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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강성 Oct 08. 2024

로마인 이야기 1권 (2)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 공화정의 발전과 반도 통일

그리스를 알고 난 뒤


기원전 509년 공화정이 되고 외부의 위협을 물리친 후, 공화정 로마는 큰 문제를 끌어안게 되었다. 그 후 기원전 367년에 이르기까지 무려 80년 동안이나 로마를 양분하게 된 "귀족과 평민의 대결"이 그것이다.


공화정이 탄생한 직후, 온 나라가 일치단결하여 외적에 대항하지 않을 수 없었던 10여 년은 로마의 평민계급에게 그들이 가진 힘을 자각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해마다 전투가 벌어졌기 때문에, 평민들은 그들의 직장인 농토나 가게에서 오랫동안 떠나 있게 되어 경제 사정이 나빠졌다.


반면에 귀족계급은 넓은 농토를 경제적 기반으로 당장 경제력이 떨어지는 형편은 아니다. 로마 귀족에 대한 평민들의 항쟁도 이런 경제적 불만이 도화선 구실을 했다.


호민관 창설


평민들이 외적이 쳐들어 올 때마다 ‘성스러운 산’이라는 뜻의 몬테사크로에서 농성을 하며 전쟁 참여를 거부하기 몇 차례, 드디어 기원전 494년, 일대는 승리의 환호성으로 뒤덮였다. 평민계급의 이익과 권리 수호를 목적으로 하는 전임 관직을 창설하기로 결정되었기 때문이다.

[몬테사크로로 탈퇴한 민중 by B. 발로치니 1849년, 출처 구글 이미지]

‘트리부누스 플레비스’라고 불리는 이 관직은 ‘호민관’으로 번역되는데, 이 관직에 앉으려면 평민계급 출신이어야 한다는 것이 절대적인 조건이었다. 호민관은 귀족계급이 쉽게 좌지우지할 수 있는 민회가 아니라, 따로 구성된 평민 집회에서 선출된다.


처음에 호민관 정원은 두 명이었고, 호민관에게는 집정관이 내린 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졌다. 또한 오늘날의 국회의원과 마찬가지로 신분상의 면책특권도 인정되었다.


12표법


이후 성문법을 만들기 위해 그리스에 파견했다가 귀국한 세 사람을 포함한 열 명의 위원이 성문법을 만들기 위한 ‘10인 위원회’(데켐비리)를 구성했다. 10인 위원회의 주도권을 장악한 것은 그리스를 시찰하고 온 세 사람이 아니라, 전부터 평민과의 대결 노선을 명확히 하고 있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였다.


기원전 449년, ‘포로 로마노’ 한쪽에 한 항목씩 동판에 새겨진 ‘12표법’이 발표되었다. 그 내용은, 잔뜩 기대하며 기다렸던 평민은 물론 협상파인 귀족들조차도 아연실색할 만한 것이었다. 새로 추가된 항목은 하나도 없었다. 로마인의 대다수는 도대체 무엇을 위한 그리스 시찰이었느냐고 생각했을 게 분명하다.

[로마 광장에서 12표법을 들여다보는 시민들을 그린 작자 미상의 삽화 출처 위키피디아]

로마 성문법으로는 처음이자 마지막인 이 법은 모두 12조였기 때문에 ‘12표법’이라고 부르는데, 오늘날에는 로마법 전문가들도 3분의 1 정도밖에 모른다고 한다. 그것은 평판이 너무 나빠서 개정이 잇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기대를 배신당한 평민계급은 다시 대결 태세를 분명히 했다. 그 효과는 당장 나타났다. 12표법의 주도자였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가 이끄는 로마군이 외적과 두 번 싸워서 두 번 다 패배를 맛본 것이다.


로마의 귀족


로마의 귀족계급은 아테네의 귀족계급과는 달리, 신흥세력의 힘에 밀려 당장 과거의 유물이 될 만큼 허약하지 않았다. 그들은 여전히 확고한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것도 토지에만 의존하는 힘이었다면, 언젠가는 그들도 아테네의 귀족계급과 같은 운명을 걸었을 게 분명하다.


로마의 귀족은 소유하는 토지 외에 또 다른 힘을 가지고 있었다. 12표법에도 명시된 파트로네스(귀족)와 클리엔테스(평민)의 끈끈한 관계이다. 이들의 관계는 명확히 정의 내리기는 어렵다. 귀족은 클리엔테스를 보호하고, 클리엔테스는 귀족의 보호를 받는다고 정해져 있었던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로 어려운 일이 생기면 발벗고 나서서 도왔고 강자와 약자의 관계라기보다는 좀 더 내밀한 관계였으며, 양자 사이에 개재하는 것들 가운데 가장 중시된 것은 무엇보다도 신의(피데스)였다. 배신은 최고의 악덕으로 간주되었다. 파트로네스와 클리엔테스의 이런 관계는 세습되었다.


기원전 449년부터 기원전 367년까지 80여 년 동안 로마는 줄곧 모색을 거듭하고 있었다. 두 명의 집정관 제도를 폐지하고, 여섯 명의 ‘트리부누스 밀리타리스’(군사 담당관)로 바꾸기도 해보았다. 이것은 페리클레스 시대에 아테네의 최고 집행기관인 열 명의 ‘국가전략 담당관’을 연상시킨다.


두 명이 행사하고 있던 권력을 여섯 명으로 분산하면 과두정치의 색깔이 엷어진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엉망이었다. 지휘계통을 통일할 필요에 쫓길 때마다 독재관을 임명하는 형편이었다. 나중에 카밀루스처럼 다섯 번이나 독재관을 경험한 사람도 나왔다.


이러는 사이 그리스에서는 기원전 404년에 결국 아테네가 스파르타에 패하여 스파르타의 패권시대가 시작되었다. 아테네는 페리클레스를 잃고 스파르타에도 패한 뒤, 갈피를 잡지 못하고 계속 혼돈 속을 헤매고 있었다. 기원전 399년에는 혼돈에 빠진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했다.


켈트족의 로마 침공


기원전 6세기가 다가올 무렵부터 켈트족의 이동이 시작되었다. 남쪽으로 밀려난 켈트족은 알프스산맥을 넘어 오늘날의 밀라노에서 포강 유역에 걸쳐 자리를 잡았다.


이탈리아에 처음 정착한 켈트족은 그러나 로마에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았다. 로마와 그들 사이에는 아펜니노산맥이 가로놓여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에트루리아인의 세력권이 아직 건재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얼마 후, 로마는 에트루리아계 왕을 쫓아내고 공화정으로 이행하며 주변 에트루리아의 세력권을 하나씩 무너뜨림으로써 켈트족의 남하를 막고 있던 방파제를 스스로 파괴해 버린 꼴이 되었다. 기원전 396년, 로마는 카밀루스의 지휘 아래 마침내 에트루리아에서도 유력한 도시였던 베이를 공략하는 데 성공했다.

[카밀루스의 승리 출처 구글 이미지]

로마는 타국과 전쟁이 시작되면 거국일치 체제가 되어 전쟁에서 승리하지만, 전투가 끝나기가 무섭게 귀족파와 평민파로 나뉘어 싸움을 벌이는 것이 상례가 되어 있었다. 베이를 공략한 뒤에도 이 상례가 되풀이된 것에 불과하다. 다만 이때는 평민 측이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베이를 로마와 함께 제2의 수도로 삼자는 제안이었다. 평민 측이 내놓은 이 제안의 뒤에는 베이의 훌륭한 시가지에 대한 감탄도 있었지만, 로마에 머무르는 한 귀족파에게 눌릴 수밖에 없다는 계산도 깔려 있었다.


귀족파는 여기에 반대했다. 귀족파 중에서도 특히 독재관으로서 10년 동안 계속된 베이 공략전에 마침표를 찍은 카밀루스가 제2수도를 로마와 병립시키자는 제안에 앞장서서 반대했다.


그런데 카밀루스가 베이에서 몰수한 돈을 그리스의 델포이에 있는 아폴로 신전에 감사금으로 봉납한 일이 문제가 되었다. 그가 아무 의논도 하지 않고 혼자 제멋대로 결정한 것이 ‘불투명’하다는 이유로 고발당하였다.


카밀루스는 자진해서 망명하는 길을 택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로마에서는 자진해서 국외로 나간 시민한테는 죄를 묻지 않기로 규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카밀루스는 클리엔테스들의 배웅을 받으며 한밤중에 몰래 로마 성문을 빠져나갔다.


이후 기원전 390년 여름, 아펜니노산맥을 넘은 켈트족은 진군하는 길목에 있는 에트루리아 도시들을 공략하면서 남하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7월 18일, 로마군은 테베레강 상류에서 맞이한 적에게 맥없이 패하고 말았다. 로마 패잔병은 개미새끼들처럼 사방팔방으로 흩어져 도망쳐버렸다.


거국적인 저항은 불가능하다고 로마인들은 판단했다. 청장년 남자들만 카피톨리누스 언덕에 올라가 농성하기로 결정했다. 저항 없는 로마에서 켈트족은 잔학하기 이를 데 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었다. 닥치는 대로 살해하고 폭행하고 약탈하고 노예로 삼았다. 신전도, 원로원 의사당도, 저택도, 시장도 모조리 파괴하고 불태웠다.

[켈트족과 카피톨리누스 언덕에서 항전하는 로마인 출처 구글 이미지]

로마인이 먼저 켈트족에게 협상을 제안했다. 몸값을 낼 테니 로마에서 나가달라는 것이 협상 조건이었다. 로마인으로서는 치욕스럽기 짝이 없는 일이었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그 방법밖에 없었다. 300킬로그램의 금괴를 손에 넣은 켈트족은 7개월 동안 계속된 점령을 풀고 로마를 떠났다.


카밀루스


야만족이 떠난 뒤에 로마인이 맨 먼저 한 일은 카밀루스를 다시 불러들이는 것이었다. 카밀루스는 망명지에서 조국의 참상을 상상하면서도, 공식적인 귀국 명령이 없이는 돌아올 수 없는 신세였다. 그는 귀국 명령과 함께 독재관에 임명되었다는 통고도 받았다. 그가 독재관에 취임한 것은 두 번째였다.


로마가 다시 일어서기까지는 4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야만족 앞에 어이없이 굴복한 로마에 인근 부족들이 등을 돌렸기 때문이다. ‘라틴 동맹’도 공중분해되었다. 해체된 정도로 끝난 것이 아니라, 어제까지의 동맹국이 이 틈을 타서 로마를 멸망시키려 하는 적으로 돌변했다.


굴욕을 참으며 몸값을 내고 7개월 만에 겨우 켈트족을 철수시킨 로마는 우선 파괴된 시가지를 복구하는 일에 착수했다. 일곱 언덕을 빙 둘러싸는 성벽이 전과 같은 형태는 아니지만 다시 세워졌다. 견고한 방벽은 완성되었지만, 최선의 방어는 공격에 있다. 로마는 다시 알맞은 시기에 알맞은 자리에 알맞은 인재를 얻게 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카밀루스를 이야기할 때,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했다.

“카밀루스만큼 군대 지휘관으로서 중요한 지위를 계속 차지하고, 또한 그 지위를 빛나는 업적으로 장식한 사람은 없었다. 그는 다섯 번이나 독재관에 지명되었고, 네 번이나 개선식을 거행했으며, 로물루스에 이어 로마의 두 번째 건국자로 칭송을 받았지만, 집정관에는 한 번도 선출된 적이 없는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로마에 등돌린 동맹 부족들을 다시 로마의 우산 밑으로 데려오는 데에는 카밀루스의 이런 성격이 큰 효과를 발휘했다. 그는 로마에 패배를 맛본 과거의 동맹자를 마치 배반 따위는 전혀 없었던 것처럼 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우선 전투에 이겨서 로마의 실력을 보여준 뒤에야 비로소 그는 평화적으로 패배자를 대했다.


독재관을 다섯 번이나 역임한 카밀루스의 업적은 무엇보다도 우선 적과 싸워서 지는 법이 없다는 말까지 들은 그의 전적일 것이다. 야만족에게 실컷 당하고 자신감을 잃어버렸던 로마인은 그의 연전연승으로 자신감을 되찾았고, 한때 로마를 깔보았던 인근 부족들도 로마의 국경을 침범할 용기를 잃어버렸다.


정치개혁


기원전 367년, 로마 역사상 획기적인 법률인 ‘리키니우스법’*이 성립되었다. 이 법은 우선 여섯 명의 군사 담당관 제도를 폐지하고, 다시 두 명의 집정관 제도로 돌아갈 것을 규정했다. 그리고 공화국 정부의 모든 요직을 평민 출신한테도 개방하기로 결정했다.


기원전 367년에 호민관 '가이우스 리키니우스 스톨로'와 '루키우스 섹스티우스 라테라누스'에 의해 '리키니우스 섹스티우스 법(라틴어: leges Liciniae Sextiae)'이 제안되었다.

법의 내용은 먼저, '트리부누스 밀리툼 콘술라리 포테스타테'(군사 담당관)을 폐지하고, 두 명의 집정관 중 한 명은 반드시 플레브스(평민) 중에서 선출되게 한 것이다.

두 번째 내용은 공유지를 500유게라(약 125헥타르) 이상 점유할 수 없도록 제한하는 것이었다. 늘어나는 시민 숫자에 비해서 계속 적어지는 공유지를 부유층이 독점할 수 없게 하고, 채무 등으로 생활이 어려운 평민들의 구제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마지막으로 채무자가 이미 지출한 이자를 원금에서 공제하고 잔액을 분할 납부 할 수 있게 한 것인데, 고대 그리스에서도 '솔론의 개혁'이 후에 나타나는 일련의 개혁들도 그렇지만, 당시 사회가 빈부의 격차가 심해지고 고리대에 의한 사회 문제가 많이 발생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공화정 로마의 원로원은 기원전 4세기 중엽에 귀족계급의 아성에서 벗어났다. 원로원 의원에게는 혈통이나 출신 가문도 성장기의 교육도 문제삼지 않게 되었다. 경험과 능력만이 문제가 될 뿐이었다. 그 이후의 로마는 귀족정치가 아니라 문자 그대로의 과두정치 체제가 된다.


기원전 367년  ‘리키니우스법’ 성립.
기원전 366년  최초의 평민 출신 집정관 선출.
기원전 356년  최초의 평민 출신 독재관 탄생.
기원전 351년  최초의 평민 출신 재무관 선출.
기원전 332년  최초의 평민 출신 법무관 선출.
기원전 322년  빚을 갚지 못했을 때 채무자의 자유를 박탈하는 것을 금지.


로마 시내 콜로세움 쪽에서 그 ‘포로 로마노’에 들어가 옛날의 성도(聖道)인 ‘비아 사크라’를 걸어가면, 지금은 기둥 하나 남아 있지 않지만, 콩코르디아 신전(Aedes Concordiae)에 이른다.  ‘포로 로마노’라는 로마의 요지 중에서도 요지에 세워진 신전이다. 이 신전은 ‘리키니우스법’의 성립을 기념하여 건립되었다.


콩코르디아 신전이라는 이름 자체가 일치, 조화, 융화, 협조의 신전이라는 뜻이다. ‘리키니우스법’으로 귀족계급과 평민계급의 대립을 해소하고, 앞으로는 두 계급이 일치단결하고 조화를 이루고 융합하고 협조하여 로마 국가를 위해 온 힘을 다할 것을 이 신전 건립으로 맹세한 것이다.

[포로 로마노 당대 상상도(오른쪽 건물이 콩코르디아 신전)와 현재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로마의 정치체제


로마의 공화정은 왕정 시대의 정치제도를 떠받치는 세 기둥이었던 왕과 원로원 및 민회 가운데 왕만 두 명의 집정관으로 바꾼 상태로 출범했다. 그밖의 관직은 필요할 때마다 그때그때 창설하는 방식을 로마인은 좋아했기 때문이다.


로마의 공화정 체제가 기능을 완전히 발휘하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390년 켈트족의 침략을 경험한 뒤라고 생각하는 편이 옳고, 그 이후 정비된 로마 공화정의 모든 관직을 설명하는 편이 실정에 맞지 않을까 여겨진다.



집정관(콘술)


왕정 시대의 왕을 대신하는 공화정 로마의 최고위 관직으로, 민회에서 선출되어 원로원의 승인을 얻어서 취임하는 것까지는 왕과 마찬가지이나, 종신제였던 왕에 비해 임기가 1년밖에 안되지만, 재선은 허용되었다. 연령 제한은 40세 이상으로 되어 있었다.


정원이 두 명인 집정관에게는 동료 집정관의 생각이나 방식에 동의할 수 없는 경우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이 부여되어 있었다. 집정관이 둘 다 동의하지 않는 한 정책은 실시되지 않는다.


집정관의 주된 임무는 민회를 소집하는 것과 전쟁터에서 지휘를 맡는 것이었다.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겸 합참의장 같은 관직이다. 실전 지휘를 맡는 것이 보통이었으니까 여기에 야전 사령관의 직무도 추가해야 할 것이다.


[로마 문양과 집정관의 상징 파스케스(Fasces)]

로마의 군사력은 보통은 양분되어 두 명의 집정관이 하나씩 통솔하도록 되어 있었다. 적의 전력이 강하지 않으면 집정관 한 명이 전쟁터에 나가고, 나머지 한 명은 수도 방위와 내정을 담당한다. 적이 강대하면, 집정관이 둘 다 각자의 군단을 이끌고 출전하고, 수도 방위는 법무관의 지휘를 받는 예비역 병사들이 맡았다.


로마는 필요한 경우에는 전직 집정관이라는 의미로 '프로콘술'이라고 이름붙인 관직을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따라 집정관에서 전직 집정관으로 수평 이동한 자가 전쟁을 계속 수행할 수 있게 된 동시에, 삼면의 적과 싸워야 할 경우에도 지휘관 자리가 비는 폐해를 막을 수 있게 되었다.


독재관(딕타토르)


딕타토르는 공화정 로마에서는 국가 비상사태에 임명되는 관직으로, 임시 독재 집정관을 의미했다. 다른 관직이 선거로 선출되는 반면, 독재관만은 두 명의 집정관 가운데 한 사람이 지명하기만 하면 성립되었다.


독재관은 정치체제를 바꾸는 것 외에는 모든 문제에 결정권을 가졌고, 독재관이 결정한 일에는 아무도 반대할 수 없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임기는 불과 6개월이다.


정원은 물론 한 명이다. 여유가 없을 경우에 독재관을 지명하여 그에게 즉결권을 부여하는 것이므로, 독재관은 능력이 뛰어나고 경험이 풍부한 집정관급 인물이 지명되는게 보통이었다. 독재관에 지명된 사람은 부관에 해당하는 '기병장관'을 독단적으로 임명할 권리가 있었다.


법무관(프라이토르) 


임기는 1년이다. 초기에는 정원이 한 명이었지만, 마지막에는 16명에 이르렀다. 이것은 로마의 영토가 확장됨에 따라 관리도 증원되었기 때문이다. 프라이토르는 물론 사법 관계를 담당했다. 처음에는 전쟁터에 나간 집정관의 업무를 대행했지만 조금씩 사법 책임자로 바뀌어갔다.


회계감사관(콰이스토르)


정원은 처음에는 두 명이었지만, 공화정 말기 40명으로 증원되었다. 임기는 1년이고, 연령 제한은 30세 이상이다. 전쟁터에서의 재무도 담당하였다. 대(大)카토는 한니발의 공격을 눈앞에 둔 로마군 진영에 가서 군비를 지나치게 낭비하고 있다고 불평했는데, 그의 당시 관직이 바로 이 콰이스토르였다.


재무관(켄소르)


원래는 인구조사를 맡기기 위해 창설된 관직이다. 그래서 공화정 초기에는 매년 켄소르를 선출하지 않고, 인구조사가 실시되는 5년 마다 한 번씩 선출했다. 또한 임기도 1년이 보통인 로마 관직 중에서는 예외적으로 1년 반 이상으로 정해져 있었다. 정원은 두 명이고, 연령 제한은 알려져 있지 않다.


로마의 인구조사는 호주들의 재정상태에 관한 조사였고, 이를 정직하게 신고하지 않은 자를 귀족이든 평민이든 상관없이 고발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국유지 운용과 국고 출납을 감독하고, 도로나 상하수도 건설을 위한 지출을 결정하는 등 국가 재정 전반을 책임지는 자리였다고 해도 좋다.


안찰관(아이딜리스)


안찰관이라는 직책만은 설립 당시부터 귀족 두명과 평민 두명으로 출신 계 급을 명확히 정해놓고 선출했다. 시민과 직접, 게다가 자주 접촉하는 관직이기 때문일 것이다. 임기는 1년이고, 연령 제한은 30세 이상이다. 안찰관도 회계감사관과 마찬가지로 젊은 세대에게 열려 있는 관직이었다.


임무는 우선 축제행사의 연출, 경기대회 개최 등이고, 두 번째는 치안을 유지하는 경찰 업무다. 식량 공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는 것도 그들의 임무였다. 또한 도로의 보수와 교통정리, 상하수도 관리도 맡아야 했다. 게다가 각종 위법행위에 부과되는 벌금을 결정하는 일도 담당했다.


호민관(트리부누스 플레비스)


호민관이라는 멋진 번역이 보여주듯이, 이것은 평민계급의 대표라고 말할 수있는 직책이다. 따라서 평민계급 출신이 아니면 호민관이 될 자격이 없다. 선출도 귀족과 평민이 모두 참석할 권리를 가진 민회가 아니라, 평민만이 침석권을 가진 평민집회에서 이루어졌다.


임기는 1년이고, 연령은 제한이 없었던 모양이다. 호민관은 정부가 결정한 일에 대해서도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받고 있었다. 하지만 이 대권도 전시에는 사용할 수 없었다.


호민관은 집정관조차도 갖지 못했던 신체 불가침이라는 특별한 권리까지 부여받고 있었다. 호민관을 지낸 사람에게는 자동적으로 원로원 의석이 제공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호민관의 정원은 처음에는 두 명이었지만, 차츰 증원되어 최종적으로는 10명이 되었다


원로원(세나투스)


로마를 찾는 사람은 오늘날에도 시내 곳곳에서 'SPQR'라는 네 글자를 발견할 것이다. "여기에 쓰레기를 버리면 안 됩니다"라는 시시한 내용의 로마시 공고문도 이 네 글자로 시작되고, 맨홀 뚜껑에도 이 네 글자가 새겨져 있다. ‘SPQR'는 ’세나투스 포풀루스 쿠에 로마누스(Senatus Populusque Romanus)‘, 즉 '원로원 및 로마 시민'을 뜻하는 네 낱말의 머리글자를 모은 기호다.

[출처 구글 이미지]

로마시 의회는 자신을 옛날 로마 원로원의 후 예로 생각하고 싶은지,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지 1,50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이 네 글자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SPQR'이 곧 로마를 의미했던 고대에, 로마의 핵인 로마 시민과 동격으로 표시된 유일한 기관인 원로원의 중요성은 오늘날의 로마시 의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세나투스는 고대 로마가 사라진 뒤에도 베네치아 공화국의 '세나토'로 계승되었고, 의회 민주주의 체제를 택하는 것이 일반적인 오늘날에도 미국과 캐나다, 프랑스, 이탈리아 등 양원제를 택하고 있는 나라의 ‘상원’은 라틴어 세나투스에서 파생된 명칭으로 불리고 있다.


고대 로마의 원로원은 양원제 의회 민주주의 체제를 택한 나라의 상원이 아니라 단원제 국가의 하나뿐인 의회이며, 현역에서 은퇴한 장로들의 집회가 아니라 팔팔한 현역들이 모인 기관이었다. 어쨌든 30세부터 원로원에 의석을 가질 수 있었다. 이 공화정 로마의 원로원(세나투스)을 명실공히 가장 충실하게 계승한 것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대의 도시국가인 베네치아 공화국의 원로원(세나토)이었을 것이다.

로마연합


로마인은 패배하면 반드시 거기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그것을 토대로 하여 기존 개념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방식으로 자신을 개량하여 다시 일어서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로마인은 외치 면에서도 켈트족에 대한 패배에서 배운 교훈을 현실화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외치 면에서의 개혁은 타국과의 관계를 재평가하는 것이었다. 영국에서 2,300년 뒤에 태어난 역사가 토인비는 이것을 ‘정치 건축의 걸작’이라고 불렀다.


로마는 왕정 시대부터 이미 이웃 부족들과 동맹관계를 맺고 있었다. 부족은 다르지만 라틴어라는 공통된 언어를 사용하고, 종교도 같고 풍속도 비슷한 부족들의 집합체였기 때문에, 총칭하여 라틴 민족이라 부르고 그 부족들 사이의 동맹도 ‘라틴 동맹’이라고 불렀다.


초기의 ‘라틴 동맹’은 동맹이라 해도 신들을 함께 제사지내는 것이 주된 목적이어서, 1년에 한 번씩 알바노산에 모여 유피테르 신전에서 함께 제사를 지내고 그리스의 올림피아 경기를 본뜬 체육대회를 즐기는 것이 거의 유일한 공동 행사였다.


로마는 공화정 체제가 일단 확립된 기원전 494년에 ‘라틴 동맹’을 재건하는 데 착수했다. 이번에는 동맹의 주요 목적이 종교 행사가 아니라 군사 행동으로 바뀌었다. 로마군과 다른 동맹국들의 군대가 반반씩 참여하여 동맹군을 구성하기로 결정되었다. 동맹군의 총 지휘는 로마군이 맡기로 결정 되었다.


로마는 기원전 338년에 껍데기만 남은 ‘라틴 동맹’을 해체하고 새로운 동맹 결성을 제창하였다. 이 시기에 이르러서야 겨우 새로운 동맹 결성을 제창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무렵에야 겨우 로마가 원래의 힘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힘이 없는 자가 이런 말을 꺼내면, 아무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출처 본문]

재평가된 동맹관계는 더 이상 ‘라틴 동맹’이라고는 부를 수 없었다. 차라리 ‘로마 연합’이라고 부르는 편이 타당한 연합체였다. ‘로마 연합’에서는 구성 요소가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첫째, 연합의 기둥인 로마다. 그 주민은 귀족, 평민 불문하고 모두 자유민이며 로마 시민권을 가졌고, 직접세의 납세 형식이기도 한 병역 의무를 짊어지고 있었다. 이들은 당연히 로마 시민권을 가진 자의 권리였던 투표권을 갖고, 로마의 공직에 출마할 수 있는 피선거권도 가지고 있었다.


두 번째는 ‘라틴 동맹’의 가맹국이었던 나라들로서, 기원전 390년에는 로마를 배신했지만, 재기한 로마에 패배한 나라들이다. 원래 언어도 종교도 풍속도 같은 이런 나라의 주민들에게도 로마는 과감하게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주었다. 승자인 로마인과 완전히 대등한 입장에 선 합병이었다. 실제로 이 사람들 가운데 로마의 집정관이 된 사람도 있었다.


세 번째 부류에 속하는 것은 라틴어로 ‘무니키피아’라고 불린 나라들이다. 이 라틴어에서 파생한 이탈리아어인 무니치피오를 사전에서는 지방자치단체나 시, 읍, 면으로 풀이하고 있다. 이런 나라에는 투표권이 없는 시민권을 주었다. 하지만 이들은 3년만 지나면 로마 시민권을 얻는 것이 보통이었다.


네 번째 부류는 우리가 식민지라고 번역하는 ‘콜로니아’다. 그러나 근대의 영국이나 프랑스나 네덜란드나 에스파냐의 식민지와는 다르다. 로마인은 경제적인 이유가 아니라 정치적 이유로 식민지를 건설했기 때문이다.


전략적 요충으로 여겨진 지역에 로마 시민들이 정착한다. 이들은 완전한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로마군에 복무할 의무를 가진다. 다만, 식민지의 로마인은 자기들이 사는 지역을 지키기 위해 군무에 종사한다. 이런 방식으로 로마는 전략적 요지마다 상설 요새 겸 신도시를 건설해갔다.

[2세기 중엽 로마 연합 상황 출처 본문]

다섯 번째 부류는 역사학에서 통틀어 ‘동맹국’이라고 부르는 나라들이다. 그러나 동맹국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후세의 일이고, 로마인은 ‘소키’라고 불렀다. 이런 부류의 ‘소키’는 완전한 국내 자치를 인정받고 있었다.


또한 언어도 종교도 풍속도 종래의 것이 그대로 허용되었다. 특히 주민이 사용하는 언어가 그리스어인 경우에는 라틴어를 새로 배우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로마의 길


‘아피아 가도’[비아 아피아(via Appia)]가 개통된 이후의 로마 가도는 단순한 행정 도로가 아니라, 정략적인 필요에서 만들어지게 된다. 정치와 군사 및 행정의 필요에 따라 길을 만든 것이다.


기원전 312년에 건설된 아피아 가도는 로마에서 카실리눔(오늘날의 카푸아)까지 뻗어 있었다. 로마의 세력권이 확장됨에 따라 차츰 연장되어, 결국 남부 이탈리아 남쪽 끝에 있는 브룬디시움(오늘날의 브린디시)에 이르는 로마의 간선도로가 되었다.

[로마 가도 출처 본문]

아피아 가도를 건설한 사람은 로마의 명문 귀족 클라우디우스 가문의 감찰관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인데, 그는 로마적 의미를 가진 가도를 처음 만들게 했을 뿐만 아니라, 본격적인 상하수도 공사를 시작한 사람이기도 했다.

[아피우스와 아피아 가도 출처 구글 이미지]

도로는 숙명적으로 양날의 칼이 될 수밖에 없다. 아군의 연락이나 이동이 편리해졌다는 것은 적군의 정보 수집이나 이동도 편리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고대 로마인의 외향성의 표본이라고 할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로마인은 숙명적으로 전쟁을 영원히 계속할 수밖에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시민권


로마 시민권[‘키비타스(civitas)']을 확실히 파악하지 않으면, 그것을 주느냐 주지 않느냐에 차별을 둔 고대 로마인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 시민권의 유무에서 생겨나는 구체적인 권리와 의무를 열거하는 것도 한 가지 방법인 듯싶다.


권리

1. 동산과 부동산을 불문하고 모든 사유재산의 보장. 그리고 그런 사유재산을 매매할 수 있는 자유.
2.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가짐으로써 국정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
3. 법에 따른 재판을 받을 권리와 함께, 법에 따라 사형을 선고받아도 로마에서는 민회에 항소할 수 있는 권리, 즉 항소권을 가졌다. 이 때문에 사실상 로마 시민권 소유자가 사형당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4.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신분을 가진 어엿한 어른이라는 증거.

의무

16세부터 40세까지는 현역으로, 그 이후에도 60세까지는 예비역으로 군무에 종사할 의무가 있었다. 돈을 내고 병역을 면제받는 것은 법률로 허용되지 않았다기보다 불명예스러운 일로 여겨졌다.

병역을 경제적으로 대체하는 행위는 시민권이 없어서 병역 의무가 없는 비시민이거나 로마인 중에서도 유복하고 자식이 없는 여자한테만 부과된 일종의 세금이었다. 동맹국이나 속주에서도 연공(年貢)이라는 형태로 직접세를 내기보다는 병력 제공에 응하는 편이 명예로운 협력 방법으로 여겨졌다.


로마인은 자국의 시민권을 타국인에게 주는 데 대단히 너그러운 민족이었다. 그것은 로마 군단이 로마 시민권 소유자로만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한 로마에서는 얼마 동안 로마에 거주하기만 하면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는 제도가 훨씬 이후까지 실시되었다.


로마에서는 오랫동안 헌신적으로 봉사한 노예에게 주인이 보답하는 의미로 자유를 주거나, 노예 자신이 저축한 돈으로 자유를 살 수 있었다. 이렇게 하여 자유를 회복한 노예를 ‘해방노예’라고 부르고, 그들의 자식대에는 로마 시민권을 취득할 수 있었다.


시민권에 대한 로마인의 개방적인 사고방식은 이중 시민권, 다시 말해서 이중 국적까지 인정한 점에도 나타나 있다. 이 시기에는 ‘로마 연합’의 동맹국 사람이 마음만 먹으면 로마 시민권도 얻을 수 있었다. 게다가 자기가 속해 있는 지방의 시민권을 포기할 필요도 없었다.


산악 민족 삼니움족


삼니움이라고 불린 민족은 이탈리아 중부에서 남부에 걸친 산악지대에 거주하는 민족으로, 수도가 확실한 통일국가도 아니고 독자적인 문명을 가진 민족도 아니었다. 나폴리와 같은 위도에 자리를 잡았지만, 나폴리에는 햇빛이 쏟아지고 있는데 그들이 사는 산지는 눈에 덮여 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로마가 카푸아와 나폴리를 중심으로 하는 캄파냐 지방을 세력권에 편입한 무렵부터 그들과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이런 상대쯤은 간단히 쳐부술 수 있었을 터인데, 로마인은 뜻밖에 애를 먹었다. 그것은 삼니움족의 게릴라 전술의 전투 방식이 평원에 익숙한 로마인이 익숙한 전술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아군의 장점을 아는 로마군은 적을 평지로 끌어내려고 애썼지만, 유인 작전은 번번이 실패로 끝났다. 결국에는 로마군이 산악지대로 들어가지 않을 수 없었다. 삼니움족과 대결 상태에 들어간 지 5년째인 기원전 321년, 로마군은 ‘카우디움 협곡’에서 삼니움족의 매복 작전에 크게 패퇴하고 굴욕을 당하며 화평 조약을 체결한다.


로마인에게는 기원전 321년에 삼니움족에게 당한 이 ‘카우디움의 굴욕’도 절대로 되풀이되어서는 안 될 치욕이 되었다. 기원전 316년, 로마는 삼니움족과 다시 싸울 준비가 갖추어졌다. 싸움을 시작할 구실은 삼니움족이 제공해주었다.  ‘로마 연합’에 가입해 있던 카푸아가 삼니움족 쪽으로 돌아선 것이다.


카푸아는 나폴리에서 조금 북쪽에 위치한 도시로, 고대에는 나폴리보다 훨씬 중요하게 여겨진 도시였다. 남부 이탈리아를 제압하느냐의 여부는 바로 카푸아를 제압하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카푸아가 카우디움 협곡에서 패배한 로마에 실망해 ‘로마 연합’을 떠났으니 로마가 이를 좌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로마는 카푸아를 먼저 쳐들어가 유력자들을 모두 사형에 처한 뒤, 점점 산지로 쫓겨들어가게 된 삼니움족과 기원전 304년에 무력을 기반으로 강화조약을 맺었다. 하지만 이 평화도 6년 만에 끝났다. 로마 북쪽의 켈트족, 에트루리아인, 동쪽의 움브리아인이 같이 쳐들어 온 데다가 삼니움족도 여기에 가세한 것이다.



기원전 297년, 로마 원로원은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16세부터 40세까지의 시민만이 아니라 평소에는 병역을 면제받는 60세까지의 예비군도 소집되었다. 그해의 집정관으로는 퀸투스 파비우스와 젊은 보르미니우스가 선출되었다. 파비우스가 집정관에 취임한 것은 이번이 다섯 번째였다.


그러나 파비우스가 자신의 나이가 많아 너무 젊은 보르미니우스와 같이 일하기 어렵다고 민회에 이의를 제기하자 민회는 보르미니우스 대신 데키우스가 다시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대신 보르미니우스는 전직 집정관(프로콘술)이 되어 전투에는 참여하였다.


그러는 동안에도 켈트족과 에트루리아인, 움브리아인, 삼니움족 등 네 민족의 군대는 아펜니노산맥 동쪽에 있는 센티노 땅에 집결하고 있었다. 그들을 뒤쫓는 로마군 본대도 적진으로부터 5킬로미터가량 떨어진 곳에 진을 쳤다.


에트루리아인들이 자국의 사정으로 빠진 상황에서 싸움은 시작되었다. 적은 양쪽으로 나뉘어 쳐들어왔다. 오른쪽은 켈트족, 왼쪽은 삼니움족. 1만 명의 로마군도 둘로 나뉘었다.


제1군단과 제3군단을 이끄는 파비우스가 삼니움족과 맞서고, 제5군단과 제6군단을 지휘하는 데키우스는 켈트족과 대결했다. 보르미니우스가 이끄는 제2군단과 제4군단은 삼니움족의 대동단결을 저지하기 위해 남쪽에 파견되어 있었다.


이날의 전투에서 적은 2만 8천 명의 병사를 잃었다. 포로는 8천 명에 이르렀다. 데키우스 군단은 켈트족의 막강한 기병과 싸웠고 전사자는 7천 명을 헤아렸고, 파비우스 군단도 1천 700명의 병사를 잃었다. 데키우스 역시 전사하였다.


쉴 틈도 없이 진격하는 로마군에게 쫓겨 켈트족은 북쪽으로 밀려났고, 움브리아인과 에트루리아인도 ‘로마 연합’에 가맹할 것을 약속했다. 기원전 290년, 삼니움족도 마침내 로마군의 군문으로 내려왔다. 이번에는 삼니움족이 먼저 강화를 제의해온 것이다. 삼니움족이 사는 지방은 ‘로마 연합’의 한 동맹국(소키)이 되었다.


로마에서 카푸아까지 건설된 아피아 가도는 기원전 285년에 베누시아(오늘날의 베노사)라고 이름지은 이 식민지까지 연장되었다. 로마는 기원전 290년의 전투를 끝으로 이탈리아 중남부의 제패를 완성한 셈이다. 그리하여 이탈리아 남해안에서 번영을 누리고 있던 그리스인의 도시와 처음으로 직접 접하게 되었다.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와 로마의 대결


기원전 283년, 장화처럼 생긴 이탈리아반도에서도 뒤꿈치 부분에 자리 잡고 있는 타렌툼(오늘날의 타란토) 앞바다에 10척의 로마 선박이 홀연히 나타났다.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 식민도시 가운데 우두머리격인 타렌툼과 로마 사이에는 로마가 삼니움족과의 전쟁에 전념하고 있을 무렵부터 이미 서로의 세력권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협약이 맺어져 있었다.


타렌툼 사람들은 이 사고를 협약 위반으로 받아들이고, 항구에 들어온 이유조차 묻지 않고 당장 실력행사에 나섰다. 로마는 자국 선박들이 항구에 들어간 것이 침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타렌툼이 이 요구를 무시하자 로마는 전쟁을 결의했다.


오늘날에도 이탈리아 해군의 주요 군항으로 쓰이고 있을 만큼 타렌툼은 천연의 좋은 항구다. 타렌툼은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할 즈음에 스파르타에서 건너온 이주민이 건설한 도시국가였다. 로마는 남쪽에서 번영을 누리고 있는 그리스인과는 500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직접 접촉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타렌툼이 용병으로 점찍은 것은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이름이 높았던 북부 그리스의 왕국 에페이로스의 왕 피로스였다. 타렌툼은 피로스 왕에게 이탈리아에 와서 로마를 공격해준다면 35만 명의 보병과 2만 명의 기병을 준비하겠다고 약속했다.

[피로스와 에페이로스의 팔랑크스 출처 구글 이미지]

당시 그리스인 가운데 알렉산드로스의 뒤를 이을 재목으로 주목받고 있었던 자가 바로 피로스였다. 그는 로마군을 격퇴하여 이탈리아를 손에 넣은 다음 37만명의 병사를 가지고 시칠리아, 카르타고까지 정복할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병법의 천재 피로스


하지만 피로스를 맞은 타렌툼 거리는 임전태세 따위는 약에 쓰려 해도 찾아볼 수 없는 상태였다. 야외극장이나 체육관은 시민들로 가득 찼고, 약속한 37만 명의 병력은 그림자도 없었다. 일단 피로스는 그리스에서 데려온 휘하 병력만 이끌고 싸우기로 결심했다. 통틀어 2만 6,500명의 병사와 코끼리 18마리가 전부였다.


로마와 피로스의 첫 전투가 타렌툼에서 그리 멀지 않은 헤라클레아에서 벌어졌는데, 양군의 전력은 거의 대등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집정관 레비누스가 이끄는 로마 연합군은 로마군 병사 8천 명에 동맹국 병사 1만 6천 명을 합해서 모두 2만 4천 명이다.


네모꼴로 똑같이 '밀집 방진'을 취하고 싸우는 중무장 보병군단이라도, 그리스의 보병군단은 ‘팔랑크스(Phalanx)’라고 부르고, 로마의 보병군단은 ‘레기온(Legion)’이라고 불렀다. 피로스와 로마군의 싸움은 군사 면에서도 기존세력인 팔랑크스와 신흥세력인 레기온이 처음으로 격돌한 전투였다.

[초기 팔랑크스와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 팔랑크스 출처 구글 이미지]
[로마의 레기온과 테스투도 전술 출처 구글 이미지]

전황은 피로스의 생각대로 진행되었다. 그리스군 보병이 로마군 보병과 맞서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싸우는 동안, 코끼리떼는 로마군 기병대를 여지없이 격파했고, 그 틈에 피로스가 이끄는 그리스 기병대가 로마군의 배후로 돌아가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피로스의 코끼리떼 공격 출처 구글 이미지]

서전의 승리와 이 전력 보충에 고무된 피로스는 지체없이 북상하여 수도 로마를 공격하기로 결심했다. 로마로 진군하는 동안, ‘로마 연합’에 가담하고 있는 부족들이 로마에 등을 돌리리라는 것도 계산에 넣은 행동이었다.


그러나 피로스의 예상과는 달리, ‘로마 연합’의 가맹국들은 로마에 반기를 들지 않았다. 나폴리도, 카푸아도, 그리고 그토록 끈질기게 로마와 싸우다가 마침내 굴복한 삼니움족까지도 피로스의 유혹을 거절했다.


바로 이것이 로마에서 불과 60킬로미터 떨어진 지점까지 쳐들어간 피로스의 기세를 꺾어버렸고, 파로스는 타렌툼으로 회군해 버렸다. 그리고 그는 로마에 강화를 제안했다. 측근인 키에나스를 로마에 파견하여 강화 조건을 제시하면서 자기가 중재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첫째, 로마는 앞으로 이탈리아 남부의 그리스계 도시를 존중하고 불가침을 선언할 것.
둘째, 그리스계 도시들과 로마 사이에 쌍방의 세력이 미치지 않는 중립지대를 두기 위해 그 지역에 사는 삼니움족과 루카니아족을 ‘로마 연합’에서 해방하여 다시 독립시킬 것.


원로원 의원의 대다수는 강화를 맺는 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노령 때문에 은퇴해 있던 아피우스 클라우디우스 카이쿠스가 이것을 알고 격분하며 원로원 의원들을 꾸짖은 다음 "모든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짓는 존재다."라고 말했다. 그는 당시 노령으로 시력을 잃어 ‘재무관 아피우스’나 ‘장님 아피우스’라고 불리었다.


결국 피로스와 맞붙을 땅으로 아우디우스라는 곳이 선정되었다. 루체리아와 베누시아라는 양대 식민지 중간에 있고, 로마 세력권의 최전선에 해당하는 곳이다. 산지 바로 밑에 자리 잡고 있어서, 피로스의 기병대와 코끼리 부대에 종횡무진의 활약을 허용해서는 안 되는 로마군으로서는 절묘한 선택을 한 셈이었다.


양군의 전력은 이번에도 막상막하였다. 두 명의 집정관이 이끄는 로마군의 병력은 통틀어 4만, 피로스의 군대도 지원병이 가담했기 때문에 역시 통틀어 4만 명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에도 로마군은 피로스의 유인 작전에 말려 평탄한 지역으로 나오게 되었다.


일단 유리한 지형으로 전쟁터가 옮겨지면, 피로스의 평소 전술이 효력을 발휘한다. 전황은 서전 때와 똑같이 전개되었다. 로마군은 집정관 한 명이 전사했을 만큼 큰 손실을 입었고, 전사자는 6천 명에 이르렀다.


패주하는 적도 뒤쫓지 않고 타렌툼으로 돌아온 피로스에게 시칠리아섬의 시라쿠사에서 사절이 찾아왔다. 카르타고의 공격으로부터 시칠리아의 그리스인을 지켜달라는 요청이었다. 로마인과의 싸움에 염증이 나 있던 피로스는 자세히 물어보지도 않고 이 요청을 수락했다.


피로스는 시칠리아를 포기하고 타렌툼으로 돌아왔다. 3년을 허송세월한 뒤에 타렌툼으로 돌아왔을 때, 그에게 남은 것은 이제 절반으로 줄어버린 휘하 병력뿐이었다. 타렌툼 역시 전보다 더 피로스를 백안시했고, 그 사이 로마는 ‘로마연합’을 좀 더 단단히 굳히는데 활용했다.


기원전 275년 여름, 피로스는 로마와의 전투에 운을 걸어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말벤툼’(‘나쁜 바람’이라는 의미로 로마는 나중에 ‘좋은 바람’이라는 뜻의 ‘베네벤툼’으로 바꾸었다) 전투에서는 전황이 불리해지자 그해 초가을, 피로스는 자신의 왕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그로부터 3년 뒤 스파르타와의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당시 지중해 세계에서 가장 이름높은 장수였던 피로스를 귀국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아넣은 이 사건으로 로마는 일약 국제적인 존재로 떠올랐다. 그로부터 2년 뒤에는 이집트에서 특사가 도착했다. 지중해 세계에서 카르타고와 어깨를 겨루는 강대국으로 인정받고 있던 이집트가 로마에 사절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기원전 273년, 타렌툼에 대한 공격이 개시되었다. 남에게 의지할 가망도 사라진 타렌툼은 간단히 함락되었다. 아피아 가도는 곧 타렌툼까지 연장되었다. 몇 년 뒤에는 타렌툼에서 브린디시움(오늘날의 브린디시)까지 연장되어, 가도의 여왕이라고 불리는 아피아 가도가 완성되었다.

[출처 구글 이미지]

기원전 267년에 로마는 처음으로 독자적인 화폐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는 필요에 쫓길 때마다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 도시들이 사용하는 화폐로 해결했다. 자국 화폐를 갖는다는 것은 로마가 대외관계를 갖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1 데나리우스 = 1/25 아우레우스(Aureus)
1 데나리우스 = 1/12.5 퀴나리우스(Quinarius)
1 데나리우스 = 4 세스테르티우스(Sestertius)
1 데나리우스 = 8 두폰디우스(Dupondius)
1 데나리우스 = 16 아스(As)
1 데나리우스 = 64 콰드란스(Quadrans)


기원전 270년 무렵인 이 시기에 이르러, 로마는 북쪽으로는 루비콘강에서 남쪽으로는 메시나해협에 이르는 이탈리아반도의 통일을 완성했다. 기원전 753년에 건국된 뒤부터 헤아리면, 무려 500년에 이르는 긴 세월이 걸린 사업이었다.


메시나해협의 본토 쪽에 서면, 시칠리아는 바로 코앞에 있다. 피로스가 시칠리아 저편에서 카르타고를 보았듯이, 로마인도 시칠리아 저편에 있는 카르타고를 바라보게 되는 데에는 그 후 10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1권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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