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책 한 권 일독할 짬조차 내기 버거운 일상 속에서, 어지간히 좋은 책이 아니고서야 한 작품을 두 번, 세 번 읽는 일은 좀처럼 없다. 그런 드문 경험을 이번에 했으니, 고전의 고전, 최초의 문학작품, 서구 문명의 뿌리, 그 수식어도 화려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도서출판 숲 , 천병희 옮김)를 두 번 연속하여 읽어냈다. 첫 번째는 약간의 의무감으로, 두 번째는 먼젓번 혀끝만 대 본 듯한 아쉬움에 그 진짜 맛을 더 음미하고 조금 더 알고 싶어서였다.
트로이아 전쟁의 한 장면(파트로클로스의 시신을 두고 싸우는 희랍군과 트로이아군)을 묘사한 도기, BC530년 경
일리아스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
고전이라 하는 대다수 작품이 그러하듯, 『일리아스』는 오늘날 나 같은 일반 대중이 편안하게 읽을 수 있는 책은 결코 아니다. 낯설기 그지없는 고대 인명과 지명들이 폭포처럼 쏟아지고, 과장된 수식어가 똑같이 숱하게 반복된다. 『일리아스』가 저 유명한 트로이아 전쟁을 다루고 있다는 사실이야 상식이겠지만, 막상 작품을 펴보면 전쟁의 기승전결을 차근차근 다루는 것이 아니라 전쟁 말기의 특정 시점을 마치 가위로 잘라낸 듯 들어내어 그 부분만을 읊으니, 앞뒤 이야기를 모르고 들어갔다가는 첫 장부터 어안이 벙벙해지기 십상이다. 하여 이 책을 즐기기 위한 몇 가지 방법을 나름대로 찾아내 보았다.
첫째, 눈으로 읽는다기보다는 귀로 듣는다는 느낌으로.
노래하소서, 무사(Mousa)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제1권 첫 문장)
호메로스는 이른바 "호메로스 난제"라는 수 세기에 걸친 논쟁에서 볼 수 있듯, 생존 연대는 물론이거니와 심지어 실존 인물인지조차 확실하게 밝혀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오늘날 일반적으로 그는 기원전 8세기에 살았으리라 추측되며,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역시 그 시기에 지어졌을 것이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기원전 8세기는 아직 고대 희랍 문자가 만들어지기 전이라는 사실이다. 즉, 호메로스가 두 작품을 지었다고는 하나 그걸 글로 적어 책으로 펴낸 것이 아니라 입으로 읊어 완성했다는 게다.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 가 문자 형태로 정리된 건 처음 창작된 때로부터 약 200년 후쯤이라고 한다.
<호메로스 흉상>, BC2세기 경 작품의 모조품, AD2세기 로마제국 시대
『일리아스』는 고대 희랍의 성경이자 모든 시민들이 익혀야 할 필수 교과서였는데, 그들은 오늘날 우리처럼 책을 펴서 글을 읽으며 일리아스를 공부한 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째로 암기한 시인, 가객들의 낭송을 귀로 들어 배웠으며, 자기들도 마찬가지로 입으로 읊으면서 외워 다시 후대에 전수했다. 기원전 6세기에 활자화되었다고는 하나 그 역시 시인들이 입으로 읊는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이 글자도 없이 어떻게 이 긴 내용을 귀로 들어 다 외웠을까 의문이 일 수 있지만, 옛날 사람들이 이른바 "스마트"하다는 현대인들보다 암기력이 몇 곱절은 뛰어났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고대 이스라엘의 율법학자들도 구약성경의 율법과 예언서들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달달 외웠다. 그리 먼 과거가 아닌 19세기의 하인리히 슐리만, 즉 그때까지 전설로만 여겨졌던 트로이아 유적을 발굴해낸 바로 그 사람도 일리아스를 통째로 외우는 방식으로 고대 희랍어를 독학했다고 한다. 사실 요즘도 판소리 명창들이 수궁가니 적벽가니 하는 긴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외워 3~4시간에 걸쳐 완창해 내는 걸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비록 우리는 책에 박힌 글씨를 눈으로 읽지만, 상상력을 발휘하여 2천8백 년 전 그 시절, 지중해의 뜨거운 햇살을 받으며 고대 도시국가의 광장 한구석에서 『일리아스』를 낭송하는 시인 곁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청중이 되었다 여기고 귀를 기울여보자. 그러면 화려하고 기다란 수사 문구가 토씨 하나 틀림 없이 수시로 반복되는 모습이라든지 과장되고 호들갑스러운 감정 표현들, 또 본 이야기에서 벗어나 지나칠 정도로 장황하게 펼쳐지는 곁가지 이야기들이 더 이상 어색하게 다가오지 않고 자연스럽게 여겨질 것이다. 노래란, 시란 원래 그런 것이니까.
< A Reading from Homer> Lawrence Alma-Tadema, 1885
둘째, 기본적인 이야기는 알고 시작하자.
스토리의 재미를 중시한다면 내용을 전혀 모른 채 읽는 것도 낫겠으나, 『일리아스』 같은 작품은 오히려 그 작품을 둘러싼 전후 내용을 미리 알고 시작하는 편이 오히려 더 제대로 즐길 수 있다고 본다.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영조와 사도세자의 비극을 자세히는 모르더라도 그 대강의 내용은 다 알고 있어, 이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 첫 장면이 대뜸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의 모습부터 시작하더라도 어리둥절해하지 않는다. 또 여말선초를 배경으로 하는 사극의 첫 회가 곧바로 위화도회군부터 시작하더라도 이후 이야기를 통해 그 지경까지 이르게 된 역사적 상황을 쉽게 파악하며 작품을 즐길 수 있다.
거두절미하고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의 다툼부터 시작되는 『일리아스』도 마찬가지. 『일리아스』가 위대한 작품인 까닭 중 하나가, 비록 이야기의 무대는 전체 트로이아 전쟁 10년 중 막바지 며칠을 대상으로 하나 그 이야기 속 곳곳에 전후 제반 사정을 알려주는 힌트가 빠짐없이 들어가 있어 『일리아스』를 꼼꼼히 다 읽고 나면 트로이아 전쟁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전부 알 수 있게 구성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이러한 치밀한 구성이 무려 2천8백 년 전 완성되었다는 점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식으로 전체 스토리를 다 파악하려면 고대 희랍인들만큼의 배경지식이 어느 정도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시중에 나와 있는 숱한 그리스로마신화 관련 교양서적에는 어디나 트로이아 전쟁을 별도의 챕터로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전쟁의 시작과 결말, 아킬레우스나 아가멤논, 헥토르 등 주요 인물들의 신상을 웬만큼 알고 『일리아스』를 시작한다면 아무 배경지식 없이 맨몸으로 뛰어드는 것보다 오히려 더 큰 재미를 느낄 수 있으리라.
셋째, 전문가의 강연을 참고하자.
나는『일리아스』를 먼저 우격다짐으로 혼자 한 번 읽어내려간 뒤, 쉽게 접할 수 있는 『일리아스』 관련 전문가 강연을 몇 개 찾아 시청하고 다시 한번 읽었다. 누군가 알려줘서 따라한 방법은 아니지만 결론적으로 어려운 고전을 즐기기에 꽤 괜찮은 방법이었다고 나름대로 자평한다. 주로 유튜브에서 강대진 교수님의 강연 영상들을 찾아보았는데, 이 분야의 독보적 권위자이시기에 그 내용은 가히 검증되었다 할 수 있다.
일리아스 속 신이란
고대 희랍의 올륌포스 신들이 오늘날 우리가 믿는 주요 종교의 신과 매우 다르다는 점은 익히 알려진 바다. 그래도 정작 『일리아스』를 읽다 보면 이건 정말 너무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인간적인, 긍정적인 면보다는 오히려 부정적인 면에서 너무나 인간적인 신들의 모습에 실망을 넘어 분노를 느낄 지경이다.
오늘날 우리는 무릇 신이란 모든 것을 다 알고(全知), 어떤 일이든 다 행할 수 있으며(全能), 모든 면에서 선하다(全善) 믿는다. 그러나 올륌포스의 여러 신들은 각자 맡은 영역이 있어 서로 돕기도 하지만 때론 자기들끼리 다투고 다른 신에게 훼방을 받는 바람에 하려는 일을 이루지 못하기도 하는 데다 어리석은 감정에 휩싸여 실수를 저지르곤 하니 전능하다 하기 어렵고, 앞날을 예측하지 못하여 다른 신의 신탁에 기대기도 하니 전지하다 할 수도 없다. 다만 신 중의 신 제우스만큼은 인간사가 흘러가는 시작과 끝의 큰 그림을 미리 다 알고 있고 스스로 예언한 그대로 기어이 이루어낸다는 점에서 다른 신들과는 달리 전지전능에 가깝긴 하나, 그 역시 구체적인 과정에서는 실수를 하고 헛발을 내딛기도 하니 완전하다고 볼 순 없다.
올륌포스의 신이 선한가라는 질문에 이르면 그 신들의 특징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일리아스』 속 세상에는 "윤리"의 개념이란 것은 아예 없었거나 있었다 하더라도 오늘날의 개념과는 전혀 달랐던 것 같다(나중에 『오뒷세이아』에는 정의와 권선징악의 개념이 나온다). 신들은 인간이 선하고 정직하게 살았느냐에는 별 무관심이고 자신들에게 얼마나 제물을 자주 많이 바쳤느냐에 따라 인간의 운명을 달리 정한다. 그렇다고 제물을 많이 바친 인간이라고 해서 꼭 배려해 주는 것만도 아니니, 제물만 즐겁게 받고는 정작 다른 뜻을 품고 그 인간에게 가혹한 운명을 내려주는 일도 다반사다. 아테나와 헤라는 파리스라는 인간 하나가 자신들 심기에 거슬렸다는 이유 하나로 전 트로이아인들의 처참한 파멸을 지독하게 밀어붙이고, 제우스는 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의 부탁을 들어준답시고 변덕스럽게 트로이아 편을 들었다 희랍 편을 들었다 하는데 그 과정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인간들이 처참하게 죽어나간다.
이렇게 말했지만 크로노스의 아들(제우스)는 그(아가멤논)의 청을 들어주기는커녕 제물만 받고 쓰라린 고통을 더욱 늘려주었다. (제2권 중)
이 두 신들(제우스와 포세이돈)이 이렇듯 심한 불화로 만인에게 공통된 전쟁의부술 수도 풀 수도 없는 밧줄을 잡고 양군의 머리 위에서번갈아 끌어당기니, 이 밧줄이 많은 사람들의 무릎을 풀었다. (제13권 중)
바르게 산다 하여 반드시 복을 받는 것도 아니요, 인간의 운명이란 신들의 변덕스러운 기분에 놀아날 뿐이어서 어느 한 신의 눈에 들었다 해도 그 때문에 다른 신의 미움을 받아 저주를 받을 수도 있으니 도무지 안심할 수가 없다. 아킬레우스나 헥토르같이 위대한 영웅의 운명도 다를 바 없다. 사실 일리아스 속에서 영웅들의 빛나는 업적도, 허무한 죽음도 전부 신들의 장난으로 보인다. 희랍인들은 도대체 왜 신들을 이런 모습으로 그려낸 것일까?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결국 『일리아스』가 그리는 신이란 한낱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운명 그 자체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왜 고통을 겪는지, 어떤 이는 잘 살지만 어떤 이는 가혹한 일을 겪는 까닭이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은 전 세계 모든 문명 종교와 철학이 탐구해 온 주제이며, 올륌포스는 이에 대한 고대 희랍인 나름의 대답이다.
그러면 인간이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이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아등바등 발버둥 치며 뭘 해도 결국 저 높은 곳 강력한 신들의 기분에 따라 결정될 운명이라면 인간의 삶이란 너무나 허무하고, 그저 제물이나 부지런히 바쳐올리며 복을 비는 것 외에 의미 있는 일이랄 게 없는 비참한 존재일 뿐이지 않나?
하나 『일리아스』에 나타나는 인간들은 삶을 그렇게 대하지 않는다. 사실 작품 속 희랍군과 트로이아군은 서로 싸우는 와중에 여러 징조를 통해 지금 제우스를 비롯한 신들이 변덕을 부려 어느 쪽 편을 들고 있는지 명확히 인식한다. 신이 저쪽 편을 들고 있다면 지금으로선 우리에겐 아무 희망이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마냥 주저앉아버리거나 도망치지 않으며, 심지어 그런 신을 딱히 원망하지도 않는다. 지금은 저편을 들고 있으되, 또 언젠가는 인간들로서는 알 수 없는 다른 까닭으로 신들이 마음을 바꿔 우리 편을 들어줄 수도 있는 것이다. 인간들은 그저 전쟁에 임하는 전사로서 그때그때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묵묵히 수행하며 운명을 받아들일 뿐이며, 그렇게 주어진 조건 하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을 지지치 않고 찾는다.
친구여! 만일 우리가 이 싸움을 피함으로써 영원히 늙지도 죽지도 않을 운명이라면 나 자신도 선두 대열에서 싸우지 않을 것이며, 또 남자의 영광을 높여주는 싸움터로 그대를 등 떠밀지도 않을 것이오. 하나 인간으로서는 면할 수도 피할 수도 없는 숱한 죽음의 운명이 여전히 우리를 위협하고 있으니 자, 나갑시다! 우리가 적에게 명성을 주든 아니면 적이 우리에게 명성을 주든. (제12권 중, 사르페돈의 대사)
어느 누구도 내 운명을 거슬러 나를 하데스에 보내지 못하오. 그러나 인간들 가운데 누구도 운명은 피하지 못했소. 겁쟁이든 용감한 사람이든 일단 태어난 이상은. 그러니 (중략) 전쟁은 일리오스에 사는 모든 남자들, 그중에서도 특히 헥토르가 염려할 것이오. (제6권 중, 헥토르의 대사)
주인공 아킬레우스를 보면 그러한 태도가 더욱 명확하다. 아킬레우스는 여신인 어머니 테티스로부터 전해 들은 덕에 다른 이들과는 달리 자신이 언제 어떻게 죽을 것인지 그 운명을 너무나 명확히 인지하고 있다. 죽음이 머지않았음을 분명히 아는데도 그는 그 운명에 압도당하지 않는다. 임박한 죽음은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이로되 그 순간까지만큼은 군대의 지휘관이자 전사이자 전우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에 충실한 동시에 자신의 감정을 마음껏 발산하며 생의 순간순간을 한껏 누리는 것, 이것이 바로 호메로스가 『일리아스』를 통해 보이고자 했던 인간의 바람직한 자세 아닐까?
내가 사랑하는 부모님과 멀리 떨어진 이곳에서 죽을 운명임은 나도 잘 아는 바다. 그렇다 해도 트로이아인들에게 전쟁이라면 신물이 나도록 해주기 전에는 나는 결코 쉬지 않으리라. (제19권 중 아킬레우스의 대사)
『일리아스』가 강력한 신들의 장난질에 갈대처럼 흩날리는 인간의 비참한 모습을 줄곧 그리고 있지만 정작 그 참뜻은 신이 아닌 인간의 위대함을 노래함에 있다는 평가가 그래서 나온 것 같다. 신들은 불멸이기에 "슬픔을 느낄 일도 없지만", 죽을 운명을 타고나 내 의지와 상관없이 좋은 일이건 나쁜 일이건 온갖 일을 겪고 살아야 하는 인간이 다른 인간들과 함께 그 운명을 향하여 겸손하되 당당히 걸어나가는 모습이 오히려 더 위대하다는 것이다.
인상 깊은 장면들 몇 가지
인상 깊은 장면, 하나
희랍군의 숱한 영웅들에 거의 혼자 맞서다시피 하는 트로이아의 왕자 헥토르가 전투 중 잠시 성안으로 들어와서 아내(안드로마케)와 아들(아스튀아낙스)을 만나 인사를 나누는 장면(제6권)은 적어도 오늘날 기준으로 볼 때 가히 최고의 명장면이 아닐까? 서사시라는 『일리아스』의 특성상 남편과 부인이 나누는 이 대화 속 표현 역시 다른 대사와 마찬가지로 연극적으로 과장되어 있긴 하지만, 조만간 그 가족에게 닥칠 운명을 미리 알고 있는 우리로선 그런 대화톤이 전혀 부담스럽지 않고 오히려 절절하기만 하다.
<가족에게 작별을 고하는 헥토르>, BC5세기
물론 나도 마음속으로 잘 알고 있소. 언젠가는 신성한 일리오스와 훌륭한 물푸레나무 창의 프리아모스와 그의 백성들에게 멸망의 날이 오리라는 것을. 그러나 (중략) 청동갑옷을 입은 아카이오이족 가운데 누군가 눈물 흘리는 당신을 끌고 가며 당신에게서 자유의 날을 빼앗을 때 당신이 당하게 될 고통만큼 내 마음을 아프게 하지는 않소. (제6권 중 헥토르의 대사)
사실 주인공 아킬레우스를 비롯하여 『일리아스』 속 영웅들이 드러내는 가치관은 현대적 관점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패자에 대한 관용, 인도주의적 관점이나 윤리는 아예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고 심지어 여러 도시국가들이 연합한 희랍군에게선 그저 각자가 개인적 명예를 위해 싸울 뿐 전쟁이라는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딱히 애국심도 없어 보인다. 오늘날에도 통용되는 일리아스 속 가치를 굳이 찾는다면 전우애나 불굴의 용기 정도뿐. 가족관도 마찬가지, 여성은 오직 약탈물, 전리품에 불과하다. 작품 속 여성들 자신들도 역시 이해하기 어려운 모습을 스스로 보이는데, 예를 들어 적장이 쳐들어와 자신의 남편과 오라비들을 모조리 쳐 죽이고 자기 자신은 전리품으로 납치당해왔는데 정작 그렇게 강제로 남편으로 맞이하게 된 적장을 진심으로 사랑하여 극진하게 모시는 브리세이스의 모습이 대표적이다.
헥토르는 전혀 다르다. 희랍군에 속한 다른 영웅들처럼 위대한 지휘관이자 용맹한 전사이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나라의 멸망이 임박한 상황 속에서 그 무엇보다도 과부가 될 아내가 겪어야 할 고생과 멸시에 가장 마음 아파하는 다정한 남편이자,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귀여워하며 신들의 축복을 기원하는 자상한 아버지다(물론 헛된 소원이 되었지만). 조국 트로이아에 그토록 큰 재앙을 초래한 장본인으로서 모든 트로이아인들로부터 비난과 저주를 받는 동생 파리스에 대한 태도를 보면, 그 역시 파리스의 비겁함에 분개하여 욕설을 퍼붓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런 동생을 안타까워하고 격려하며, 열심히 싸워 큰 공을 세움으로써 악평을 씻어버리길 진심으로 바라 마지않는 속 깊은 형이다. 또 다른 재앙의 원천 헬레네에 대하여도 다른 모든 이가 그에게 험한 소리를 해도 헥토르만큼은 부드럽게 그들을 말리며, 어차피 이미 제수씨가 되어버린 헬레네에게 합당한 존중을 표한다. 공동체에 대한 헌신, 군인으로서의 용기, 처자식을 비롯한 가족에 대한 애틋한 마음씨. 이 모두가 오늘날 당장 그대로 다시 태어난다 해도 똑같이 칭송받을 만한 덕목이다.
<헥토르와 안드로마케의 이별> 독일 뫼르스 팰리스 공원 소재
오다가다 주워들은 말로는 이미 고대 로마에서부터 헥토르에 대한 평이 아킬레우스를 뛰어넘었다고 하던데, 아무리 『일리아스』의 주인공이라 할지라도 오직 자신의 삶과 감정에 충실할 뿐인 아킬레우스보다는 이타적 면모를 보이는 헥토르에게 더 끌리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안드로마케와 헤어지는 헥토르, 아버지의 투구를 무서워하는 아스튀아낙스>, Benjamin West, 1766
<헥토르와 안드로마케>, Antonio Zucchi, 1773
<헥토르와 안드로마케의 이별>, Kauffmann Angelica, 1798
<신들에게 아들을 축복해 주길 기원하는 헥토르>, Jean-Baptiste Carpeaux, 1854
제우스여, 그리고 다른 신들이여! 여기 내 아들도 나와 똑같이 트로이아인들 중에서 뛰어나고, 또 나처럼 힘이 세어 일리오스를 강력히 다스리게 해주소서. 그리하여 그가 싸움터에서 돌아올 때 사람들이 그를 보고 말하게 하소서, '그는 아버지보다 훨씬 훌륭하구나!'라고. (제6권 중 헥토르의 대사)
<헥토르와 안드로마케>, Giovanni Maria Benzoni, 1871
<헥토르와 안드로마케>, Giorgio de Chirico, 1912
영화 트로이(2004) 중, 가족과 헤어지는 헥토르(에릭 바나)
인상 깊은 장면, 둘
사랑하는 전우 파트로클로스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자 그때까지 참전을 거부하고 있던 아킬레우스는 이성을 잃고 격분하여 당장 전장으로 뛰어나가려 하지만, 파트로클로스에게 빌려줬던 자신의 갑옷을 헥토르가 빼앗아 입어 버렸기에 당장 갖추고 나갈 무구가 없어 전투에 참여할 수 없는 상황(아킬레우스는 발목만 빼고 나머지 신체는 상처를 입지 않는다는 신화 속 설정은 일리아스에선 보이지 않는다.). 이에 아킬레우스는 어머니 테티스가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로부터 새 무구를 얻어올 때까지는 일단 참되, 우선 거세게 밀려들어오는 트로이아군을 위협하여 쫓아버리기로 하고 방벽을 넘어 참호에 오른다.
그때 아킬레우스는 갑옷도 입지 않고 홀로 참호 위에 우뚝 서서는 트로이아군을 향하여 소리를 지르는데, 이때 그를 돕는 여신 아테나가 그의 뒤에서 함께 고함을 질러주고, 그 소리와 모습에 놀란 트로이아군은 방금 전까지 희랍 군을 몰아내던 기세를 모조리 잃어버리고 허겁지겁 도망쳐버린다. 마치 삼국지 속 장판파에서 장비가 조조의 대군을 기합으로 쫓아버리는 장면을 연상케 하지만, 아테나라는 큰 신을 개입시킴으로써 한층 더 장대한 장면을 연출해 내었다. 후대 독자도 그렇겠지만 특히 『일리아스』 낭독을 듣고 있던 고대 희랍의 젊은이들은 이 장면에서 온몸에 전율이 이는 짜릿한 정서적 경험을 했으리라.
그곳에 서서 그가 고함을 지르자 팔라스 아테나도 멀리서 소리를 질러 트로아이안들 속에 형언할 수 없는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마치 목숨을 앗아가는 적군이 도성을 포위했을 때 전쟁의 나팔소리가 맑게 울려 퍼지듯, 꼭 그처럼 아이아코스의 손자의 목소리가 맑게 울려 퍼졌다. (제18권 중)
<아킬레우스와 팔라스 아테나(참호에서 포효하는 아킬레우스)>, Thomas Woolner, 1868
<트로이아인들을 위협하는 아킬레우스> Max Slevogt, 1905
인상 깊은 장면, 셋
희랍신화의 원천 중에서도 단연 그 으뜸이라고 하는 『일리아스』의 명성에 걸맞게, 이 작품 속에는 원래의 이야기인 트로이아 전쟁 이야기 외에도 다양한 신화 속 이야깃거리들이 숱하게 등장한다. 나는 그중에서도, 아가멤논이 몽니를 부리는 바람에 아킬레우스로 하여금 분노를 불러일으켜 희랍군에 화를 자초했던 배후로 지목된 "미망(어리석음)의 여신(Ate, 아테)"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미망의 여신은 제우스의 맏딸인데, 다름 아닌 아버지 제우스로 하여금 사랑하는 아들 헤라클레스에 관한 잘못된 맹세를 하게 만들었다는 죄목으로 제우스의 분노를 사 인간 세상으로 추방된다. 미망의 여신은 몸이 가볍고 발이 날래 재빠르게 세상 이곳저곳을 누비며 수많은 인간들에게 어리석은 짓을 하도록 만든다. 그런데 이 미망의 여신을 허겁지겁 뒤쫓아 다니는 자매들이 있으니, 바로 "사죄의 여신들(Litae, 리타이)"이다. 이들은 얼굴엔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눈은 사팔뜨기이며 무엇보다 절름발이다. 그래서 발 빠른 미망의 여신을 따라잡을 수가 없고 그가 이미 휩쓸고 가버린 자리에 뒤늦게 나타날 따름이다. 그래도 이 사죄의 여신들을 환대하며 받아들인 이들에게는 그들이 축복을 베풀어준다. 하지만 그들의 못난 모습을 보고 문전박대해버린다면, 사죄의 여신들은 아버지 제우스에게 올라가 간청을 하는데 그 내용이란 바로 미망의 여신이 영원히 그 인간 옆에 붙어있길 기원하는 것이다.
인간은 너 나 할 것 없이 누구나 실수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 그래도 늦게나마 진심 어린 사과를 통해 그 실수를 만회할 수 있지만, 자존심을 내세워 사과를 거부한다면 그 실수의 늪에서 영원히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 이 단순하지만 실천하기 어려운 인간사 진리를 이런 식으로 설명한 고대 희랍인들의 상상력이 재미있다.
<아테와 리타이>, Peter Flötner, 1546. 하늘 위에서 훨훨 날아다니는 아테를 절름발이 리타이가 힘겹게 쫓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