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중 솔론전을 읽고
오늘날 "아테네"라고 하면 스파르타와 함께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대표이자 맹주 이미지가 떠오르지만, 솔론(Solon; BC 630 ? ~ BC 560 ?)이 등장하기 전 기원전 6세기까지는 아직 그런 지위에 오르지 못한 상태였다. 정치·경제적으로는 사회 발전과정에서 발생한 빈부격차가 점점 벌어짐에 따라 수많은 서민들이 소수 부유층에게 진 빚을 감당하지 못해 소작농으로 전락하기도 하고 인신 저당으로 노예가 되거나 외국으로 팔려나가기까지 했으면 심한 경우 부모가 자녀들을 팔아넘기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에 부유층과 빈곤층을 각각 대표하는 정파 간 갈등이 격심해져 유혈사태까지 종종 벌어지던 혼란과 불의의 시대였고, 종교·문화적으로는 아직 고대로부터 이어져내려온 야만적이고 무절제한 습속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러한 혼란을 더 이상 방관할 수 없으며 누군가 나서 수습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된 상황에서, 오직 솔론만이 아테네의 그 누구보다 시대의 불의로부터 거리가 먼 자로 두루 인정받았으며 "부자로서 착취를 한 적도 없으면서 빈자들처럼 궁핍하지도 않은" 인물로 여겨졌다.
그렇다고 솔론이 두루뭉술하여 이편 저편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처신하는 우유부단한 인물이었냐 하면 결코 그렇지 않다. 솔론은 "그리스의 일곱 현자" 중 하나로서 아테네를 대표하는 지성인이자 시인이기도 했지만(이 7현인에는 '최초의 철학자'라고 불리는 탈레스가 포함되어 있다.), 살라미스 섬을 둘러싼 이웃나라 메가라와의 오랜 갈등 속에 당시 아테네 권력층이 주화론으로 기운 상황에서도 목숨을 걸고 강경론을 주장하여 관철하였고 내친김에 아예 스스로 사령관이 되어 전쟁을 지휘하고 승리로 이끈 전쟁영웅이기도 했다.
그만한 명성과 정치적 영향력을 가졌으면서도 당시 아테네처럼 사회갈등이 극단적으로 악화된 사회에서 특정 정파 소속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고, 그가 결정권자가 되어 어떠한 결정을 내리더라도 사심이나 정파적 고려 없이 최선의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일 것이라고 많은 국민들이 신뢰했다는 건 솔론이 얼마나 특별한 사람이었는지 보여준다.
오늘날 우리의 상황은 어떨까? 우리 사회에는 이런 인물이 등장할 수 있을까? 어떤 사람이 자신의 전문영역에서 특별한 성과를 내었거나 또는 훌륭한 인품을 보여 국민들로부터 두루 사랑을 받더라도, 자의든 타의든 정치와 연관되는 순간 그가 "어느 편"인가에 대한 신경질적인 판단 앞에 놓인다. 오해든 사실이든 어느 정파 쪽이라는 결론이 한 번 내려지면, 그 결론에 따라 그 사람의 삶에서 정치와는 무관한 부분까지 포함한 한 인격 전체에 대한 평가마저 뒤바뀌어 버리곤 한다. 우리에게 솔론과 같은 현자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 사회의 분열과 갈등이 기원전 6세기 고대 아테네보다 더 깊어서 그러한 인물을 알아보거나 인정할 수 없을 정도인 것일까?
솔론은 결국 집정관으로 선출되어 아테네 전체를 규율할 법을 제정할 수 있는 무소불위의 권한과 책임을 부여받았다. 심지어 꽤 많은 이들이 솔론에게 토론이나 입법 같은 번거로운 절차 따위 무시하고 당장 참주(tyrant)의 자리에 올라 거침없이 개혁을 추진하라 권하기까지 했으나, 솔론은 "참주란 즐거운 자리이긴 하지만 내려올 길이 없다"라는 이유로 사양한다. 솔론은 마음으로부터 독재를 혐오하고 자유를 신봉했기에 자신 앞에 놓인 절대권력자 자리를 미련 없이 걷어찼다. 생전에 누릴 권력보다는 후대에까지 이어질 명성을 더 값지게 보았던 까닭도 있다. 그런데 그의 정치적 지지자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옆에서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다르게 생각했던 것 같다.
솔론에게 전권을 위임한 부유층과 빈곤층은 동상이몽을 꾸고 있었다. 부자들은 솔론이 현 상태를 그대로 유지해 주리라 기대했고, 빈자들은 토지의 전면 재분배를 원했다. 그러나 솔론은 "기득권자들과 타협하지도, 유권자들에게 휘둘리지도 않고" 중간의 타협점을 선택한다. 토지 소유상태는 그대로 두되 첫째, 현재 존재하는 부채를 전면 탕감하고, 둘째, 인신 저당으로 노예 상태가 된 자들을 해방시키는 동시에 향후 인신을 저당잡는 행위 자체를 금지했다.
이와 관련하여 새겨봄직한 에피소드도 있다. 솔론이 이 개혁안을 발표하기 전 자신의 절친들에게 먼저 계획을 털어놓았다. 솔론이 벗이라고 믿고 상의를 하고자 속내를 내놓았던 그 자들은 솔론이 조만간 빚은 전액 탕감하되 토지를 재분배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곧바로 이러한 사실을 알 길 없는 이들로부터 막대한 돈을 빌려 땅을 사들였고, 얼마 후 솔론의 입법이 발표되자 당연히 최대 수혜자가 되었다. 이 사건 때문에 솔론의 진정성마저 의심받는 위기가 찾아왔으나, 솔론은 자신이 만든 법에 따라 스스로 자기가 가진 막대한 금액의 채권을 모두 무효화하는 솔선수범을 보임으로써 시민들의 신뢰를 간신히 회복할 수 있었다.
사실 솔론의 개혁안은 부자와 빈자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했고 양측 모두 솔론을 원망했다. 솔론도 이로 인해 크게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
사람들은 한때는 나에게 너무 큰 희망을 걸더니 이제는 화를 내고 내가 마치 그들의 적인 것처럼 흘겨보는구나.(솔론의 시)
정치 개혁에서도 마찬가지, 솔론은 그간 정치에서 배제되었던 서민층에게 실질적인 참정권을 부여하는 동시에 부유한 기득권자들이 누려왔던 지위도 해치지 않는 방향으로 세심하게 배려했으며,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이득을 얻거나 다른 편을 함부로 공격할 수 없도록 조치했다. 요즘 식으로는 점진적 개혁파, 온건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왜 이런 선택을 했을까? 솔론은 현 상황에 모순이 있다고 하여 "체제를 완전히 해체시켜 버릴 경우, 그 이후 질서를 다시 세우고 통치체계를 새로이 구성할 만한 여력이 없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부수기야 부술 수 있겠지만 부수고 나서 다시 만들지 못하게 된다면 어떡할 것인가? 시대의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는 소명을 충분히 인식했으나, 그렇다고 현존 질서 그 자체를 무너뜨리는 급진적인 개혁에는 단호히 반대했던 것이다.
훗날 누군가 솔론에게 "당신이 정말 아테네에 최선의 법을 선사한 거요?"라고 묻자 솔론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아테네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한도에서 최선이었소.
나는 솔론이 추구했던 정치적 이상을 이렇게 추측한다. 한 국가 안에서 국민들이 극단적으로 갈라져 서로 대립할 때, 기어이 어느 한 쪽을 제압하여 완전히 말살해버리기보다는, 인신 보증과 같이 가장 심각한 악습은 즉각 제거하되 근본적으로는 사회의 모든 계층이 건전한 애국심과 신앙심을 바탕으로 서로 화해하고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되기를 꿈꾸었던 것 같다. 사실 그때도 적지 않은 야심가들이 국민 대다수를 차지하는 빈민들의 편에서 수적으로 소수인 부유층 기득권자들을 폭력으로 일거에 쓸어버리고 싶어 했으나, 솔론은 그런 것을 정의롭다고 여기지 않았다.
어쩌면 솔론이 이상적이었다기보다는 도리어 지극히 현실적이었을 수 있다. 두 정파 중 어느 한쪽만의 요구를 전격 수용할 경우 애초에 솔론을 그 자리에 올려놓았던 무당파성은 크게 훼손되었을 것이다. 적정한 지점에서의 타협안이 솔론이 그토록 중요시했던 토론과 합의를 통해 도달 가능한 최선의 결론이었을지도 모른다.
솔론은 현실을 법에 맞추기보다는 법을 현실에 맞추어야 했다.(플루타르코스)
만약 이러한 결론에 만족하지 못한고 썩어빠진 지배구조 자체를 아예 뒤엎어버려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다면 결국 토론과 합의라는 수단으로는 불가능하고 피를 동반한 폭력을 사용해야만 할 것이다. 가까운 훗날 이를 행동으로 옮겨 솔론의 이상을 무너트린 이가 바로 페이시스트라토스다. 솔론과 교제했던 스키타이의 전설적인 현자 아나카르시스는 솔론이 법을 구상하던 초기에 그의 시도는 실패로 끝날 것이고 헛수고를 하고 있다며 비웃었는데, 결과적으로 그의 말이 옳았다.
솔론의 법은 정치, 경제는 물론 결혼, 제의, 장례, 상속, 직업 등 사회 전반 전체에 걸쳐 아테네인들의 생활 전반을 규율하는 광범위한 것이었다. 이 중 내가 인상 깊게 보았던 것 몇 가지만 메모한다.
어떤 사람이 폭행이나 상해 등 공격을 당하면, 누구라도 가해자를 고발하고 기소할 수 있다.
솔론은 시민 전체가 서로를 하나의 공동체 구성원으로 여기고, 이웃이 당한 불의에 마치 내 일처럼 함께 분노하고 동정할 줄 아는 사회가 가장 이상적인 국가라고 믿었고 아테네를 그렇게 만들고자 했다. 내 눈앞에 억울한 일을 당하고 고통받는 사람이 있어도 나에게 닥칠 후환이 두려워, 또는 귀찮은 마음에 애써 못 본 척하는 오늘날 우리에게 2천6백년 전 아테네의 현자가 보내는 메시지다.
혁명 등 정치적 혼란기에 어느 편에도 서지 않은 자의 시민권을 박탈한다.
나는 이 법이 "어느 편을 들었느냐"가 아니라 "어느 편도 들지 않았다"는 것을 잘못으로 보아 공동체에서 쫓아내 버린다는 점에 주목한다. 공동체의 시민이라면 공동체가 혼란에 빠졌을 때 자신의 양심과 신념에 따라 보다 올바르다고 생각되는 쪽에 가담하여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 올바른 도리이지, 어느 편이 이길지 기다리며 안전한 곳에 숨어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문제는 솔론이 경계했던 비겁한 중립을 지키는 것보다, 나와 다른 정치적 견해에 대한 마땅한 존중이나 인정 없이 정파적으로 어느 편인가에 따라 한 사람 전체에 대한 이분법적 평가를 내려버리는 모습이 훨씬 더 큰 병폐라고 생각한다. 솔론은 훗날 자신이 세운 통치체제를 파괴하고 참주 자리에 오른 자신의 옛 지지자 페이시스트라토스와 정치적으로 완전한 극단에 섰고 심지어 무기를 들어 맞서기까지 했지만, 그 와중에도 서로에 대한 개인적 우정과 호감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
죽은 이들에 대한 비난을 금지한다.
이러한 법을 제정한 까닭은
"첫째, 죽은 이를 신성하게 여기는 것이 경건한 것이고, 둘째, 지금 없는 사람은 공격하지 않는 것이 정의로운 것이며, 셋째, 증오가 지속되지 않도록 막는 것이 정치적으로 지혜로운 것"
이라는 것이다. 특별히 세 번째 이유에 눈길이 간다. 수십 년 전에 죽은, 심지어 더 먼 과거에 이미 세상을 떠난 역사적 인물들에 대한 공과功過 논쟁이 아직까지도 대한민국을 두 갈래 세 갈래로 찢어놓아 그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오늘, 여기를 살고 있는 우리 시민들끼리도 편을 나누어 서로를 미워하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증오는 사회지도층에 의해 방지되기는커녕 권력을 놓고 다투는 이들에 의해 오히려 의도적으로 더욱 활활 타오른다. 과거에 대한 반성과 청산도 물론 필요하겠으나, 과거 없는 현재란 없다는 당연한 사실, 지금 우리가 가진 좋은 것과 나쁜 것 모두 과거를 살았던 이들의 결정들이 모여 이루어지고 내려온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 역시 중요하다. 지나간 이들의 좋지 못한 점을 바닥끝까지 들춰내어 결코 결론 날 수 없는 것을 내 생각대로 결론내고야 말겠다며 지루하게 서로 싸우기보다는, 좋은 것은 감사하며 누리되 나쁜 것은 우리가 고쳐나가 더 나은 세상을 후대에 물려주는 것이 지혜로운 행동이 아닐까?
법 제정을 완수한 후 솔론은 홀연히 권력을 내려놓고 10년간 망명을 떠난다. 아테네 인들이 자신의 법에 자연스럽게 적응하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솔론의 법에도 불구하고 아테네의 계층 간, 정파 간 깊은 반목은 조금도 치유되지 않았고 시간이 갈수록 더 깊어지기만 했다. 이때 솔론의 6촌 형제이자 절친한 벗, 열렬한 지지자이면서 동지였던 페이시스트라토스(Peisistratus; BC 600 ? ~ BC 527)는 스스로 아테네 시민 다수를 차지했던 빈민층(산악파)의 리더가 되었다. 솔론이 귀국한 후 얼마 되지 않아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자해를 하고는 반대파에게 테러를 당했다는 드라마틱한 거짓말로 지지자들을 흥분시킨 뒤 유혈 폭동을 일으킨다. 기득권자들을 제압하고 정권을 완전히 장악한 후,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예전 솔론이 거부했던 세습참주의 자리에 올랐다. 페이시스트라토스 가문 참주정 시대의 시작이다.
유의할 것은 페이시스트라토스가 다수 시민들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고 억지로 독재자의 자리에 오른 것이 아니라, 오히려 속임수와 선전선동을 동원하여 대다수 국민의 열광적 환호 속에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독재의 길을 열었다는 점이다. 사실 현대사 속 세계의 독재자들 거의 대부분이 이와 같았다.
아테네 시민들 중 다수는 페이시스트라토스를 지지하고, 나머지 소수는 그가 두려워 침묵하거나 해외로 도망가는 와중에 솔론만이 팔순의 노령에도 홀로 주변인들의 만류를 뿌리치며 담대하게 맞섰고, 민주주의를 빙자하여 사실상 독재자의 지배 하로 기꺼이 들어서려 하는 아테네 시민들을 꾸짖었다.
그대들의 비겁함으로 말미암아 지금 고통받고 있으니 신들을 원망치 말고 스스로를 탓하라. 다름아닌 그대들이 폭군에게 큰 힘을 주었으니 그것이 바로 오늘 그대들 모두가 노예가 된 까닭이다.(솔론의 시)
그러나 이미 노쇠한 솔론이 혼자 힘으로 대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결국 솔론이 꿈꾸었던, 계급 간 화합을 통한 질서정연한 공동체는 꿈으로 끝나고 하나의 정파가 다른 정파를 폭력으로 말살시킨 후 그 리더가 독재자 자리에 오른 뒤에야 그 오랜 갈등은 마무리될 수 있었다.
그런데 페이시스트라토스는 자신의 위치가 안정되자 솔론의 법 대부분을 그대로 유지했고 그 자신 역시 솔선수범하여 법을 준수했으며 함부로 권력을 휘두르지 않았다. 오히려 늙은 솔론을 극진히 존중하고 예우하며 국정 조언가로 모셔 자문을 구하곤 했다. 그는 대단히 유능한 지도자로서 서민들을 위한 훌륭한 정책을 펼쳐 내부 정치를 안정시켰고 문화를 진흥하고 국부를 증대시키는 등 훗날 아테네가 그리스의 패자가 될 수 있는 단단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독재권력을 얻는 과정은 비열하고 폭력적이었으나, 일단 권력을 쟁취한 후에는 그 힘을 적절히 활용하여 시대가 요구하는 시의적절한 과제를 적절히 수행했던 것이다. 이른바 선한 독재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부분적으로 보면 솔론의 이상을 페이시스트라토스가 힘으로 실현시켰다고 볼 수도 있겠다.
아이러니하게도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안정적 통치 하에서 아테네 시민들의 경제적 부는 물론 정치적 역량도 점점 커졌고, 이는 결국 그의 자리를 세습한 아들 대에 이르러 아테네가 참주정을 타파하고 민주정을 세우는 토대가 되었으니, 우리나라가 현대사에서 겪었던 경험이 절로 떠오르는 부분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이 새삼 와닿는다.
솔론과 페이시스트라토스 중 누가 옳은가? 숲을 보느냐 나무를 보느냐, 당대에 평가하느냐 후대에 평가하느냐, 수단과 절차를 중시하느냐 결과를 중시하느냐에 따라 대답은 다 제각각일 것 같다. 확실한 것은 이 둘이 대표하는 정치적 가치의 대립은 그때에도 있었고, 그 후에도 있었고, 오늘도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있을 것이라는 사실 하나다.
솔론은 현실 정치가로서 실패했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제정했다고 전해지는 법률들 전부가 과연 솔론 한 사람의 작품인지에 대해서도 사실 회의적인 시각이 많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솔론은 그리스의 숱한 도시국가들 중 하나일 뿐이었던 아테네를 동서고금 가장 특별한 문명의 중심지로 발돋움할 수 있는 기초를 닦은 인물이자 오늘날까지 입법자의 상징으로 여겨진다(미국 워싱턴 D.C.에 있는 의회도서관에 그의 동상을 세워 놓은 것이 좋은 예다.). 솔론의 정치적 신념에 동의하는지와는 별개로 그가 삶을 통해 보여준 고결한 인품, 지혜, 조국과 동포에 대한 깊은 애정, 필요할 때는 죽음을 불사하는 용기, 지치지 않는 에너지, 경건한 신앙심, 끊임없이 배우려는 자세, 솔선수범, 그리고 한편으로는 인생을 즐길 줄도 아는 여유는 시공을 넘어 누구에게나 모범이 될 만한 덕목들이다.
페이시스트라토스 집권 후 솔론은 비록 실권은 없었으나 여전히 국가의 원로로서 예우와 존경을 받았다. 시인으로서 시를 쓰고 문화생활을 영위하며 평화로운 말년을 보냈던 것 같다. 오늘날까지 솔론의 격언으로 널리 알려진 그의 시 한 구절을 보면, 여생을 보내는 늙은 현자 솔론이 어떤 모습이었을지 짐작이 간다.
나는 늙어가면서도 결코 배움을 멈추지 않는다.
[사진출처]
1. 미국 의회도서관 홈페이지(https://www.loc.gov/item/2007684401/)
2. Wikimedia Commons(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Salle_des_gardes_de_la_reine-SOLON_SOUTENANT_LA_JUSTICE.jpg)
3. Wikimedia Commons(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Anacharsis.jpg)
4. Wikimedia Commons(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NAMA_15111_A.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