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미학
서산마애불
저 잔잔한 미소에 어린 뜻은
문화유산이 창조되고 사용되는 과정을 얘기하면서 자연스럽게 그 미학의 성격을 드러나게 하는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다. 논리적 사변의 전개가 아니라 삶의 체취로 다가서보는 것이다. 요컨대 문화유산의 생산과 소비자로서 인간의 이야기이다.
우리가 문화유산을 얘기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일이기 때문이다. 금세기 최고의 미술사가라 할 에르빈 파노프스키(Erwin Panofsky)는 「인문학의 실현으로서 미술사」라는 유명한 논문에서, "하나의 작품 속에는 인간 정신의 기록과 기쁨과 고뇌, 소망과 믿음이 서려 있는바 미술품을 통해 인간 정신의 발달과정을 탐구하면서 더 높은 고양을 구현하는 것이 미술사의 임무"라고 했다. 나는 그 정신을 답사기 세번째 책에 실어보고 싶었다.
더없이 평온한 내포 땅의 들판길
서산마애불을 답사하기 위해 서울에서 천안을 거쳐 예산으로 45번 국도가 훤하게 뚫렸을 때 비로소 우리는 답사 기분을 낼 수 있었다. 내포 땅을 가면서 차창 밖으로 펼쳐지는 들판을 바라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커다란 기쁨이다.
창밖에 스치는 풍광이라고 해봤자 낮은 산과 넓은 들을 지나는 평범한 들판길이다. 그러나 이 비산비야(非山非野)의 들판길은 찻길이 항시 언덕을 올라타고 높은 곳으로 나 있기 때문에 넓게 내려다보는 부감법의 시원한 조망이 제공된다. 평범한 들판길이 오히려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는 곳이 바로 여기다.
초가을 45번 국도변에는 코스모스가 만발해 있었다. 희고 붉게 핀 꽃대가 무리지어 끝없이 늘어서서 앞차가 일으킨 바람에 쓸려 눕다가도 우리가 다가서면 곧추 일어서서 환영의 도열이라도 하듯 꽃송이를 흔든다.
들판엔 추수를 기다리는 벼포기들이 문자 그대로 황금빛을 이루면서 초추(初秋)의 양광(陽光) 속에 해맑은 노랑의 순색을 발하고 있다. 벼포기의 초록빛과 벼이삭의 누런빛이 어우러져 덜 익은 논은 연둣빛이 되고 웃익은 논은 갈색이 되지만 엷은 바람에는 너나없이 단색의 노랑으로 변하며, 그 일렁이는 황금빛 물결 속에 먼 산의 단풍도 길가의 화사한 꽃들도 모두 묻혀버린다.
서산마애불의 ‘발견 아닌 발견’
서산마애불은 운산에서 고풍으로 꺾어들어가 고풍저수지가 끝나면서 시작되는 용현계곡, 속칭 강댕이골 계곡 깊숙한 곳 한쪽 벼랑 인바위〔印岩〕에 새겨져 있다. 하기야 불상이 새겨져 있어서 인바위라는 이름을 얻었겠건만 이제는 거꾸로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인바위에 마애불이 있다는 사실을 인근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문화재 관계자들은 몰랐다.
그래서 강댕이골 저 안쪽 보원사터에 있는 석조물들은 일찍부터 문화재로 지정되었지만 마애불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었다. 그러던 중 1959년 4월, 오랫동안 부여박물관장을 지낸 금세기의 마지막 백제인이라 할 연재(然齋) 홍사준(洪思俊, 1905~80) 선생이 보원사터로 유물 조사 온 길에 어느날 인바위 아래 골짜기에서 만난 한 나이 많은 나무꾼이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부처님이나 탑 같은 것은 못 봤지만유, 저 인바위에 가믄 환하게 웃는 산신령님이 한분 새겨져 있는디유, 양옆에 본마누라와 작은마누라도 있시유. 근데 작은마누라가 의자에 다리 꼬고 앉아서 손가락으로 볼따구를 찌르고 슬슬 웃으면서 용용 죽겠지 하고 놀리니까 본마누라가 짱돌을 쥐고 집어던질 채비를 하고 있시유.”
홍사준 선생은 이를 즉각 국보고적보존위원회(현 문화재위원회)에 보고하였으며 위원회에서는 그해 5월 26일 당시 국립박물관장 김재원(金載元) 박사와 황수영(黃壽永) 교수에게 현장조사를 의뢰하였고 조사단은 이 마애불이 백제시대의 뛰어난 불상인 것을 확인하였다. 이때부터 우리는 이 불상을 서산마애불 또는 서산마애삼존불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서산마애불의 발견 아닌 발견은 실로 위대한 발견이었다. 서산마애불의 등장으로 우리는 비로소 백제 불상의 진면목을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이전에 백제 불상에 대하여 말한 것은 모두 추론에 불과했다. 저 유명한 금동미륵반가상이나 일본 코오류우지(廣隆寺)의 목조반가사유상, 일본 호오류우지(法隆寺)의 백제관음 등이 백제계 불상일 것이라는 심증 속에서 논해져왔는데, 서산마애불은 이런 심증을 확실한 물증으로 전환시키는 계기로 되었다.
서산마애불은 미술사적으로 두가지 측면에서 크게 주목받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이 불상의 양식적 특징이자 매력의 포인트이기도 하다. 하나는 삼존불 형식이면서도 곁보살〔脥侍菩薩〕이 독특하게 배치된 점이며, 또 하나는 저 신비한 미소의 표현이다.
삼존불 형식이라고 하면 여래상을 가운데 두고 양옆에 보살상이 배치되는 것으로 엄격한 도상체계에 따르면 석가여래에는 문수와 보현보살, 아미타여래에는 관음과 세지보살, 약사여래에는 일광과 월광보살 등이 배치되게끔 되어 있다. 그러나 6세기 무렵에는 여래건 보살이건 그 존명(尊名)보다도 상징성이 강해서 그 보살이 무슨 보살인지 추정하기 힘든 경우가 많다.
그런데 서산마애불은 중국이나 일본, 고구려나 신라에서는 볼 수 없는 아주 독특한 구성으로 오른쪽에는 반가상의 보살, 왼쪽에는 보주(寶珠)를 받들고 있는 이른바 봉주(捧珠)보살이 선명하게 조각되어 있다. 반가상의 경우는 미륵보살로 보는 데 별 이론이 없지만 봉주보살에 대해서는 아직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했다.
‘백제의 미소’와 그 미소의 뜻
서산마애불의 또다른 특징이자 가장 큰 매력은 저 나무꾼도 감동한 환한 미소에 있다. 삼국시대 불상들을 보면 6세기부터 7세기 전반에 걸친 불상들에는 대개 미소가 나타나 있고, 이는 동시대 중국과 일본의 불상에서도 마찬가지다. 7세기 이후 불상에서는 이 미소가 사라지고 대신 절대자의 근엄성이 강조된다.
그런데 6,7세기 동북아시아 불상의 일반적인 특징은 사실성보다 상징성을 겨냥하여 입체감보다 평면감, 양감보다 정면관(正面觀)에 치중했다는 데 있다. 불상을 사방에서 둘러보는 것이 아니라 정면에 서서 시점의 이동 없이 본다는 전제하에 제작된 경향이 있다.
그러나 서산마애불을 비롯하여 백제의 불상들을 보면 오히려 인간미가 더욱 살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점에 착목하여 삼불(三佛) 김원용(金元龍) 선생은 서산마애불이 발견된 이듬해에 「한국 고미술의 미학」(『세대』 1960년 5월호)이라는 글을 통하여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기에 이른다.
"백제 불상의 얼굴은 현실적이며 실재하는 사람을 모델로 쓴 것 같은 느낌을 주고 있다. 그 미소 또한 현세적이다. (...) 그런 중 가장 백제적인 얼굴을 갖고 있는 것은 작년(1959)에 발견된 서산마애불이다. 거대한 화강암 위에 양각된 이 삼존불은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말할 수 없는 매력을 가진 인간미 넘치는 미소를 띠고 있다. 본존불의 둥글고 넓은 얼굴의 만족스런 미소는 마음좋은 친구가 옛 친구를 보고 기뻐하는 것 같고, 그 오른쪽 보살상의 미소도 형용할 수 없이 인간적이다. 나는 이러한 미소를 ‘백제의 미소’라고 부르기를 제창한다."
황수영 교수는 김재원 관장과 함께 이 마애불을 찾은 순간의 감격을 이렇게 표현했다. "애써 찾은 이 백제 삼존불 앞에 선 두 사람은 모두 말이 없었다. (…) 어떻게 이 충격을 표현해야 할지 몰랐던 것이다. 아마도 무언만이 이같은 순간에 보낼 최고의 웅변이며 감격의 표현이었는지도 모른다.(황수영 「백제 서산마애불」, 『박물관신문』 1974. 8. 1)"
서산마애불의 위치 설정
서산마애불의 발견 당시의 상황을 보면 주변의 자연경관과 흔연히 어울리면서 인공과 자연의 절묘한 조화를 보여준다. 그러나 서산마애불은 결코 과학적 계산을 고려하지 않은 자연스러움이 구사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기계적 계산을 넘어선 진짜 과학적 배려에서 위치가 설정되고 방향이 결정되었다.
서산마애불이 향하고 있는 방위는 동동남 30도. 동짓날 해뜨는 방향으로 그것은 일년의 시작을 의미하며, 일조량을 가장 폭넓게 받아들일 수 있는 방향이다. 경주 토함산 석굴암의 본존불이 향하고 있는 방향과 같다. 마애불 정면에는 가리개를 펴듯 산자락이 둘러쳐져 있다. 이는 바람이 정면으로 마애불을 때리는 일이 없도록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마애불이 새겨진 벼랑 위로는 마치 모자의 차양처럼 앞으로 불쑥 내민 큰 바위가 처마 역할을 하고 있어서 빗방울이 곧장 마애불에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는데, 마애불이 새겨진 면석 자체가 아래쪽으로 80도의 기울기를 갖고 있어서 더욱 효과적으로 빗방울을 피할 수 있다. 한마디로 광선을 최대한 받아들이면서 비바람을 직방으로 맞는 일이 없는 위치에 새긴 것이다.
불상조각 중에서 가장 만들기 힘든 것이 석불이다. 목불, 금동불, 소조불 등은 측량과 계산에 따라 깎고 빚어 만들면 되지만 석불은 한번 떨어져나가면 다시는 수정할 수 없다는 긴박한 조건에서 만들어진다.
석불 중에서도 화강암에 새기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한다. 대리석이나 납석 같은 것에 비할 때 화강암은 단단하여 여간 다루기 힘든 것이 아니란다. 또 같은 석불 중에서도 자연석에 그대로 조각하는 것이 제일 어렵다고 한다.
서산마애불이 기법상으로 가장 절묘하게 구사된 점은 뭐니뭐니 해도 야외 조각의 특성에 맞춰 얼굴은 높은 돋을새김으로 하고 몸체는 아래로 내려오면서 차츰 낮은 돋을새김으로 처리한 것이다. 이 점은 실로 놀라운 것이다.
서산마애불 보호각
서산마애불에 보호각이 준공된 것은 1965년 8월 10일인데 그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30년도 넘게 마애불의 관리인으로 근무하고 계신 분이 있다. 이름은 정장옥(鄭張玉), 수계받은 법명은 성원(性圓)인데 스님은 아니고 속인으로서 한평생을 이 마애불과 함께해왔다.
성원 아저씨는 마애불의 미소가 보호각으로 인해 보이지 않는 것이 안타까워 암막(暗幕)을 설치하고는 긴 장대에 백열등을 달아 태양의 방향대로 따라가며 비추면서 미소의 변화를 보여주는 장치를 해놓았다. * 지금은 통풍의 문제로 보호각은 철거되었다.
“이 마애불의 미소는 조석으로 다르고 계절에 따라 다르게 나타납니다. 아침에 보이는 미소는 밝은 가운데 평화로운 미소고, 저녁에 보이는 미소는 은은한 가운데 자비로운 미소입니다. 계절 중으로는 가을날의 미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어느 시인은 ‘강냉이가 익걸랑 함께 와 자셔도 좋소’라고 읊었지만 강냉이술이 붉어질 때 마애불의 미소는 더욱 신비하게 보입니다. 그래서 일년 중 가장 아름다운 미소는 가을해가 서산을 넘어간 어둔녘에 보이는 잔잔한 모습입니다.”
보원사터
서산마애불에서 용현계곡을 타고 조금만 안으로 들어가면 계곡은 갑자기 조용해지고 시야는 넓어지면서 제법 넓은 논밭이 분지를 이룬다. 거기가 서산마애불의 큰집 격인 보원사가 있던 자리다.
보원사는 백제 때 창건되어 통일신라와 고려왕조를 거치면서 계속 중창되어 한때는 법인국사(法印國師) 같은 큰스님이 주석한 곳이었다. 그러다 조선시대 어느 땐가 폐사되어 건물들은 모두 사라지고 민가와 논밭 차지가 되었고 오직 인재지변, 천재지변에도 견딜 수 있는 석조물들만이 남아 그 옛날의 자취와 영광을 말해주고 있다.
개울을 가운데 두고 앞쪽엔 절문과 승방이, 건너편엔 당탑(堂塔)과 승탑(僧塔)이 있었던 듯 개울 이쪽엔 당간지주와 돌물확〔石槽〕이, 개울 저쪽엔 오층석탑과 사리탑이 남아 있다.
오층석탑과 법인국사 보승탑
오층석탑은 고려시대 석탑 중 최고의 걸작으로 꼽힐 뿐만 아니라 감은사탑 같은 중후한 안정감과 정림사탑 같은 경쾌한 상승감이 동시에 살아난 명품이다. 기단부 위층에 새겨진 팔부중상의 조각들은 그 하나하나가 독립된 릴리프(relief)로서 손색이 없고 기단부 아래층에 새겨진 제각기 다른 동작의 열두 마리 사자상은 큰 볼거리다.
아래위로 튼실하게 짜여진 기단부 위의 오층 몸돌은 정림사탑에서 보여준 정연한 체감률도 일품이지만 마치 쟁반으로 떠받치듯, 두 손으로 공손히 올리듯 넓적한 굄돌을 하나 설정한 것이 이 탑의 유연한 멋을 자아내는 요체가 되었다. 이런 굄돌받침의 형식은 보령 성주사터의 삼층석탑에서 처음 나타난 것으로 통일신라시대와 고려시대에 걸쳐 이 지역의 석탑에만 나타나는 백제계 석탑의 ‘라벨’ 같은 것이다.
보원사터 승탑과 비는 고려초의 고승으로 광종 때 왕사(王師)를 거쳐 국사가 된 법인스님 탄문(坦文)의 사리탑과 비석으로, 탑명은 보승탑(寶乘塔)이며, 비문의 글은 김정언(金廷彦)이 짓고 글씨는 한윤(韓允)이 썼다.
일반적으로 고려초에 만들어진 고승의 사리탑들은 고달사터 원종대사 혜진탑에서 보이듯 크고 장대하게 만드는 것이 하나의 추세였는데 이 법인국사 보승탑은 소담하고 얌전한 자태를 취하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백제 미학의 여운을 느낄 수 있다.
금동여래입상과 철불
보원사터는 1968년에 발굴 정비되었는데 그때 백제시대 금동여래입상이 하나 발견되어 지금은 공주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그 부처님의 얼굴 역시 서산마애불과 마찬가지로 살이 복스럽게 올라 있어서 백제인의 미인관을 짐작게 한다.
그리고 여기서는 장대하고 수려한 철불(鐵佛) 한분도 발굴되었다. 그것은 국립중앙박물관 진열실에 옮겨져 지금도 우리나라 철불을 대표하고 있다. 이 철불을 두고 8세기 통일신라 제작으로 보는 학설(강우방姜友邦)과 10세기 고려초로 보는 학설(문명대)이 팽팽히 맞서 있는 것은 일반인들도 한번쯤 들어볼 가치가 있다.
8세기로 보는 근거는 완벽한 몸매의 균형, 유연한 옷주름의 표현, 풍만한 육체, 알맞게 살진 얼굴 그리고 근엄하면서도 너그러운 인상이 전형적인 8세기 불상의 모습으로 10세기에서는 그런 예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10세기로 보는 견해는 얼굴의 표정이 젊고, 체구가 당당하며, 입이 작고 귓불이 밖으로 휘어내린 것 등이 10세기 철불의 일반적 특징으로 8세기에는 없던 형식이기 때문이다.
"불교미술은 결코 이교도들의 신앙물이 아닙니다.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방식의 정직한 표정이고 사상의 산물이지요. 필요하면 얼마든지 갖다 쓰는 것이지요. 다만 맹목적 모방이냐, 주체적 수용을 통한 재창조였냐가 중요한 것이지요. 백제의 미학은 그래서 빛나는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 고대국가의 세련된 고전미를 창출해냈거든요. 인도중국일본에선 볼 수 없는 화강암의 건축과 조각, 즉 석탑과 석불이 그 대표적 예인데 우리는 그 중 석불의 아름다움을 답사한 것입니다. 저 잔잔한 '백제의 미소'에는 그런 뜻이 서려 있는 것입니다." (본문 48쪽)
익산 미륵사터
이루어지지 않은 왕도의 꿈
호남의 첫마을 여산
익산 미륵사터를 보고 또 보아도 물리지 않는 것을 보면 그곳이 답사의 명소이긴 명소인가보다. 그러나 미륵사터를 스치듯 들러가는 곳으로만 삼았다는 것은 그 존대한 유적에 참으로 큰 실례를 범한 것이었다. 그곳은 역사적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은 왕도(王都)의 꿈이 서린 곳이며, 한국미술사의 가장 우뚝한 봉우리인 석탑의 시원양식이 지금도 그곳 폐허 속에서 금자탑보다도 더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익산 미륵사터를 찾아가는 답사의 첫 관문은 여산(礪山)이다. 지금은 사정이 조금 달라졌지만 호남고속도로에 있는 첫 휴게소이자 최대 규모이며 최고의 장사목이 된 곳이 바로 여산휴게소이다.
여산은 조선시대에 역원이었던 곳으로 전라도 땅으로 들어가는 첫 마을이었으니 여산휴게소는 여산 땅의 팔자소관으로 생긴 것인지도 모르겠다. 판소리 「춘향가」 중에서 이도령이 암행어사가 되어 남원 땅으로 출두하면서 역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들은 전라도 초읍(初邑) 여산에 가서 기다려라!” 했다. 거기는 지금의 익산시 여산면 여산리 주막거리이다.
가람 생가
휴게소 안쪽 원수리(源水里) 참실골〔眞絲洞〕에는 가람(嘉藍) 이병기(李秉岐, 1891~1968) 선생의 생가가 있다. 가람 선생은 여기에서 태어나 한학을 공부하다가 신학문을 익혀 한성사범학교를 마친 뒤 여산공립보통학교를 비롯하여 해방 후 서울대학교까지 줄곧 교편을 잡으며 국문학 연구에 전념하신 선비로 시조의 전통을 혁신하면서 우리말을 아름답게 갈고닦는 데 누구보다 큰 공을 세웠다.
가람 선생은 이태준(李泰俊), 정지용(鄭芝溶), 김기림(金起林) 같은 당대의 문사를 배출한 선생으로 이름높지만 그에 못지않은 것이 당신의 문장이고 시조였다. 여기에 가람의 시비를 하나 세웠으면 하는 희망이다. * 지금은 생가 앞에 동상과 시비가 세워져 있다.
가람 이병기는 관립한성사범학교 재학 중이던 1912년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으로부터 조선어문법을 배우고, 졸업 후 국어국문학 및 국사에 관한 문헌을 수집하는 한편, 시조를 중심으로 시가문학을 연구, 창작하였다. 당시 수집한 책들은 나중에 서울대학교에 기증하여 '가람문고'가 설치되는 계기가 된다.
1921년 12월 서울 휘문의숙에서 김윤경·최현배·최두선 등과 함께 조선어연구회를 창립하고 간사가 되었다. 1930년 조선어철자법 제정위원이 되었고, 연희전문학교·보성전문학교의 강사를 겸하면서 조선문학을 강의하다가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8.15 광복 후 1946년부터 서울대학교 교수 및 각 대학 강사로 재직했고, 1990년 독립운동 공적을 인정 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평생 시조 혁신을 위해 노력하였고, 수필도 많이 남겼다. 그의 시조를 이수인이 가곡하여 노래로 만든 별이 있는데 교과서에 실리는 등 인기가 있는 가곡이다. 1909년 4월 13일부터 1966년 6월 20일까지 무려 57년 동안 일기를 쓴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루어지지 않은 왕도, 금마
여산휴게소에서 불과 6킬로미터 못미처 익산 인터체인지가 있는데 여기서 익산 쪽으로 꺾어들면 비로소 우리는 정겨운 전라도 땅으로 들어선 맛을 만끽하게 된다. 언덕을 넘어 내리막길을 달리면 차는 반듯한 네거리 신호등 앞에 서게 된다. 곧장 가면 익산, 왼쪽은 왕궁리, 오른쪽은 금마읍내와 미륵사터로 빠지는 길이 된다.
금마 일대에는 참으로 많은 유적이 밀집해 있다. 미륵사터, 왕궁평(王宮坪) 오층석탑, 고도리(古都里) 석인상, 쌍릉, 기준산성(箕準山城), 사자사(師子寺)터, 연동리 석불좌상, 오금산성, 태봉사 삼존석불…… 익산군 시절에 발간한 향토지 『미륵산의 정기』를 보면 모두 82군데의 유적지 해설이 들어 있을 정도다.
금마는 몇차례 왕도에 준하는 영광의 도시로 역사 속에서 명멸하였다. 마한(馬韓)의 월지국(月支國, 또는 目支國, 箕準의 마한국), 백제 무왕의 별궁, 후백제 견훤의 왕궁, 고구려 유민인 안승의 보덕국 등 어느 하나 오랜 경륜을 펴지 못했으나 금마 땅 고도리 왕궁평 들판과 미륵산에는 미완의 왕도가 남긴 유적들이 폐허 속에 즐비하게 널려 있는 것이다.
금마는 마한의 중심지였다. 삼한시대에 마한은 54개의 소국으로 큰 나라는 1만여 호요, 작은 나라는 수천 호로 총 10여만 호인데, 총수인 진왕(辰王)은 월지국을 다스렸다고 『후한서』와 『삼국지 위지』가 증언하고 있다. 다산 정약용이 『아방강역고(我邦彊域考)』에서 “마한은 지금의 익산군으로, 금마는 마한 전체 총왕의 도읍이다”라고 말한바, 금마가 마한의 중심지였음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마한은 고대국가로 성장하지 못하고 이내 멸망의 길로 들어섰다. 북쪽에서 백제가 강성하게 일어나면서 온조왕 26년(AD 8년)에 마한을 함락시켜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래서 금마 땅에는 마한보다 백제의 자취가 더 진하게 남게 되었다.
무왕과 「서동요」
백제왕조의 치하에서 금마는 김제평야의 경제적 부와 금강의 수로 때문에 중요한 몫을 담당했을 것이 분명하고, 수도가 점점 남하하여 성왕(聖王)이 부여로 천도한(538) 이후는 더욱 비중이 커졌음은 기록이 없어도 알 만하다. 그러다가 금마가 다시 역사상 부상하는 것은 무왕(武王)의 탄생부터이다. 무왕의 탄생과 서동요 전설에 관해 『삼국유사』에 나오는 관련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30대 무왕(武王)의 이름은 장(璋)이다. 그 어머니가 과부가 되어 서울 남쪽 못 가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는데 못의 용(龍)과 관계하여* [장을] 낳고 어릴 때 이름을 서동(薯童)이라고 하였다. 재기와 도량이 커서 헤아리기 어려웠다. 항상 마를 캐어 팔아서 생업(生業)을 삼았으므로 나라 사람들이 그 때문에 서동이라고 이름하였다. * 일연스님은 “『삼국사기』에서는 법왕의 아들이라고 했다.“는 주석을 붙여 놓았다.
第三十武王名璋. 母寡居築室扵京師南池邊, 池龍文校勘通而生小名薯童. 噐量難測. 常掘薯蕷賣為活業. 國人因以爲名.
신라 진평왕(眞平王)의 셋째공주 선화(善花)혹은 선화(善化)가 아름답기 짝이 없다는 말을 듣고 머리를 깎고 [신라의] 서울로 갔다. 마를 동네 아이들에게 먹이니 아이들이 친해져 그를 따르게 되었다. 이에 노래를 지어 여러 아이들을 꾀어서 부르게 하니 그것은 이러하다.
“선화공주님은, 남몰래 사귀어 두고, 서동방을 밤에 몰래 안고 간다.”
동요가 서울에 가득 퍼져서 대궐 안에까지 들리자 백관(百官)들이 임금에게 극력 간하여 공주를 먼 곳으로 귀양보내게 했다.
聞新羅真平王第三公主善花 (一作善化) 羙艶無雙,剃髮來京師。以薯蕷餉閭里羣童,羣童親附之。乃作謡誘羣童而唱之云。
"善花公主主隠,他密只嫁良置古,薯童房乙夜矣卵[1]乙抱遣去如。"
童謡滿京逹扵宫禁,百官極諌竄流公主扵逺方。
장차 떠나려 하는 데 왕후(王后)는 순금 한 말을 주어 노자로 쓰게 했다. 공주가 장차 귀양지에 도착하려는데 서동이 도중에 나와 절하면서 장차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공주는 비록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알지 못했지만 우연히 믿고 좋아했다. 이로 말미암아 서동을 따라가면서 몰래 정을 통하였다. 그런 뒤에야 서동의 이름을 알았고, 동요의 영험을 믿었다.”
사람들은 백제와 신라 양국이 전쟁을 치르는 적대국인데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냐 등 이 전설을 황당한 얘기로 치부하곤 한다. 그러나 그가 법왕의 서얼이라는 것도 조선시대의 서출 개념이 아니라 오히려 귀인(貴人)의 소출이라는 뜻이 되는 것이며, 서동이 선화공주를 얻어 스스로 귀인임을 내세운 것은 그의 뛰어난 정치력으로 해석될 사항이고, 끝내는 인심을 얻어 왕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의 탁월한 정권창출 능력으로 보아야 한다.
아무튼 무왕은 금마에서 태어나 금마에서 자라고 금마를 배경으로 왕이 됐으며, 금마는 백제의 지정학상 중요한 위치를 갖게 됐으니 그것은 조선왕조 정조대왕 시절 수원이 갖는 위치와 비슷한 것이었다.
미륵사터
고산자(古山子) 김정호(金正浩)의 『대동지지』 「익산군」조에 “백제 때 금마지(今麻只)는 무왕 때 축성하고 이곳에 별도(別都)를 두었으니 지금의 금마저(金馬渚)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별궁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별궁은 고도리 왕궁평으로 추정된다.
정조대왕이 노론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수원천도를 구상하고 수원성을 쌓았듯이, 무왕은 부여 토착세력을 꺾을 요량으로 금마천도를 생각하였고 그 전초작업으로 탄생한 것이 왕궁리의 별궁과 용화산 미륵사였다.
어느 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에 가려고 용화산 밑의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 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올렸다. 부인이 왕에게 말하기를 “모름지기 이곳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그것을 허락했다. 지명법사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비스러운 힘으로 하룻밤 사이에 산을 무너뜨려 못을 메우고 평지를 만들었다. 이에 미륵삼회(彌勒三會)의 모습을 본따 전(殿)과 탑(塔)과 낭무(廊廡)를 각각 세 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彌勒寺)(국사(國史)에서는 왕흥사(王興寺)라고 했다)라고 하였다. 진평왕이 여러 공인(工人)들을 보내서 이를 도왔는데 그 절은 지금도 남아 있다.
이후 미륵사터 발굴 결과 이 얘기는 사실로 증명됐다. 미륵사가 늪지에 세워져 서쪽 금당은 경주 감은사터에서 본 바와 같이 높은 주춧돌로 받쳐 있고, 법당, 탑, 회랑이 각각 세 곳에 세워져 있음을 알게 됐다.
서탑 사리함과 사리봉안기
2009년 서탑을 복원하기 위하여 해체하던 중 기단부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10년에 걸친 미륵사 발굴 때는 본원의 목탑과 동원의 석탑 자리에서는 아무런 사리장치를 발견하지 못하였는데 서탑을 복원하기 위하여 탑을 해체하던 중 석탑 1층 중심에 몸돌의 무게를 떠받치는 기능을 하는 심주석에서 사리공을 발견한 것이다.
사리공 안에는 금사리호와 총 194자의 금사리봉안기(15.5×10.5cm) 등 총 400여 점이 출토되었다. 이들은 사리함 봉안식 때 탑의 안전과 개인의 복을 기원하는 공양품으로 넣은 것으로 생각된다. 금사리호의 기형은 둥근 몸체에 긴 목과 넓은 입을 갖고 있고, 둥글납작한 뚜껑 위에 보주형 꼭지가 달려 있다. 사리호에는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꽃무늬가 새겨져 있다. 백제 금속공예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명작이다.
그리고 얇은 금판(15.5×10.5cm)의 앞뒷면에 새긴 금사리봉안기에는 총 194자의 발원문이 적혀 있었다. 그런데 그 내용은 전혀 예상 밖이었다.
우리 백제 왕후께서는 좌평(佐平)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따님으로 지극히 오랜 세월[曠劫]에 선인(善因)을 심어 금생에 뛰어난 과보[勝報]를 받아 삼라만상을 어루만져 기르시고 불교[三寶]의 동량(棟梁)이 되셨기에 능히 정재(淨財)를 희사하여 가람(伽藍)을 세우시고, 기해년(己亥年) 정월 29일에 사리(舍利)를 받들어 맞이했다.
기해년은 무왕 40년(639)이 되고 무왕의 왕후는 백제 귀족인 사택적덕의 딸인 셈이다. 기록과 유물 사이에 차이가 있을 경우 우리는 유물에 따라야 한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서동과 선화공주의 설화를 무조건 허구로 돌리기도 힘들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적으로 판단하여 현재로서 해석할 수 있는 것은, 창건 당시는 선화공주의 발원으로 이루어지고 선화공주가 사망하여 새로 맞이했거나 또는 후비인 왕후 사택적덕의 딸이 서탑에 발원문을 봉안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미륵사의 3탑 3금당(金堂) 3회랑(廻廊) 가람배치는 삼국시대에 다른 예가 없는 특이한 구조다. 본래 백제의 사찰은 1탑 1금당 식이라고 해서 남북 일직선 축선상에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 승방으로 이어지고 중문과 강당을 미음자로 잇는 회랑만으로 끝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가람배치는 모두 일곱가지 집으로 구성됐다고 해서 칠당가람이라고 하는데 부여의 군수리 폐사지, 정림사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백제 멸망 뒤 미륵사의 상황에 대하여는 단편적인 기록 몇몇만이 종잡을 수 없이 전해지고 있을 뿐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성덕왕조를 보면 “금마군 미륵사에 지진(또는 뇌진)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조선왕조 영조 때 이긍익(李肯翊)의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성덕왕 29년(730) 6월에 뇌진이 쳐서 서쪽이 반쯤 무너졌는데 그뒤 누차 무너졌으나 더이상 붕괴되지 않고 중간에 옛 모습대로 고쳐놓았다”고 한다.
미륵사터 구층석탑
미륵사가 폐사지가 되어 목조건축은 모두 불타고 무너져버리게 되었을 때도 석탑만은 건재할 수 있었다. 발굴조사에 의하면 동탑 서탑이 똑같은 구조였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동탑은 완전히 도괴되어 낱낱 석탑 부재(部材)들이 깡그리 없어지고, 서탑은 6층까지만 간신히 남아 그 형상의 뼈대만 보여주게 되었다.
그러다가 1910년, 일제시대 초 서탑의 서쪽이 크게 무너져내리자 일제 총독부의 문화재조사를 전담했던 세끼노 타다시(關野貞)가 거대한 시멘트 벽체를 설치함으로써 더이상 무너지는 것을 막았다. 그것은 토함산 석불사의 석굴을 보수한다고 바른 것과 똑같은 무지막지한 시멘트였다.
미륵사탑은 석탑이지만 목조건축을 충실히 반영한 석탑이므로 목조건축의 아름다움을 여기에 빠짐없이 구현하였다. 압도하는 스케일의 중량감, 적당한 비례의 배흘림기둥, 정연한 체감률로 안정감을 주는 중층구조…… 미륵사탑의 세부적인 아름다움의 백미는 추녀의 묘사에 있다. 거의 직선으로 그어가던 반듯한 처마가 추녀에 이르러서는 살포시 반전하는 그 맵시가 여간 고운 것이 아니다.
미륵사탑 앞에는 또 이 명작에 걸맞은 에필로그 같기도 하고 특별 보너스같이 망외의 기쁨을 주는 유물이 하나 있다. 그것은 석탑 한쪽 모서리에 세워져 있는 석인상이다. 영락없이 제주도 돌하르방이나 전라도 돌장승 같은 포즈인데 아닌게아니라 이 석인상은 그런 장승의 원조이다.
복원된 동탑
그러나 1993년 봄, 미륵사터에 비극의 막이 올랐다. 미륵사터 발굴조사작업이 ‘동탑 복원작업’으로 이어져 5년간의 대역사 끝에 동쪽 석탑이 완공된 것이다. 총예산이 몇십억원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복원된 거대한 동탑은 보기에도 끔찍스러운 흉물이 되고 말았다. 애초에 복원이라는 발상 자체부터 잘못된 것이다.
한마디로 복원된 탑은 자연석이 아니라 인조석으로 만든 탑처럼 보인다. 돌을 정으로 쪼은 것과 기계로 깎은 것의 차이인 것이다. 그리고 낱낱 부재를 이어맞춘다는 것은 돌 하나하나의 성격이 살아있는 연결이어야 하는데 복원된 것은 마치 긴 돌이 없어서 그랬다는 듯이 낱장 낱장의 성격을 죽여버리니까 이같이 박제된 시체처럼 된 것이다.
그런 형식상의 차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아마도 정신에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 시대는 공사계획과 견적에 따라 석조물을 복원한다는 생각에서 한 것임에 반하여 백제사람은 절대자를 모신다는 종교 하는 마음으로 했다는 사실이 이런 결과를 낳은 것이리라.
서쪽 별원의 금당 자리에는 늪지에서 흔히 보이듯 긴 석주로 마루받침을 삼았는데, 본원 목탑 자리 앞에는 석등받침으로 사용했던 팔판 연화문이 귀꽃을 살포시 세우고 어여쁜 매무새로 햇살에 반짝이고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석등받침돌이다. 한쌍의 당간지주는 통일신라시대 때 만든 것인데 그 고전적 기품이 미륵사탑과 흔연히 어울린다.
회상의 백제행
서울 -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
서울의 잠실, 석촌동, 올림픽공원과 아시아선수촌아파트를 잇는 길을 백제고분로라고 이름붙였는데, 그 길 한복판에 나라에서 공식적으로 이름붙인 ‘백제초기 적석총(積石塚)’, 내가 사적(私的)으로 부르는 ‘돌마리 옛 무덤’이 있다.
석촌동 일대는 백제시대엔 지배층의 공동묘역으로 흙무덤과 함께 적석총이라고 불리는 돌무지무덤(북한 용어로는 돌각담무덤)이 떼를 이룬 것이 특색인데, 세월이 흐르면서 흙무덤들은 다 농지로 변해버렸고 돌무지가 가득한 들판에 민가가 모여 ‘돌마을 또는 돌마리’라고 불렸었다. 그런데 일제 때 지적도를 만들면서 한자어로 ‘석촌동’이라고 표기하게 된 것이다.
100여 호가 오순도순 살아가는 한강변의 안마을로 황포돛대가 머물던 나루터이자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내려와 무릎 꿇고 항복했던 치욕의 장소인 삼전도(三田渡)가 여기이며 송파 산대놀이의 고장이기도 하다.
그 많던 돌마리 옛 무덤들은 다 없어지고 오직 8기의 무덤이 남아 있었는데 백제고분로라는 새 길을 설계하면서 하필이면 마지막 남은 백제시대 돌무지무덤 제3호분과 제4호분 사이를 지나가게끔 하는 바람에 고분지역은 양쪽으로 갈리게 되었고, 무덤은 귀퉁이가 잘려나가며 공사장에서는 인골이 교란되기에 이르렀다.
지금 고분공원에 온전히 복원되어 있는 고분은 4기. 발굴된 뒤 바닥 평면을 드러내놓은 상태에 있는 것이 4기다. 4기의 고분 중 흙무덤은 하나고 나머지 3기가 모두 돌무지무덤인데 그것도 기단식이라고 해서 네모뿔로 올라간 것은 남한 땅에선 여기밖에 없어 이것이 이 고분공원의 하이라이트다.
근초고왕의 무덤을 바라보면서
석촌동 제3호분, 계단식 돌무지무덤은 명물이다. 이 계단식 돌무지무덤은 본래 고구려 무덤양식으로, 장수왕의 무덤으로도 추정되는 장군무덤〔將軍塚〕은 모두 일곱 단으로 구성되었는데 한 변이 30미터, 높이가 11.28미터에 이르는 장대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여기 있는 석촌동 제3호분은 기단의 폭이 50미터나 되니 장군무덤만 못할 것이 없는데 다만 높이가 3단 이상을 오르지 못한 채 3미터 정도에 머물러 위용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안정된 자태에 기품이 있고 전아(典雅)한 멋이 풍긴다.
『삼국사기』에 보면 개로왕조에 “욱리하(郁里河, 한강)에서 큰 돌을 주워 곽을 만들고 아버지의 뼈를 묻었다”고 하였으니 왕족의 무덤임을 의심하지 않는데, 여기에서 나온 유물들은 대개 4세기 것이므로 고고학자들은 백제 영토를 최대로 확장했던 근초고왕(375년 사망)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다.
몽촌토성
올림픽공원 한쪽에 치우쳐 있는 몽촌토성은 백제의 역사만큼이나 무관심 속에 팽개쳐져 있는 아름다운 토성이다. 몽촌토성은 오래전부터 백제시대의 토성으로 전해져왔을 뿐, 그 정확한 내용이 알려진 바도 없고 이미 토성으로서 기능을 상실한 지도 오래되어 그 옛날 성안엔 민가들이 모여 촌락을 이루고 성벽과 언덕에는 여기저기 무덤들이 들어선 야산으로 변해 있었다.
1984년 6월부터 몽촌토성발굴조사단이 구성되고 서울대 박물관이 이 일을 맡게 되었다. 3년간에 걸친 발굴조사는 뜻밖에 많은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고, 몽촌토성은 곧 하남 위례성이라는 유력한 학설까지 낳게 되었다.
발굴·복원한 결과 몽촌토성의 총면적은 6만 7천 평. 성의 모양새는 자연구릉을 최대한 이용하여 불규칙하지만 대체로 타원형 또는 마름모꼴 형상으로 남북 최장 730미터, 동서 최장 540미터이며 성벽의 총길이는 약 2.3킬로미터인 것으로 드러났다.
1995년, 서울시는 ‘정도(定都) 600년’ 행사를 거창하게 치렀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왕조의 한양 도읍을 말할 뿐, 백제의 수도 위례성(慰禮城)의 존재는 완전히 무시한 것이었다.
온조가 고구려계의 유민집단을 이끌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한강 북쪽에 먼저 자리잡은 것을 『삼국사기』에서는 기원전 19년으로 기록하였으니 2천년도 더 된 때의 일이고, 이후 한강 남쪽으로 궁실을 지어 옮긴 것이 기원전 5년이라고 했으니 1996년은 ‘하남 위례성 정도 2천년’이 되는 기념비적인 해인 것이다.
몽촌토성을 발굴하면서 많은 유물들이 수습되었다. 백제시대 질그릇과 기와편이 많이 출토되었고, 3세기 중국 서진(西晋)시대의 회유도기(灰釉陶器) 파편도 발견되어 이 토성이 3세기 이전에 축조되었다는 사실이 확인되었고, 많은 집자리와 지하저장 구덩이까지 조사되었다.
그 모든 것을 감안해서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들 중에 일부는 몽촌토성을 곧 하남 위례성이거나 위례성을 보위하는 군사시설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근래에는 풍납토성의 본격적인 발굴결과 풍납토성은 위례성, 몽촌토성은 군사시설로 인식하고 있다).
북2문으로 들어가 해자를 옆에 끼고 참나무가 고목으로 자란 토성의 옆길을 걷다보면 홀연히 목책(木柵)을 만나게 되는데, 다산 정약용이 『강역고(彊域考)』에서 말한 위례성의 목책 설명과 일치한다.
위례(慰禮)라고 하는 것은 방언으로 대개 사방을 둘러싼 큰 울타리를 뜻하는 것으로 위리(圍籬)라고 하는데 위리와 위례가 소리가 비슷해서 생긴 것이다. 목책을 땅에 세워 큰 울타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고로 위례라고 불렀다.
솔밭 아래쪽 무덤의 주인공은 조선 숙종 때 우의정을 지낸 충헌공(忠憲公) 김구(金構, 1649~1704)다. 무덤 앞에는 아주 듬직한 신도비(神道碑)가 있어서 노론의 골수였던 청풍 김씨의 세력을 실감하게 되는데, 글씨는 서명균(徐命均)이 썼고 전서(篆書)는 유척기(兪拓基)인지라 글씨를 아는 사람들은 퍽 좋아할 비석이다.
그런 중 내가 이 무덤에 특별히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무덤에 바짝 붙어 서 있는 까만 비석 때문인데, 그 뒷면을 읽어보니 비석 전면의 큰 글씨는 ‘석봉한호집자(石峰韓濩集字)’라고 씌어 있는 것이다. 무덤 앞에는 한쌍의 양(숫양과 암양) 조각이 놓여 있다.
백제의 아름다움 혹은 백제의 미학에 대해 김부식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시조 온조왕 15년, 기원전 4년 항목에서 가장 정확하고 멋있게 핵심을 잡아 표현했다. “춘정월(春正月)에 궁실을 새로 지었는데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고 했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되 사치스럽지 않았다’라는 뜻이다.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를 통해 검이불루 화이불치의 미학을 읽어낸다는 것은 곧 하나의 유물은 하나의 명저만큼이나 위대한 정신의 소산임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말하지 않는 것과의 대화…… 그것이 미술사이다.”
공주와 부여
공주 - 정지산 산마루에 누대를 세우고
공주는 백제의 두번째 서울, 당시 이름으로 웅진(熊津), 곰나루였다. 고구려의 한 갈래로 남쪽으로 내려온 백제인이 처음 정착한 곳은 한강 남쪽, 이른바 하남의 위례성이었는데 이제 다시 고구려의 침공을 피해 급히 남쪽으로 내려가 자리잡은 것이 금강 남쪽의 공주였다. 그래서 고구려의 평양, 고려의 개성, 조선의 한양이 모두 강북에 위치함에 비해 백제의 도읍은 위례성이건 웅진이건 강남에 있었다.
옛사람들이 금강이 휘감고 도는 공산성(公山城)의 모습을 보면서 대동강이 부벽루를 끼고 흐르는 풍광과 닮은꼴이라고 하며 양자의 친연성을 새삼 말하곤 했지만, 평양은 대동강 강북에 있고 공주는 금강 강남에 있다는 사실은 보통 차이가 아닌 것이다.
금강은 전주 무악산에서 발원하여 북쪽을 향하여 출발한다. 이것이 영동과 대청호를 지나 조치원에 와서는 방향을 급히 서쪽으로 틀고 또 공주를 지나면 다시 남쪽으로 향하여 부여, 강경을 지나면 비로소 서해바다를 바라보며 장항, 군산 쪽으로 흘러나가는데, 알뜰살뜰 저축하듯 냇물을 모아 마침내 공주에 와서 강다운 강이 되니 공주는 한 나라의 도읍이 될 만하였고, 금강은 공주와 함께 역사의 전면에 부상하게 되었다.
원래의 공주는 금강 남쪽 공산성 주변이다. 강변에 바짝 붙어 금강을 내려다보며 버티듯 뻗어 있는 공산성을 바라보면서 공주대교를 건널 때 우리는 공주에 왔음을 실감하게 된다.
공산성은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공으로 개로왕마저 피살되자 문주왕이 급히 내려온 뒤에 자리잡은 금강변 천혜의 자연산성으로 왕궁이 세워지기도 했다. 당시의 이름은 웅진성이었고, 토성(土城)으로 생각되며 지금의 석성(石城)은 임란 이후 산성을 증축할 때 세워진 것이다.
웅진은 문주왕 원년(475)에서 성왕 16년(538)까지 63년 이어온 웅진백제 시절에 동성왕과 무령왕이라는 걸출한 임금이 나와 백제의 개방적이면서 세련된 문화의 기틀을 잡았던 곳이다. ‘삼국사기’ 동성왕 22년(500)조에 “왕국의 동쪽에 높이가 5척이나 되는 임류각*이란 누각을 세우고 또 연못을 파 기이한 새를 길렀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 현재 임류각은 1993년에 2층으로 복원한 것이다.
발길을 금강변으로 돌려 산성을 거닐면서 답사 아닌 산책을 느긋이 즐기다보면 공산성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가시적인 백제 유적인 암문터의 연지를 만나게 된다. 가지런한 석축을 여러 단 쌓아 만든 네모난 이 연지는 견실하면서도 부드러운 느낌을 주어 역시 백제의 아름다움이란 것이 이런 것이구나라고 가벼운 찬사를 보내게 된다.
연지 위에는 만하정이라는 누각이 있어 거기에 오르면 한쪽으로는 금강, 한쪽으로는 연지를 번갈아 바라보며 푸근히 쉬어갈 수 있다. 그리고 공산성의 가장 높은 곳에 우뚝 서 있는 공북루까지 금강을 따라 성벽을 거니는 것으로 공산성의 산책 아닌 답사를 마치게 된다.
공북루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공주대교를 사이에 두고 바로 앞 강변에 높은 언덕이 우뚝 서 있는데 이 산이 무령왕릉의 송산과 잇닿아 있는 정지산(艇止山)이다. 공주의 지형은 마치 큰 배가 정박하고 있는 형상인데 그 닻을 내린 곳에 해당한다고 해서 배 정(艇)자, 머무를 지(止)자 정지산이다.
동쪽으로 눈을 돌리면 멀리 구석기시대 유적지인 석장리(石壯里)까지 내다보이며 계룡산 산자락이 검푸른 잔산(殘山)으로 그림처럼 걸려 있다. 정자의 참 멋은 거기에 앉아 풍광을 즐기는 것인데 예로부터 정자를 세우는 것에는 단지 한가히 구경하는 것을 넘어선 큰 뜻이 있었다.
대통사터 당간지주
대통사는 『삼국유사』에 전하기를 성왕 7년(529)에 양나라 황제를 위하여 지은 절이라고 한다. 이는 양나라와의 친선관계를 그렇게 나타낸 것이니, 요즘으로 치면 한미우호동맹을 상징하는 교회당 같은 것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다. 기록상으로 명확한 이 대통사는 한동안 어디에 있었는지 알지 못하였다.
그러다 일제강점기에 공주시내 반죽동에 통일신라시대 당간지주(보물 150호)와 백제시대의 아름다운 석조(石槽)가 있어 이곳을 발굴한 결과 ‘대통’이라는 명문이 새겨 있는 기와편이 수습되어 여기가 대통사의 절터인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송산리 고분군과 무령왕릉의 발견
아무리 공주가 남루한 역사도시로 전락했다고 했도 당당히 웅진백제의 도읍이었음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송산리 고분공원에 있는 무령왕릉(武寧王陵)이 있기 때문이다. 공산성과 마주보는 산자락에 위치하여 걸어서 불과 10분 거리다.
일제시대에 도굴이 횡행하면서 제1호분부터 5호분까지 모조리 도굴되면서 송산리 고분군은 고고학적으로 부각되었다. 이 다섯 무덤은 모두 돌방흙무덤이었는데 1927년 무렵 파헤쳐진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1932년에는 제5호분 옆, 무령왕릉 앞에 있는 제6호분을 카루베 지온(輕部慈恩)이라는 공주고보 교사가 총독부와 교섭해서 발굴했다.
송산리 제6호분이야말로 임자를 잘못 만나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받고 말았다. 무령왕릉이 출현하기 이전까지 백제 왕릉의 간판스타는 단연코 이 6호분이었다. 유일한 벽돌무덤인데다가 사신도까지 그려져 있어서 백제문화가 중국, 고구려와 교류한 구체적인 물증까지 제공해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무덤을 발굴한 카루베는 출토유물을 고스란히 자기가 챙기고 무덤 바닥을 빗자루로 쓸어 말끔히 치운 다음 총독부에는 이미 도굴된 것으로 보고하였다. 그는 1969년, 죽기 1년 전에 송산리 6호분 사진자료를 그의 공주고보 제자인 이성철씨(전 문공부 문화국장)에게 보냈는데 일련번호 26번까지 붙어 있는 사진 중 제10번, 아마도 유물 노출상태의 사진만은 빼놓고 보내왔다.(정재훈 「공주 송산리 제6호분에 대하여」, 『문화재』 제20호, 1987)
결국 우리는 아직껏 그 유물의 행방도 사진의 행방도 모르는 상태로 안타까움만 더할 뿐이다. 학자들은 이 6호분을 무령왕 앞인 동성왕 아니면 뒤인 성왕 두분 중 한분의 무덤으로 보는데, 통상 아래쪽 앞에 있는 것이 나중 무덤이므로 성왕의 무덤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이 5호분과 6호분은 도굴되고 발굴되는 과정에서 천장이 훼손됐다. 그로 인하여 큰비만 오면 무덤 안으로 물이 스미는 바람에 1971년 여름부터 장마를 앞두고 배수로를 만들기 위하여 뒤쪽 언덕을 파내려가게 됐는데 그것이 무령왕릉 발견의 단초가 되었다. 그 날짜가 6월 29일이다.
1971년 7월 5일 배수로공사 도중 한 인부의 삽이 무령왕릉의 벽돌 모서리에 부딪혔다. 공사책임자인 김영배 관장이 그 벽을 따라 파들어가보니 아치형의 벽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곳이 바로 무령왕릉의 입구였다. 김영배 관장은 작업을 중지시키고 이를 문화재관리국에 보고했다.
보고받은 문공부장관(당시 윤주영)은 김원용 국립박물관장을 단장으로 하는 발굴단을 파견했고, 7월 7일 오후에 현장에 모인 발굴단원들은 이튿날(7월 8일) 아침에 무덤의 문을 열기로 하고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튿날 무령왕릉은 역사적인 개봉을 하게 되었다.
마침내 무덤이 열려 안으로 들어간 김원용과 김영배는 소스라치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무덤 조성 후 한번도 개봉되지 않은 처녀분을 만난 것이었다. 김영배는 7월 4일 밤 꿈에서 본(산돼지에게 쫓겨 도망다니다가 결국 집까지 따라온 돼지를 보고 비명을 지르며 깨어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멧돼지처럼 생긴 돌짐승을 보고 크게 놀랐고, 김원용은 입구에 놓인 무령왕의 묘지를 보고서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다들 이것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감격이었다고 했다. 사실 수많은 왕릉이 발굴되고 도굴되었지만 그 무덤이 어느 왕의 무덤인지를 확실한 기록과 물건으로 알려준 것은 무령왕릉이 처음이었다. 그러니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무령왕릉의 답사는 국립공주박물관의 무령왕릉 출토유물 전시품을 보았을 때 비로소 의의를 지닐 수 있다. 국립공주박물관은 무령왕릉 출토유물을 전시하기 위하여 새로 지은 것이니 이 유물을 보지 않은 무령왕릉 답사란 겉껍질 구경에 불과하다.
무령왕릉 발견의 가장 큰 의의는 수많은 삼국시대 고분 중 피장자가 누구인지를 확실하게 아는 첫번째 왕릉이라는 사실이다. 경주시내 남쪽에만 155개의 고분이 있고 지금까지 6개의 신라 금관이 출토되었지만 출토 유물의 피장자가 확인된 예는 하나도 없다. 더욱이 무령왕릉의 지석(誌石)에 적혀 있는 기록이 『삼국사기』와 단 하루도 틀리지 않고 일치한다는 사실은 우리 고대사의 기록에 대한 정확성을 보증해준 첫번째 쾌거이다.
또 하나는 그동안 백제의 미술, 백제의 문화에 대하여 심정적으로만 언급하고 구체적인 유물이 부족하여 실증적으로 말하지 못했던 것을 어떤 면에서는 신라, 고구려보다도 더 정확하게 말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됐다는 사실이다. 백제가 멸망한 뒤 뒷전으로 밀려나 있던 백제의 역사를 다시 무대 위로 부상시켜놓은 것이다. 그래서 무령왕릉은 1,300년간 땅속에 묻혔던 백제의 역사를 지상으로 끌어올렸다는 말까지 할 수 있게 한다.
그런 중 내가 가장 감동받은 유물은 지석 중 매지권이다.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두 장의 지석을 두고 묘지(墓誌)로 보는 견해와 매지권으로 보는 견해가 나뉘어 있는데 그 명칭을 무어라 하든 이 지석의 내용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시사점을 준다.
돈 1만 닢〔枚〕. 이상 1건(件). 을사년 8월 12일에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 백제 사마왕은 상기의 금액으로 토왕(土王), 토백(土伯), 토부모(土父母), 지하의 여러 관리 및 지하의 지방장관에게 보고하고 남동 방향의 토지를 매입하여 무덤을 쓴다. 이를 위하여 증서를 작성하여 증명하게 하며 (이 묘역에 관한 한) 모든 율령에 구속되지 않는다.(「매지권 명문」, 임창순 옮김 『무령왕릉』, 문화재관리국 1973)
사마왕은 무령왕의 생전 호칭이다. 영동대장군은 양나라에서 무령왕을 백제의 왕으로 인정하면서 부여한 칭호로, 이 묘지석의 내용은 묘를 쓰면서 토지신에게 땅을 구입한다는 것인데 이런 풍습은 중국 도교사상에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그 풍습의 연원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식으로 자연에 대해 겸허한 자세를 지켰던 고대인의 마음이다.
무령왕릉은 왕과 왕비의 관이 우리나라에서는 나지 않고 일본에 많이 자라고 있는 금송(金松)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 때문에 여러가지로 주목받고 여러가지 추측도 낳고 있다. 금송은 매우 단단하고 습기에 강하여 일본에서는 신성시되며 불단과 지배층의 관재로만 사용되었다.
무령왕은 501년 동성왕이 좌평(佐平) 백가(苩加)가 보낸 자객에 피살되자, 뒤이어 백제왕에 오른 다음 나라를 안정시키고 고구려와 말갈의 침략을 물리치고 또 양나라와의 우호를 적극 추진하여 백제문화가 아들인 성왕 대에 와서 꽃필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던 것이다.
아름다운 여미산과 곰사당의 돌곰
무령왕릉이 있는 송산리 고분공원 아래쪽 금강변, 공주시내를 관통하여 흘러내려오는 제민천(濟民川)이 금강과 만나는 곳이 곰나루다. 곰나루 금강변에는 아름다운 솔밭이 있어 나라에서 명승 제21호로 지정하였다. 곰나루 솔밭 아래 흰 백사장 너머로는 아름다운 여미산(余美山)이 항시 강물에 엷게 비친다. 그 아련한 풍광을 보면 절로 백제를 그리는 회상에 잠기며 역사적 상상의 날개를 펼 수 있게 된다.
공주는 그 옛날에는 고마나루라고 부르고 한자로 웅진(熊津)이라고 적었다. 그래서 일본에서는 지금도 웅진이라고 쓰고 고마나루라고 발음한다. 그 웅진은 나중에 웅주(熊州)라거나 혹은 곰주라고도 불렀는데 고려초(940) 전국의 지명을 한자식으로 바꾸면서 곰주를 공주로 고친 것이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공주는 이렇게 곰과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으며 그 사연은 곰나루 전설로 전해지고 있다.
곰나루의 별스러울 것 없는 전설은 참으로 고맙게도 곰사당 앞마당에 있는 웅신단비(熊神壇碑)에 미려한 문체로 새겨놓은 것이 있어 읽는 이의 가슴에 애잔하게 다가온다. 비문의 찬술자는 공주사범대학(현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로 되어 있다.
아득한 옛날 한 남자
큰 암곰에게 몸이 붙들리어
어느덧 애기까지 얻게 된다.
허나 남자는 강을 건너버리고
하늘이 무너져내린 암곰
자식과 함께 강물에 몸을 던진다.
여긴 물살의 흐름이 달라지는 곳이어서
배는 자주 엎어지곤 하였다.
곰의 원혼 탓일까 하고
사람들은 해마다 정성을 드렸는데
그 연원 멀리 백제에까지 걸친다. (…)
곰나루에서 출토된 ‘돌곰’은 아주 소박한 기법으로 되어 있지만 만만히 볼 유물이 아니다. 앞다리는 곧추세우고 몸 뒤쪽은 한껏 웅크린 채 고개는 위로 치켜들고 먼데를 응시하는 듯한 자세로, 어딘지 조금은 쓸쓸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부여 -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부여는 정말로 작은 읍이다. 인구 3만명에 시가지라고 해야 사방 1킬로미터도 안되는 소읍(小邑)이다(최근에야 규암에 리조트가 문을 열었다). 그래서 가람 이병기 선생도 「낙화암」이라는 기행문에서 부여의 첫인상을 “이것이 과연 고도(古都) 부여란 말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그 허망부터 말했다.
그러나 그분의 눈을 의심할 수 없는 가람 선생이나 육당 선생은 부여답사를 허망하다고 말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부여에서 느낀 그 허전함까지를 백제답사의 한 묘미로 말할 수 있는 눈과 가슴이 있었다. 그중에서도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이 「삼도고적순례(三都古蹟巡禮)」에서 보여준 부여에 대한 사랑의 예찬은 눈물겨운 것이기도 하다.
육당은 삼국의 도읍이 저마다 각별한 인상을 풍기고 있는데 그것은 지형에서 오는 것도 있고, 문화의 내용과 유물의 상황에서 말미암은 것도 있다면서 부여를 평양, 경주와 비교해 이렇게 논했다.
평양에를 가면 인자한 어머니의 품속에 드는 것 같고 경주에를 가면 친한 친구를 대한 것 같으며, 평양에서는 무엇인가 장쾌한 생각이 나고 경주에서는 저절로 화창한 기운이 듭니다. (..) 평양은 적막한 중에 번화가 드러나고 경주는 번화한 가운데 적막이 숨어 있는데, 백제의 부여는 때를 놓친 미인같이, 그악스러운 운명에 부대끼다가 못다 한 천재자(天才者)같이, 대하면 딱하고 쉽고 눈물조 차 피어오릅니다. (…) 얌전하고 존존하고 또 아리땁기도 한 것이 부여입니다. 적막할 대로 적막하여 표리로 다 적막만 한 것이 부여입니다. (..) 거기에서는 평양과 같은 큰 시가를 보지 못하고 경주와 같은 풍부한 유물들을 대할 수 없음이 부여를 더욱 쓸쓸히 느끼게 합니다마는 부여의 지형으로부터 백제의 전역사를 연결하는 갖가지 사실 전체가 한 덩어리의 쓸쓸함, 곧 적막으로 우리의 눈과 마음에 비추임을 앙탈할 수 없습니다. 사탕은 달 것이요, 소금은 짤 것이요, 역사의 자취는 쓸쓸할 것이라고 값을 정한다면 이러한 의미에서 고적다운 고적은 아마도 우리 부여 라할 것입니다.
육당의 부여에 대한 예찬은 이처럼 끊임없는 사설로 이어져 만약 삼도 고적을 심리적으로 나눈다면 고구려는 의지적이고 신라는 이성적임에 반해 백제는 감정적이면서 더 나아가 관능적이고 촉감적인 고적의 주인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결국 “보드랍고 훗훗하고 정답고 알뜰한 맛은 부여 아닌 다른 옛 도읍에서는 도무지 얻어 맛볼 수 없는 것”이라고 찬미했다.
능산리 고분과 모형관의 무덤들
능산리에는 10여 기의 고분 중 7기를 정비하여 고분공원으로 만들어놓았는데 그것은 정말 멋지게 잘해놓았다. 20세기 인간도 이렇게 잘할 때가 있구나 싶을 정도로 잘해놓았다. 능산리 고분군 산자락 반대편에 백제고분모형관을 유적 자체에 대한 방해 없이 세운 뜻부터 훌륭하다.
능산리 고분군은 예부터 왕릉으로 전해져왔고 또 사신무덤 같은 특수한 예를 볼 때 더욱 왕릉으로 추정케 된다. 그러나 그 모두 왕릉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사비시대 백제의 왕은 모두 여섯분인데 그중 성왕은 공주, 무왕은 익산, 의자왕은 중국에 그 무덤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고 있으니 위덕왕, 혜왕, 법왕 세분만이 여기에 해당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능산리는 왕가의 묘역이거나 어느 왕, 아마도 위덕왕을 중심으로 하는 신하들의 딸린무덤이 된다.
신라의 무덤에 비할 때 이 백제의 무덤들은 초라한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그러 나 인간의 이지가 발달할 대로 발달한 6,7세기 상황에서 무덤을 크게 만든 것이 곧바로 발달된 문화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당시는 고분미술시대를 지나 불교 미술시대로 들어서 있어서 고분과 금관에 쏟은 정열을 사찰 사리장엄구에 바쳤다. 그런 뜻에서 나는 백제의 무덤들이 휠씬 인간적이고 온화한 품성을 지녔다는 생각을 해오고 있다.
능산리 고분군은 최근 몇년 사이에 더욱 유명해졌다. 그것은 고분모형관이 있는 바로 옆 논에서 그 유명한 백제금동용봉향로가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이 자리는 원래 절터로 전형적인 백제의 가람배치인 1탑 1금당식 구조인데 공방(工房)으로 생각되는 자리에서 이 향로가 발견됐다.
그리고 목탑 자리에서는 화강암으로 만든 사리감이 발견됐는데, 이 사리감에는 “백제 창왕(昌王, 즉 위덕왕) 13년(567)에 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는 내용의 글자가 씌어 있어서 이 절은 왕궁의 원당사찰, 말하자면 백제의 정릉사(定陵寺)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비성의 실체는 부여 나성
능산리 절터 서쪽 산등성이에는 부여 나성의 한자락이 남아 있어서 이 일대의 유적 가치가 더욱 높아진다. 나성은 백제의 수도 사비를 보호하는 외곽성으로 우리가 사비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 나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웅진에서 사비로 옮기는 538년을 전후하여 쌓은 것이 분명한데, 이 성은 진흙판을 떡시루 앉히듯 층층이 얹어쌓는 판축공법(版築工法)의 토성이어서 오늘날에는 인력이 너무 많이 들어 옛 모습을 도저히 복원하지 못한다.
몽촌토성처럼 보이는 바와 같이 성 외벽은 급경사를 이루게 하고 성벽 안쪽은 완만하게 다듬어서 말을 타고 달릴 수 있을 정도로 했고, 곳곳에 초소가 있었다. 부소산성에서 시작해 산자락과 강줄기를 따라 사비 고을을 감싸안으며 축조한 이 나성은 약 8킬로미터 되는데, 그 동쪽으로 둘러쳐진 나성의 잔편이 지금 능산리 절터 옆에 완연히 남아 있는 것이다.
‘의자왕은 죄가 없도다’
부소산은 부여의 진산이면서 동시에 국방상 최후의 방어진이 되므로 산 정상과 계곡에 흙과 돌로 성을 쌓아 보강하였다. 그것이 부소산성이며, 산성 안에서 군량미를 보관했던 군창터와 이를 지키던 군대 움막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이 산성은 꼭 군사적 목적만이 아니라 산성 남쪽 자락에 자리잡은 왕궁의 원림 구실을 한 듯 곳곳에 누정이 세워져 있다.
부소산성의 산책로는 여러 갈래가 있지만 정문으로 들어가서 영일루, 반월루, 사비루, 백화정, 낙화암, 고란사를 보고 나서 서복사터 옆문으로 나오는 길이 제일 좋다. 영일루는 본래 영월대(迎月臺)가 있던 곳으로 가람과 육당의 기행문에만 해도 분명 ‘달맞이대’로 되어 있는데 어느 순간에 왜 ‘해맞이’로 바뀌었는지 알 수 없다.
아무튼 지금의 영일루, 원래의 영월대를 옛사람들은 부소산 최고의 경관이라고 상찬을 아끼지 않았다. 가람 선생은 그것을 이렇게 예찬했다.
영월대를 찾았다. 이 산의 가장 높은 곳이다. 좋은 전망대다. 이 산을 강으로 두르고 봉으로 둘렀다. 그 봉들은 천연 꽃봉오리다. 현란한 꽃밭 속이다. 호암산, 망월산, 부소산, 백마강 할 것 없이 주위에 있는 멀고 가까운 산수들은 오로지 이곳을 두고 포진하고 있다. 나는 이윽히 바라보다가 포근포근한 금잔디를 깔고 앉아 그 놀라운 영화와 향락을 고요히 그려보았다.
부소산 영월대에서 맞은 ‘백마강 달밤’은 정말로 멋있었다. 그 황홀경에 문득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시구가 하나 있었다. 어느 옛 시인이 읊었다는 ‘강산여차호 무죄의자왕(江山如此好 無罪義慈王)’이다. 풀이하자면 ‘강산이 이토록 좋을지니 의자왕은 죄가 없도다’.
답사의 하일라이트는 정림사터 오층석탑
부여답사에서 하이라이트는 아무래도 정림사터 오층석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정림사탑은 멀리서 보면 아주 왜소해 보이지만 앞으로 다가갈수록 자못 웅장한 스케일도 느껴지고 저절로 멋지다는 탄성을 지르게 한다. 본래 회랑 안에 세워진 것이니 우리는 중문(中門)을 열고 들어온 위치에서 이 탑을 논해야 한다.
헌칠한 키에 늘씬한 몸매 그러나 단정한 몸가짐에 어딘지 지적인 분위기, 절대로 완력이나 난폭한 언행을 할 리 없는 착한 품성과 어진 눈빛, 조용한 걸음걸이에 따뜻한 눈인사를 보낼 것 같은 그런 인상의 석탑이다. 특히 아침안개 속의 정림사탑은 엘리건트(elegant)하고, 노블(noble)하며, 그레이스풀(graceful)한 우아미의 화신이다.
정림사 오층석탑의 구조를 정확히 실측한 사람은 석굴암을 측량한 요네다 미요지이다. 석굴암을 측량하면서 통일신라 때 사용한 자가 곡척(曲尺, 30.3cm)이 아니라 당척(唐尺, 29.7cm)이었음을 밝힌 요네다는 백제 때 사용한 자는 곡척이 아니라 고려척임을 또 밝혀냈다. 고려척은 고구려척의 준말로 동위척이라고도 하는데, 일본 호오류우지 등 아스까시대의 여러 건축에 사용한 것으로 신라의 황룡사, 익산의 미륵사 등도 고려척을 사용한 것이다.
고려척은 약 1.158척(35.15cm)이다. 고려척으로 측량한 결과, 요네다는 이 탑의 설계에서 기본 단위는 7척에 있었음을 알아낼 수 있었다. 1층 탑신 폭은 7척, 1층 총높이는 7척, 기단의 높이는 7척의 반인 3.5척이고 기단 지대석 폭은 7척의 한배 반인 10.5척이다. 그런 식으로 연관되는 수치를 요네다는 기하학적 도면으로 제시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요네다는 정림사탑의 아름다움의 요체는 체감률에 있는데 그것은 등비급수 또는 등차급수적 체감이 아니라 기저부 크기의 기본 되는 길이에서 발전하는 등할적구성으로 되어 있음을 밝혀냈다. 예를 들어 1층부터 5층까지 각층의 높이를 보면 층마다 10분의 1씩 줄어들어 결국 1층은 6.9척, 2층과 5층을 더한 것이 7척, 3층과 4층을 더한 것이 6.9척이 되므로 대략 7척과 맞아떨어진다.
또 1층부터 5층까지 탑신의 폭을 보아도 1층이 7척이고, 2층과 3층을 더한 것이 7척, 2층과 5층을 더한 것이 7.2척이므로 이 또한 대충 7척과 맞아떨어진다. 그런데 요네다는 모든 수치관계가 대략만 맞는다는 사실을 그대로 용인하고 그 정도의 차이는 여러 돌을 쌓기 때문에 수평고름을 하기 위하여 시공 때 약간씩 다듬은 데사 생긴 오차로 보았다. *이 부분에 대해 저자는 실제로 느끼는 체감률때문에 일부러 약간의 차이를 둔 것으로 설명한다.
정림사 오층석탑의 구조의 미학과 양식적 전후관계를 밝힌 것은 ‘조선탑파의 연구’를 저술한 우현 고유섭 선생이다. 우현 선생은,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양식인 익산 미륵사탑은 목조탑파를 충실히 모방한 것으로 다만 재료를 돌로 한 목탑이라고 할 수 있음에 반하여 정림사탑은 이제 목조탑파의 모습에서 떠나 석탑이라는 독자적인 양식을 획득하는 단계로 들어선 기념비적 유물로 평가하면서 이 탑의 특색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이 탑에 있어서 소재의 취급은 저 미륵사탑과는 판이하여 외용의 미는 소재 정리의 규율성과 더불어 율동의 미를 나타내고 (…) 각층의 수축성과 더불어 아주 운문적인 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소재 조합의 정제미뿐만 아니라 소재 자체의 세련미도 갖고 있어서 온갖 능각(稜角)이 삭제되어 (…) 매우 온화한 평탄면을 갖고 있다. 더욱이 지붕돌은 낙수면의 경사가 거의 완만하여 수평으로 뻗다가 전체 길이 10분의 1 되는 곳에서 약간의 반전을 나타내어 강력한 장력을 보이고 있다. 또 각 지붕돌 끝을 연결하는 이등변삼각형의 사선은 약 81도를 이루어 일본 법륭사 오층탑과 거의 같다. 곧 안정도의 미를 볼 수 있다.
부여박물관 가이드라인
부여답사에서 국립부여박물관을 들르지 않으면 백제답사가 아니라 부여지방 풍광기행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부여답사의 핵심은 어쩌면 이 박물관 관람에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립부여박물관은 종합박물관이 아니라 부여를 중심으로 한 백제문화권 지방박물관으로서 아주 특색있게 꾸며져 있다. 그러니까 지상에서 사라져버린 백제의 유산을 땅속에서 찾아 다시 지상에 복원한 것이 국립부여박물관인 것이다.
선사실에 들어가면 이 지역 청동기문화의 큰 특징인 ‘송국리형 문화’가 출토지별, 종류별로 세심하게 전시되어 있다. 여기에 전시된 청동유물들은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 못지않은 양과 질을 보여준다.
역사실에 들어가면 고분 출토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백제의 큰 항아리를 보는 것은 정말로 큰 기쁨이다. 그렇게 부드러운 질감과 우아한 곡선의 항아리를 만든 사람은 백제인밖에 없다. 그리고 산수문전에 나타난 그 세련된 조형미는 여기서 말로 다 설명하지 못한다.
불교미술실에서 우리는 백제 불상만이 갖는 여러 표정을 만나게 된다. 삼불 선생이 주장한 백제의 미소를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된다. 군수리 절터에서 나온 납석여래좌상을 보면 고개를 6시 5분으로 갸우뚱하게 기울임으로써 그 친숙감이 절묘하게 살아나고 있다. 또 규암리에서 출토된 금동보살입상을 보면 그 수려한 몸매와 맵시있는 몸가짐, 귀엽고 복스러운 얼굴에서 당대의 미인, 말하자면 ‘미스 백제’를 보는 듯한 착각조차 일어난다.
그리고 나는 구아리 유적에서 나온 나한상(羅漢像)의 강렬한 인상을 잊지 못한다. 광대뼈와 골격이 또렷하여 그 표정이 확연히 살아있는데 이 나한의 얼굴에 서린 고뇌의 빛깔은 모든 인간이 이따금 드러내고 마는 인간 실존의 비극적 표정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다.
‘작은 것이 위대하다’는 격언이 있다. 그것을 소중현대(小中現大)라 한다. 즉 ‘작은 것 속에 큰 것이 다 들어가 있다’는 뜻이다. 이는 명나라의 문인화가인 동기창(董其昌)이 작은 화첩에 역대 명화 대작들을 축소하여 복사하듯 그려보고는 그 표장에 ‘소중현대’라고 적어서 유명한 말이 된 것인데, 요컨대 백제의 미학은 ‘검이불루 화이불치’에 ‘소중현대’를 합치면 제격을 갖추게 된다고 믿는다.
백마강변의 신동엽시비
부여를 떠날 때면 백제교를 건너기 바로 직전 백마강변 나성 한쪽에 조촐한 모습으로 세워진 불교전래사은비(일본 민간단체에서 기증)와 신동엽(申東曄) 시비에 꼭 들른다. 신동엽 시비에는 우리의 소망, 백제의 혼이 서려 있다. 신동엽은 현대 한국문학사상 최고의 시인이자 부여가 낳은 최고의 시인이다.
나는 우리나라 예술 속에서 그리움을 노래한 몇몇 대가를 알고 있다. 한분은 김소월(金素月)이다. 그분의 시는 거의 다 그리움으로 가득하다는 느낌이다. 「초혼」 같은 시는 그리움에 지쳐 쓰러지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소월이 보여준 그리움이란 항시 이루어보지 못한 어떤 대상에 대한 애절한 동경의 그리움이었다.
이에 반하여 이중섭(李仲燮)의 그림은 잃어버린 행복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득하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아내와 아들을 만나고 싶은 그리움의 감정을 황혼녘에 울부짖는 「소」 「달과 까마귀」 「손」에 실었다. 그는 개인적으로 겪는 그리움의 고통을 보편적 가치로 전환하는 데 성공했고, 그래서 그의 그리움에서는 살점이 떨어지는 듯한 애절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김소월과 이중섭의 그리움에는 치열한 현실의식이나 역사인식이 들어 있지 않다. 역사의 아픔과 그 아픔을 넘어서는 희망까지를 말하는, 역사 앞에서의 그리움은 신동엽의 차지였다. 그의 「산에 언덕에」에는 그런 그리움의 감정이 남김없이 서려 있다. 지금도 백마강변 나성에 세워져 있는 신동엽 시비에는 이 「산에 언덕에」가 조용한 글씨체로 잔잔하게 새겨져 있다.
부여에서 태어나서 숙명적으로 백제를 사랑하며 백제의 마음으로 살고 싶어했던 신동엽이 마음 속에 그린 백제는 과연 어떤 것일까? 만약 그런 것이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회상의 백제행’의 마지막 여운으로 삼아도 좋지 않겠는가. 그의 장시 ‘금강’ 제23장은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백제,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거름을 남기는 곳,
금강,
옛부터 이곳은 모여
썩는 곳,
망하고, 대신
정신을 남기는 곳
<6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