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불사 석굴과 경주 불국사
토함산 석불사
종교와 과학과 예술의 만남
석불사의 석굴, 그것은 종교와 과학과 예술이 하나됨을 이루는 지고(至高)의 최미(最美)이다. 거기에는 전세계 고대인들이 추구했던 이상적인 인간상으로서 절대자의 세계가 완벽하게 구현되어 있다. 우리는 석굴에 감도는 고요의 심연에서 끝도 없이 흐르고 있는 신비롭고 장중한 정밀(靜謐)의 종교음악을 감지할 뿐이다.
석굴에는 불(佛), 보살(菩薩), 천(天), 나한(羅漢)이 모두 마흔 분 모셔져 있다. 거기에는 절대자를 중심으로 한 천상의 질서가 정연하게 펼쳐져 있다. 팔만대장경으로 설명한 장엄하고 오묘한 불법이 이 하나의 석굴 안에 요약되어 있다. 그 절묘한 만다라를 모두 해석해낼 학자는 아직 없다.
석굴의 구조는 평면과 입면이 과학적이고도 철학적인 수리체계를 이루어 부분과 부분의 조화, 전체에 의한 부분의 통합이 빈틈없이 이루어져 있다. 남천우 교수는 그 엄청난 무게의 돌을 자르고 깎아 세우면서도 10미터를 재었을 때 1밀리미터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다고 했다. 즉 1만분의 1의 실수도 보이지 않은 것이다.
그 무서우리만큼 정확한 기술에는 우리 시대엔 상상도 할 수 없는 과학이 뒷받침되어 있었던 것이다. 20세기 들어와 보수에 보수를 거듭하면서도 온전한 보존책을 아직껏 마련치 못하고 있는 것은 현대의 기술만 과신하고 고대인의 과학을 무시했던 소치였다.
석굴의 제존상(諸尊像)은 분명 종교예술품이다. 아무런 생명도 성격도 없는 돌을 깎아 거기에 영원한 생명과 절대자의 이미지를 부여한 것은 종교적 열정에 근거한 예술혼의 산물이다. 고은 선생은 석굴 앞에서 “모든 이 나라의 찬미(讚美) 형용사는 그곳에 모여들었다가 하나씩 하나씩 다른 것을 찬미하기 위하여 나갔으니 석굴은 하나의 형용사로서 도저히 찬미할 수 없다”고 고백하였다.
나는 석불사 석굴에 대하여 완벽한 인간공력이 이루어낸 경이로움만 말할 수 있으며 거기에 오직 한마디만 덧붙일 수 있다. “보지 않은 자는 보지 않았기에 말할 수 없고, 본 자는 보았기에 말할 수 없다.”
석굴암은 대한민국의 국보(제24호)이자, 한국을 대표하는 석굴사원으로 그 예술성과 가치를 인정받아 불국사와 함께 1995년 12월 6일 독일 베를린에서 개최된 제19차 세계유산위원회(World Heritage Committee)에서 '석굴암과 불국사'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김대성의 창건설화
석불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대성이 두 세상 부모에게 효도하다(大城孝二世父母)」뿐이다. 위대한 명작에 대한 기록으로는 너무 빈약한 것인데, 그나마도 지방에 전하는 옛 기록인 「고향전(古鄕傳)」과 절집에 전하는 기록인 「사중기(寺中記)」가 다르다면서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어 모두 소개한다고 되어 있다.
[고향전]의 기록
모량리(牟梁里: 浮雲村이라고도 함)의 가난한 여인 경조(慶祖)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머리가 크고 이마가 아주 넓어 성(城)과 같으므로 이름을 대성(大城)이라 하였다. 집이 가난해 기르기가 힘들었으므로 어머니가 부잣집에 가서 품팔이를 했는데, 그 집에서 밭 몇 마지기를 주어 생활을 꾸려나갔다.
하루는 점개(漸開)라는 중이 흥륜사(興輪寺)에 육륜회(六輪會)를 베풀고자 시주하기를 권해 베 50필을 시주하였다. 이에 점개가 “불교 신자로서 보시를 잘 하시니 천신(天神)이 항상 보호해 하나를 시주하면 만 배를 얻어 안락하고 장수할 것입니다.”라고 축원하였다.
대성이 이 말을 듣고 뛰어들어 와서 어머니에게 “제가 문간에서 축원하는 스님의 말을 들으니 하나를 시주하면 만 배를 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가난하게 사는 것을 생각할 때 전생에 착한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지금 시주하지 않으면 내세에는 더욱 어려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경작하는 밭을 법회(法會)에 시주해 후세의 복을 얻음이 어떻겠습니까?” 라고 말하자 어머니가 좋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밭을 점개에게 시주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대성이 죽었다. 그 날 밤 재상 김문량(金文亮)의 집에 하늘에서 부르짖음이 있기를 “모량리의 대성이 지금 너의 집에 환생하리라” 하였다. 집안 사람이 놀라 모량리에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과연 하늘에서 부르짖은 때 대성이 죽었다.
그러고 나서 김문량의 부인이 임신해 아들을 낳았는데, 아이가 왼손을 꽉 쥐고 펴지 않다가 7일 만에 손을 폈다. 그런데 손안에 ‘대성(大城)’이라는 두 글자를 새긴 금간자(金簡子)가 있어 이름을 대성이라 하였다. 또한 전세의 어머니를 집으로 데리고 와 함께 부양하였다.
대성이 장성하자 사냥을 좋아해, 하루는 토함산(吐含山)에 올라가 곰 한 마리를 잡고 산 밑 마을에서 잠을 자는데, 꿈에 곰이 귀신으로 변해 말하기를 “네가 나를 죽였으니 나도 너를 잡아먹을 것이다” 하였다. 대성이 겁에 질려 용서하기를 빌었더니 귀신이 “네가 나를 위해 절을 지어주겠는가?” 하고 물어 대성이 그렇게 하겠다고 맹세하였다.
꿈을 깨니 온 몸에 땀이 흘러 자리를 적셨다. 그 뒤로는 일체 사냥을 금하고, 곰을 위해 사냥하던 자리에 장수사(長壽寺)를 세웠다. 그리고 현세의 부모를 위해 불국사를 창건하고, 전세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石佛寺: 지금의 石窟庵)를 창건했다고 한다.
「사중기」에 의하면, 경덕왕 때 대상(大相)인 김대성이 천보 10년 신묘(751)에 불국사를 세우기 시작하여 혜공왕대를 거쳐 대력 9년 갑인(774) 12월 2일에 대성이 죽었으므로 나라에서 이를 완성하고 처음에 유가의 대덕인 항마〔瑜伽大德降魔〕를 청하여 이 절에 거주케 하고 오늘에 이르렀다 하였는데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
이것을 통해 김대성이 혹 가난한 집안 자손으로 재상을 지내는 명문집안에서 길러진 것이 그런 전설을 낳게 되었고, 김대성 자신 또한 재상을 지냈고 재상자리를 물러난 바로 그 다음해에 불국사와 석불사 창건을 추진하다가 24년이 지나도록 끝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 완성했다는 사실로 인식하게 되었다.
석불사 석굴의 유래
석불사는 암자가 아니라 석굴사원이다. 석굴은 인도에서 기원전부터 시작되었다. 차이티야(chaitya, 塔院)라고 하여 암석을 파고 굴을 만들어 그 안에 도량을 세우는 방법이다.
이는 장방형의 전실(前室)과 원형의 주실(主室)로 구성되며 주실 중앙에는 스투파(stupa, 탑)가 있어 참배자들이 이 스투파를 돌며 예배하게끔 되어 있다. 석불사의 석굴도 기본구조는 이 차이티야와 같다. 차이티야는 이후 주실에 불상도 모시게 되었는데 이것이 인도의 아잔타, 중국의 뚠황·윈깡·룽먼 석굴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산은 노년기 지형으로 단단한 화강암이 주류를 이루기 때문에 인도나 중국처럼 쉽게 굴착될 수 있는 사암(砂岩)이 없다. 그래서 이를 변형하여 백제의 서산마애불처럼 바위에 새기거나 고신라의 감실부처님처럼 작은 규모로 바위를 깎거나, 군위의 삼존불처럼 자연석굴을 이용한 석굴사원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것이 석불사의 석굴에 이르러서는 세계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인공석굴을 조영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주실의 천장이 궁륭을 이루는 돔(dome)으로 설계된 것이다. 모르타르가 없던 시대에 낱장의 돌을 쌓아 반구형의 돔을 형성한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며, 이는 이제까지 없었던 대단한 구상이다.
김대성은 여기에서 '팔뚝돌'이라는 버팀돌의 힘을 창안하였다. 석굴의 천장은 반구형으로 올라가는 것이 모두 5단으로 되어 있다. 아래 쪽 제1단과 제2단은 평판석 12개, 13개를 호형으로 다듬어 이어나갔는데 천장덮개돌을 향한 제3, 제4, 제5단은 모두 10개의 평판석과 그 사이마다 끼워 있는 돌출된 삐침돌을 볼 수 있다.
이 삐침돌을 '동틀돌' 또는 '리벳(rivet, 대갈못) 형상'이라고들 부르고 있으나 남천우 교수는 아주 적절하게도 '팔뚝돌'이라고 표현하였다. 팔뚝돌은 실제로 주먹을 구부린 팔뚝모양으로 되어 있다. 그 길이는 대략 2미터이다. 이것을 바깥쪽에서 빙 둘러가며 비녀를 꽂듯이 수평으로 끼워 아래쪽 평판석을 눌러주는 것이다.
천장덮개돌이 세 동강난 사연
모든 신비로운 유물은 저마다 조그마한 흡집과 함께 미완성의 전설을 갖고 있다 석불사의 석굴은 마지막 마무리단계에서 천장덮개돌이 세 동강나고 마는 사건과 함께 그 미완성의 전설을 지니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천장덮개돌이 세 동강난 것을 이렇게 증언하였다.
대성이 장차 석불을 조각코자 큰 돌 하나를 다듬어 덮개돌을 만들다가 갑자기 세 토막으로 갈라졌다. 대성이 통분하여 잠도 채 들지 않고 어렴풋이 졸았는 데 밤중에 천신이 내려와서 다 만들어놓고 돌아갔다. 대성이 막 자리에서 일어나 급히 남쪽 고개에 올라 향나무를 태워 천신께 공양하였다. 이로써 그 곳을 향령(香嶺)이라고 한다
천장덮개돌의 안치는 곧 석굴의 마지막 마무리를 의미한다. 덮개돌을 눌러춤으로써 천장의 낱낱 돌이 힘의 평형을 이룬다. 간단히 마무리하자면 둥근 원기둥을 아래쪽은 크기를 구멍에 맞추고 위쪽은 좀더 크게 만들어 끼우면 빠뜨릴 일도, 떨어뜨릴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김대성은 그것을 아름다운 연꽃이 두 겹으로 피어나는 모습으로 디자인하였다. 그래서 석굴에서 천장을 올려다보면 피어나는 연꽃이 본존불의 머리 위에서 마치 스포트라이트를 비추는 환상적 분위기를 연출했던 것이다. 측량기사 요네다는 이것을 태양으로 생각했고 고유섭 선생은 광배의 이동으로 보았다.
김대성이 설계한 천장덮개돌은 아가리가 밖으로 벌어진 손잡이 없는 찻잔을 거꾸로 엎어놓은 형상으로 연화문 지름이 2.5미터, 높이 1미터, 바깥쪽 지름이 3미터 되는 크기로 무게가 자그마치 20톤짜리였다. 이것을 떨어뜨려 세 동강내고 만 것이다.
김대성은 얼마나 낙심했을까? 일연스님은 "분하고 억울했다"고 표현했다. 어찌하면 좋을까, 그 고민중에 김대성은 잠이 든 것이다. 그리고 잠든 사이에 천신이 와서 설치하고 갔다는 것이 설화의 내용이다. * 그 이후 실제로 어떻게 진행이 되어 완성되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잊혀져가는 석불사
이후 석불사는 아무런 증언 없이 세월이 흐르다가, 창건 뒤 근 천년이 되는 조선왕조 숙종 때 한 답사객의 기행문 속에 나온다. 그 기행문은 민영규 선생이 발굴한 우담(愚潭) 정시한(丁時翰)의 『산중일기(山中日記)』다. 그중 1688년 5월 15일자로 답사기는 석굴의 원형을 잘 설명해주고 있다.
석문(石門) 밖 양변엔 큰 돌에 각각 4, 5명의 불상을 조각하였는데 그 교묘함이 마치 하늘이 이룬 것 같았다. 석문은 돌을 다듬어 무지개 모양을 했다. 그 안에 큰 석불상이 있는데 엄연히 살아있는 듯하다. 좌대는 반듯하고 아주 정교하다. 굴 위의 덮개돌과 여러 돌들은 둥글고 반듯하게 서 있어 하나도 기울어지거나 어긋난 것이 없다. 줄지어 서 있는 불상들은 마치 살아있는 듯한데 그 신기하고 괴이함을 말로 다할 수 없다. 이러한 기이한 모습은 보기 드문 일이다.
이후 18, 19세기에 한 차례씩 중건했다는 자료가 나오지만 그 내용이나 규모에 대한 언급은 없고 다만 “불국지석굴(佛國之石窟)”이라고 한 것을 보아 이미 불국사의 말사로 되었음만은 확인할 수 있다.
소네 통감의 도둑질
잊혀져가는 명작, 석불사의 석굴이 세상에 다시 알려지게 된 것은 1907년 무렵이었다. 1907년에 “토함산 동쪽에 큰 석불이 파묻혀 있다”는 소문이 일본인 사이에 퍼졌다고 한다. 이 소문은 한 우체부가 우연히 발견하고 이를 우체국장(일본인 관리)에게 말한 것이 그렇게 과장되게 퍼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석굴이 알려지자 드디어 도굴꾼이 이 높고 험한 산중에까지 닥치게 되었다. 이때 도굴꾼들은 석굴 내 감실에 안치된 불상 중 두개—아마도 열개의 감실상 중 가장 아름다운 것 둘—를 훔쳐갔다. 운반상의 문제 때문에 그들로서는 둘밖에 못 가져갔던 모양이다.
1909년 가을, 이또오에 이어 2대 통감으로 부임한 소네 아라스께(曾禰荒助)가 초도순시차 수행원을 거느리고 경주에 왔다. 소네 또한 엄청난 문화재 약탈자였다. 그의 관심사는 주로 불교미술품과 고문서였다.
경주에 온 소네 통감은 그 귀하신 몸으로 어려운 등산을 감내하고 토함산 석불사에 올랐다. 이 고관대작이 다녀간 이후 석굴 11면관음보살 앞에 놓여 있던 아름다운 대리석 오층소탑(小塔)이 온데간데없이 증발해버렸다. 소네 통감이 사람을 시켜 가져간 것이 분명했다.
앞쪽에 있던 (다른) 소탑은 부서진 잔편만 남아 경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지금 석굴 안에는 인왕상 양쪽에 네모난 사리공을 하늘로 드러낸 석탑 받침돌〔臺石〕만이 쓸쓸히 그 자취를 말해주고 있다.
소네 통감은 서울로 돌아간 다음 미술사가 세끼노 타다시(關野貞)를 현지에 보냈다. 석굴의 문화재적 가치를 “동양무비(無比)의 작품”이라며 최고로 평가한 세끼노의 보고를 들은 소네 통감은 석굴의 보수와 보존을 검토하면서 그 결론으로 석굴의 불상을 모두 서울로 옮긴다는 구상을 하였으나 결국 진행하지는 못하였다.
테라우찌 총독의 보수공사
1910년 한일병합과 동시에 첫 총독으로 부임한 테라우찌는 석굴을 포함한 경주 주요 고적에 대한 현상조사를 실시케 하였는데 1912년 6월 25일자 복명서(復命書)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그 구조의 진기함과 조각의 정미(精美)함은 당대의 최우수 유물이라 하겠는데, 현상은 반구형(半球形) 천장의 3분의 1 정도가 추락하여 동혈(洞穴)이 되어 그 안으로 산 위의 흙과 모래가 유입되어 불상을 더럽히고 있으며, 현상태로 놔두면 천장의 3분의 2도 추락하여 주벽 불상을 상하게 되고 중앙에 있는 석가모니 대상을 파괴하여 동양 무비(無比)의 미술품을 멸망시킴에 이른다.
그리하여 테라우찌 총독은 그해 직접 토함산 석굴에 올라 현장을 답사하고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지시하였고, 총독부 토목국 기사인 쿠니지(國枝博)를 현장에 출장 보내 보수계획을 수립하게 했다. 1913년 4월 8일자로 된 그의 복명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 돌을 일단 전부 해체하고, 주위의 석벽도 모두 다시 쌓아서 뒷면에 두께 3자 균일로 콘크리트를 박으며, 천장도 되도록 구석(舊石)을 사용하고 부족한 것만을 보충하여 그 위에 두께 3자의 콘크리트를 박아 다시 추락하지 않게 한다. 전면입구 상부는 원래 천장이 있었던 것이 중세에 파괴된 것이므로 이것도 철근콘크리트로 덮으면 석상의 보존상 크게 유효한 것이 될 것이다.
해체되는 석굴
결국 석불사 석굴은 창건 이래 처음으로 완전 해체되는 비극적인 대수술을 받게 된다. 1913년 10월, 석굴 해체공사를 위해 천장덮개돌의 위치를 고정시키는 목제 가구(假構)를 설치하는 작업부터 시작하였다.
12월에 이 작업을 완성하고는 철조망으로 출입금지케 한 다음 한 해 겨울을 나고 이듬해인 1914년 5월 21일부터 공사를 재개하여 6월 15일에는 지붕돌을 다 들어내고, 8월 17일에는 굴 내 조각을 다 들어냈으며, 9월 12일에는 완전 해체하였다고 현장감독을 맡았던 이이지마(飯島源之助) 기사의 보고서에 나와 있다.
10월 9일부터 콘크리트를 부어 벽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 과정에서 석굴 뒤쪽 암반에서 두 개의 샘물이 올라오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들은 샘물이 석굴 뒤쪽 암반을 관통하여 석굴암 앞쪽 감로수로 흘러내리는 오묘한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아연관으로 배수로를 만들어 밖으로 빼내었다.
그리고 3차연도인 1915년 5월에 석굴 재조립공사가 시작되었다. 본래 석굴의 외벽은 “지름 5자의 옥석(玉石) 또는 절석(切石)으로써 이중으로 쌓아올려” 석굴 내부의 공기가 숨을 쉴 수 있게 되어 있었는데, 일본인들은 외벽에 3자 정도의 석재로 버팀판을 만들고는 두께 2미터의 콘크리트 외벽으로 싸발라버렸던 것이다.
남천우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이때의 공사는 천장 앞부분만 수리하면 간단히 끝날 수 있는 것이었다고 한다. 석굴의 개수공사는 1,200년을 유지해온 석굴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상만 주었다. 야나기 무네요시도 장문의 「석불사의 조각에 관하여」라는 글을 『예술(藝術)』지 1919년 6월호에 발표하면서 통탄했다.
나는 이것(보수된 돌담)을 보았을 때 그 몰취미한 행위에 크게 놀랐다. 무슨 이해가 있다고 거의 터널의 입구로 잘못 보는 그러한 건설을 해놓았을까? 나는 이것이 석불사의 수리가 아니라 새로운 파손행위라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기사는 비록 과학적인 수리를 했다 하더라도 아무런 예술적 수리는 알지 못한 것 같다. (…) 될 수만 있다면 저 돌담을 파괴해서 그 수리는 조선인 자신에게 맡기고 싶다.
끊임없이 생기는 습기와 이끼
그러나 미관보다도 더 큰 문제는 이 신식 기술과 재료 사용으로 인하여 석굴이 극심한 누수현상을 일으킨 것이었다. 준공 2년 뒤인 1917년에는 하는 수 없이 빗물누수 방지공사를 위해 천장돔 외부에 하수관을 묻는 보수공사를 하게 된다.
2차 보수공사 뒤에도 석굴의 누수현상은 그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1920년 9월 3일부터 1923년까지 4년에 걸친 대대적인 제3차 보수공사를 시행하게 된다. 천장부분의 콘크리트벽에 방수용 아스팔트를 바르는 작업과 석실 지하수의 아연관 배수로가 샘물을 다 감당하지 못하므로 오른쪽으로 빼돌리는 공사를 하였다.
그러나 3차 보수공사에도 불구하고 석굴의 습기문제는 역시 해결되지 못했다. 석굴에는 푸른이끼〔靑苔〕가 끼며 육안으로도 그 손상을 역력히 볼 수 있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1927년 증기사용에 의한 세척법을 강구하게 되었고 이를 위한 보일러를 제작 설치케 하였다.
1927년 증기세척으로 일단 푸른 이끼를 제거하였으나 시간의 경과 속에 이끼는 또 피어났다. 이리하여 1934년, 석굴 옆에 설치한 흉기, 보일러가 다시 가동되며 증기세척으로 분무세례를 받게 되었다.
일제 36년을 통하여 일제가 석굴에 남겨준 유산이란 두께 2미터의 콘크리트벽과 끊임없이 생기는 습기와 푸른 이끼, 그리고 가공할 흉기, 증기세척 보일러뿐이었다. 그것은 석불사 석굴이 겪은 오욕의 역사에 첨부된 증거물이었다.
석굴의 신비에 도전한 사람들
석불사 석굴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최초로 본격적인 글을 발표한 것은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였다. 1919년 6월 『예술』지에 게재된 그의 「석불사의 조각에 관하여」라는 장문의 논문 부기에는 다음과 같이 씌어 있다.
나는 오랫동안 조선의 예술에 대하여 두터운 흠모의 정을 품고 있다. (…) 특히 이 석불사의 조각은 내 여행중 나를 자극한 잊을 수 없는 작품들이었다. 나는 이 세계의 걸작이 아직도 일반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을 애석하게 생각하고 이것을 널리 소개하는 최초의 한사람이 되었다. (…) 나는 이 소개를 객관적인 것으로 하기 위해 지극히 멋없는 글이 된 것을 마음 괴롭게 생각한다. (…) 그러나 다소는 나의 사랑을 전달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며, 내가 맛본 이해의 어느 부분은 반드시 정당하다는 것을 믿는다.
실로 석굴암은 분명히 하나의 마음에 의해 통일된 계획의 표현이다. 인도 아잔타나 중국 용문석굴처럼 (…) 누대의 제작이 모인 집합체가 아니다. 하나의 마음을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정연한 구성이다. 서로가 서로를 살리는, 분리할 수 없는 하나의 유기체적 제작이다. 외형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놀랄 만큼 주도면밀히 계획된 완전한 통일체이다.
걸음을 굴 밖에서 굴 안으로 옮기면 마음도 또한 내면의 세계로 들어간다. 위대한 불타는 소리없이 조용히 그 부동의 모습을 연화좌대 위에 갖춘다. 우러러보는 자는 그 모습의 장엄과 미에 감동되지 않을 수 없다. 이곳은 완전히 내적인 영(靈)의 세계다. 그는 앞에 네명의 여보살을, 뒤에는 십일면관음을, 그리고 좌우에는 그가 사랑하는 열 사람의 제자를 거느리고 영원의 영광을 고한다. 감실에 있는 여러 불상들은 그 법열을 찬송하는 듯하다.
여기는 (석굴 밖) 외부의 힘의 세계가 아니다. 내적인 깊이의 세계다. 미와 평화의 시현이다. 또한 장엄과 그윽함의 영기(靈氣)이다. 얼마나 선명한 대비가 굴 안팎에 나타나 있는가! 모든 것이 밖으로부터 안으로 돌아간다. 힘에서 깊이로 들어간다. 움직임〔動〕보다도 고요함〔靜〕 속에 사는 것이다. 종교의 의미는 석굴암 속에서 다하는 느낌이다.
야나기의 뛰어난 안목이 밝혀낸 또 하나의 중요한 관찰은 모든 조상들이 갖는 시선의 방향 문제다. 그는 한 사람의 참배자, 즉 사용자 입장에서 석굴암을 한바퀴 돌 때 일어나는 모든 심리적 변화를 이 조상들의 시선처리에서 살피고 있는 것이다.
우현 고우섭의 고전미술론
석불사의 석굴을 한국미술문화사적 지평에서 총체적으로 규명한 것은 우현(又玄) 고유섭(高裕燮, 1905~44) 선생이었다. 한국미술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우현 선생은 여러 논문에서 석불사의 석굴에 대하여 그분이 보낼 수 있는 최대의 찬사와 함께 치밀한 양식분석과 정신사적 해석까지 내렸다.
우현 선생은 우리나라 불상조각의 흐름을 크게 세 갈래로 보았다. 삼국시대의 그것은 상징주의, 통일신라의 그것은 고전주의 내지 이상주의, 고려시대의 그것은 낭만주의적 성격을 지녔다는 것이다.
삼국시대의 불상은 측면관을 전혀 무시한 정면성의 강조와 살붙임의 변화를 갖지 않는 부분부분의 조립적·구축적 특질과 옷주름의 양식화된 도식적 평면전개로 전체적으로 기계적인 경직함과 추상적 신비함으로 충만된 상징주의적 경향이었다.
그러나 통일신라의 조각은 살붙임이 풍부하고 따라서 입체적인 깊이와 양적 크기가 증가하여 모든 굴절은 자연적인 유기적 연관을 보유하고 가장 이상화된 정돈 속에 사실적 충실성을 표시하여 추상적 신비성은 구체적인 감각면의 강조로서 나타났다. 석불사의 조각은 바로 그 이상주의적 고전주의의 정상에 서 있는 것이다.
요네다의 석굴 측량
석불사 석굴의 과학성을 밝혀낸 것은 한 일본인 토목기사였던 요네다 미요지(米田美代治)였다. 요네다는 1932년 일본대학 전문학부 건축과를 졸업하고 이듬해부터 조선총독부 박물관의 촉탁으로 적은 월급을 감내하면서 고건축 측량에 몰두하였다.
그는 후지따(藤田亮策) 교수의 조수로 성불사(成佛寺) 개수공사에 참여하여 측량을 맡은 이후 경주 사천왕사 천군동 석탑, 평양 청암리사터, 부여 정림사터, 그리고 불국사와 석굴암의 측량을 도맡았다. 그리고 백제 부소산성을 실측하던 중 장티푸스에 걸려 불과 35세의 젊은 나이에 1942년 10월 24일 세상을 떠났다.
요네다의 책에 실린 「경주 석굴암의 조영계획」은 석불사 석굴의 과학적 신비를 푸는 첫 실마리이자 가장 중요한 열쇠가 되었다. 요네다가 석굴 조영계획을 찾는 작업은 통일신라사람들이 측량에 사용했던 자〔尺〕의 길이를 밝히는 데서 시작하였다.
그는 석탑의 각 부위를 측량하여 0.98곡척, 1.96곡척, 23.6곡척 등의 수치가 반복적으로 나오는 것을 보고 이때의 석공들이 사용했던 자는 곡척(曲尺, 30.3센티미터)이 아니라, 0.98곡척(29.7센티미터)이라는 결론에 도달했고, 이 길이를 당척(唐尺)이라 이름붙였다.
그는 석굴의 조영이 12자를 기본으로 하면서 정사각형과 그 대각선의 길이인 √2의 응용, 정삼각형 높이의 응용, 원에 내접하는 육각형과 팔각형 등의 비례구성으로 이루어졌음을 풀어내었다.석굴구성의 기본은 반지름을 12자(지름 24자는 1일 24시간에 일치)로 하는 원(360도는 1년 360일에 일치)이다.
석굴 출구의 12자는 1일(12刻)에 해당하고 궁륭천장(천체우주)은 같은 원둘레에 구축하여 유구한 세계를 표현하고 그 중심(천장덮개돌)에는 원형(태양)으로 큼직하게 연꽃덮개돌을 만들고 구면 각 판석의 사이에 팔뚝돌이 비어져나와 별자리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남천우 박사(전 서울대 교수, 물리학)는 “석굴의 구조란 깊이 조사하면 조사할수록 실로 무서우리만큼 숫자상의 조화로 충만되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실현해 낸 기술의 신비로움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남천우 「석굴암 원형보존의 위기」, 『신동아』 1969년 5월호).
석굴 본당은 정원(正圓)으로 이루어져 있고 이 원호(圓弧)를 구성하고 있는 조각의 숫자만도 15구에 달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거대한 화강암의 암석을 갖고 마치 밀가루반죽 다루듯 자유자재로 다듬어놓았던 신라인의 솜씨도 놀랍거니와 그러한 솜씨를 뒷받침하여준 신라인의 기하학에 대해서도 경탄할 뿐이다.
신라인들은 원주율(圓周率) 파이(π)의 값을 3.141592……보다도 훨씬 더 높은 정확도로 알고 있었을 것은 물론이고, 아마도 정12면체에 대한 정현(正弦)법칙, 다시 말하면 싸인(sin) 9°에 대한 정확한 값을 구할 수 있는 기하학을 최소한도의 것으로 갖고 있었다."
석굴 밑에서 샘이 솟는 이유
석불사의 석굴에 오르면 우리는 넓은 공터에서 석굴을 마주보게 된다. 바로 그 공터 앞 맞은편 바위에서는 천연샘이 솟아나고 이를 감로수라고 부른다.
이 감로수는 신비하게도 석굴 본당의 암반 밑에서 용출하는 두개의 샘이 흘러내리는 것이다. 1913년에 시작된 보수공사 때 일제는 콘크리트벽을 세우기 위해 암반을 파고들다가 이 샘을 발견하고는 그 습기가 석굴 내부로 스며오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아연관〔鉛管〕을 묻었다.
1963년 석굴 수리공사를 재개할 때도 이 샘물이 큰 문제가 되었다. 일제 때 묻었던 연관은 이제 다 삭아버려 튼튼한 동(銅)파이프를 묻어 석굴 밖으로 빼내었다.
이태녕(李素寧, 전 서울대 교수, 화학, 역사학자 이병도의 아들) 박사는 1973년 2월에 열린 역사학회 월례발표회에서 「석굴암의 구조와 습기문제」라는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그 요지가 『법시』 통권 67호(1973년 4월호)에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석굴암 석면(石面)의 결로현상은 석면의 온도조절이 균형을 잃은 데서 일어난다. 일제 때 보수하기 이전(즉 원형)에는 석굴 밑에 있는 두개의 샘물 때문에 석굴 바닥의 온도가 조각이 있는 벽면보다 낮아 바닥돌에서만 결로현상이 나타나고 풍화작용도 이곳에서만 심했다. 그러나 일제 때 두 차례에 걸친 보수공사에서 바닥을 강회로 보강하고 샘물을 연관으로 돌리고 요석 뒷면에 콘크리트를 다져넣었기 때문에 온도가 낮아야 할 바닥돌의 온도가 높아지고 반대로 요석 부분의 온도가 낮아져 정교한 조각이 있는 벽면에 물기가 돌고 있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었다. 실내에 스며든 수분은 섭씨 0.1도의 온도차이만 있어도 차가운 쪽에서는 물분자 이동이 저하되어 결로(結露)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신라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밑으로 샘물이 흐르는 암반은 섭씨 4~10도를 유지하므로 결로현상은 바닥에서만 생기고 석굴 자체는 조금도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슬기를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석굴의 습기문제는 일제시대의 콘크리트벽, 3공화국시절의 목조전실과 유리장, 샘물의 배수관 등을 모두 제거하면 자연스런 상태에서 원활히 보존된다는 결론에 다다르게도 되는 것이다.
해는 동쪽에서 떠오른다
토함산 동쪽 산자락 해발 565미터상에 세워진 석불사의 석굴이 향하고 있는 방향은 동동남 30°이다. 멀리 동해바다의 수평선이 바라다보이는 자리다. 왜 정동(正東)이 아니고 30°를 남쪽으로 이동하였는가? 이것은 오랫동안의 의문이었다.
1960년대 석굴의 보수공사 총감독을 맡았던 황수영 박사가 이것은 문무대왕의 대왕암이 있는 동해구(東海口)를 바라보고 있는 것이라는 설을 1964년에 발표하였다. 이 논증을 위하여 황수영 박사는 1967년에 대왕암은 곧 수중릉이라는 주장을 폈고, 석굴의 본존불은 아미타여래라는 학설까지 내놓았다.
그러나 남천우 박사는 석굴의 방향은 대왕암(28.5°)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 동짓날 해뜨는 방향(29.4°)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석굴암에서 망각된 고도의 신라과학」(『진단학보』 제32호, 1969)에서 발표하였다.
석불사의 석굴이 지금처럼 목조전실로 세워진 것이 아니라 개방구조가 원형이라고 생각할 때 동짓날 일출이 지니는 의미는 자못 큰 것이다. 동지는 일년의 끝이 아니라 시작을 의미한다. 석굴구조의 수리적 관계를 생각할 때 동짓날 일출의 방향은 설득력을 더하게 된다.
김대성의 키는 170센티?
조각가로서 석굴을 관찰한 아주 재미있고 유익한 논문이 영남대 김익수 교수에 의해 발표된 바 있다(「석굴암 원형에 관한 견해」,『영남대학교논문집』 제14집, 1980).
김익수 교수는 석굴의 원형은 남천우 박사가 주장하는 개방설과 전실은 전개가 아니라 굴절이라는 주장에 동조하면서 김대성의 키는 170센티미터라고 추정하는 신기한 주장을 편다.
창조자가 요구하는 관점은 전실의 정중앙에 해당하는 자리가 되는데, 이때 사람의 키에 따라 부처의 얼굴이 두광(頭光)의 정중앙에 놓이기도 하고 약간 위쪽 또는 아래쪽이 된다는 것이다. 이를 더욱 치밀하게 측량한 결과 보는 사람의 눈높이가 160센티미터일 때 불두는 두광의 정가운데 놓인다.
더욱 신기한 것은 이 길이는 곧 좌대의 높이와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160센티미터의 눈높이를 가지려면 키가 172센티미터로 되어야 하는데 이때 가죽신 또는 짚신의 높이 2센티미터를 빼야 하므로 김대성(설계자)의 키는 170센티미터가 된다는 계산이다.
본존불은 과연 누구인가
석불사 석굴사원의 본존불을 우리는 그냥 본존불이라고 부르는 데 익숙해 있다. 그 이유는 이 불상이 석가모니라는 설(민영규, 문명대, 남천우 등 우세설), 아미타여래라는 설(황수영 박사), 비로자나불이라는 설(김리나 교수) 등이 팽팽히 맞서 있기 때문이다.
본존불의 인상(印相)은 분명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다. 석가모니가 성도(成道)할 때 마귀를 항복시키고서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순간의 모습을 묘사한 것이다. 그래서 오른손 검지손가락이 살짝 들려 있다. 이 점에서는 석가여래로 보는 설이 우세하다.
이와 같이 설이 오가는 중에 강우방 선생은 움직일 수 없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발견하였다. 강우방 선생은 측량기사 요네다의 논문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런데 요네다는 건축적 구조만 설명했을 뿐 어쩌면 가장 중요한 본존불의 크기가 왜 높이가 11.5자, 무릎과 무릎 사이가 8.8자, 어깨너비가 6.6자로 되었는지에 대하여는 밝히지 못하였다.
강우방 선생은 이 수치의 근거를 찾아내기 위하여 각종 문헌자료를 조사하던 중 현장법사의 『대당서역기』를 읽다보니 신기하게도 똑같은 수치가 나오는 것이었다. 당나라 현장법사는 인도에 가서 부다가야의 마하보리사에 석가모니 성도상(成道像)이 세워질 때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대좌의 높이가 4.2자이고 너비는 12.5자이며, 불상의 높이는 11.5자, 양무릎 사이가 8.8자, 양어깨 사이가 6.2자였다. 얼굴 모습은 원만구족하여 그 자비로운 얼굴은 산 사람과 같았다. (…) 사람들은 모두 진심으로 그것을 만든 이가 어떤 사람인가 알고 싶어했다.
어깨너비의 4치 차이만 제외한다면 바로 그 숫자와 방향과 모습이 일치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석불사 석굴의 본존상은 부다가야 마하보리사의 석가 성도상을 모델로 하여 조영된 것이 분명하다.
또 다시 작동되는 보일러
6·25동란이 끝난 1953년 보일러는 또 한차례 가동되었다. 그러나 이때의 증기세척 작업은 경주박물관 직원에 의한 조심스러운 작업이었다고 한다.
문제는 1957년, 해방 후 제3차 세척작업이었는데 이것은 경주교육청이 청부업자에게 지시하여 긴급하게 실시한 것이었다. 당시 관광차 내한한 외국인 관광객의 도착 전에 세척한다고 사용준칙인 열도(熱度)의 조절, 1자 이상 거리에서의 분무 등을 무시하고 쏘아댔다.
이것이 신문에 “펄펄 끓는 수증기의 세례에 다박솔로 문질러댄 석굴암”이라고 보도되자 정부는 문교부차관을 파견하여 진상규명을 하기에 이르렀다. 이를 계기로 문교부 산하 문화재관리국에는 1958년 1월에 ‘석굴암 보수공사 조사심의위원회’가 결성되어 이승만정권하에서 3차에 걸쳐 조사단을 파견했다.
박정희의 등장과 공사 진척
유네스코 문화재연구소장 플랜덜라이스 박사가 1961년 7월 17일 내한하였다. 그는 21일에는 현지로 내려가 단 하루 조사하면서 “석굴의 누수상태와 지하수 문제의 검토를 위하여는 석굴을 덮고 있는 봉토층의 제거가 필요하다”는 보고서를 내었다.
이에 따라 문교부는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이를 승인함으로써 7월 31일부터 봉토 제거작업이 시작되었다. 이것이 1964년부터 시행되는 본격적인 보수공사에 대한 예비공사의 시작이었다.
수리공사의 기본방침은 석굴의 습기와 이끼를 원인부터 제거하기 위하여 ① 빗물이 스며들지 못하도록 이중돔을 세운다, ② 지하수가 스며들지 못하도록 석굴 밑 암반에서 나오는 샘물의 배수구를 강화한다, ③ 습한 공기의 유입을 막기 위하여 전실에 목조건축을 세운다, ④ 석굴 내부의 환기를 위하여 지하에 공기통로를 만들어 이중돔 공간으로 빠지게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석굴의 습기문제가 ‘습한 공기의 유입’에 있다는 판단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후 그는 현지에서 조사를 하며 이태녕 박사 같은 자연과학자들과 의견을 교환하면서 뒤늦게 한국의 자연조건이 사계절의 온도차가 한여름 섭씨 35도에서 한겨울 영하 15도에 이르는 큰 차이가 있음과, 상대온도·상대습도에 의해 결로가 생긴다는 자연원리를 인지하였다.
그리고서는 지난번에 제출한 의견서를 정정(석굴암의 통풍을 위해 지붕이나 문 등의 밀폐를 '전적으로' 반대(all against))하는 2차 의견서를 내게 되었다. 그 제출날짜가 8월 18일이었으니 25일간의 연구결과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플랜덜라이스의 2차 의견서는 묵살되었다. 공사단의 방침은 이미 대통령에게 보고된 방향으로 굳어져 있었던 것이다.
1961년 7월 31일, 봉토 제거작업이 시행되면서 본격화된 석굴 수리공사는 1961년 9월 13일에 공사 현장사무소가 설치되었다. 예비공사는 1963년 6월 30일까지 약 2년에 걸쳐 실시된 것이었다. 당시 황수영·김중업 2인의 중앙감독관이 임명되었다.
그런데 1962년 11월 13일, 김중업씨 후임에 김원용 박사가 임명되었다. 황수영과 김중업의 의견차이는 전실에 목조건축을 얹기 위하여 벽면을 현재의 절곡(折曲)에서 전개(展開)로 바꾸는 문제였다. 당시 전실은 양측면의 팔부중상이 한 분씩 등을 돌리고 꺾여 금강역사와 마주보는 형상으로 되어 있었다. 이것을 네 분씩 나란히 편다는 주장이 나온 것이다.
1963년 2월 16일, 새 감독관에 임명된 김원용 박사는 현지의 석재를 조사하고는 굴곡부분은 원형(原形)이므로 이를 변경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린다. 또 11일 뒤 10인의 관계자가 현지에 가서 같은 결론을 내린다.
그러는 사이 본공사가 시작되는 1963년 7월 1일이 되었다. 그리고 7월 2일 김원용 박사는 중앙감독관에서 해임되고 황수영 중앙감독관이 혼자 주관하게 되었다.
이후 그렇게 강행된 석굴암 수리 본공사는 1964년 7월 1일, 만 1년 만에 준공식을 갖게 된다. 1961년 7월 31일, 봉토 제거작업이 시작된 이래 만 3년에 걸친 대역사였다. 준공식에는 당연히 이 공사를 강행한 박정희 대통령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석굴 벽면에서는 눈에 띄게 물이 흘러내렸다. 누수는 물론이고 습한 공기의 유입까지 막는 3년간의 공사가 결국 석굴을 물바다로 만들고 만 것이다. 여론이 비등하였다. “석굴암인가 수(水)굴암인가” “석굴암은 암(暗)굴암.” 그리고 그해 여름 석굴의 본존불은 물방울로 샤워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석굴의 습기문제를 근본적으로 검토하는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현상태에서 기계설비에 의한 습기제거를 강구하게 되었고 준공 2년 뒤에는 서울공대 기계과 김효경 박사에게 이 작업이 위촉되었다. 그리하여 석굴에는 급기야 공기냉각장치(에어컨)를 설치하여 기계작동에 의한 강제방식을 취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석굴은 ‘전(電)굴암’이라는 또 하나의 별명을 얻게 되었다.
광창의 문제
남천우 박사는 석굴의 온전한 보존문제는 온전한 원형을 찾아내는 일이 된다며 석굴의 원형은 대담한 개방구조였고 석굴에는 광창(光窓)이 있었다는 사실을 논증하였다. 또 석굴 본당의 10개 감실은 외벽과 맞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뒤로 더 물러나 아래쪽에서 공기가 숨쉬도록 되어 있었다는 주장을 폈다.
남천우 박사는 일제시대의 석굴 보수공사 때 어디에 쓴 것인지 몰라 석굴 한쪽에 버려둔 원석재(原石材)들을 검사하면서 호(弧)형을 이룬 긴 석재들이 바로 광창의 부재였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기계작동에 의한 습기제거가 일단은 성공하였다. 그러나 습기문제가 완전히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1970년 다시 내한한 플랜덜라이스 박사는 석굴의 수리상태를 보고 나서 ① 전실 목조건축을 철거할 것, ② 이중돔 공간에 단열시공을 하고 또 그곳을 가온할 것 등을 건의했다. 그러나 역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종을 치는 자는 모름지기
석불사 석굴의 조각은 맹목적 보편성을 드러내는 아카데미즘이 아니었다. 신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도 인간적이고, 인간적이라고 말하기엔 절대자의 기품이 강하였다. 엄숙하다고 말하기엔 온화하고, 인자하다고 말하기엔 너무 엄했다. 젊다고 생각하려니 너무 의젓하고 노숙하다고 말하기엔 너무도 탄력있었다. 남성으로 보려 하니 풍염하고 여성이라고 말하기엔 너무 건장하였다.
본존불은 고전주의적 기품을 보여줌에 반해 10대제자상은 강렬한 리얼리즘으로 포진하고 있고, 팔등신의 늘씬한 몸매의 문수·보현, 제석천·범천이 얇은 돋을새김으로 환상적·이상주의적 자태를 보여준다. 11면관음보살은 여지없는 ‘미스 통일신라’로 돌에서 뛰쳐나올 듯하다.
고개를 들어 감실의 제상(諸像)을 둘러보니 지장보살은 의젓하고 유마거사는 열변을 토하는데 유희좌(遊戱坐)로 몸을 비틀고서 무릎에 턱을 괸 어여쁜 보살은 상기도 조는 듯 눈을 내리고 있다. 그 아련한 분위기에 나는 오랫동안 넋을 잃고 있었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운 것이다.
문득 고유섭 선생이 「고대미술연구에서 우리는 무엇을 얻을 것인가」(1975)에서 던진 미술사적 화두가 떠올랐다. "종소리는 때리는 자의 힘만큼만(에 응분하여) 울려지나니......"
경주 불국사
불국사 안마당에는 꽃밭이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전통건축을 논하려면 반드시 사찰건축을 거론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중 뛰어난 절집이라면 당연히 영주 부석사, 순천 선암사, 경주 불국사가 꼽힐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 세 절은 건축적 지향점, 특히 자연과의 조화관계가 아주 다르다.
부석사는 백두대간의 여맥을 절 앞마당인 양 끌어안는 장엄한 스케일을 보여주고, 선암사는 부드러운 조계산 자락이 사방에서 감지되는 아늑한 산중에 자리잡았는데, 불국사는 산자락을 타고 올라앉았으면서도 비탈을 평지로 환원하여 반듯하게 경영되었다.
그래서 부석사는 자리앉음새(location)가 뛰어나고, 선암사는 건물과 건물 간의 공간(space)운영이 탁월하며, 불국사는 돌축대의 기교(technic)와 가람배치(design)의 묘가 압권이다.
그런데 부석사 같은 절, 선암사 같은 절은 다른 예가 참 많지만 불국사처럼 자연과 인공을 대비하면서 조화를 구한 절은 달리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유일본이다. 그 점에서 불국사는 어느 건축보다도 독창적이고 독특한 건축이라 할 수 있다.
불국사 창건과 역사에 관한 기록
불국사의 창건과 역사에 관한 기록으로는 「불국사 고금 역대 제현 계창기(佛國寺古今歷代諸賢繼創記)」(이하 「역대기」)와 「불국사 사적(事蹟)」(이하 「사적」) 둘이 있다. 「역대기」는 1740년에 동은(東隱)스님이 쓴 것이고, 「사적」은 1708년에 백련(白蓮)스님이 재간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우리는 이런 기록에 의해 불국사의 역사는 물론이고 김대성(金大城) 창건 당시의 모습을 유추해볼 수 있다. 그건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 기록들은 좀처럼 믿을 수 없는 거짓말과 오류를 곳곳에서 범하고 있으니 그것은 오히려 불행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그것은 비단 불국사에만 해당하는 일이 아니다. 임란 이후 불교가 다시 일어나면서 각 사찰은 그동안 끊겼던 전통과 권위를 되찾는 작업으로 사사(寺史)와 사지(寺誌)를 편찬하면서 무작정 고찰로 끌어올리는 헛된 풍조가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불국사 「역대기」는 불국사 창건을 법흥왕 때로 올려놓고, 「사적」은 한술 더 떠서 눌지왕 때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해놓았으나 그것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불국사의 창건에 관한 기록으로 지금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대성이 두 세상 부모에게 효도하다(大城孝二世父母)”뿐이다(위 '석굴암' 관련 내용 참조).
경덕왕의 치세와 ‘문화대통령’
통일신라의 문화적 전성기를 장식했던 경덕왕은 복이 많은 분이었지만 자식 복이 없어서 아들을 낳지 못했다. 그래서 경덕왕은 아들을 낳게 해달라고 능력있는 스님인 표훈대사에게 부탁하게 된다.
왕이 하루는 표훈대덕(大德, 덕이 높은 스님)에게 명했다.
“내가 복이 없어 아들을 두지 못했으니 원컨대 대덕은 상제(上帝)께 청하여 아들을 두게 하여주오.”
표훈이 천제(天帝)에게 올라가 고하고 돌아와서 아뢰었다.
“상제께서 딸은 얻을 수 있지만 아들은 얻을 수 없다 하십니다.”
“딸을 바꿔 아들을 만들어주기 바라오.”
표훈이 다시 하늘에 올라가서 청하니 상제는 말했다.
“할 수는 있지만 아들이 되면 나라가 위태할 것이다.”
이후 아들이 태어났고, 태자는 8세 때 왕이 세상을 떠나므로 왕위에 올랐다. 이가 혜공대왕(惠恭大王)이다. 왕은 나이가 어렸으므로 태후가 대신 정사를 보살폈으나 정치가 잘 되지 않았다. 도둑이 벌떼처럼 일어나 미처 막아낼 수 없었다.
경덕왕(재위 742~65)은 통일신라문화의 꽃을 피운 ‘예술의 왕자(王者)’였다. 요즘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문화대통령’이었다. 통일신라의 예술품으로 뛰어난 것은 모두 경덕왕 때 소산이다.
불국사, 석불사(석굴암), 석가탑, 다보탑은 물론이고 에밀레종, 경주 남산의 불상들, 안압지(雁鴨池) 출토의 판불(板佛)들, 오래전에 사라졌지만 거대하기 이를 데 없었다는 황룡사의 대종(大鐘)과 분황사의 약사여래입상도 이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 8세기 3/4분기 경덕왕 때는 이처럼 통일신라문화의 한 정점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통일신라문화의 마지막 만개(滿開)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경덕왕이 세상을 떠나고 그의 아들 혜공왕이 즉위하자 귀족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전제왕권에 도전하여 혜공왕은 결국 신하로부터 죽임을 당하고 그 신하가 왕이 되니, 이후 왕권을 둘러싼 귀족들간의 다툼이 계속된다.
경덕왕은 이런 문화적 난숙 속에 감지되는 불안과 위기를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경덕왕은 왕실의 전제정권이 귀족세력의 부상으로 흔들리는 것을 의식하여 왕권의 재강화를 위한 일련의 관제정비와 개혁조치를 취했다. 불국사를 지으면서 김대성이 총감독을 맡은 것도 국무총리급에게 이 공사를 맡긴 셈이었다.
그러나 경덕왕의 소망은 하나도 이루어진 것이 없었다. 아들은 결국 귀족세력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고, 성덕대왕신종도 경덕왕은 실패만 거듭해서 혜공왕 7년(771)에야 완성됐고, 불국사도 그는 완공을 보지 못하고 혜공왕 때 준공을 보았으니 모두 감당할 수 없는 국력의 쇠미를 의미하는 것인가, 아니면 천신의 뜻이었던가.
불국사 안마당엔 꽃밭이 없습니다
불국사는 삼국시대 이래 유행한 여러 가람배치 중 달리 유사한 예를 찾아볼 수 없는 오직 하나뿐인 독특한 구조를 갖고 있다. 그 점에서 불국사의 특징과 매력과 가치가 모두 나온다.
우리나라 초기의 사찰은 시가지에 있는 평지사찰이었다. 또한 당시의 절들은 대개 시내에 있었고, 건물에는 회랑이 있었다. 그래야 성속(聖俗)의 영역이 확실히 구분되었고, ‘왕즉불(王卽佛)’이라 했으니 부처를 모신 곳은 임금이 사는 곳에 준해야 했으므로 궁궐에 회랑이 있듯이 절에도 회랑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중대신라로 들어서면 의상대사가 세운 화엄 10찰을 비롯하여 지방에 산사가 하나씩 세워지게 되었고 이때부터 산사에는 회랑이 없어졌다. 그 이유는 아마도 주변의 산세가 회랑의 역할을 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하대신라로 들어서면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선종사찰이 심심산골에 개창되면서 절집은 교종의 엄격성보다도 선종의 개방성이 강조되니 더이상 회랑 같은 엄격한 질서나 구속을 요구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국사는 그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다. 불국사는 토함산 자락에 자리잡았지만 평지사찰 개념으로 경영하였다. 불국사는 화엄세계를 추구하는 교종의 사찰이지 선종사찰이 아니었다. 더욱이 불국토를 건축적으로 구현한 부처님의 궁전인 것이다.
그래서 불국사 안마당에는 회랑은 있지만 산사에서 볼 수 있는 아름다운 꽃밭도, 나무도 없다. 그 대신 산비탈을 평지로 환원하기 위한 엄청난 축대를 쌓아야 했다. 그것이 불국사의 가장 큰 특징이자 가장 큰 아름다움이 되었다.
불국사 석축의 아름다움
불국사 건축의 아름다움은 석축(石築)으로부터 시작된다. 일연스님은 석축의 구름다리〔雲梯〕를 일러 “동부의 여러 사찰 중 이보다 나은 것이 없다”는 한마디로 마감했다. 조선후기의 한 낭만적 문인인 박종(朴琮)이 쓴 「동경(경주)기행」이라는 글에서는 “그 제도가 심히 기이하고 장엄하다”는 말로 감탄을 대신했다.
전장 300자, 약 90미터의 이 석축은 대단히 복잡한 구성이어서 현란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이 복잡하고 현란한 구성이 어지러운 것이 아니라 정연한 인상을 주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면 “경사지를 두개의 단으로 조성하고 거기에 석축을 쌓았는데 아랫단은 자연미나게 쌓았으며 윗단은 다듬은 돌로 모두 인공미나게 쌓았다. 그리하여 단순한 가운데서 변화를 주며 또 자연미로부터 인공미에로의 체계성있는 변화를 안겨오게 하였다”.리화선 『조선건축사』 제1권, 발언 1993)
반듯하게 다듬은 장대석으로 네모칸을 만들면서 열지어 가는 것이 기본틀인데 그 직사각형 속은 제각각 다른 크기의 자연석으로 꽉 채우고 청운교·백운교, 연화교·칠보교에서 인공미를 최대한 구가했는가 하면 크고 잘생긴 듬직한 자연석을 그대로 기단부로 삼는 대담한 여유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반듯한 석축이 열지어 가다가는 범영루(泛影樓)에 이르면 화려한 구성의 수미산(須彌山) 모양 축대가 누각을 번쩍 들어올린다.
불국사의 교리적 상징 체계
현재 남아 있는 건물과 「역대기」의 기록으로 유추해보면, 창건 당시의 건축취지는 그야말로 불국토를 건축적으로 재현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 절집의 돌 하나, 문 하나마다 그런 정신이 들어 있는 것이다.
불국사의 석축은 곧 천상의 세계로 오르는 벽이다. 그 정상이 수미산인데 범영루가 이를 의미한다. 그래서 「역대기」에서는 ‘수미범종각’이라고 이름하였고, 그 정상의 누각에는 108명이 앉을 수 있다고 하였다. 108은 물론 백팔번뇌를 의미한다.
그리고 천상으로 오르는 청운교와 백운교는 모두 33계단으로 곧 33천(天)의 세계를 의미한다. 청운교와 백운교의 위치는 책마다 다르게 나오는데 「역대기」에 의하면 위가 청운교, 아래가 백운교로 되어 있고, 「동경기행」에서도 위가 청운, 아래가 백운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지만 정확히 말하면 아래 계단이 끝나면서 무지개다리 모양으로 돌이 깔려 있는 부분이 백운교이고, 위의 계단이 끝나면서 자하문(紫霞門) 문턱에 다리를 가설하듯 돌을 깐 것이 청운교라고 했다. 어느 말이 맞는지 모르지만 위가 청운교이고, 아래가 백운교이다.
이리하여 33천에 올라 자하문에 들어서면 석가모니 부처를 모신 대웅전과 마주하게 되고 그 좌우로는 석가탑과 다보탑이 시립하듯 우뚝 서 있다. 이런 쌍탑의 설정은 『묘법연화경』의 「견보탑품(見寶塔品)」에 나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건축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다보불은 평소에 "내가 부처가 되어 죽은 뒤 누군가 법화경을 설하는 자가 있으면 내 그 앞에 탑 모양으로 땅에서 솟아나 '참으로 잘하는 일이다'라고 찬미하며 증명하리라"고 서원(誓願)을 내었는데 훗날 석가여래가 법화경의 진리를 말하자 그 자리에 칠보로 장엄한 탑이 우뚝 섰다는 것이다. 이것이 다보탑의 내력이다. 그래서 다보탑은 화려한 것으로 되었다. 다보불과 석가여래의 이런 관계는 곧잘 이불병좌상이라 해서 부처님 두분이 나란히 앉아 있는 불상으로도 표현되곤 했다. 다보탑 사리함에서 나왔다는 불상 2구란 바로 다보・석가일 가능성이 크다.
대웅전 영역 서쪽으로는 서방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여래를 모신 극락전 영역이 따로 있는데, 여기로 오르는 계단은 칠보교와 연화교로 극락세계의 정문인 안양문(安養門)에 곧장 연결되고 있다. 칠보교는 칠보를 돋을새김으로 조각한 일곱개의 계단인데 지금은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마모되었지만 연화교의 연꽃받침 조각은 지금도 선명하다.
극락전 뒤쪽으로는 대웅전과 이어주는 3열의 돌계단이 각각 16단으로 모두 48단을 이루고 있다. 이는 아미타여래가 48가지 원(願)을 내어 극락세계를 건립한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불국사는 석불사 못지않은 그런 비례관계를 지니고 있다. 이에 대한 분석 또한 석불사를 측량했던 요네다가 발표한 「불국사 조영계획에 대하여」라는 논문에 수치와 도면으로 제시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수치란 비례관계이며 그것이 조화(harmony)와 균제(symmetry)의 근거가 된다.
그 내용을 요약해보면, 불국사는 다보탑과 석가탑 사이 간격의 1/2을 단위기준으로 하고 그것의 일정한 배수로 건축물들을 규모있게 배치하였다.
석등을 중심으로 대웅전·석가탑·다보탑이 동일한 거리에 있으며 대웅전 지붕 높이와 자하문의 거리는 1:2의 비율로 되어 있다. 다보탑, 석가탑의 하층기단의 폭은 대웅전 한 변의 1/3이며, 석가탑의 평면 크기는 대웅전 평면의 1/10이다. 이런 정연한 비례관계 때문에 불국사에서는 정연한 기품이 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불국사 건축의 세부 관찰
석가탑, 다보탑, 석등과 배례석, 금동아미타여래좌상, 금동비로자나불좌상, 불국사 사리탑, 그 어느 것 하나 나라의 보물 아닌 것이 없고, 명품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여유가 없다. 그 대신 나는 답사객이 그냥 지나치기 쉬운 감추어진 아름다움을 제시하는 것으로 나의 임무를 대신하고자 한다.
첫번째는 대웅전 정면으로 오르는 돌계단의 소맷돌 측면의 살짝 공그른 곡선의 아름다움이다. 마치 옷깃의 선 맛을 낸 것도 같고, 소매끝의 곡선 같기도 한데 그 날카로운 듯 부드러운 아름다움엔 더할 수 없는 기쁨이 일고, 그런 미세한 아름다움을 구사한 옛사람의 마음을 생각하면 놀라움이 일어난다.
두번째는 석가탑의 탑날개 직선의 묘이다. 사람들은 다보탑은 그 화려한 구조의 묘를 자세히 살피면서도 석가탑은 전체적 인상만 즐길 뿐 세부적 관찰은 포기하곤 한다. 석가탑은 무엇보다도 지붕돌이 상큼하게 반전한 맵시가 일품이다.
이를 자세히 살피면 지붕돌은 기울기가 직선으로 되어 있지 반전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처마를 직선으로 뻗게 하다가 추녀 부분에서 살을 두툼히 붙여 급하게 깎아낸 것인데, 그것을 밑에서 올려다보니까 살포시 반전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착시현상을 이용하여 곡선의 느낌을 창출한 것이다.
세번째는 석축에서 그랭이법으로 자연석 위에 얹힌 장대석을 자연석 모양에 따라 깎은 것이다. 외국인들은 대개 여기에서 자지러지듯 놀라며 인공과 자연의 조화에 얼마나 많은 공력과 계산이 들었는가를 인정하게 된다.
극락전 바깥쪽 서쪽 면의 축대쌓기에 이르면 그 감동은 절정에 이른다. 불국사 석축 정면에서 왼쪽으로 돌아서면 비탈길에 드러난 극락전의 석축이 있는데, 곧게 세운 세로줄 장대석을 가로지르는 허리축 걸림돌이 수평으로 뻗어가다가 오르막에서 급격한 꺾임새를 나타내는 동세(動勢)는 천하의 일품이다.
네번째는 극락전 안양문에서 연화교를 내려다보면서 연꽃무늬가 계단을 타고 내려가는 것을 보는 것이다. 계절과 시각과 광선에 따라 선명도에 차이는 있지만 육안으로 반드시 간취될 것이다. 시카고 미술관의 제임스 우드 관장은 이 조각새김을 보는 순간 “믿기지 않는다(incredible)”고 했다.
다섯번째는 관음전에 올라 관음전 남쪽 기와담 너머로 보이는 회랑과 다보탑을 꼭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서 보는 시각이, 회랑이 있는 절집의 정연한 기품이 무엇인가를 남김없이 제시해주기 때문이다.
여섯번째, 불국사 서북쪽의 빈터에는 불국사 복원 때 사용되지 않은 석조 부재들이 널려 있는데 이중 주춧돌이야 누구나 알 만한 것이지만, 뒷간에 사용되었던 타원형으로 구멍난 돌은 참 신기하고 재미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이상하게도 네모난 돌에 버들잎 모양으로 홈을 파고 아래쪽에 작은 구멍을 내놓은 용도 미상의 석물이 있다. 물을 담아 밑을 씻던 물받이 석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불국사 수난의 역사
「역대기」와 「사적」을 통하여 우리가 마지막으로 불국사의 영광을 볼 수 있는 것은 1796년 정조대왕이 하사품을 내려준 것이며, 마지막 기록으로 남아 있는 것은 1805년에 비로전을 수리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후 19세기 100년간 불국사가 어떤 상태로 유지되어왔는지에 대해서는 어떤 기록도 갖고 있지 않다.
1902년 8월, 토오꾜오제국대학 조교수였던 세끼노 타다시가 고건축 실태조사를 위해 한국에 왔을 때 불국사를 조사한 기록과 사진을 남긴 것이 우리가 20세기 들어와 다시 만나는 첫 자료이다. 이때 불국사에는 스님이 두어명밖에 없었다고 한다.
세끼노는 이때 조사한 것을 2년 뒤인 1904년에 『조선건축 조사보고』라는 책자로 발표하였는데, 그는 이 책을 조선 방문시 신세진 개성에 사는 한 일본인에게 선물로 보냈다.
그런데 이것이 결과적으로는 유물을 약탈해가는 정보가 되어 그 개성의 일본인은 을사보호조약 이듬해인 1906년 불국사에 와서 지금 보물 제61호로 지정되어 있는 이른바 ‘광학(光學)부도’를 일본으로 반출해갔다. 이후의 과정은 이구열(李龜烈) 선생의 『한국문화재 수난사』(돌베개 1996)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그 자초지종은 다음과 같다.
불국사 사리탑은 어떻게 돌아왔나
일본으로 반출된 불국사 사리탑은 토오꾜오 우에노 공원께의 세이요오껜(精養軒)이라는 요릿집 정원에 있었다고 한다. 당시 세끼노는 『쿠니하나(國華)』지의 요청으로 이 승탑의 해설문을 기고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세끼노는 1909년 이래로 다시 조선에 와서 고적조사를 하면서 조선총독부에 이 승탑을 되찾아 제자리에 돌려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승탑은 요릿집에서 딴 데로 팔려가고 행방을 잃었다. 그래도 세끼노는 끈질기게 탐문하여 물경 20년 뒤인 1933년 5월 토오꾜오의 한 제약회사 사장인 나가오 킨야(長尾欽彌)의 정원에서 이것을 발견했고, 드디어는 나가오가 조선총독부에 기증하는 형식으로 하여 1933년 7월에 불국사로 반환되었다.
다보탑의 돌사자와 사리함은?
1909년, 세끼노가 경주에 다시 왔을 때 그사이 불국사 다보탑 기단 위 네 귀퉁이에 놓여 있던 네 마리의 돌사자 중에서 두 마리가 분실된 것을 발견했다. 그는 돌사자 네 마리 중에서 상태가 좋은 것 한쌍이 사라졌다고 했다.
그런데 다보탑의 돌사자 나머지 한쌍 중 비교적 상태가 좋은 것이 또 도난당하고 마는데 그것은 또 언제 사라진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경주군의 서기로 근무했던 키무라 시즈오(木村靜雄)가 1924년에 「조선에서 늙으며」라는 글을 쓰면서 “다보탑 사자 한쌍을 되찾아 보존상의 완전을 얻는 것이 나의 죽을 때까지 소망”이라고 했으니 그 이후가 아닌가 추정된다.
1924년 일제는 불국사에 대한 대대적인 개수(改修)공사를 실시하였다. 공사내역은 석축과 석교의 복원, 법당의 중수 그리고 다보탑의 전면 해체작업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 공사관계 기록이나 사진을 남기지 않았는지 현재까지 밝혀진 것이 없다. 이로 인하여 1970년대 복원공사 때 1924년 개수공사시 변형해놓은 원상을 바로잡느라 무척 고생했다고 실무자들은 증언하고 있다.
1924년 공사에서 결정적인 피해를 본 것은 다보탑의 해체수리였다. 이에 대한 공사 보고서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데, 여기에 분명히 들어 있었을 사리장치가 이때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완전범죄는 없는 법인가보다. 1924년 불국사 보수공사의 감독이었던 타께우찌 야스지(武內保治)가 1925년 6월 9일자로 경주군수에게 보낸 공문 중 「발견물 이송의 건(件) 통지」라는 공문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는 것이다.
다보탑 수선중 발견된 불상 2구의 처치에 관하여 이번 학무국장으로부터 심사의 필요상 송부하라 하므로 경복궁 내 종교과(宗敎課) 분실(分室) 앞으로 발송한다.(『불국사 복원공사 보고서』, 문화재관리국 1976)
경주 황복사탑에서 순금불상 2구가 사리장치로 발견된 예가 있는데, 다보탑의 것도 그런 것이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이 불상이 어떤 것이고 어디로 갔는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 없다. 그것은 실로 아름다운, 석가탑 사리장치 솜씨에 준하는 명작이었을 것이다.
1966년 9월의 도굴 훼손과 1966년 10월의 파손
1966년 9월. 때는 차기 대통령선거 운동이 한창이던 때, 9월 8일자 도하 신문에는 ‘불국사 석가탑 위태’라는 제목 아래 사진과 함께 3단 기사가 실렸다. 이하 진행과정을 당시 특종을 한 『중앙일보』 기사로 소개한다.
불국사 대웅전 앞에 있는 국보 제21호 석가탑이 지난 8월 29일 밤 동해남부 일대에 있었던 미진(2도가량)으로 흔들려 탑이 6도가량 남쪽으로 기울어졌으며, 탑신 4개처가 떨어지고 2층 갑석 하단부가 균열됐음이 8일 현지 조사에서 돌아온 도교육위원회 직원에 의해 밝혀졌다. (…)
그리고 5일 뒤인 9월 13일자 신문에는 ‘석가탑 파손에 양론(兩論)’이라는 제목 아래 6단 박스기사가 실렸다.
석가탑 훼손 원인을 둘러싸고 문화재관리위측의 조사단과 현지 경찰, 불국사측의 견해가 엇갈려 주목을 끌고 있다. 문화재보존위원 황수영 교수와 문교부 임봉식(任奉植) 문화재과장 등 일행은 9일부터 11일까지 3일간의 현지조사 끝에 ‘훼손 원인이 자연적인 것이었다’는 이제까지의 주장을 뒤엎고 사리를 탐낸 도둑의 소행이라고 결론, 경찰국에 수사를 의뢰했다.
범인들은 처음, 9월 3일 밤 석가탑 하층을 들어올리려다 잭(jack)의 힘이 약해서 실패하자 이튿날 다시 10톤짜리 공기압축 잭을 대구에서 날라다 일층탑을 들어올렸다고. 그러고도 9월 5일 밤에 세번째로 이층탑을 들어올려 손을 넣어 더듬어보았지만 사리가 없어서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튿날 석가탑 이외에도 지난 10개월간 모두 13회 범행을 했다는 자백을 받아냈는데 석가탑과 똑같이 잭 때문에 망가진 나원리 오층석탑도 이들의 소행임이 밝혀졌다.
이후 문화재관리국은 석가탑을 원상대로 복원하기 위해 전문가로 문화재 보수단을 편성했고 10월 13일부터 복원공사를 시작했다. 13일 하오 2시 금빛 찬란한 사리함이 발견되어 모두들 탄성을 올린 지 불과 2시간 만에 들어올리던 2층 옥개석이 떨어져 미리 밑에 내려놓았던 3층 탑신마저 부서뜨린 것이다. 도굴자의 손에 상처를 입었던 석가탑이 이제 그것을 복원하던 손길에 또 아픈 상처를 입었다.
천하의 보물—석가탑 사리장치
석가탑 대파(大破)에 톱기사를 내주어야 했지만 사실, 탑이 깨지기 두시간 전에 2층 탑신부에서 발견한 사리장치는 우리나라의 국보인 정도가 아니라 세계적인 보물로, 세기의 대발견이었다.
탑신 복판 사방 41센티미터, 길이 18센티미터의 사리공(舍利孔)에는 파란 녹으로 덮인 금동제 사리함이 둘리고 그 둘레에는 목제소탑(木製小塔), 동경(銅鏡), 비단, 향목, 구슬 등이 가득한 채 둘레에 천년 유향(遺香)이 번졌다. 네모반듯한 청동외합(너비 17cm, 높이 18cm)은 석가탑의 그것처럼 장중한 균형미를 갖춰 국내외에서 발견된 사리장치 중 최고의 예술품임이 확인되었다.
이밖에 비단으로 싼 목판본 불경은 폭 8센티미터, 길이 5미터의 다라니경으로서 한지에 한문이 총총히 박힌 것을 볼 수가 있어 이는 우리나라 최고의 인쇄문화를 말하는 귀중한 유물임이 분명하다.
그 무렵 아주 중요한 슬픈 사건이 불국사에서 또 일어난 것을 아무도 몰랐다. 지금도 거의 모든 사람이 모르고 있는 일이다. 그것은 석가탑에서 나온 사리장치 중 하이라이트인 사리 46과가 담겨 있던 녹색 유리사리병을 한 스님이 옮기다 떨어뜨려 깨뜨린 것이다. 그야말로 박살이 나도록 깨져 억지로 이어붙인 상태로 지금은 국립경주박물관 창고에 있다.
1969년 늦봄, 박정희 대통령이 3선개헌을 과연 할 것이냐 아니냐에 정가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던 때, 5월 12일 박정희 대통령은 불국사 복원을 지시하였다. 이리하여 시작된 불국사 복원공사는 만 4년 만인 1973년 7월 3일 준공하여 오늘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그것은 막대한 예산이 들어간 엄청난 공사였다. 이 불국사 복원과정은 『불국사 복원공사 보고서』에 40단계로 상세하게 일지로 기록해두었는데 이 일지를 보면 박정희 대통령의 문화재 복원의지가 얼마나 강했는가를 알 수 있으며, 당시 경제 실정으로는 감당하기 힘든 재원을 강력한 통치력으로 밀어붙여 완공하였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불국사의 잃어버린 아름다움
그리하여 불국사는 복원되었다. 지금 그나마도 복원되었기에 나는 우리나라 건축에서 최고로 손꼽을 수 있게 됐으니 이 일을 수행한 모든 분들의 노고에 감사하는 마음도 없지 않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보다 또 모든 면에서 많이 발전했다. 기술도, 조사연구도, 생각도 30년 전과는 다른 것이 많다. 그래서 역사도, 문화도 발전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각도에서 그 복원공사 때 잃어버린 불국사의 아름다움을 또 기록해두지 않을 수 없다.
첫째는 경루를 복원하지 않은 잘못이다. 앞서 살폈듯 완벽한 대칭적 구성과 황금비례를 갖춘 것이 불국사 조영계획인데 막상 대웅전 영역에 들어서면 화려한 다보탑과 단순한 석가탑이 균형을 잃고 있다는 생각을 버릴 수 없다.
지금 경루는 복원되지 않고 사물(四物)을 걸어놓았지만 원래는 아주 단순하고 닫힌 구성의 건물이었고, 종루인 범영루는 ‘수미범종각’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화려한 건물이었다. 그러니까 부처님 위치에서 보자면 왼쪽은 화려한 다보탑 너머로 단순한 경루, 오른쪽은 단순한 석가탑 너머 화려한 종루로 대(對)를 맞추어 다양의 통일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래야 불국사의 기본 조영취지가 살아나는 것이다.
둘째는 석가탑을 복원하면서 상륜부를 너무 장식적으로 처리한 점이다. 석가탑의 상륜부는 원 모습을 알 수 없어서 남원 실상사탑의 상륜부를 그대로 본떠온 것이다. 그런데 실상사탑은 석가탑을 본받은 9세기 석탑으로 아담하고 장식성이 강한 탑이었으니, 이를 석가탑에 옮기려면 그 장식성을 제거하고 석가탑의 단순하고 우아한 아름다움에 맞추었어야 했다.
셋째는 극락전 건물의 초라함이다. 극락전은 임란 때 불탄 뒤 1750년에 중창된 것인데, 그때 건물의 기둥을 반듯하게 깎은 것이 아니라 뒤틀림이 강한 것을 썼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정연한 기단부와는 어울리지 않게 되었다. 그런 건물은 자연석 주춧돌에 그랭이법으로 세우는 산사에나 어울릴 뿐 회랑이 있는 이 기하학적 건축에는 불성하고 초라한 기색으로 남을 뿐이다. 그 결과 극락전은 곧 쓰러질 것처럼 볼품이 없어 안쓰럽기까지 하다.
넷째는 아마도 가장 큰 아쉬운 점으로, 구품연지(九品蓮池)를 1970년대 복원 때 포기한 점이다. 구품연지는 청운교와 백운교 아래에 있던, 동서로 길이 39.5미터, 남북으로 폭 25.5미터 되는 타원형 연못이었다. 연못 안쪽의 이른바 호안부는 불국사 석축에 쓰인 큰 자연석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여기에는 항시 맑은 물이 가득했을 구품연지에는 수미산 같다는 범영루가 그 화려한 축대와 함께 거꾸로 비쳤던 것이다. 그래서 누각의 이름을 범영루(泛影樓)라 했던 것이다. 만약에 구품연지가 있었다면 일교차로 인해 당연히 아침안개를 일으켜 청운교와 백운교를 가볍게 덮었을 것이다. 그럴 때면 ‘보랏빛 안개’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자하문은 진짜 자하문 같았을 것이고, 불국사는 정녕 불국토의 건축적 구현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8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