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정선과 낙산사
평창, 정선
아우라지강의 회상
영동고속도로는 여느 고속도로와 달리 싱그러운 여심(旅心)을 일으킨다. 여주, 원주를 거쳐 새말을 지나면 이제부터는 태백산맥의 허리를 지르는 첫 관문으로 둔내재를 넘어가게 된다. 횡성군 둔내면을 관통하는 이 큰 고개는 영동1호터널에 이르러 해발 890미터로 사실상 대관령보다도 더 높다.
“이제 막 우리의 버스는 봉평터널(영동2호터널)을 지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가면 장평교차로가 나옵니다. 여기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대화면을 거쳐 평창읍으로 빠지게 되고 북쪽으로 올라가면 봉평면이 되는데 바로 이 봉평은 이효석의 고향입니다.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서 읽고 배웠던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가 바로 여깁니다.“
이효석 생가
이효석(李孝石)은 1907년 평창군 봉평면 창동리 남안동에서 태어났다. 호는 가산(可山). 평창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경성제일고보(나중 경기중고), 1925년에 경성제대에 입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하고 1928년 「도시와 유령」으로 등단하여 1930년 졸업 때까지 많은 단편을 발표하며 경향문학의 동반작가로 지칭되었다.
27세(1933)에는 구인회(九人會)에 가입하고 「돈(豚)」을 발표하면서 경향성에서 인간의 자연성에로 전환을 보이며, 28세(1934)에 평양 숭실전문학교로 옮겨 창작을 계속하던 중 34세(1940) 때 아내가 1남 2녀를 남기고 세상을 떠나자 실의에 잠겨 만주를 여행하고, 36세(1942)에 뇌막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이효석은 짧은 일생에서 70여 편의 단편과 많은 수필을 남겼는데, 1936년 『조광(朝光)』지에 고향을 무대로 한 「메밀꽃 필 무렵」을 발표한 것이 결국 평창 봉평땅을 아름다운 문학기행의 명소로 만들어놓았다.
팔석정과 봉산서재
봉평마을을 들어가는 길에는 그럴 만한 유적이 있다. 그것은 봉산서재(蓬山書齋)와 판관대(判官垈) 그리고 팔석정(八石亭)이다. 장평에서 봉평 쪽으로 들어가다보면 바로 길가에 판관대라는 기념비가 서 있는 것이 보인다. 돌받침에 까만 오석의 비를 세우고 지붕돌을 자연석으로 모자 씌우듯 해 놓았다.
판관대는 신사임당의 율곡 이이 잉태지다. 당시 수운판관(水運判官)을 지내고 있던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李元秀)가 이곳 백옥포리(白玉浦里)에 거주하고 있던 아내 신사임당을 보러 왔다가 그날 밤 율곡을 잉태하게 되는 용꿈을 꾸었다는 집터 자리다.
그 뒤 이 얘기가 궁중에까지 알려져 현종 3년(1662)에 사방 십리의 사패지(賜牌地)와 영정(影幀)을 내려주고 봄 가을로 제향케 했는데, 1906년에는 고을 유생들이 평촌리 덕봉산턱에 서재를 건립한 것이 봉산서재이다.
팔석정은 조선시대 4대 명필 중의 한 명으로 인정받던 봉래(蓬萊) 양사언(楊士彦)이 강릉부사로 부임하는 길에 들러 이곳 천변의 풍경이 좋아 8일간 머물렀던 곳으로 훗날 이를 기념하여 팔일정(八日亭)을 지었던 곳이라고 한다.
바위에는 양봉래가 썼다는 "석실한수(石室閑睡), 석대투간(石臺投竿), 봉래(蓬萊), 영주(瀛洲)" 등 여덟 글자가 새겨 있는데 글씨는 제법 단정히 새겨져 있으나 양봉래의 웅혼한 초서체와는 거리가 멀다.
산은 강을 넘지 못하고
장평에서 다시 영동고속도로로 들어가 계속 타고 내려가다가 하진부에서 꺾어들어서면 정선군 나전리까지 장장 100리의 천변로를 타게 된다. 오대천 여울이 진부에 이르면서 제법 큰 내를 이루어 좌우로 1,200~1,300미터의 위용을 자랑하는 박지산, 잠두산, 갈미봉, 가리왕산, 오두치를 헤집고 나아가며 긴 협곡을 이룬다.
그러나 하진부에서 나전에 이르는 협곡은 그런 강변길이 펼쳐주는 장쾌한 넓이가 없다. 마치 고개 숙이고 굴속으로 들어가듯이 산허리를 헤집고 나아가기 바쁘다. 찻길은 ㄹ자로 돌다가 다시 ㄷ자로 꺾어지면서 눈앞엔 언제나 거대한 산을 마주하고 달려야 한다.
기암절벽과 반석이 곳곳에 자리하며 비경을 이루고 솔밭과 외딴집들이 점점이 이어지며 인적의 체취를 느끼게도 하지만 오대천 깊은 여울을 끝없이 따라가는 형상은 마치 자연의 모태 속으로 회귀하는 것 같은 강한 흡입력을 연상케 된다.
아우라지에서 정선에 이르는 산과 강은 국토의 오장육부가 아니고서는 세상천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유장한 아름다움과 처연한 감상의 집합체이다.
산자분수령(山自分水嶺)이라고 했다. “산은 스스로 분수령이 된다”는 뜻이다. 실제로 산은 물을 가르고 물은 산을 넘지 못한다. 그러나 강의 입장에서 보면 비록 산에서 물이 흐르고 그 물이 모여 강을 이루지만 결과적으로 산은 절대로 그 강을 넘지 못한다. 오직 강이 있기에 그 산들은 여기서 저기로 떨어져 있을 뿐이다.
아우라지강
정선땅 아우라지강을 찾아가는 행로는 먹거리로 칠 때 주식이 아니라 별식에 해당된다. 그런데 그 별식이 피자나 난자완스 같은 것이 아니라 강원도 감자부침 같기도 하고 옛날 잔치상에 오른 속빈 강정의 순구한 맛 같은 것이다.
산천의 경개에 비유하자면 설악산이 감성을 환기시켜주는 절경의 명산이라면 지리산은 감성을 심화시켜주는 깊이감을 갖고 있는 영산(靈山)이라 할 만하며, 아우라지강을 찾아가는 길에 맞닥뜨린 태백산맥의 연봉들과 거기에 어우러진 큰 여울들은 자연의 원형질을 대하면서 받는 자기 정서의 순화작용 같은 것이었다.
여량은 조그만 산간의 강마을이다. 오대산 줄기인 발왕산에서 발원한 송천(松川, 일명 구절천)과 태백산 줄기인 삼척 둥근산(일명 중봉산)에서 발원하여 임계면을 두루 돌아 유유히 내려오는 골지천(骨只川, 일명 임계천)이 여량에 와서 합수된다. 두 물줄기가 아우러진다고 해서 얻은 이름이 아우라지강이다.
아우라지에는 조그마한 나룻배가 한 척 있다. 벌써 오래전부터 삿대를 젓지 않고 강 위로 긴 쇠줄을 잡아매어 그것을 잡고 오가고 있다. 강 건너 솔밭언덕이 지척에 보이건만 작아도 강은 강인지라 나룻배 없이는 건너지 못한다.
강언덕 양지바른 쪽에는 처녀상 하나가 야무진 맵시로 세워져 있다. 누구의 솜씨인지 몰라도 아우라지의 순정을 19세기 서양 고전주의예술풍으로 다듬어놓은 것이다. 그 어색함이란 마치 뽕짝가요를 이탈리아 가곡풍으로 부르는 격이라고나 할까.
정선아리랑의 유래
흔히 우리나라에는 3대 아리랑이 있다고 한다. 강원도의 정선아리랑, 호남의 진도아리랑, 영남의 밀양아리랑이다. 밀양아리랑은 씩씩하고, 진도아리랑은 구성지고, 정선아리랑은 유장하다.
그 중 가장 충실한 민요적 음악언어를 갖고 있는 것은 정선아리랑이라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하여 팔도아리랑 중 오직 정선아리랑만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아리랑의 뜻과 어원에 대하여는 알영(박혁거세의 부인)설에서 의미없는 사설이라는 설까지 십여가지 설이 있는데 정선아리랑은 ‘(누가 내 처지를) 알아주리오’라는 뜻에서 ‘아라리’가 되었다는 전설을 갖고 있고 실제로 이곳 사람들은 ‘정선아라리’라고 부르고 있다.
정선아리랑은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성으로 정선땅 거칠현동(居七賢洞)에 은거한 선비 전오륜(全五倫)이 산나물을 뜯어먹으면서 비통한 심정을 율시로 지어 부르던 것을 지방의 선비들이 한시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풀이하여 감정을 살려 부른 것에서 시원을 삼고 있다.
그래서 정선아리랑 700수 중에서 제일 첫번째 노래는 송도(개성)의 만수산이 나오며, 다른 아리랑보다 애조를 띠게 됐다는 것이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억수장마 질라나.
만수산 검은 구름이 막 모여든다."
본디 논노래·들노래·베틀노래·뗏목노래 등 민초들의 삶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던 노동요가 1865년 경복궁 중수 때 팔도 부역꾼들이 각지의 일노래를 주고받는 가운데 아리랑의 보편성과 지역성이 동시에 확보되고 일의 노래가 놀이노래로 확대해갔다는 것이 고정옥의 『조선민요연구』이래로 정설이 되었다.
조양강과 정선읍
아우라지강은 굽이굽이 맴돌아 정선읍내에 이르러 조양강이 된다. 여량에서 정선으로 가자면 큰 고개를 하나 넘게 되는데 그 고갯마루에서 내려다보는 풍광은 국토의 오장육부에서만 볼 수 있는 절경을 이룬다. 강은 산과 산을 헤집고 넘어가는데 산은 강을 넘지 못하여 옆으로 비껴간다.
조양강은 푸르고 푸른 옥빛이다. 잠시 후 우리가 맞을 사북과 고한의 시커먼 물빛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맑기만 하다. 조양강의 풍광은 아침햇살을 머금은 때가 가장 아름답단다. 그래서 이름조차 아침 조(朝)자에 볕 양(陽)자가 되었다.
고은 선생은 비행기재를 넘어 비봉산 고갯마루에서 별리 정선읍내를 바라볼 때 찾아온 감정은 “뭐라고 말할 수 없는 도달감과 단절감”이었다고 술회하였다.
정암사의 단풍
정선에서 사북을 지나 고한의 하갈래에서 곧장 질러 고한을 벗어나면 이내 정암사(淨巖寺)로 오르게 된다. 그 순간 산천은 거짓말처럼 맑아진다. 아우라지강가의 밝은 빛과는 달리 고산지대의 짙은 색감이 산과 내를 덮고 있다. 그래서 정암사 언저리의 나무들은 더 싱싱하고 힘있고 연륜이 깊어 보인다.
정암사의 아름다움은 공간배치의 절묘함에 있다. 이 태백산 깊은 산골엔 사실 절집이 들어설 큰 공간이 없다. 모든 산사들이 암자가 아닌 한 계곡 속의 분지에 아늑하고 옴폭하게 때로는 호기있게 앉아 있다.
정암사는 가파른 산자락에 자리잡았으면서도 절묘한 공간배치로 아늑하고, 그윽하고, 호쾌한 분위기를 두루 갖추었다. 정암사는 좁은 절마당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하여 모든 전각과 탑까지 산자락을 타고 앉아 있다. 마치 제비새끼들이 둥지 주변으로 바짝 붙어 한쪽을 비워두는 것처럼.
절 앞의 일주문에 서면 정면으로 반듯한 진입로가 낮은 돌기와담과 직각으로 만나는데 돌기와담 안으로 적멸궁(寂滅宮)이 보이고 또 그 너머로 낮은 돌기와담이 보인다. 일주문으로 들어서 절 안으로 들어가는 길은 왼편으로 육중한 축대 위에 길게 뻗은 선불도량(選佛道場)과 평행선을 긋는다.
절마당을 가로질러 산자락으로 난 돌계단을 따라 오르면 정암사가 자랑하는 유일한 유물인 수마노탑(水瑪瑙塔, 보물 제410호)에 오르게 된다.
정암사의 수마노탑
수마노탑은 전형적인 전탑양식인데 그 재료가 전돌이 아니고 마노석으로 된 것이 특색이다. 마노석은 예부터 고급 석재였다. 고구려의 담징이 일본에 갔을 때 일본사람들이 이 위대한 장공(匠工)에게 큰 맷돌을 하나 깎아달라고 준비한 돌이 마노석이었다고 한다(그래서 일본 나라(奈良)의 토오다이지(東大寺) 서쪽 대문을 맷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탑에 물 수(水)자가 하나 더 붙어 수마노로 된 것은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귀국할 때 서해 용왕을 만났는데 그때 용왕이 무수한 마노석을 배에 실어 울진포까지 운반한 뒤 다시 신통력으로 태백산(갈래산)에 갈무리해두었다가 장차 불탑을 세울 때 쓰는 보배가 되게 하였다는 전설과 함께 생긴 것이다.
수마노탑은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가져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다. 그래서 저 아래 적멸궁에는 불상이 안치되지 않고 곧바로 이 탑을 예배토록 되어 있다. 지금 우리는 양산 통도사 금강계단, 오대산 월정사 적멸보궁, 영월 법흥사 적멸보궁, 설악산 봉정암과 이곳 정암사를 5대 진신사리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자장이 쌓았다는 원래의 수마노탑 모습은 알 수 없고 지금의 탑은 1653년에 중건된 것을 1972년에 완전 해체 복원한 것이다.
자장율사의 일생
『삼국유사』의 「자장정률(慈藏定律)」, 중국의 『속고승전』, 그리고 『정암사사적편』에 나오는 자장의 전기는 정암사의 내력을 자세히 말해주고 있다.
자장(慈藏, 590년~658년)은 신라의 스님이었고, 율사(律師)로 알려져 있다. 출가하기 전에는 진골 출신의 귀족이었으며, 성은 김(金), 속명은 선종(善宗)이다.
진골 출신 관리 호림공(虎林公) 김무림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모를 일찍 여의자, 처자를 버리고 원녕사(元寧寺)를 지어 고골관(枯骨觀, 인생의 무상함을 마른 뼈와 같이 여기는 관념)을 닦았다. 이때 선덕여왕이 재상에 임명하였으나 나가지 않았다.
636년(선덕여왕 5년) 왕명으로 제자 승실 등 10여명과 함께 중국 당나라의 오대산에 가서 문수보살을 친견하고 가사와 사리를 받고, 불도를 닦았다. 훗날 화엄종의 시조가 되는 두순(杜順)과 계율종(戒律宗)의 도선(道宣)에게 배운 뒤 643년(선덕여왕 12년) 장경 1부와 불구를 가지고 돌아왔다.
분황사 주지로 있으면서 궁중과 황룡사에서 《대승론》, 《보살계본》 등을 강론하였다. 그 후 대국통이 되어 승려의 규범과 승통의 일체를 주관하였다. 또한 황룡사 9층 목탑의 창건을 건의하여 645년에 완성하였으며, 통도사와 금강계단을 세웠다. 전국 각처에 10여 개의 사탑을 세웠고, 중국의 제도를 본받아 신라에서는 처음으로 관복을 입게 하였다.
자장은 당나라 유학 시절 청량산 북대(北臺)에 올라 문수보살상 앞에서 삼칠일간 정진하니 하루는 꿈에 이역승〔梵僧〕이 나타나 범어로 게승을 들려주었고 이튿날 아침 다시 나타나 번역을 해 주었다고 한다.
모든 법을 남김없이 알고자 하는가
본디 바탕이란 있지 않은 것
이러한 법의 성품을 이해한다면
곧바로 노사나불을 보리라
了知一切法 自性無所有
如是解法性 郎見盧遮那
그리고는 "비록 만가지 가르침을 배우더라도 이보다 나은 것이 없소"라고 덧붙이고는 가사와 사리 등을 전하고는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자장은 북대에서 받은 사리 100립(粒)을 황룡사 구층탑, 통도사 계단, 울주 대화사의 탑에 나누어 봉안했고, 만년에는 강릉부에 수다사(水多寺, 지금 평창에 터만 있음)를 짓고 살았다.
그러던 어느날 꿈에 북대에서 본 이역승이 나타나 “내일 그대를 대송정(大松汀)에서 보리라” 하고 사라졌다. 놀라 일어나 대송정에 나가니 문수보살이 나타나는지라 법요(法要)를 묻자 “태백산 갈반지(葛蟠地)에서 다시 만나세”라며 자취를 감추었다.
자장이 태백산에 들어와 갈반지를 찾는데 큰 구렁이가 나무 아래 서리어 있는 것을 보고는 시자에게 “여기가 갈반지다”라고 말하고 석남원(石南院, 지금 정암사)을 짓고는 문수보살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어느날 다 떨어진 방포(方袍, 네모난 포대기)에 죽은 강아지를 칡삼태기에 담은 늙은이가 와서 “자장을 만나러 왔다”고 하였다. 이에 시자는 “우리 스승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사람이 없거늘 당신은 도대체 누구냐”고 묻자 늙은이는 “너의 선생에게 그대로 고하기만 하라”고 하였다.
시자가 들어가 스승에게 사실대로 말하니 자장은 “미친 사람인가보다”라고 하였다. 시자가 나와 욕을 하며 늙은이를 쫓았다.
그러자 늙은이는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 아상(我相, 자신이 남보다 우월하다는 자격지심 같은 것)이 있는 자가 어떻게 나를 볼 것이냐!”라며 칡삼태기를 쏟자 죽은 강아지는 사자보좌(獅子寶座)로 바뀌고 그는 이를 타고 빛을 발하며 홀연히 떠났다.
시자가 이 놀라운 광경을 자장에게 전하자 자장이 의관을 갖추고 황급히 따라나섰으나 벌써 아득히 사라져 도저히 따를 수 없었다. 문수보살을 따라가던 자장은 드디어 몸을 떨어뜨려 죽었다.
금강경 25번째 마디, 화무소화(化無所化), 번역하여 ‘교화(敎化)하여도 교화함이 없음,’ 풀이하여 ‘가르쳤으나 가르침이 없는 경지’에 이러한 구절이 나온다. 부처님이 장로(長老) 수보리(須菩提)에게 하는 말이다.
수보리야! 너희들은 여래가 중생을 제도하리라고 여기지 마라. (…) 진실로 어떤 중생도 여래가 제도할 것이 없느니라. 만일 어떤 중생을 여래가 제도할 것이 있다면 이는 여래가 아상(我相),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있다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아상이 있다”고 한 것은 곧 아상이 아니건만 범부들은 아상이 있다고 여기느니라. 수보리야! 범부(凡夫)라는 것도 범부가 아니고 그 이름이 범부일 뿐이니라.
낙산사와 관동 폐사지
낙산사 회한
2005년 4월 5일, 강원도 양양군 일대를 휩쓴 대형 산불은 45만평(150헥타르)의 야산을 태우고 낙산사 원통보전을 비롯한 크고 작은 전각 13채와 보물 제479호인 낙산사동종마저 삼켜버렸다. 그렇지만 낙산사 스님들과 사부대중은 전국민의 지대한 관심과 격려에 힘을 얻어 복원불사에 착수하여 마침내 2009년 10월 12일에 복원불사 회향식이 봉행되었다.
당시 낙산사 주지 정념스님은 그 회한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복원위원회는 낙산사의 사격이 가장 크고 장엄했던 조선 세조 때의 모습으로 복원하기로 의견을 모으고 단원 김홍도의 「낙산사도(洛山寺圖)」를 기본 모형으로 삼아 불사를 진행키로 했습니다. 이번에 회향하는 빈일루, 응향각, 정취전, 설선당, 고향실, 송월요, 근행당 등 총 7동의 주요 전각들은 이 그림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 전통건축의 아취와 천년고찰의 격조가 느껴질 수 있도록 정성스럽게 지어졌습니다. (…)“
의상대사의 낙산사 창건설화
낙산사를 답사할 때면 나는 으레 후문으로 들어가 정문으로 나왔다. 그것은 동해바다가 멀리 내다보이는 의상대(義湘臺)에 먼저 오르기 위함이었다.
낙산사의 유래를 알기 위해서도 그렇고 낙산사의 건축적 자리매김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의상대에 먼저 오르는 것이 유리하다. 특히 의상대에서 바라보는 일출은 대단히 장엄하다. 겸재 정선이 그린 「낙산일출」은 이 의상대에서 본 그림이다.
의상대는 1926년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雲, 1879~1944) 스님이 여기 낙산사에 머물고 계실 때 저 장엄한 ‘낙산일출’을 바라볼 곳에 정자 하나 없는 것이 못내 아쉬워 높은 벼랑 위 시원한 전망을 가진 이곳에 육각정을 지은 것이다.
만해스님은 이 누대의 이름을 의상대라 하고 당대의 서예가인 성당(惺堂) 김돈희(金敦熙, 1871~1936)의 글씨로 현판을 달았다.
의상대사가 여기에 낙산사를 세우게 된 내력은 『삼국유사』에 아주 자세히 전하고 있다.
옛적에 의상법사가 당나라에서 돌아와(670년, 문무왕 10년) 관음보살의 진신(眞身)이 이 해안 굴 속에 산다는 말을 듣고 인하여 낙산이라고 하였으니 이는 서역에 보타락가산(補陀洛迦山, 관음이 거주하는 곳)이 있는 까닭이다. 이것을 소백화(小白華)라 하는 것은 백의(白衣)보살(관음보살의 별칭)의 진신이 머물러 있는 곳이므로 이를 빌려 이름 지은 것이다.
의상이 재계(齋戒)한 지 7일 만에 앉은 자리〔座具〕를 새벽물 위에 띄웠더니 천(天), 용(龍) 등 팔부중(八部衆, 사천왕이 거느리는 여덟 수호신)이 굴 속으로 그를 인도하였다. 의상이 공중을 향하여 예를 올리니 수정염주 한 꾸러미를 내어주므로 그것을 받아 물러나왔다. 그러자 동해의 용이 또한 여의주 한 알을 바치므로 그것도 받아왔다. 의상이 다시 7일 동안 재계하니 비로소 관음의 진신을 보게 되었다.
관음보살이 의상에게 말하기를 “앉은 자리 위 산꼭대기에 한쌍의 대가 솟아날 것이니 그 자리에 불전을 짓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의상이 그 말을 듣고 굴에서 나오니 과연 쌍죽이 땅에서 솟아나왔다. 이에 금당을 짓고 관음상을 빚어 모시니 그 원만한 얼굴과 고운 모습이 천연스러웠다. 그리고 그 대는 없어졌으므로 그제야 비로소 이곳이 바로 관음의 진신이 거주하는 곳임을 알았다. 이로 인하여 그 절을 낙산사라 하고 의상은 그가 받은 수정염주와 여의주를 성전(聖殿)에 모셔두고 떠났다.
의상대에서 북쪽을 바라보면 깎아지른 벼랑 위, 노송과 대밭 밑에 보타굴(관음굴)과 홍련암(紅蓮庵)이 있다. 지금 홍련암 바닥에는 10센티미터 남짓한 구멍을 통하여 관음굴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해놓았으니 여기가 곧 전설의 고장인 것이다.
홍련암은 의상이 참배할 때 한 마리 파랑새〔靑烏, 관음보살 주변에 붙어 있는 새, 곧 그의 화신〕를 만났는데 그 파랑새가 석굴 속으로 자취를 감추자 의상이 7일 동안 기도를 한즉, 7일 후 별안간 붉은 연꽃〔紅蓮〕이 떠오르고 관음보살이 현현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고려불화 중에는 금강대좌에 앉아 선재동자의 방문을 맞이하는 「수월관음도(水月觀音圖)」가 여러폭 있는데, 그중 일본 다이또꾸지(大德寺)에 소장된 그림에는 아래쪽에 팔부중과 동해용왕이 여의주를 바치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관음보살 머리 위로 파랑새가 날고 있어 의상대사의 낙산사 창건설화와 그대로 연결된다.
이런 전설을 지닌 홍련암은 낙산사 화재 때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사람들로 하여금 의상대사의 신성함과 신통력을 다시금 생각게 하고 있다.
원효대사의 낙산사 봉변
그런데 『삼국유사』 낙산사 전설에는 의상의 신통력 이야기에 뒤이어 이상하게도 원효대사의 큰 망신과 봉변 얘기가 나온다. 이 얘기에서는 자못 악의적이라 할 만큼 원효대사가 폄하되어 있다.
"훗날 원효법사가 뒤이어 (낙산사에) 와서 예를 보이려 하였다. 처음에 남쪽 교외에 이르니 논 한가운데 흰옷〔白衣, 백의관음의 암시〕을 입은 한 여자가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가 희롱삼아 그 벼를 달라고 하니 여인은 벼가 열매 맺지 않았다고 희롱으로 대답했다.
원효가 또 길을 가다가 다리 밑에 이르니 한 여인이 월경대〔月水帛〕를 빨고 있었다. 원효가 먹을 물을 달라고 청하니 이 여인은 그 (월경대 빨던) 더러운 물을 떠서 주었다. 원효는 여인이 준 물을 쏟아버리고 다시 냇물을 떠서 마셨다.
이때 들 한가운데 서 있는 소나무 위에서 파랑새 한 마리가 “휴제호(休醍醐) 화상(제호를 마다하는 스님)아!” 하고는 재빨리 몸을 숨기고 보이지 않았다. 소나무 아래엔 신 한 짝이 벗어져 있었다. 원효가 낙산사에 이르니 관음보살상 자리 밑에 전에 보았던 신 한 짝이 벗어져 있는 것이었다.
그제야 원효는 전에 만났던 여인이 관음의 진신임을 알았다. 그래서 그때 사람들은 그 소나무를 관음송이라 했다. 원효가 성굴(聖窟)에 들어가 다시 관음의 참모습을 보려고 했으나 풍랑이 크게 일어 들어가지 못하고 떠났다."
이 전설의 요지인즉, 원효는 관음을 만났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한 스님이고, 관음에게 수정염주를 받기는커녕 월경대를 빨던 물이나 한 바가지 얻은 스님이었다는 것이다.
일종의 유언비어라 할 원효대사 봉변기는 말하자면 ‘유언비어의 사회사’로 풀어야 그 의미가 살아난다. 의상과 원효는 선후배, 동학으로 서로 존경하던 사이인데 이처럼 악의적인 이야기가 나오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의상과 원효는 여러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의상은 진골귀족 출신이었고, 원효는 육두품 출신이었다. 의상은 끝내 당나라에 유학하여 화엄종 체계를 배워왔지만 원효는 결국 유학을 포기하고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는 스스로의 깨달음을 실천했다.
의상은 강렬한 국가의식을 가진 정치적 인물이어서 당나라에서 귀국하게 된 동기가 당나라의 신라 침공계획을 본국에 알리기 위한 것일 정도였다. 그러나 원효는 광대의 노래에 무애가(無碍歌)를 붙여 부르고 다닐 정도로 대중성이 강했다. 원효가 개인적 깨달음을 주장했다면, 의상은 거대한 불교체제 속에 들어와야 깨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지배층이 필요로 했던 것은 의상의 정신을 높이고 대중들이 신봉하는 원효의 사상을 약화시킬 수 있는 유언비어였다는 얘기가 된다. 그래서 의상의 신격화된 전설 뒤에는 줄곧 원효의 그림자가 따라다니곤 한다. 그 원효의 모습은 항시 의상에 못 미치는 신통력 없는 것, 별 볼일 없는 것, 아니면 낙산사 봉변기 같은 것이다.
낙산사 홍예문
낙산사는 아래쪽 초입의 일주문보다도 산자락을 마주 이어 성문처럼 세운 홍예문(강원유형문화재 제33호)에 이르러야 산문에 들어선 기분이 일어난다. 낙산사 안내서를 보면 이 무지개 모양의 돌문은 세조 13년(1467)에 세조가 낙산사에 행차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절 입구에 세운 것이라고 되어 있으나 정확한 설명은 아니다.
세조는 세조 12년(1466) 3월부터 윤3월까지 40일간에 걸쳐 금강산을 유람하였다. 원래 목적은 고질적인 피부병 치료를 위한 것이었다. 외금강 온정리에서 온천을 마친 세조는 귀로로 동해안변을 타고 내려와 낙산사, 대관령, 월정사를 거쳐 궁궐로 돌아갔다.
이때 세조는 몽골난 이후 퇴락한 낙산사를 보고 학열(學悅)스님에게 중수를 명하였다. 『동국여지승람』은 이 사실을 “세조가 이 절에 행차했다가 전사(殿舍)가 비좁고 더러우니 신축하도록 명하여 굉장해졌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동해 낙산사!”
고은 선생이 뜨거운 가슴으로 쓴 『절을 찾아서』의 제1장 제1절은 「바다와 여행자가 함께 부처 되어」라는 제목으로 쓴 낙산사다. 고은 선생은 이 글의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한다.
“동해 낙산사!”라고 말해야 한다. 거기에는 반드시 감탄사가 붙어 있지 않으면 하나의 고유명사가 되지 않는다. (…) 창연망망한 동해와 더불어 오랜 세월을 그 파도 속에 싸여서 살아온 낙산사를 어찌 감탄부 없이 부를 수 있겠는가.
이런 절이 이제 김홍도의 「낙산사도」에 입각하여 다시 태어난 것이다. 단원 김홍도의 「낙산사도」는 그의 금강산 사생화첩인 『금강사군첩(金剛四郡帖)』의 한 폭이다. 1788년 가을, 단원 나이 44세 때 정조대왕은 단원 김홍도와 복헌 김응환에게 금강산을 그려오라는 명을 내렸다.
이에 단원과 복헌은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 등 금강산의 동서남북을 이루는 회양군, 통천군, 고성군, 장연군 등 4개 군의 명승을 두루 그린 다음 돌아오는 길은 세조의 금강행과 마찬가지로 동해안을 타고 내려와 대관령을 넘어가는 길을 택하게 됨으로써 사실상 영동의 9개 군 명승첩으로 꾸며졌다. 때문에 이 화첩은 『금강사군첩』이면서 그 속에는 성류굴, 대관령, 월정사 등과 함께 낙산사 그림이 들어 있는 것이다.
단원이 돌아와 정조에게 바친 그림은 수십미터 되는 장폭의 두루마리 그림이었다고 서유구(徐有榘, 1764~1845)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서 이렇게 말했다.
김홍도는 (…) 일찍이 왕명을 받들어 비단 화첩을 들고 금강산에 들어가 50여일을 머물면서 1만 2천 봉우리와 구룡연 등 여러 승경을 모두 유람하고 그것을 형상으로 그려 수십장(丈) 길이의 두루마리로 만들었다. 채색이 아름답고 운치있으며 붓놀림이 아주 정밀하니 환쟁이의 채색산수라고 소홀히 볼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두루마리는 지금 전해지지 않고 다만 그 초벌 그림으로 그린 사생첩인 『금강사군첩』만이 여러 형태로 전해지고 있다. 이 『금강사군첩』은 큰 인기가 있었던 듯 몇권의 복사본이 전해지고 있고 엄치욱, 이풍익 등 단원을 추종한 화가들이 이 첩을 거의 똑같이 임모(臨摸)한 것도 있다.
그중 「낙산사도」를 보면 화면을 대각선으로 나누어 왼쪽엔 낙산사, 오른쪽엔 동해바다와 일출을 그렸다. 낙산사 건물은 원통보전을 중심으로 하여 뒤쪽은 돌담, 앞쪽은 회랑으로 반듯하게 둘러져 있고 바닷가 쪽으로는 의상대사의 홍련암이 지붕만 빠끔히 내밀고 있다.
바다를 한쪽으로 비껴두고 산자락에 편하게 들어앉아 있는 그림 속의 이 낙산사는 누가 보아도 단아하고 사랑스러운 절집이라는 찬사가 나오게 한다.
원통보전 칠층석탑과 별무늬 담장
원통보전은 낙산사의 본전(本殿)이다. 원통보전이란 관세음보살을 모신 전각을 일컫는다. 낙산사는 관음보살의 상주처로 세워진 절이기 때문에 이 절에는 석가모니불을 모신 대웅전이나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 같은 불전이 없고 이 원통보전이 금당 역할을 하고 있다.
원통보전 앞에 서 있는 칠층석탑(보물 제499호)은 몇 안되는 조선시대 석탑이다. 조선시대는 폐불정책으로 새 절이 별로 창건되지 않고 불교미술이 위축되어 별다른 특징이란 것이 없는데, 낙산사는 조선초 세조 때 중수되면서 범종, 불상, 탑 모두에서 고려시대의 전통을 잇는 조선적인 세련미를 보여준다.
탑의 받침이 되는 기단부는 정사각형의 바닥돌 위로 밑돌을 놓았는데 윗면에 24잎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신부는 지붕돌과 몸돌을 일층으로 하여 칠층을 이루면서 각 층의 몸돌 아래로는 넓고 두꺼운 괴임이 한 단씩 있어 듬직한 무게감이 있다.
반면에 지붕돌은 경사면이 평탄하며 네 귀퉁이의 들림이 잘 어우러져 경쾌한 느낌을 준다. 탑의 머리 찰주에는 라마탑(喇嘛塔) 모양의 상륜부가 장식되어 있다.
이 칠층석탑은 사리장치 대신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을 친견하고 얻어왔다는 수정염주와 여의주가 봉안되었다고 전해 내려오고 있다.
원통보전 법당 밖에는 아름다운 별무늬 담장이 있는데, 비록 보물로 지정된 바는 없지만 낙산사에서 가장 큰 볼거리는 단연코 이 담장이다. 암키와와 진흙을 교대로 쌓으면서 사이사이에 화강암을 동그랗게 다듬어 끼워넣음으로써 아름다운 별무늬로 장식된 이 담장은 조선인들의 소박하면서도 멋스러운 정취를 잘 보여준다.
원통보전이 불길에 휩싸여 있을 때 소방차가 이곳에 사정없이 물을 쏘아대려고 했으나 스님들이 차라리 건물은 포기하고 담장과 석탑은 살리자고 하여 온전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경황 없던 때에도 절집의 명물을 지키려고 노력했던 스님들의 슬기에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일어난다.
수정염주와 여의주의 행방
낙산사의 전설적인 수정염주와 여의주의 행방에 대해서는 『삼국유사』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몽골 대병이 침입한 이후 계축·갑인(1253,54년) 연간에 관음·정취 두 보살상과 두 보주(수정염주와 여의주)를 양양성으로 옮기었는데, 몽골병의 침입이 아주 급박하게 되어 성이 거의 함몰할 때 주지스님인 아행(阿行)이 은상자에 넣어 도망치려 하였다. 이때 절의 노비〔寺奴〕인 걸승(乞升)이 그것을 빼앗아 땅에 묻고 맹세하였다. “만약 내가 이 전쟁에서 죽음을 면치 못하면 두 보주는 마침내 인간세상에 나타나지 못하여 아는 사람이 없게 되겠지만, 내가 만약 죽지 않으면 마땅히 두 보주를 받들어 나라에 바칠 것이다.”
이후 성이 함락되었으나 절의 노비 걸승은 살아남아 적병이 물러난 뒤 두 보주를 파내어 명주도(溟州道) 감창사(監倉使) 이록수(李祿綏)에게 바쳤다. 이후 명주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임금이 야별초 10명을 보내 걸승을 데리고 가서 명주성에서 두 보주를 가져오게 하여 내부(內府, 궁궐)에 모셔두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 수정염주와 여의주가 칠층석탑 속에 안치되었다고 전하는 것인데 이 석탑은 건립 이후 해체된 적이 없으니 사실이라면 아직도 탑 속에 있어야 한다. 어쩌면 이 탑이 임진왜란, 6·25동란, 낙산사 화재를 모두 이겨낸 것이 이 수정염주와 여의주의 신력인지도 모를 일이다.
건칠관음보살좌상
원통보전 안으로 들어가니 새로 봉안한 후불탱화 신중탱화와 함께 화마에서 기적적으로 구해낸 건칠(乾漆)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2호)이 해맑은 개금으로 새 단장하고 나를 맞아준다.
인근에 있는 영혈사에서 모셔왔다고도 전해지는 이 건칠관음상은 팔각 대좌 위에 결가부좌한 채 앉아 허리를 곧추 세우고 고개만 앞으로 약간 숙여 마치 굽어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이 불상은 4월 5일 화재에서 일단 진정되었던 산불이 오후 들어 다시 일어나기 시작할 때 낙산사 스님들이 등에 업고 모셔내어 지하수장고로 급히 피신시킴으로써 기적적으로 살려냈다.
낙산사 동종
본래 낙산사에는 보물 479호 낙산사 동종이 있었는데 낙산사 화재 당시 서까래 밑에 깔리면서 화염에 녹아 버렸다. 이 낙산사 동종은 조선초기의 대표적인 범종 중 하나다.
이 종은 예종 원년(1469)에 그의 아버지인 세조를 위해 낙산사에 보시한 것으로 높이 158센티미터, 입지름 98센티미터의 제법 크고 묵직한 종이다. 그러니까 에밀레종으로 대표되는 우리나라 범종 전통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것이다.
종의 몸통에 양각된 명문에 따르면 세조 때에 중수하여 성화 5년(1469) 을축일에 조성하였다. 그 어떤 종보다도 화려하다. 종에는 보살상 네 좌와 고사리 모양 물결 무늬, 연꽃 36송이와 삼각형으로 큰 꽃 세 송이를 양각했고 종의 정상에는 쌍룡을 장식했다. 특히 중요한 점은 종신의 끝부분에 조선 태조의 권운문(卷雲文)과 조선 세조의 파상문(波狀文)을 새겼다는 것이다. 낙산사 동종이 왕실 발원, 특히 세조의 각별한 지원으로 만든 웅대하고 예술적인 작품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범종 중 가장 화려하게 꾸며진 것으로 유명하며 특히 양각된 보살입상은 우리나라 조각물 중 최우수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출처 나무위키]
이후 불교미술, 조각, 금속공예, 보존과학 등 분야별 전문가들로 복원 자문단을 구성하고 중요무형문화재 제112호인 주철장 원광식씨가 2005년 9월부터 13개월의 복원과정을 거쳐 2006년 10월에 낙산사 새 범종루에 걸고, 화마로 녹은 범종은 현재 의상기념관에 안치되었으며 보물 제479호가 해제되었다.
진전사터
양양 낙산사에서 북쪽으로 8킬로미터쯤 올라가다가 속초비행장으로 꺾어들어가는 강현면사무소 소재지에서 설악산을 바라보고 계곡을 따라, 계곡을 건너 20리길을 오르면 둔전리 마을이 나온다. 진전사(陳田寺)가 있었다고 해서 진전리였던 것이 음이 변해 둔전리(屯田里)가 된 것이다.
진전사가 정확하게 언제 세워졌는지 현재로서는 확인할 자료가 없으나, 도의(道義)선사가 서라벌을 떠나 진전사의 장로가 되었던 때를 시점으로 잡는다면 821년에서 멀지 않은 어느 때가 된다. 진전사의 삼층석탑(국보 제122호) 양식이 9세기 초 하대신라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으니 이 점을 의심하는 미술사가는 아무도 없다.
진전사의 삼층석탑에는 앞 시대에 볼 수 없던 돋을새김 장식이 들어 있다. 기단 아래쪽 천의(天衣)자락을 흩날리는 화불(化佛)이 사방으로 각각 두 분씩 모두 여덟 분, 기단 위쪽에는 팔부중상 여덟 분이 사방으로 각각 두 분씩, 그리고 일층탑신(塔身)에 사방불(四方佛) 네 분이 각 면마다 한 분씩 돋을새김되어 있다.
도의선사가 북쪽으로 간 이유
도의선사가 우리나라 역사 속에서 사상적 일대 전환을 일으킨 장본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국정교과서에는 도의선사의 진전사에 대해 일언반구의 언급이 없다.
도의선사의 일대기가 별도로 전해지고 있는 것은 없다. 그러나 『조당집(祖堂集)』과 문경 봉암사에 있는 지증대사비문, 장흥 보림사에 있는 보조선사비문을 종합해보면 어느정도 그의 삶과 사상이 복원된다.
도의의 성은 왕(王)씨이고 호는 원적(元寂)이며 북한군(北漢郡) 출신이다. 선덕왕 5년(784)에 당나라에 건너가 강서(江西) 홍주(洪州)의 개원사(開元寺)에서 서당지장(西堂智藏, 739~814)에게 불법을 이어받고 도의라고 개명하여 헌덕왕 13년(821)에 귀국하였다. 무려 37년간의 유학이었다.
도의가 당나라에서 익힌 불법은 선종(禪宗) 중에서도 남종(南宗)선의 골수였다. 달마대사에서 시작된 선종이 6조에 와서 남북종으로 나누어져 남종선은 조계혜능(曹溪慧能, 638~713)부터 다시 시작됨은 내남이 모두 알고 있는 바 그대로다.
달마대사가 “편안한 마음으로 벽을 바라보면서(安心觀壁)” 깨달음을 구했던 것이 혜능에 와서는 “문자에 입각하지 않으며, 경전의 가르침 외에 따로 전하는 것이 있으니, 사람의 마음을 직접 가리켜, 본연의 품성을 보고, 부처가 된다(不立文字 敎外別傳 直指人心 見性成佛)”고 호언장담을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당시 통일신라의 왕권불교는 왕즉불(王卽佛)의 엄격한 체계로 이루어져 있었다. 왕은 곧 부처요, 귀족은 보살이고, 대중은 중생이니 부처님 세계의 논리와 위계질서는 곧 사회구성체의 지배와 피지배 논리와 절묘하게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런 판에 도의가 서라벌에 와서 그 논리와 질서를 송두리째 흔들어놓은 것이다. 서라벌의 승려와 귀족 들은 도의선사의 외침을 ‘마귀의 소리’라고 배격했다.
그래서 도의는 서라벌을 떠나 멀고 먼 곳으로 가서 은신할 뜻을 세웠으며, 그가 당도한 곳이 설악산의 진전사였다. 보림사의 보조선사비문에 의하면 “아직 때가 이르지 못함을 알고 산림에 은둔”한 것이라고 한다.
그 사정을 최치원은 지증대사비문을 쓰면서 다음과 같은 현란한 비유법으로 설명하고 있다.
도의스님이 서방(중국)으로 건너가 서당지장으로부터 ‘심인(心印, 즉 自心卽佛)’을 익혀 처음으로 선법(禪法)을 말하면서 원숭이처럼 조급한 마음에 사로잡혀 북쪽으로 치닫는 (교종의) 단점을 감싸주었지만, 메추라기가 제 날개를 자랑하며 붕(鵬)새가 남쪽바다로 떠나는 높은 뜻을 비난하듯 하였다. 그들은 인습적인 염불에 흠뻑 젖어 있어서 도의스님의 말을 마귀의 말〔魔語〕이라고 비웃었다.
이에 스님은 진리의 빛을 행랑채 아래에 거두고 자취를 항아리 속에 감추며, 동해의 동쪽(중국에서 본 동해의 동쪽, 즉 서라벌)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북산(설악산)의 북쪽에 은둔하였다. (…) 그러나 겨울 산봉우리에 빼어나고 정림(定林)에서도 꽃다우매 그 덕을 사모하여 모여드는 사람이 산에 가득하고, 매로 변화하듯 뛰어난 인물이 되어 깊은 골짜기로부터 나오게 되었다.
이와 같이 도의의 가르침을 받아들인 것은 서라벌의 귀족이 아니었다. 그것은 지방에서 나름대로 경제적·군사적 부를 키워온 호족들이었다. 호족의 입장에서 보면 도의가 주장한 ‘자심즉불(自心卽佛)’과 ‘일문일가(一門一家)’는 하나의 구원의 사상인 셈이었다.
이에 호족들은 다투어 지방에 선종사찰을 세우게 된다. 선종의 구산선문은 한결같이 오지 중의 오지로 들어가 보령의 성주사, 강릉의 굴산사 등은 오늘날에도 폐사지로 남고 영월 법흥사·남원 실상사·곡성 태안사·문경 봉암사·장흥 보림사처럼 답사객을 열광케 하는 심산의 명찰로 남아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역사의 진행은 이내 호족 중 한 사람인 왕건의 승리, 불교의 이데올로기는 선종의 우위라는 확고한 전통을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 모든 진행의 출발이 곧 여기 진전사에서 비롯되었으니 어찌 우리가 도의와 진전사를 모르고 역사를 말할 수 있겠는가(현재 조계종 종헌에서는 도의선사를 종조로 모시고 있다).
진전사터에서 산등성을 조금 더 올라가면 보물 제439호로 지정된 ‘진전사터 부도’라고 불리는 승탑(僧塔)이 있다. 진전사를 발굴한 정영호 교수는 이 승탑은 곧 도의선사의 사리탑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하고 있으며 그것은 미술사학계에서도 공인된 학설이다.
승탑의 탄생, 그것 또한 위대한 탄생이었다
신라시대의 저 유명한 고승들, 원효·의상·진표·자장 등 어느 스님도 사리탑이 남아 있지 않다. 화엄세계의 거대한 논리와 질서 속에서 고승의 죽음이란 그저 죽음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도의선사에 이르면 대선사(大禪師)의 죽음은 이제 다르게 생각되었다. “본연의 마음이 곧 부처”이고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곧 부처와 동격이 된다. 일문일가라고 했으니 그 독립성의 의미는 더욱 강조된다. 일문(一門)을 이끌어온 대선사의 죽음은 석가모니의 죽음 못지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구산선문의 제일문인 가지산파의 제1조 도의선사의 사리탑이 진전사 뒤쪽 산등성에 모셔진 것이었다. 이 사리탑은 당나라 초당사(草堂寺)에는 있는 유명한 불경 번역승인 구마라습(鳩摩羅什)의 팔각당 구조의 사리탑을 기본으로 하고 그 받침대는 석탑의 기단부를 그대로 원용하였다.
도의선사 사리탑 이후, 가지산문의 2조인 염거화상의 사리탑에서는 상하로 구성된 연꽃받침대에 팔각당을 얹은 모습으로 바뀌게 되며 이 사리탑은 이후 하대신라에서 고려초에 이르는 모든 승탑의 범본이 된다.
염거화상의 사리탑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이것을 반출하려다 실패하여 1914년 무렵 탑골공원에 설치했다가 해방 후 경복궁으로 옮겨놓았고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옥외 전시장에 모셔져 있다.
그리고 반드시, 꼭 반드시 기억하고 넘어가야 할 한가지 사항이 있다. 그것은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一然)스님이 바로 이곳 진전사에서 14세 때 머리를 깎고 수도했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이후 진전사에 어떤 스님이 계셨으며, 언제 폐사가 됐는지는 알 수 없다.
선림원터
선림원터는 행정구역상 양양군 서면 황이리에 있지만 실제는 양양군·인제군·홍천군·강릉시와 경계선을 맞대고 있는 곳으로 설악산과 오대산 사이의 움푹 꺼진 곳인데, 이 동네 사람들은 스스로 ‘하늘 아래 끝동네’라고 말하고 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처연한 이름에 걸맞은 캄캄한 골짜기였다.
그 '하늘 아래 끝동네'에서 끝번지 되는 곳에 선림원터가 있는 것이다. 56번 국도상의 황이리에서 하차하여 동쪽을 바라보고 응복산(1,360미터) 만월봉(1,281미터)에서 내려오는 미천(米川)계곡을 따라 40여분 걸어가면 선림원터가 나온다.
지금 남아 있는 자료를 종합해보면 선림원은 애장왕 5년(804) 순응(順應)법사가 창건한 절이다. 순응은 당나라 유학승 출신으로 가야산에서 초당을 짓고 수도하던 중 애장왕 왕비의 등창을 고쳐주어 왕의 하사금으로 해인사를 세운 스님이다. 해인사를 802년에 세운 순응이 2년 후에 선림원을 세우고 다시 수도처로 삼은 것이다.
불에 탄 선림원터 범종
그때 세운 삼층석탑(보물 제444호)이 최근에 동국대 발굴팀에 의해 복원되었는데, 그 구조와 생김새는 진전사탑과 거의 비슷하다. 다만 선림원탑이 훨씬 힘찬 기상을 보여준다. 폐사지 위쪽, 아마도 조사당 건물 앞마당에 세워진듯한(주춧돌만 남아 있다) 석등은 비록 지붕돌 귀꽃이 깨졌지만 고풍스러운 멋은 잃지 않았다.
순응은 선림원을 세울 때 범종 하나를 주조하였다. 그 종은 선림원이 무너질 때 땅에 묻혀버렸는데 1948년 10월, 해방공간의 어수선한 정국에 발굴되었다. 발굴된 선림원의 범종은 돌볼 이 없는 이곳에 방치할 수 없어 오대산 월정사로 옮겨놓았다.
그리고 2년이 채 못되어 6·25동란이 터졌다. 국군은 퇴각하면서 인민군이 주둔할 가능성이 있는 양양 낙산사와 이곳 월정사에 불을 질렀다. 그때 낙산사와 월정사는 석탑들만 남긴 채 폐허가 되었고 선림원의 범종은 불에 타 녹아버린 것이다.
당시 국군이 월정사 위쪽 상원사까지 불을 지르러 올라갔을 때 방한암 스님은 법당 안에 들어앉아 불을 지르려면 나까지 태우라 호령했고 이 호령에 눌려 군인들은 형식적으로 문짝만 뜯어 절마당에서 불태우고 내려가 상원사 범종(국보 제36호)과 세조가 발원한 목조문수동자상(국보 제221호)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순응법사 이후 선림원에 주석한 스님은 홍각(弘覺)선사였다. 홍각선사는 구산선문 중 봉림사문(鳳林寺門)으로 말년에 선림원에 머물다 886년에 입적한 스님이었다. 홍각선사의 사리탑과 탑비는 당대의 명작이었다.
특히 탑비는 왕희지 글씨를 집자해 만들어 금석학의 귀중한 유물로 되었고 돌거북받침과 용머리지붕돌은 하대신라의 문화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것이었다. 또 잘생긴 석등과 조사당을 지어 그 공덕을 기리어왔는데, 그 모든 것이 어느날 산사태로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무너져버린 것만도 안타까운데 그 폐허의 잔편들마저 또 상처를 받았다. 홍각선사의 사리탑은 어이된 일인지 기단만 남고* 팔각당은 오간 데 없으며, 탑비의 돌거북받침대와 용머리지붕돌은 완연하건만 비는 박살이 나서 150여자 잔편만 수습 되었다.
* 비신은 전하지 않고 2개의 비편만 남아있다. 작은 편은 국립춘천박물관, 큰 편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인데 현재 국립춘천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귀부와 이수만 선림원지에 있었으나 2008년에 비신을 새로 복원했다.
<4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