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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강성 Sep 11. 2024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6)

영남답사 일번지

북부 경북 순례
의성・안동

[의성, 안동 답사 경로 출처 본문]

영남답사 일번지 - 북부 경북


답사기 첫째 권에서 남도답사 일번지로 강진과 해남을 꼽은 것을 보고서 “그렇다면 영남답사 일번지는 어디가 되겠느냐”는 질문을 곧잘 해온다. 그럴 때면 어김없이 그리고 지체없이 안동을 중심으로 한 북부 경북이라고 대답한다.


낙동강 반변천(半邊川)의 푸른 물줄기를 따라 안동, 영양, 봉화 땅을 누비자면 낮은 언덕을 등지고 기품있게 자리잡은 반촌(班村)이 처처에 보인다. 퇴색한 고가(古家)와 재실(齋室), 운치있는 누정(樓亭)과 늠름한 서원(書院)들의 이 유서깊은 옛 고을의 풍광은 조선시대 한 정경을 연상케 하는 명실공히 양반문화의 보고이다.


1996년에 살아있는 금세기 최고의 지성이라 할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가 우리나라에 와서 보름 동안 전국을 돌며 여러 차례 강연과 토론회를 가졌는데, 하버마스의 이한(離韓) 인터뷰 기사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 그는 확실히 놀라운 안목을 가진 세계적인 석학이었다.


“한국사회에는 불교가 갖고 있는 도덕적 순수성과 유교가 지닌 공동체 지향적 윤리의 전통이 있습니다. 이것을 결합시킨다면 한국사회는 새로운 문화적 정체성을 확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2019년 서울대 한상진 명예교수와의 대화, 2019년 출간한 '또 하나의 철학의 역사' 출처 구글 이미지]  

‘약무호남(若無湖南) 무시조선(無是朝鮮)’이라는 말이 있다. ‘호남이 없으면 그것은 조선이 아니다’라는 뜻인데 그것은 남도의 풍부한 물산과 따스한 인정, 멋진 풍류를 두고 하는 말인 줄로 안다.


마찬가지로 ‘약무안동(若無安東) 무시조선’이라는 명제를 내걸고 ‘안동이 없다면 그것은 조선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니 그때는 무엇보다도 정신과 도덕을 두고 하는 말임에 모두가 동의하게 될 것이다.


능교형과 니껴형


언젠가 『영남일보』에서 「능교형과 니껴형의 지역분포」라는 아주 재미있는 학술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처음엔 이 괴이한 언어를 알아차리지 못했는데 기사를 읽어보니 ‘했능교?’와 ‘했니껴?’라는 어미의 차이로 경상도 방언의 지역 구분을 시도한 국어학자들의 논의를 소개한 글이었다.


능교형의 대표 지역은 대구이고 니껴형은 안동을 비롯한 예천, 의성, 영양, 봉화, 영주 등이다. 같은 북쪽이라도 문경, 점촌, 상주는 또 달라서 북부가 아니라 서부로 분류하여 선산, 구미, 김천 등과 함께 ‘사요’형으로 구분되고 있으니 옛날에는 이 지역을 낙동강 서쪽이라고 해서 낙서(洛西)지방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그리고 어미뿐만 아니라 이른바 성조(聲調)라고 하는 말의 높낮이와 길이에도 차이가 있어서 ‘학교 안 가나’에서 능교형의 대구에서는 ‘안’에 악센트가 있지만 니껴형의 안동에서는 ‘가’에 악센트가 있다. 이른바 고평평(高平平)과 평고평(平高平)의 차이다.


고평평의 능교형은 담대하고 확실함이 간혹은 무례하고 무뚝뚝하고 멋없어 보인다는 오해를 낳기도 하지만 싱싱하면서도 매운 듯 달콤한 반면, 평고평의 니껴형은 단어 또는 문장상에서 악센트를 뒤쪽으로 주므로 힘도 있고 설득력도 있으며, 무엇보다도 리듬감과 여운이 있다.


신라탑의 출발점, 탑리 오층석탑


북부 경북 순례의 첫 기착지는 아무래도 탑리 오층석탑이 제격이다. 의성군 금성면 탑리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다. 우현 고유섭 선생은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양식은 익산 미륵사탑, 부여 정림사탑 이외엔 탑리 오층석탑밖에 없음을 지적하면서 이 탑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김원용 선생은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설명했다.

 

“7세기 전반기에 분황사의 모전석탑을 만들어낸 신라는 7세기 중엽에 와서 백제인들이 먼저 시작한 것처럼 화강석을 써서 목탑·전탑 혼합식이라 할 수 있는 신라 석탑의 초기 형식을 구현하는 데 성공하였다. 경북 의성군 금성면 탑리 소재 오층석탑은 (…) 기단의 형식, 몸돌, 지붕돌의 형식 등이 소위 신라 석탑 형식에로의 방향과 청사진을 만들어놓아 (…) 모든 신라 석탑의 출발점이 되고 있다.“


의성군 금성면은 이 탑으로 인하여 문화사·미술사뿐만 아니라 지방사적으로도 큰 이름을 얻었는데, 그 이름이 너무 큰 바람에 시외버스 행선지 표시조차 ‘탑리(금성)’로 되어 있다. 또 금성면 봉황재에서 부산대 지질학과 김항목 교수가 발견한 공룡의 화석은 ‘울트라사우루스 탑리엔시스’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의성 탑리 오층석탑이라는 명작은 그곳으로부터 20리 떨어진 그윽한 골짜기 빙계계곡에 빙산사(氷山寺)터 오층석탑이라는 모방작을 낳았다. 누군가가 경북8승(慶北八勝)의 하나로 꼽은 바도 있는 빙계계곡은 느릿하고 밋밋한 이곳 산세에서는 전혀 예기치 못한 깎아지른 절벽이 그림 같은 병풍을 이루는 절경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계곡 한쪽 언덕에 큰 바위가 있는데 아래쪽 구멍인 빙혈(氷穴)은 한여름에 얼음이 얼고 위쪽 구멍인 풍혈(風穴)은 한겨울에 더운 바람이 나온다는 오묘한 곳인데, 바로 이 빙혈과 풍혈 곁 평평한 곳에 빙산사 오층석탑이 아름답게 서 있다.

[탑리 오층석탑(좌)과 빙산사터 오층석탑(우) 출처 본문]

답사회원 중 농협에 근무하는 조재일씨에게 의성의 특산물 소개를 부탁했더니 생각 밖으로 아주 유창했다. 먼저 “의성은 경상북도의 최고 중앙에 있어 의성 북쪽을 북부 경북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의성의 특산품으로는 마늘, 작약, 감을 들 수 있습니다.”라고 시작한다.


“방금 우리가 다녀온 탑리 오층석탑이 있는 금성면과 사곡면 경계지역엔 금성산이 있는데 금성산은 남한에서 유일하게 화산분화구가 남아 있으며 화산재가 토양을 형성한 사곡면 마늘(보통 '의성마늘'로 불리는)에는 벌레가 없고 안동댐 조성 이후 경북에서 가장 추운 곳이 되어 한지형 마늘의 대표적 생산지가 되었습니다.


사곡에서 본래 유명한 것은 감이었습니다. 지금은 생산량도 많지 않은 사곡시(柿)는 옛날엔 진상품이었습니다. 사곡시에는 씨가 하나도 없고, 첫서리가 내리기 전 배꼽이 붉어질 때 따서 비닐봉지에 밀봉한 뒤 장독에 넣어 땅에 묻었다가 12월 말쯤에 먹으면 단감하고는 비교할 수 없는 단맛과 개운한 맛이 있습니다.


또한 의성은 한국에서 작약이 제일 많이 재배되는 곳입니다. 꽃 피는 5월이면 의성 땅 곳곳에 작약꽃이 환하게 핍니다. 작약꽃의 다른 이름인 함박꽃이 탐스럽게 활짝 피면 정말 함박웃음만큼 복스러워 보입니다.”

[의성 사곡시와 작약밭 출처 구글 이미지]

망호리 소호헌(蘇湖軒)의 이모저모


의성읍내를 관통하여 계속 북쪽으로 달려 단촌면 소재지를 지나 안동 쪽으로 사뭇 달리니, 가늘고 예쁘기가 눈썹 같다고 해서 미천(眉川)이라고 하고 또는 깊이 파였다고 해서 골천이라고도 부르는 실개천이 바짝 따라붙는다.


의성군과 안동시의 경계선상을 넘으면 우리는 곧 오른쪽으로 고색창연한 기와집이 늘어선 양반마을을 만나게 된다. 여기는 망호리(望湖里, 안망실(安望室)과 소호(蘇湖)를 통합한 이름), 한산 이씨·대구 서씨·영양 남씨의 동성(同姓)마을이 있다. 예서부터가 옳게 안동답사다.

[소호헌 보물 475호 출처 구글 이미지]

소호헌은 여러 면에서 개인주택으로는 호사로운 구조를 갖춘 별당 서실(書室)이다. 아름다운 정자, 편안한 사랑채와 조용한 독서실을 겸했던 이 소호헌은 권위적이면서 서정적이며, 고전적 기품에 낭만적 운치가 함께하는 안동의 명소가 되었던 것이다.


소호헌은 본래 안동 법흥동 임청각(臨淸閣)의 고성 이씨 이명(李洺)이 그의 다섯째 아들 이고(李股)를 분가시키며 지어준 집인데 이고에겐 아들이 없어 그의 외동딸에게 장가온 서해(徐嶰)가 이 집 주인이 되었다.


그리고 서해의 아들인 약봉(藥峯) 서성(徐渻, 1558~1631)은 과거에 급제하여 판중추부사에 이르고 사후엔 영의정에 추증되며 충숙공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이후 대구 서씨는 크게 번창하여 이 집안은 4대에 걸쳐 대과 5인에 정승 3인을 낳은 명문이 되었다.


소호헌 안쪽의 '안망실'에는 영양 남씨 송곡파(松谷派)인 둔재(屯齋) 남창년(南昌年, 1463~?)의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데, 남씨 영모사(永慕祠)에는 임란 때 의병을 일으킨 청천(晴川) 남태별(南太別, 1568~1635) 위패를 모시고 봄가을로 향사를 지내고 있다.

[망호리 남씨 영모사(望湖里南氏永慕祠)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런가 하면 소호헌 건너편에는 목은 이색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한산 이씨 동성마을이 있다. 개천 하나를 두고 노론(대구 서씨)과 남인(한산 이씨) 마을로 갈라서 있다. 이 마을은 안망실로 들어가는 남쪽편 산자락에 있어서 '양지마'라고 부르는데 영조 때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1710~81)이라는 큰 학자가 나와 안동의 명문으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까 한 동네에서 세 집안이 내세우는 자랑과 긍지가 다르다. 하나는 벼슬, 하나는 의병, 하나는 학문이다. 그리고 앞으로 보면 알겠지만 안동지역에선 벼슬보다 학문, 학문보다 지조를 더 높이 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여타 지역과 안동이 다른 점이다.


사과밭 속의 조탑동 오층전탑


소호를 지나면 금세 일직면 다운타운과 만나게 되고 여기서 남안동 톨게이트 진입로로 들어서면 조탑동(造塔洞, 전탑을 만드는 일이 얼마나 거했으면 동네 이름조차 조탑동이 되었을까) 오층전탑에 다다르게 된다.


조탑동 오층전탑은 ‘전탑의 고장’ 안동의 한 상징이다(무수히 많은 벽돌로 만들어졌다). 시내 안동역전에 있는 동부동의 오층전탑, 임청각 옆에 있는 법흥동의 칠층전탑과 함께 이 지역의 고집스러운 ‘전통고수의 전통’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통일신라시대에 전국이 화강암 삼층석탑을 취하고 전탑이나 모전석탑은 버렸을 때 이 니껴형 북부 경북에서는 오히려 전탑을 발전시켜 우리나라 탑파의 역사에서 별도의 한 장(章)을 만들게 했던 것이다.


조탑동 오층전탑에서 가장 매력적인 부분은 1층 몸돌의 감실을 지키고 있는 두분의 인왕상 모습이다. 법계(法界)를 수호하는 경호실장급의 이 신상(神像) 두분은 무서운 퉁방울눈에 태권도의 공격과 방어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공격하는 분은 입을 벌리고 방어하는 분은 입을 다문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을 아상(呵像)과 우상(吽像)이라고 하는데, 우리가 석굴암에서도 보았고 경주 분황사탑에서도 본 바 있는 도상이다. 그런데 조탑동 오층전탑의 인왕상은 무섭지도 위엄스럽지도 않고 오히려 귀엽기 짝이 없다. 사람을 겁주거나 놀라게 하기는커녕 꿀밤 한 대 먹이지도 못할 애기주먹으로 묘사되어 있으니, 파격적인 변형이다.

[조탑동 오층전탑과 1층 몸돌의 인왕상 출처 본문]

조탑동 오층전탑 바로 옆에는 유허각 하나가 있는데 여기엔 일직 손씨의 시조인 손홍량(孫洪亮, 1287~1379)의 비가 모셔져 있다. 손홍량은 홍건적의 난을 평정할 때 큰 공을 세웠는데 공민왕이 그를 평해 ‘일직(一直)한 사람’이라는 칭찬과 함께 지팡이와 초상을 하사하여 그 말이 일직면, 일직 손씨에 붙게 됐다.


『몽실 언니』의 권정생 아저씨


오층전탑 과수원 앞에는 철탑 종루가 있는 오래된 교회가 하나 있다. 여기는 일직교회로 『몽실 언니』(창작과비평사 1984, 1990년 MBC에서 드라마화)를 쓴 동화작가 권정생(權正生) 선생의 옛 직장이었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 후 부푼 꿈을 안고 귀국하였으나 중병에 걸려 절망 끝에 안동에 죽을 자리를 잡고 신앙생활과 종지기를 하며 동화작가가 되었다고 한다. 197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무명 저고리와 엄마」가 당선된 이래 그는 빛나는 감성과 생생한 현실을 어린이들에게 되돌려주는 건강한 동화를 선사했다.


“지순한 동심을 통해 가난한 백성이 겪는 불행의 원인과 그것을 잉태시킨 사회구조의 모순을 예리하게 짚어낸 한국 아동문학의 신기원” 『몽실 언니』는 그렇게 탄생한 것이다. *2007년 작고하며 유산과 인세를 남북한과 분쟁지역 어린이들을 돕는데 쓰라는 유언을 남겼다.

[권정생 선생(사진의 좌)과 '몽실언니' 출처 본문]

안동역 한쪽의 오층전탑


안동시내로 들어서면 안동역전 광장 서쪽 구석엔 보물 제56호로 지정된 동부동 오층전탑이 있다. 여기는 옛날 법림사(法林寺)가 있던 자리로 지금은 당간지주와 함께 이 전탑이 하나 남아 있어 니껴형 전탑의 고장을 장식하고 있다.


비록 상륜부는 잃었지만 몸체는 완형을 갖추어 벽돌의 텍스처(texture)를 최대한 강조하고 1층부터 5층까지 급격히 체감하여 날카로운 상승감을 유도하고 있다. 그리고 각층마다 화강석으로 감실을 만들고 2층 감실엔 인왕상을 새겨놓아 변화를 주며, 지붕엔 각층마다 기와를 얹어 목조건축을 모방했다는 취지를 보여준다.

[동부동 오층전탑 출처 본문]

천년을 두고 우뚝한 칠층전탑


안동시내 동쪽 낙동강 강둑으로 일제 때 중앙선 철길이 놓였는데 그 철둑은 법흥동 칠층전탑을 아슬아슬하게 비켜가고, 고성 이씨 종택과 임청각 군자정은 철길로 인하여 행랑채를 잃어버렸으며 지금도 기차가 지나갈 때마다 지축이 흔들리는 진동과 소음에 나라의 국보와 보물이 시달리고 있는 것이 안쓰럽기 짝이 없다.

[임청각과 칠층전탑 옆을 지나가는 철길 출처 뉴시스]

고성 이씨 종택 옆의 법흥동 칠층전탑은 높이 17.2미터로 현존하는 우리나라 탑 중 가장 키가 큰 탑일 뿐만 아니라 그 장대한 스케일에 걸맞게 웅혼한 기상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층마다 지붕돌엔 기와가 얹혀 있어서 7층이라는 당시로서는 최고층 빌딩의 이미지를 한껏 발휘했는데 지금도 2층, 3층 지붕엔 기와들이 남아 있다. 뿐만 아니라 야문 화강암으로 구축한 기단부에는 팔부중상이 멋지게 조각되어 있다.

[법흥동 칠층전탑, 지붕 기와, 기단부 팔부중상 출처 본문, 구글 이미지]

임청각 군자정, 고성 이씨 종택


법흥동 임청각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살림집 중에서 가장 큰 규모로 철도 부설 때 50여 칸의 행랑채와 부속건물을 철거당하고도 이런 규모를 보여주는 99칸 집이었다. 이 집은 김봉렬(金奉烈) 교수의 말대로 “우선 규모에 놀라고 다양한 기능이 체계적으로 조합된 공간조직에 놀라게 된다”(『한국의 건축』, 공간사 1985).


쓸 용(用)자형으로 반듯하게 구성된 이 양반집은 살림채, 사당, 별당(군자정)으로 구분되고 살림채는 또 안채, 사랑채, 행랑채로 나누어져 있는데 이 복잡한 구성과 기능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마당의 운용이 탁월하여 다른 대갓집에서 느끼던 숨막힐 듯한 답답함이 없다.

[임청각과 석주 이상룡 출처 서울신문, 구글 이미지]

여기는 고성 이씨의 동성마을이었다. 법흥동 고성 이씨는 세종 때 좌의정을 지낸 이원(李原)의 여섯째아들인 이증(李增)이 이곳 풍광에 매료되어 여기에 자리잡음으로써 입향조가 되었고, 이증의 셋째아들로 중종 때 형조좌랑을 지낸 이명이 임청각, 군자정을 지으니 보통 임청각이라고 하면 이명을 지칭하는 것이다.


안동 양반사회에서 도산서원 원장과 함께 최고의 명예직으로 삼고 있는 안동좌수(座首)를 이 집안에서 가장 많이 배출했다는 것이 가문의 큰 명예며, 금세기 초 상해 임시정부의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이 임청각 출신이라는 것은 비단 고성 이씨의 자랑이 아니라 안동의 자존심으로 칭송된다.


임청각, 군자정에 오면 나는 항시 두가지 사실에 놀라워하고 또 고마워한다. 하나는 이 집을 항시 개방하고 있는 너그러움이다. 또 하나는 나라에서 지원해주는 것이 따로 있을 리 만무한데도 이 엄청난 대갓집을 유지하며 생생히 보존·관리하고 있는 정성이다.


양반의 삶은 흔히 봉제사(奉祭祀), 접빈객(接賓客)으로 그 특징을 요약하기도 한다. 이런 정신적인 것의 이야기가 안동의 문화유산마다 어려 있어 ‘들을 안동이지 볼 안동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어느정도는 사실이고, 어느정도는 겸손이며, 어느정도는 변명이다. 그게 안동이다.

[임청각의 별당채인 군자정 출처 본문]
북부 경북 순례
안동・풍산


건진국시와 헛제삿밥


법흥동 임청각에서 굴다리로 철둑을 빠져나오면 바로 눈앞엔 안동댐 보조댐이 나타나고 댐 건너편 산자락으로는 민속박물관과 민속경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


안동댐으로 수몰될 운명에 있던 건물 중 예안의 선성현(宣城縣) 객사(客舍), 월영대(月映臺), 석빙고 같은 준수한 건물들을 옮겨놓았고 까치구멍집, 도투마리집, 통나무집 같은 안동지방의 민가들도 옮겨와 야외 건축박물관을 만들면서 바로 그 민가에서 안동의 향토음식을 팔고 있다.


나는 안동답사 때면 항시 여기에 와서 헛제삿밥이든 건진국시든 안동의 향토식을 한 그릇 들고 간다. 그렇게 해야 외지의 답사객들은 안동의 살내음을 점점 진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안동댐과 민속경관지, 건진국시, 헛제사밥 출처 본문, 구글 이미지]

팔도성주의 본향, 제비원


안동시내에서 영주로 가는 5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시오리쯤 가면 고갯마루 너머 오른쪽 산기슭 암벽에 새겨진 커다란 마애불을 훤하게 바라볼 수 있다. 이 불상의 공식명칭은 ‘안동 이천동(泥川洞) 석불상’(보물 제115호)이지만, 조선시대에 '제비원'이라는 역원(驛院)이 있던 자리여서 흔히 제비원 석불로 통한다.


멀리서 바라보면 큰 바위에 몸체를 표현한 것 같지만 가까이가면 두 개의 큰 바위 사이에 기도 드리는 공간을 설정해 놓은 것이다. 그래서 제비원 석불은 고려시대의 여타 매너리즘 경향의 불상과는 달리 파격적이라 할 정도로 확실한 자기 이미지를 갖고 있으며, 바로 이 점 때문에 제비원 석불은 많고 많은 전설을 갖게 됐다.


그중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는 우리나라 무가(巫歌) 중 「성주풀이」라고 해서 성주님께 치성드리는 성주굿 노래에서 어느 지역이든 성주의 본향(本鄕)을 따지는 대목에서는 모두가 이 제비원 석불을 지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주님 본향이 어디메냐/경상도 안동 땅/제비원이 본일러라/제비원의 솔씨 받아 (…)"


그래서 안동은 불교문화, 양반문화의 본향임과 동시에 민속문화의 본향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제비원 석불 출처 본문, 구글 이미지]

봉정사 가는 길


제비원에서 조금 더 내리막길을 타고 내려가다보면 우리는 이내 봉정사로 들어가는 저전동(苧田洞)에 닿게 된다. 저전동은 지금도 할머니 할아버지 들은 ‘모시밭’이라고 짧고 빠르게 발음하는 예쁜 이름의 옛 마을이다.


이래저래 안동에는 한자어를 둘러싼 많은 일화가 있다. 임재해의 『이바구세상』(한울 1994)에는 이런 얘기가 나온다. 한 총각이 강제로 선도 보지 않고 결혼을 하게 됐는데 여자가 반촌 출신이 아니라 민촌(民村) 출신인지라 영 맘에도 안 들고 깔보게 되어 첫날밤 신방에서 색시를 멋지게 골려주려고 한자로 운(韻)을 던져 대구(對句)를 읊어 제시하지 못하면 면박을 줄 속셈으로 “청포대하자신노(靑袍帶下紫腎怒)”라 했다는 것이다. 풀이하여 ‘푸른 도포 허리띠 아래에서 붉은 신이 노했도다’. 그런데 색시는 뜻밖에도 이를 척 받아서 화답하는데 “홍상과중백합소(紅裳袴中白蛤笑)”, 즉 ‘붉은 치마 고쟁이 속에서 흰 조개가 웃는다’라고 했다는 것이다.


봉정사 앞 일주문을 넘어 참나무 숲길을 벗어나면 갑자기 하늘이 넓게 열리며 산속의 분지가 나타나고 저 앞쪽 멀리로는 돌축대, 돌담을 끼고 늠름히 서 있는 봉정사 만세루가 아련히 들어온다.


만추의 안동, 참나무 갈색 낙엽이 단색조로 차분히 누렇게 물들고 있을 때면 노랗게 물든 은행잎에 햇살이 부서지며 밝은 광채를 발하고 누구라 따갈 이 없는 늙은 감나무에 홍시가 빠알갛게 익어 그 가을빛은 더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자랑한다.

[봉정사 만세루 출처 본문]

봉정사 극락전


봉정사가 세상에 이름높은 것은 현존하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집인 극락전(국보 제15호)이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하여 안동은 절집에 있어서도 목조건축의 보고(寶庫)라고 당당히 말하는 바이다.


기존에는 1376년에 중건되었다는 기록이 발견된 부석사 무량수전이 한동안 최고의 목조건물로 지목되기도 했다. 그런데 1972년 9월, 봉정사 극락전을 중수하기 위해 완전 해체했을 때 ‘기문장처(記文藏處)’라고 표시한 게 있어서 열어보았더니 정말로 상량문이 거기에 들어 있었다. 이 상량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안동부 서쪽 30리쯤 천등산 산기슭에 절이 있어 봉정사라 일컬으니, 절이 앉은 지세가 마치 봉황이 머물고 있는 듯하여 이와같은 이름으로 부르게 됐다.

이 절은 옛날 능인대덕(能仁大德)이 신라 때 창건하고 (…) 이후 원감(圓鑑), 안충(安忠) 등 여러 스님들에 의해 여섯차례나 중수되었으나 지붕이 새고 초석이 허물어져 1363년(공민왕 12년, 至正 23)에 용수사(龍壽寺)의 대선사 축담(竺曇)이 와서 중수했는데 다시 지붕이 허술해져서 수리하였다.”

[봉정사 전경 출처 본문]

이 상량문 기록에 더해 봉정사 극락전이 최고의 건물이라는 주된 논거는 건축양식상 고식(古式)으로 판단되는 점이 많기 때문이다. 즉 흔히 고구려식으로 불리는 건축 양식으로 통한다.


즉, 고구려 고분벽화에 나오는 기둥과 공포(拱包) 그림과 합치되는 결구방식, 또한 기둥과 기둥 사이에서 옆으로 가로지른 창방 위에 올라앉은 나무받침, 고구려 벽화에서 보이는 복화반(覆花盤, 즉 꽃잎을 엎어놓은 모양), 사용한 자가 고구려자〔尺〕등과 무엇보다 간결하면서도 강건한 인상을 주는 건물의 느낌이 그러하다.

[봉정사 극락전과 앞 마당 출처 구글 이미지]

봉정사 극락전의 이 간결하면서도 강한 아름다움과 고구려식 결구와 복화반 받침 등의 특징은 내부에서 더 잘 보여준다.


여기에 더해 이 집의 또다른 매력은 지붕이 높지 않고 낮게 내려앉아 안정감을 줄 뿐만 아니라 아주 야무진 맛을 풍긴다는 점이다. 또한 이 집은 9량집으로 되어 있으면서도 9량집 건물이라면 가운데에 들어앉아야 할 네개의 높은 기둥〔高柱〕 중 앞쪽 두개를 생략했다. 그래서 내부공간이 아주 넓고 시원해 보인다.

[봉정사 극락전 내부 출처 구글 이미지]

봉정사에는 극락전 말고도 국가지정 문화재로 대웅전(보물 제55호), 화엄강당(보물 제448호), 고금당(古今堂, 보물 제449호)이  있는데, 봉정사가 봉정사일 수 있는 것은 낱낱 건물 자체보다도 그 건물을 유기적으로 포치한 가람배치의 슬기로움에 있다.


봉정사는 결코 큰 절이 아니다. 그러나 봉정사는 정연한 건물배치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단정하고 고풍스러운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산사가 되었다. 봉정사는 불국사처럼 대웅전과 극락전이라는 두개의 주전(主殿)을 갖고 있고 각각이 독자적인 분위기를 장악하고 있어 두 공간의 병렬적 배치가 봉정사에 다양성과 활기를 부여한다.


봉정사 대웅전 앞마당은 전형적인 산지중정형(山地中庭形)으로 남북으로는 대웅전과 만세루, 동서로는 선방인 화엄강당과 승방인 무량해회(無量海會)가 포치하고 있다. 그런데 이 앞마당에는 석탑이나 석등 같은 일체의 장식물이 없고 반듯한 축대에 반듯한 돌계단이라는 정면성이 강조되어 있다. 그 단순성과 표정의 절제로 우리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말간 느낌의 절마당을 맛보게 된다.


이에 반하여 바로 곁에 있는 극락전의 앞마당은 중정에 귀여운 삼층석탑이 자리잡고 극락전 돌계단 양옆으로는 화단이 있어서 정겨운 공간이 연출되고 그 앞으로는 거칠 것 없이 시원한 전망이 열려 있어서 대웅전 앞마당 같은 엄숙과 위압이 없다.

[봉정사 대웅전과 앞마당 출처 위키백괴]

봉정사의 절집 진입로는 만세루인 덕휘루(德輝樓) 아래로 난 돌계단으로 되어 있다. 정성을 다해 가지런히 쌓았으면서도 천연의 멋을 다치지 않았다. 돌계단을 밟고 만세루를 향하면 품에 안을 듯 압도하는 누각에 몸을 맡기고 싶어진다. 그리고 반드시 누마루 아래로 난 돌계단을 따라 고개를 숙이고서야 안마당으로 들어서게 되니 성역에 들어가는 겸손을 저절로 보이게 되는 것이다.

[봉정사 덕휘루 출처 구글 이미지]

마당을 알아야 한옥이 보인다


봉정사답사는 요사채 뒤쪽 산자락에 자리잡은 영산암(靈山庵)까지 다녀와야 제맛을 알게 된다. 영산암은 낡고 낡은 누마루인 우화루(雨花樓) 밑으로 대문이 나 있고 안에 들어서면 서너 채의 승방이 분방하게 배치되어 있다.


안마당은 굴곡과 표정이 많아서 조금 전 우리가 본 봉정사 대웅전이나 극락전과는 전혀 다른 뭔가 부산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일부러 가산(假山)을 만들고 거기에 괴석(怪石)과 굽은 향나무를 심고 여름꽃도 갖가지, 관상수도 갖가지다. 툇마루도 있고 누마루도 있고 넓은 정자마루도 있으며 뒤뜰로 이어지는 숨은 공간도 많다.


봉정사에 와서 우리는 서로 성격이 다른 세개의 마당을 보았다. 대웅전 앞의 엄숙한 마당, 극락전 앞의 정겨운 마당, 영산암의 감정표현이 강하게 나타난 복잡한 마당. 마당을 눈여겨볼 줄 알 때 비로소 한옥을 제대로 보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우리 건축의 에쎈스는 마당에 있다.

[영산암 출처 본문]
[우화루 현판 우화(雨花)는 부처님이 설법할 때 꽃비가 내렸다는 얘기에서 나온 것이다 출처 본문]

삼태사 묘소


봉정사에서 나와 우리의 다음 목적지인 하회의 병산서원으로 향하면 서후에서 검제(금계)를 지나 풍산으로 들어가면 된다. 길에는 ‘장태사묘(張太師廟) 입구’가 있고 또 검제 다 가서는 ‘권태사묘(權太師廟) 입구’도 나온다. 그러니까 이 안쪽은 바로 ‘안동 삼태사의 묘’가 모두 모여 있는 안동 역사의 진원지인 것이다.

[출처 구글 이미지]
안동 시내에 있는 태사묘는 삼태사의 위패를 모시기 위해 중종 때(1541) 안동부사 김광철(金光轍)이 건립한 것으로 여러차례 중수를 거듭하다 6·25동란 때 불탄 것을 1952년, 전쟁이 끝나자마자 우선적으로 복원한 것이다. 묘당과 재실이 격식과 규모를 갖추었고, 보물각엔 보물 제451호로 지정된 삼태사 유물도 전시되어 있으며, 또 차전놀이에 쓰던 동체도 보관되어 있다.


안동의 옛 이름은 고창(古昌)이었다. 왕건이 공산전투에서 신숭겸 장군을 잃는 등 견훤에게 참패를 당하고 고창으로 도망쳐 왔을 때,  이 지방 토호인 권행(權幸), 김선평(金宣平), 장길(張吉) 등이 향군을 이끌고 도와 대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여기서 왕건은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고, 후삼국 통일 후 ‘동쪽을 안정시켰다(安於大東)’는 뜻으로 이 고장 이름을 안동(安東)이라 지어주고는 3인의 호족에게 각각 태사 벼슬을 주어 그들이 곧 안동 권씨, 안동 장씨, 안동 김씨의 시조가 되었다.

[안동 시내 태사묘 출처 구글 이미지]

검제, 의성 김씨 학봉 종택


서후면사무소를 지나면 오른쪽 산자락 능동(陵洞)골로는 길가의 빗돌엔 ‘검제(금계)’라고 씌어 있는데 여기엔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93)을 불천위로 모시는 의성 김씨 검제 종가가 있다.


검제의 학봉 종택에는 많은 고문서가 있어서 일괄유물로 56종 261점을 보물 제905호로, 17종 242점을 보물 제906호로 지정하여 이것이 지금 운장각(雲章閣)에 보관·진열되어 있다.


특히 의성 김씨 검제 종가는 보종(輔宗)을 잘하는 것으로 안동에서도 이름높은데, 10년 전 김혈조 교수가 이 댁을 답사했을 때는 종손 이하 어른들은 누런 두루마기로 정장을 하고 맞이하며 동네 친척 아낙들이 총동원되어 80명 밥을 해주는데 그것은 고마움을 넘어서 큰 볼거리였다고 한다.

[의성 김씨 검제 종가 출처 본문]

우리가 역사에서 배운 바로 학봉은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에 부사(副使)로 갔을 때 “반드시 전쟁이 있을 것(必有兵禍)”이라고 보고한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는 반대로 “그러한 정세를 보지 못했다(不見如許情形)”라고 잘못 말한 장본인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학봉은 자신의 과오에 사죄하듯 초유사(招諭使)로 종군해서 전국에 격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하고 관찰사로서 노심초사하다가 결국 진주성이 함락되기 얼마 전 성 안에서 전사하고 만다. 이처럼 학봉은 우리가 단편적으로 알고 있는 그런 속 좁은 서생이 아니었다.


학봉이 안동에서 특히 존경받고 이름높은 이유는 퇴계의 수제자로 학문이 깊었고 그를 따르는 제자가 많았다는 사실에 있다. 학봉은 서애와 함께 퇴계의 오른팔, 왼팔을 다투는 위치에 있었고, 바로 그 힘겨루기로 끝끝내 해결을 보지 못한 병호시비를 몇백년 두고 계속하게 되었던 것이다.


병호시비, 3차의 공방전


병호시비는 류성룡의 병산서원과 김성일의 호계서원 간의 두분 사후 라이벌 대결을 말하는 것이다. 퇴계 이황의 양대 제자라 할 두분을 비교해보면 나이는 학봉이 네살 위였으나 벼슬은 서애가 영의정을 지낸 데 비해 학봉은 경상도 관찰사에 머물렀다.

[류성룡과 김성일 출처 구글 이미지]

서애 쪽은 벼슬이 높은만큼 관으로 진출하는 이가 많았으나 학봉 쪽은 학문에 힘쓰는 이가 많아 영남 유림은 오히려 학봉 쪽이 강했다. 둘은 이래저래 쌍벽의 수재였는데 결국은 두분 사후에 제자들간에 라이벌 대결이 벌어진 것 이었다.


시비의 발단은 1620년 퇴계를 모신 호계서원(당시 이름은 여강서원)에 수제자 두분을 함께 모시기로 결정을 보았는데 누구를 왼쪽(상위)에 모시느냐로 시비가 일어난 것이다. 학봉 쪽은 장유유서로 하자고 했고 서애 쪽은 관작으로 해야 한다고 했는데, 결국 정경세(鄭經世)의 결정으로 서애를 왼쪽에 모시는 걸로 결론이 났다.

[호계서원 출처 구글 이미지]

병호시비 2차전은 1805년 영남 유림에서 서울 문묘에 서애, 학봉 및 한강(寒岡) 정구(鄭逑),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네분을 종사케 해달라는 청원을 올리기 위해 네명의 자손들이 서울에 모여 소장을 쓰는데, 누구를 먼저 쓰느냐는 문제를 가지고 또 다툼이 생겨 양쪽에서 모두 상소를 올리니 조정에서는 둘 다 기각해버렸다.


학봉, 서애의 알력으로 다 된 문묘종사를 망친 한강, 여헌의 사림들이 대구 이강서원에 모여 독자적으로 상소할 것을 결정하고 영남 유림에 통보하자, 안동의 유림은 한강, 여헌 양 파를 규탄하는 통문을 띄우기로 결정했는데, 그 통문을 전주 류씨 류회문이 작성하면서 두 선생의 순서를 학봉, 서애로 했다는 것이다(3차 시비).


이에 반발한 서애파들은 결국 호계서원과 결별하고 이후는 병산서원에 따로 모이게 되니 안동의 유림은 학봉의 호계서원(사실은 3위 모두 여기에 모셔져 있음)과 서애의 병산서원으로 갈라서게 되었다. 이 자존심과 체면 싸움은 학봉학통과 서애학통의 알력이기 때문에 안동 유림 전체가 이 시비에  말려들고 만 것이다.


아마도 안동 양반들의 엄청스런 고집을 말하라고 하면 이 병호시비처럼 좋은 예가 없으며, 그런 병통은 오늘의 안동인에게도 어느정도는 전통으로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안동 갑갑이, 안동 답답이라는 말 이외에 안동 외고집, 안동 x고집이라는 말도 생겨난 것이다.


풍산들판을 지나면서


차머리를 하회에 두고 34번 국도를 어느정도 달리다보면 풍산읍이 나오고 풍산읍 상리(上里) 어귀의 체화정(棣華亭)부터 또다시 반촌의 행렬이 이어진다.


체화정은 예안 이씨 이민적(李敏迪, 1663~1744)이 지은 것으로, 그의 조카 이한오(李漢伍)가 노모를 모시고 효도한 곳이고, 훗날 순조가 효자 정려(旌閭)를 내린 명소이다. 체화란 산앵두나무의 꽃으로 『시경』에서 형제의 두터운 우애를 비유적으로 노래하였다.


특히 이 방 창살문은 그 구성과 무늬가 매우 기발하고 아름답기로 유명한데 방문 바로 위에는 담락재(湛樂齋)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이 현판은 안동 바로 곁인 안기에서 찰방을 지낸 단원 김홍도가 1786년 나이 42세 때 3년간의 임기를 마치고 돌아가면서 여기서 즐거운 한때를 가졌던 것을 기념하며 이별의 징표로 써준 것이다.

[체화정과 창살 출처 본문]
[담락재와 단원 김홍도의 현판 출처 본문]

풍산들


풍산읍을 벗어나면 넓은 들판과 마주하게 되는데, 여기가 풍산들, 북부 경북의 곡창지대이며, 안동 곡물 생산량의 절반을 감당하고 있는 곳이다. 풍산읍 우렁골 선성 이씨, 오미동(五美洞) 풍산 김씨, 소산(素山) 안동 김씨, 하회 풍산 류씨, 풍산 가곡(佳谷) 안동 권씨 등등이 모두 이 언저리를 돌면서 동성마을을 이루고 있다.


풍산들이 유난히 넓고 풍요롭게 느껴지는 것은 풍산을 거쳐 하회로 들어가는 찻길이 풍산들의 가장자리를 타고 돌기 때문에 그 넓이의 최대치를 보게 되는 것도 한 이유이지만, 또다른 큰 이유는 북부 경북 순례길은 산등성, 분지뿐이라는 그 상대성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안동에만 틀어박혀 어린시절을 보낸 안동 갑갑이는 ‘이 세계에서 가장 넓은 들판은 풍산들’이라고 생각하며, 나중에 커서 김제 만경의 지평선이 가물거리는 장대한 외배미들을 보면서도 ‘안동에 가면 풍산들은 이보다 더 크다’고 엉뚱한 고집을 부리며 어려서 상상 속에 키워온 이미지를 좀처럼 바꾸지 않는다.


안동사람들은 이처럼 자존심이 강하고 자기중심적 사고도 강하다. 그래서 안동에 앉아서 남쪽을 내려다보면서 영천, 경주, 대구 등 능교형 사람들을 ‘하도(下道)사람’이라고 하기도 한다. 이게 안동의 자존심이고, 안동사람들이며, 그게 풍산들이다.

[풍산 들판 출처 본문]
북부 경북 순례
하회・예안
[하회, 도산서원 답사 경로 출처 본문]

하회마을 예찬


관광 안동의 명소로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은 하회마을이다. 실제로 하회의 풍산 류씨 동성마을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보존된 민속촌이다. 그 규모와 내용의 다양성 그리고 수려한 풍광에서 하회를 당할 곳은 없다.


하회는 이중환의 택리지에 나오는 유명한 가거처(可居處)로 일찍부터 명성을 얻고 있었다. 택리지가 보증한 하회는 풍산들판의 꽃뫼〔花山〕를 꽃내〔花川, 즉 낙동강)가 오메가(Ω)자를 쓰듯 반 바퀴를 휘돌아나가므로 '물돌이동'이라고도 하는데, 풍수상으로는 태극형 또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이라고 한다.


그래서 큰 인물이 많이 나왔고 평온을 유지해왔다는 것이다. 서애 류성룡과 그의 형인 겸암(謙庵) 류운룡(柳雲龍)에 의해 가문이 크게 일어난 이 풍산 류씨의 하회마을에는 지금 서애 종택인 충효당과 겸암 종택인 양진당(養眞堂)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그 외에도 북촌댁, 남촌댁, 빈연정사(賓淵精舍), 원지정사(遠志精舍) 등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목조건축이 많고 많아 전통한옥의 특징과 아름다움을 살피는 데 여기만큼 좋은 볼거리를 제공하는 곳도 없다.

[하회마을 전경 출처 본문]
[하회마을과 양진당 출처 본문]

병산서원으로 가는 길


하회의 답사적 가치는 어떤 면에서는 하회마을보다도 꽃뫼 뒤편 병산서원(屛山書院)이 더 크다고 할 수 있다. 병산서원은 1572년 서애 류성룡이 풍산읍내에 있던 풍산 류씨 교육기관인 풍악서당(豐岳書堂)을 이곳 병산으로 옮겨 지은 것이다.


이후 1613년에는 정경세를 비롯한 서애의 제자들이 류성룡을 모신 존덕사(尊德祠)를 지었고, 1629년에는 서애의 셋째아들인 수암 류진을 배향했으며 1863년엔 병산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그리고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 때도 건재한 조선시대 5대 서원의 하나이다.

[병산에서 내려다 본 병산서원 전경 출처 본문]

본래 서원의 구조는 매우 간명하게 되어 있다. 1543년, 주세붕(周世鵬)이 세운 소수서원을 기폭제로 하여 전국으로 퍼져나간 서원은 그 구조가 거의 공식화되었을 정도로 아주 정형적이다. 크게 선현을 제사지내는 사당과 교육을 실시하는 강당 그리고 원생들이 숙식하는 기숙사로 이루어 진다.


이외에 부속건물로 문집의 원판을 수장하는 장판고(藏板庫), 제사를 준비하는 전사청(典祀廳), 그리고 휴식과 강학의 복합공간으로서 누각과 어느 건물에나 당연히 있을 뒷간이 있으며, 서원을 관리하고 식사를 준비하는 관리소인 고사는 별채로 구성된다.


건물의 배치방법은 성균관 문묘나 각 고을의 향교와 비슷하여 남북 일직선의 축선상에 외삼문, 누각, 강당, 내삼문, 사당을 일직선으로 세우고 강당 앞마당 좌우로 동재와 서재, 강당 뒤뜰에 전사청과 장판고를 두며 기와돌담을 낮고 반듯하게 두른다. 사당과 강당은 구별하여 내삼문 좌우로 담장을 쳐서 일반의 출입을 막는다.

[병산서원 복례문 출처 본문]

병산서원이 낙동강 백사장과 병산을 마주하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곧 병산서원의 정원이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를 건축적으로 끌어들이는 건축적 장치를 해야 이 자연공간이 건축공간으로 전환되는 것인데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이 만대루이다.


외삼문을 열고 만대루 아래로 난 계단을 따라 서원 안마당으로 들어서면 좌우로 시위하듯 서 있는 동재, 서재를 옆에 두고 돌계단을 올라 강당 마루에 이르게 된다. 강당 누마루에 올라앉으면 양옆으로는 한 단 아래로 동재와 서재가 지붕머리까지 드러내면서 시립하듯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다.


동재는 일신재((日新齋), 서재는 직방재(直方齋)라 하여 답사객들은 어디서 들어본 듯한 말인데 그 뜻을 알 듯 모를 듯하여 고개를 갸우뚱하곤 한다.


일신이란 '대학'의 "구일신 일일신 우일신(苟日新 日日新 又日新)"에서 나온 것으로 "진실로 날로 새롭겠거든 날로 날로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하라"라는 뜻이다. 직방이란 '주역' 곤괘의 "경이직내(敬而直內) 의이방외(義以方外)"에서 나온 말로 "공경하는 마음으로 내면(마음)을 곧게 하고, 올바름으로 외면(행동)을 가지런히 한다"에서 나온 것이다.


강당에서 고개를 들어 앞을 내다보면 홀연히 만대루 넓은 마루 너머로 백사장이 아련히 들어오는데 그 너머 병산의 그림자를 다 받아낸 낙동강이 초록빛을 띠며 긴 띠를 두르듯 흐르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서원 대청마루에서 내다 본 전경 출처 본문]

만대루에 중심을 두는 건물배치는 건물의 레벨 선정에서도 완연히 나타난다. 병산 서원이 올라앉은 뒷산은 화산(꽃뫼)이다. 이 화산의 낮은 구릉을 타고 외삼문에서 만대루, 만대루에서 강당, 강당에서 내삼문, 내삼문에서 존덕사로 레벨이 올라간다.


병산서원은 주변의 경관과 건물이 만대루를 통하여 흔연히 하나가 되는 조화와 통일이 구현된 것이니 이 모든 점을 감안하여 병산서원이 한국 서원건축의 최고봉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병산서원에는 마스터플랜뿐만 아니라 디테일에서도 감탄을 자아내는 아름다움이 있다. 우선 만대루로 오르는 두개의 통나무 계단은 그 자체가 감동적이다. 그런 통나무 계단은 세계에 다시는 없을 것이다.

[만대루 출처 본문]
[만대루 나무 계단 출처 본문]

병산서원의 외삼문 돌담 모서리에 있는 2인용 뒷간은 ‘뒷간연구가’이기도 한 민속학자 김광언(金光彦) 교수가 보증하는바 최고의 명작 뒷간이다. 깔끔하고 단정한 면 분할과 갸름한 타원형의 밑창은 뛰어난 기하학적 구성이다. 하늘이 열린 야외용 뒷간이 있는데 우리는 ‘머슴 뒷간’이라고 부른다.

[뒷간과 머슴 뒷간 출처 본문]

소산의 안동 김씨


하회에서 풍산들을 지나 얼마 안되는 거리에 왼쪽으로 거하게 들어앉은 반촌이 보이는데, 여기는 소산(素山), 그 유명한 안동 김씨의 동성취락이다. 소산마을 안쪽에는 청원루(淸遠樓), 안동 김씨 종택인 양소당(養素堂)과 선(先)안동 김씨 종택인 삼소재(三素齋)가 있고, 길가로 보이는 늠름한 정자는 삼구정(三龜亭)이다.


안동 양반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부지불식간에 조선말기에 세도정치를 주도한 안동 김씨의 후예로 생각하면서 심하게는 나라를 망친 세도가의 후손으로 못마땅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건 정말로 오해다. 세도정치를 한 안동 김씨는 본관이 이곳 소산일 뿐 실제로는 서울 장동(壯洞 )에 살고 있던 '장동 김씨'였다.


안동 김씨는 선(先)안동과 후(後)안동이 시조가 다르다. 선안동 김씨는 신라 경순왕의 넷째아들의 둘째아들인 숙승(叔承)을 시조로 하고 고려 때 장수인 김방경(金方慶)을 중시조로 하며 인조대 김자점(金自點), 독립지사 김구(金九) 등이 이 집안 출신이다.

  

후안동 김씨는 삼태사 중 하나인 김선평(金宣平)의 후예로 그의 9대손 되는 김삼근(金三近)이 비안(比安) 현감에서 물러나면서 이곳 소산(시미마을)에 정착하여 입향조가 되니 그 후손을 비안공파라 한다. 비안공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만아들 계권(係權)은 한성부 판관을, 둘째 계행(係行)은 대사성을 지냈다.


둘째아들 김계행은 무오사화 때  부당함을 상소하고는 소산으로 낙향하고 이후 길안 묵계(默溪)로 옮겨 그의 후손들은 거기에 칩거하게 된다. 안동답사의 비장처(秘藏處)라 할 길안면의 묵계서원, 묵계  종택, 만휴정(晩休亭)이 모두 그분의 유적이다.


그러나 맏이 김계권은 출셋길로 나아가 중앙에 진출하며 명문의 토대를 쌓는데, 특히 둘째 아들 김번의 후손들은 서울 장동의 청풍계(淸風溪, 청운동)에 세거(世居)하게 된다. 이후 장동파는 크게 번성하여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자손 중에는 왕비가 셋, 임금의 사위가 둘, 정승이 15명, 판서가 51명, 관찰사가 46명, 시호 받은 이가 49명이 되는 영광과 권세를 누린다. 이들이 세도정치의 주역인 안동 김씨 집안이다.


그러나 서울 장동파는 소산을 본향으로 잊지 않았다. 김상헌이 병자호란 때 항복문서를 찢고 단식으로 척화(斥和)를 주장하다 여의치 않자 이곳으로 내려와 칩거하면서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뜻으로 청원루라 이름짓고 심양으로 끌려갈 때까지 여기 살았다.(『소산동의 연원』, 안동김씨소산종회 1986)

[도산서원 가는 길 출처 본문]

깔끔한 오천 군자리 문화재단지


안동에서 도산서원으로 가는 예안길을 따라가면 와룡면 소재지를 거쳐 감애리를 지나면 이내 오른쪽 산자락에 잘생긴 기와집들이 제법 장대하게 펼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는 와룡면 오천동(烏川洞), 속칭 오천 군자리(君子里) 문화재단지다.


본래 안동 예안면 오천동, 이곳 말로 외내에 있던 광산 김씨 예안파의 중요 건물들이 안동댐으로 수몰되게 되자 1974년 이곳으로 집단이주하여 하나의 건축문화재단지를 이룬 것이다. 광산 김씨의 예안 입향조는 농수(聾叟) 김효로(金孝盧, 1455~1534)다.


이들의 자손들이 번창하여 명문으로 우뚝 서게 되었 으며, 진보 이씨, 봉화 금씨, 안동 권씨 등과 통혼함으로써 영남 사림의 한 일가를 이 루게 되었다. 지금 오천 군자리에 있는 집들은 모두 입향조에서 시작하여 그의 증손자들에 이르는 분들이 지은 사랑채와 정자들로, 이런 예는 참으로 드문 것이다.


특히 건물을 이전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발견이 있었다. 대종택을 해체하다 대들보와 지붕 사이 빈 공간에서 입향조의 증조부부터 대대손손에 이르기까지 500년에 걸친 고문서가 고스란히 나온 것이다. 여기에는 교지(敎旨), 호구단자(戶口單子), 토지문서, 분재기(分財記), 혼서(婚書) 등 고문서 2천 점과 고서 2,500여 권이 들어 있어, 이 고문서를 보물 제1,018호로 지정하였고 그 유물은 단지 내 승원각(崇遠閣)에 보존되어 있다.

[군자리 전경 출처 본문]

오천 군자리 문화재단지에는 후조당(後彫堂), 대종택 사랑채, 읍청정(揖淸亭), 설월당(雪月堂), 탁청정(濯淸亭), 낙운정(洛雲亭), 침락정(枕洛亭) 등 일곱 채의 사랑채와 정자가 있다.


이 중에서 침락정은 동서로 마주 세운 출입문이 반월형으로 어찌나 맵시가 어여쁜지 여기에 와서 이 예쁜 작은 문에서 사진 찍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침락정 입구의 일각문 출처 본문]

불천위제사의 뜻


외내 광산 김씨의 사당은 입향조인 김효로와 그의 증손자로 양관 대제학을 지내고 임란 때 의병장을 지내 가문을 한층 빛낸 근시재 김해의 부조위(不祧位)를 모신 곳이다. 부조위란 불천위(不遷位)라고 한다.


본래 제사는 고조할아버지까지 4대 봉사를 하고 4대가 지나면 조묘제(祧墓祭)를 지내고 더이상 제사지내지 않게 되어 있으나 나라에 큰 공이 있거나 학덕이 높은 분에 대해서는 국가에서 영원토록 위패를 '옮기지 않고(不遷)' 모시는 것을 허락했는데, 따라서 불천위를 모신다는 것은 그 가문의 영광이며 권위인 것이다.


이러한 불천위는 반드시 국가〔禮曹〕에서 일종의 라이선스를 발급하듯 허가를 내려주었는데, 나중에는 도에서 인정하는 도천(道遷), 서원에서 인정한 원천(院遷) 등으로 인플레 현상이 일어나고 조선말기로 가면 그것을 문중이 결정했다고 해서 문천(門遷) 또는 사조(私祧)라고 하는 것까지 생겨났다.


안동문화를 이해하는 데 제사의 실체를 모르면 아무것도 안된다. 이 군자리 단지 안에만도 제사를 위한 공간이 세 채나 있다. 종갓집에서는 1년에 최소한 열두번의 제사를 지내게 된다. 추석과 설의 차례(茶禮), 불천위 할아버지·고조할아버지·증조할아버지·할아버지·아버지 모두 다섯분의 내외분 기제사가 합해서 열번이다.

[불천위제사 장면 출처 본문]

안동사람들에게 제사는 가문의 결속과 질서를 세우는 중요한 형식으로 작용한다. 그러니까 제사는 죽은 조상을 통한 산 자손들의 만남이라는 속뜻이 서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제사의 기본은 조상에의 경의에 있다.


특히 불천위 조상에 대한 긍지는 기독교인이 예수님 모시듯, 절집에서 부처님 모시듯 거의 절대적이다. 그것은 그 조상을 구심점으로 해서 집안이 결속한다는 뜻도 있지만 그 조상을 공경함으로써 자신을 항시 반성하면서 조상에게 부끄러운 일을 해서는 안된다는 다짐의 계기도 되는 것이다.


북부 경북 순례
도산서원


사라진 예안길과 도산서원 진입로


오천 군자리 문화재단지에서 다시 큰길로 나와 도산서원을 향하여 산자락 두어 굽이를 넘어가면 차창 오른쪽 저 멀리로 산상의 호수 안동호가 유연히 떠오른다. 옛날에 도산서원으로 가던 예안길과 예안 마을은 송두리째 물에 잠기고, 불안스러울 정도로 높은 교각에 떠받쳐 있는 좁고 긴 '예안교’가 질러지고 있다.


예안장터 사람들이 집단으로 이주해서 형성한 새 마을인 도산면 서부리, 퇴계가 존경해 마지않던 고향 선배로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만사(挽詞)와 행장(行狀)을 지어 바친 농암 이현보의 유적들이 많던 분천(汾川), 여기 말로 부내를 지나면 도산서원이 나타난다.

[겸재 정선의 「계상정거도(溪上靜居圖)」옛 도산서원의 그윽한 분위기를 잘 전해준다. 출처 본문]

도산서당에서 도산서원으로 되기까지


퇴계가 처음 도산 남쪽에 서당터를 잡은 것은 57세 때인 1557년이었다. 그러나 이 터가 마음에 차지 않아서 지금 자리로 새로 옮기게 됐고, 5년간의 공사 끝에 61세 되는 1561년에 완공을 보게 됐다. 이때 지은 집은 선생의 공부방인 도산서당과 학생들의 기숙사인 농운정사(隴雲精舍), 두 채뿐이었다.


도산서당의 건축정신에 대해서는 퇴계 자신이 쓴 「도산잡영 병기(陶山雜詠幷記)」, 풀이하여 ‘도산에서 이것저것 읊은 시에 붙인 글’에서 자세히 살필 수 있다.


처음에 내가 퇴계 계상(溪上)에 자리를 잡고 시내 옆에 두어 칸 집을 얽어짓고 책을 간직하고 옹졸한 성품을 기르는 처소로 삼으려 했는데, 벌써 세번이나 그 자리를 옮겼으나 번번이 비바람에 허물어졌다. 그리고 그 시내 위는 너무 한적하여 가슴을 넓히기에 적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옮기기로 작정하고 도산 남쪽에 땅을 얻었던 것이다.

거기에는 조그마한 골이 있는데 앞으로는 강과 들이 내다보이고 깊숙하고 아늑하면서도 멀리 트였으며 산기슭과 바위들은 선명하며 돌우물은 물맛이 달고 차서 이른바 (『주역』에서 말한바) 비돈(肥遯)할 곳으로 적당하였다. 어떤 농부가 그 안에서 밭을 일구고 사는 것을 내가 샀다.


그러다 학생들이 늘어나면서 기숙사 시설이 부족하던 차에 제자 지헌(芝軒) 정사성(鄭士誠, 1545~1607)이 입학할 때 그의 아버지가 기숙사 별관으로 역락서재(亦樂書齋)를 지어주었다. 여기에다 나중에 하고직사(下庫直舍)라고 불리는 관리 주사(廚舍)가 덧붙여진 것이 퇴계 생전 도산서당의 전부였다.

[도산서원 전경 출처 본문]

1570년, 퇴계가 세상을 떠나고 3년상이 지나자 제자들은 당연히 선생을 모실 사당과 선생의 학문을 이어받을 서원을 짓기로 결정하였고, 그것은 도산서당의 위쪽 산을 깎아 세우기로 하였다. 그래서 사후 4년 뒤인 1574년에 착공하여 이듬해인 1575년에 낙성을 보았다.


그래서 서당 위쪽으로 진도문(進道門), 전교당, 동재, 서재라는 강학공간과 내삼문, 전사청, 상덕사라는 제사공간 그리고 상고직사(上庫直舍)라고 부르는 서원 관리소와 인쇄원판을 보관하는 장판각(藏板閣) 등 부속건물을 갖추어 전형적인 서원을 세우게 되었다.

[도산서원 현판 한석봉의 글씨 출처 본문]

그리고 ‘위대한 20세기’에 들어와 도산서원은 1969년 ‘도산서원 성역화 사업’으로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시행됨으로써 상처와 변질을 맞게 된다. 변질이란 진입로가 서쪽 기슭 천광운영대(天光雲影臺) 쪽으로 뚫림으로써 도산서원 진입계획 전체가 일그러져버린 점이다.


상처란 지금 도산서원 앞마당을 무려 5미터 이상 높이로 흙을 북돋아 평평하게 만들어놓은 점이다. 그래서 서원 앞마당의 은행나무, 벚나무, 갯버들 등이 몸체 줄기는 땅에 묻히고 가지들이 지표에 들떠 있어 나무마다 기이한 모양이 됐다. 한마디로 1969년 도산서원 성역화 사업은 속된 관광화 사업이 되고 만 것이다.

[도산서당과 현판 출처 본문]

현대 도산서원의 진풍경 둘


요즈음 도산서원엔 퇴계 선생 당년엔 없던 두개의 진풍경이 있다. 모두가 영광과 상처를 함께 지닌 것으로 혹자는 영광을, 혹자는 상처를 먼저 생각한다.


하나는 도산서원 앞마당에 당도하면 제일 먼저 우리의 눈을 끄는 것으로 호수가 된 낙동강 한가운데 섬으로 솟아 있는 시사단(詩社壇)이다. 수몰되기 전 여기는 백사장과 솔밭이 시원스레 펼쳐진 강변이었다.


그러던 1792년 3월, 정조는 규장각 대신인 이만수(李晩秀)를 보내 도산서원에 치제(致祭)하고 별과(別科)를 보게 했는데 응시자가 너무 많아 서원에서는 볼 수 없어 과장(科場)을 강변으로 옮기고 시험문제는 소나무 가지에 걸어놓고는 시험을 보니 답안지 제출자만도 3,632명이었다는 것이다.


그때의 일을 기념하여 단을 쌓고 기념비를 세우니 그것이 시사단이다. 이 유래깊고 자랑스러운 시사단이 물에 잠길 처지에 놓이게 되자 1976년 높이 10미터, 반경 10미터의 둥근 축대를 쌓아 그 위로 올린 것이다.

[시사단 출처 본문]

또 하나는 도산서원 정문을 들어서면서 우리가 제일 먼저 마주하게 되는 키 큰 금송(金松)이다. 이 금송은 도산서원 성역화 사업 입안자였던 故 박정희 대통령이 청와대 집무실 앞에 심어 아끼던 금송*으로 1970년 12월 8일 도산서원 경내를 빛내기 위해 손수 옮겨심은 것이다.


소나무·전나무는 집의 울 앞에는 안 심는다는 조상의 뜻을 거스른 것이 그 또한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 이 금송은 2년 후 고사되었고 다른 금송을 구입해서 식재하였다가 현재는 서원 밖으로 옮겨졌다.

[도산서원 내의 금송과 2013년 도산서원 밖으로 옮겨진 금송 출처 구글 이미지]

퇴계의 일생


퇴계 선생은 1501년 예안 온계리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일곱달 만에 아버지를 여의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타고나기를 학문을 좋아하여 선친의 책을 밤낮으로 읽었는데, 젊은 나이로 과부가 된 어머니의 애비 없는 자식 소리 듣지 않게 예의바르고 열심히 공부하라는 가르침을 깊이 새겼다.


자라면서 12세 때는 숙부에게 논어를 배웠고, 스무살에는 벌써 주역을 홀로 탐구했다. 이때 건강을 해쳐 소화불량으로 평생 고생하고 채식만 했다. 스물한살에 결혼하고, 스물셋에는 서울로 올라가 과거를 공부했는데 과거에 세번이나 떨어져 크게 자책하다가 이때 『심경(心經)』이라는 책을 읽고 크게 깨친 바가 있었다.


결국 스물일곱에 진사시에 합격했고, 서른세살에 문과에 합격하여 외교문서를 다루는 승문원 관리가 되어 비로소 벼슬길에 나서게 됐다. 과거 공부에 열중하는 동안 가정에는 부인이 둘째아들을 낳고 산후조리를 잘못해 세상을 떠났고 전처 사후 3년 뒤 재혼을 하는 변고가 있었다. 이후 퇴계는 관리로서 출셋길을 걸어 42세 때는 암행어사가 되고 43세엔 성균관 대사성에 이른다.


그러나 퇴계는 날이 갈수록 고향으로 돌아와 학문에만 전념하고 싶어했다. 사표가 수리되지 않아서 불려가 관직에 머무르기를 5년 정도 더 하는 동안 무고로 관직이 박탈됐다가 복직되기도 하고 둘째부인마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었다. 46세 때는 고향 시냇가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성리학 연구에 전념한다. 이때 토계(兎溪)를 퇴계로 고치고 퇴거(退居)의 뜻을 다졌다.


그러나 48세에 단양군수로 발령받아 다시 나갔고, 이어 풍기군수가 되며 이때 조정으로부터 백운동서원의 지원금을 받아내는 데 성공하여 소수서원이라는 사액을 받고 지방교육기관으로서 서원제도를 확립하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웠다. 그리고 군수직을 사직하고 50세에는 고향으로 돌아와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57세에 도산서당을 짓기 시작하여 61세 때  완공했다.


이에 덕망 높은 학자로 전국에 알려져 각지에서 우수한 학생들이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다. 제자인 고봉(高峰) 기대승(寄大升)과  8년간 논쟁한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은 퇴계의 학문과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나 거듭되는 조정의 부름을 단호히 뿌리치지 못해 공조판서, 예조판서를 거쳐 69세에 우찬성이 될 때까지 부임과 사퇴를 거듭했고 물러나서는 도산서당에서 학문의 탐구와 교육에  힘썼다.


사단칠정론이란 인성론에서 인간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네가지 마음씨, 즉 인의예지(仁義禮智)와 인간의 일곱가지 감정, 즉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이 어떻게 일어나느냐를 설명한 것인데, 퇴계는 주자 이래의 학설에 따라 사단은 이가 발한 것이고, 칠정은 기가 발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의 제자 고봉 기대승이 여기에 문제제기를 하여 장장 8년간의 왕복서한으로 이루어진 논쟁 끝에 퇴계는 자기 설을 수정하여 “사단은 이가 발현하여 기가 거기에 따르는 것이요(理發氣隨之), 칠정은 기가 발현하고 이가 거기에 올라타는 것(氣發理乘之)”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1570년, 70세로 고향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성리학자로서, 뛰어난 이론가로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 『송계원명이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 『심경후론(心經後論)』 『성학십도(聖學十圖)』 등을 지었다.


또한 교육자로서 서애·학봉·월천·한강 같은 직접 제자와 율곡(栗谷) 이이(李珥) 같은 간접 제자를 무려 360명이나 배출했으며, 빼어난 시인으로서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 「매화음주시(梅花飮酒詩)」 등 2천여 수를 남겼다.


청량산과 퇴계의 묘소


퇴계 태실은 본래 퇴계 할아버지 되시는 이계양(李繼陽)의 고택으로 보통 노송정 종택이라고 하고, 퇴계 종택은 또 퇴계의 종택으로 각각 불천위를 모시는 종갓집으로 종손 되는 분의 가족이 이 유서깊은 집을 지키고 계신다. 답사는 당연히 퇴계의 묘소, 그의 후손인 이육사(李陸史) 생가가 있는 원촌리까지 이어지게 된다.


“1570년 12월 8일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나흘 전에 조카에게 유서를 받아쓰게 하면서 비석은 조그만 돌 앞면에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고만 쓰고 자신이 지은 명문(銘文)을 새길 것이며, 기고봉 같은 사람이 비문을 쓰면 장황하고 없는 것도 만들어낼 수 있으니 그냥 간단히 쓰라고 했지.

그리고 하루 전날에는 제자 이덕홍에게 ‘책은 네가 맡아 관리하라’고 했어요. 그리고 당일 아침 ‘저 매화나무 물 줘라’ 하셨고, 내내 아무 말 없다가 저녁에 일으켜 앉히니 앉은 채로 서거하셨지.

[퇴계 종택과 퇴계 묘소 출처 본문]
북부 경북 순례
임하・영양


종가건축의 대표작, 내앞 종가


안동 주변 임하댐에 이르면 강 건너편으로는 수몰 전 송림이 섬으로 된 진풍경과 함께 이내 천전동(川前洞), 여기 말로 '내앞'에 다다르게 된다. 내앞은 『택리지』에서 뛰어난 가거처로 지목한 계거(溪居)의 명당으로 의성 김씨 대종가와 소종가를 비롯한 의성 김씨들의 큰 동성마을이다.


의성 김씨는, 집현전 학사였던 휴계(休溪) 김한계(金漢啓)가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보고는 안동으로 내려온 뒤 그의 아들인 망계(望溪) 김만근(金萬謹)이 임하에 살던 오씨 집안으로 장가가면서 이곳에 정착하게 됐다. 그후 그의 손자인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아들 5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이라는 영광을 안으며 집안을 크게 일으켰다.


내앞 대종가는 바로 청계공을 불천위로 모시는 곳이며, 그의 작은아들인 학봉 김성일은 검제로 분가했고, 소종가는 청계공의 손자로 임란 때 의병을 일으킨 운천(雲川) 김용(金涌)의 종가다. 이 내앞의 의성 김씨는 만주서 독립투쟁한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을 비롯하여 수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안동에서 명문 중의 명문임을 자랑한다.


의성 김씨 내앞 대종택은 보물 제450호로 지정될 정도로 건물이 오래되고 또 달리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웅장한 규모와 복잡한 공간운영을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건축가들에게는 한옥의 다양한 공간변용의 예를 연구하는 데 가장 좋은 모델로 지목되고 있다.


집 정면으로는 행랑채가 한 일자로 길게 뻗어 있고, 그 안쪽에 미음자형 안채와 별당의 사랑채가 뒷마당으로 빠지는 문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데, 사랑채는 긴 복도로 행랑채와 연결되어 뱀 사(巳)자형 평면을 그리고 있다.


게다가 사랑채에는 넓은 제청이 붙어 있어서 그 공간의 운영이 아주 다양하고 공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또 안채를 보면 대청마루가 3단으로 단을 이루고 부엌 위로는 2층을 달아매어 그 위용이 당당하다.

[내앞 대종택, 대청마루, 진입 공간 출처 본문]

안동 양반은 누구인가


안동 양반에는 몇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입향조는 대개 세조찬탈 또는 무오·갑자사화 때 수절(守節)하여 낙향한 분이라는 점, 둘째 문중의 중흥조는 본인이나 그 자제가 문과에 올라 가문을 빛낸 분이라는 점, 셋째 문중에 퇴계의 문하생으로 석학이 된 분이 있는 집안, 넷째 임진왜란때 의병을 일으킨 분이 있는 집안 등 네가지 유형을 다 갖추었거나 최소한 하나를 갖고 있어야 안동에서 양반 반열에 든다.


그리고 17세기로 들어서서 정국이 노론 전권시대로 들어가면 안동의 퇴계학파 남인계열은 출세의 길이 끊어지면서 이른바 혼인을 잘 치름으로써 반가의 품격을 유지하지만 벼슬로 나가는 사람이 없게 되니 가산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어 나중에는 벼슬도 돈도 없이 이름만 양반으로 남는 집안이 많아졌다.


가난하고 벼슬 없는 안동 양반은 한번 양반의 룰을 어기면 다시는 복귀할 근거가 없었으니 죽으나 사나 그 규범을 고지식하게 지키는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내놓고 이렇게 말할 수 없는 일이니 그들 나름대로 명분을 강화하게 되었다.


그래서 안동의 양반들은 벼슬보다도 학문과 인격의 완성이 더 중요하다는 학자적 긍지, 선비의 높은 도덕률로 양반의 체통을 지켜왔던 것이다. 자식으로 하여금 그것을 고수케 가르쳤고, 문중이 이를 감시했다. 이것이 개화기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직된 사고는 시대의 조류 속에서 스스로를 자멸케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안동 양반들이 세상에 대고 다시 큰소리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일제시대에 항일의병과 애국계몽운동, 독립운동을 적극 벌였다는 사실에 있다. 이것이 안동 양반의 자랑이자 자부심인 것이다.


무실, 박실, 지례를 지나며


내앞을 떠나 다시 34번 국도를 타고 반변천을 따라 영양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 이내 임하댐 전망대로 가는 길이 나온다. 이를 무시하고 계속 동으로 달리면 차가 고갯마루를 올라타는 순간부터 오른쪽으로 장대한 산상의 호수 임하호가 따라붙는다.


임하호가 반변천이던 시절엔 200미터 아래쪽에 있던 마을이 무실인데 여기 살던 전주 류씨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차마 고향을 떠날 수 없는 전주 류씨 무실 종택을 비롯하여 무실 정려각(旌閭閣), 기양서당(岐陽書堂), 수애당(水涯堂) 같은 국가지정 문화재 한옥들만이 새 마을을 형성한 것이다.


무실과 항시 따라붙어 얘기되는 박곡(朴谷), 여기 말로 박실 마을이 있는데, 무실과 박실에는 전주 류씨 동성마을이 있었다. 입향조는 류성(柳城)으로 그는 학봉과 처남매부지간이었는데 처가인 내앞 가까이 자리잡고 살았으나 불행히도 나이 서른을 못 채우고 세상을 떠났다.


이후 학봉의 누님인 그의 처는 남편상을 당하자 손수 삭발하고 3년 시묘(侍墓)살이한 뒤 단식으로 자결했다. 그 열녀비가 무실 정려각이다. 그러나 그의 후손 중에는 석학이 많이 나와 퇴계의 정맥을 이었다는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임란 때 의병장을 지낸 기봉(岐峰) 류복기(柳復起) 등이 상징적 인물이 되었다.


박실 너머에는 지례예술촌이 있어서 요즘은 그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지만 예술촌의 현위치는 박곡동이며, 원래는 200미터 아래쪽 강변마을 이름이 지례였다. 지례의 입향조는 의성 김씨 지촌(芝村) 김방걸(金邦杰, 1623~96)이다.


그는 지산서당(芝山書堂)을 지어 후학을 가르쳤는데, 그 후손들이 공부를 잘해서 그 전통이 오늘에까지 이어져 박사가 열몇, 교수가 열몇, 고시합격이 거의 열 하면서 전국에서 최고임을 자랑하며 얼마 전 돌아가신 김호길(金浩吉) 박사, 그의 아우 한동대 김영길(金泳吉) 총장, 시인 김종길(金宗吉) 등 함자를 쭉 늘어놓는다.

[무실마을 입구 출처 본문]

진보, 청송보호감호소를 바라보며


임동면사무소 소재지 위로 넘어가는 임동교 큰 다리를 건너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가랫재라는 큰 고개를 넘어가게 되는데 여기부터가 청송군 진보면, 진성 이씨의 본향이다.


그런데 진보를 받쳐주는 큰 산에는 무슨 산성 같은 설치물이 산허리를 감싸고 돌아간다. 나는 처음엔 그것이 그저 진보산성이겠거니 생각하고 별 마음 쓴 바 없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바로 한국의 빠삐용 감옥, 청송보호감호소(사회보호법에 따라 보호감호 처분을 받은 대상자를 수용하던 곳)*라는 것이다.


세상에 퇴계 선생의 도산서당 앞마을은 안동호수가 삼키더니 퇴계 선생의 본관지는 감호소가 누르고 있는 것이다. *2009년 사회보호법 폐지법에 따라 ‘청송제3교도소’로 바뀌었다.


영양의 국보, 봉감 모전석탑


진보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영양, 남쪽으로 내려가면 청송, 동쪽으로 곧장 가면 영덕이다. 요즘은 각종 기행 프로가 많이 생기면서 자주 등장하고 있다. 오염되지 않은 강 반변천, 음택의 명당이 있다는 일월산(日月山), 소설 『객주』의 작가 김주영(金周榮)의 고향인 청송, 이문열(李文烈)의 고향인 영양 석보 문학기행……


그런데 영양의 국보인 봉감(鳳甘) 모전석탑은 명색이 국보 제187호인데도 공중파 방송은 고사하고 도록에서조차 제대로 주목받아본 일이 없다. 입암에서 흘러내려오는 반변천이 절벽을 타고 반달 모양으로 흘러가는 자리에 우뚝 서 있는 봉감 모전석탑은 분황사 모전석탑과 똑같은 아이디어로 쌓아올린 이형탑이다.


봉감 모전석탑은 그 자체의 건축적 조형미도 조형미이지만 주변 환경과의 어울림이 탁월하여 앞으로 별격의 답사처로 주목받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강 건너 절벽이 시루떡결같이 수평으로 썰린 듯 보이는데, 이 봉감의 모전석탑이 철추를 내리듯 수직으로 곧게 뻗어 우뚝하니 그 힘차고 장중함이 더욱 당당하다.

[봉감 모전석탑 출처 본문]

한국 정원의 백미, 서석지


입암에서 청기(靑杞)로 가는 길을 따라 얼마를 가다보면 반변천상에 불쑥 솟은 선바위, 입암(立岩)이 나오고 거기서 조금 더 들어가면 연당리 작은 마을이 나온다. 여기는 동래 정씨 동성마을로 진흙 돌담이 집집마다 둘러쳐져 있는 예스러운 동네이며, 그 한쪽 켠에 서석지(瑞石池)가 자리잡고 있다.


서석지는 이 마을 입향조인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 1577~1650)이 조성한 정원으로 조선시대 민가의 연당(蓮塘)정원으로 으뜸이라 할 만한 명작이다. 서석지는 서재인 주일재(主一齋)와 정자인 경재(敬齋)를 기역자로 배치하고 두 건물 앞마당에 해당하는 공간을 큰 연못으로 축조한 정원이다.


서석지에는 건축적 기교가 많이 구사되어 있다. 우선 연못이 그냥 사각형으로 된 것이 아니라 주일재 앞에 사우단(四友壇)을 내어 쌓아서 여기에 송·죽·매·국을 심었다. 그래서 주일재 툇마루에 앉으면 이 사우단이 앞의 시야를 막아주면서 공간을 아늑히 감싸준다. 그리고 이 사우단으로 인하여 연당의 평면은 요철을 갖게 됐다.


이 정원의 두번째 기교는 대문을 남향으로 냄으로써 진입공간이 한번 꺾인 다음 연당에 들어오게 한 점이다. 이런 대문 설정으로 감칠맛나는 공간을 확보하게 되었고, 그 대문이 비켜간 모서리 공간에 큰 은행나무를 심어서 모든 조원의 기준을 여기에 두었다. 그리고 연못의 연꽃과 울밑의 국화가 정원 원예의 대종을 이룬다.

[서석지 대문과 서석지 출처 본문]

일원의 문향, 주실마을


서석지에서 나와 영양읍으로 달리는 길은 더욱 맑고 맑은 반변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길이다. 지나다보면 ‘오일도(吳一島) 시비’도 있고 ‘문향(文鄕) 영양’이라고 쓴 빗돌도 보이며, 또 들판 한가운데로는 현2동 삼층석탑이 보인다.


영양읍을 지나 봉화 쪽으로 가다보면 강원도 산골처럼 경사가 가파르고 산이 가까이 다가서면서 일월면(日月面)이라는 멋진 이름이 나와, ‘아! 여기가 일월산이 있는 곳인가보다’ 생각하게 되고 또 가다보면 번듯한 반촌이 나오는데, 시인 조지훈(趙芝薰)의 고향으로 알려진 주곡(注谷), 속칭 주실마을로 한양 조씨 집성촌이다.


주실마을로 말할 것 같으면 한 마을에서 인물 많이 나오기로 여기만한 곳이 없을 정도이다. 영양 주곡의 입향조는 조전(趙佺)이다. 본래 한양에 뿌리를 둔 이 집안은 조광조(趙光祖) 파동이 일어나는 기묘사화 때부터 피해 다니다가 조전이 이곳에 들어온 것이 1630년 무렵이라고 한다.


이후 그분의 증손 되는 조덕순(趙德純), 조덕린(趙德隣)이 모두 대과에 오름으로써 명문의 기틀을 다졌다. 그러나 조덕린이 영조 때 사약을 받아 비운에 세상을 떠나고 역적마을이 된 주곡에서는 출셋길이 막혀 자연히 학문에만 힘을 쓰는 '문흥(文興)'이 일어났다. 조덕린은 가문의 추앙을 받아 옥천 종택에서 불천위로 모신다.


이후 개화기에 조병희(趙秉禧)가 독립협회 무렵 서울의 개화바람을 보면서 고향의 청년들을 서울로 데리고 와서 신문명을 접하게 하고 개화시켰는데, 이 개화 청년들의 다음 세대는 토오꾜오, 뻬이징, 서울로 유학을 가게 된다. 이런 개화운동의 쎈터가 마을의 월록서당(月麓書堂)이었다.


이 무렵 조지훈의 증조부 되는 조승기(趙承基)는 의병장을 하였으니 주실에서 구시대의 마지막 인물이라 할 것인데, 조지훈의 아버지 조헌영(趙憲泳)은 신간회 토오꾜오지회장을 맡아 1928년에는 신간회운동의 일환으로 영양 주곡을 양력과세로 바꾸는 파격적인 단안을 내린다. 그런가 하면 주실은 마을 전체가 창씨개명을 거부했다. 그러니 이 마을의 전통과 기개와 문흥을 알고도 남음이 있다.


1930년대에 주곡에는 ‘꽃탑회’라는 문화패가 있어 조지훈의 형인 조동진(趙東振)이 그중 인물이었고 주실에 처가가 있는 오일도가 여기에 합세했다. 그러나 조동진은 스무살에 세상을 떠나고 오일도는 그의 유작을 모아 『세림시집(世林詩集)』을 냈으며 조동진의 시는 결국 아우 조지훈에 의해 계승되었다.

[주실마을 전경과 조지훈 시비 출처 본문]
[조지훈과 고려대 교정의 시비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러나 주실마을은 유감스럽게도 6·25동란 때 오래된 집들은 불타고 지금은 몇채만 남아 옛 마을의 명색만 유지하고 있고, 대부분의 집들이 안동 양반들처럼 죽으나 사나 끼고 앉아 갈고닦는 정성과 애착은 보이지 않아 때로는 황폐하고 때로는 스산해 보였다.


봉화로 가는 길


반변천을 따라 일월산 턱밑까지 찾아온 나의 북부 경북 답삿길은 이제 꿈의 마을 같은 봉화로 향하고 있다. 주실에서 가곡을 지나면 곧 청기면 산골을 지나게 된다. 청기면을 지나면 봉화군 재산면, 재산면 지나면 명호면, 차는 사뭇 청량산 동북쪽 자락을 굽이굽이 돌아간다.


봉화에 가면 봉성면의 향교, 법전의 진주 강씨 마을, 오록의 풍산 김씨 마을, 닭실의 안동 권씨 마을, 해저와 황전의 의성 김씨 마을, 북지리의 봉화 금씨 마을이 우리가 안동의 옛 마을 답사하듯 두루 살필 명소들이다.


봉화엔 불천위 종가가 일곱이나 되며, 전국에서 한글 마을이름이 가장 많이 남아 있는 전통성을 갖고 있다. 지금 봉화의 대부분 땅이 옛날엔 안동부에 속해 있었다. 더욱이 안동에 비할 때 봉화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어서 외지인의 상처를 받지 않고 옛 이끼까지 곱게 간직하고 있는 그야말로 살아있는 민속촌이다.

[청량산과 낙동강 출처 본문]

옛날엔 퇴계가 청량산이 세상에 알려질까 두려웠다고 하더니 나는 지금 차라리 그 청량산으로 갈지언정 봉화엔 가지 못하는 것이다. 나는 시심(詩心)이 모자라 내 마음을 노래하지 못하지만 퇴계가 청량산을 사랑하여 부른 노래에 나의 마음을 얹어본다.

 

   청량산 육육봉(六六峯)을 아는 이 나와 백구(白鷗)

   백구야 날 속이랴마는 못 믿을손 도화(桃花)로다

   도화야 물 따라 가지 마라, 어부가 알까 하노라



<7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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