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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강성 Sep 06. 2024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4)

지리산 동남쪽 함양, 산청과 영주 부석사, 청도 운문사

지리산 동남쪽 함양・산청
[함양・산청 답사길 출처 본문]

복날 청하는 편지 - 탁족(濯足)


<언간독>이라는 조선시대 목판본은 한글로 편지 쓰는 법이 사안에 따라 예문으로 제시된 책이다. 오죽 격식을 차렸기에 기별을 보내면서도 예를 갖추어야 했던가. 그래야 했던 것이 봉건시대이며, 지배층의 규범까지 쫓느라고 피지배층이 겪어야 했던 어려움의 일단이 여기에도 나타나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오히려 서민문화 내지 민중문화가 지니는 커다란 미덕을 내용과 형식 모든 측면에서 찾아보게 된다. 글씨체를 보면 나라에서 국민교화용으로 발행한 <훈민정음>, <오륜행실도>등의 한글서체에서 느껴지는 규율과 권위 같은 것이 없다.

[언간독 출처 본문]

또 그 내용을 볼 것 같으면 편지 보내야 했던 경우가 오늘날과 비슷하면서도 그 분위기는 사뭇 달라서 사람 사는 정을 물씬 풍기고 있다. 아비가 집 나간 아들에게 하는 편지, 생남(生男) 축하편지, 화류 때 청하는 편지, 가을에 노자고(놀자고) 청하는 편지쓰기 등이 들어 있고, 아주 재미있는 내용의 '복날 청하는 편지'도 있다.


"배상(拜上)

복날 더위가 더욱 심하온데

형체(兄體) 어떠하오시니잇가. 제(弟)는 서증(暑症)으로 앓고 지내옵다가 요사이야 저으기 낫사오나 더위도 너무 괴롭사오이다.

마침 주효(酒肴)가 있삽기 통(通)하오니 산수 좋은 곳에 가 탁족(濯足)이나 하오면 어떠하리잇가.

옛글에 일렀으되 관(冠)을 벗어 돌벽에 걸고 이마를 드러내어 솔바람을 쐬인다 하얏사오니 이 아니 상쾌하니잇가. 자세히 기별하옵소서.

즉일(卽日) 제(弟) 아모 배(拜)"

[이경윤 「고사탁족도」와 작자 미상 삼복탁족도(부분) 출처 본문]

탁족이라! '발을 세탁한다'는 표현에 웃음이 절로 난다. 본래 탁족이라는 말은 자못 준엄한 말로 시작되었다.  ⟪맹자⟫에서 지식인이 시세에 응하여 벼슬에 나아가기도 하고 물러설줄도 아는 행장진퇴(行藏進退) 처신의 신중함을 경고하는 말이었다.


흐르는 물이 맑으면, 나의 갓끝을 씻고
흐르는 물이 흐리면, 나의 발을 씻는다
滄浪之水淸兮 可以濯我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我足


이 탁영탁족(濯纓濯足)이라는 말은 굴원(屈原)이 「어부사(漁父辭)」에 한 구절로 끌어들여 더욱 유명해지게 되었다. 그러한 탁족을, 진나라 때 글을 잘 써서 "낙양의 종잇값을 올려놓았다"는 고사의 주인공인 좌사는 <영사시>를 지으면서 세상사로부터 유연히 물러나 있는 탈속의 자세로 표현하였다.


천길 벼랑에서 옷을 털고
만리로 흐르는 물에 발을 씻는다
振衣千仭崗 濯足萬里流


나의 경험에 의하건대, 그 탁족의 행복을 누린 가장 환상적인 아름다움의 계곡은 함양 화림동의 농월정과 산청 지리산의 대원사 계곡이다. 이제 나는 남한땅 최고의 탁족처라고 말해도 지나침이 없을 지리산 동남쪽, 함양, 산청으로 먼 여행길을 떠나고자 한다.


무진장을 지나며


서울에서 가자면 경부고속도로 김천에서 거창으로 빠져 안의로 들어가는 길과 호남고속도로 전주에서 남원으로 내려가 함양으로 들어가는 길이 정코스이다. 그러나 전주에서 진안으로 들어가 육십령고개를 넘어 안의계곡에 이르는 옛길을 택하면, 낭만의 여로로 바꿀 수 있고 화림동의 농월정으로 곧장 들어갈 수 있다.


전주에서 진안으로 넘어가는 모래재는 사뭇 험하다. 모래재를 내려가는 길이 어느만치 뻗어가다가 강정골재를 넘어서면 홀연히 마이산의 기이한 봉우리가 나타난다. 그 신비로운 형상을 한번 본다는 것, 그리고 20세기 설치미술의 최고 명작이라고 할 탑사(塔寺)의 공력을 구경하는 것은 그것 자체로 여행의 별격(別格)이다.

[마이산과 탑사의 돌탑들 출처 본문, 구글 이미지]

덕유산 서남쪽 산골마을인 무주·진안·장수 3개 군을 줄여서 무진장이라고 부르는데, 이처럼 무진장에는 눈이 '무진장' 온다.


마이산을 지나 오천(梧川)초등학교 앞에서 장수로 빠지는 길을 버리고 장계(長溪)마을을 곧장 지르면 임진왜란 때의 의기 주논개(朱論介, ?~1593) 출생지로 들어가는 푯말이 보인다. 초행길 답사객은 진주의 논개가 이곳 출신이라는 사실에 다소 당황하곤 한다.

[주논개 생가지 푯말과 주논개 초상 출처 구글 이미지]

화림동 계곡의 정자들


장계에서 함양으로 들어가자면 육십령고개를 넘어야 한다. 육십령고개는 남덕유산 아랫자락을 타고 넘는 길로 고갯마루에서 전라북도와 경상남도의 경계를 이룬다.


육십령고개는 예순굽이라는 거창한 이름을 지녔지만 경사가 가파르지도 않고 험하지도 않다. 장계마을에서 고갯길이 빤히 올려다보이는데 그 고갯길의 생김새는 산비탈을 느슨하게 타고 오르는 뱀의 형상을 그리고 있다. 어느만큼 고개를 올라 아래쪽 장계마을을 내려다보면 안온한 촌락풍경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육십령고개에서 내려다 본 장계마을 출처 본문]

육십령고개를 넘으면 금천계곡을 곁에 두고 줄곧 비탈길을 내려가게 된다. 덕유산에서 발원한 계류가 흙모래를 다 쓸어내고 골격 큰 화강암바위를 넘으면서 곳곳에 못을 이루고, 어쩌다 너럭바위를 만나면 미끄러지듯 흘러내려 아름다운 풍광을 곳곳에 빚어놓았다.


그 계곡이 절정을 이루는 곳을 화림동(花林洞)이라 하며, 예부터 팔담팔정(八潭八亭)의 승경을 자랑해왔다. 『영남누대지(嶺南樓臺誌)』에 실린 영남의 누각과 정자는 책으로 한 권이 될 정도로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누대에는 저마다 사대부의 풍류와 은일(隱逸)의 뜻이 서려 있다.


화림동의 여덟정자 중 거연정(居然亭)은 중추부사를 지낸 전시숙(全時叔)이 소요하던 곳을 후손 전재학이 추모의 염으로 세웠고, 동호정(東湖亭)은 동호 장만리(章萬里)의 후손이 역시 추모하여 세웠다고 한다.

[거연정 출처 본문]

군자정(君子亭)은 정여창(鄭汝昌)이 일찍이 찾은 곳이라고 해서 사인(士人) 전세걸 (全世杰)이 세웠고, 농월정(弄月亭)은 관찰사와 예조참판을 지내고 임란 때 의병을 일으켰던 지족당(知足堂) 박명부(朴明榑)가 노닐던 곳에 후손들이 세운 것이란다.


영남의 정자들이 계곡과 강변의 경승지를 찾아 세운 것이 많다는 사실은, 호남의 정자들이 삶의 근거지에서 멀지 않은 곳, 전원생활현장에 세운 것이 많다는 것과 큰 차이를 보여준다. 때문에 호남의 정자는 자연과 혼연히 일치하는 조화로움과 아늑함을 보여주는데, 영남의 정자는 자연을 지배하고 경영하는 모습을 띠고 있다.


농월정(弄月亭)


농월정은 월연암(月淵岩)이라고 부르는 방대한 너럭바위 전체를 조망하는 자리에 세워져 있다. 월연암에 농월정이라면 못에 비친 달을 정자에서 희롱한다는 뜻이 되니 그 이름만으로도 풍광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바위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살은 제법 빠르며 그 소리 또한 시원스럽다. 여름철 물이 깊어지면 바지를 걷어붙여도 정자 쪽으로 건너가지 못한다. 가을 단풍이 계곡물에 잠기며 오색이 어른거릴 때도 멋있지만 한겨울 얼음장 위로 흰 눈이 수북이 쌓여 있을 때는 여지없는 한 폭의 수묵산수화로 된다.


농월정 정자*는 이층누각에 바람막이 작은방을 가운데 두고 삼면으로 난간을 돌린 제법한 규모다. 누마루에서 오른쪽 바위를 내려다보면 웅혼하고 유려한 글씨체로 ‘지족당장구지소(知足堂杖屨之所)’라는 글씨를 깊게 새겨놓아 이 농월정의 뜻을 새삼 새겨보게 된다. ‘장구’란 지팡이와 신을 뜻하는 것으로 산책을 의미한다. * 2003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2015년에 다시 복원되었다.

[농월정과 바위에 새겨진 글 출처 본문]

안의마을을 돌아보며


안의(安義)는 아주 아담한 시골마을로 조선시대에는 현감이 다스리던 현(縣)이었다. 본래 이름은 안음(安陰)이었는데, 영조 43년(1767) 인근 산음현(山陰縣)에서 일곱살 난 여자아이가 아기를 낳는 괴이한 일이 벌어지자 영조가 그쪽에 음기가 너무 세어 그렇다며 산음을 산청(山淸)으로 개명하면서 안음도 안의가 되었다.


화림동에서 흘러내린 계류가 안의에 이르러서는 금천(錦川)이라는 호칭에 어울리게 마을을 곱게 감싸고 돌아간다. 옛 마을인지라 향교도 있고 마을 한복판에는 광풍루(光風樓)라는 제법 큰 누대가 건재하여 거기에 오르면 천변의 풍광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다.

[안의 광풍루 출처 본문]

안의초등학교 가까이 중요민속자료 제207호로 지정된 ‘허삼둘(許三乧) 가옥’이 있다. 약 70년 전에 윤대흥(尹大興)이라는 사람이 진양(晋陽)갑부 허씨 문중에 장가들어 부인 허삼둘과 함께 지은 집이란다. 이집을 남자의 이름으로 지칭하지 않고 여자주인 삼둘이를 내세운 것은 삼둘이가 실세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래서인지 ‘삼둘이네 집’ 안채는 공간배치가 야릇하다. 부엌을 ㄱ자의 정모서리에 붙여놓았다. 함께 간 건축가 승효상씨 설명에 따르면 기품이고 체통이고 다 무시해버린 여성생활 위주의 공간포치란다. 그렇다면 이 집이 ‘허삼둘 가옥’으로 불리는 이유도 알겠다

[허삼둘 가옥 안채와 부엌 출처 본문]

안의초등학교 교정에서


나의 지리산 동남쪽 답삿길에 굳이 안의마을을 들러야 했던 이유는 안의초등학교 때문이었다. 여기는 옛날 안의현의 동헌이 있던 자리다. 우리나라의 초등학교는 그 출발부터 기구한 팔자를 지니고 있다. 일제가 지금의 면단위마다 소학교를 세우면서 그 위치를 옛날 현청이 있던 자리를 택하였다.


신시가지에 일본인 관리가 통치하는 면사무소를 세우면서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죽이고 한편으로는 자신들의 신식문명을 내세우는 양면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그리하여 답사와 연관해서 본다면 1894년 농민전쟁 때 조병갑이 혼난 고부현청은 고부초등학교, 수안보에서 이화령고개를 넘어가면서 내려다보이는 연풍, 단원 김홍도가 3년간 근무했던 연풍현청엔 연풍초등학교, 그리고 연암 박지원이 5년간 근무했던 안의현청에는 안의초등학교가 들어서 있게 된 것이다.

  

안의현감을 지낸 역대 선생들의 면면을 제대로 알지 못하나, 이곳 함양 출신으로 거유 정여창이 이곳에 부임하여 선화루를 크게 고쳐짓고 광풍루라고 했던 일, 한국회화사에서 속화 장르를 확립한 선비화가 조영석이 여기에 근무하던 중 세조의 초상화를 새로 그리라는 영조의 명을 거절했던 일만은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답사의 큰 이유는 아니었고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55세 되는 1792년부터 5년간 그의 첫 외직(外職)으로 이곳 안의현감을 지냈다는 사실때문이다. 연암의 글 중에는 안의시절에 씌어진 기문이 상당수 있고, 현재로서 연암을 기릴 수 있는 사적지는 여기밖에 없다.


홍국영의 세도가 한창일 때 황해도 금천(金川)의 연암협(燕巖峽)으로 은거하여 그 아호가 연암이 되었으니 연암이 제격일 것이나 이제는 분단으로 갈 수 없는 땅이 되었기에 안의는 차선에 차선책으로 그분의 사적지가 되었고, 지금 안의초등학교 교정 화단 한쪽에는 이우성 선생이 찬한 연암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연암 박지원 사적비와 뒷면 출처 구글 이미지]

연암의 시 「시골집」


연암의 「양반전」 「호질」 「허생전」 같은 소설은 우리들이 대충 알고 있다. 그러나 연암의 시에 대하여는 좀처럼 들어볼 기회가 없다. 나 또한 북한에서 출간한 『박지원작품집』 한글번역본을 손에 쥐기 전에는 그 시의 분위기를 체감할 수 없었다.  「시골집〔田家〕」이라는 시에 이르러서는 그 정경묘사가 얼마나 눅진하고 소담스러우면서 아름답고 그립던지, 학생들과 야외스케치 나갈 때면 이 시를 복사해 나눠주곤 하였다.

 

할아범 새를 보러 밭둑에 앉았건만
개꼬리 같은 조이삭엔 참새가 달려 있네.
맏아들 둘째아들 들일로 다 나가고
온종일 시골집은 삽짝문 닫혀 있네.
소리개 병아리를 채려다 못 채가니
박꽃 핀 울밑에서 뭇닭이 울어대네.
새댁이 함지 이고 꼿꼿이 내 건널 제
누렁개 발가숭이 아이 앞뒤로 쫓아가네.
老翁守雀坐南陂 粟拖狗尾黃雀垂
長男中男皆出田 田家盡日晝掩扉
鳶蹴鷄兒攫不得 群鷄亂啼匏花籬
小婦戴棬疑渡溪 赤子黃犬相追隨


연암의 산문 정신


연암 박지원이 한국문학사상 불후의 명저를 남긴 대문인으로 칭송되는 바는 내남이 모두 알고 있다. 또 진정한 실학자로서 현실의 모순을 직시했고, 북학파의 선봉이 되어 세계를 바라보는 인식을 새롭게 했음도 두루 알려져 있다. 한마디로 그는 당대의 대안목이었고 실천적 지식인 상의 모범이었다.


연암의 산문은 높은 상징과 밑모를 깊이의 은유로 가득하다. 그 상징과 은유의 오묘함 때문에 『연암집』은 아직껏 한글완역본이 출간되지 못하고 있다. 연암의 글이야말로 독자에 따라 “아는 만큼 느낄 뿐이다.” 나는 수많은 명문 중에서 열하일기의 「환희기(幻戱記)」를 아주 감명깊게 읽었고, 아주 좋아하여 기회만 있으면 인용한다.

[연암 박지원의 연암집과 열하일기 출처 구글 이미지]
우리나라에 서화담(徐花潭) 선생이란 분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외출했다가 길에서 우는 사람을 만났더랍니다. '너는 어째서 울고 있느냐?" "나는 세살 때 눈이 멀어 지금 40년이 되었습니다. 전일에는 어디를 갈 때는 발을 의지삼아 보고, 잡을 때는 손을 의지해 보고, 음성을 듣고는 누군지 분별하니 귀를 의지해 보았고, 냄새를 맡고는 무슨 음식인지 살폈으니 코를 의지해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두 눈만 가지고 보지만 내 손과 발, 코와 귀가 눈 아닌 것이 없었답니다.

어찌 수족과 코.귀뿐이겠습니까? 시간이 이르고 늦음을 낮에는 피로한 정도로 보았고 사물들의 모습과 색깔을 밤에는 꿈으로 봅니다. 그래도 아무런 장애가 없이 의심되고 헷갈리는 것이 없었는데,

오늘 길을 오는 도중에 두 눈이 갑자기 밝아지고 백태가 낀 것이 절로 열려 천지가 확 트이고 산천이 어지럽게 널렸는데 만물이 눈을 막고 온갖 의심이 가슴에  차여 손. 발.코.귀의 감각이 뒤집히고 섞여 모든 것이 정상을 잃게 되어 아득하니 집도 잊어버려 혼자 찾아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울고 있습니다.

"너는 네가 의지하던 손.발.코.귀에 물으면 그것이 응당 알 것 아닌가?" "내 눈이 이미 밝아졌으니 그것을 어디에 사용하겠습니까?" "네가 다시 눈을 감아라. 즉시 너의 집을 찾아갈 것이다."

이로 본다면 밝다는 것을 믿을 바가 못됨이 이와 같습니다. 오늘 요술구경을 본 것도  요술쟁이가 우리를 속인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제 자신을 속인 것이외다. (김혈조 ‘연암 박지원의 사유양식과 산문문학’에서 번역문 인용)


함양・산청의 유적들


함양과 산청에는 가야시대 이래로 무수한 유적이 널려 있다. 산청 어서리의 가야고분군과 구형왕릉으로 전해지는 네모난 돌무지무덤은 예사롭지 않았던 이 땅의 연륜을 말해준다.


지리산 칠선계곡을 타고 내려오는 마천·휴천 일대에는 영원사터, 무주암터, 안국암터, 두류암터, 엄천사터 등이 즐비하여 목장승으로 유명한 마천 벽송사(碧松寺)와 덕전리 실덕마을의 거대한 마애불(보물 제375호)은 그것만으로도 훌륭한 하루 답사가 된다.

[마천 벽송사와 덕전리 마애불 출처 구글 이미지]

산청의 지리산 대원사, 법계사, 내원사야 익히 보고 들어 알겠지만 율곡사의 대웅전(보물 제374호), 도전리의 마애불(지방유형문화재 제209호) 쪽으로는 발길이 잘 닿지 않는다.


고려시대 이래로 함양과 산청은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그 인재의 후손과 제자들은 영남사림파의 한 맥을 형성했다. 고려시대 문익점(文益漸)은 산청 출신으로 그분의 묘소와 목화 시배지가 유적지로 정비되어 있다. 현대불교의 고승인 성철스님의 생가도 있다.


함양은 조선시대에 좌안동(左安東) 우함양(右咸陽)이라 하여 학문과 문벌의 자부심이 대단했다. 조선 성종 때 명신인 유호인(兪好仁), 문묘 배향자(配享者)의 한분인 정여창(鄭汝昌)이 함양분이었다. 그리고 퇴계와 더불어 한 시대 사상적 지주였던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산청 덕산에 자리잡았다.


큰 선비가 많이 나오고 양반이 많았으므로, 서원이 거짓말처럼 즐비하다. 함양의 남계서원(藍溪書院), 청계(淸溪)서원, 송호(松湖)서원…… 산청의 서계(西溪)서원, 도천(道川)서원, 배산(培山)서원, 덕천(德川)서원…… 이미 빈터로 변한 서원은 이루 다 열거하지 못한다.


지금 나의 답삿길은 그중 대표적인 고가로 정여창 고택, 대표적인 폐사지로 단속사터, 대표적인 서원으로 덕천서원, 대표적인 절집으로 대원사를 향하여 공격하듯 달리고 있는 것이다.


정여창 고택에서 하룻밤


정여창 고택은 안의와 함양 사이, 지곡(池谷)면 개평(介坪)리에 있다. 지곡면사무소가 있는 마을 어디쯤에 차를 세워놓고 개울을 따라 동쪽으로 사뭇 올라가면 거기가 개평마을이다. 개평마을은 그 생김새가 댓잎 네개가 붙어 있는 개(介)자 형상이라고 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정여창 고택은 여느 양반가옥과 마찬가지로 솟을대문, 사랑채, 안채, 아래채, 별당, 가묘, 곳간 등으로 구성되었다. 사랑채 옆으로 난 일각문(一角門)을 통해 안채로 들어서니 앞마당이 직사각형으로 길게 뻗어 아래채와 사랑채로 연결된다. 보통은 네모 반듯한데 이 집은 그렇지 않았다.

[정여창 고택 출처 본문]

사랑채 뒤쪽으로 툇마루를 붙여 안팎으로 분리된 공간을 다시 하나로 묶어놓았다. 그러한 공간배치가 이 집의 온화한 가풍을 느끼게 해준다. 영남의 양반가옥들은 안동이나 경주에서 흔히 보이듯 폐쇄공간을 즐겨 구사했는데 이 집은 철저한 개방공간으로 분할되고 경영되어 집이 밝고 명랑하다.


나는 이 유서깊은 명가(名家)에서 하룻밤을 묵어가는 영광과 은혜를 입으면서 전통한옥의 품격을 몸으로 느껴볼 수 있었다. 따지고 보면 특이한 구조나 공간배치가 없는 셈인데도 정여창 고택은 정연한 기품으로 가득했다. 나는 처음에는 그 고상한 분위기와 인간적 체취가 어디에서 나오는 줄 몰랐다.


평면으로 파악하고 보니 이 집은 거짓말처럼 가옥배치가 간단명료했다. 집의 바닥평면이 언덕을 올라탄 지형인지라 레벨의 차이가 심한 입지조건이었는데도 반듯하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었다.


그제야 사랑채의 축대를 높이 쌓아 안채, 아래채와 수평을 맞추었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요사스러운 변화나 번잡스러운 치장이 없는 명료한 구성, 그것은 채색장식화가 아닌 담백한 수묵담채의 문인화 같은 멋이다.


정여창 고택은 지금 경상남도 지정문화재로 되었고 그 유물명칭은 한때 그의 후손인 지정 당시의 건물주 이름을 따서 ‘정병호 가옥’으로 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정여창 고택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함양의 상림과 학사루


나는 함양・산청사람들은 복받은 인생인 줄로 안다. 장대한 산, 지리산을 곁에 두고 위천수(渭川水), 경호강(鏡湖江)의 맑은 물을 품에 안고 사는 천혜의 복이 외지사람 입장에서 얼마나 부러운지 그곳 사람들은 다는 모를 것이다. 차 안에서 함양읍내를 내다보면서 나는 마이크를 잡았다.


“함양에 올 기회가 있으면 상림(上林)공원에 한번 가보십시오. 6만 5천평의 대지에 100여 종의 활엽수가 장관을 이루는 인공림입니다. 신라 진성여왕 때 최치원이 함양태수로 와서 조림한 곳입니다. 당시는 함양을 천령(天嶺)이라고 했고 상림을 대관림(大官林)이라 했습니다.


최치원은 지리산 북쪽 계류가 흘러든 위천이 마을을 관류하기 때문에 홍수의 위험이 있음을 알고 둑을 쌓아 물길을 돌리며 대대적으로 인공조림케 하였습니다. 그것이 천년 전 얘기 이니 이 상림은 당연히 천연기념물(제154호)로 지정되었죠.“

[함양 상림공원 출처 본문]

“그리고 읍내에서 식사할 일 있으시면 장터에서 시골밥상 한번 받아보고 산책삼아 군청 앞에 있는 학사루(學士樓)에 들러보십시오. 학사루는 본래 최치원이 처음 세운 것으로 대대로 중수되어 함양관아(함양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것인데 1978년엔가 옮겨 놓은 것이랍니다.

이것이 저 유명한 무오사화 때 유자광이 김종직을 부관참시하는 꼬투리가 되었던 누대입니다. 무오사화는 훈구파의 유자광이 신진사림의 김일손.김굉필.정여창 등을 대대적으로  제거한 사건입니다.


그 발단은 김일손이 쓴 ⟪성종실록⟫의 사초(史草)에 김종직이 세조의 찬탈을 은유적으로 비방한 조의제문(弔義帝文)이 실린 것을 유자광이 훈구대신과 연산군에게 일러바치며 시작됐지요.


서얼 출신으로 이시애 난 때 종군하여 출세길을 달린 유자광은 남이 장군을 무고하여 죽게 만든 대단한 모사꾼이었는데,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부임해 학사루에 올라 유자광의 시가 현판으로  붙어 있는 것을 보고 "유자광이 어떤 놈인데"라며 당장 떼어 불질러버렸고, 이 사실을 안 유자광은 사무치는 원한을 품게 되었답니다.

[학사루 출처 위키백과]

더욱 무서운 얘기는 그러면서도 유자광은 아직 김종직에게 대들 처지가 못됨을 알고 오히려 가까운 척하고 김종직이 서거하자 그를 당나라의 대문장가이자 거유인 한유(韓愈)에 비기는 제문까지 지었답니다. 그래놓고는 무오사화 때 김일손을 고문하여 사건이 모두 김종직에게서 나온 것으로 몰아붙여 부관참시까지 한 것입니다.”


그보다 더 무서운 얘기는, 훗날 김종직은 여러 서원의 배향자로 추앙받는 인물이 되었지만 유자광은 만년에 유배 가서 장님이 되어 죽었는데 큰아들은 여색에 빠져 가보지도 않았고 작은아들은 아프다고 핑계대고는 술만 마시고 장지인 적거지(謫居地)로 끝내 내려가지 않았답니다."


달리는 버스는 이미 함양을 벗어나 아름다운 경호강을 따라 산청 쪽으로 내려간다. 경호강 맑은 물은 지리산 산자락을 휘감고 돌면서 외지의 탑승객을 에스코트하듯 따라붙는다. 안의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함양으로 돌아나온 위천과 만나 이렇게 불어났다니 신기한데, 이 강이 진주 남강으로 흘러든다니 그것이 또 그립다.

  

단성에 온 박규수


경호강 물줄기를 가로지르는 큰 다리가 나오면 거기는 하정(下丁) 원지마을, 여기서 곧장 가면 차로 20분 안에 진주에 닿는다. 그러나 우리는 오른쪽으로 꺾어 서쪽으로 향해 야단성을 거쳐 덕산에 닿는다. 하정에서 지리산으로 꺾어드는 길로 접어들면 이내 큰 마을이 나온다. 여기는 옛날 현청이 있던 단성(丹城)이다.


1862년 농민전쟁, 임술민란이라고도 하고 진주민란이라고도 불렀던 봉건사회 해체기의 엄청난 역사적 사건인 이 농민전쟁은 이곳 단성에서 시작되었는데, 단성을 지날 때면 그때 안핵사(按覈使)로 내려온 박규수(朴珪壽, 1807~76)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는 사태의 추이를 면밀히 파악하여 조정에 보고하였다.


이 사건은 단순히 수령된 자의 통치미숙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삼정(三政)의 문란’이라는 구조적 모순에 있음을 보고했다. 이 사태는 단순히 땔나무나 하는 사람들이 모여 일어난 것이 아니라 요호부민까지 참여하고 있음도 보고하였다.

[임술민한의 유일한 자취가 남아 있는 단성향교 출처 본문]

임술민란이 일어났을 때 조정에서는 누구를 안핵사로 보낼 것인가의 논의가 있었다. 이때 다른 사람은 가야 백성들이 들어주지도 않을 것이라며 오직 박규수 대감이라야 백성들이 믿어줄 것이라고 해서 현장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박규수는 연암 박지원의 손자다. 그는 임술민란의 안핵사를 맡은 이후 경복궁 중수의 책임자였고, 1866년 셔먼호사건 때 평안감사를 지냈다. 그는 중국에 두 차례 다녀오면서 청나라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몸소 목격하고 개국과 개화에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대원군 설득에 실패하자 사직하고는 가회동 사랑채에서 김옥균·유길준·박영효·김윤식 등 훗날 개화파의 선봉이 된 양반집 자제들에게 연암사상과 개화사상을 가르쳤다. 그는 당대의 안목으로서 격변하는 시류를 정확하게 읽고 있었다.

[박규수,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출처 구글 이미지]

더욱이 그는 항시 백성의 입장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셔먼호사건 이후 천주교도 박해 때 그는 백성이 천주교를 좇는 것은 위정자가 이들을 교화하지 못한 탓이니 처벌하지 말고 선도해야 한다며 평안도 관내에서는 단 한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았다. 이 사실만으로도 박규수의 경륜과 인품을 알아볼 수 있다.


박규수는 서화에 대한 안목 또한 일가를 이룬 분이었다. 그는 무덤덤한 능호관 이인상 그림에 서린 문인화적 가치를 명확히 논증하였고, 추사체의 변천과정을 일목요연하게 밝히면서 추사는 많은 고전을 터득한 연후에 개성을 갖게 된 것이니 후생 소년들은 함부로 추사체를 흉내내지 말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박규수처럼 높고 깊고 넓은 안목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옛 선비들은 어떤 자세로 공부했는가. 청명 선생은 태동고전연구소 개설 30주년(1993)을 맞은 회고와 전망에서 후학들에게 다음과 같이 충고했다.


“『중용(中庸)』의 저자는 학문하는 자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널리 배우고, 세밀하게 의문점을 제기하고, 깊이 사색하고, 정확하게 판단하고, 힘있게 실천하라(博學之 審問之 愼思之 明辨之 篤行之).”


단속사의 어제와 오늘


단성을 지나 멀리 천왕봉을 내다보며 달리는 차창으로 고색이 완연한 묵은 동네가 보인다. 지리산 깊은 골에 이런 고래등 기와집들이 즐비하다는 것이 신비롭게 생각된다. 여기가 그 유명한 남사(南沙)마을이다.


40여 호의 기와집들이 부(富)의 과시를 경쟁적으로 집에 나타내어, 전통적인 양반가옥이 19세기 들어와 요호부민의 저택에 이르러 어떻게 발전하고 과장되고 변형되었는가를 흥미롭게 살필 수 있는 건축학도의 필수 답사처이다.

[남사 예담촌 출처 구글 이미지]

남사마을을 차창 밖으로 비껴보며 산허리 한 굽이만 돌아서면 천왕봉을 앞에 두고 오른쪽에서 흘러내리는 계류와 만나게 된다. 그 계류를 따라 시오리만 들어가면 단속사(斷俗寺)터에 닿게 된다.


단속사의 창건에 관하여는 『삼국유사』의 「신충괘관(信忠掛冠)」항에 두가지 설을 모두 기록해둔 것이 있다. 하나는 763년 어진 선비 신충(信忠)이 두 친구와 지리산에 들어가 단속사를 세우고 중이 되었다는 것이며, 또 하나의 설은 748년에 직장(直長) 이순(李純 또는 李俊)이 작은 절을 중창하여 단속사라 하고 스스로 삭발하였다는 것인데, 일연스님도 어느 것인지 몰라 둘 다 적어놓는다고 했다.


단속사에는 또 두개의 중요한 탑비가 있었다. 하나는 법랑(法郎)에 이어 선종을 익힌 신행(神行 또는 信行, 702?~779)선사의 비이고, 하나는 고려시대 최고의 명필이었던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 1070~1159)의 비이다.


두개 모두 부서져 박살이 난 것을 수습하여 신행의 비편은 동국대학교 박물관, 탄연의 비편은 숙명여대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고, 모두 한국 금석문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명필들이다. 신행선사는 통일신라시대에 북종선(北宗禪)을 전래한 신사상의 소유자로 단속사터는 한국불교사 내지 한국사상사의 기념적인 유허인 것이다.


그러나 그 내력깊은 절이 폐허가 되어 지금 남아 있는 것은 부러진 당간지주와 한쌍의 삼층석탑(보물 제72, 73호)뿐이다. 단속사의 쌍탑은 아담한 크기에 정연한 비례감각으로 더없이 상큼하고 아담하다. 지붕돌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흘러내리다가 귀끝을 가볍게 올린 자태가 여간 맵시있는 것이 아니다.


단속사의 명물로는 절 아래쪽 청계리 용두마을 개울 석벽에 새겨져 있는, 최치원이 썼다는* ‘광제암문(廣濟嵒門)’ 각자(刻字)*와 정당매(政堂梅)라고 불리는 매화나무들이 있다. *글씨가 크고 형태가 단정하며 꽉 짜여 있어 보기에도 시원스러운데, 이것이 꼭 최치원 글씨인지는 알 수 없다.

[단속사터와 광제암문 출처 본문]

정당매는 고려말 강회백(姜淮伯)이 소년시절에 단속사에서 공부하며 매화를 심었는데 그가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쌍탑 뒤에 있는 이 매화나무 안내판을 보니 수령 605년으로 되어 있다.

[정당매 출처 본문]

쌍탑에서 농가를 옆으로 돌아 강당자리 빈터에 서면 뒤편으로 울창한 왕죽이 빼곡히 들어앉은 대밭이 보인다. 밖에서 보면 어두컴컴하지만 대밭으로 들어서면 하늘이 뚫려 있어 어둡지 않다. 대밭은 해묵은 댓잎이 낙엽으로 쌓여 촉감이 아련할 정도로 부드럽다. 거기에 큰 대자로 누워 하늘을 쳐다보면 그것이 곧 단속(斷俗)이다.

[단소사터 대밭 출처 본문]

덕산의 어제와 오늘


지리산 천왕봉에 오르려면 거림골, 중산리골, 대원사골 셋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데 어느 코스를 잡든 반드시 덕산(德山)을 거쳐야 한다.


덕산은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큰 마을이다. 70년대 말만 해도 지리산행 버스는 여기가 종점이었으며, 시천(矢川)면의 중산리·내대리 사람과 인근 삼장(三壯)면 사람들은 약초와 곶감, 복조리 같은 것을 모두 덕산장에 집결시켜 도회지로 중개하였다. 말하자면 지리산 동남쪽 교통의 요충이었던 곳이다.


1862년 2월 4일 단성에서 첫 봉화가 붙은 농민항쟁, 이른바 임술민란에서 주모자들이 초군을 중심으로 먼저 장악한 곳이 이곳이고, 이태의 『남부군』에서 가장 전투다운 전투를 보여주는 것이 시천면, 삼장면의 경찰대를 공격하는 것인바, 그 공격목표가 바로 이 덕산이었던 것이다.


나의 지리산 동남쪽 답삿길은 반드시 덕산에 있는 유일한 여관인 덕산장에서 하룻밤 묵는 것부터 시작한다. 그 이유는 바로 여기에 남명(南冥) 조식(曺植, 1501~72)의 서재였던 산천재(山天齋), 남명 선생의 묘소, 남명 선생을 모신 덕천서원(德川書院)이 있기 때문이다.


위대한 처사, 남명 조식


남명 선생은 퇴계 이황과 동갑으로 당대 도학(道學)의 쌍벽이었다. 누구의 학문이 더 깊고 누구의 인품이 더 고고했는가를 따지는 것은 이제 와서는 부질없는 일이며, 지금 우리가 여기서 남명 선생을 기리는 것은 그분이야말로 말의 진실된 의미에서 처사(處士)였다는 사실에 있다.


옛말에 이르기를 왕비를 배출한 집안보다도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이 낫고,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보다도 문묘 배향자를 낳은 집안이 낫고, 문묘 배향자를 배출한 집안보다도 처사를 배출한 집안이 낫다고 했다.


남명은 1501년 경상우도 합천 삼가(三嘉)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문과에 장원급제하자 서울로 올라가 살았다. 그는 과거공부보다도 정통유학과 제자백가, 노장사상을 두루 섭렵하면서 학문의 폭을 넓혔다.


그런 중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아버지도 파직되고 이내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내려와버렸다. 그러고는 처가인 김해 탄동(炭洞)으로 옮겨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 이리하여 30대 후반에는 “경상좌도에 퇴계가 있고 우도에 남명이 있다”는 찬사를 받았다.


남명의 학식과 명망이 높아지자 회재 이언적은 그를 왕에게 추천하여 헌릉참봉을 내려주었으나 남명은 나아가지 않았다. 또 퇴계의 추천으로 단성현감이 내려졌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이이화의 『인물한국사』(한길사 1993)의 표현을 그대로 빌리면, “성운(成運) 같은 도학자와 교유하고 탁족하면서 지냈다.”


회갑을 맞은 남명은 번잡한 김해를 떠나 지리산 천왕봉 아래 덕산에 자리잡고 산천재를 짓고서 오직 학문과 제자양성에 전념하였다. 남명은 산천재에서 곽재우, 김우옹, 최영경, 정구, 정인홍 같은 뛰어난 제자를 배출하고 나이 72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영정에는 '처사'라고 적혔다.

[산천재와 현판 출처 구글 이미지]

산천재 토벽의 벽화


지금 덕산에는, 정확히 시천면 사리(絲里) 덕천강가에는 남명의 서재였던 서너 칸짜리 산천재가 그대로 남아 있다. 세월의 빛바램 속에 산천재는 낡고 헐어 또다시 중수되어 오늘에 이르도록 그것이 남명 당년의 모습에서 과장되지 않았음을 나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1985년 얼어 있는 덕천강 출처 본문]

산천재 툇마루에 앉아 위를 바라보면 거기에는 우리나라 어느 서원이나 서재에서 예를 볼 수 없는 벽화가 토벽에 그려져 있다. 오직 현풍의 도동서원에 그려진 산수화 벽화가 하나 더 있을 뿐이다. 그것이 어느 때 그려진 것인지 확인할 길 없지만, 필치를 보아하니 근래의 것은 물론 아니다.


사람들이 거들떠보지 않은 탓이었을까. 벽화는 낡고 헐어 볼품이 사라진다. 바둑 두는 그림은 다 낡아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고, 소부와 허유 그림은 바닥이 검게 되어 제맛을 잃어가는데, 농부와 소 그림은 어느날 토벽이 떨어진 것을 미장이 아저씨가 양회로 덧바르면서 용케도 소 모양만 살려내고 보수하였다.

[덕천강 출처 본문]
[산천재 토벽 출처 본문]

남명 선생의 묘소는 산천재 맞은편 동산에 모셔져 있다. 타계 후 영의정에 추증된 남명이었지만, 그를 어떻게 기릴 것이냐를 두고 참으로 말도 많고 일도 많았다. 삶의 겉치레와 허명을 싫어했던 남명에게 호화로운 장식을 하려고 했던 데서 벌어진 것이었으니 어쩌면 땅속의 남명이 노하셨던 모양이다.


남명 묘소 앞쪽에 깨어지고 엎어진 세개의 비석이 그를 말해주고 있다. 비문을 네개씩이나 받아두는 제자와 후손의 잘못이 누대에 걸치면서 일어난 소설 같은 얘기라는 사실만 적어두고 지나가련다.

[남명 묘소와 쓰러진 세 개의 비석들 출처 본문]

산천재에서 걸어서 20분, 덕산장터를 지나 중산리 쪽으로 더 올라가면 물길이 세 갈래로 갈라지는데 대원사 쪽에서 흘러내린 계류를 가로지른 긴 다리를 건너면 바로 덕천서원이 된다. 그래서 이 동네 이름이 원리(院里)가 되었다.


남명 선생이 타계하고 5년째 되는 1576년에 선생의 학업을 기리는 덕천서원이 세워지고, 1609년에는 사액서원으로 되었다. 지금 서원 뒤 사랑에는 남명과 그 제자 되는 최영경(崔永慶)을 모셨는데, 다른 서원에 비해 규모가 큰 것은 아니지만, 정연한 기품만은 여느 서원 못지않다.

[덕천서원 출처 본문]

덕천서원 대문과 마주한 덕천강변에는 남명 선생 생전부터 있어온 남루한 정자가 하나 서 있다. 이름하여 세심정(洗心亭)이다. 강가로 올라앉아 있기에 마음을 닦는 세심정이라 했을 것이니, 저 아래 강가의 너럭바위는 마땅히 탁족대(濯足臺)가 될 일이다.

[덕천 세심정 출처 구글 이미지]

대원사


덕천삼거리에서 중산리 쪽으로 곧게 뻗은 길을 버리고 오른쪽으로 꺾어돌면 국립공원 지리산 동부관리소 건물이 보이고 찻길은 대원사계곡을 따라 거슬러올라간다.


대원사는 아주 조용하고 깔끔한 절이다. 지금도 50여명의 비구니들이 참선하고 있는 청정도량이다. 절의 내력이야 통일신라시대 연기법사의 창건설화에서 시작되지만, 지리산 빨치산의 항쟁과 토벌의 와중에서 잿더미가 된 것을 다시 세웠으니 우리가 여기에서 무슨 문화재를 음미하고 따지겠는가.

[대원사 전경 출처 본문]

오직 하나, 불에 견딜 수 있는 것은 돌뿐이었다. 선방 한쪽에 있는 다층석탑은 근년에 나라에서 보물로 지정한 것으로, 그 구조의 특이성이 후한 평점을 내리게 한 모양이다. 이것이 보물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맨 아래쪽에 팔부중상을 돋을새김해놓고 네 모서리는 석인상 네 분이 머리로 탑을 이고 있는 조각의 특수성 때문이다.

[대원사 구층석탑과 석인상 출처 본문]

이 절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은 원통보전 뒤쪽에서 산왕각(山王閣)으로 오르는 돌계단 양옆에 늘어선 장독대라고 생각하고 있다. 몸체가 동글면서 어깨가 풍만하게 과장된 전형적인 경상도 장독들이 3열횡대로 정연히 늘어서 있다.


경상도 장독은 아주 복스럽게 생겼다. 전라도 장독은 아랫도리를 훌치면서 내려가는 곡선이 아름답고, 경기도·서울 장독은 늘씬하니 뻗은 현대적 세련미의 형태감을 자랑함에 반하여 경상도 장독의 탱탱한 포만감은 삶의 윤택이 야물차게 반영되어 풍요의 감정이 일어나 더욱 좋다.


대원사에서 유평리에 이르는 계곡은 내가 앞에서 내건 남한땅 제일의 탁족처이기에 결코 버릴 수도 뺄 수도 없는 황금의 답사코스다. 길가엔 아리따운 노송이 늠름한 자태로 줄지어 있고, 붉은 기를 토하는 암반 위로는 맑은 계류가 끝없이 흘러간다. 옛사람들은 이럴 때 옥류(玉流)라는 표현을 썼던 모양이다.


길가에서 바로 내려다보이는 널찍한 계곡 한쪽에는 제법 큰 소(沼)를 이룬 곳이 아래위 두 곳에 있는데 아래쪽을 세신탕(洗身湯), 위쪽을 세심탕(洗心湯)이라고 부른다.

[대원사 계곡의 세신소 출처 본문]

산은 지리산


지리산 천왕봉에는 가까이에 법계사 삼층석탑(보물 제473호)이 있어 거기에 오를 기회가 있었다. 암반 위에 세워진 법계사탑은 생긴 것이 오종종하고 쩨쩨해서 볼품이 너무 없다. 그러나 이 높은 산상의 탑이라는 점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지리적 의미를 갖는 것이니 그것이 보물로 지정된 것을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다.

[산청 법계사와 삼층석탑 출처 구글 이미지]

산을 말함에 있어서도 그 옛날의 대안목들이 말하는 산은 달랐다. 산에서 느끼는 크기 자체가 달랐다. 김일손은 천왕봉의 인상을 이렇게 말했다.


"한밤중 천지가 청명하고 큰 들은 광막하며 흰구름은 산골짜기에서 잠을 자는 듯한데, 마치 바다의 밀물에 올라앉은 것 같고, 머리 내민 산봉우리들은 흰 파도에 드러나는 섬처럼 점점 이 찍혀 있다. 내려다보고 쳐다보니 마음이 오싹하고 몸은 태초의 원시에 와 있고, 가슴속은 천지와 함께 흐르는 것 같았다. 이튿날 여명에 해가 돋아오르는 것을 보니 밝은 허공이 거울과 같았다. 서성이며 사방을 바라보니 만리가 끝이 없고 대지의 뭇산은 개미집이나 버러지 자국만 같다. 평소에는 다만 구름이 하늘에 붙은 줄로만 알았고 그것이 반공에 떠 있는 물건이라는 것을 몰랐는데 여기 와서 보니 눈 아래 펀펀히 깔린 그 아래는 반드시 대낮이 그늘져 있을 것이다."


지리산의 장엄은 천왕봉의 높이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넓이와 깊이에서 나온다. 그 면적이 자그마치 485제곱킬로미터로 전북의 남원, 전남의 구례, 경남의 함양·산청·하동 등 3도 5군이 머리를 맞댄 곳이다. 남명 선생은 「덕산계정 기둥에 새긴 글〔題德山溪亭柱〕」에서 이렇게 읊었다.


천석이나 되는 저 큰 종을 좀 보소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울리지 않는다오.
허나 그것이 지리산만 하겠소,
(지리산은) 하늘이 울어도 울리지 않는다오,
請看千石鐘 非大扣無聲
爭似頭流山 天鳴猶不鳴


지리산을 좋아하는 분은 채색장식화보다도 수묵담채화를 좋아할 것이다. 그런 분이라면 예쁜 분원사기보다도 금사리가마의 둥근 달항아리를 더 좋아할 것이다. 그런 분이라면 바그너나 모짜르트보다도 바흐를 좋아할 것이다. 그런 분이라면 똘스또이의 소설을 책상에 앉아 줄을 치며 읽을 것이다. 하나의 안목은 다른 안목에도 통한다. "산은 지리산이다."


영주 부석사


[영주 부석사 답사 경로 출처 본문]


남한땅의 5대 명찰


미술품은 하나의 물체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물(物)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물체를 통해 나타나는 상(像)을 갖고 이야기한다. 유식하게 말해서 오브제(objet)가 아니라 이미지(image)로 대하는 것이다. 따라서 미술품에 대한 해설은 필연적으로 시각적 이미지를 언어로 전환시켜야 한다는 조건에서 시작된다. 이 때문에 예로부터 미술을 말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그 이미지를 극명하게 부각시킬 수 있는가를 고민해왔다.


조선왕조 철종 때 영의정을 지낸 경산(經山) 정원용(鄭元容)은 비록 그자신이 문장가이기는 했지만 글씨에 대하여 특별한 전문성을 갖고 있었던 것 같지도 않은데 네 사람의 명필을 논한 「논제필가(論諸筆家)」에서는 미술과 문학의 행복한 만남을 보여주고 있다.


한석봉(韓石峯)의 글씨는 여름비가 바야흐로 흠뻑 내리는데 늙은 농부가 소를 꾸짖으며 가는 듯하다.
서무수(徐懋修)의 글씨는 반쯤 갠 봄날 은일자가 채소밭을 가꾸는 듯하다.
윤백하(尹白下)의 글씨는 가을달이 창에 비치는데 근심에 서린 사람이 비단을 짜는 듯하다.
이원교(李圓嶠)의 글씨는 겨울눈이 쏟아져내리는데 사냥꾼이 말을 타고 치달리는 듯하다.


어린 시절 동네 아저씨가 점을 봐준다면서 읊어주던 그림같은 정경을 인용해서 남한땅의 5대 명찰을 논하는 「논제명찰(論諸名刹)」을 읊어보련다.


"춘삼월 양지바른 댓돌 위에서 서당개가 턱을 앞발에 묻고 한가로이 낮잠자는 듯한 절은 서산 개심사(開心寺)이다.

한여름 온 식구가 김매러 간 사이 대청에서 낮잠자던 어린애가 잠이 깨어 엄마를 찾으려고 두리번거리는 듯한 절은 강진 무위사(無爲寺)이다.

늦가을 해질녘 할머니가 툇마루에 앉아 반가운 손님이 올 리도 없건만 산마루 넘어오는 장꾼들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듯한 절은 부안 내소사(來蘇寺)이다.

한겨울 폭설이 내린 산골 한 아낙네가 솔밭에서 바람이 부는 대로 굴러가는 솔방울을 줍고 있는 듯한 절은 청도 운문사(雲門寺)이다.

몇날 며칠을 두고 비만 내리는 지루한 장마 끝에 홀연히 먹구름이 가시면서 밝은 햇살이 쨍쨍 내리쬐는 듯한 절은 영주 부석사(浮石寺)이다."

[산사의 여러 모습,  1. 내소사 2. 무위사 3. 개심사 4. 운문사 출처 본문]

질서의 미덕과 정서적 해방의 기쁨


영주 부석사는 백두대간이 두 줄기로 나뉘어 제 갈 길로 떠나가는 양백지간(兩白之間)에 자리잡고 있다.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 봉황산(鳳凰山) 중턱이 된다. 이 자리가 지닌 지리적·풍수적 의미는 그것으로 암시되며,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의 발길이 닿기 쉽지 않은 국토의 오지라는 사실에서 사상사적·역사적 의미도 간취된다.


영주 부석사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이다. 그러나 아름답다는 형용사로는 부석사의 장쾌함을 담아내지 못하며, 장쾌하다는 표현으로는 정연한 자태를 나타내지 못한다. 부석사는 오직 한마디, 위대한 건축이라고 부를 때만 그 온당한 가치를 받아낼 수 있다.


건축잡지 『플러스』에서 1994년 2월에 건축가 2백여명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를 발표한 적이 있는데, “가장 잘 지은 고건축”이라는 항목에서 압도적인 표를 얻어 당당 1위를 한 것이 부석사였다. 부석사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무량수전에 있다.


그것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이라서가 아니며, 그것이 국보 제18호라서도 아니다. 부석사의 아름다움은 모든 길과 집과 자연이 이 무량수전을 위해 제자리에서 제 몫을 하고 있는 절묘한 구조와 장대한 스케일에 있는 것이다.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대사가 「법성게(法性偈)」에서 말한바 “모든 것이 원만하게 조화하여 두 모습으로 나뉨이 없고, 하나가 곧 모두요 모두가 곧 하나됨”이라는 원융(圖融)의 경지를 보여주는 가람배치가 부석사인 것이다. 부석사는 곧 저 오묘하고 장엄한 화엄세계의 이미지를 건축이라는 시각매체로 구현한 것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출처 본문]

비탈길의 미학과 사과나무의 조형성


부석사 매표소에서 절집을 향하면 느릿한 경사면의 비탈길이 곧바로 일주문까지 닿아 있다. 길 양옆엔 은행나무 가로수, 가로수 건너편은 사과밭이다. 별스러운 수식이 없지만 이 부석사 진입로야말로 현대인에게 침묵의 충언과 준엄한 꾸짖음 그리고 포근한 애무의 손길을 던져주는 조선 땅 최고의 명상로라고 생각된다.


이 비탈길은 사철 중 늦가을이 가장 아름답다. 가로수 은행나무잎이 떨어져 샛노란 낙엽이 일주문 너머 저쪽까지 펼쳐질 때 그 길은 순례자를 맞이하는 부처님의 자비로운 배려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부석사로 오르는 은행나무 가로수길 출처 본문]

내가 늦가을 부석사를 좋아하는 이유는 은행잎 카펫길보다도 사과나무밭 때문이었다. 사과나무의 줄기는 직선으로 뻗고 직선으로 올라간다. 그렇게 되도록 가지치기를 해야 사과가 잘 열린다. 한 줄기에 수십개씩 달리는 열매의 하중을 견디려면 줄기는 굵고 곧지 않으면 안된다.


곧게 뻗어오른 사과나무의 줄기와 가지를 보면 대지에 굳게 뿌리를 내린 채 하늘을 향해 역기를 드는 역도선수의 용틀임을 느끼게 된다. 형체는 어느 모로 보아도 불균형을 이루면서 전체는 완벽한 힘의 미학을 견지하고 있다. 그 힘은 뿌리에서 나온다. “세상엔 느티나무 뽑을 장사는 있어도 사과나무 뽑을 장사는 없다.”

[부석사 입구의 사과나무 밭 출처 본문]

9품 만다라의 가람배치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으로 오르는 길 중턱 왼편에는 이 절집의 당(幢), 즉 깃발을 게양하던 당간의 버팀돌이 우뚝 서 있다. 높이 4.3미터의 이 훤칠한 당간지주는 우리나라에 있는 수많은 당간지주 중 가장 늘씬한 몸매의 세련미를 보여주는 명작 중의 명작이다.


비탈길이 끝나고 낮은 돌계단을 올라 천왕문에 이르면 여기부터가 부석사 경내로 된다. 사천왕이 지키고 있으니 이 안쪽은 도솔천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무량수전에 다다르기까지 우리는 아홉 단의 석축 돌계단을 넘어야 한다. 그것은 곧 극락세계 9품(品) 만다라의 이미지를 건축적 구조로 구현한 것이다.


『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을 보면 극락세계에 이를 수 있는 16가지 방법이 설명되어 있는데 마지막 세 방법은 3품3배관(三品三輩觀)으로 상품상생(上品上生)에서 중품중생(中品中生)을 거쳐 하품하생(下品下生)에 이르기까지 저마다의 행실과 공력으로 극락세계에 환생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곧 9품 만다라다.


부석사 돌축대들은 제멋대로 생긴 크고 작은 자연석의 갖가지 형태들을 다치지 않고 자연스럽게 이를 맞추어 쌓은 것이다. 낱낱의 개성을 죽이지 않으면서 무질서를 질서로 환원시킨 이 석축들은 자연스런 아름다움이라기보다도 의상대사가 말한바 “하나가 곧 모두요 모두가 곧 하나됨”을 입증하는 상징적 이미지까지 서려 있다.


천왕문에서 세 계단을 오른 넓은 마당은 3품3배의 하품단(下品壇) 끝이 되며 여기에는 요사채가 조용한 자태로 자리잡고 있다. 여기서 다시 세 계단을 오르는 중품단(中品壇)은 범종이 걸린 범종루(梵鐘樓)가 끝이 되며 양옆으로 강원(講院)인 응향각(凝香閣)과 취현암(醉玄菴)이 자리잡고 있다.


범종루에서 다시 세 계단을 오르면 그것이 상품단(上品壇)이 되며 마지막 계단은 안양루(安養樓) 누각 밑을 거쳐 무량수전 앞마당에 당도하게 되어 있다. 마지막 돌계단을 오르면 우리는 아름다운 자태에 정교한 조각솜씨를 보여주는 아담한 석등과 마주하게 된다.


이 석등의 구조와 조각은 국보 제17호로 지정된 명작 중의 명작이다. 아마도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석등 중에서 가장 화려한 조각솜씨를 자랑할 것이다.

[부석사 당간지주와 무량수전 앞 석등 출처 본문]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여래의 상주처인 무량수전 건물은 1016년, 고려 현종 7년, 원융국사가 부석사를 중창할 때 지은 집으로 창건연대가 확인된 목조건축 중 가장 오랜 것이다. 정면 5칸에 측면 3칸 팔작지붕으로 주심포집인데 공포장치는 아주 간결하고 견실하게 짜여 있다.


무량수전 건축의 아름다움은 외관보다도 내관에 더 잘 드러나 있다. 건물 안의 천장을 막지 않고 모든 부재들을 노출시킴으로써 기둥, 들보, 서까래 등의 얼키설키 엮임이 리듬을 연출하며 공간을 확대시켜주는 효과는 우리 목조건축의 큰 특징이다.


무량수전에 모셔져 있는 불상 또한 명품이다. 이 아미타불상은 흙으로 빚은 소조불(塑造佛)에 도금을 하였는데 전형적인 고려시대 불상으로 개성이 강하고 육체가 건장하게 표현되어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내부와 불상 출처 본문]

안양루에 올라


부석사의 절정인 무량수전은 그 건축의 아름다움보다도 무량수전이 내려다보고 있는 경관이 장관이다. 바로 이 장쾌한 경관이 한눈에 들어오기에 무량수전을 여기에 건립한 것이며, 앞마당 끝에 안양루를 세운 것도 이 경관을 바라보기 위함이다.


안양루에 오르면 발아래로는 부석사 당우들이 낮게 내려앉아 마치도 저마다 독경을 하고 있는 듯한 자세인데, 저 멀리 산은 멀어지면서 소백산맥 연봉들이 남쪽으로 치달리는 산세가 일망무제로 펼쳐진다. 안양루에 걸려 있는 중수기(重修記)를 읽어보니 이렇게 적혀 있다.

 

몸을 바람난간에 의지하니 무한강산(無限江山)이 발아래 다투어 달리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르니 넓고 넓은 건곤(乾坤)이 가슴속으로 거두어들어오니 가람의 승경(勝景)이 이와 같음은 없더라.

[무량수전에서 내려다 본 경치 출처 구글 이미지, 본문]

부석과 선묘각


무량수전 좌우로는 이 위대한 절집의 창건설화를 간직한 부석(浮石)과 선묘 아가씨의 사당인 선묘각(善妙閣)이 있다. 부석과 선묘에 대하여는 민영규 선생이 일찍이 연구발표한 것이 있고 그 내용은 『한국의 인간상』(신구문화사 1965) ‘의상’편에 자세하다.


부석사를 고려시대에는 선달사(善達寺)라고도 하였는데 선달이란 ‘선돌’의 음역으로, 부석의 향음(鄕音)이란다. 절만이 부석이 아니었다. 세상사람들은 의상을 부석존자라고 부른다. 부석에 얽힌 선묘의 이야기는 송나라 찬녕이 지은 『송고승전』에 나온다. 그것을 여기에 요약하여 옮겨본다.


의상과 원효가 유학길에 올랐다가 원효는 깨친 바 있어 되돌아오고 의상은 당주(지금의 남양, 아산)에서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등주에 닿았다. 의상은 한 신도집에 머물렀는데 그 집의 선묘라는 딸이 의상에게 반했으나 의상의 마음을 일으킬 수 없자 "세세생생에 스님께 귀명하여 스님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소원을 말했다. 의상이 종남산의 지엄에게 화엄학을 배우고 돌아오는 길에 그 신도집에 들러 사의를 표했다. 이때 선묘는 밖에 있다가 의상을 선창가에서 보았다는 말을 듣고는 의상에게 주려고 준비했던 옷과 집기들을 들고 나왔 으나 의상의 배는 이미 떠났다. 선묘는 옷상자를 바다에 던지고 내 몸이 용이 되어 저 배를 무사히 귀국케 해 달라며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귀국 후 의상은 산천을 섭렵하며 "고구려의 먼지나 백제의 바람이 미치지 못하고, 말이나 소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을 찾아 여기야말로 법륜의 수레바퀴를 굴릴 만한 곳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교(잘못된 주장을 하는 종파)의 무리 500명이 자리잡고 있었다. 항상 의상을 따라다니던 선묘는 의상의 뜻을 알아채 고 허공중에 사방 1리나 되는 큰 바위가 되어 사교 무리들의 가람 위로 떨어질까말까 하는 모양으로 떠 있었다. 사교 무리들은 이에 놀라 사방으로 흩어지고 의상은 이 절에 들어가 화엄경을 강의했다.


지금 부석사 왼쪽에는 조그마한 맞배지붕의 납도리집 한 채가 있어서 선묘의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고, 조사당 벽화 원본을 모셔놓은 보호각 뒤로는 철문이 닫혀 있는 옛 우물자리가 있는데 이를 선묘정이라고 부른다.

[무량수전 뒷편의 선묘각]

선묘 아씨를 찾아서


쿄오또의 명찰 코오잔지(高山寺)에는 많은 유물이 전해지고 있다. 그중 대표작은 일본국보로 지정되어 있고, 일본 특유의 두루마리그림인 에마끼(繪卷)의 3대걸작 중 하나인 「화엄종조사회전(華嚴宗祖師繪傳)」이 있다. 12세기 카마꾸라(鎌倉)시대 묘오에(明惠, 1173~1233) 쇼오닌(上人, 큰스님)이 제작케 한 것인데, 정식으로 이름을 붙이자면 의상전(傳) 원효전(傳)의 도해(圖解)이다.


선묘니사(善妙尼寺젠묘오니지)는 오래전에 폐사되었고 그 조각과 그림은 모두 쿄오또박물관에 위탁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아담한 상자 안에 보관된 빼어난 솜씨의 선묘 목조상을 보는 순간 나는 그 예술적 아름다움보다도 그녀의 마음씨에 감사하고 대한민국 국민 모두를 대신해서 사과드리는 합장의 예를 올렸다.

[일본의 국보 「화엄종조사회전」 중 의상과 선묘 부분과 선묘 조각상 출처 본문]

조사당과 답사의 여운


이제 우리는 이 위대한 절집의 창건주 의상대사를 모신 조사당(祖師堂)으로 오를 차례다. 무량수전에서 조사당을 향하면 언덕 위의 삼층석탑을 지나게 된다. 삼층석탑 옆쪽으로 나 있는 오솔길은 부드러운 흙길이다. 돌비탈길, 돌계단길로 무량수전에 오른 순례자들이 오랜만에 밟게 되는 자연 그대로의 길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에 자연으로 돌아온 여운이라는 표현을 썼던 것이다.


오솔길의 끝은 조사당이다. 이 건물 또한 고려시대의 건축물로 단칸 맞배지붕 주심포집의 단아한 아름다움을 모범적으로 보여준다. 처마의 서까래가 길게 내려뻗어 지붕의 무게가 조금은 부담스럽다. 그러나 그로 인하여 이 집은 작은 집이지만 조금도 왜소해 보이질 않는다.

[조사당 측면 출처 본문]

그러나 조사당 안을 들여다보면 그 순간 밖으로 나오고 싶어진다. 내벽에 20세기 특유의 번쩍거리는 채색으로 생경한 모습의 제석천, 범천, 사천왕이 그려져 있다. 딴에는 잘 그린다고 한 것인데 이 시대의 역량은 그것밖에 안된다.


부석사의 스님들은 대대로 친절했다. 보호각을 열고 일제시대에 떼어놓은 옛 벽화를 보여달라면 언제고 응해주었다. 여러분도 나중에 요사채에 들러 부탁해보고 그 벽화와 이 벽화를 비교해보시라.

[일제 때 철거된 부석사 조사당 벽화 출처 본문]

조사당 건너편에는 나한상을 모신 단하각(丹霞閣)과 응진전이 있고 자인당(慈忍堂)에는 부석사 동쪽 5리 밖에 있던 동방사(東方寺)라는 폐사지에서 옮겨온 석불 2기가 모셔져 있는데, 모두 당당한 일세의 석불들이다. 보호각 쪽 언덕 너머 외롭게 서 있는 원융(圓融)국사의 비를 보는 것도 답사 끝의 작은 후식이다.


부석사의 수수께끼


부석사에는 나로서는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둘 있다. 하나는 석룡(石龍)이다. 절 스님들이 대대로 전하기로 무량수전 아미타여래상 대좌 아래는 용의 머리가 받치고 그 몸체는 ㄹ자로 꿈틀거리며 법당 앞 석등까지 뻗친 석룡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찰 자산대장에도 나와 있고 일제시대에 보수할 때 법당 앞마당을 파면서 용의 비늘 같은 조각까지 확인했다는 것이다. 그때 용의 허리부분이 절단된 것을 확인하여 일본인 기술자에게 보수를 요구했으나 그는 완강히 거부했다는 것이다.


두번째 의문은 이 큰 절집에 상주하는 스님이 3년 전에는 겨우 두 분이었다는 사실이다. 그때는 주지와 총무뿐이었고 간혹 객승들이 기도드리러 올 뿐이었다. 지금도 많아 보았자 서너 분 아닐까 싶다—이 위대한 절, 이 아름다운 절, 소백산맥 전체를 정원으로 안고 있는 이 방대한 절에.


하대신라의 대표적인 큰스님인 봉암사의 지증대사, 태안사의 혜철스님, 성주사의 무염화상 등은 모두가 부석사 출신으로 나중에 구산선문의 개창주가 된 스님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부석사에서 공부하고 떠났지 머물지는 않았다. 결국 부석사는 일시의 수도처는 될망정 상주처로는 적당치 않다는 셈이다.


최순우의 무량수전


1992년 7월 15일 오후 6시, 국립중앙박물관 중앙홀에서는 『최순우(崔淳雨) 전집』(전5권) 출간기념회가 열렸다. 나는 항시 부석사의 아름다움은 고 최순우 관장의 「무량수전」 한 편으로 족하다고 생각해왔다.

[최순우 저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출처 구글 이미지]

나는 그날 낭랑한 나의 목소리를 버리고 스산하게 해지는 목소리에 여운을 넣어가며 부석사 비탈길을 오르듯 느긋하게 읽어갔다. 박물관 인생이라는 외길을 걸으며 우리에게 한국미의 파수꾼 역할을 했던 고인의 공력을 추모하면서.


소백산 기슭 부석사의 한낮, 스님도 마을사람도 인기척도 끊어진 마당에는 오색 낙엽이 그림처럼 깔려 초겨울 안개비에 촉촉이 젖고 있다. 무량수전, 안양루, 조사당, 응향각들이 마치도 그리움에 지친 듯 해쓱한 얼굴로 나를 반기고, 호젓하고도 스산스러운 희한한 아름다움은 말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나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사무치는 고마움으로 이 아름다움의 뜻을 몇번이고 자문자답했다 (..)

눈길이 가는 데까지 그림보다 더 곱게 겹쳐진 능선들이 모두 이 무량수전을 향해 마련된 듯 싶어진다. 이 대자연 속에 이렇게 아늑하고도 눈맛이 시원한 시야 를 터줄 줄 아는 한국인, 높지도 얕지도 않은 이 자리를 점지해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층 그윽하게 빛내주고 부처님의 믿음을 더욱 숭엄한 아름다움으로 이끌어줄 수 있었던 뛰어난 안목의 소유자, 그 한국인, 지금 우리의 머릿속에 빙빙 도는 그 큰 이름은 부석사의 창건주 의상대사이다.


나는 이 글을 통해 ‘사무치는’이라는 단어의 참맛을 배웠다. 그렇다! 내가 해마다 거르는 일 없이 부석사를 가고 또 간 것은 사무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청도 운문사
[운문사 답사경로 출처 본문]

운문사의 아름다움 다섯


청도의 운문사를 찾게 되는 다섯가지 아름다움이 있다. 첫째는 거기에 비구니 승가대학이 있어서 사미니계를 받은 250여명의 비구니 학인스님이 항시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앳된 비구니를 바라볼 때면 왠지 모르게 눈도 마음도 어질게 됨을 느낀다.


둘째는 장엄한 새벽예불이 있기 때문이다. 어느 절인들 새벽예불이 없겠는가마는 250여명의 낭랑한 목소리가 무반주 여성합창으로 금당 안에 가득할 때 우리는 장엄하고 숭고한 음악이 무엇인가를 실수없이 배울 수 있다. 셋째는 운문사 입구의 솔밭이다. 운문사로 들어가는 진입로 1킬로미터 남짓한 길 양옆의 늠름하면서도 아리따운 조선소나무의 자태는 그것을 보며 걷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을 느끼게 해준다.


넷째는 운문사의 평온한 자리매김이다. 운문산, 가지산 연맥으로 이어진 태백산맥의 끝자락, 이곳 사람들이 영남 알프스라고 부르는 높고 깊은 산속에 자리잡았음에도 운문사는 넓은 평지사찰로 되어 있으니 그 안온한 분위기는 다른 예를 찾아볼 수 없다. 다섯째는 내 존경에 존경을 더해 마지않는 일연스님, 답사기를 쓸 때면 가장 먼저 찾아보는 그분의 『삼국유사』가 여기서 씌어졌다는 사실이다.

[운문사 전경 출처 본문]

양노의 자운영 강의


청도 운문사는 겨울이 가장 아름답다. 그러나 운문사로 가는 길은 여름날이 더욱 아름답다. 어디에서 들어오든 길가 여름꽃들이 마치도 환영객들이 도열하여 축하의 손짓을 보내는 듯한 축복의 여정이 되기 때문이다.


몇해 전 여름답사가 충청도 청양으로 잡혔을 때 내 친구 안양노가 자기 고향으로 간다고 두 아들을 데리고 따라왔다. 양노는 전공이 정치학인지라 문화재와는 거리가 먼 친구였는데, 1박2일 답사중 회원들이 병아리처럼 안양노 뒤만 따라다니는 괴이한 일이 벌어졌다. 그는 뛰어난 들꽃선생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정산삼거리 한쪽 논 가운데 있는 보물 제18호 구층석탑을 보러 가는데 보랏빛 작은 꽃이 줄지어 있는 아리따운 정경이 나타났다. 여지없이 한 열성회원이 양노에게 달려와 이게 뭐냐고 묻는다. 그러자 양노는 꽃 앞에 주저앉아 꽃송이를 매만지면서 느려터지게 설명한다.

 

“이게 자운영이여. 이쁘지이. 근데 이게 그냥 자라난 들풀이 아니이여. 역부러 씨를 뿌려 이렇게 심어놓은 것이지이. 초가을에 논에다 자운영씨를 줄줄 뿌리면 초여름에 이렇게 꽃이 피거든. 그때는 한창 모내기할 때가 된단 말이여. 그 무렵에 이걸 뒤집어버리는 것이여. 풀이니까 잠깐이면 썩거든. 농부들은 이렇게 해서 땅을 기름지게 하는 것이여. 이런 건 시굴서 자란 애들은 다 아는 것이여.”

[정산 구층석탑 입구 자운영 출처 본문]

동곡의 선암서원


운문사로 들어가는 길은 여러 갈래다. 태백산맥의 끝자락이 마지막으로 요동을 치면서 이룬 영남 알프스의 저 육중한 산덩이가 운문산 북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으니 운문사 너머 남쪽은 밀양이고, 동쪽은 울산 석남사, 서쪽은 청도읍내, 북쪽은 경산시 압량벌로 연결된다.


고속도로가 생기기 전에는 청도에서 곰티재를 넘어 동곡(東谷)에서 꺾어들어오는 것이 정코스라고 하겠지만, 지금은 경부고속도로 경산인터체인지에서 자인을 거쳐 동곡으로 들어오는 길이 제일 빠르다.


어느 길을 택하든 동곡은 운문사 초입이 된다. 동곡은 청도군 금천(錦川)면의 다운타운으로 운문산에서 흘러내린 운문천과 단석산에서 발원한 동곡천이 합류하여 동창천(東倉川)을 이루며 제법 큰 내가 되어 들판을 휘감고 돌아가면서 만든 강마을이다. 그래서 비단 같은 냇물이라는 마을이름을 얻었다.


금천면 동곡의 동창천가에는 아름다운 경관을 갖춘 선암서원(仙巖書院)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선암서원은 삼족당(三足堂) 김대유(金大有)와 소요당(逍遙堂) 박하담(朴河淡)을 모신 서원으로 선조 원년(1568)에 매전면 동산동 운수정(雲樹亭)에 세운 것을 선조 10년(1577)에 이곳으로 옮겼다고 한다.

[선암서원 출처 본문]

선암서원 아래로는 소요대 높은 바위 아래로 동창천이 유유히 맴돌아간다. 준수한 소나무가 강변을 따라 오솔길을 안내하고 서원 뒤쪽으로는 각이 지듯 꺾인 운문산 줄기가 마냥 듬직하고 시원스러운데, 밭에는 초여름이면 보리가 누렇게 익고, 한여름이면 호박꽃이 장관으로 피어나는 싱그러움을 보여준다.

[선암서원과 소요대 출처 본문]

운문댐 앞에 서서


동곡에서 경주 방향으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방지마을이 나오고 곧게 뻗은 길이 작은 고개를 넘으면 갑자기 깔끔한 시골 속의 도회가 나타난다. 여기가 신대천(新大川)마을로 운문면사무소 소재지이다.


속 모르는 외지인은 신대천에 와서 집들이 한결같이 깔끔하고 도로 폭이 널찍한 것을 보고 근대화된 마을이라고 좋아할지 모른다. 그러나 여기는 슬픔의 마을이고, 집집마다 피어오른 한숨으로 가득 찬 아픔의 현장이다.


신대천에서 마주보이는 육중한 운문댐이 생기는 바람에 댐 너머에 있던 면사무소 소재지인 대천리사람들을 집단으로 이주시켜놓은 마을이다. 그래서 신대천이다. 신대천에서 오른쪽으로 산고개 한 굽이를 돌아오르면 고갯마루에서 장대한 운문댐을 조망할 수 있다.

[운문면 대천리 수몰 전과 수몰 후 운문댐 출처 본문]

대천리사람들의 집단 강제이주는 1991년 가을부터 시작되었고, 1992년 봄부터 잔인한 불도저는 대천리마을 건물과 집 들을 허물기 시작했다. 모든 담벽에는 붉은 스프레이로 철거, 철거, 철거…… 철거가 휘날리는 초서체로 씌어졌다. 그 철거 글씨가 미처 닿지 않은 벽에는 철자법 하나 맞지 않는 대천리사람의 흐느끼는 호소와 분노의 외침도 적혀 있었다.

[대천리 상가의 철거 모습 출처 본문]

대천리 수몰지구 너른 호수를 저 아래로 내려다보며 새로 닦은 포장길을 따라 운문사를 향하여 계곡을 타고 오르면 이내 냇가 쪽으로 제법 큰 마을이 나온다. 문명리(文明里), 그 윗마을이 신원리(新院里)이다. 운문댐 수몰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마을이니 언젠가 담수가 끝나고 나면 필시 매운탕집 동네가 될 것만 같다.


문명리, 신원리에 사는 어린이들은 문명초등학교에 다닌다. 문명초등학교는 역사가 깊다. 본래 이곳은 가마솥공장으로 유명했다. 캄캄한 시골이지만 일제시대에 마을사람들의 교육열이 높아 이 학교를 세웠다고 하니 그것 자체가 뿌듯한 역사의 자랑이다.


저 푸른 소나무에 박힌 상처는


운문사에 당도하는 그 시각이 몇시든 여장을 풀고 곧장 운문사로 들어가는 것이 나의 운문사행 답사의 정코스다. 해묵은 노송들이 시원스레 뻗어올라 소나무 터널이 높이 치켜든 우산처럼 드리워진 솔밭 사이를 여유롭게 걷는다.


운문사 솔밭은 우리나라에서 첫째는 아닐지 몰라도 둘째는 갈 장관 중의 장관이다. 서산 안면도의 해송밭, 경주 남산 삼릉계의 송림, 풍기 소수서원의 진입로 솔밭, 봉화군 춘양의 춘양목…… 내 아직 백두산의 홍송을 보지 못하여 그 상좌를 남겨놓았지만 남한땅에 이만한 솔밭은 드물 것 같다.


운문사의 노송들은 그 밑동이 마치 대검에 찍히고 도끼로 파인 듯한 큰 흠집을 갖고 있다. 이것은 일제말기 ‘대동아전쟁’ 때 송진을 공출하기 위해 송진 받아낸 자국이다. 그들은 석유 대용을 위해 이 송진으로 송탄유(松炭油)를 만들어 자동차를 운전할 정도로 발악하였다.


그러나 보라! 조선의 소나무는 그래도 죽지 않고 여기 이렇게 사철 푸르게 살아있지 않은가. 웬만한 소나무는 그 칼부림, 도끼날에 생명을 다했을 것이련만 조선의 소나무는 그 아픔의 상처를 드러내놓고도 아리따운 자태로 늠름히 살아있지 않은가. 아무리 모진 시련도 우리는 그렇게 꿋꿋이 이겨왔다.

[운문산 입구의 솔밭 출처 본문]

대작갑사와 가슬갑사


운문사의 내력은 무엇보다도 운문사 주지였던 일연스님이 쓴 『삼국유사』의 「원광서학(圓光西學)」과 「보양이목(寶壤梨木)」에 자세히 나와 있다. 또 숙종 44년(1718) 채헌(彩軒)이라는 스님이 쓴 『호거산운문사사적기』가 있어 그 자초지종을 알 수 있는데, 간혹 재해석과 재구성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사적기에 의하면 신라 진흥왕 18년(557)에 한 도승이 지금 운문사 5리 못 미처 있는 금수동(金水洞) 계곡에 들어와 작은 암자를 짓고 3년 동안 수도하더니 홀연히 득도하여 도우(道友) 10여명과 산세의 혈맥을 검색하고 다섯개의 갑사〔五岬寺〕를 짓기 시작하여 7년 만에 완성하였다고 한다.


오갑사의 첫번째 중창자는 원광(圓光)법사였다. 일연스님은 『삼국유사』의 제5권 「의해(義解)」편에서 첫머리에 원광법사를 논하면서 「원광서학」에 대하여 이례적으로 상세히 기록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자신이 글을 쓰고 있던 바로 그 자리의 일인지라 이처럼 세심한 배려를 가했던 모양이다.


일연스님에 의하건대 원광법사는 진평왕 22년(600)에 귀국하여 경주 황룡사에 있다가 대작갑사에 와서 3년간 머문 뒤 가슬갑사로 옮겨갔다. 원광법사는 바로 이 가슬갑사에서 화랑 귀산과 추항에게 저 유명한 「세속오계」를 내려주었다.


가슬갑사는 계곡을 따라 5킬로미터쯤 들어가면 나오는 신계리마을 동쪽 문복산(文福山) 기슭의 속칭 ‘절티낌’으로 추정되며 지금도 주춧돌 10여개가 밭고랑에 머리를 내밀고 있다.

[운문사의 겨울 출처 본문]

보양국사의 중창


운문사의 두번째 중창자는 보양국사였다. 보양이 당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주석한 곳은 밀양(密陽, 당시 推火)의 봉성사(奉聖寺)였다.


왕건이 동정(東征)을 하여 청도의 경계까지 쳐들어갔는데 산적무리들이 견성(犬城, 伊西山城)에 들어가 거만을 부리며 항복하지 않았다. 왕건은 산 아래로 내려와 보양스님에게 방책을 물으니 스님은 이렇게 묘책을 가르쳐주었다.

 

“대저 개라는 짐승은 밤을 지키지 낮을 지키지 않으며, 앞을 지키지 뒤를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니 낮에 그 뒤쪽(북쪽)을 치시오.”


바로 그 보양스님이 전설적으로 운문사를 중창한다. 보양이 당나라에서 귀국할 때 바다를 건너는 중 해룡이 그를 용궁에 청하여 금라가사(金羅袈娑) 한 벌을 주고 그의 아들 이목(璃目)에게 스님을 모시고 가 작갑(鵲岬)에 절을 창건하라고 했다.


이후 왕건은 후삼국을 통일하고 보양스님이 작갑사를 세웠다는 말을 듣고 오갑의 밭 500결을 절에 부치게 하고 태조 20년(937) 운문선사(雲門禪寺)라고 사액하였다.

[운문사 경내와 삼층석탑 쌍탑 출처 본문]

이목소의 전설


왕건이 운문이라고 이름지어 내린 것은 당나라 때 고승 운문문언(雲門文偃, ?~949)을 가리키는 것이다. 유명한 「운문어록」의 운문스님을 기리는 뜻이다. 운문스님은 대단한 호승(豪僧)이었다. “만약에 석가모니가 내 앞에서 다시 한번 천상천하유아독존이라는 오만을 부린다면 다리몽둥이를 분질러놓겠다”고 호언할 정도였다.


운문사 작갑전에는 사천왕상이 네개의 돌기둥에 정교하게 조각된 석주가 남아 있어 이것이 보물 제318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처럼 신비한 전설의 소유자인 보양의 이적(異跡)은 여기에 머물지 않고 이목소의 전설로 이어진다. 그것이 『삼국유사』에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이목(璃目)은 절 결의 작은 못에 살면서 법화(法化)에 게으르지 않았는데 어느 해에 날이 몹시 가물어 채소들이 모두 말라죽으므로 보양은 이목에게 부탁하여 비를 내리게 하니 흡족히 해갈되었다. 그런데 천제께서 하늘의 일을 무단으로 가로챈 이목을 죽이라고 천사를 내려보냈다. 이목은 보양에게 달려와 구원을 요청하였다. 보양은 이목을 마루 아래 숨겨두었는데 이내 천사가 물에 내려와 이목을 내놓으라고 하였다. 보양은 손가락으로 뜰 앞의 배나무를 가리키며 이목(梨木)이라고 하였다. 이에 천사는 배나무에 벼락을 내리치고 다시 하늘로 올라갔다. 이 때문에  배나무는 거의 죽어가게 되었는데 이목이 어루만지매 다시 청정해졌다. 그 나무가 근년에 다시 넘어졌다. 어떤 사람이 그 나무로 빗장을 만들어 선법당과 식당에 설치했다. 그 자루에는 명(銘)이 새겨져 있다.


지금 운문사 극락교 아래에 있는 이목소는 냇돌이 구르고 굴러 소의 자취를 잃어간다. 10년 전만 하여도 짙은 초록색을 발하는 깊은 못이었다. 운문사 학인스님들은 밤낮으로 이목소 앞에서 세수를 한다. 조석으로 몸을 같이하는 이 개울에 그런 전설이 있고 없음에는 정서적 차이가 크게 나는 것이다.


원응국사의 3차 중창


청도 운문사를 세번째로 중창한 것은 원응(圓應)국사 이학일(李學一, 1052~1144)이었다. 학일스님은 전북 부안군 보안면 출신으로 승과에 합격한 후 송나라에 유학하고 돌아와 선사, 대선사의 승계를 밟아 인종 즉위년(1122)에 왕사(王師)로 책봉되었다.


지금 운문사에는 원응국사비(보물 제316호)가 남아 있어 그 내력이 소상한데, 비문은 윤관 장군의 넷째아들로 당대의 문사였던 윤언이(尹彦頤)가 짓고, 글씨는 고려왕조 최고의 명필이었던 탄연(坦然)이 썼으니 그 금석적 가치는 막중한 것이다.


이리하여 운문사의 새벽예불에서 마지막에 이 절집을 세워주신 큰스님께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로 절을 올릴 때 이 절을 창건한 세 스님의 존명을 부른다. “차사창건(此寺創建) 삼대법사(三大法師) 원광법사, 보양국사, 원응국사 지심귀명례”


『운문사사적기』에 의하면 원응국사가 운문사에 주석하면서 가람의 위용을 갖추어 사찰 경내 사방에 장생표주(長生標柱)를 설치하고 전결노비비(田結奴婢碑)까지 세우니 “나라의 5백선찰(禪刹) 중 제2의 선찰”이 되었다고 한다.

[원응국사비와 사천왕 돌기둥(부분) 출처 본문]

운문의 김사미와 초전의 효심


12세기 말, 무신정권하에서 일어난 농민과 천민의 항쟁은 대대적인 것이었다. 1176년 공주 명학소의 망이·망소이의 천민항쟁으로 시작된 일련의 항쟁 가운데 1193년 명종 23년에 경상도에서 일어난 농민항쟁은 전에 없던 대규모였다. 그것이 『고려사』 명종 23년 7월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남적(南賊)이 봉기하였다. 그중 극심한 자는 운문에 거점을 둔 김사미와 초전(草田, 현 밀양)에 거점을 둔 효심(孝心)이다. 이들은 떠돌아다니는 자〔流亡民〕들을 불러모아 주현(州縣)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정부의 대공세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김사미는 이듬해 2월, 개경에 사람을 보내어 편안히 살 수만 있게 해준다면 항복하겠다는 뜻을 비치었다. 이에 왕은 죄를 묻지 않겠다며 심부름꾼을 돌려보내고 병마사에게 위무토록 지시하였다.


이리하여 김사미는 안심하고 항복하였으나 병마사는 김사미를 즉시 죽여버리고 잔여 농민군의 소탕에 나섰다. 정부의 기만책에 분노한 농민군들은 운문산으로 숨어들었으며, 험악한 산세를 배경으로 하여 다시 완강하게 버티었다. 나라에서는 이들을 ‘운문적(雲門賊)’이라고 하였다.


운문산의 봄과 겨울이 열 번이나 바뀌도록 운문적이 된 농민들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운문산을 떠나는 자가 생기기는커녕 오히려 산으로 들어오는 유망민이 더욱 불어났다. 고려가요 「청산별곡」의 ‘청산에 살어리랏다’라는 처연한 가사가 이 시절 유망민들의 처지를 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게 불어난 운문군을 조직한 사람은 패좌(孛佐)였다. 운문산 농민군은 1203년 경주에서 신라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 반정부연합군의 일원으로 산에서 내려왔다. 그러나 신라부흥군의 대장 이비(利備)가 정부군 사령관의 꼬임으로 생포되고, 패좌는 측근 부장에게 살해되면서 운문산 농민군은 허망하게 무너지고 말았다.


일연스님의 『삼국유사』 집필처


1277년 72세의 일연스님이 운문사 주지로 임명된 것만은 알 수 있다. 이미 대선사의 승계를 제수받은 일연스님은 강화도 선월사, 영일 오어사, 비슬산 인홍사의 주지를 거쳐 충렬왕의 명으로 운문사에 주석하게 되었다. 5년간의 운문사 주지 시절 일연스님은 민족의 위대한 문화유산 『삼국유사』를 집필하셨다.


채헌이 지은 『운문사사적기』는 원응국사 이후의 역사는 기록하지 않고 다만 “4비(碑) 5갑(岬) 5탑(塔) 4굴(窟)이 있었는데 파괴되었다”고만 하였다. 5갑은 5갑사를 말하고, 4비는 신도비(神道碑)·사액비(賜額碑)·행적비(行跡碑)·위답노비비(位畓奴婢碑)이다.


그런데 원응국사의 신도비는 오늘날까지 건재하건만, 행적비는 틀림없이 일연선사 행적비이겠건만 어찌하여 그것이 파괴되었는지 안타깝기 짝이 없다. 전하는 말로는 임진왜란 때 파괴되었다고 하니 그 전란의 피해가 더욱 원망스럽다.


운문사의 희생과 비구니 승과대학


임진왜란으로 병화를 입은 운문사를 다시 일으켜세운 이는 설송(雪松)대사(1676~1750)였다. 지금 원응국사비 곁의 설송대사비를 보면 영조 30년(1754)에 세워진 것인데 글은 영의정 이천보(李天輔)가 짓고, 글씨는 형조판서 이정보(李鼎輔)가 쓰고, 전액(篆額)은 승정원 도승지 이익보(李益輔) 삼형제가 써서 이채롭다.


8·15해방이 되고 6·25동란을 지나 비구·대처가 대립하여 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난 직후인 1958년 운문사에는 비구니 전문강원이 개설되었다. 그리고 1977년 명성(明星)스님이 10대 주지로 취임하면서 운문사의 면모를 일신시키면서 승가대학으로 4년제 정규과정을 갖추고 학인스님 250여명이 항시 공부하고 수도하는 현대판 승과 도량으로 되었다.


학인스님은 사미니계를 받은 분으로 시험에 응시하여 들어오게 된다. 학제는 대학과 마찬가지로 4학년까지 되어 있지만 승가대학 내에서는 학년으로 부르지 않고 1학년은 치문(緇門)반, 2학년은 사집(四集)반, 3학년은 사교(四敎)반, 4학년은 대교(大敎)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학인스님들은 졸업할 무렵 비구니계를 받아 나가게 된다.

[학인스님들의 감자캐기 출처 본문]

장중한 종교음악, 새벽 예불


청도 운문사가 보존하고 있는 최고의 문화유산은 새벽예불이다. 운문사의 답사는 반드시 새벽예불을 관람하거나 참배하는 음악이 있는 기행으로 엮어져야 제 빛을 발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운문사답사는 미술사답사가 아니라 음악이 있는 기행이다.


그때나 지금이나 절집의 새벽예불이 보여주는 장엄함은 가톨릭의 「그레고리안 찬트」와 비견되는 것이다. 결코 다성음이 아니라 단성음으로 최소한의 변화를 구사할 따름이지만 바로 그로 인하여 웅장함을 지닐 수 있고, 변화의 가능성을 안으로 끌어넣을 수 있는 것이었다. 제인 해리슨(Jane Harrison)이 『고대예술과 제의』(Ancient Art and Ritual)에서 누누이 강조한바 제의적 성격에 나타나는 단순성의 의미인 것이다.


새벽예불은 도량석으로부터 시작된다. 예불 30분 전에 요사채와 법당 주위를 돌면서 목탁을 두드리며 독송하는 도량석은 새벽예불의 서주, 판소리로 치면 다스름에 해당한다.


그리고 250여명의 비구니들이 법당 안에 정연히 늘어서서 의식과 함께 행하는 새벽예불은 곧 무반주 여성합창이다. 도량석을 독송한 스님은 새벽예불에서 도창(導唱)이 되어, 합창이 일어나면 감추어지고 합창이 가라앉으면 다시 일어나는 변주의 핵심이 된다.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 지극한 마음으로 귀의한다는 ‘가사’가 일곱번 ‘후렴’처럼 반복되면서 새벽예불은 가사와 곡조에 일정한 규율을 지닌다. 합장과 절의 자세가 반복되기 때문에 엎드려 고개숙여 ‘지심귀명례’를 들을 때 소리는 낮게 내려앉고 다시 합장의 자세로 들어서면 고음(高音)이 된다.


새벽예불은 합창단과 예불의식이 분리된 것이 아니라 일체가 되어 있다는 점에서 의식과 음악의 미분리라는 원형질적 성격이 더 간직되어 있다. 신중단을 향하여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을 암송하는 것으로 예불은 끝나고 스님들은 5분간 참선의 묵상에 잠긴다.

[운문사 스님들의 하루 출처 본문]

운문사 벚나무 돌담길


운문사에는 미술사적 의의를 지닌 큰 볼거리가 없다. 오직 분위기 그것뿐이다. 그러나 운문사 솔밭의 행렬이 끝나고 낮은 기와돌담이 한쪽으로 길게 뻗은 벚꽃나무 가로수길로 접어들면 그것만으로도 운문사에 온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낮은 기와돌담길이 갖고 있는 위력을 곳곳에서 보았다. 담양 소쇄원에서, 부안 내소사에서, 순천 선암사에서, 그중에서도 운문사 돌담길은 담장 안쪽으로 노목의 벚나무가 들어차 있어서 벚나무 줄기의 굽은 곡선이 직선 기와지붕과 어울리는 조화의 묘를 한껏 드러내어 더욱 가슴 치는 감동의 산책길로 됐다.

[운문사의 돌기와 담장과 벚꽃 출처 본문]

운문사 스케치 리포트


학생들에게 운문사를 스케치하는 과제를 냈더니 압도적으로 많은 것은 운문사 입구의 솔숲이었고, 그 다음은 벚나무 돌담길이었다. 그런데 금당 앞 석등을 그린 학생은 내게 손을 들고 질문을 했다.

 

“샌님여! 대웅보전 앞 석등은 영 이상하데예. 한쌍으로 되었는데 헌것하고 새것하고 섞어서 헌 받침에 새 몸체, 새 받침에 헌 몸체를 붙여서 두개 다 짝짝이가 됐어예. 영 파이데예. 와 그리 됐능교?”


아마도 쌍탑의 배치와 맞춘다고 새것을 하나 더 세우면서 새것이 어색하지 않게 보이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운문사의 큰 실수였다. 본래 석등은 하나만 모시는 것이 불가의 불문율이다. 아무리 절마당이 커도 석등은 하나만 모시도록 되어 있다. 그것은 불문율이 아니라 『시등공덕경(施燈功德經)』에 “가난한 자가 참된 마음으로 바친 하나의 등은 부자가 바친 만개의 등보다도 존대한 공덕이 있다”는 구절에 근거를 둔 것이다.


한 미술사학과 학생은 큰 발견이나 한 양으로 이렇게 물어왔다.

“샌님여, 운문사 대웅보전에 모셔진 불상은 비로자나불 맞지예?”
“그렇지. 지권인(智拳印)을 하고 있으니 비로자나불이지.”

“그란데 와 대웅보전이라 캅니까? 대웅보전은 석가모니 모셔진다고 안했습니까?”

“그러니까 우습지. 조선후기 들어서면 중들이 계율보다 참선을 중시한다고 불가의 율법을 등한시했어요. 그 바람에 저렇게 잘못된 것이 많아요. 굳이 해석하자면 본래는 석가모니 집인데 비로자나불이 전세 살고 있는 것이라고나 해야 될까보다.”

[운문사 쌍탑 중 서탑과 금당 앞 석등 출처 본문]
[운문사의 명물 400년 수령의 처진 소나무 출처 본문]

연꽃이 피거든 남매지로 오시이소


이목소가 내려다보이는 극락교를 건너면 새로 지은 죽림헌(竹林軒)과 목우정(牧牛亭)이 나온다. 거기에서 운문산을 바라보면 그 산세가 그렇게 듬직스러울 수가 없다.


정자 아래에는 수련이 아주 곱게 피어 있다. 흰색, 분홍색, 빨강색, 노랑색. 그러나 수련의 건강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영남대 가정대 앞에 있는 거울못에서 옮겨왔는데 거기처럼 장하게 피질 못한다고 한다. 이유는 수렁이 너무 맑아서 그럴 것이다. 물이 더 깊이 고여야 하는데 흐르는 물살이 너무 빠르기 때문이다.


하루는 저녁에 남매지로 산보를 갔더니 연밥을 따는 할아버지가 일을 끝내고 옷을 털고 계셨다. 멀리서 볼 때의 남매지와는 달리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그야말로 수렁이었다.


“할아버지, 물이 이렇게 더러운데도 꽃이 피네요.”

“뭔 말을. 연꽃은 진흙창 썩은 물이 아니면 자라덜 않아. 그 찌꺼기가 썩어야 양분을 빨아먹고 쑥쑥 안 크낭가.”

“더러워야 더 잘 큰다고요?”

“하믄, 하지만 물이 썩는다고 꽃이 자라는 게 아니어. 저쪽 좀 봐. 물이 졸졸 흐르지. 저렇게 맑은 물이 살살 흘러야 그게 생명수가 되어 꽃이 자라는 거야. 수렁은 찌꺼기가 푹 썩고 한쪽에선 맑은 물이 살살 흘러야제.”


전주의 덕진공원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연꽃이 가장 장하게 피는 곳은 경산의 삼천지(三千池)이다. 7월 말 8월 초가 되면 3천평 크기 연못이 연잎과 연꽃으로 꽉 메워지는데, 영남대 공대 옆에 있어서 학생들이 공대못이라고 부르고, 바로 남매지에서 길 하나 건너에 있다.

 

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스님은 머릿속으로 그 연꽃 핀 광경을 상상하는 것 같았다. 나의 지기, 그분의 법명은 진광(眞光)이다. “스님, 연꽃이 피거든 남매지로 오시이소.”

[삼천지 연꽃 출처 본문]


<5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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