보면 일본사람들이 고마워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었다. 영암의 왕인 박사 유적지도 이처럼 조용하고 차분한 사적지로 만들었으면 거기서 마음으로 생각게 하는 바가 더 깊고 그윽했을 성싶다.
월남사터를 지나며
영암에서 큰 고개를 넘어가는데, 그 고개가 풀티재, 초령(草嶺)이다. 현재는 터널이 뚫렸는데 그 옛날에는 험하고 험한 누릿재, 황치(黃峙)를 넘어야 했다고 한다. 풀티재, 누릿재 고갯마루는 영암과 강진을 갈라놓는 경계선이다.
고갯길을 내려가면서 우리는 다시 월출산이 봉우리부터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고개가 끝날 무렵 시야가 넓어지면서 오른쪽으로 마을이 나타나니 거기가 월남리(月南里)이다. 나는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창 오른쪽 월남상회 옆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예쁜 마을이 나옵니다. 거기에는 준수하게 생긴 고려시대 삼층석탑이 있습니다. 석탑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이것을 모전석탑(模塼石塔)이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맞는 표현이 아닙니다.
탑의 지붕돌이 지붕꼴이 아니라 계단식으로 되어서 그렇게 부른 모양인데 그렇다고 벽돌 모양인 것은 아닙니다. 이 탑이 중요한 것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음에도 부여의 정림사탑을 모방하는 지역적 특성이 살아있다는 점이며 그래서 늘씬하고 우아한 풍모가 느껴진다는 점입니다.
월남사터 삼층석탑 가까이에는 깨진 비석을 등에 이고 있는 돌거북이가 있는데, 돌거북 얼굴은 용머리 형상으로 힘이 장사로 느껴집니다. 대부분의 고려 조형물에 보이는 완력과 괴력의 강조가 여기에도 나타나 있습니다. 이 비는 월남사를 창건한 진각(眞覺)국사의 비입니다.“
무위사 극락보전의 아름다움
월남리에서 강진 쪽으로 불과 3킬로미터. 길가에는 ‘국보 제13호’라는 큰 글씨와 이발소 그림풍의 관음보살상 입간판이 오른쪽으로 화살표를 해놓고 있다. 여기서 월출산 쪽으로 다시 3킬로미터. 그러다 보면 산모퉁이를 도는 순간 월출산의 동남쪽 봉우리가 환상의 나라 입간판처럼 피어오른다.
무위사에 들어서면 정면에 보이는 정면 3칸의 맞배지붕 주심포집이 그렇게 아담하고 의젓하게 보일 수가 없다. 조선시대 성종 7년(1476) 무렵에 지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목조건축의 하나다. 세상의 국보 중에는 국보답지 못한 것이 적지 않지만 무위사 극락보전은 국보 제13호의 영예에 유감없이 답하고 있다.
예산 수덕사 대웅전, 안동 봉정사 극락전, 영주 부석사 조사당 같은 고려시대 맞배지붕 주심포집의 엄숙함을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한편으로는 조선시대 종묘나 명륜당 대성전에서 보이는 단아함이 그대로 살아 있다. 거기에다 권위보다도 친근함을 주기 위함인지 용마루의 직선을 슬쩍 공글린 것이 더더욱 매력적이다.
극락보전 안에는 성종 7년에 그림을 끝맺었다는 화기(畵記)가 있는 아미타 삼존벽화와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가 원화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이것은 두루마리 탱화가 아닌 토벽의 붙박이 벽화로 그려진 가장 오래된 후불(後佛)벽화로, 화려하고 섬세했던 고려불화의 전통을 유감없이 이어받은 명작 중의 명작이다.
무위사 벽화 이래로 고려불화의 전통은 맥을 잃게 되고 우리가 대부분의 절집에서 볼 수 있는 후불탱화들은 모두 임란 이후 18~19세기의 것이니 그 기법과 분위기의 차이는 엄청난 것이다.
한정식의 3대 음식점
강진땅을 답사할 때 나는 언제나 남도장여관에 여장을 풀고 해태식당에서 저녁을 먹는다. 해태식당은 강진 공용터미널 뒤쪽에 있는 한정식집으로 해남 천일식당, 서울 인사동 영희네집과 더불어 조선백반의 진수를 보여주는, 내 경험으로 꼽을 3대 한정식집 중 하나다.
해태식당은 주인 아줌마의 인상이 넉넉하고 며느님도 상냥하게 맞아주고 한정식 한 상에 채어육(菜魚肉), 즉 육해공군이 밑반찬과 요리로 28접시나 나온다. 돔배젓·토하젓 같은 토산젓갈뿐만 아니라 깻잎 하나를 무쳐도 서울 맛과는 다른 접시가 되며, 생선회와 찌개는 철따라 메뉴가 달라진다.
영랑생가의 툇마루에서
영랑생가는 강진군 강진읍 남성리 211번지이다. 김영랑(金永郞, 1903~50)의 본명은 윤식(允植), 1930년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등과 『시문학』지를 창간하여 「내 마음을 아실 이」 같은 향토색 물씬 풍기는 영롱한 서정시로 이름을 얻고 또 ‘북의 소월, 남의 영랑’이라는 말과 함께 뭇사람의 사랑을 받았다.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 같은 영랑의 시를 생각하면 나는 1930년대 식민지 현실 속에 만연한 인간적 상실과 좌절을 뼛속까지 느끼게 된다. 영랑의 시가 향토적 서정과 민족적 운율을 동반한 영롱한 서정시라는 것은 문학사가들의 해설이 없어도 알겠고 또 실수 없이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서정의 발현이라는 것이 너무 파리하고 가냘프다. 모란이 피기까지 그가 기다린다는 것은 고작 ‘찬란한 슬픔의 봄’이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고 개화·신문화운동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여 1925년이 되면 카프(KAPF)를 비롯한 진보적인 문예운동이 일어나다가 1930년대 들어서면 국내는 진보적 운동이 결정타를 맞고 그 대신 남만주와 북간도에서는 항일 게릴라와 독립군이 무장투쟁을 하고 있을 때다.
이때 우파의 문학·예술인들은 맥없이 순수예술을 주장하다가 그래도 그중 괜찮다는 사람들이 일말의 양심 내지 자존심에서 좌파가 내세운 민족성·현실성의 가치 중 일부를 고작해서 향토색이라는 이름으로 흡수하여갔다. 그래서 나는 영랑의 시에서 차라리 측은한 인간적 상실과 사회적 좌절의 비애가 느껴지는 것이다.
다산초당
강진땅이 나의 ‘남도답사 일번지’로 올라온 것은 다산 정약용의 18년 유배지가 여기였고, 여기에서 그의 학문이 결실을 맺게 되었고, 그의 숱한 저술, 저 유명한 『목민심서(牧民心書)』가 집필되었기 때문이다.
이름은 초당이라고 하였건만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기와 지붕으로 툇마루가 넓고 길며 방도 큼직하여 도저히 유배객이 살던 집 같지가 않다. 나도 본 일이 없지만 실제로 이 집은 조그만 초당이었다고 한다. 그것이 무너져 폐가로 된 것을 1958년 다산유적보존회가 이처럼 번듯하게 지어놓은 것이다.
다산과 추사의 현판 글씨
다산초당의 현판 중 행서로 씌어진 ‘다산초당(茶山艸堂)’과 예서를 변형시켜 쓴 ‘보정산방(寶丁山房)’ 모두 추사 김정희의 글씨다. 이중 다산초당은 추사의 글씨를 집자해서 만든 것인지라 글씨에 울림은 있으나 글자의 크기와 구성이 다소 어수선해 보인다. 그러나 ‘보정산방’ 현판은 추사체의 멋이 한껏 풍기는 명작이다.
다산초당 연못 옆 조그만 기와집에는 ‘다산동암(茶山東菴)’이라는 정약용 글씨를 집자한 현판이 걸려 있다. 정약용은 학자로서 상당한 명필이었다. 그의 글씨는 해서건 초서건 획이 아주 정확하고 붓을 들어올리고 내리면서 강약의 리듬을 잘 맞추어 글씨의 흐름이 겉멋으로 기울거나 자세의 흐트러짐이 없다.
멋을 부렸음에도 그 멋이 단아한 규율과 법도에 꼭 들어맞는 한에서만 구사했다. 정약용의 글씨에서는 해맑은 느낌이 마치 천고의 무공해 글씨체 같기도 하고, 술에 곯아떨어진 다음날 아침 밥상에 나온 북어국 백반 같기도 하다.
추사는 정약용보다 24세 연하로 다산의 아들인 정학연, 정학유 형제와 친구로 지냈으니 한 세대 아래인 셈이다. 추사가 다산을 얼마나 존경하고 사모하였는가는 다산이 지은 「수선화」라는 시에 잘 나타나 있다.
1828년 가을, 다산 나이 66세, 추사 나이 42세 때, 추사는 평양에 갔다가, 그때 마침 연경 다녀오는 사신이 추사의 부친인 평안감사에게 수선화 한 뿌리를 선물하자 추사는 이를 얻어 화분에 심은 다음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남양주 여유당에 계신 다산 선생께 보냈고, 다산은 기쁜 마음에 「수선화」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
다산동암의 그림 한 폭과 일기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매조도(梅鳥圖)」는 정약용이 1813년 7월 14일 다산동암에서 그리고 썼다는 것으로 그림 아래쪽에는 그의 독특한 ‘북어국 백반체’로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파르르 새가 날아 내 뜰 매화에 앉네
향기 사뭇 진하여 홀연히 찾아왔네
이제 여기 머물며 너의 집을 삼으렴
만발한 꽃인지라 그 열매도 많단다.
翩翩飛鳥 息我庭梅
有烈其芳 惠然其來
爰止爰棲 樂爾家室
華之旣榮 有蕡其實
내가 강진에서 귀양살이한 지 수년 됐을 때 부인 홍씨가 헌 치마 여섯 폭*을 부쳐왔는데, 이제 세월이 오래되어 붉은 빛이 가셨기에 가위로 잘라서 네 첩(帖)을 만들어 두 아들에게 물려주고 그 나머지로 이족자를 만들어 딸아이에게 준다.
余謫居康津之越數年 洪夫人寄敝裙六幅 歲久紅渝 剪之爲四帖 以遺二子 用其餘 爲小障 以遺女兒
매화가지에 앉은 새의 그림 또한 그 애절한 분위기가 어느 전문화가도 흉내 못 낼 솜씨로 되어 있다. 붓의 쓰임새가 단조롭고 먹빛과 채색의 변화도 구사되지 못했건만 화면 전체에 감도는 눈물겨운 애잔함이란 누구도 흉내 못 낼 것 같다.
*다산의 부인 홍씨가 보내주었다는 치마는 시집올 때 입은 녹의홍상(綠衣紅裳)일 가능성이 크다. 2006년에 다산의 이 ‘하피첩(霞皮帖)’이 200년 만에 새로 공개되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그것이 진품이냐 아니냐를 놓고 의견이 엇갈리고 있지만, 붉은 치마에 깃든 사랑의 정만큼은 뜨겁게 느껴진다.
다산초당을 찾은 답사객은 어둡고 습한 초당에 오래 머물지 못한다. 너나없이 동암 바로 옆에 있는 천일각(天一閣)*으로 빠져나가 거기서 멀리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구강포를 바라보며 쾌재를 부른다. 그 풍광의 시원한 눈맛이란 가보지 않은 자에겐 설명할 길이 없다. *정약용 유배시에 천일각 건물이 없었다.
일찍이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이 “다산 선생 한 사람에 대한 연구는 곧 조선사의 연구요, 조선 근세사상의 연구요, 조선혼의 밝음과 가리움 내지 조선 성쇠존망에 대한 연구이다”라고 설파한 바 있다.
갑오농민전쟁 때 동학군이 선운사 마애불 배꼽에서 꺼냈던 비기(秘機)는 곧 『목민심서』였다는 전설, 심지어는 베트민의 호찌민(胡志明)이 부정과 비리의 척결을 위해서는 조선 정약용의 『목민심서』가 필독의 서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으니, 이런 것을 그분 위대함의 보론으로 삼고 싶다.
백련사
다산초당 천일각에서 만덕산 허리춤을 세 굽이 가로질러 백련사에 이르는 산길은 늦은 걸음이라도 30분 안에 다다를 수 있는 쾌적한 등산길이다. 정다산이 강진 유배시절 인간적·사상적 영향을 적지않이 서로 주고받았던 백련사 혜장(惠藏, 1772~1811)스님을 만나러 다니던 길이다(최근에 해월루가 새로 지어졌다).
백련사(白蓮寺)는 읍내가 가까운 절집답게 크도 작도 않은 규모로 만덕산 한쪽 기슭 남향밭으로 자리잡고 있다. 해안변에 바짝 붙어 있어 강화도 정수사, 김제의 망해사처럼 바다를 훤히 내다보는 호쾌한 경관도 갖고 있는데다가 서산 개심사 못지않은 정갈한 분위기도 갖추고 있어서 이곳을 찾은 사람을 결코 실망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백련사는 우리나라 사찰 중에서 예외적으로 다소는 위압적인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백련사의 불친절성은 가람배치의 특수성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백련사 초입 넓은 마당에는 천왕문이라도 있음직한 자리엔 아무런 축조물이 없이 저 위편에 장대한 규모의 만경루(萬景樓)가 우리의 시야를 가로막는다.
*가람(伽藍)이란 말은 범어를 음역한 것으로 사찰을 뜻하며, 가람배치란 말은 사찰 건축의 형식화된 틀, 혹은 정형화된 공간배치를 의미한다. 불교사원을 건축할 때는 중요한 건물들, 즉 금당(金堂), 탑(塔), 문(門), 회랑(回廊), 강당(講堂), 경루(經樓), 종루(鐘樓), 승방(僧房) 등의 규모와 상호간의 거리 및 위치 등에 공간적인 규칙성이 있는데 이를 가람배치라고 할 수 있다. [출처: 한국고고학사전]
대웅전 또한 높은 축대 위에 팔작다포집으로 하늘을 향해 날개를 편 듯한 형상으로 우뚝 서 있고, 그 정면에는 계단이 없으므로 또다시 저쪽 옆으로 빙 돌게끔 되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839년 구산선문 중 하나인 충남 보령 성주사문을 개창했던 무염(無染)선사가 창건했다고 하니, 신라말기에 지방호족들이 큰스님을 초치하여 산간벽지에도 절을 세우던 그 시절에 그런 사연으로 세워진 것이다.
이후 원묘(圓妙, 속명 서료세徐了世)스님이 최씨정권과 밀착해 있던 지방호족들의 후원을 받아 1211년부터 7년간의 대역사 끝에 80여 칸의 백련사를 중건했는데 그의 제자 된 중만도 38명, 왕공·귀족·문인·관리로 결사에 들어온 사람이 300명이었다고 한다. 이후 120년간 백련사에서는 8명의 국사가 배출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말에 왜구의 잦은 침략이 극에 달하여 급기야 해안변 40리 안쪽에는 사람이 살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보니 강진만에 바짝 붙어 있는 백련사도 어쩔 수 없이 폐사가 되고 말았는데, 조선 초기에 행호(行乎)스님이 나타나 효령대군이라는 왕손의 후원으로 중창을 보게 된다.
백련사 만경루를 답사객에게 불친절하게 보일 정도로 가파른 비탈을 이용하여 세운 이유는, 바로 만덕산 산자락에서 구강포로 이어지는 평온한 풍광을 끌어안기 위함이었던 것이다. 백련사 만경루를 다시 빙 돌아 앞마당으로 내려오면 우리는 장대한 동백나무숲 한가운데로 난 길을 걸어내려가게 된다.
3천평 규모의 이 울창한 동백숲은 천연기념물 제151호로 지정된 조선의 자랑거리로 고창 선운사의 동백숲보다도 훨씬 운치가 그윽하고 연륜도 깊다.
모든 것을 다 떠나서 이 동백꽃을 구경할 목적만으로 백련사를 찾아올 만도 한데, 그 시기는 동백꽃이 반쯤 져갈 때, 그리하여 탐스런 꽃송이가 목이 부러지듯 쓰러져 나무 밑 풀밭을 시뻘겋게 물들이고 상기도 피어 있는 꽃송이들이 홍채를 잃지 않은 3월 중순께가 좋다.
녹우당과 해남윤씨 유물전시관
해남읍에서 대흥사 쪽으로 꺾어지면 자못 넓은 들판을 달리게 되는데, 태백산에서 출발하여 소백산, 속리산, 덕유산, 지리산을 이루며 호기있게 치닫던 노령산맥의 끝자락이 망망한 남해바다를 내다보고는 급브레이크를 밟아 주춤거리면서 이루어낸 분지평야가 삼산벌이며 문득 정지한 지점이 두륜산이다.
임란 이전에 삼산벌의 주인은 해남 정씨였는데, 선대의 예에 따라 자손균분의 상속으로 이 땅은 해남 윤씨에게 시집간 딸에게 떼어주었다. 처갓집 덕분에 큰 부자가 된 어초은(漁樵隱) 윤효정(尹孝貞)은 일찍이 장자상속을 시행하고 이것을 윤씨 집안 만대의 유언으로 남기어 해남 윤씨의 자산은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었다.
이리하여 신흥갑부가 된 해남 윤씨 집안은 이 재력을 바탕으로 하여 인물을 배출하기 시작하니 어초은의 4대손에 이르면 고산 윤선도라는 걸출한 인물이 나오고 그의 증손자대에는 공재 윤두서가 배출되었다.
삼산벌을 가로질러 3킬로미터쯤 가다보면 왼편으로 ‘고산 윤선도 고택’이라는 표지판이 나오는데 여기서 1킬로미터쯤 깊숙이 자리잡은 마을이 바로 연동마을이며, 연동마을 제일 안쪽 울창한 비자나무숲에 덮인 덕음산 바로 아래에 해남 윤씨 종갓집이 자리잡고 있다.
이 집 사랑채는 고산 윤선도가 30년 유배 끝에 다시 관직에 들어갔을 때 효종이 왕세자 시절 사부였던 윤고산에게 수원에 사랑칸 한 채를 지어 하사해준 것을 훗날 여기로 옮긴 것이다. 녹우당(綠雨堂)이라는 당호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뒷산의 비자나무가 한줄기 바람에 스치면 우수수 봄비 내리는 소리처럼 들렸다고 해서 붙인 것이다.
이 녹우당 편액(扁額)은 윤공재의 친구이자 성호 이익의 이복형인 옥동(玉洞) 이서(李漵)의 글씨이다. 그는 당대의 명필로 서결(書訣)까지 지었고, 중국과 다른 민족적 서체인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원조인 분이다.
해남 윤씨 유물전시관이 처음 세워진 것은 1979년, 그후 1986년에 해남군에서 지금의 관리소를 짓고 유물을 전시·관리해왔는데, 작년에 새로 전시관을 따로 지어 현재는 주차장 왼편은 관리실, 오른편은 전시실로 되어 있다.
유물전시관에는 보물로 지정된 노비문서, 윤고산의 육필원고 중 『금쇄동기(金鎖洞記)』 『산중신곡(山中新曲)』 등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산중신곡』 첩 중에 “내 벗이 몇인고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로 시작되는 유명한 「오우가(五友歌)」가 펼쳐져 있다.
이 유물관이 자랑하는 또다른 유물은 국보 제240호로 지정된 공재 윤두서의 자화상과 보물로 지정된 윤공재와 그의 아들 윤덕희, 손자 윤용의 3대 작품을 모은 『가전화첩(家傳畵帖)』인데, 공재 윤두서의 작품으로 잘못 알려진(손자 윤용의 작품) 다 낡은 「미인도」를 도난당했다가 반환받은 사건도 있었다고 한다.
두륜산 대흥사
국토의 최남단에 우뚝 선 두륜산(해발 706미터)의 여러 봉우리에서 흘러내린 골짜기들이 한줄기로 어우러져 제법 큰 계곡을 이루어 ‘너부내’라는 이름을 얻은 펑퍼짐한 자리에 대흥사는 자리잡고 있다. 행정구역상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九林里) 장춘동(長春洞)에 속하는데, ‘아홉 숲’에 ‘긴 봄’이라는 이름이 아무렇게나 붙여진 것은 아닐 것이다.
너부내 계곡을 타고 대흥사로 들어가는 십리 숲길은 해묵은 노목들이 하늘을 가리는 나무터널로 이어진다. 소나무·벚나무·단풍나무가 저마다 제멋으로 자라 연륜을 자랑하고 있으니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모두 계절의 제 빛을 놓치지 않는다.
대흥사 입구 피안교를 건너 ‘두륜산 대흥사’라는 편액(조선 후기의 서예가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이 씀)이 걸려 있는 천왕문을 지나면 길 오른쪽으로 고승의 사리탑과 비석이 즐비하게 늘어선 승탑밭이 나오는데 여기에는 서산대사 이래 13대종사(大宗師)와 13대강사(大講師)의 납골이 모셔져 있다.
대흥사 여러 당우(堂宇)들에 걸려 있는 현판 글씨는 대단한 명품으로 조선후기 서예의 집약이기도 하다. 대웅보전, 천불전, 침계루(枕溪樓)는 원교 이광사의 글씨이며, 표충사는 정조대왕의 친필이고, 가허루(駕虛樓)는 창암 이삼만, 무량수각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인 것이다.
두륜산의 원래 이름은 ‘한듬’이었다. 국토 남단에 불찰 솟은 그 형상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이것을 한자어와 섞어서 ‘대듬’이라고 부르더니 나중엔 대둔산(大芚山)이라 불리게 됐고 ‘한듬절’은 ‘대듬절’에서 ‘대둔사’로 바뀌게 되었다.
그런 중 또 유식한 자가 나타나서 대둔산은 중국 곤륜산(崑崙山) 줄기가 동쪽으로 흘러 백두산을 이루고 여기서 다시 뻗은 태백산 줄기의 끝이라는 뜻에서 백두산과 곤륜산에서 한 자씩 따서 두륜산(頭崙山)이라고 이름지었는데, 일제 때 전국 지명을 새로 표기하면서 ‘륜’자를 바꾸어 두륜산(頭輪山)이라고 하고 대둔사는 대흥사로 바꾸어놓았다고 한다.
대흥사 응진전 앞의 삼층석탑(보물 제320호), 두륜산 정상 바로 못미쳐 있는 북미륵암의 마애불(국보 제308호)과 삼층석탑(보물 제301호), 그러니까 나라에서 국보·보물로 지정한 대흥사의 세 유물이 모두 나말여초의 시대양식을 지니고 있다.
서산대사의 유언과 표충사
국토의 남단, ‘지방 중에서도 지방’의 절집으로 창건되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던 ‘한듬절’이 대흥사로 일약 변신하게 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의 유언 때문이었다.
1604년 1월, 어느날 서산대사는 묘향산 원적암에서 마지막 설법을 마치고는 제자 사명당(泗溟堂, 1544~1610)과 처영(處英)스님에게 당신의 의발(衣鉢)을 두륜산에 둘 것을 유언하였다.
"두륜산은 해변 한구석에 있어 명산은 아니지만 거기에는 세가지 중요한 뜻이 있느니라. 첫째는 기화이초(奇花異草)가 항상 아름답고 옷과 먹을 것이 끊이지를 않는다. 내가 보건대 두륜산은 모든 것이 잘될 만한 곳이다. ...... 내가 출가하여 머리 깎고 법을 들은 곳이 두류산(頭流山, 즉 지리산)이니 여기는 종통(宗統)의 소귀처(所歸處)이다."
또 절집의 기록에 의하면 1669년에 정면 3칸 맞배지붕으로 표충사를 지어서 여기에 서산대사, 사명당, 처영스님 등 세분의 영정을 모셨다고 한다. 그러고는 1백년이 좀 넘었을 때 호조판서를 지내던 서유린의 진언에 따라 정조대왕은 표충사라는 어필사액(御筆賜額)을 내려 해마다 예조에서 제사를 지내게 했다고 한다.
대흥사의 가람배치는 아주 뛰어난 마스터플랜을 보여준다. 양쪽에서 흘러드는 계곡을 끌어안아 절집 전체를 4구역으로 나누고는, 대웅보전을 중심으로 한 남원(南院)에는 법당과 승방이, 천불전을 중심으로 한 북원(北院)에는 강원(講院)이 있으며 그 위로 표충사와 부속건물, 대광명전과 부속건물로 절집의 두께를 더하여갔다.
초의스님
초의스님의 속세 성명은 장의순(張意恂)이었으며, 1786년 나주 삼향면에서 태어나 5세 때 물에 빠진 것을 어느 스님이 살려준 것이 인연이 되어 16세에 남평 운흥사(雲興寺)에 들어가 중이 되었다.
초의는 월출산·금강산·지리산·한라산 등 명산을 유람하며 선지식을 찾아다니고 불법을 구하다가 대흥사 조실 완호스님의 법맥을 이어받았다. 그는 종교로서 불교의 굴레를 벗어 학문으로서 선교(禪敎)를 연구하고 유학과 도교에까지 지식을 넓혀갔으며, 맥이 끊어져가던 차(茶)문화를 일으켜 『동다송』 같은 명저를 남겼다.
초의는 자신의 명성이 차츰 세상에 알려지자 은거에 뜻을 두고 대흥사에서 두륜봉 쪽 산중턱에 일지암(一枝庵)을 짓고 거기서 두문불출하며 40여년 지관(止觀)에 전력하니 스님께 사미계를 받은 스님이 40명, 보살계를 받은 스님이 70명, 선교와 잡공(雜工)을 배운 사람은 수백명이었다고 한다. 향년 81세, 법랍 66년이었다.
초의와 동갑내기인 추사 김정희는 초의에게 차를 배웠고, 초의가 보내주는 차 마시기를 제일 좋아하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추사는 초의에게 차를 구하는 편지를 자주 보냈는데 그중 한통에 다음과 같은 애절한 사연이 들어 있다.
"편지를 보냈는데 한번도 답은 보지 못했습니다. 아마도 산중엔 반드시 바쁜 일은 없을 줄로 생각되는데 그렇다면 나 같은 세속 사람과는 어울리고 싶지 않아서 나처럼 간절한 처지도 외면하는 것입니까. (…)
나는 스님을 보고 싶지도 않고 또한 스님의 편지도 보고 싶지 않으나 다만 차와의 인연만은 차마 끊어버리지도 못하고 쉽사리 부수어버리지도 못하여 또 차를 재촉하니 편지도 필요없고 다만 두 해의 쌓인 빚을 한꺼번에 챙겨 보내되 다시는 지체하거나 빗나감이 없도록 하는 게 좋을 거요."
어린애들의 장난기어린 투정까지 부리면서 이처럼 막역한 우정을 나누고 있는 것은 그것 자체가 미담이고, 선망의 대상이 된다. 그리하여 추사의 예술 중에서 백미로 꼽히는 희대의 명작 「명선(茗禪, 차를 마시며 참선에 든다)」 같은 작품을 낳은 것이었다.
한나라 때 비문인 백석신군비(白石神君碑) 글씨에서 그 본을 구하여 웅혼한 힘과 엄정한 구성을 유지하면서도 필획의 변화가 미묘하게 살아 움직이는 추사 예서체의 진수가 들어 있다.
추사와 원교 이광사
추사가 활약하던 당시 글씨에 있어서 그동안 조선의 서체는 원교 이광사의 동국진체라는 개성적이며 향색(鄕色), 즉 민족적 색채가 짙은 것이 크게 유행하고 있었는데 추사는 이를 글씨의 고전, 한나라 때 비문 글씨체의 준경한 법도에 근거한 것으로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주도 귀양길에 추사는 해남 대흥사에 들러 초의를 만났다. 귀양살이 가면서도 그 기개가 살아있어 대흥사의 현판 글씨들을 비판하며 초의에게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것이 원교 이광사인데, 어떻게 안다는 사람이 그가 쓴 대웅보전 현판을 버젓이 걸어놓을 수 있는가”라며 있는 대로 호통을 치며 신경질을 부렸다. 초의는 그 극성에 못이겨 원교의 현판을 떼어내고 추사의 글씨를 달았다고 한다.
1848년 12월, 추사는 63세의 노령으로 귀양지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햇수로 9년 만에 맞는 해방이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길에 다시 대흥사에 들른 추사는 초의를 만나 회포를 풀던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옛날 내가 귀양길에 떼어내라고 했던 원교의 대웅보전 현판이 지금 어디 있나? 있거든 내 글씨를 떼고 그것을 다시 달아주게. 그때는 내가 잘못 보았어.”
지금 대흥사 대웅보전에는 이리하여 다시 원교 이광사의 현판이 걸리게 되었고, 그 왼쪽에 있는 승방에는 추사가 귀양가며 썼다는 ‘무량수각’ 현판이 하나 걸리게 되었는데, 원교의 글씨체는 획이 가늘고 빳빳하여 화강암의 골기(骨氣)를 느끼게 하는데, 추사의 글씨는 획이 살지고 윤기가 나는 상반된 미감을 보여준다.
'땅끝'에 서서
두륜산의 여맥이 주체하지 못하여 날카로운 톱니처럼 산등성이를 그어가다가 문득 멈추어 선 곳이 땅끝이다. 땅끝으로 가는 들판을 가로지르다 보면 마치 공룡의 등뼈 같은 달마산 줄기가 한눈에 들어오는데 그 정상 가까이에는 고색창연한 미황사(美黃寺)라는 아름다운 절이 있다.
달마산 줄기가 한굽이 치솟아오른 사자봉 높은 산마루, 거기가 일명 토말(土末), ‘땅끝’이다. 북위 34도 17분 38초. 사자봉 봉수대 옆에는 5층 건물 높이의 땅끝전망대가 세워져 있어 우리는 땅끝에 이는 모진 바람을 막고 사위를 살필 수 있다.
1961년, 그의 나이 스물한살 때 김지하는 목포 선착장에서 문득 ‘땅끝행(行)’이라는 깃발을 보았고, 절망감을 못 이겨 ‘땅끝’으로 가서 끝내버릴 작정이었단다. 그래서 겨우 간 곳이 용당반도 끝이었고, 그 스산한 시야 바다 물결 속에 서툰 자살기도는 실패하고 한 편의 시만 남겼다(「용당리에서」).
그리고 1985년, 그러니까 김지하가 긴 옥고를 치르고 석방되어 해남으로 내려온 지 2년째 될 때 그는 사자봉 땅끝에 서서 또다시 막바지까지 왔다는 절망감에서 한 편의 시를 썼다. 그것이 그의 유명한 「애린」이다.
땅끝에 서서
더는 갈 곳 없는 땅끝에 서서
돌아갈 수 없는 막바지
새 되어서 날거나
고기 되어서 숨거나
(…)
혼자 서서 부르는
불러
내 속에서 차츰 크게 열리어
저 바다만큼
저 하늘만큼 열리다
이내 작은 한 덩이 검은 돌에 빛나는
한 오리 햇빛
애린
나.
예산 수덕사와 가야산 주변
천혜의 땅 ‘내포’와 가야산
오대산에서부터 뻗어내려온 차령산맥 줄기가 서해바다에 다가오면서 그 맥을 주춤거리다 방향을 아래쪽으로 틀면서 마지막 용틀임을 하듯 북쪽을 향해 치솟은 땅이 가야산(伽倻山, 678미터)이다. 이리하여 차령산맥 위쪽 가야산을 둘러싼 예산·서산·홍성·태안 나아가 당진·아산에는 비산비야의 넓은 들판이 생겼다. 옛날에는 여기를 ‘내포(內浦)’라 했고 지금도 이 일대를 내포평야라고 부른다.
내포는 농사와 과일이 잘될 뿐만 아니라 안면도·황도의 조기잡이, 간월도의 어리굴젓이 상징하는 바다의 풍요가 있다. 그래서 조선후기의 실학자이자 지리학자였던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은 『택리지(擇里志)』의 팔도총론에서 이 지역에 대해 "충청도는 내포를 제일 좋은 곳으로 친다. 토지는 비옥하고 평평하고 넓다. 물고기, 소금이 넉넉하여 부자가 많고 또 대를 이어 사는 사대부도 많다."고 설명하였다.
이런 내포땅인지라 기암절벽이 이루는 절경은 없어도 낮은 구릉이 굽이치는 평화로운 전경은 일상과 평범 속의 아름다움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무슨 연유에서일까, 내포땅이 배출한 인재들은 온화한 성품의 소유자가 아니라 기골이 강해서 시쳇말로 ‘깡’이 센 사람들이다.
최영 장군부터 시작해서 사육신의 성삼문, 임진왜란의 이순신, 9년 유배객 추사 김정희, 자결한 구한말의 의병장 면암 최익현, 김대건 신부, 윤봉길 의사, 김좌진 장군, 개화당의 김옥균, 『상록수』의 심훈, 남로당의 박헌영, 만해 한용운, 문제의 화가 고암 이응로……
슬프다 수덕사여!
내포땅 가야산의 가장 이름 높은 명승지는 수덕사이다. 가야산 남쪽 덕숭산(德崇山, 580미터) 중턱에 널찍이 자리잡은 수덕사는 백제 때부터 내려오는 유서깊은 고찰이다. 고려 때 지은 대웅전이 건재하고 근세에 들어와서는 경허와 만공 같은 큰스님이 있었다.
그러나 수덕사는 더이상 그런 수덕사가 아니다. 그 옛날의 수덕사는 완벽하게 망가져버렸다. 최근 몇년간에 걸친 엄청난, 아니 어마어마한 중창불사로 으리으리한 사찰이 되었다. 마치 중국 무술영화에서나 본 적이 있을 듯한 다듬어진 돌길에다 돌계단으로 화려의 극을 달린다.
파란 하늘 아래로 바짝 붙어선 덕숭산 산자락에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소나무·떡갈나무가 복스럽게 자라 마치 백제시대 산경문전 전돌에 나오는 산수무늬인 듯 곱고 우아한 자태를 보여준다. 아! 슬프다. 오늘의 수덕사여, 그 옛날의 수덕사여.
대웅전—간결한 것의 힘과 멋
수덕사가 아무리 망가졌어도 거기에 대웅전 건물이 건재하는 한 나는 수덕사를 무한대로 사랑한다. 수덕사 대웅전은 고려 충렬왕 34년(1308)에 건립된 것으로, 현재까지 정확한 창건연대를 알고 있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다. 이를 기준으로 하여 건축사가들은 부석사 무량수전, 안동 봉정사 극락전, 강릉 객사문 등 고려시대 건축의 양식과 편년을 고찰한다.
수덕사 대웅전 건축은 그 구조와 외형이 아주 단순하다. 안정된 정서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수덕사 대웅전의 저 간결미와 필요미가 연출한 정숙한 아름다움에 깊은 마음의 감동을 받을 것이다. 대웅전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은 설명이 적혀 있다.
"국보 제49호 (…) 맞배지붕에 주심포형식을 한 이 건물은 주두 밑에 헛첨차를 두고 주두와 소로는 굽받침이 있으며, 첨차 끝은 쇠서형으로 아름답게 곡선을 두어 장식적으로 표현하고, 특히 측면에서 보아 도리와 도리 사이에 우미량을 연결하여 아름다운 가구를 보이고 있다."
전통 한옥의 지붕모양에는 맞배지붕, 우진각지붕, 팔작지붕 세가지의 기본형이 있다. 팔작지붕은 우진각지붕의 세모꼴 측면에 다시 여덟 팔(八)자의 모양을 덧붙여 마치 부챗살이 퍼지는 듯한 형상이 되었다고 해서 합각지붕이라고도 한다. 경복궁 근정전을 비롯한 조선시대 대부분의 건축과 부잣집 기와지붕은 이 팔작지붕으로 되었다.
그러니까 지붕의 형식 중에서 가장 간단한 기본형이 맞배지붕인 것이다.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 목조건축의 대종은 맞배지붕이었다. 여기에 새로운 스타일인 팔작지붕이 중국에서 건너온 것은 고려중기로 생각되는데 부석사 무량수전이 가장 오랜 유물이다. 화려한 집을 지을 때면 팔작지붕이 어울리지만 거기에는 경건한 기품이 없다. 단순한 것 같지만 맞배지붕에는 엄숙한 분위기가 살아난다.
수덕사 대웅전은 이른바 주심포(柱心包)집이다. 다포(多包)집이 아니라는 말이다. 집을 지으려면 기둥을 세운 다음 이것을 연결시켜 고정해야 한다. 기둥과 기둥을 옆으로 잇는 것을 창방이라고 하고, 앞뒤로 가로지르는 나무를 들보라고 한다.
이 기둥과 창방과 들보를 매듭으로 연결하는 장치, 즉 공포(栱包)를 어떻게 역학적으로 효과있게, 그리고 외형적으로 멋있게 짜느냐가 목조건축에서는 아주 중요한 과제가 된다.
옛날에는 이 공포를 기둥 위에만 설치했다. 그것이 주심포집이다. 그런데 건물을 보다 크고 화려하게 하기 위하여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공포를 만들어서 끼워넣었다. 이것이 다포집이다. 그러니까 맞배지붕에는 주심포가 어울리고, 팔작지붕에는 다포집이 어울린다.
이와 더불어 우리가 빼놓을 수 없는 수덕사 대웅전 건축의 중요한 특징은 배흘림기둥이다. 기둥이 아래에서 위로 곧바로 뻗어올라간 것이 아니라 가운데가 슬쩍 부풀어 탱탱한 팽창감을 느끼게 해주고 윗부분을 좁게 마무리한 기둥을 배흘림이라고 한다.
배흘림기둥은 삼국시대 이래로 우리 목조건축의 중요한 특징이며, 그리스 신전에서도 이 형식이 나타나 이른바 엔타씨스(entasis)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건축물의 외형은 각 부재들이 이루어내는 면분할의 조화 여부에 성패가 걸린다. 수덕사 대웅전의 면분할은 무엇보다도 건물의 측면관에 멋지게 구현되었다. 우리시대 건축에서는 도저히 찾아볼 수 없는 간결성의 멋과 힘이 거기 있다.
더욱이 가로세로의 면분할이 가지런한 가운데 넓고 좁은 리듬이 들어가 있고, 둥근 나무와 편편하게 다듬은 나무가 엇갈리면서 이루어낸 변주는 우리의 눈맛을 더없이 즐겁게 해준다.
지금 안벽에는 아무 그림도 그려져 있지 않으나 원래는 아름다운 야생화 꽃꽂이와 비천상들이 그려져 있었다. 그것은 고려불화 중에서 괘불이 아니라 벽화의 모습을 추정하는 유효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회화의 정수를 보여준다.
1934년 수덕사 대웅전 해체공사가 대대적으로 시행되었다. 이를 위해 겉에 있는 단청과 벽화를 고(故) 임천(林泉) 선생이 모사하던 중 1528년의 개채기(改彩記)를 찾아내고 또 벽화 속에서 원래의 그림을 찾아내었다. 지금 국립중앙박물관 창고에는 그중 임천 선생이 그린 야생화 모사도가 한 폭 보관되어 있다.
만공스님과 정혜사 불유각
오늘날에도 불교계의 수덕사 덕숭문중은 큰 일파를 이루어 요즘처럼 종정 선출이 난항을 거듭할 때면 으레 덕숭문중의 의향이 관심의 초점이 되곤 한다.
수덕사 경내에서 서쪽 계곡을 끼고 덕숭산으로 올라가는 등산길이 있는데, 본사에서 1,200개의 돌계단을 오르면 정혜사(定慧寺)의 능인선원이 나온다. 그 중턱에는 일제시대 때 조선불교의 법통을 지킨 송만공(宋滿空, 1871~1946)스님의 사리탑과 만공스님이 세운 25척의 미륵불이 있다.
만공스님은 정읍 태인 사람이다. 13세 때 부친이 돌아가시자 어머니가 여승이 됨에 따라 중이 되었다. 소년시절부터 참선에 정진한 만공은 30세에 정혜사 선원 조실이 되어 수많은 납자(衲子)를 배출했다. 만공스님이 속세에 살았다면 대단한 기인이었을 것이다.
만공은 젊은 여자의 벗은 허벅지를 베지 않으면 잠이 안 온다고 하였다. 그래서 일곱 여자의 허벅다리를 베고 잤다고 해서 ‘칠선녀와선(七仙女臥禪)’이라는 말이 생겼다. 스님의 이런 파격적인 행위는 그의 은사 스님인 경허스님으로부터 이어받은 것이었다.
일제시대 조선총독이 31본산 주지회의에서 일본불교와 조선불교를 합쳐야 한다고 말하자 만공은 자리를 박차고 “청정본연(淸淨本然)하거늘 어찌 문득 산하대지(山河大地)가 나왔는가!”라고 호령하여 총독이 만공의 기세에 눌렸단다. 그분의 거룩한 초상이다.
만공탑에서 다시 돌계단을 오르면 정혜사 능인선원이 나온다. 정혜사 약수는 바위틈에서 비집고 올라오는 샘물이 동그란 공을 반으로 자른 모양의 석조에 넘쳐흐르는데 이 약수를 덮고 있는 보호각에는 ‘불유각(佛乳閣)’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부처님의 젖이라!’ 글씨는 분명 스님의 솜씨다. 말을 만들어낸 솜씨도 예사롭지 않다. 누가 저런 멋을 가졌던가. 누구에게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았고, 설혹 틀린다 해도 상관할 것이 아니었다(훗날 다시 가서 확인해보았더니 예상대로 만공의 글씨였다).
수덕사에 사연을 심은 사람이 어디 하나둘이겠는가마는 나는 수덕사에 올 때마다 언제나 두 여인을 생각하게 된다. 한분은 그 유명한 김일엽 스님이다. 일엽스님은 1896년생으로 본명은 김원주(金元周).
목사의 딸이었던 일엽은 조실부모한 후 23세에 이화여전을 졸업하고 3·1운동 후 일본에 건너가 토오꾜오에이와(英和)학교에 다니다 이내 귀국하여 잡지 『신여자(新女子)』를 창간하였고, 시인으로서 신문화운동, 신여성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당시 신여성 화가 나혜석만큼이나 파격적으로 소문난 여자였다.
38세의 일엽은 수덕사 만공스님을 만나 발심(發心)하여 견성암(見性庵)에서 머리를 깎았다. 지금 수덕사 대웅전 아래쪽에는 환희대(歡喜臺)라는 작은 건물이 있는데 여기가 곧 그 옛날의 견성암이다.
그 옛날의 견성암 현판은 수덕사 왼쪽에 있는 덕숭총림의 비구니 선방에 옮겨져 걸려 있는데, 덕숭총림은 장판지 240장이 깔린 엄청나게 큰 방에 항시 100명의 여승이 수도하고 있으니 당신이 뿌린 씨가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듯하다.
또 한 여인은 수덕사 입구의 수덕여관* 주인 아주머니. 지금은 할머니라고 불러야 할 분이다. 이분은 우리 현대미술사의 걸출한 화가라 할 고암(顧菴) 이응로(李應魯, 1904~89)의 본부인이시다. * 지금은 수덕사 기념관으로 바뀌었다.
1957년, 고암이 자신의 예술을 국제무대에서 펼쳐볼 의욕으로 독일을 거쳐 빠리로 건너갈 때 그는 이화여대 제자였던 박인경 여사와 함께 갔다. 들리기엔 오래전부터 본부인을 버리고 그렇게 살았단다.
나는 고암을 무척 좋아하고 또 미워한다. 그의 삶을 미워하고, 그의 예술을 좋아한다. 내가 고암을 좋아하는 이유는 누가 뭐래도 고암은 우리 전통회화를 현대적으로 계승한 가장 탁월하고 기량있는 화가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연군 묘와 불타는 가야사
수덕여관을 떠난 우리의 일정은 가야산의 밑동을 한바퀴 훑는 것이다. 그 첫번째 코스는 남연군(南延君), 즉 흥선대원군 아버지의 묘소이다. 우리가 국사교과서에서 배운 상식으로 말하자면 1868년 독일 상인 오페르트가 이 무덤을 파헤쳐 흥선대원군이 대노하고 이후 천주교를 더욱 박해했다는 사건의 현장인 것이다.
고종 5년(1866)에, 두번씩이나 통상 요구를 하다 실패한 오페르트는 미국인 자본가 젠킨스의 자금지원을 받아 프랑스 선교사 페롱을 앞세우고는 1868년 4월 18일 서산 앞바다 행담도에 정박하고 구만포쪽으로 들어와서 스스로 아라사 군병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총을 쏘고 질주하여 곧장 가야산에 있는 남연군 묘를 파헤쳤다.
이 해괴한 사건은 적지 않은 물의를 일으켜 마침내 자본주 젠킨스는 불법 파렴치죄로 기소됐다. 그러나 요즘도 흔히 듣는 구실인 ‘증거불충분’으로 무죄가 됐고 다만 배석판사인 헤이스가 해적의 노략질과 다름없는 무모한 소행이었다는 ‘소수의견’을 냈다. 이것이 그리피스가 쓴 『코리아, 은둔의 나라』에 나오는 얘기다.
흥선대원군이 진노한 것은 그것이 단순히 조상의 묘라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구구한 사연이 있었고 그로서는 천신만고 끝에 자신의 야망을 성취한 음덕이 바로 거기에 있다고 믿었던 또다른 사연이 있다.
이하응이 젊었을 때 정만인(鄭萬仁)이라는 지관이 가야산 동쪽 덕산에 “2대에 걸쳐 황제가 나올 자리〔二代天子之地〕”를 알려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자리는 가야산의 유서깊은 거찰 가야사의 보웅전 앞에 있는 금탑(金塔)—석탑인데 상륜부가 금동으로 되어 있어 이런 별명이 붙은 탑—자리라는 것이었다.
흥선군은 가야사의 중들을 내쫓아 빈 집을 만든 다음 불을 질러 폐사시켜버리는데, 『매천야록』에서는 흥선군이 재산을 처분한 2만냥의 반을 주지에게 주어 불을 지르게 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가야사는 불타버리고 금탑만 덩그러니 남아 있는 폐사지가 되었다.
남연군 묘처럼 명당의 조건에 해당하는 요소들이 거의 모범답안처럼 펼쳐져 조산(祖山)·주산(主山)·안산(安山), 좌청룡·우백호가 이처럼 뚜렷하게 드러나는 곳을 보기 쉽지 않다. 얼핏 보기에 좌청룡 쪽 산세가 너무 험악하다는 인상을 주는데, 그 때문에 계곡 아래쪽에는 석조보살상을 세워 그 기세를 누그러뜨렸다고 한다.
오직 흠이 있다면 주산에서 명당으로 흐르는 지맥이 생각보다 짧다. 그래서 정만인은 만대(萬代)가 아닌 2대(二代)의 천자가 나온다고 예언했나보다.
보덕사의 내력
남연군 묘를 거기에 쓴 후, 흥선군은 실제로 대원군이 되었다. 아들은 고종황제, 손자는 순종황제가 되었으니 별 볼일 없는 황제라도 정만인의 예언만은 맞은 셈이다.
대원군은 누군가에게 보답하고 싶었을 것이다. 정만인에게, 가야사에, 또는 가야산의 음덕에. 또 미안한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특히 가야사에. 고종 2년(1865), 대원군은 남연군 묘 맞은편에 있는 서원산(書院山) 기슭에 절을 짓고 보덕사(報德寺)라는 이름을 내렸다. 은덕에 보답한다는 뜻이 었다.
보덕사는 “토목금벽(土木金碧)으로 치장하여 대단히 웅장하고 화려했으며, 많은 전토와 보화가 내려졌다”고 한다. 주지로는 벽담(碧潭)선사를 임명했고, 절의 시주자는 큰아들 이재면(李載冕)으로 했으니 조선왕조의 마지막 왕실원당(願堂) 사찰인 것이다.
그러나 이 절집은 6·25동란 중에 불타버리고 지금은 ‘능력있는’ 여승들이 중창하여 길도 좋게 닦아놓고 주차장까지 설비해놓은 비구니사찰로 되어 있다.
'예덕상무사'의 보부상 유품
남연군 묘에서 다시 덕산으로 나오면 덕산면사무소 뒤뜰에 있는 ‘예덕상무사(禮德商務社)’ 기념비각과 보부상 유품전시장이 한번 들러볼 만한 곳이다.
패랭이에 솜뭉치를 양쪽에 단 이 장돌뱅이들이 쓰던 도장과 도장궤, 청사초롱, 빨간 보자기〔紅褓〕, 공문서 등을 보면 그 당시 상행위를 상상하는 데 여간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부여군 홍산면 교원리 김재련씨가 소장하고 있는 신표(信標), 비변사에서 발급한 완문(完文) 등과 함께 중요문화재 제30호로 지정된 것이기도 하다.
보부상은 보상(褓商)과 부상(負商)이 합쳐진 말이다. 보상은 보자기에 싸고 다녔고, 부상은 지게에 지고 다녀서 생긴 이름인 것이다. 이 장돌뱅이라 불리는 보부상이 하나의 길드적 조직으로 형성된 것은 고려말 조선초로 생각된다.
이성계가 석왕사(釋王寺)를 지을 때 황해도 토산(兎山) 사람 백달원(白達元)이 보부상을 거느리고 불상과 건자재를 운반한 공이 있어서 이태조가 그에게 보부상의 상행위에 관한 전권을 주었다고 한다. 그래서 ‘예덕상무사’ 비각 안에 모셔져 있는 역대 보부상 두령의 위패 중에서 ‘두령 백토(白兎) 선생 달원(達元) 신위’가 중앙에 크게 세워져 있다.
보부상의 조직은 근대로 내려올수록 커지고 사회구성에서도 점점 큰 몫을 갖게 됐다. 1866년에 와서는 드디어 나라에 보부청(褓負廳)이 세워졌다. 대원군의 큰아들 이재면이 이 보부청의 청무를 맡았다.
그러고 나서 보부청은 여러번 기구가 개편되고 명칭이 바뀌다가 1899년에는 상리국(商理局) 안의 좌사(左社), 우사(右社)로 개편됐다. 그래서 생긴 말이 상무사(商務社)이며 한일병합 후에는 일본인들이 이들을 해산시키고 상권을 오로지하였던 것이다.
해미읍성과 삼화목장
덕산에서 해미(海美)로 가는 길은 참으로 예쁘다. 가야산을 오른쪽으로 두고 왼편으로 펼쳐진 논과 밭을 보는 우리의 마음속에는 평온이라는 감정이 조용히 일어난다.
외지에서 해미로 오는 사람은 꼭 해미읍성에 들른다. 해미읍성은 조선 성종 22년(1491)에 쌓은 읍성으로 고창의 모양성, 낙안의 읍성보다 그 원형이 더 잘 보존되어 있다. 여기는 충청도 병마절도사의 영(營), 즉 사령부가 있었던 곳이다.
1866년,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 때 해미읍성은 감옥소가 되었다. 그리고 무려 1천여명이 처형된 형장으로 이용되었다. 당시 내포땅에는 김대건 신부 이래로 천주학이 크게 퍼져 있었다. 그래서 끌려온 수도 그렇게 많았는데 읍성 안의 한 고목나무가 그 처형장이었다고 한다.
해미를 떠나 개심사 쪽으로 조금만 가면 처음 가는 사람들은 반드시 놀라고 말 전경이 펼쳐진다. 이국 풍경도 이런 이국이 있을까 싶다. 산이란 산은 모두 마치 바리깡으로 머리를 밀듯이 완벽하게 삭발되고 거기에 잘 자란 초목에서는 젖소떼가 또는 한우떼가 무리를 지어 풀을 뜯고 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김종필의 삼화목장이다. 지금은 한서장학재단 소유로 되어 있는 삼화목장은 총 638만평이다. 삼화목장을 거치지 않고는 개심사로 갈 수 없다. 오히려 삼화목장의 깊숙한 곳을 거쳐야 거기에 다다른다.
개심사
개심사 주차장에서 내리면 울창한 솔밭이 앞을 막는다. 그것도 줄기가 붉은 빛을 발하는 아름다운 조선 소나무이다. 솔바람소리에 송진 내음이 우리 같은 도시인에게 절로 탄성을 지르게 한다. 주차장 왼쪽으로는 소나무 사이로 곧장 난 흙길 비탈이 가파르게 올라 있고, 마주보는 곳으로는 돌계단길이 잘 깔려 있다.
경내로 들어서려면 길게 뻗어 있는 연못이 앞을 막는다. 그 한가운데 걸쳐져 있는 나무다리를 건너서 대웅보전으로 오르게 된다. 만약 한여름에 여기를 찾는다면 희고 붉은 수련이 한창일 것이다. 또 무궁화를 배게 심고 잘 다듬어놓은 해우소로 가는 길은 무궁화꽃도 가꾸면 이렇게 아름답다는 모범을 보여준다.
개심사는 가야산의 한 줄기가 내려온 상왕산(象王山) 중턱 가파른 비탈을 깎아 터를 잡았기 때문에 수덕사나 가야사(남연군 묘) 같은 호방함은 없다. 그러나 저 멀리 내다보는 시야는 서해바다로 뻗어가는 시원스러움이 있고 양쪽 산자락이 꼭 껴안아주는 포근함이 있다.
극락보전(보물 제143호)은 수덕사 대웅전을 축소해 길게 뽑은 모양으로 이른바 ‘주심포계 다포집’의 맞배지붕이다. 주심포에서 다포집으로 넘어가는 과정의 집인 것이다. 1484년에 중건되었다는 기록이 있으니 이것이 우리 건축양식 변화의 한 기준이 된다.
그러나 보는 사람을 놀라게 하는 집은 심검당(尋劍堂)이다. 대웅보전과 같은 시기에 지었고 다만 부엌채만 증축한 것으로 생각되는 이 집은 그 기둥이 얼마나 크고 힘차게 휘었는지 모른다. 이 절집 종루의 기둥 또한 기상천외의 모습이다. 자연스러움을 거역하지 않고 오히려 즐기고 순종한 마음의 소산이다.
삽교천의 낙조
서산·당진을 지나 서울로 오는 길에 답사객은 삽교천 방조제를 넘을 때면 으레 서해바다의 일몰을 보게 된다. 그때 사람들은 너나없이 불법인 줄 알지만 방조제 한쪽에 차를 세우고 붉은 태양이 서해바다 깊은 곳으로 내려앉을 때까지 저 장중한 자연의 침묵하는 교향악을 숙연히 바라본다.
삽교천 방조제의 완공과정에는 두가지 전설적인 얘기가 전한다. 하나는 간만의 차가 심하여 방조제 공사가 난관에 부닥치자 고(故) 정주영 회장은 거대한 폐선을 침몰시켜 조수의 흐름을 막아 엄청난 난공사를 성사시켰다는 것이다.
정회장의 기발하고도 굽힐 줄 모르는 의지는 난공사 중 난공사였던 이 방조제를 무사히 완공케 하고, 토목공학에서는 정주영공법으로 불린다고 한다*(이 방식은 1984년 삽교천 방조제가 아니라 서산간척지 공사에서 처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또 하나는 20세기 후반 한국사의 엄청난 사건인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인데, 그는 바로 1979년 10월 26일, 삽교천 완공식에 참여하고 서울로 돌아가 안가에서 저녁을 하던 중 변을 당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일정은 원래 예정에 없던 것으로 당일 아침에 급작스럽게 결정되어 헬기를 타고 참석하였는데 왜 그렇게 일정이 바뀌었는지에 대해서는 무수한 유언비어만 남아 있다. 이 또한 운명의 길이었나보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