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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강성 Oct 08. 2024

로마인 이야기 1권 (1)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 로마의 탄생과 왕정, 그리스

제1권은 로마가 탄생하여 7명의 왕정의 시기를 거친 후 공화정의 정치 체계를 확립하고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공화정의 로마가 성문법을 만들기 위해 시찰단을 파견한 아테네와 스파르타 그리고 페르시아 전쟁에 관한 이야기도 들어가 있다.

 

제1장 로마의 탄생

유민의 전설


세계문학사상 최고 걸작의 하나로 손꼽히는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에 따르면, 기원전 1,200년경 트로이가 아가멤논이 이끄는 그리스군의 공격으로 멸망하기 직전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사위인 아이네아스(Aenēās)는 어머니인 아프로디테 여신의 도움으로 트로이를 탈출한다.


이후의 이야기는 로마의 시성 베르길리우스의 12권짜리 장편시 『아이네이스(라틴어: Aeneis)』리비우스의 건국사에 그려져 있는데, 아이네아스는 카르타고를 거쳐 이탈리아 서부 해안을 올라오다가 로마 근처 해안에 최종 정착한다. 그 땅의 왕이 반해 딸을 아이네아스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일리아스와 아이네이스, 아이네아스의 이동 경로 출처 본문]

이후 아이네아스의 아들 아스카니오스가 왕위를 물려받고 30년 동안 나라를 다스린 뒤 그 땅을 떠나 로마에서 25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알바노 호수 옆(현재는 바티칸 교황의 휴양지인 '카스텔칸돌포')에 '알바롱가(Alba longa)'라고 새로 이름지은 도시를 건설하였는데 이것이 훗날 로마의 모체가 된 도시이다.

[알바롱가 위치와 현재 모습 출처 구글 지도와 이미지]

로마 건국 신화에 따르면, 그 이후 몇 백년이 흐른 후 기원전 753년에 그 자손인 로물루스*가 로마의 팔라티움 언덕에서 자신의 이름을 따 로마를 건국하게 된다. 이 시기에는 그리스에서는 4년마다 열리는 올림피아 경기도 어느덧 6회를 지나, 신화와 전설의 세계를 벗어난 역사시대에 들어서 있었다.


로마 건국신화에 따르면 어머니의 이름은 레아 실비아. 그녀의 본래 신분은 알바롱가의 왕 '누미토르'의 외동딸로 알바롱가의 공주였다. 하지만 누미토르의 동생 '아물리우스'가 일으킨 반란에 의해 누미토르가 폐위당하면서 그녀는 베스타(헤스티아) 신전의 사제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르스 신이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해 그녀와 사랑을 나누었고, 레아는 임신해 로물루스와 레무스 쌍둥이를 낳는다.

이에 자신의 권력을 뺏어갈까 봐 두려워한 아물리우스 왕은 레아의 자식인 쌍둥이 형제를 바구니에 담아 티베리스 강에 버린다. 바구니는 강을 따라 흘러가다 팔라티움 언덕 근처의 무화과나무 옆에 도달했고, 지나가던 암컷 늑대에게 건져져 키워진다.

그 후 양치기 파우스툴루스가 둘을 발견해 키웠다. 어느 날 레무스가 도둑맞은 양떼에 대한 분쟁에 휘말려 외할아버지 누미토르 앞에 서게 된다. 이를 알게 된 파우스툴루스는 그들에게 출생의 비밀을 알려주었고, 그들이 타고 온 아기 바구니를 누미토르에게 보여주어 레아 실비아의 아들임을 증명한다.

이후 세력을 키운 두 쌍둥이는 아물리우스 왕에게 반감을 품은 사람들을 동원하고 알바롱가 성 안의 사람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아물리우스는 결국 굴복하였고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들은 알바롱가의 왕위를 외조부 누미토르에게 돌려주고 파우스툴루스에게 발견되었던 자리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기로 한다.

하지만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도시를 세울 자리를 두고 언쟁을 벌이다가 결국 전쟁을 벌였는데 이 전쟁에서 레무스가 죽고 만다. 레무스가 죽은 후 로물루스는 팔라티움 언덕에 도시를 세우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로마라고 이름 지었다. [출처: 나무위키]
[로물루스와 레무스 출처 구글 이미지]

기원전 8세기의 이탈리아


기원전 8세기 중엽의 이탈리아반도에는 입지조건만 좋으면 당당한 도시도 쉽게 건설할 수 있을 만한 경제력과 기술력을 갖춘 민족이 적어도 두 개는 존재했다. 중부 이탈리아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에트루리아인과 남부 이탈리아 일대에 정착하기 시작한 그리스인이 그렇다.


에트루리아인


에트루리아인의 문자는 현재까지도 아직 완전히 해독되지 않았다. 그래서 오랫동안 그들을 수수께끼의 민족이라고 불렀다. 어쨌든 그들은 기원전 9세기에는 이미 철기 제조법을 알고 있었다. 중부 이탈리아에는 광산이 많이 분포되어 있었다. 이 지방에 정착한 에트루리아인은 이 천연의 혜택을 활용한다.


기원전 8세기, 그들의 세력권은 북쪽의 피렌체를 흐르는 아르노강과 남쪽의 로마를 흐르는 테베레강 사이의 전역에 걸쳐 있었다. 이 도시들의 대부분이 외부와의 교류에는 불편하지만 방어에 유리하게 높은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고대의 에트루리아는 12개 도시국가의 연방제 형태를 취하고 있었다. 12개 도시국가 가운데 알려져 있는 것은 아레초, 볼테라, 키우시, 비테르보, 오르비에토, 타르퀴니아, 체르베테리, 베이, 페루자 등 9개다. 이들 가운데 7개 도시가 지금도 건재하다.

[에트루리아인과 그들의 영토와 도시들 출처 구글 이미지]

에트루리아인은 티레니아해의 제해권을 둘러싸고 카르타고 및 그리스와 격전을 벌인 일도 있다. 산 사람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풍습도 있었다. 그들은 기술력을 자랑할 정도로 근면했고, 그런 면에서의 진취적인 기질은 단연 뛰어났다. 이런 에트루리아인이 로마인에게 미친 영향은 많은 점에서 헤아릴 수 없이 크다.


이탈리아의 그리스인


기원전 8세기의 그리스는 귀족이 통치하는 도시국가(폴리스) 시대에 접어들어 있었다. 경작지가 별로 없는 그리스에서 못 가진 사람들은 국외로 나가는 것밖에는 살아갈 길이 없었다. 기원전 8세기는 그리스인의 식민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다. 그들의 특징인 진취적 정신과 모험을 좋아하는 성향이 여기에 박차를 가했다.


이탈리아는 그리스와 가깝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식민도시 건설은 다른 곳과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왕성했다.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남부 이탈리아 도시들의 기원은 몇몇 카르타고계(系) 도시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그리스계가 차지하고 있다.


나폴리, 타란토, 유적으로만 남아 있는 페스툼과 쿠마이, 시칠리아섬의 메시나, 시라쿠사, 아그리젠토 등등. 이런 도시들을 통틀어 ‘대(大)그리스’(마그나 그라이키아)라고 불렀다. 그렇게 부른 이유는 이런 도시들이 이미 높은 문명을 가진 그리스인들이 정착하여 단기간에 풍요로운 번역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그리스 식민활동에 따른 그리스 세력권의 확대 출처 본문]

갓 태어난 로마가 북부의 에트루리아와 남부 이탈리아의 그리스라는 양대 세력의 틈바구니에서 온전할 수 있었던 것은 에트루리아인과 그리스인이 로마의 독립을 존중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시 로마에는 에트루리아인과 그리스인이 자기네 세력권 안에 넣고 싶어할 만한 매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로마의 왕정 시대


[로마 왕정시대의 왕들 출처 구글 이미지]

건국의 왕 로물루스


로마에 있는 일곱 언덕은 모두 테베레강 동쪽 연안에 모여 있다. 테베레강은 로마를 지나 30킬로미터쯤 흘러서, 오스티아를 지나 지중해로 흘러든다.


일곱 언덕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퀴리날리스(이탈리아어로는 퀴리날레), 비미날리스(비미날레), 에스퀼리누스(에스퀼리노), 카피톨리누스(카피톨리노), 팔라티누스(팔라티노), 카일리우스(첼리오), 아벤티누스(아벤티노)로 내려온다. 언덕과 언덕 사이의 평지는 아직 습지였다.


로물루스는 별로 높지는 않지만 언덕 위의 면적이 10헥타르나 되고 테베레강과도 가까운 팔라티누스 언덕을 선택했다. 카피톨리누스 언덕은 신들의 거처로 예정되었다. 그는 우선 팔라티누스 언덕 주위에 성벽을 쌓았다.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의사 표시다. 신들에게 산 제물을 바치는 의식도 엄숙하게 거행되었다. 그날은 기원전 753년 4월 21일이었다고 한다.


[로마의 왕정 당시 지도 출처 본문]

로마를 건국하고 초대 임금이 된 로물루스는 모든 일을 혼자서 처리하는 왕이 되지는 않았다. 국정을 3개의 기관에 나누어준 것이다. 왕과 원로원 및 민회. 이 3개의 기둥이 로마를 떠받치게 되었다.


종교제의와 군사 및 정치의 최고 책임자인 왕은 민회에서 투표로 선출하기로 결정되었다. 민회는 로마 시민 전원으로 구성되었다. 왕을 비롯한 정부관리를 선출하는 것이 민회의 역할이다.


다만, 민회는 정책을 입안할 권리는 갖지 못했고, 왕이 원로원의 조언을 받아 입안한 정책을 승인할 것인가 부인할 것인가를 결정했을 뿐이다. 전쟁을 할 때도 그들의 승인이 필요했고, 외국과 강화를 맺을 때도 그들이 승인해야만 비로소 효력이 발휘되었다.


로물루스는 100명의 장로를 모아서, 그들을 구성원으로 하는 원로원을 창설했다. 원로원 의원은 정부의 관직이 아니다. 왕에게 조언을 하는 것이 그들의 역할이다. 따라서 민회의 선거를 거칠 필요가 없다. 원로원 의원들은 아버지를 의미하는 ‘파테르’라고 불렸다. 건국의 아버지라는 뜻이다. 이 낱말에서 귀족을 뜻하는 ‘파트리키’라는 낱말이 생겨났다.


사비니족과의 통합


정치체제를 확립한 뒤, 로물루스가 수행한 두 번째 사업은 바로 이민족 여인들을 강탈하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인근에 있는 사비니족을 축제에 초대하고 축제 중에 갑자기 사비니족의 여인들을 강탈하였다.


이 일로 인해 로마와 사비니족 간에 네 번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네 번째 전투가 한창일 때, 강탈당한 사비니족 여인들이 싸움판에 끼어들었다. 그러고는 저마다 남편과 오라비가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다고 호소했고 이에 따라 두 부족 간의 화평이 이루어졌다.

[푸생의 ‘사비니족 여인의 강탈’(위)과 자크 루이 다비드의 ‘사비니 여인들의 개입’(아래) 출처 구글 이미지]

이후 로물루스는 사비니족에게 서로 세력권을 존중하여 공존하는 형태의 화평이 아니라 두 부족이 하나로 합치는 형태의 화평을 제안했다. 부족 전체가 로마로 이주하라는 것이었다. 그는 일곱 언덕 가운데 하나인 퀴리날리스 언덕을 사비니족의 주거지로 제공했고, 사비니족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


로물루스가 이룩한 또 하나의 업적은 전쟁을 통한 영토 확장이었다. 100명의 병사로 편성된 백인대(百人隊, 켄투리아) 제도를 고안해낸 것도 바로 로물루스였다. 이것은 로마 군단의 최소단위이자 핵으로서, 로마가 존재하는 한 백인대 제도도 계속 존속하게 된다.


로물루스는 39년을 다스리다가 기원전 715년에 군대를 열병하던 중 갑자기 사라졌다. 로마인은 갑작스러운 불행에 당황해하면서도 왕이 신의 부름을 받고 하늘로 올라갔다가 믿으면서 로물루스를 로마의 국부로 삼고 신으로 모실 것을 결정했다.


제2대 왕 누마(기원전 715~673)


누마는 로물루스의 초빙을 받고 로마로 이주한 동포들과는 달리,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에 남은 사비니족이었다.  그의 높은 덕망과 깊은 교양은 로마에도 널리 알려져 있었다. 후계자 문제로 라틴파와 사비니파의 대립으로 경직 상태에 빠진 로마 원로원은 누마를 만장일치로 왕으로 추대했다.


역사가 리비우스는 『로마사』에서 누마의 업적을 소개할 때,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왕위에 오른 누마는 법과 풍습을 개선하여, 그때까지 폭력과 전쟁으로 기초를 쌓은 로마에 건전함을 주고자 했다.”


누마는 출입문의 수호신이며 전쟁의 신이기도 한 야누스에게 바치는 신전을 지었다. 이 문은 전시에는 열리고 평화시에는 닫힌다고 말했다. 누마가 로마를 다스린 43년 동안, 이 문은 한 번도 열리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누마가 죽은 뒤에는 줄곧 열린 채로 세월이 흘렀다.


그는 농축업 진흥에 힘을 쏟았다. 약탈은 승전에는 으레 따라다니는 것이었지만, 구태여 약탈을 하지 않아도 생계를 꾸려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누마는 로마 시민들을 각종 직능별로 분류하고, 모든 시민이 독자적인 수호신을 갖는 단체에 소속되도록 했다. 목수조합, 철공조합, 염색공조합, 도공조합 등이 있었다.


누마는 백성들의 일상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달력도 개혁했다. 누마는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기준으로 하여 1년을 12달로 정하고, 1년의 날수를 355일로 결정했다. 남는 날수는 20년마다 결산한다. 이 달력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1년을 365일로 개정할 때까지 650년 동안 사용되었다.


또한 1년 동안 각 달의 배치도 3월이 첫 달이었던 것을 세 번째 달로 바꾸고, 11월과 12월이었던 달을 앞으로 가져와서 각각 1월과 2월로 하기로 했다.

[황도 12궁과 축제 및 농경법이 있는 메놀로기움 루스티쿰 콜로티아눔. AD 1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로마 대리석 달력]

누마의 업적 가운데 가장 특기할 만한 것은 종교에 관한 개혁일 것이다. 로마에는 이미 많은 신들이 있었는데, 누마는 이런 신들을 정리하여 계급을 부여했다. 하지만 어떤 신 하나를 정하여, 이것이야말로 로마의 신이라고 규정하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신들을 공경하는 일의 중요함을 가르쳤다. 로마인은 신에게 자기네 윤리도덕을 바로잡는 역할을 요구하지 않은 대신 무엇을 요구했을까. 그것은 바로 수호신 역할이다.


이 누마는 재위 기간 동안 동안 신관이 입은 하얀 토가를 걸치고 혼자서 자주 숲속에 틀어박혔다. 사람들은 그가 님프를 통해 신의 계시를 받고 있다고 믿게 되었다. 그는 43년 동안 통치하다가 님프들의 마중을 받으며 평온하게 저세상으로 떠났다.

[누마 동상과 신들에 대한 공경을 가르치는 누마 출처 구글 이미지]

제3대 왕 톨루스 호스틸리우스(기원전 673~641)


누마의 뒤를 이어 왕으로 선출된 사람은 톨루스 호스틸리우스이다. 그는 로물루스와 마찬가지로 라틴계 로마인이었던 그는 로물루스처럼 공격형이었다. 그가 이끌게 된 로마도 내부를 충실히 다진 누마 시대를 거쳐 이제는 외부로 발전할 시기에 이르러 있었다.

[툴루스 호스틸리우스와 베이인의 전투, 주세페 체사리 作 출처 구글 이미지]

툴루스 왕은 라틴족의 발상지로서 로마인에게는 선조의 땅이기도 한 알바롱가를 첫 번째 공격 목표로 삼았다. 알바롱가시는 철저히 파괴되었다. 주민들은 로마로 강제 이주당했다. 하지만 노예로서가 아니라 로마 시민으로서였다. 로마인과 동등한 시민권을 부여받은 이들의 주거지로 카일리우스(첼리오) 언덕이 할당되었다.


퀸틸리우스, 세르비우스, 율리우스 같은 알바롱가의 유력한 가문은 로마 귀족이 되었고, 그 대표자한테는 원로원 의석이 제공되었다. 만약 이때 알바롱가 백성이 몰살당했거나 노예가 되었다면, 나중에 율리우스 가문에서 태어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제4대 왕 안쿠스 마르티우스(기원전 641~616)


툴루스가 죽은 뒤에 선출된 제4대 왕은 사비니족 출신의 안쿠스 마르티우스라는 자였다. 그는 누마의 외손자로 로마에서 태어나 자랐다. 안쿠스 역시 다른 부족과의 싸움을 피할 수 없었고 싸움에 진 민족들을 노예화하지 않고 로마로 강제 이주시켜 ‘로마화’하는 방식을 바꾸지 않았다.


그리하여 로마의 일곱 언덕은 주민으로 채워지기 시작했다. 팔라티누스 언덕에는 로물루스 시대부터 라틴계 로마인이 모여 살았고, 사비니계 로마인은 오래전에 퀴리날리스 언덕에 본거지를 두었다.


알바롱가인에게는 카일리우스 언덕이 주어졌고, 가장 새로운 이주민들한테는 아벤티누스 언덕이 제공되었다. 여기에 신들의 거처가 된 카피톨리누스 언덕을 더하면, 일곱 언덕 가운데 다섯 개가 주민을 가진 셈이 된다.


안쿠스는 테베레강에 다리를 놓고 이어 테베레강 어귀에 있는 오스티아를 정복하였다. 오스티아를 정복함으로써 로마는 비로소 지중해와 마주 보게 되었다. 또한 오스티아 주변의 모래밭에서는 소금이 생산되고 있었기 때문에 염전 사업도 수중에 넣게 되었다.

[오스티아 출처 구글 이미지]

로마에서 출발하는 도로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도로의 하나는 ‘비아 살라리아’라는 길이다. 이 이름을 직역하면 ‘소금길’이 된다. 이 길은 테베레강 어귀에서 산출되는 소금을 내륙지방의 여러 도시로 운반하기 위한 길이었다.


최초로 선거 운동을 한 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기원전 615~579)


타르퀴니우스는 순수한 에트루리아인이 아니라, 그리스 코린트에서 에트루리아로 망명한 그리스인 아버지와 에트루리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에트루리아인이었다. 혼혈아 타르퀴니우스는 자신의 운명을 개척할 곳으로 로마를 선택하고 로마로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10년도 지나기 전에 이 이방인은 안쿠스 왕의 유언 집행자로 지명될 만큼 출세했다. 그러나 타르퀴니우스는 공증인으로는 만족하지 않았다. 왕이 죽은 뒤 스스로 왕에 입후보한 것이다. 그는 또한 선거운동을 한 최초의 로마인이기도 했다.


37년에 이르는 그의 치세 동안, 로마의 세력권은 더욱 확장되었을 뿐 아니라 로마의 내부도 비로소 도시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도시로 변모했다. 시민들의 생활 수준도 비약적인 향상을 이룩했다.


그는 언덕과 언덕 사이에 펼쳐져 있는 넓은 습지대로 눈을 돌렸다. 습지대의 물을 빼기 위해 대규모 지하수로 공사가 착수되었고, 이 간척사업으로 평지가 된 일대는 처음에는 시장으로 쓰였다. 하지만 각 부족끼리 모여 사는 일곱 언덕에 비하면, 이 일대는 중립지대가 된다.

[타르퀴니우스의 로마 배수로와 건축 공사 출처 구글 이미지]

그리고 지하수로의 위쪽을 덮어야 할 필요성 때문에 이곳만 돌로 포장했다. 그래서 공공 건축물이 서서히 이 일대를 차지하게 되었다. 로마의 심장부라고까지 부르게 된 ‘포룸 로마눔’, 즉 ‘포로 로마노’가 탄생한 것이다.


간척 기술, 지하수로 공사에 필요한 기술, 도로포장 기술, 신전 같은 대규모 석조 건물을 지을 수 있는 기술 등 모든 기술이 에트루리아에서 들어왔다. 기술 지도자로 에트루리아인도 들어온다. 로마인은 에트루리아 기술자들의 지도를 받고 일하면서, 그 기술을 배우고 익혔다.

[타르퀴니우스가 짓기 시작한 유피테르 카피톨리누스 신전의 풍경 이미지, C.R. 코커렐 RA 作]

그러던 어느 날, 타르퀴니우스 왕은 우연히 한 에트루리아 소년을 만났다. 왕은 왠지 이 소년이 마음에 들어 친아들과 함께 기르기로 했다. 소년이 젊은이가 되었을 무렵에는 그의 총명함과 용기에 맞설 수 있는 사람은 로마 귀족의 자제 가운데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타르퀴니우스는 이 세르비우스를 사위로 삼았다.


후계자 자리를 노리고 있던 선왕 안쿠스의 두 아들은 타르퀴니우스가 이처럼 세르비우스를 후대하자 불안해졌다. 그들은 왕을 암살하는 데에는 성공했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어느 쪽도 왕위에 오르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세르비우스를 소년 시절부터 키워온 타르퀴니우스의 아내가 남편에게 일어난 변고를 알자마자 세르비우스를 불러서, 재빨리 왕위를 차지하라고 권했기 때문이다.

[안쿠스의 아들들에게 살해 당하는 타르퀴니우스 출처 구글 이미지]

제6대 왕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기원전 579~534)


제6대 왕이 된 세르비우스에게는 선왕이 착수한 공사부터 마무리짓는 일부터 서둘렀다. 하지만 그에게는 로마 전체를 지키는 성벽을 완성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2,50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세르비우스의 성벽’이라 불리고, 현대 로마에도 군데군데 남아 있는 이 성벽은 로마의 일곱 언덕 전부를 에워싸는 대규모 성벽이다.

[로마를 둘러 싼 ‘세르비우스 성벽’ 출처 구글 이미지]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이룩한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군제 개혁일 것이다. 게다가 이것은 군제 개혁인 동시에 세제 개혁이자, 선거제도의 개혁이기도 했다. 세르비우스는 로마에서는 처음으로 인구조사를 실시했고 그 결과에 따라 로마 시민은 귀족과 평민의 구별없이 경제력을 기준으로 하여 여섯 계급으로 나뉘었다.


[세르비우스의 여섯 계급 출처 본문]

로마에서는 한 사람이 한 표를 갖지 않고, 군단의 최소단위인 백인대가 각각 한 표를 갖는다. 백인대 내부에서 논의와 토론을 거쳐 뜻을 모으고, 그렇게 하여 나온 통일된 뜻이 한 표로 연결된다. 말하자면 소선거구제다. 또한 당시 로마에서는 많은 의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많은 권리를 갖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세르비우스는 병법을 확립했다. 로마군은 전위, 본대, 후위로 삼분된다. 전위는 맨 먼저 적과 부딪쳐 적의 전선을 흩뜨리는 역할을 맡는다. 그런 다음, 두 번째로 대기하고 있던 군단의 주력부대인 중무장 보병이 승부를 결정짓고, 여차하면 세 번째인 후위가 지원하러 들어가는 전술이다. 기병은 기동대 역할을 맡았다.


마구잡이로 밀어붙이던 시절, 세르비우스의 병법에 따라 전열을 가다듬고 쳐들어가는 로마 군단의 위력은 압도적이었다. 주변 부족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게 되었다.



마지막 왕 '거만한 타르퀴니우스'(기원전 534~509)


세르비우스한테는 두 딸이 있었는데, 이들을 선왕(타르퀴니우스 프리스쿠스)의 두 아들과 결혼을 시켰다. 이 중 성미가 드센 톨리아 왕녀는 야심만만한 남편(타르퀴니우스)을 부추겨 로마에 사는 에트루리아인들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인 다음 원로원에서 세르비우스의 출신을 문제 삼으면서 원로원에 찾아 온 왕을 살해하였다.

[타르퀴니우스와 세르비우스를 살해하는 타르퀴니우스와 톨리아 출처 구글 이미지]

그리고 그는 선왕파 원로원 의원들을 모조리 죽였다. 무장한 호위병에 둘러싸이지 않곤 밖에도 나가지 않은 그는 민회에서의 선거도 원로원의 승인 절차도 거치지 않고 왕위에 올랐다.


그 후에도 그는 줄곧 원로원에 조언을 청하지도 않았고, 민회에 찬반을 묻지도 않았다. 시민들은 뒤에서 그를 ‘거만한 타르퀴니우스(Tarquinius Superbus)’라고 불렀다.


국내에서는 독재적 전제군주인 ‘타르퀴니우스 수페르부스’(거만한 타르퀴니우스)도 군사적 재능은 뛰어났다. 주변 부족들과의 전투에서도 이기는 것은 늘 로마 쪽이었다. 화친과 전쟁의 양면 정책을 구사하면서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가는 그의 방식은 교묘했지만 음험하기도 했다.


그런에 왕의 아들 '섹스투스'콜라티누스의 아내 루크레티아를 강제로 범하자, 그녀는 아버지와 남편에게 급하게 와 달라는 편지를 보냈고, 아버지인 루크레티우스발레리우스를 데리고 달려왔고, 남편인 콜라티누스유니우스 브루투스와 함께 달려왔다.


그녀는 사정을 설명하고 복수를 부탁하며 은장도를 가슴에 꽂았다. 브루투스는 그녀의 시체를 '포로 로마노' 연설대 위에 안치하고 시민들을 선동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루크레티아의 죽음, 에두아르도 로살레스 작 출처 구글 이미지]

이후 아르데아의 전쟁터에 나가 있던 타르퀴니우스도 변고를 알았다. 왕은 당장 휘하부대만 이끌고 로마로 돌아왔다. 성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추방하기로 결정되었다는 통고를 받았을 뿐이다. 이렇게 ‘거만한 타르퀴니우스’의 치세는 25년 만에 끝났다. 제7대 왕이었던 그와 함께 로마의 왕정도 끝났다.


제2장 로마 공화정(기원전 509~)


공화국으로 이행한 로마


씨를 뿌린 브루투스


사적인 추문을 교묘히 이용하여 왕정 타도로까지 끌고 간 공로자는 루키우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였다. 그는 그 후 500년 동안 이어지는 로마 공화국의 창시자가 되었다.


왕을 추방한 직후에 브루투스는 ‘포로 로마노’에 시민들을 모아놓고, 앞으로 로마는 어떤 인물도 왕위에 오르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며, 어떤 인물도 로마 시민의 자유를 침해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게 했다.


해마다 민회에서 왕을 대신할 국가의 최고 지도자인 집정관 2명을 선출하는 제도를 창설했다. 초대 집정관으로는 브루투스와 자결한 루크레티아의 남편인 콜라티누스가 선출되었다.


한 사람의 왕이 해온 일을 2명의 집정관이 맡게 된 것은 개인의 전횡을 막기 위한 제도였지만, 재선이 허용된다 해도 집정관의 임기는 불과 1년밖에 안 된다. 이런 제도가 유효하게 기능을 발휘하려면, 권위와 함께 권력도 갖는 안정된 기관이 필요하다. 브루투스는 왕정 시대부터 존재한 원로원을 300명으로 늘리며 강화했다.


공화정 로마에서는 원로원에서 연설할 때, “원로원 의원 여러분” 하고 부르는 대신, “파트레스, 콘스크리프티”(‘아버지들이여, 신참자들이여’)라는 호칭으로 연설을 시작하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이 호칭은 공화정이 시작된 기원전 509년부터 시작되었다. 브루투스의 개혁으로 많은 신참자가 원로원 자리를 얻었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일부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왕정 복고 모의 사건이 발생했다. 그들이 모인 집은 집정관 콜라티누스의 친척집이었고, 그들 중에는 집정관 브루투스의 두 아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부르투스는 공화정을 지키기 위해 두 아들이 채찍질을 당하고 직접 처형되는 것을 지켜보는 냉정한 모습을 보여준 반면, 콜라티누스는 재판정에서 눈물을 보이다가 스스로 집정관에서 내려와 이웃 나라로 망명하였고 그 자리에는 선왕 타르퀴니우스와 혈연관계가 없는 발레리우스가 선출되었다.

[부르투스와 아들을 처형하는 부르투스 출처 구글 이미지]

이후 왕위에 복귀하려는 타르퀴니우스가 끌어들인 에트루리아의 군대와 맞서다가 부르투스는 타르퀴니우스의 아들 아룬테스와의 일대일 결투에서 전사하였지만 전쟁은 로마군의 승리로 끝났다. 장례식은 국장으로 치러졌고, 로마 여인들은 아버지가 죽었을 때처럼 1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뿌리를 내린 발레리우스


공화정의 창시자 브루투스의 장렬한 죽음에 눈물을 흘린 로마 시민들은 그 눈물이 채 마르기도 전에 전쟁에서 살아남은 집정관 푸블리우스 발레리우스(Pvblivs Valerivs)에게 의혹의 눈초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발레리우스 출처 구글 이미지]

우선 발레리우스가 네 마리의 백마를 몰고 개선식을 거행한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둘째는 ‘포로 로마노’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서 있는 그의 웅장한 저택이었다. 마지막으로, 브루투스의 죽음으로 집정관 자리 하나가 공석으로 남아 있었음에도 발레리우스는 그 자리를 빨리 메우려 하지 않고 뭉그적거렸다.


이를 알아차린 발레리우스는 수많은 일꾼을 동원하여 하룻밤 사이에 자기 저택을 부숴버렸다. 그리고 민중에게 좋은 평판을 받을 성싶은 법률을 발빠르게 차례로 제정하고, 뒤이어 동료 집정관을 선출하기 위한 민회를 소집했다.


이로써 발레리우스의 인기는 계속 높아졌다. 사람들은 발레리우스를 ‘푸블리콜라’라는 별명으로 부르게 되었다. 공공(푸블리카)의 이익을 중시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이듬해인 기원전 508년의 집정관 선거에서도 ‘푸블리콜라’는 거뜬히 재선되었다.


기원전 509년부터 기원전 503년까지 여섯 해 동안, 발레리우스 푸블리콜라는 집정관에 네 번 선출되었다. 그리고 푸블리콜라는 에트루리아인의 유출로 저하된 로마의 경제력을 회복하기 위해, 오스티아의 염전에서 나오는 소금 판매를 개인으로부터 국가로 이관하려 했다.


또한 푸블리콜라는 타국인의 로마 이주에도 적극적이었다. 이 호소에 응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예는 5천 명이나 되는 일족을 이끌고 로마로 이주한 클라우디우스 가문일 것이다. 푸블리콜라는 이들 모두에게 로마 시민권과 거주지를 주고, 가문의 가부장인 아피우스에게는 원로원 의석을 주었다.


아울러 타르퀴니우스를 왕위에 복귀시키기 위해 직접 출전한 에트루리아인 클루시움의 왕 포르센나를 물리치기도 하였다. 이 싸움에서 포르센나를 암살하려다가 잡혀 고문받던 중 장렬하게 저항하면서 오른손을 스스로 불에 태운 '가이우스 무티우스'의 이야기가 나온다(그래서 '왼손잡이 무티우스'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포르센나와 무티우스 이야기 출처 구글 이미지]

기원전 503년, 로마가 공화정이 된 지 6년이 지났을 때, 푸블리콜라가 세상을 떠났다. 그 많던 재산도 없어져 장례식 비용조차 낼 수 없게 된 발레리우스 가문을 위해, 로마인들은 모두들 조금씩 추렴하여 푸블리콜라의 장례식을 거행했다. 브루투스가 죽었을 때처럼 로마 여인들은 1년 동안 상복을 입었다.


로마 공화정의 씨를 뿌린 사람은 브루투스였고, 뿌리를 내린 사람은 푸블리콜라였다. 이 두 사람의 뒤를 이은 로마인 가운데 왕정으로 돌아가려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리스에 시찰단 파견


주변 부족들과의 전쟁이 일단락된 기원전 5세기 중엽, 로마인은 처음으로 성문법이라는 것을 만들게 되었다. 그때까지의 로마법은 말하자면 불문율의 집성이었고, 이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지배계급뿐이었다. 여기에 불만을 품은 민중이 법의 성문화를 요구했다.


이에 원로원은 법치국가로서는 선진국인 그리스에 시찰단을 파견했다. 시찰단은 3명의 원로원 의원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정부 요직을 맡은 경험자들로서, 로마의 유력 가문에 속하는 남자들이기도 했다. 3명의 로마인은 1년 동안 그리스를 시찰했다.


당시 아테네는 솔론(기원전 6세기의 아테네 정치가이며 현명한 입법자)의 개혁으로 유명하지만, 스파르타에는 리쿠르고스(기원전 7세기경에 활동한 스파르타의 입법자)의 개혁이 있었다. 이 시찰단의 보고를 토대로 로마의 ‘12표법(表法)’이 만들어졌다.


그리스 문명


그리스 문명은 기원전 2,000년 전후 크레타 섬에서 발생했고, 기원전 1,350년경 수도인 크레노스가 파괴되어 사라진다. 이후 기원전 1,250년 전후에는 우리에게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통해 알려진 ‘미케네의 트로이 원정’이 있었고, 도리아인의 침략으로 미케네가 멸망한 기원전 1,200년경부터 도리아인의 스파르타와 아카이아인이 세운 아테네가 등장하는 기원전 800년경까지의 암흑기를 ‘그리스의 중세’라고 불린다.

 

그리스인에게 기원전 8세기는 해외진출의 시대인 동시에 국내에서도 내실을 다진 시대였다. 그리스인의 활력을 가장 효율적으로 발휘하게 한 폴리스가 형성된 것이 바로 기원전 8세기였다(기원전 776년에 제1회 올림피아 경기가 열렸다). 그리고 그리스인 특유의 국가체제인 폴리스를 대표하는 것이 아테네와 스파르타였다.


아테네


아테네를 수도로 하는 아티카 지방은 면적이 2,600제곱킬로미터에 이르고, 경작지가 많다고는 할 수 없지만 바위투성이인 그리스에서는 비교적 넓은 편에 속한다. 아테네 근처에는 천연의 항구인 피레우스도 있어서, 바다를 향해 열려 있는 지방이었다.

[아테네 출처 구글 이미지]

기원전 8세기 무렵에는 왕정(‘모나르키아’)귀족정치(‘아리스토크라티아’)로 바뀐다. 귀족 출신인 9명의 통령이 1년 임기로 행정과 군사와 제사를 담당하고, 그밖의 귀족들로 구성된 장로회의가 이들을 보좌했다. 자유시민들로 이루어진 민회가 있었지만 발언권은 거의 없었다.


솔론의 개혁


기원전 7세기에 접어들자 이 귀족정치는 아테네의 현실에 맞지 않게 되었다. 토지 소유에 경제적 기반을 둔 귀족 계급에 대해, 상공업으로 힘을 얻기 시작한 신흥 계급이 대두했기 때문이다.


‘데모스’라고 불리는 이 시민들은 기원전 620년 무렵에 이루어진 법률의 성문화로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에 따라 귀족 계급은 불문법 시대에는 제멋대로 휘두를 수도 있었던 사법권을 잃었다.


‘데모스’의 불만은 이 정도의 개혁으로는 해소되지 않았다. 이때 솔론의 등장으로 이들의 불만이 해소되는 것이다. 기원전 594년, 기성 지배층인 귀족들로부터 개혁을 단행하기 위한 권한을 인정받은 그는 역사상 ‘솔론의 개혁’이라고 불리는 정치개혁에 착수했다.


솔론 자신은 아테네를 좌우해온 명문 귀족 출신이지만, 우선 자작농들을 빚더미에서 구제하기 위한 정책을 입안하여 그것을 법제화했다. 농민들의 빚은 크게 줄어들었고 빚을 갚지 못한 사람이 채권자의 노예가 되는 종래의 제도도 폐지되었다.


솔론은 온건하고 자유주의적인 사고방식의 소유자였던 모양이다. ‘데모스’의 급진파는 모든 사유지를 몰수하여 일단 국유화했다가 그것을 똑같이 분배하자고 제안했지만, 솔론은 이 제안을 물리쳤다.

[솔론, 아테네인들의 반대에 맞서 자신의 법을 지지하는 솔론 (노엘 쿠아펠, 17세기경; 프랑스 루브르박물관)]

그러나 솔론이 가장 주안점을 둔 개혁은 정치개혁이었을 것이다. 그는 우선 인구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밝혀진 사실을 토대로, 권리는 부동산에 비례한다고 규정했다. 권력이 재산의 많고 적음에 비례하는 솔론의 제도는 인구조사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의미에서 ‘티모크라티아’라고 불리게 되었다.


귀족으로 태어나지 못하면 참정권을 갖지 못했던 귀족정치에 비하면, 이는 상당히 발전한 정치체제였다. 혈통은 어쩔 수 없지만, 재산을 모으는 것은 재능과 운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솔론은 재산의 많고 적음에 따라 아테네 시민을 네 계급으로 나누었다. 수입이 많은 사람부터 차례로 제1계급, 제2계급, 제3계급으로 내려오고, 무산자인 시민은 제4계급을 이룬다.


제1계급과 제2계급에 속하는 시민은 자기 부담으로 군비와 군장을 갖추는 기병으로서 병역에 종사할 의무가 있었고, 제3계급은 말을 갖출 비용은 제외된 중무장 보병, 제4계급은 경무장보병 내지 함대 승무원이 되었다. 정부 요직은 제1계급과 제2계급이 차지하고, 제3계급은 행정 관료를 맡고, 제4계급은 선거권을 갖되 피선거권은 갖지 못하도록 규정되었다.


지중해 세계에서는 어느 나라보다도 앞선 ‘솔론의 개혁’이 아테네를 귀족정치에서 탈피시켜, 폴리스라는 민주적인 도시국가로 탈바꿈시킨 것이 분명하다. 아테네는 이 솔론에 의해 발전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페이시스트라토스의 독재(참주 정치)


솔론이 공직 생활에서 은퇴하자마자 여기저기서 불만이 터져 나와 무정부 상태, 즉 '아나르키아'가 되었다. 무정부 상태의 혼란과 계속되는 권력투쟁에 지친 아테네 시민들은 질서만 회복된다면 그밖의 일은 아무래도 좋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것을 스스로 실현할 능력이 없는 그들은 한 사람에게 질서 회복의 임무를 맡겼다.


페이시스트라토스도 솔론과 마찬가지로 명문 귀족 출신이다. 다만 이 명문 귀족은 자기가 속해 있는 귀족 계급이 아니라 민주파라고 불리는 신흥 계급에 권력 기반을 두고 있었다.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맨 처음 독재정치를 실시한 것은 기원전 561년이었지만, 그때는 반대 세력이 통일전선을 구축하여 당장 그를 추방해버렸다. 하지만 이 실패에서 교훈을 얻은 그는 15년 뒤인 기원전 546년에 이번에는 무력을 사용하여 아테네로 복귀했다. 이때부터 죽을 때까지 20년 동안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아테네에서 독재정치를 계속했다.

[아테네로 복귀하는 페이시스트라토스 출처 구글 이미지]

페이시스트라토스의 20년 독재는 아테네에 평화와 질서를 주었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유례없는 번영을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그가 죽은 뒤 후계자가 된 그의 아들들의 독재까지는 참지 않았다. 기원전 510년, 아테네 귀족들은 스파르타의 후원을 얻어 독재정치를 타도했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


클레이스테네스는 귀족정치로 돌아가지 않았고 솔론의 개혁을 부활시키는 데 머물지 않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을 빌리면 “보다 민주적인 방향으로 정치체제를 개혁”했다.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으로 생겨난 정치체제는 데모스(민중)에 의한 정치체제라는 의미에서 ‘데모크라티아’라고 불린다. 도시국가 아테네는 기원전 6세기 말에 이르러 문자 그대로 민주정치 체제를 확립하게 되었다.


우선 민회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민회에는 20세 이상의 아테네 시민이면 누구나 참석할 권리를 갖는다. 또한 아테네에서는 로마와는 달리 한 사람이 한 표를 가졌다.


또한 클레이스테네스는 후세의 정부 부처와 비슷한 조직까지 창설했다. 오백인 회의라고 불러도 좋은 기관인데, 각 구(區)에서 추첨으로 뽑힌 30세 이상의 시민으로 구성된다. 제비뽑기니까 출신 가문이나 재산이나 재능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모두 500명으로 이루어진 이 기관이 실제 정무를 담당했다.

[클레이스테네스와 행정개혁 출처 구글 이미지]

클레이스테네스는 솔론의 시대에는 1년 임기의 9명으로 구성되었던 정부관리를 한 사람 늘려서 10명으로 하고 새로 ‘스트라테고’라는 이름을 주었다. 전략을 뜻하는 영어 낱말 ‘스트래티지’의 어원이 된 말이다. ‘국가전략 담당관’이라고 불러도 좋은 이 관직에 취임할 사람은 해마다 민회에서 선출한다. 이것이 도시국가 아테네의 내각이 되었다.


도편추방제


클레이스테네스가 실시한 마지막 개혁은 일종의 자체 정화제도인 ‘도편추방제’다. 아테네에서 추방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도자기 파편에 써서 투표했기 때문에 ‘도편추방’이라고 부른다. 독재정치(참주)를 피하기 위해 이 제도가 만들어진 것은 분명하다.


이 추방에는 그 시민의 명예를 더럽히는 의미는 전혀 없고, 도편추방을 당해도 별로 부끄러운 일로 생각하지 않았다. 추방당한 당사자는 시민의 권리를 잃어버리는 것도 아니고, 재산을 몰수당하지도 않았다. 단지 10년 동안 아테네에서 추방되어 국외에서 살아야 했을 뿐이다. 10년이 지나면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스트라테고’에 뽑힐 수도 있었다.


어쨌든 이 시기에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일반 시민이 국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정치체제가 탄생했다. 후세는 이것을 ‘직접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당시 아테네의 유권자 수, 즉 성인이 된 남자 시민의 수는 3만 내지 4만이었고, 평상시 민회에 참석하는 사람은 1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테미스토클레스 아리스티데스도 그 후 도편추방의 희생자 명단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이 제도는 기원전 417년에 폐지되었다. 도편추방이 국익에 어긋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아테네인들도 깨달았는지 모른다.


아테네에서는 아무리 무식하더라도 당시의 국적인 시민권만 있으면 권리를 완벽하게 인정받았지만, 시민권을 갖지 않은 사람은 참정권을 완전히 봉쇄당했다. 그리고 부모 가운데 적어도 한 사람이 아테네 시민이어야만 아테네 시민권을 가질 수 있었다. 이것도 페리클레스 시대에 이르면 더욱 배타적으로 바뀌어, 부모가 모두 아테네 태생이 아니면 시민권을 가질 자격이 없게 되었다.


소크라테스는 아무리 악법이라도 조국의 법률에 따르겠다고 말하면서, 도망치라는 권유도 물리치고 사약을 마셨다. 같은 철학자라도 아리스토텔레스는 법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 않고 재빨리 도망쳤다. 아테네 시민인 소크라테스에게 아테네는 조국이었지만, 아테네 태생이 아닌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테네 법률을 위해 목숨을 버릴 의리는 없었던 것이다.


스파르타


기원전 1200년경에 남하해온 도리아 민족이 선주민을 정복하여 생긴 것이 스파르타다. 정복자인 도리아인은 선주민과 동화되지 않았다.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이 스파르타만큼 확실히 분리되고, 또한 분리된 채 지속된 폴리스는 하나도 없다. 스파르타에서는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의 차이는 권력의 유무 이전에 민족의 차이였기 때문이다.


우선, 정복자의 자손으로 현재 지배계급을 형성하고 있는 스파르타인이 있다. 이들은 1만명 남짓이고 군무에만 종사한다. 두 번째 계급은 상공업에 종사하는 ‘페리오이코이’라고 불리는 사람들로서 타지방 출신의 그리스인으로 참정권은 없었다. 마지막 신분은 ‘헬로트’라고 부르는 농노들로 도리아인이 침략하기 전에 스파르타에 살았던 선주민이다. 이들의 인구 비율은 1 대 7 대 16 정도였다고 한다. 이 인구 비율이 스파르타의 모든 것을 규정했다.


30세 이상 스파르타인으로 구성된 민회 외에 장로회의가 있었다. 민회에서 선출된 60세 이상의 시민 28명이 장로회의를 구성하고, 임기는 종신이다. 2명의 왕도 의석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장로회의 구성원은 모두 30명이 된다. 군사와 정치의 최고 지도자인 왕은 스파르타의 두 명문 출신이 맡도록 규정되어 있었다(‘디아르키아’).


리쿠르고스의 개혁


기원전 7세기 후반에 이루어진 리쿠르고스의 개혁으로 이 정치체제는 더욱 확고해졌고, 스파르타적 성격의 급진화가 점점 더 진척되었다. 스파르타인의 모든 일상생활은 전보다 더 한층 군무를 지상 목적으로 삼는 계획에 따라 이루어지게 되었다.


건장한 전사로 자랄 것 같다고 판단된 아이는 여섯 살까지는 부모 슬하에서 자라는 것이 허용된다. 일곱 살이 되자마자 집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다. 또래의 소년들과 공동생활을 하면서, 전사 양성을 목적으로 치밀하게 세워진 일정에 따라 교육을 받는다. 물론 신체 단련이 주요 과목이다.


스무 살이 되면 병역이 시작된다. 이들은 60세가 될 때까지 현역 전사로 군무에 종사해야 한다. 결혼해도 30세까지는 공동생활을 해야 할 의무가 있었기 때문에, 그때까지는 밤이 되면 다시 막사로 돌아가야만 했다.


스파르타에서는 국정 참여와 병역을 제외하면 남녀가 완전히 평등했다. 여자도 남자와 마찬가지로 건강하고 튼튼한 체격을 만드는 데 필요한 식사를 하는 것이 의무화되어 있었다. 훈련을 할 때나 경기대회에 참가할 때는 여자도 남자처럼 나체가 되어야 했다.


남자도 소년 시절에 기본적인 읽기와 쓰기를 배울 뿐, 고상한 내용의 책을 읽는 것도 수준 높은 토론에 열중하는 것도 환영받지 못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지금도 과묵한 사람을 ‘라코니코’라고 묘사한다. 도시국가 스파르타가 있었던 지방을 라코니아라고 불렀으니까, ‘라코니코’는 ‘스파르타적’이라는 뜻이 된다.


리쿠르고스는 그때까지 스파르타에서도 유통되고 있던 금화와 은화를 폐지하고, 통화는 쇠로 만든 철화만 쓰기로 결정했다. 철제 화폐로 물건값을 주면, 타국 상인들이 스파르타와 교역하기를 꺼린다. 검소하고 성실하며 강건한 생활을 좌우명으로 삼는 생활에 불필요한 물건들도 스파르타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리쿠르고스 출처 구글 이미지]


아테네의 국력이 강해지면서 불안을 느껴 타국을 침략하기 시작한 스파르타는 기원전 6세기 말에는 이미 펠로폰네소스반도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신의 지배하에 들어온 폴리스들을 모아서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결성했다. 스파르타가 주도하는 이 군사동맹에 참가하는 조건은 스파르타가 전쟁을 수행할 때 병력을 제공하고 민주정치가 아니라 귀족정치를 채택하는 것이었다. 해마다 공물을 바치라는 요구는 하지 않았다.


그리스에는 폴리스가 150개나 있었다고 하는데, 기원전 500년을 전후한 이 시기에는 150개의 폴리스 가운데 아테네와 스파르타만이 다른 폴리스들을 멀찌감치 떼어놓고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서로 충돌을 회피했다. 그리스 외부에서 강적이 침략해왔기 때문이다. 페르시아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페르시아 전쟁


기원전 5세기에 접어들 무렵, 오리엔트 전역을 정복하는 데 성공한 페르시아 제국은 서쪽으로 시선을 돌리기 시작했다. 페르시아가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한 이유는 다음 두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는 경제적인 이유다. 이 시대에는 이오니아 지방이라고도 불리는 소아시아 서해안과 그리스 본토 사이에 가로놓인 에게해 일대가 경제 중심지였다. 페르시아는 번영하는 이 일대를 수중에 넣고 싶어 했다.


둘째는 종교적인 이유다. 당시 페르시아인들은 덕의 화신인 아후라 마즈다를 최고신으로 섬기는 조로아스터교가 인간과 비슷한 덕밖에 갖지 못한 그리스 신들보다 우월하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우월한 종교를 가진 민족이 열등한 종교를 가진 민족을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그들은 생각했다.


이오니아 지방 점령


페르시아 전쟁은 우선 페르시아와 가까운 소아시아 해안에서 불을 뿜었다.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가 이 일대의 폴리스들에게 민주정치가 아닌 군주정치를 하라고 강요했기 때문이다. 당시 이오니아 지방은 그리스 본국보다 경제가 발전했고, 그래서 정치체제 개혁도 더 빨리 진행되어 아테네보다 먼저 민주정치를 실현했을 정도였다. 밀레토스를 비롯한 이오니아 지방의 폴리스들은 다리우스 왕의 강요에 당연히 반발했다.


밀레토스의 구원 요청에 스파르타는 거절하였으나 그리스인들 중에서도 같은 아카이아 민족이라는 이유로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아테네와 에우보이아는 이에 응하였다. 하지만 결국 페르시아의 대군에 버티지 못하고 이들의 저항은 분쇄되고 말았다. 기원전 494년의 일이다.


1차 침입과 마라톤 전투


기원전 490년, 다리우스 왕은 전에 이오니아 지방을 지원한 두 나라에 육해군을 합쳐서 2만 5천 명의 병사로 이루어진 군대를 파견했다. 다행히 아테네에는 10명의 스트라테고(국가전략 담당관) 가운데 결단력이 풍부한 밀티아데스가 끼어 있었고, 그는 마라톤 평원에서 페르시아 대군을 물리친다(‘마라톤 전투’ 아래 지도 1번).


마라톤에서의 승리로 자신감을 얻었지만, 아테네에서는 앞으로의 전략을 둘러싸고 온건파와 강경파가 대립해 있었다. 온건파의 영수는 아리스티데스였고, 강경파의 영수는 테미스토클레스였다. 강경파의 의견이 우세하여 아테네 조선업은 1년 사이에 삼단(三段) 갤리선을 200척이나 건조할 수 있을 만큼 발전했다. 아테네는 카르타고를 완전히 앞질러, 지중해 세계에서 제일가는 해군력을 가진 국가로 변모했다.

[테미스토클레스와 아리스티데스 출처 구글 이미지]

2차 침입과 스파르타의 테르모필레 전투와 아테네의 살라미스 해전


마라톤 전투가 있은 지 10년이 지난 기원전 480년, 선왕 다리우스의 뜻을 이어받은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 왕은 친히 30만 대군과 1천 척의 군함을 이끌고 그리스로 쳐들어왔다. 이번에는 스파르타까지 연합군을 결성하고, 스파르타의 레오니다스 왕이 이끄는 300명의 스파르타 병사가 그리스 중부의 산악지방에 있는 테르모필레(아래 지도 2번)의 비좁고 험준한 산길에서 페르시아군을 막기로 했으나 산지를 우회하여 배후에서 쳐들어온 페르시아군에게 패배한다.


이후 그리스 국토의 3분의 2와 아테네까지 페르시아에 정복되어버렸다. 하지만 ‘살라미스 해전’(아래 지도 3번)에서 그리스 해군은 엄청난 승전을 거두고 크세르크세스 왕은 페르시아의 수사라는 도시까지 달아났으며, 페르시아 함대는 에게해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출처 구글 이미지]

3차 침입과 플라타이아이 전투


이듬해 다시 페르시아는 설욕전을 걸어왔고, 스파르타의 파우사니아스 왕이 지휘하는 5만 명의 그리스 연합군은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트라키아와 마케도니아 지방을 지나 남하해오는 페르시아군을 테베 근처의 플라타이아이 평원(아래 지도 4번)에서 맞아 싸웠다. 격전이었지만, 이번에도 승리는 그리스군의 것이었다.


여세를 몰아 같은 해, 이번에는 그리스 쪽이 공격에 나섰다. 아테네 해군을 주축으로 편성된 그리스 연합함대는 에게해를 지나 동쪽의 소아시아로 쳐들어갔다. 그리스군은 육지에서도 바다에서도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다. 페르시아 전쟁은 기원전 478년에 끝났다. 밀레토스와 에페소스, 그리고 역사가 헤로도토스의 고향이기도 한 할리카르나소스 같은 이오니아 도시들도 그리스인의 손으로 돌아왔고, 에게해도 다시금 그리스인의 바다가 되었다.



패권국가 아테네


그리스의 폴리스들은 언젠가는 다시 쳐들어올 페르시아에 대비하여 항구적인 방어체제를 갖출 필요가 있다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델로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이 동맹의 주도권은 당연히 아테네가 잡았다. 페르시아 전쟁을 결정지은 것은 아테네의 해군력임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본부로는 델로스섬이 선정되었다. 이 섬에는 아폴로 신에게 바쳐진 신전이 있어서, 그리스 민족에게는 국경을 초월한 경배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아테네가 주도권을 장악한 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스파르타가 동맹 참가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는 델로스 동맹의 결성으로 패권을 확립한 아테네를 흘기면서, 자기네 ‘펠로폰네소스 동맹’을 강화하는 길을 택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이긴 뒤, 바다에서는 이렇게 아테네가 점점 강해지고 육지에서는 스파르타가 점점 강해져갔다.


페르시아군을 격퇴한 지 불과 7년 뒤인 기원전 471년,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에서 추방되었다. 어기찬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래도 굽히지 않고 스파르타의 위험을 계속 경고했지만, 그가 외친 반스파르타주의는 아테네만이 아니라 다른 폴리스에도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에서 아무도 받아주지 않자 페르시아로 망명했고 10년 후 페르시아 왕이 그리스 침공을 도와달라고 하자 결국 독배를 마시고 자살했다.

[페르시아에 투항하는 테미스토클레스와 그의 동상(피레우스 항구) 출처 구글 이미지]

그 사이 아테네는 온건 보수파가 지배했다. 보수파의 영수는 명성을 안은 채 은퇴한 아리스티데스의 뒤를 이어받은 키몬이었다. 그는 마라톤 전쟁의 승자인 밀티아데스의 아들이고, 그 자신도 훌륭한 해군 장수였다. 하지만 테미스토클레스가 죽기 1년 전, 이 키몬도 도편추방을 당한다. 아테네에서 민중파가 다시 대두했기 때문이다.


페리클레스 시대


키몬의 실각 이후 30대에 권력을 잡은 페리클레스는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으로 다져진 아테네의 민주정치를 더욱 철저하게 민주화했다. 그때까지는 정부관리와 행정 및 군사 담당자를 민회에서 선거로 뽑았지만, 페리클레스는 재능과 경험이 중요한 군사와 재정 책임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추첨으로 선출하기로 결정했다. 또한 이 모든 공무원에게는 공무에 종사하는 기간 동안 일당을 지불하기로 했다.

[연설하는 페리클레스 출처 구글 이미지]

페리클레스가 지도하는 아테네는 모든 분야에서 재능있는 인물을 우대했다. 시민권을 주지는 않았지만, ‘내수’(內需)로 그들에게 보답했다. 철학자도 역사가도 예술가도 모두 아테네를 지향했고, 아테네에서 인정받는 것이 그들에게는 등용문을 의미하게 되었다. 이오니아 지방에서 태어난 그리스 철학이 아테네로 중심을 옮겨온 것도 바로 이 무렵이다.


또한 그는 개인 재산을 들여 페르시아 전쟁 때 파괴된 채 방치되어 있던 아크로폴리스를 파르테논 신전을 중심으로 전보다 더 아름답고 호화로운 신전과 극장으로 메우는 웅대한 재개발 사업에도 착수했다. 외국인들의 찬탄이 높아질수록 아테네 시민들의 긍지도 높아졌다.

[아테네 전경 출처 구글 이미지]

흔히 말하는 ‘페리클레스의 황금시대’는 기원전 460년부터 기원전 430년까지 30년 동안이다. 후진국 로마의 원로원 의원 세 명이 선진국 그리스를 시찰하기 위해 방문한 것은 기원전 453년부터 기원전 452년까지 1년 동안이라고 한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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