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와 문경 봉암사
경주
선덕여왕과 삼화령 애기부처
첨성대 구조의 상징성
경주는 교과서에 씌어 있는 대로 ‘찬란한’ 문화유산의 보고(寶庫)다. 그런데 그런 기대를 안고 처음 경주에 가보는 사람들에게 감동은 고사하고 실망만을 안겨주는 대표적인 유물은 첨성대이다.
교과서에서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대라고 배운 첨성대가 겨우 10미터도 안되는 초라한 규모라는 사실에 망연자실해질 따름이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첨성대의 구조와 상징성에 대해 제대로 들어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경주시내 인왕동에 있는 첨성대는 신라시대로 말하자면 궁성이 있던 반월성과 계림의 바로 위쪽에 있으며, 대릉원의 고분군·석빙고·안압지와 이웃하고 있다. 즉 그 주변은 서라벌 ‘다운타운’이 아니라 관공건물이 모여 있던 곳이고, 거기에 있던 신라 국립관상대 내지 천문대의 한 건물이 첨성대이다.
국립관상대에는 별도 건물이 있었겠지만 신라시대 모든 목조건축들이 그렇듯이 폐허가 되어 사라졌고 지금은 그 상징물이던 첨성대만이 남아 있는 것이다.
한국과학사의 연구자들은 첨성대의 기능에 대하여 첨예한 의견대립만 계속할 뿐 아직껏 합의에 도달한 결론이 없지만(천문대설과 일종의 기념비 혹은 제단, 창고였을 것이라는 설이 논쟁 중이다), 그런 중에 내가 설득력있게 받아들이고 있는 사항은 다음과 같다.
만약 지금 서울 서대문에 있는 국립기상대 건물 앞마당에 천문기상관측의 상징물을 하나 세운다고 하면 어떤 형태의 조형물이 될까? 설계자들은 이 시대의 천문지식을 최대한 상징해 보려고 고심할 것이다.
신라사람들이 다다른 결론은 곧 첨성대의 구조였다. 전체 모양은 대(臺)였다. 제기(祭器)를 받치는 기대(器臺)에서 따온 것이리라. 올라가 밟고 섰다 해서 대가 아니라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 받침이라는 뜻이리라.
옛날 사람들은 천원지방(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첨성대의 기단은 정사각형이고 몸체는 원으로 되었다. 몸체는 모두 27단으로 되었는데, 맨 위에 마감한 정자석(井字石)과 합치면 28. 기본 별자리 28수(宿)를 상징한다. 여기에 기단석을 합치면 29. 한달의 길이를 상징한다.
몸체 남쪽 중앙에는 네모난 창이 있는데, 그 위로 12단, 아래로 12단이니 이는 1년 12달과 24절기를 상징하며 여기에 사용된 돌의 숫자는 어디까지 세느냐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지만 362개 즉 1년의 날수가 된다.
(박성래, 한국사특강편찬위 『한국사특강』, 서울대출판부 1990, 433면)
뿐만 아니라 첨성대는 태양의 움직임을 관측하는 기준이 되는 일정한 기능도 했다.
기단석은 동서남북 4방위에 맞추고 맨 위 정자석은 그 중앙을 갈라 8방위에 맞추었으며 창문은 정남이다. 정남으로 향한 창은 춘분과 추분, 태양이 남중(南中)할 때 광선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치게 되어 있고, 하지와 동지에는 아랫부분에서 완전히 광선이 사라지므로 춘하추동의 분점(分点)과 지점(至点) 측정의 역할을 한다. (전상운 『한국과학기술사』, 정음사 1975, 54면)
얼마나 절묘한 구조이고 기막힌 상징성인가? 또한 첨성대의 생김새는 얼마나 안정감 있고 아담하며 조순한 인상을 풍기고 있는가. 맨 위 정자석 길이가 기단부 길이의 절반으로 된 것은 안정감을 위한 비례였을 것이며, 유연하게 뻗어올라간 형태미와 곡선은 친숙하고 아담한 것을 좋아했던 그 시대 미적 정서의 표출일 것이다.
경주를 말해주는 세 가지 유물
문화유산을 보는 안목을 높일 수 있는 가장 빠르고 좋은 방법은, 좋은 유물을 좋은 선생님과 함께 보면서 배우는 것이다. 내게 경주를 가르쳐준 분은 정양모 선생이었다. 선생의 아호는 소불(笑佛). 소불 선생은 두 차례에 걸쳐 경주박물관장을 역임하셨다.
어느날 소불 선생은 한참 생각하시더니 나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자네, 진평왕릉 가보았나?” “아니요.”
“자네, 장항리 절터 가보았나?” “아니요.”
“자네, 에밀레종 치는 거 직접 들어보았나?” “아니요.”
“자네, 경주를 말하려면 꼭 이 세 가지를 잘 음미해야 할 걸세. 신라문화의 품격을 알려주는 것은 바로 이 세 가지일세.”
진평왕릉
진평왕릉은 경주 낭산(狼山) 동쪽 산자락이 시작되는 구황동 낮은 산비탈 논밭 한켠에 자리잡고 있다. 시내에서 가자면 분황사를 거쳐 보문관광단지 쪽으로 가다가 로터리 지나 첫번째 오른쪽 길로 접어들면 외길 농로가 나오는데 논밭 저편 고목나무 가로수가 일렬로 늘어선 그 끝에 진평왕릉이 있다.
봉분에는 아무런 치장이 없다. 김유신 묘처럼 12지상이 조각되거나, 괘릉처럼 석인·석수가 늘어선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황남대총처럼 사람을 기죽이는 웅장한 맛이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경주 시내 155개 고분 중에서 왕릉으로서의 위용을 잃지 않으면서도 소담하고 온화한 느낌을 주는 고분은 진평왕릉뿐이다.
진평왕릉은 누가 만들었는가? 그의 따님, 선덕여왕 때 만든 것이다. 우리가 지금 경주에 가서 볼 수 있는, 통일신라가 아닌 고신라의 대표적인 문화유물들은 거의 다 진평왕과 선덕여왕 때 만들어진 것이다.
국보 제83호 금동반가사유상과 남산 선방곡(禪房谷) 삼릉불은 진평왕 때 유물로 추정되며 황룡사 구층탑, 분황사, 첨성대, 삼화령 애기부처, 남산 불곡의 감실부처님 등은 모두가 진평왕과 선덕여왕 시절 유물들이다. 경주에 있는 왕릉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 시기 소산인 셈이다.
어디 그뿐인가. 원광법사는 진평왕 때, 자장율사는 선덕여왕 때 고승이다. 원효와 의상 같은 사람들도 선덕여왕 때 젊은 날을 보냈다. 그런데 왜 역사책(특히 김부식의 『삼국사기』)에서 진평왕의 이름은 언급조차 없고 선덕여왕은 야사에서 통 큰 여자 정도로만 묘사되고 있을까.
어쨌거나 이미 널리 알려진 선덕여왕의 ‘지기삼사(知幾三事, 미리 알아낸 세가지 일)’*에서 우리는 여왕의 재기와 배짱 그리고 뛰어난 감각을 충분히 엿볼 수 있다. 이 여왕의 배포가 큰 것은 황룡사 구층탑만 보아도 알 수 있다.
* 당태종이 보내온 모란꽃과 옥문지의 개구리 그리고 자신의 최후 예지이다.
황룡사 구층탑
분황사 남쪽, 지금 한창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는 대지 면적 2만 5천평의 황룡사터*는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 승방, 회랑, 종루, 경루의 건물 자리가 반듯하게 정비되어 그 스케일을 느낄 수 있다. 각 건물 자리에는 주춧돌만을 복원하여 비록 입면은 아니어도 평면만은 명확히 재구성해볼 수 있다.
* 1238년 몽골 제국이 침공했을 때 불타서 여태까지 복원되지 못하고 터만 남았다. 1963년에 사적 제6호로 지정되었다
그중 초석과 심초석(心礎石)을 드러낸 구층목탑의 자리는 한 변의 길이가 사방 22.2미터다. 바닥 면적만 해도 150평이 된다. 여기에 올라간 9층 목조건물의 높이는 『삼국유사』에서 말하기를 상륜부가 42척, 본탑 높이가 183척, 총 225척으로 약 80미터가 되는 것이다.
황룡사를 생각할 때 나를 놀라게 하는 사실은 두 가지가 더 있다. 황룡사를 처음 짓기 시작한 것은 진흥왕 14년(553)으로 17년 만에 담장을 쌓아 완성했는데, 장륙존상을 만든 것은 22년 후인 574년, 금당은 32년 후인 584년, 구층목탑을 준공한 것은 92년 후인 645년이다.
그러니까 완공까지 걸린 기간이 장장 1세기에 육박하는 것이었다. 공기(工期)가 얼마 걸리든지 90년 후까지 대를 이어가며 절집을 지은 정성은 무어라 설명할 것인가?
또 하나 놀라운 것은 황룡사 구층탑을 설계한 것은 신라 조정의 초청으로 백제 정부에서 파견되어온 아비지(阿非知)였다는 사실인데, 이때가 역사가들이 한결같이 말하고 있듯이 한창 통일전쟁을 하고 있던 시절이라면 어떻게 상대국에게 이런 청을 하고 또 응했겠는가.
어쨌든 신라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백제의 감화를 많이 받았고, 그것을 소화하면서 자기 문화능력을 키웠으며 또 자기화(自己化)하였다.
그래서 선덕여왕 시절의 유물들에는 그 앞시대나 뒷시대의 유물과는 판연히 다른, 따뜻하고 유순하며 인간적 체취를 느끼게 하는 정서가 배어 있다. 진평왕릉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바로 그것이었던 것이다.
삼화령 미륵삼존
선덕여왕 시절 문화유산 중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유물은 삼화령 애기부처다. 정식 명칭은 “생의사(生義寺) 미륵삼존상”이다. 이 세개의 석불은 본래 남산 삼화령 고개에 있던 것인데 1925년 본존불을 박물관으로 옮겨오고 또 민가에서 훔쳐간 협시보살 두개를 압수해서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이 삼존불이 『삼국유사』에 나오는 ‘생의사 석미륵’인 것을 밝혀낸 것은 황수영 박사였다. 기록에는 선덕여왕 13년(644)에 제작한 것이라고 한다.
이 삼존불은 참으로 귀엽게 생겼다. 모두 4등신의 어린아이 신체비례를 하고 있어서 그 앳된 얼굴의 해맑은 웃음이 보는 이의 마음을 송두리째 사로잡는다. 특히 왼쪽의 협시보살입상은 비록 코가 깨졌지만 불심(佛心)과 동심(童心)의 절묘한 만남을 느끼게 해준다.
언제부터였을까? 삼화령 고개에 오른 사람들은 이 애기 모습의 보살상을 보면 얼굴을 쓰다듬고 손을 매만져보았다. 그 이름도 ‘삼화령 애기부처’라고 바뀌었다.
감실부처님
7세기 전반기, 진평왕과 선덕여왕 시절의 신라문화상은 한마디로 모든 것을 남이 아니라 자신의 입장에서 창조하고 소비할 수 있는 자신감에 충만한 것이었다. 백제·고구려·중국의 문화를 적극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주체적으로 소화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선덕여왕 시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상들 또한 이 시대의 문화적 성격을 아주 잘 말해주고 있다. 그중 한 예로, 경주 남산의 북쪽 기슭에 있는 감실부처님을 들 수 있다.
이 불상을 보면 저 조순하고 인자한 기품은 부처님상이니까 그렇다고 치더라도 마치 신라시대 어느 여인을 모델로 했음직한 그 친숙한 이미지는 원효가 불교를 주체적으로 소화하여 대중화작업을 펼쳤던 그 위대한 족적에 비견되는 고신라 불상의 한 백미라 할 것이다.
땅속에 깊이 뿌리를 내린 자연 암석을 깎았기에 어떤 도굴꾼도 당신을 겁탈하지 못하였고, 바위를 깎아 감실을 만들었기에 풍화의 시달림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관광의 대상에서 제외되어* 사람의 손때를 입지 않았으니 어느 불상이 당신처럼 본모습 그대로를 유지하는, 상처받지 않은 행복이 있었겠느냐는 축복이었다.
*감실부처님 보러 가는 길은 이제 반듯하게 잘 다져져 있고, 주차장도 넓고 이정표도 확실하여 찾기 쉽다.
여근곡
경주 톨게이트를 떠나 고속도로로 들어서면 이내 건천(乾川)역이 오른쪽에 보이는데, 그 건천역 지나 조금 가면 왼쪽으로 산줄기가 한눈에 들어온다. 그 산이 바로 선덕여왕의 ‘지기삼사’에 나오는 여근곡(女根谷)이다.
마치 여자의 국부와 허벅지의 디테일을 클로즈업한 것 같은 형상인데, 나는 아직 안 가보았지만 실제로 그 중앙에는 옥문지(玉門池)라는 샘이 있어 더욱 신비롭다고들 한다.
서기 636년. 신라 27대 선덕여왕 5년, 한겨울인데도 개구리 떼가 영묘사(靈廟寺)의 옥문지(玉門池)라는 못에서 사나흘 계속 울어대는 괴이한 일이 발생했다. 신하들이 불길한 흉조라고 수근거리자 선덕여왕은 두 장수를 불러 "지금 당장 서쪽으로 가서 여근곡이라는 곳을 찾으면 그 안에 백제군이 숨어 있을 것이니 반드시 찾아 죽이시오"라고 명령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500여 명의 백제군이 매복해 있어 출동한 신라군은 적군을 포위해 섬멸했다.
승리하고 돌아온 장수와 신하들이 여왕에게 어떻게 적군의 매복을 알게 됐는지 자초지종을 묻자 여왕은 이렇게 답했다. "성난 개구리는 병사의 상이요, 옥문은 곧 여근이다. 여자는 음이고 그 빛은 흰데, 흰색은 곧 서쪽을 의미한다. 해서, 서쪽의 여근곡에 적이 있음을 알았다. 또 남근이 여근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기 때문에 적을 쉽게 잡을 줄 알았다."
경주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감포가도
경주에서 토함산 북동쪽 산자락을 타고 황룡계곡을 굽이굽이 돌아 추령고개를 넘어서면 대종천(大鐘川)과 수평으로 뻗은 넓은 들판길이 나오고 길은 곧장 동해바다 용당포 대왕암에 이른다('감포가도').
불과 30킬로미터의 짧은 거리이지만 이 길은 산과 호수, 고갯마루와 계곡, 넓은 들판과 강, 그리고 무엇보다도 바다가 함께 어우러진 조국강산의 모든 아름다움의 전형을 축소하여 보여준다.
먼저 경주 시내를 벗어나 비탈길을 오르면 오른쪽은 벼랑뿐이지만 왼쪽으로는 넓은 저수지 덕동호(德洞湖)가 펼쳐진다. 70년대 경주개발사업의 일환으로 만들어져 경주 일원의 상수원과 농업용수로 기능하며 보문호의 수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이 덕동호는 높은 산골짜기를 막아 만들었기 때문에 여느 호숫가의 풍경과는 다르다. 이 호수로 인해 고선사 터가 수몰되었는데, 그 너머에는 암곡동(暗谷洞) 골짜기가 있다.
무장사 깨진 비석 이야기
암곡동 산속 깊은 곳에는 지금도 무장사(鍪藏寺) 절터가 남아 있어, 깨진 비석받침과 삼층석탑 하나가 외롭게 거기를 지키고 있다. 문무왕이 당나라 군사를 몰아내고 명실공히 통일전쟁을 마무리했을 때, 전시비상체제를 해제하는 뜻으로 투구〔鍪〕를 여기다 묻고 절을 세웠다고 『삼국유사』에 전하고 있다.
여기에 세워졌던 비석은 조선 정조 때 대학자인 이계(耳溪) 홍양호(洪良浩, 1724~1802)가 경주시장(부윤)을 지낼 때 마을사람이 콩 가는 맷돌로 쓰고 있는 비석 파편을 발견하여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된 ‘무장사 단비(斷碑)’, 정식 명칭으로 ‘무장사 아미타불 조성기(造成記)’ 비석의 고향이다.
801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비는 전설로만 김생 글씨라고 전해져왔으나 홍양호는 비편을 보고는 김육진(金陸珍)이 왕희지 글씨체로 쓴 것이라고 감정하였다.
그리고 몇십년이 지나 금석학의 대가인 추사 김정희가 나이 32세 때 이 암곡동 산골짜기를 직접 답사하여 또다른 비편 한 조각을 발견하고 너무 기뻐 소리지르고 말았다고 한다.
추사는 이 비석의 글씨는 김육진이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하여 세운 것이라고 고증하고는 비편에 자신이 발견하게 된 과정을 새겨넣었다. 이 두개의 비편은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대종천과 장항리 폐사지
황룡계곡의 골짜기를 빠져나오면 이내 넓은 들판이 나오는데 거기가 장항리. 양쪽에서 홀러내린 두 줄기 계류가 만나 제법 큰 내를 이룬다. 그것이 대종천이다. 한 갈래는 함월산에서 흘러온 것이고, 또 한 갈래는 토함산 동쪽을 맴돌아 내리뻗어 있다.
반대편 토함산 쪽 계곡을 따라 십리길을 올라가면 장항리 폐사지가 나온다. 이곳엔 잘생긴 오층석탑(국보 제236호)과 무너진 석탑부재가 남아 있어 통일신라 때 절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1235년 몽골군의 제3차 침입 때, 경주를 불바다로 만들어 황룡사 구층탑을 태워버린 몽골군은 황룡사의 대종이 하도 탐이 나 이것을 원나라로 가져갈 계획을 세웠다.
대종은 에밀레종의 네배나 되는 무게(약 100톤)였다. 이 거대한 약탈작전은 바닷길이 아니고서는 운반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어 지금 우리가 넘어온 길로 끌고 와서는 강에 뗏목을 매어 바닷가로 운반하는 방법을 취하게 되었다.
그러나 봉길리 바닷가에 거의 다 왔을 때 그만 종을 물속에 빠뜨렸다. 대종은 물살에 실려 동해바다 어디엔가 가라앉고 이후 이 내를 대종천이라 부르게 됐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 사람들은 파도가 거센 날이면 바닷속에서 종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을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일제시대부터 요즘까지 대종을 찾겠다는 사람들이 심심치않게 나오고 있다.
과대포장된 대왕암의 진실
대종천 어귀, 벌써 바닷바람이 느껴지는가 싶으면 양북면 면사무소가 있는 어일(漁日)에 다다르게 되는데, 어일 삼거리 검문소에서 감포로 가는 왼쪽 길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곧장 뻗은 봉길리·용당리 길을 택한 뒤, 감은사를 옆에 두고 곧장 동해바다로 달리면 왼쪽으로는 이견대(利見臺), 오른쪽으로는 대왕암으로 갈라진다.
대왕암은 문무대왕의 시신을 화장한 납골을 뿌린 산골처(散骨處)로 이미 오래전부터 알려져왔고, 이곳 해녀들은 절대로 이 근처에 가지 않았다는 성역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문무대왕 해중릉(海中陵)을 발견했다고 신문마다 대서특필하였다.
그 내용은 대왕암 가운데 바위 밑에 납골을 모신 합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증명되지 않은 하나의 가설이고 추측일 따름이며, 거북이 등 밑에서는 아무것도 발견되지 않았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21년(681)조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7월 1일 왕이 돌아가시므로 (…) 그 유언에 따라 동해 어귀의 큰 바위에 장사지냈다. 세상에 전하기를 용으로 화(化)하여 나라를 지킨다고 하여 그 바위를 가리켜 대왕암이라고 하였다. 왕이 유조(遺詔)에 말하기를 (…) (화려한 능묘란) 한갓 재정만 낭비하고 거짓만을 책에 남기며 공연히 사람들의 힘만 수고롭게 하는 것이니 (…) 내가 죽은 뒤 열흘이 되면 곧 궁문 밖 뜰에서 인도식(불교식)으로 화장하여라.
그리고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편 만파식적(萬波息笛)조에는 문무왕이 아들 신문왕에게 만파식적을 내려주어 이 피리를 불면 ‘왜적이 물러가고, 가뭄에 비가 오고, 질병이 퇴치되는 (…) 신라의 국보가 되었다’는 기사 앞에 이렇게 씌어 있다.
신문왕은 (…) 681년 7월 7일에 즉위하였다.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하여 동해변에 감은사를 세웠다. 사중기(寺中記)에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고자 이 절을 짓다가 마치지 못하고 돌아가 바다의 용이 되었는데,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여 682년에 마쳤다. 금당 계단 아래를 파헤쳐 동쪽에 한 구멍을 내었으니 그것은 용이 들어와 서리게 하기 위한 것이다. 생각건대 유조로 장골(葬骨)케 한 곳을 대왕암이라 하고 절은 감은사라 하였으며, 그후 용이 나타난 것을 본 곳을 이견대라 하였다.
또 『세종실록』 지리지(地理志) 경주부 이견대조에 보면 이렇게 실려 있다.
이견대 아래쪽 70보가량 되는 바닷속에 돌이 있어 사각이 높이 솟아 네 문(門) 같은데 여기가 문무대왕의 장처(葬處)이다.
그리고 지금부터 200년 전, 1796년 무렵, 경주부윤을 지내고 있던 홍양호는 대왕암과 이견대를 방문하여 대왕암의 전설을 듣고는 그것을 『삼국사기』와 대조해보고 왕의 큰 뜻을 기려 제물을 갖추고 제사를 지냈다고 그의 문집인 『이계집(耳溪集)』 중 ‘제(題)신라문무왕릉비’에 기록해두었다.
홍양호가 발견한 문무대왕비문 파편에는 “나무를 쌓아 장사지내다〔葬以積薪〕” “뼈를 부숴 바다에 뿌리다〔粉骨鯨津〕” 등이 『삼국사기』의 내용과 똑같이 적혀 있다.
감은사탑
문무대왕은 생전에 이곳 경주로 통하는 동해 어귀에 절을 짓고 싶어했으나 680년 세상을 떠나게 되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 신문왕은 부왕의 뜻을 이어받아 즉위 이듬해(682)에 완공하고는 부왕의 큰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으로 감은사(感恩寺)라 하였다.
신문왕은 문무대왕이 죽어 용이 되어 여기를 지키겠다는 유언에 따라 감은사 금당 구들장 초석 한쪽에 용이 드나들 수 있는 구멍을 만들어놓았는데, 그것을 지금 감은사터 초석에서도 볼 수 있다.
감은사의 가람배치는 정연한 쌍탑일금당(雙塔一金堂)으로 모든 군더더기 장식은 배제하였다. 이것은 이후 불국사에서도 볼 수 있는 가람배치의 모범을 보인 것이다.
또 여기에 세워진 한쌍의 삼층석탑, 이 감은사탑은 이후 통일신라에 유행하는 삼층석탑의 시원(始原)을 보여주는 것으로 그것의 조형적 발전은 불국사 석가탑에서 절정에 달하게 된다.
우리나라는 석탑의 나라다. 중국의 전탑(벽돌탑)과 일본의 목탑(목조건축)과 비교해서 생긴 말이다. 중국에서 처음 불교가 들어올 때는 목조건축 형식의 목탑이 유행하여 황룡사 구층탑 같은 거대한 건물을 세우게도 되었다. 이것을 석탑으로 전향시킨 작업을 해낸 것은 역시 백제사람들이었다.
익산 미륵사터에 남아 있는 한쌍의 구층석탑은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인데, 이것은 돌로 지었을 뿐 거의 목조건축을 모방한 것이었다. 이것을 발전시켜 건축부재의 표현을 간소화시키면서 석탑이라는 양식, 기단부와 각층의 몸돌과 지붕 그리고 상륜부라는 구조의 틀을 보여준 것은 부여 정림사터 오층석탑이었다.
정림사터 오층석탑은 그것 자체로 하나의 완결미를 갖고 있는 또 다른 명작이다. 나의 답사기가 부여로 향할 때 이 탑 앞에 아주 오래 머물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우아하다는 감정을 조형적으로 표현해낸 모범답안이었다.
미륵사탑·정림사탑이 세워진 것은 600년 무렵, 즉 백제 무왕 때다. 이때가 백제문화의 전성기였다. 유명한 금동반가사유상·서산마애불이 제작된 것도 이 시기다. 발달된 중국의 불교문화를 체화·육화하여 자체 생산력을 갖춘 시기였다.
한국은 화강암의 나라다. 그 자연풍토와 재질을 살려 독창적 문화를 창조하게 되니 태안·서산의 화강암바위 마애불과 예산·정읍의 석불을 제작하였고 그것이 탑에서도 적용된 것이 석탑이었다. 그러나 백제는 여기에서 문화적 하강곡선을 그리게 되니 정림사탑의 맥은 통일신라의 과제로 넘겨지고 말았다.
정림사의 오층석탑은 곧 신라에서도 모방하는 바가 되었다. 의성 탑리의 오층석탑, 월성 나원리의 오층석탑, 장항리의 오층석탑 등이 바로 그 맥인 것이다.
그러던 오층석탑이 감은사에 이르러 삼층석탑으로 변신하게 되었다. 그 형태와 층수를 변형시켜야만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양식적 분석에 입각한 조형의지의 파악으로 설명해야 한다.
정림사탑은 대단히 우아하고 세련된 멋을 갖추고 있다. 고상하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단어일 것이다. 그러나 정림사탑에는 힘이 없다. 일층의 몸체가 훤출하여 상승감이 돋보이지만 이를 받쳐주는 안정감이 약하다.
감은사를 조영하던 정신은 통일된 새 국가의 건설이라는 힘찬 의지의 반영이었으니 그런 식의 오층석탑은 그들에게 어울릴 수가 없었다. 장중하고, 엄숙하고 안정되며, 굳센 의지의 탑을 원했던 것이다.
그것은 기단과 몸체의 확연한 분리, 그리고 기단부의 강조에서 안정감을 취하고, 몸체의 경쾌한 체감률에서 상승감을 획득하는 이른바 이성기단(二成基壇)의 삼층석탑으로 결론을 얻게 된 것이다.
기단을 상하 두 단으로 튼실하게 쌓고, 몸체는 일층을 시원스럽게 올려놓고는 이층, 삼층을 점점 좁혀서 상륜부 끝으로 이르는 상승의 시각을 유도하는 것이었다.
사리장엄구
감은사 쌍탑 중 서탑은 1959년 해체·복원 과정에서 삼층몸돌 위쪽에 설치된 사리공에서 대단히 아름다운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부식 상태가 심하여 화려했던 원 모습을 그리기엔 부족했다.
그러나 1996년 동탑 해체·복원 과정에서 역시 삼층몸돌 위쪽의 사리공에서 똑같은 세트의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이는 보존상태가 양호하여 완벽하게 원형을 갖추고 있었고 우리나라 사리장엄구의 최고 가는 명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사리함의 전통은 역시 백제에서 시작되었다. 왕흥사 사리함, 미륵사 서탑 사리함,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함 등은 백제 금속공예의 하이라이트들이다.
통일신라는 이 사리함의 전통을 이어받아 통일신라식으로 발전시킨 아름답고 화려한 사리장엄구를 석탑에 봉안하였다. 그 첫번째가 감은사 삼층석탑의 사리장엄구이며 이는 나원리 오층석탑, 황복사 삼층석탑, 불국사 석가탑, 칠곡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함으로 이어진다.
감은사탑 사리장엄구는 네 면에 사천왕을 조각으로 붙인 사각형 외함(높이 27센티미터) 안에 가마 모양의 화려한 보장형(寶帳形) 사리기가 따로 모셔지고 그 가운데에 수정사리병을 봉안하였다.
외함은 이국적인 얼굴로 삼굴(三屈)의 자세를 취한 사천왕의 몸동작이 생동감 있게 표현되었고 문고리 장식, 구름무늬도 곁들여 아주 장엄하고 높은 품격을 보여준다. 작은 수정사리병은 앙증맞을 정도로 귀엽고 뚜껑도 깜찍스럽다.
고선사탑
고선사탑의 경우는 감은사탑과 가히 쌍벽을 이룰 통일신라 초기의 명작이다. 원효대사가 주지스님으로 계시던 암곡동 고선사터가 덕동호에 수몰되는 바람에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 뒤뜰 한쪽 모퉁이에 처박히듯 세워져 있는 저 시대의 명작을 사람들은 별로 눈여겨보지 않는다.
그러나 고선사탑은 그 스케일과 형태에서 감은사탑과 거의 비슷한데, 다만 하늘을 찌를 듯한 찰주가 없고 선마무리가 약간 부드럽다는 차이가 있을 뿐, 장중함에서는 감은사탑 못지않다.
언젠가 답사회원들과 경주의 삼층석탑을 순례하고 돌아오는 길에 버스 속에서 우리는 서로의 감상을 얘기하는 시간을 가졌는데 그때 노처녀가 아니라 독신녀로 당당하게 살아가기를 희망한다는 분은 이렇게 말했다.
“완벽하고 존경스러운 감정을 일으키는 것은 감은사탑이지만, 내게 배우자로 선택하라면 고선사탑 같은 남자를 택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선사탑은 완벽성 대신 포용성과 인자함이 살아있거든요.”
석가탑
감은사탑과 고선사탑이 세워진 지 80년이 지나면 석가탑이 등장하여 삼층석탑의 형식은 거기에서 최고의 완성을 보게 된다.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정제된 아름다움, 단아한 기품과 고귀한 덕성, 빼어난 미모를 모두 갖춘 조화적 이상미의 전형이 거기에 있다.
감은사탑에 비할 때 석가탑은 그 스케일이 3분의 2로 줄어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왜소함이 아니라 알맞은 크기로의 축소였다. 감은사탑은 누가 보든 생각보다 크다고 말한다.
그 크기 때문에 일층몸돌은 한 장의 돌로 만들지 못하고 네개의 기둥돌을 세운 다음 네장의 돌판을 붙여놓고 그 속을 자갈로 채웠던 것이다. 그래서 감은사탑은 오늘날 뱀의 소굴이 되었다.
석가탑은 일층몸돌, 일층지붕돌, 이층몸돌, 이층지붕돌, 삼층몸돌, 삼층지붕돌 등이 각각 한 장의 돌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세련과 완결미는 여기서 빛나게 마무리된 것이다.
그러나저러나 감은사탑 같은 감히 근접하기 힘든 기품을 갖춘 그런 미인은 없을 것 같다. 종묘제례악 수제천이나, 「그레고리언 찬트」를 들었을 때, 그리고 청도 운문사에서 비구니 승가학교 학생들의 아침예불 합창을 들었을 때 감은사탑 같은 감동이었으니 아마도 이승에서는 찾지 못할 것 같다. “아! 감은사, 감은사탑이여!”
경주
에밀레종의 신화(神話)와 신화(新話)
성덕대왕신종
소불 선생이 나에게 “경주를 알려면 에밀레종소리를 들어보아야 한다”는 가르침을 준 그 이튿날 새벽 여섯시, 냉기가 온몸에 스미는 늦가을 나는 처음으로 그 소리를 들어보았다. 신새벽 고요를 가르며 울리는 에밀레종소리는 장중하기 그지없었다.
낮게 내려앉은 저음이지만 그 맑은 여운은 긴 파장을 이루며 한없이 퍼져나간다. 세상에 이런 악기가 다시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장중하면 맑기 어렵고, 맑으면 장중하기 힘든 법이건만 그 모두를 갖추었다. 소불 선생은 이 소리를 “엄청나게 큰 소리이면서 이슬처럼 영롱하고 맑다”고 표현하였다.
에밀레종은 여느 범종과 마찬가지로 항아리를 뒤집어놓은 달걀 모양, 또는 대포알을 머리와 허리춤에서 자른 모습이지만 가운데 아래쪽이 불룩하게 부풀어 있으면서 끝마무리는 슬쩍 오므려 풍만한 포만감을 주는 긴장미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종 어깨에서 몸체를 지나 허리에서 마감하는 유려한 곡선미를 드러낸다.
전에는 해마다 12월 31일 자정에 보신각종과 에밀레종이 타종되었는데, 이제 에밀레종 타종 소리는 그치게 되었다. 영원히 보존하기 위한 조치였다는 것이 문화재 관계자들의 생각이겠지만, 불국사에 계신 월산스님의 말을 빌리면 “종은 쳐야 녹슬지 않는 법”이다.
만물이 자기 기능을 잃으면 생명이 끊어지듯이. 게다가 지금은 종 앞에 달려 있는 나무봉마저 거두어버렸으니 에밀레종은 종으로서 생명을 잃고 “명작들의 공동묘지”에 안치된 것이다.
한·중·일 삼국의 범종
범종은 사찰에서 시각을 알릴 때, 의식을 행할 때, 또는 사람을 불러모을 때 사용하는 것으로, 그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성덕대왕신종의 명문에서는 “범종의 기원을 살펴보니 인도에서는 카니슈카(Kanishka)왕 때부터이고 중국에서는 고연(鼓延)이 시초였다”라고 하였다.
범종은 기본적으로 몸체인 종신(鐘身)과 종고리인 종뉴(鐘紐)로 구성되며 종신에는 여러가지 장식이 가해지고 몸체를 나무봉으로 때려 울린다. 이는 몸체 속의 방울로 울리는 서양종과 다른 동양의 독특한 형식이다.
그런데 한·중·일 삼국의 범종은 비슷하면서도 또 각기 형태와 특징이 달라 한·중·일 삼국 문화의 정서적 특질을 잘 보여준다.
중국 종은 형태가 대단히 화려하고 장중한 멋이 있다. 종의 몸체가 여덟 팔(八)자 모양으로 넓게 퍼지면서 맨 아랫부분인 종구(鐘口)가 나팔꽃 모양으로 각이 지게 돌려졌다. 일본 종은 엄숙함을 느끼게 하는 단순미가 있다. 형체가 거의 수직으로 내려오고 몸체에는 열 십(十)자를 반복적으로 그린 기하학적 구성이 있다.
한국 종은 형태에 유연한 곡선미가 있다. 몸체에는 아름다운 비천상이 조각되었고 종봉(鐘棒)과 마주치는 자리에 당좌(撞座)가 연꽃무늬로 새겨졌다.
그리고 종 윗부분에는 종유라는 돌기 모양의 꽃봉오리가 달려 있는데 4곳의 유곽(乳廓) 속에 9개씩 모두 36개가 달려 있다. 종고리는 한 마리 용으로 만들어지고 음통(音筒)이 피리처럼 솟아 있다.
우리나라 범종은 그 소리와 울림이 아름다워 음향학에서는 ‘한국 종(Korean bell)’이라는 별도의 학명으로 불린다. 한국 종의 유래에 대해서는 아직 명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기록상으로 보면 삼국시대부터 만들어진 것 같은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범종은 성덕왕 24년(725)에 만들어진 상원사 동종이다.
에밀레 종의 형체는 더없이 장중하면서 고고한 품위를 보여준다. 돋을새김의 조각들은 청동조각인 만큼 석굴암의 그것보다도 더 정교하다. 향로를 받들고 공양하는 비천상의 자태와 꽃구름과 함께 휘날리는 천의 자락은 감은사탑 사리장엄구의 조각보다 더 부드럽고 우아하게 피어오른다.
종유는 돌출된 돌기가 아니라 돋을새김으로 정교하게 새겼다. 상대·하대·연화당좌·유곽·종유의 연꽃과 넝쿨무늬의 새김도 우아하다. 그리고 종 맨 아랫부분인 종 입술〔鐘口〕이 여덟 모로 엷게 각이 지면서 맵시있게 마무리되었다.
에밀레종에는 총 1,037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어 제작 시기, 제작 동기, 범종이 갖는 의미 등을 소상히 밝히고 종을 만드는 데 참여한 사람 8명의 이름과 관직, 주종 기술자 4명의 직책과 이름을 모두 기록해놓았다.
효자인 경덕왕이 어머니와 부왕(성덕대왕)을 여의고서 추모의 정이 더하여 구리 12만근을 희사하여 대종 하나를 주조코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아들 혜공왕이 부왕의 유언에 따라 종 기술자에게 설계하여 본을 만들게 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마침내 신종이 완성되니,
“그 모양은 산처럼 우뚝하고 소리는 용이 읊조리는 것과 같아 위로는 하늘에 이르고 아래로는 지옥에까지 통하여 보는 사람은 신기(神奇)를 칭송하고 종소리를 듣는 사람은 복을 받으리라고 했다.”
봉덕사종 이동기
에밀레종은 봉덕사(奉德寺)에 봉안되었다. 봉덕사는 성덕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운 절이니 이 종이 거기에 봉안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 우리는 봉덕사가 어디였는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다만 어느 때인가 경주 북천(北川)이 홍수로 넘쳐 봉덕사는 매몰되고 오직 에밀레종만이 폐사지에서 뒹굴고 있었다고 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세조 6년(1460), 당시 경주부윤을 지낸 김담(金淡)이 이것을 영묘사(靈妙寺) 옆에 달아놓았다고 한다.
그런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중종 원년(1506)에 당시 부윤 예춘년(芮椿年)이 경주 남문 밖 봉황대(鳳凰臺) 밑에 종각을 짓고 종을 옮겨와 성문을 열고 닫을 때, 그리고 군사의 징집을 알릴 때 이 종을 쳤다고 한다.
봉황대 밑에서 성문종(城門鐘)으로 480년간 복무(?)한 에밀레종은 1915년 8월, 경주 법원 뒤쪽에 있는 구(舊)경주박물관 자리로 옮겨지게 되었다. 이곳은 본래 경주부 관아가 있던 곳이다. 그때 운반하던 장면이 낡은 사진으로 하나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1975년 이른봄부터 6월까지 에밀레종을 새로 지은 현재의 박물관으로 옮기는 작업이 진행되었다. 에밀레종을 새 박물관으로 옮기는 일은 대한통운이 맡았다.
에밀레종은 높이가 3.7미터, 무게가 22톤으로 생각되었다(훗날 포항제철에서 정확히 재어보니 19.2톤이었다). 이것을 운반하기 위해 포장을 하니 높이가 5미터, 무게가 30톤이 되었다. 이것을 또 트레일러에 올려놓으니 6미터가 넘게 되고 트레일러 무게와 합치면 50톤이 넘게 되었다.
박물관 구관에서 신관까지는 월성로를 따라가면 불과 2킬로미터의 거리인데, 그 중간에 다리가 하나 있는데 이 다리로는 결코 50톤의 하중을 견디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결국 돌아서 5킬로미터를 가야 하는데 이번에는 경주시내 전깃줄이 모두 걸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국전력공사에서는 전공들이 여럿 동원되어 에밀레종을 실은 트레일러가 지나갈 때마다 전깃줄을 끊어주고 지나간 다음에는 곧 이어주고 하면서 시내를 관통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에밀레종을 실은 트레일러가 지나가자 경주사람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남녀노소가 그 뒤를 따랐다. 끝까지 따라올 기세였다. 당시 경주시민 대부분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 예기치 않은 경주시민들의 축제 같은 행사에 소불 선생은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시장에 가서 광목 열 필을 사오라고 했다. 이것을 에밀레종에 세 가닥으로 매어 늘어뜨리고 시민들은 그것을 잡고 따라오면서 장대한 행렬을 벌이게 됐다.
소불 선생은 이렇게 에밀레종을 신관 새 종각 자리까지 옮겨다놓았지만 이제는 이것을 안전하게 거는 일이 태산 같은 걱정이었다. 종각이 부실공사가 아닐까 걱정도 되고 공사자들이 신식기술을 과신하거나 옛 유물을 과소평가하지나 않을까 걱정이었다. 무엇보다도 종고리가 휘어 부러질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소불 선생은 고심 끝에 포항제철에 강괴 28톤을 빌려 시험적으로 달아보고자 공문으로 요청했다. 결국 소불 선생은 에밀레종 무게보다 6톤의 여분으로 28톤을 빌려와 시험적으로 걸어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것은 큰 실수였다. 22톤의 하중을 견디는지 시험하려면 44톤이 필요하다. 바람에 움직이는 물체는 정지된 물체보다 두배의 힘이 필요한 것이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소불 선생은 아침 저녁으로 강괴를 흔들어보았다.
이레째 되던 날 아침, 경비원이 소불 선생을 찾아 뛰어왔다. 종고리가 휘어 벌어진다는 것이었다. 열흘이 되니 곧 떨어질 것 같아 강괴를 내려놓았다. 소불 선생은 휘어지고 벌어져 추한 모습이 된 종고리를 떼어들고는 부르르 떨었다고 한다.
이 어이없는 일로 지체높은 분들이 모였다. 문화재관리국장, 공영토건 사장, 원자력연구소장, 국립중앙박물관장 등이 ‘에밀레종 종고리 제작위원회’를 조직하여 실수 없이 하기로 했다.
종고리위원회는 먼저 일그러진 고리를 인천에 있는 한국기계공업회사에 가서 시험해보니 연구원 하는 말이 “이 쇠는 똥쇠(똥철)입니다”라는 것이었다.
문제는 종고리만이 아니었다. 종을 걸 쇠막대기도 22톤 하중을 잘 지탱해야 한다. 황실장은 이 쇠막대기는 특수한 강철을 사용하여, 황실장이 지정하는 실력있는 공장에서, 황실장의 지시에 따라 최소한 직경 15센티미터가 되는 철봉을 만들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큰 문제가 생겼다. 에밀레종 머리의 쇠막대기를 끼우는 부분은 용이 용틀임하는 형상으로 그 허리에 가로지르게 되어 있는데 이 구멍이 9센티미터도 안되는 것이었다. 최상의 질로 15센티미터를 해야 기계역학에 맞는데 구멍은 9센티미터밖에 안된다니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황실장은 “관장님, 그 전에 매단 쇠막대기 있습니까?” 하고 물어왔다. 소불 선생이 창고에서 그것을 꺼내 보여주었더니 황실장은 득의만면하여 “이것이라면 안전합니다”라는 것이었다.
신라시대인지 조선시대인지 알 수 없지만 이 옛날 쇠막대기는 여러 금속을 합금해서 두드려 편 다음 다시 단조기법으로 두드려 말아서 만든 형태이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위원회는 이 쇠봉을 다시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과학기술로 본 성덕대왕신종
에밀레종 몸체에는 종고리인 용머리의 방향과 같은 축으로 둥그런 연꽃무늬 당좌가 양쪽에 새겨져 있다. 종을 칠 때는 반드시 여기를 쳐야 제 소리가 난다. 조금만 어그러지거나 비껴가도 안된다.
종 몸체에 새겨져 있는 모든 문양, 비천상, 명문의 서(序)와 사(詞), 어깨에 새긴 종젖꼭지〔鐘乳〕, 입술 부분의 보상당초문(寶相唐草文) 등이 이 두 당좌를 축으로 하여 완벽하게 좌우대칭을 취하고 있는 것도 그 이유다.
남천우 박사의 견해에 의하면 에밀레종은 납형법(蠟型法)으로 제작되었다. 중국 종·일본 종이 만형법(挽型法) 또는 회전형법(廻轉型法)으로 제작된 것과는 큰 차이다.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이 ‘조선 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기법의 차이에서부터 유래한다.
일본의 범종학자인 쯔보이 료오헤이(坪井良平)에 의하면 몇해 전 일본 NHK에서 세계의 종소리를 특집으로 꾸민 적이 있는데 에밀레종이 단연 으뜸이었다는 것이다. 장중하고 맑은 소리뿐만 아니라 긴 여운을 갖는 것은 에밀레종뿐이라고 한다.
카이스트의 이병호 박사는 「성덕대왕신종의 음향학적 연구」에서 종소리의 음색과 음질, 종소리의 톤 스펙트럼을 분석하면서 대단히 어렵고 복잡한 종성평가식을 제시하고 그 채점 결과를 발표했다.
이렇게 해서 채점한 결과, 100점 만점에 성덕대왕신종 86.6점, 상원사종 55.7점, 보신각종 58.2점, 여타의 종은 50점 이하였다.
에밀레종을 비롯한 한국 종에서의 이 울림, 물리학에서 말하는 ‘맥놀이’현상은 진동수가 거의 동일한 두개의 음파가 동시에 발생될 때 생기는 일종의 공명현상이라고 한다. 그러나 에밀레종에서 이 진동원(振動源)이 어디인지는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사람들은 아마도 음통(音筒)에 그 비결이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
에밀레종의 풀리지 않는 비밀
남천우 박사가 주장한바, 에밀레종이 납형법으로 제작되려면 22톤의 쇳물, 감량 20~30퍼센트를 계산하면 약 25~30톤의 쇳물을 끓여 동시에 부어야 한다. 명문에 12만근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은 당시 225그램을 한근으로 계산해보면 약 27톤이 되니 맞는 얘기가 된다.
27톤을 거푸집에 일시에 부을 때 거푸집이 그 압력을 버티기 쉽지 않고 지금도 어려운데 당시 기술로 그 많은 기포를 어떻게 모두 뺐는지 불가사의할 따름이다.
성덕대왕신종이 에밀레종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 것은 그 여운의 소리가 “에밀레” 같고, 그 뜻은 “에밀레라” 즉 “에미 탓으로”와 같기 때문이다. 내용인즉 경덕왕이 대종의 주조를 위한 성금을 모으기 위하여 전국에 시주중을 내보냈을 때 어느 민가의 아낙네가 어린애를 안고 희롱조로 “우리집엔 시주할 것이라고는 이 애밖에 없는데요”라며 스님을 놀렸다는 것이다.
대종이 연신 실패를 거듭하자 일관(日官)이 점을 쳐서 이것은 부정(不淨)을 탄 것이니 부정을 씻는 희생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여러 갈래로 그 부정을 추정한 결과 그 아낙네 탓으로 단정되었다. 그리하여 그 애는 “에밀레”로 되었다는 얘기다.
이 전설은 반강제 성금을 내야만 했던 민중의 고통으로 해석되기도 하고, 온국민의 국가적 총력으로 설명되기도 하는데, 아기가 진짜로 희생됐다, 아니다에는 엇갈린 견해가 여지껏 팽배하다.
또한 에밀레종은 오랜 세월에 걸쳐 제작되었는데, 남천우 박사는 그 이유를 회전형 주조법에서 밀랍형 주조로 옮아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시행착오 때문이었다고 해석하고 있다.
밀랍형으로 제조하려면 우선 밀랍이 있어야 하는데, 에밀레종의 부피가 3세제곱미터이고, 벌통 하나에서 채취되는 밀랍은 고작해야 1~2리터이고 보면 최소한 토종벌통 1,500 내지 2,000개가 있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것은 보통 숫자가 아닌 것이다.
결국 종래의 종은 회전형인지라 여운이 없었는데 에밀레종은 밀랍법으로 되어 긴 여운을 띠게 되었다. 그것은 대단히 신기한 일이었을 것이며, 좋은 종을 만든 큰 기쁨이었을 것이다.
거기에서 그 여운이 신기하여 무슨 소리 같다는 둥 하던 사람들의 얘기가 “에밀레”로 결론을 내게 되었고, 나라에서는 신종(神鐘)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되었던 것이다.
후천개벽춤
에밀레종소리를 세상에 다시 없는 음악으로 생각하게 된 나는 이 음악에 맞추어 추는 춤도 생각해보았고, 그것을 곧 실현시켜보게도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1986년 10월 9일 새벽 6시 서울대 이애주 교수는 에밀레종소리에 맞추어 후천개벽무를 추었다.
에밀레종은 30명이 4인씩 조를 짜서 1분 간격으로 치다가 나중에는 30초 간격으로 점점 빠르게 쳤다. 세번째 종이 울리자 저 멀리서 소복을 한 춤꾼이 종소리의 여운을 밟으며 서서히 다가왔다. 가슴에는 차곡차곡 갠 광목을 품고 있었고 탑돌이를 하듯 종을 한바퀴 돈 다음 그것을 종 밑 우묵히 파인 울림통에 공양하듯 바쳤다.
종소리가 울릴 때마다 춤꾼은 율동과 정지를 반복하면서 비장감 감도는 춤사위로 흐느끼듯 기도하듯 저항하듯 공경하듯 환희에 날뛰듯 춤추었다. 종소리 간격이 조금씩 빠르게 되자 춤꾼은 에밀레종 밑으로 들어가 광목자락 끝을 잡고 어디로 가는지 마냥 걸어갔다. 마지막 종소리의 여운이 끝났을 때 춤꾼은 보이지 않았다.
문경 봉암사
별들은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고
봉암사((鳳巖寺)
1990년 늦겨울 어느날, 정말로 인연이 닿으려고 해서인지 문화유산답사회의 한 열성회원이 봉암사에서 큰 선방을 짓는데 상량식에 초대받았으니 같이 가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열 일을 제쳐두고 따라가서 십 년의 한을 풀 수 있게 되었다.
그 전까지 외부인의 방문을 허락하지 않아 천하의 대 문장가 최치원(崔致遠, 857년 ~ 908년 이후?)이 지증대사(智證大師)의 비를 쓰면서 묘사한 봉암사의 모습은 나의 환상 속의 절집이 되어 있었다.
나는 봉암사가 일년에 한번, 사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만은 축제의 현장으로 일반인들의 출입을 허용한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고는 바로 그해(1991년) 한국문화유산답사회 제7차 답사로 다시 다녀왔는데, 한 답사회원의 표현을 빌리건대 경관이 맑고 배어나면서도 마음의 평온을 안겨다주는 가장 넉넉한 기품의 절집이다.
최치원이 쓴 지증대사비문
암사를 창건한 분은 신라 말기의 큰스님 지증대사였다. 지증대사의 일대기와 봉암사의 유래는 최치원이 지은 지증대사비문에 소상하게 실려 있고 그 비석은 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거의 모든 글자를 다 읽어볼 수 있을 정도로 온전하게 남아 있다.
서예가 여초 김응현 선생의 표현을 빌리면 "남한에 남아 있는 금석문 중에서 최고봉"이다. 이 비문의 맨 끝에는 "분황사 스님 혜강이 83세에 쓰고 새겼다“고 되어 있다. 비문의 정식명칭은 ‘유당 신라국 고봉암사 교시 지증대사 적조지탑비명(有唐 新羅國 故鳳巖寺 敎諡 智證大師 寂照之塔碑銘)’이다.
최치원의 지증대사비문으로 말할 것 같으면 성주사 낭혜화상비, 쌍계사 진감국사비, 경주 숭복사비 등과 함께 이른바 최치원의 사산비명(四山碑銘) 중 하나로서 특히 이 비문에서 신라시대 선종이 유래하는 과정을 말하면서 지증대사의 위치를 가늠하고 있기 때문에, 하대 신라의 선종을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지증대사비의 시대적 배경
천하의 대문장가 최치원의 글맛이 이 비문보다 더 잘 나타난 것이 없다고 생각된다. 글의 구성은 도도한 강물의 흐름처럼 막힘이 없고 이미지의 구사는 그 스케일이 클 뿐 아니라 비유와 비약이 능란하다.
그래서 낭만적 과장을 엿보게도 하지만 그것이 감상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진중한 사물의 성찰과 세계에 대한 인식에 기초한 것인지라 그 흐름, 그 무게, 그 감성의 번뜩임이 나로 하여금 몇번이고 무릎을 치게 하고, 잠시 넋놓고 허공을 바라보며 음미하게 한다.
최치원이 쓴 지증대사 적조탑비의 글머리는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을 유장하게 풀어가는 것으로 서서히 시작한다. 그리고 이야기가 9세기에 들어서면 도의선사가 당나라에 유학하여 선종을 배워 전파하는 대목부터 목청이 높아진다.
당시 도의의 설법을 경주의 귀족들이 마귀의 소리라고 비웃게 되자 그는 "동해의 동쪽을 버리고 북산의 북쪽"(설악산 진전사)에 은둔하였다며 이후 선종의 전파과정을 설명한다.
이어 최치원은 지증의 법맥을 얘기하는데, 선종을 처음으로 신라에 소개한 것은 도의선사보다도 150년 전인 7세기 중엽의 법랑(法郎)스님이다. 그는 중국 선종의 제4대조인 도신(道信)에게 전수받았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로서는 크게 선풍을 일으킬 문화적 성숙이 없어서 지리산 단속사의 신행에서 준범, 혜은스님으로 명맥만을 유지해오다가 드디어는 고손제자 되는 지증대사에 와서 큰 빛을 발하게 된 것이었다.
지증대사의 일대기
지증대사(824~82)의 이름은 도헌(道憲)이고, 자는 지선(智詵)이며, ‘지증’은 그가 세상을 떠나자 임금이 존경과 애도의 뜻으로 내린 시호다. 속성은 김씨로 경주사람이었는데 키가 8척에 기골이 장대하고 말소리가 크고 맑아 "참으로 위엄있으면서 사납지 않은 분"이었다고 한다.
최치원은 스님의 일대기를 쓰면서 그분의 일생에 있던 기이한 자취와 신비한 얘기는 이루 다 붓으로 기록할 수 없다며 여섯가지 기이한 일과 여섯 가지 올바른 일로 추려서 적어나갔다.
17세(840)에 부석사 경의율사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나중에는 혜은스님에게서 선종의 교리를 배우니 이는 법랑의 5대 제자 되는 셈이었다. 이후 운수행각으로 명성을 쌓아가는데 지증은 고행을 몸으로 실천하여 비단옷과 솜옷을 입지 않고 가죽신을 신지 않으며, 노끈과 가는 실도 반드시 삼과 닥나무실을 사용했다고 한다.
남을 가르치기보다도 스스로 깨치기를 더 좋아하였으나 어느날 산길에서 돌연히 나무꾼이 나타나 "먼저 깨친 사람이 나중 사람에게 배운 것을 나누어주는 데 인색해서는 안된다"고 꾸지람하고 사라진 뒤부터 계람산 수석사에서 법회를 여니 찾아오는 대중이 갈대밭, 대밭처럼 빽빽하였다.
지증의 명성이 이처럼 높아지자 경문왕은 정중한 편지를 내어 서라벌 근처 아름다운 곳에 절집을 지어 모시고 싶다면서 "새가 자유로이 나무를 고르듯 훌륭한 거동을 아끼지 말아주십시오"라며 간청하였다.
그러나 지증은 이 영광된 부름을 거부하면서 “진흙 속에 편히 있게 하여 나를 예쁜 강물에 들뜨게 하지 마십시오"라는 답을 보냈다. 이후 지증의 명성은 더욱 온 나라에 가득하게 되었다.
봉암사의 창건과정
이처럼 덕망높은 스님으로 세상의 존경을 한몸에 받고 있는 지증에게 하루는 문경에 사는 심충(沈忠)이라는 사람이 찾아와서 "제가 농사짓고 남은 땅이 희양산(曦陽山) 한복판 봉암용곡(鳳巖龍谷)에 있는데 주위 경관이 기이하여 사람의 눈을 끄니 선찰을 세우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지증은 심충의 부탁이 하도 간곡하고 또 완강한지라 그를 따라 희양산으로 향했다. 희양산(998미터)은 문경새재에서 속리산 쪽으로 흐르는 소백산맥의 줄기에 우뚝 솟은 기이하고 신령스러운 암봉이다.
지증이 나무꾼이 다니는 길을 따라 지팡이를 짚고 희양산 한복판 계곡으로 들어가 지세를 살피니 "산은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으니 마치 봉황의 날개가 구름을 치며 올라가는 듯하고, 계곡물은 백 겹으로 띠처럼 되었으니 용의 허리가 돌에 엎드려 있는 듯하였다."
이에 지증은 탄식하여 말하기를 "여기는 스님의 거처가 되지 않으면 도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이리하여 881년, 대사는 불사를 일으켜 봉암사를 건립하였다.
이때 지증은 법당 건물의 처마를 날카롭게 치켜올려 거친 지세를 누르고, 철불상 두 구를 주조하여 봉안했다. 절이 완성되자 헌강왕은 관리를 내려보내 절의 강역을 구획하여 장승을 표시케 하고 절 이름을 봉암사라고 지어 내렸다.
별들은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고
이 고매한 지증대사의 입적 모습은 어떤 것이었을까? 큰스님들의 최후는 언제나 큰스님다웠다. 해인사 조실 자운스님은 열반에 드는 날 저녁에 4행시를 지었는데 맨 끝 구절은 “서쪽에서 해가 뜬다(西方日出)”였다.
서산대사는 운명 직전에 당신의 초상화를 가져와서는 "80년 전에는 네가 나이더니, 80년 후에는 내가 너로구나"라고 적고는 입적하셨다.
또 수덕사 만공스님은 저녁공양 후 거울을 보면서 "만공, 자네는 나와 함께 70여년 동고동락했지. 그동안 수고했네"라고 말하고 떠났고, 인조 때 걸출한 스님 진묵대사는 제자들을 불러놓고 "얘들아, 내 곧 떠날 것이니 물을 것 있으면 빨리 다 물어나보아라" 하고는 한두마디 대답하더니 앉은 채로 열반했다고 한다.
그러나 지증대사의 죽음은 이런 예감도 기발함도 아니다. 평온과 안락 그 자체였다. 지증대사는 저녁공양을 마치고 제자들과 앉아서 도란도란 얘기하던 중 가부좌를 튼 채로 돌아가셨다. 그런 분이 바로 지증이었다.
인도의 네루가 죽었을 때 사람들은 "아시아의 큰 별이 떨어졌다"는 표현을 명언이라고들 했는데 천하의 대문장가 최치원은 그 정도로 만족하지 못했다.
최치원의 비문은 “오호라! 별들은 하늘나라로 되돌아가고 달은 큰 바다로 빠졌다 嗚呼 星廻上天 月落大海“였다. 그 높은 덕으로 온 세상을 밝게 비춰주던 스님이 세상을 떠나니 하늘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암흑 같았다는 뜻이리라. 이런 장대한 이미지 구사가 나올 때 최치원의 글은 제격이다.
불타는 봉암사
지증대사가 세상을 떠난 것은 882년(헌강왕 8년) 12월이었고, 이듬해 봉암사에서 다비하여 사리탑을 세웠다. 지증의 법통은 제자인 양부(陽孚)에게 전해졌다.
그리고 3년 뒤 헌강왕은 최치원에게 대사의 비문을 지으라고 명하였는데, 원고 청탁을 받은 최치원은 그 자료를 찾는 어려움과 방대한 자료를 소화하기 힘든 '무능과 게으름'으로 무려 8년이 지나서 탈고했는데, 그때는 헌강왕은 이미 죽고 진성여왕 6년인 892년이었다.
그리고 이 비가 세워진 것은 다시 33년이 지난 924년이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늦어졌을까. 그것은, 지증대사 임종 후 신라사회는 이내 후삼국시대라는 일대 혼란기로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견훤(甄萱)이 전라도 광주에서 반기를 든 것은 바로 최치원이 비문을 완성한 892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후 5년도 못되어 봉암사는 불바다가 되고 일찍이 지증대사의 예언대로 도적의 소굴이 되고 만다.
이 와중에서 언제 봉암사가 누구의 손에 의해 불타게 됐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그로부터 6년 뒤인 935년, 봉암사를 다시 크게 일으키는 정진대사 긍양(878~956)이 봉암사에 당도했을 때 모습이 그의 비석인 '정진대사 원오(대)탑비'에 이렇게 씌어 있다.
“대사가 봉암사에 이르러 희양산 산세를 둘러보니 천층만첩의 깎아지른 벼랑들이 보였다. 때는 도적들이 불지르며 다니던 시절인지라 계곡의 모습은 의구해도 절집의 틀과 스님의 거처는 태반이 무너져내리고 가시덤불 쑥대만 무성하였다. 오로지 우뚝 솟아 보이는 것은 비석을 지고 있는 돌거북이와 그 비석에 새겨져 있는 지증대사의 덕이며, 도금한 불상이 신령스런 빛을 비추고 있는 것이었다.”
봉암사의 흥망성쇠와 승탑들
935년, 폐허가 된 봉암사를 다시 일으켜 세운 정진대사 긍양(靜眞大師 兢讓)은 정치적 수완이 대단한 스님이었다. 고려초의 문장가였던 이몽유가 찬한 그의 비문에는 대사의 행장이 아주 상세하다.
충남 공주에서 태어나 20세에 출가하여 양부(陽孚)선사의 제자가 되었다가 23세 되는 900년 중국에 유학하여 24년 후인 924년에 귀국하여 스승 양부선사가 주석하던 강주(오늘날 진주) 백엄사에 있다가 935년 봉암사로 오게 되었다. 경애왕은 그에게 ‘봉종대사’라는 별호를 올리며 초빙하였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자 부르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찾아가 불교정책을 자문하고(930), 혜종이 즉위하자 경하의 편지를 보내고(943), 정종이 즉위하자 초대를 받았다(945).
이후 광종이 즉위하자 왕사가 되어 사라선원에 머물게 되었으며, 956년 79세의 천수를 다하고 세상을 떠나니 그는 후삼국 혼란기에 다섯 임금의 귀의를 받은 영광의 스님이었다.
정진대사 원오탑과 탑비는 지금도 봉암사 동쪽 언덕 비선골에 남아 있다. 이런 능력있는 정진대사였기에 봉암사의 중창은 거대한 것이어서 ‘봉암사지’에 의하면 법당이 10채, 승당이 16채, 행랑.누각이 14채, 부속건물이 10여채, 산내 암자가 9채였다고 한다.
이때가 사실상 봉암사의 전성기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봉암사는 여주 고달원, 양주 도봉원과 함께 광종의 직지를 받은 고려 삼원의 하나가 되었던 것이다.
봉암사의 보물 다섯 점
지금 남아 있는 유적이란 모두 석조물뿐이며, 목조건축은 18세기에 지은 극락전 한 채뿐이다. 지증대사가 창건 당시 주조했다는 철불 2구, 그것은 정진대사도 보았다는 것인데, ‘봉암사 안내기’ 끝에는 그것에 관해 이렇게 적혀 있다.
“1구는 땅속에 묻혀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오고 있다. 근간에는 금색전에 있던 반파된 불상을 생각이 부족한 스님들에 의해 고물로 처리한 애석한 일이 있었다.”
봉암사 석조유물 중 나라에서 보물로 지정한 것이 다섯개 있는데 그것은 삼층석탑(제169호), 지증대사 적조탑과 비(제137, 제138호), 정진대사 원오탑과 비(제171, 제172호)이다.
삼층석탑은 지증대사의 봉암사 창건 당시 유물로 추정되는데, 전체 높이 6.3미터의 아담한 명작이다. 9세기 지방사찰의 대부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불국사 석가탑을 모본으로 하여 그것을 경쾌한 모습으로 다듬으면서 지붕돌의 곡선미를 살려낸 것이다.
특히 이 삼층석탑은 기단부가 훤칠하게 커서 늘씬한 미인을 연상케 하는데 그 난리통에도 상륜부가 온전하게 남아 있어서 유물로서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지증대사 적조탑은 하대신라의 대표적인 승탑들과 마찬가지로 규모가 장중하고 돋을새김의 조각이 힘차고 아름답다. 특히 기단부의 공양상과 비파연주상은 그것 자체가 완숙한 평면 회화미를 보여주며, 팔각당의 자물쇠 새김은 단순하면서도 기품과 힘이 넘쳐흐른다.
그러나 지붕돌 반쪽이 파손되어 그 원형을 잃어버렸고 지금은 어두운 보호각 속에 갇혀 있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깝고 답답하게 한다.
이에 비하여 정진대사 원오탑은 절 바깥 언덕배기에 있고 상태도 온전하여 그 주변 경관과 함께 시원스런 유물과의 만남이 보장되어 있다. 승탑의 형태도 지증대사의 그것을 그대로 본받았으니 그 안정감과 기품은 나라의 보물에 값할 만한 것이다.
그러나 조형미를 따질 때 이것은 지증대사의 그것에 감히 견줄 상대가 못된다. 만고불변의 진리인바, 창조적인 것과 모방한 것과는 그런 차이가 있는 것이다.
지증대사의 건축적 안목과 고뇌
나는 이 아름다운 자리를 택하여 절집을 앉힌 지증대사의 안목에 깊은 경의를 표한다. 사실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위치 설정, 이른바 로케이션이다. 부석사 무량수전과 병산서원 만대루가 건축적 아름다움으로 칭송받고 있는 것의 반은 자리앉음새에 있다.
우리나라 산사들이 그 산에서 가장 좋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음은 개창조들의 땅을 보는 건축적 안목이 얼마나 높았던가를 실물로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자리를 잡았다고 해서 그것이 건축적으로 성공한다는 보장은 없다. 여기에서 건축적으로 더욱 중요한 것은 자연과 인공의 행복한 조화이다.
조용한 산세에는 소박하게, 화려한 산세에는 다채롭게, 호방한 산세에는 기세좋게 건물을 세운 것이 우리 산사 건축의 미학이다. 전국 각 산사의 건축이 비슷한 것 같지만 자연과의 어울림은 모두가 저마다의 여건에 따라 이런 원칙이 지켜졌다.
봉암사를 창건한 지증대사도 이 점에 대한 심각한 건축적 고민이 있었다. 최치원이 지증대사비에서 증언한 바에 의하면 대사가 봉암사를 짓고 보니 산세에 눌려 사찰의 위용이 보이지 않는 것이 고민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대사께서는 다음과 같은 건축적 조치를 내렸다고 한다.
“기와추녀를 사각추 모양으로 치켜올려 그 지세를 누르고, 철불 2구를 주조하여 이를 호위케 하였다. 起瓦簷四注以厭之, 鑄鐵像 二軀以衛之”
지증대사 당시의 절집 모습을 우리는 알 수 없지만 다른 절집에서는 볼 수 없는 두 개의 석조물이 이 절의 디테일이 얼마나 뛰어났던가를 증언해주고 있다. 하나는 대웅전 앞마당에 있는 한쌍의 노주석이다.
정료석 또는 순한글로 불우리라고 하는 이 돌받침은 야간에 행사가 있을 때 관솔불을 피워 그 위에 없어 마당을 밝히던 곳이다. 이런 불우리를 봉암사처럼 옛 모습 그대로 지니고 있는 곳은 흔치 않다.
그리고 법당의 돌축대 아래에 있는 긴 석조 물받이통이다. 지붕의 낙숫물이 마당을 파놓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처럼 아름답고 기능적인 물받침 홈통을 설치했으니 그 건물은 또 얼마나 멋스러운 것이었겠는가.
생각하면 할수록 지증대사의 안목에 감탄하게 되고, 겉으로는 드러나지 않으나 실제로는 자연과 인공의 조화를 위한 깊은 성찰과 고뇌가 담긴 우리 전통건축의 미학에 높은 자부심을 갖게 된다.
봉암계곡의 불적들
봉암사 경내를 벗어나 계곡을 따라 희양산 산속으로 1킬로미터쯤 가노라면 백운대(白雲臺)라고 불리는 널따란 암반이 나온다. 그 위쪽으로는 집채만한 바위에 귀엽게 생긴 보살상이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어서 이 백운계곡은 더욱 성스러워 보인다.
계곡의 마애불 한쪽에는 호쾌한 필치로 '백운대'라고 새겨놓은 것이 있다. 이것을 사람들은 최치원 글씨라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근거없는 거짓말이고 글씨체로 보아 조선후기 어느 선비의 솜씨임이 틀림없다.
봉암사 입구 계곡에는 너럭바위가 있는데 그 아래쪽 단면에는 문짝만한 글자로 '야유암(夜遊岩)'이라고 새겨놓은 굳센 필치의 각자가 있고, 그 위로는 다 뭉개졌지만 '취적대'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또 개울 건너 마을 쪽으로 가면 '고산유수 명월청풍'이라는 단정한 해서체의 각자도 있다.
그리고 이것이 모두 최치원 글씨라고 전한다. 그러나 이 역시 지증대사비의 최치원이 와전 내지 과장되어 생긴 말이며 모두 조선후기 선비들의 글씨다. 이런 각자들은 조선시대 봉암계곡의 주인공은 수도하는 스님이 아니라 풍류를 즐기던 문인 묵객들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3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