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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y강성 Oct 25. 2024

로마인 이야기 4권 (2)

율리우스 카이사르 (상) - 갈리아 전쟁기 1년째에서 4년째까지

갈리아 전쟁 1년째
(기원전 58년, 카이사르 42세)


로마를 떠나며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총독에 부임하는 사람이 로마를 떠날 때는 날마다 잔치가 열린 뒤에 일가 친척과 수많은 ‘클리엔테스’의 전송을 받으며 거창하게 출발하는 것이 보통이다.


카이사르의 경우에는 5년 동안이나 로마를 떠나 있게 된다. 출발도 당연히 장중하고 거창해야 했다. 그러나 42세를 눈앞에 둔 카이사르는 로마의 일반 시민들은 알아차리지도 못할 만큼 간소하게 출발했다.


그와 동행한 수행원은 카이사르가 직접 부장(副將)으로 발탁한 전직 호민관 라비에누스(Titus Labienus), 그리고 아들을 전선에 보내 군인 수업을 시키는 로마 양반집의 관습에 따라 카이사르 휘하에 맡겨진 몇몇 젊은이들이었다. 그들 중에는 ‘삼두정치’의 일원인 크라수스의 아들도 있었고, 카이사르와 인척관계인 데키우스 브루투스와 카이사르의 조카인 퀸투스 페디우스도 있었다.


[갈리아 전쟁 1년째 카이사르 경로 출처 본문]

갈리아 헬베티족 문제


기원전 58년 이른봄에 임지에 도착한 카이사르는 총독 휘하의 4개 군단을 긴급 소집했다. 제7군단·제8군단·제9군단·제10군단이다. 카이사르는 2개 군단(제11군단과 제12군단)을 새로 편성하도록 명령했다. 군단을 새로 편성하려면 원로원의 허가를 받아야 하지만, 그는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 자신은 제10군단만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주네브(제네바) 앞을 지나는 론 강 유역에 홀연히 모습을 나타냈다. 이것은 헬베티족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들은 사절을 보내, 프로빈키아를 통과할 수 있도록 허락해달라고 다시 요청했다. 카이사르는 그 요청을 거절하고, 그들이 남쪽의 로마 속주로 침입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론 강 남쪽에 약 30킬로미터에 이르는 약 5미터 높이의 방책을 세우고, 방책 앞쪽에는 도랑도 파게 했다.


그러자 헬베티족은 서쪽으로 곧장 가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고 그 길목에 살고 있는 세콰니족을 설득해줄 것을 세콰니족의 서쪽에 사는 하이두이족에게 부탁했다. 하이두이 족장은 헬베티족을 통과시켜 주라고 세콰니족을 설득했다. 설득은 성공했다. 하지만 30만 명이나 되는 인구의 이동이 무사히 이루어질 리가 없었다. 혼란의 물결은 하이두이족이 사는 곳까지 퍼졌다. 하이두이족은 중개 역할을 맡은 것을 후회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헬베티족으로 도와주려다가 오히려 영토를 유린당한 하이두이족은 동맹관계에 있기 때문에 상호방위 의무도 있는 로마에 구원을 요청해왔다. 기원전 58년 5월, 카이사르와 그의 군단은 루그두눔(오늘날의 리옹)에서 하이두이족 대표와 만났다. 갈리아 전쟁은 로마와 하이두이족의 공동투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리옹 출처 구글 이미지]

헬베티족과의 첫 전투


세콰니족과 하이두이족 영토의 경계선을 흐르는 강은 아라르강(오늘날의 손강)이다. 북쪽에서 론 강으로 흘러드는 지류의 하나다. 척후병이 가져온 보고에 따르면, 그 강에 헬베티족이 모여 있다는 것이다. 4분의 3 정도는 벌써 강을 건넜지만, 나머지는 아직도 이쪽 강기슭에 남아 있다는 것이었다.

[론강과 손강 출처 구글 지도]

카이사르는 3개 군단만 거느리고 한밤중에 숙영지를 떠났다. 헬베티족은 기습을 당한데다 전체가 양분된 상황이라 도저히 로마군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강 이쪽에 남아 있던 헬베티족은 대부분 죽고, 간신히 목숨을 건진 자들은 도주했다. 이미 맞은편 강기슭으로 건너가 있던 동족들이 속수무책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전투는 끝나버렸다.


하지만 여기서도 카이사르는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당장 다리를 가설하게 한 것이다. 공병으로 돌변한 병사들은 하루 만에 다리를 완성했다. 이를 보고 놀란 헬베티족은 카이사르에게 사절을 보내 강화를 요청하고, 카이사르가 지정하는 곳으로 이주해도 좋다는 뜻을 전해왔다.


카이사르는 볼모 제공과 하이두이족에 대한 손해배상을 조건으로 제시했다. 하지만 사절에게는 이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절은 "자기네한테는 볼모를 잡아두는 관습은 있어도 볼모를 바치는 관습은 없다"는 말을 남기고 떠나버렸다. 강화 교섭은 결렬되었다.


비브라크테 전투


북쪽으로 진로를 잡은 헬베티족을 카이사르의 6개 군단이 뒤따랐다. 북동쪽으로 18로마마일(약 27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하이두이족의 도읍인 비브라크테(오늘날의 오툉 근처)가 있다. 카이사르는 거기서 군량을 확보할 작정으로 군단의 진로를 북동쪽으로 돌렸다.

[오툉 대성당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런데 로마군에 참가한 갈리아인 기병이 적과 내통하여 이 사실을 적에게 알려주고 말았다. 헬베티족은 발길을 되돌렸다. 후미를 공격당한 카이사르는 당장 헬베티족의 도전을 받아들였다. 그는 보병 군단을 가까운 언덕으로 올려보내는 동시에, 기병대를 적에게 내보냈다. 기병대가 적의 공격에 맞서고 있는 동안, 언덕 중턱에는 고참병으로 이루어진 4개 군단을 로마군의 전통에 따른 3열 전투대형으로 배치했다.

[로마군 출처 본문]

갈리아인의 진형은 전체가 하나로 뭉쳐서 그리스의 팔랑크스(方陣)와 비슷한 밀집대형을 취한다. 이런 대형으로 언덕 아래쪽에서 로마군에 맹공격을 가해왔다. 이 전투에서 카이사르가 배치한 진형이야말로 배수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언덕 비탈에 포진해 있으니까 쉽사리 도망칠 수도 없다. 카이사르 자신도 말에서 내려 모범을 보였다. 희생을 공평하게 하는 동시에 여차하면 달아날 수 있다는 기대를 아예 없애버리기 위해서였다.


로마군의 투창은 끝이 휘도록 개량되어 있다. 투창이 적의 방패를 꿰뚫으면 당장 휘어져, 적병이 방패에서 창을 빼내기 어렵게 하기 위해서다. 헬베티족과의 전투에서도 이 목적은 적중했다. 길이가 2미터나 되는 창을 매단 방패는 쓸모가 없다. 갈리아 병사들은 방패를 내버리고, 방어 수단도 없이 싸울 수밖에 없었다.


3만 명의 로마군보다 수적으로 세 배나 우세한 헬베티군도 결국에는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헬베티족과 함께하던 다른 부족의 갈리아 병사들이 방패로 지킬 수 없는 오른쪽에서 로마군을 공격해왔다. 제1열과 제2열은 헬베티족과 싸우고, 제3열은 새로운 적과 싸우는 양면 전투로 공방전의 제2라운드가 시작되었다.


승부가 결정난 것은 해가 진 뒤였다. 갈리아 병사들도 용감히 싸워서, 제7시(오후 1시)부터 해가 질 무렵까지 계속된 전투에서 등을 돌리고 달아난 자는 한 명도 없었다. 살아남은 갈리아 병사들은 그날 밤 북동쪽으로 도망쳤다.


사흘의 휴식을 마친 로마군이 추격을 다시 시작했을 때, 헬베티족에게 남은 길은 카이사르에게 엎드려 용서를 비는 것뿐이었다. 카이사르는 그들에게 당분간 식량을 원조해주라고 프로빈키아의 갈리아인들에게 명령했다. 그것으로 연명하는 동안 그들이 떠나면서 불태운 도시나 마을을 재건하라는 것이다.


이동을 시작한 36만 8천 명 가운데 11만 명이 고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이로 말미암아 스위스인들은 스위스에 계속 살게 되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프랑스의 어딘가를 스위스라고 부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게르만 문제


헬베티족 문제를 해결하고 군영(軍營)으로 돌아온 카이사르에게 갈리아 부족장들이 승전을 축하하러 찾아왔다. 그들은 비브라크테에서 갈리아 부족장 회의를 열었다. 친로마파로 알려진 하이두이 족장 디비키아쿠스가 회의를 주재했는데, 회의 결론은 갈리아인을 대신하여 게르만인을 혼내달라는 것이었다.


라인강을 건너온 게르만인은 처음에는 1만 5천 명에 불과했지만, 금세 늘어나 이제는 12만 명에 달해 있었다. 게르만인의 수령 아리오비스투스는 세력이 강대하여 이웃에 사는 갈리아 부족들을 억압하고, 갈리아 부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하이두이족조차도 볼모를 보내고 해마다 연공을 바치고 있는 형편이었다.


하이두이 족장 디비키아쿠스는 카이사르에게 문제 해결을 부탁하면서 이렇게 말을 맺었다.

“총독 각하, 만약에 각하와 로마가 아무 도움도 주지 않으면, 갈리아의 모든 부족은 헬베티족의 선례에 따라 게르만인들한테서 조금이라도 멀리 떨어진 지방으로 옮겨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아리오비스투스와의 회담


그래도 카이사르는 우선 대화로 문제를 해결하는 길을 택했다. 그리고 회담을 요구하기 위해 파견한 사절에게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을 전달했다.


1. 게르만인을 더 이상 라인강 너머 서쪽으로 들여보내지 마라.
2. 지금까지 잡아둔 하이두이족 인질을 송환하라.
3. 하이두이족과 그 동맹 부족에게 더 이상 굴욕을 주거나 싸움을 걸지 마라.


아리오비스투스도 당장 회답을 보내왔다. "만약 카이사르가 쳐들어올 생각이라면, 언제든지 쳐들어오라. 14년 동안이나 한뎃잠을 자며 날마다 무술을 연마해온 게르만인들의 용맹을 깨닫게 해주겠다." 아리오비스투스의 회답은 말하자면 최후 통첩이었다.


브장송 선점


군단 전체에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아리오비스투스가 베손티오(오늘날의 브장송)로 향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브장송은 세콰니족의 본거지다. 여기는 식량이나 무기도 많이 비축되어 있고, 지형적으로도 유리한 곳이다. 행군 속도를 제3종*으로 올린 카이사르 군단은 당장 브장송에 도착하여, 그곳을 쉽게 수중에 넣었다.

로마는 군단의 행군 속도를 세 종류로 분류하였다. 수만 명에 이르는 병력의 행군이기 때문에 시속 얼마가 아니라, 하루의 행군 시간과 거리에 따라 분류했다.

1. 평상시의 행군(이테르 유스툼)─5시간에 25킬로미터.
2. 강행군(이테르 마그눔)─7시간에 30 내지 35킬로미터.
3. 최강행군(이테르 막시뭄)─밤낮을 가리지 않고 최대한의 거리를 행군.


그런데 그곳에 머무르는 동안 갈리아 상인들이 로마군 병사들에게 게르만인에 관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게르만인 남자들은 키가 너무 커서 올려다봐야 할 정도라는 것, 무기를 다루는 솜씨가 능숙하고 용맹하다는 것, 그들과 전쟁터에서 맞붙은 갈리아인들은 그들의 큰 체격과 형형한 눈빛에 기가 질려 꼼짝도 못했다는 것 등등.


전투 경험이 거의 없는 젊은 장교들이 맨 먼저 이 공포에 침범당했다. 이 공포는 전쟁에 익숙할 터인 고참병이나 백인대장이나 기병대장들한테까지 조금씩 침투해갔다. 어떤 자들은 카이사르한테 직접 찾아와, 카이사르가 출동 명령을 내려도 병사들은 군기를 앞세우고 전진하기를 거부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작전회의


전군의 분위기가 이에 이르자, 카이사르는 각급 백인대장까지 모두 참석시킨 작전회의를 소집했다. 그 자리에서 카이사르는 우선 그의 전략에 대해 비판하거나 논란하는 것을 엄하게 꾸짖었다.


“아리오비스투스는 내가 집정관이었던 해에 로마와의 우호관계 수립을 강력히 요청한 자다. 그가 광기에 사로잡혀 우리에게 도전했다 해도, 그대들이 왜 두려워해야 하는가. 그대들 자신의 용맹과 나의 생각에 왜 의심을 품어야 하는가.

로마는 우리 아버지 시대에 게르만인과 대결했다. 마리우스가 킴브리족과 테우토니족을 궤멸시켰을 때다. 그 후로는 노예전쟁(여기에 참전한 자들 중에는 게르만인이 많았다)이 있지만, 그들이 로마와 맞서 그런 대로 싸울 수 있었던 것도 우리 로마인한테 배운 전술과 군율 덕분이었다.

이런 예를 보더라도, 싸움에 이기는 데에는 불굴의 의지야말로 최상의 무기임이 분명할 것이다. 로마인들은 오랫동안 아무 이유도 없이 게르만인을 두려워했지만, 대결하자마자 게르만인을 무찔렀다. 게르만인은 헬베티족이 자주 무찌른 사람들과 같은 민족이다. 그 헬베티족을 우리는 굴복시켰지 않은가…….

내일 밤 제4보초시에 들어가자마자 나는 숙영지를 떠날 것이다. 그대들의 마음속에서 수치심과 의무감이 이기는지, 아니면 공포심이 이기는지를 알기 위해서이기도 하다. 나를 따라오는 자가 없다 해도, 제10군단만은 데리고 떠나겠다. 그들의 충성심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제10군단은 앞으로 내 친위대가 될 것이다.”


이날 밤 카이사르의 연설은 순식간에 군영 구석구석까지 전달되어 모든 병사의 사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제10군단 병사들은 지휘관을 통해 자기들의 충성심과 의무감을 믿어준 카이사르에게 사례하고, 싸우러 나갈 준비는 이미 끝났다고 보고했다.


다른 군단들도 카이사르에게 지휘관을 보낸 것은 마찬가지였지만, 그들이 카이사르에게 말한 내용은 달랐다. 그들은 카이사르에게 사죄하고, 앞으로 두 번 다시 총사령관의 전략을 비판하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카이사르는 그들의 사죄를 받아들이고, 종전처럼 부하로 인정했다.


아리오비스투스와의 전투


일주일에 걸친 강행군이 끝난 뒤, 척후병이 가져온 정보로 아리오비스투스가 35킬로미터 거리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서 카이사르와 아리오비스투스의 회담이 성사되었는데 로마의 내부 사정에도 밝은 아리오비스투스가 여전히 굽히지 않고 카이사르를 자극하면서 회담은 결렬되었다.

[카이사르와 아리오비스투스의 회담 출처 구글 이미지]

그런데 로마군이 바싹 접근해도 적은 진영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었다. 포로를 심문해 보니, 게르만 사회에서는 출산 경험이 있는 여자에게 제비를 뽑게 하여 싸우기에 좋은 때인지 아닌지를 점치는 관습이 있는데, 초승달이 뜰 때 싸우면 게르만인이 승리할 수 없다는 점괘가 나왔다는 것이다.


카이사르는 이를 이용하기로 했다. 결전은 이튿날 아침으로 결정되었다. 카이사르는 배수진을 치지는 않았지만, 적정을 정확히 파악하여 거기에 맞는 전술을 구사했다. 또한 게르만 전사들은 갈리아인과 마찬가지로, 초반에는 강력한 공격력을 보이지만 전투가 진행될수록 힘이 떨어지는 약점이 있었다.


여기에 두 배가 넘는 적의 공격을 받고 열세에 빠져 있던 로마군 우익을 구한 것은 청년 장교 크라수스의 재치였다. ‘삼두’의 일원인 크라수스의 맏아들은 기병대 지휘를 맡고 있었는데, 제3대열의 병사들이 활용되고 있지 않은 것을 깨닫고는 그들을 이끌고 우익을 지원하러 달려간 것이다. 이것이 승부를 결정지었다.


적병은 모두 등을 돌리고 달아났다. 게르만 전사들은 7.5킬로미터 떨어진 라인강을 향해 패주했다. 아리오비스투스의 두 아내와 딸 하나는 죽고, 또 다른 딸은 포로가 되었다. 그들에게 붙잡혀 있던 갈리아인들은 모두 자유를 되찾았다.


이 전투 결과가 알려지자마자, 라인강을 건너려고 강기슭에 모여 있던 수에비족은 갈리아로 이주하기를 단념하고 자기네 땅으로 돌아가 버렸다. 아리오비스투스는 라인강 동쪽으로 간신히 달아나긴 했지만 1년 뒤에 쓸쓸히 죽었다고 한다.


전투 후


갈리아 전쟁 첫해를 두 차례의 승리로 장식한 카이사르는 겨울철 숙영에 들어가기에는 아직 이른 9월 증순이었지만 모든 장병에게 겨울 철 숙영이라는 형태로 긴 휴식을 주기로 했다. 로마군이 갈리아에서 첫 겨울을 보낼 숙영지는 세콰니족의 도읍인 브장송으로 결정되었다.


그 위치로 보아, 갈리아보다는 라인강 건너편을 위압할 목적이었던 게 분명하다. 겨울철 숙영지의 최고 책임은 부장인 라비에누스에게 맡겼다. 카이사르 자신은 알프스를 넘어 남쪽으로 갔다. 그의 담당 지역을 순회하면서 총독의 또 다른 임무인 내정이나 사법을 관장하는 일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원전 58년의 전쟁은 후세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카이사르는 로마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로마인들이 '레누스'라고 부른 라인강이 로마 국가의 기본 방위선"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보여주었다. 또한 산맥보다는 강이나 바다를 바위선으로 삼아야 한다는 로마 방위 전략의 첫 주춧돌이 놓인 것을 의미했다.


한편, 그 동안 로마에서는


클로디우스의 키케로 공격


갈리아로 떠나는 카이사르가 클로디우스에게 요구한 것은 원로원파를 꼼짝 못하게 못박아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호민관은 못박아두는 정도가 아니라 그 이상의 일을 저지른다. 첫 번째 표적은 키케로였다.


클로디우스에게 원로원파를 못박아두라는 임무를 맡긴 카이사르는 무기, 즉 표면상의 방침도 주었다. 그것은 카이사르 자신이 ‘카틸리나 역모사건’ 때 제기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원칙항소권이 인정되어 있는 로마 시민을 재판도 하지 않고 사형에 처하는 것은 위법이라는 원칙을 다시 들고 나오라는 것이었다.


기원전 58년 3월, 호민관 클로디우스는 재판도 하지 않고 로마 시민권 소유자를 사형에 처한 자는 추방한다는 법안을 제출했다. 5년 전의 ‘카틸리나 역모사건’ 때 카틸리나의 동지 다섯 명을 재판도 하지 않고 사형에 처한 책임자는 그해의 집정관인 키케로였다. 클로디우스의 표적이 키케로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했다.


48세의 키케로는 동갑내기인 폼페이우스가 클로디우스의 공세에서 자기를 지켜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알바의 별장에까지 찾아간 키케로를 폼페이우스는 만나주지도 않았다. ‘삼두정치’의 또 다른 일원인 크라수스도 모호한 대답만 할 뿐이었다.


원로원도 딱하다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절망한 키케로는 시민들이라면 자기편이 되어줄 거라고 믿고, 흐트러진 머리에 상복을 입은 모습으로 포로 로마노에 나가서 지나가는 시민들을 붙잡고 호소했다. 하지만 5년 전에는 그를 구국의 영웅으로 찬양했던 시민들이 슬금슬금 그를 피해 길을 돌아가는 것이었다.


키케로의 로마 탈출


클로디우스가 제출한 법안은 3월 20일에 시민들의 투표에 부쳐질 예정이었다. 키케로는 그 전날 밤에 로마를 떠났다. 하지만 그는, 카토가 로마에 없다 해도 클로디우스의 법안이 그대로 통과되는 것을 원로원파가 허용할 리 없다고 생각하여, 로마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머물면서 기다렸다.


하지만 결과는 더욱 나빠졌다. 키케로의 탈출을 알게 된 클로디우스가 새로운 조항을 추가하여, 그 형태로 법안이 가결되어버린 것이다. 추가된 조항은 키케로의 재산을 파괴하고 몰수하는 한편, 키케로가 국경에서 750킬로미터 이내로 들어오면 당장 체포한다는 것이었다.


눈물을 흘리며 가족과 이별한 키케로는 브린디시에서 배를 타고 그리스로 망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팔라티노 언덕 위의 호화 저택은 호민관의 명령에 따라 잿더미가 되고, 그 땅에는 자유의 신에게 바치는 신전을 세우기로 결정되었다. 키케로 소유의 별장들도 몰수되어 경매에 부쳐졌다.


편지 쓰기를 좋아했던 키케로는 망명 생활을 하는 동안 수많은 편지를 각지에 보냈다. ‘울보 키케로’라는 별명도 이 시기에 그가 쓴 수많은 편지에서 유래했다. 키케로에게 호의적이었던 『영웅전』의 저자 플루타르코스조차도 키케로가 역경에는 약했다고 평했을 정도다.


갈리아 전쟁 2년째
(기원전 57년, 카이사르 43세)
[갈리아 전쟁 2년째 카이사르 경로 출처 본문]

센강의 북동쪽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체를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고 말했다. 언어와 풍습뿐 아니라 주민과 자연 환경의 차이까지 고려하였는데, 그 중 하나가 센강과 마른 강 및 모젤강을 남쪽 경계로 하고, 북쪽으로는 도버해협과 발트해 및 라인강을 경계로 하는 지방이다. 오늘날 프랑스 북동부와 벨기에 및 네덜란드 남부까지를 포함한다.


이 지방에는 오래전부터 게르만인들이 라인강을 건너와 정착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이 일대를 게르만인의 피가 짙게 섞인 지방으로 분류했다. 이들은 로마인들이 '벨가이'라고 부른 벨기에인으로, 갈리아인 중에서도 가장 호전적인 민족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들이 갈리아 전쟁 2년째를 맞이한 카이사르의 상대가 되었다.


벨기에인 연합군과의 전투


기원전 58년부터 57년에 걸친 겨울 동안,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북부의 속주 통치에 전념하고 있던 카이사르에게 벨기에인들의 불온한 움직임을 알리는 보고가 점점 자주 들어오게 되었다.


이번에도 카이사르는 자비로 군자금을 조달했다. 원로원이 인정한 4개 군단에 그가 자비로 편성한 4개 군단을 더하여, 카이사르 휘하 군단은 8개 군단이 되었다. 여기에 누미디아 기병과 크레타 궁수 등, 특수 기능을 가진 외국 용병이 지원대라는 이름으로 가담했다.


갈리아 전쟁 당시의 현지병은 하이두이족을 비롯한 갈리아의 친로마 부족이다. 카이사르 휘하의 총병력은 8개 군단 4만 8천 명에 외국 용병 5천, 갈리아 현지병인 기병 4천을 합하여 5만 7천 명에 이르렀다. 한편 벨기에 전력은 40만 명에 달했다.


카이사르는 현지 정보에 의해 벨기에인이 움직이기 시작한 몇 가지 이유를 알게 되었다.

첫째, 갈리아 중부가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간 이상, 로마군의 다음 표적은 자기네 영토일 거라는 위기감.
둘째, 게르만인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으니까, 로마인의 침입도 허용할 수 없다는 자부심.
셋째, 로마의 세력이 미치면, 약육강식의 방식도 더 이상 통하지 않게 되리라는 우려.


여기에 의기가 투합한 벨기에인들은 단결하여, 수에시오네스 족장인 갈바를 총대장으로 삼아 갈리아 중부를 침략함으로써 로마에 선제 공격을 가하려 하고 있었다. 당장 군영을 떠난 카이사르 군대는 보름 동안 강행군을 계속하여, 벨기에 영토와의 경계에 이르렀다.


로마군이 이렇게 빨리 도착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경계와 가장 가까운 땅에 살고 있는 레미족은 당장 동요했다. 레미족은 급히 사절을 보내 복종을 맹세하고, 로마군의 군량 보급에 협력하겠다고 제의했다.


여기서 카이사르는 적이 쳐들어오기를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전군을 이끌고 노비오두눔(오늘날의 수아송) 바로 북쪽을 흐르는 센강을 건넜다. 선수를 쳐서 적의 영토로 진격한 것이다. 강을 건너자마자 그는 거기에 진영을 세웠다.


“이런 진영은 지형상 유리하다. 배후에는 강이 흐르기 때문에, 적의 공격으로부터 배후를 지켜주는 동시에 레미족을 비롯한 우호 부족들이 보급해주는 군량도 안전하게 받을 수 있다. 강에는 다리가 걸려 있기 때문에 다리 건너를 요새화하고, 막료인 사비누스에게 6개 대대를 주어 경비하게 했다. 또한 진영 앞쪽의 저지대에는 좌우에 3.5미터 높이의 방책을 세우고, 너비 5.5미터의 참호를 팠다.”


북쪽에서 쳐들어오는 벨기에군의 진로에 레미족의 도읍이 있었다. 카이사르의 진영과는 12킬로미터쯤 떨어진 곳이다. 벨기에군은 우선 성벽으로 둘러싸여 요새화되어 있는 그 도시를 습격했다.


카이사르는 당장 누미디아 기병과 크레타 궁수와 마요르카 투석병을 파견했다. 이것은 수비 쪽에 힘을 주고 공격 쪽의 힘을 꺾는 효과를 낳았다. 레미족의 도읍에 대한 공격을 포기한 벨기에군은 카이사르 진영을 향해 남하해왔다.


이미 진영의 좌우를 연장하여 방책을 세우고 참호를 파둔 것이 전쟁터의 확산을 막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벨기에군이 로마군 진영으로 쳐들어오기 위해서는 넓은 습지대의 양옆을 돌아서 구획된 전쟁터로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전쟁터가 좁으면 압도적으로 많은 병력에는 오히려 불리해진다.


정면 공격을 포기한 벨기에군은 좌우로 나뉘어 강 쪽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강을 건너, 진영과는 다리로 이어져 있는 요새를 공격한 다음, 배후에서 로마군 진영으로 쳐들어올 작정이었다.


카이사르는 몸소 선두에 서서 누미디아 기병과 경무장 보병 전원을 이끌고 강을 건넜다. 다리를 지나 벨기에군보다 먼저 강을 건넌 로마군은 강을 건너오는 적을 맞아 싸우는 형태가 되었다. 모두 한꺼번에 강을 건너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적의 전력은 조금씩밖에 투입되지 않는다.


그리고 카이사르가 하이두이족한테 이미 손을 써둔 것도 효과를 낳기 시작했다. 동맹관계에 있는 하이두이족으로 하여금, 벨기에인 중에서 가장 강력한 벨로바키족의 영토를 유린하게 한 것이다.


전황은 좋지 않고, 군량은 부족하고, 영토도 마음에 걸리고 해서, 벨기에 연합군은 각 부족이 일단 자기 땅으로 돌아간 다음 서로 연락을 취하면서 싸우자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적의 퇴각을 확인한 이튿날 새벽, 카이우스는 기병대와 부장 라비에누스가 이끄는 3개 군단에 추격 명령을 내렸다. 벨기에 전사들은 대열을 흐트러뜨리고 사방팔방으로 달아났다. 거칠것없는 상태에서 살육을 끝마친 로마군 병사들은 카이사르의 명령대로 해지기 전에 진영으로 돌아왔다.


노비오두눔 전투 - 첫 번째 각개 격파


이튿날 아침, 카이사르는 진영을 떠났다. 목적지는 노비오두눔(오늘날의 수아송). 벨기에군 총대장 갈바의 출신 부족인 수에시오네스족의 본거지다. 군단에는 제2종 행군 명령이 떨어졌다.

[노비오두눔(수아송) 출처 구글 이미지]

패주해온 벨기에 전사들은 이미 성안으로 들어가버린 뒤였다. 이제는 공성전(攻城戰)을 각오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느긋하게 공방전을 벌이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카이사르는 로마인이 가진 기술력을 활용하기로 했다.


‘비네아’라고 불리는 병기는 길이 4미터, 너비 2.5미터, 높이 2미터의 바퀴달린 이동식 전차다. ‘투레스 모빌레스’(이동탑)라고 불리는 공성기도 준비되었다. 이름 그대로 이동식 탑인 이 병기는 성벽과 거의 같은 높이에 이르는 것으로, 병사들이 층층대를 타고 위로 올라가도록 되어 있다.

[로마군 공성 병기 출처 본문]

이 같은 공성용 병기들은 벨기에인들에게는 난생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그처럼 크고 무시무시한 병기를 순식간에 만들어내는 로마인의 기술력에 그들은 압도당하고 말았다. 항복 사절이 카이사르를 찾아온 것은 공성용 병기가 아직 완전히 준비되지도 않았을 때였다.


카이사르는 항복을 받아들이면서, 마치 레미족이 옆에서 거들었기 때문에 그러는 척했다. 총대장 갈바의 두 아들을 포함한 유력자들의 아들을 볼모로 잡고 무기도 회수한 뒤에 강화가 이루어졌다. 이리하여 각개격파의 첫 번째 목표는 달성되었다.


벨로바키족의 투항


카이사르는 그러나 잠시도 쉬지 않고, 벨기에인 가운데 최강이라는 벨로바키족 영토로 진격해 들어갔다. 오늘날로 치면 파리에서 북쪽으로 100킬로미터쯤 떨어진 지역이다.


목적지에서 5로마마일(약 7.5킬로미터) 떨어진 지점까지 진군했을 때, 카이사르는 벨로바키족 장로들이 투항의 표시로 두 손을 앞으로 내민 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들은 변명하기를, 자기들은 원래 로마와 맞설 생각이 없었다고 말했다.


카이사르와 동행한 하이두이 족장 디비키아쿠스도 한마디 거들었다. 벨로바키족은 하이두이족과 우호관계에 있었지만, 하이두이족이 로마의 동맹자가 된 것에 반발한 자들의 부추김을 받고 로마에 반기를 든 것이라고.


그래서 벨기에 연합군에 가담한 자들 가운데 로마의 패권하에 살기를 원치 않는 강경파는 브리타니아(오늘날의 영국)로 도망쳐 갔고, 현재 남아 있는 자들은 모두 온건파니까 그들의 강화 제의를 수락해달라고 부탁한 것이다.


암비아니족과 네르비족 격파


카이사르는 다음 목표인 암비아니족을 쳐부수러 갔다. 암비아니족도 어렵지 않게 정복했다. 다음 목표는 네르비족이었다. 갈리아 북동부 지방에서는 최강으로 알려진 네르비족은 기병을 주력으로 삼는 갈리아인 중에서는 드물게도 보병을 주력으로 삼고 있는 호전적인 부족이었다.


카이사르의 로마 군단은 북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오늘날로 치면 프랑스 국경을 넘어 벨기에 영토로 들어간 셈이다. 로마인은 상인조차도 들어가본 적이 없는 지방이다.


네르비족 영토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행군한 뒤, 카이사르는 15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지점을 흐르는 강 너머에 적군이 집결해 있다는 것을 원주민한테서 알아냈다.


카이사르는 척후병과 백인대장으로 이루어진 부대를 앞서 보내, 진영을 짓기에 적당한 곳을 물색하게 했다. 하지만 갈리아인 가운데 스파이가 있어, 로마군의 행군 방식을 네르비족에게 밀통했다. 군단과 군단 사이에 수송부대가 끼어 있으니 그 틈새를 찌르면 공격에 성공할 거라고 조언한 것이다.


앞서 보낸 척후병과 백인대장들이 진영 설치 지점을 잘못 선택한 것은 아니다. 수심이 1미터도 채 안 되는 강을 사이에 두고 진영 설치 예정지 바로 건너편에 관목으로 뒤덮인 야트막한 언덕이 있었는데, 그 언덕 전체에 적병이 매복해 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로마군은 허를 찔린 셈이다.


강 이쪽에서 진영 설치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수송부대도 도착하기 시작했다. 적군 사이에서는 수송부대가 모습을 나타내는 것을 공격 개시의 신호로 삼기로 했기 때문에, 숨어 있던 7만 명이 넘는 병력이 성난 파도와도 같은 기세로 강을 향해 몰려왔다. 강기슭에 머물러 있던 로마군 기병대는 깜짝 놀라 사방으로 흩어졌다.


전투를 준비할 겨를이 없었는데다 적이 너무나 갑작스레 공격해왔기 때문에 로마군 병사들은 부대기를 내걸 틈도, 투구를 쓸 겨를도, 방패 덮개를 벗길 여유도 없었다. 그렇지만 전투 경험이 많았기 때문에 제각기 칼을 집어든 곳에서, 눈에 들어온 부대기가 자기 부대의 깃발이 아니더라도 그 주위에 모여 싸웠다.


이날의 전투에서 로마군은 비록 기병대와 경무장 보병에 한정되긴 했지만 처음으로 적에게 등을 보였다. 로마군이 패주했다는 소식은 그 후의 변화와 관계없이 갈리아 북동부 일대에 널리 퍼졌을 정도였다.


이렇게되자 카이사르는 선임 백인대장 역할까지 맡는 것도 망설이지 않았다. 고전하고 있는 군단이 보이면, 후위에 있던 병사의 방패를 빼앗아 들고 그대로 최전선에 나가 격려하기까지 했다. 총사령관의 이런 모습에 병사들은 사기충천하여 용감하게 싸웠고, 전황은 어느덧 로마군에 유리한 쪽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수송부대 호위를 겸해 후위 경비를 맡고 있던 2개 군단이 달려왔고, 재빨리 적진에 쳐들어가 본영을 함락하는 데 성공한 라비에누스가 제10군단을 지원군으로 보내온 것이 상황을 더욱 확실히 바꾸어놓았다. 좌우 양쪽에서 달려온 이 응원군 덕분에 적의 기세에 압도당할 기미를 보이던 병사들의 심경도 일변했다.


네르비족도 벨기에인 가운데 가장 용맹하다는 평판에 부끄럽지 않게 싸웠지만 지구력에서는 로마군 병사를 따라가지 못했다. 후반전에 들어갈수록 강해지는 것이 로마군의 특징이었다. 결국 네르비족의 시체가 산과 피바다를 이룬 상태에서 전투는 끝났다.


이 격전은 네르비족의 성인 남자를 전멸시켰다. 습지대로 피난했던 네르비족 노약자와 아녀자들은 카이사르에게 사절을 보내 항복을 제의했다. 사절의 말에 따르면, 600명의 유력자 가운데 살아남은 자는 불과 3명, 6만 명이었던 전사 가운데 살아남은 자는 불과 500명이었다.


카이사르는 그들에게 인질도 요구하지 않고 강화를 맺었고,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 살 권리도 인정했다. 그뿐만 아니라 인근 부족들에게 명령하여, 네르비족을 공격하거나 놀리지 못하게 했다. 카이사르가 생각하기에 전쟁을 일으키는 것 자체는 죄가 아니었다.


아투아투키족 전투


카이사르는 계속 북동쪽으로 진군했다. 네르비족의 요청에 따라 참전했던 아투아투키족 1만 5천 명은 자기네 땅으로 도망쳤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로마군에 대항할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들이 틀어박혀 있는 요새는 천연의 요해지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은 방비를 자랑하고 있었다. 주위는 절벽으로 둘러싸이고, 단 한 곳에만 300미터 너비의 완만한 비탈이 있을 뿐이었다. 이곳이 요새의 출입구로 쓰이고 있었다.


이런 교착상태를 깨뜨리려면 로마군의 기술력을 활용할 수밖에 없었다. 공병으로 바뀐 병사들이 대규모 공성용 병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비네아’가 만들어지고, ‘이동탑’이 만들어지고, ‘아리에스’(성문을 부수는 망치)도 만들어졌다.


갈리아인들은 늘 로마인의 키가 작은 것을 비웃고 있었다. 하지만 공성용 병기들이 요새를 향해 접근하기 시작하자, 그들의 빈정거림과 비웃음은 당장 사라졌다.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난생처음 보는 갖가지 대규모 병기에 얼굴이 새파래졌다.


그러나 이런 공성용 병기들은 활용되지 않은 채 끝났다. 아투아투키족이 강화를 요청하는 사절을 보내왔기 때문이다. 항복하긴 하지만, 조건이 있다는 것이었다. 무장 해제만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그 조건이었다. 사절은 자위력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카이사르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강화 교섭도 무장 해제가 이루어진 뒤에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 해도 네르비족에게 취한 것과 같은 조치는 취해주겠다. 즉 로마와 강화를 맺은 부족을 공격하는 것은 로마에 반항하는 거나 마찬가지이므로, 너희 부족을 공격하지 말라고 다른 부족들에게 명령하겠다.”


이 대답을 가지고 사절이 요새로 돌아간 뒤, 요새에서는 많은 무기가 밖으로 내던져졌다. 하지만 3분의 1은 요새 안에 남아 있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그래도 카이사르는 약속을 지켰다. 아투아투키족과의 강화는 그날로 성립되었다.


그런데 그날 밤 제3보초시, 즉 자정이 지났을 무렵, 숨겨둔 무기를 휴대한 사내들이 요새에서 빠져나와 진영에서 잠자고 있던 로마군을 습격했다. 하지만 한밤중의 격투 끝에 4천 명의 적병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요새 안으로 쫓겨 들어갔다.


이튿날 아침, 로마군은 이제 경비병도 없는 성문을 통해 요새 안으로 들어갔다. 농성하고 있던 전사와 주민들은 모두 노예로 팔렸다. 노예상인들이 카이사르에게 보고한 바에 따르면, 노예로 팔린 사람은 모두 5만 3천 명에 이르렀다.


젊은 크라수스의 활약


갈리아 북동부 일대를 평정한 카이사르에게, 1개 군단을 이끌고 대서양 연안의 갈리아 지방에 파견된 젊은 크라수스한테서 소식이 들어왔다. 베네티족을 비롯한 7개 부족을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이었다. 이들 7개 부족은 볼모를 바치고,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기로 맹세했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갈리아 전역은 카이사르의 말을 빌리면 ‘평화’로워졌다. 카이사르가 거둔 전과는 라인강 동쪽에도 전해져, 그 지방에서도 볼모를 바치고 로마를 따르겠다고 제의하는 사절을 보내왔다.


카이사르한테서 기원전 57년의 전투 보고서를 받은 로마 원로원은 15일 동안 신들에게 감사제를 올리기로 결의했다. 카이사르는 ‘지금껏 유례없는 15일 감사제’라는 말로 『갈리아 전쟁기』 제2권을 끝냈다. 폼페이우스가 미트라다테스를 무찌른 해에 원로원이 그의 공적을 찬양하여 결정한 감사제 기간은 12일이었다.


한편, 그 동안 로마에서는


카토의 키프로스 부임과 키케로의 추방으로 원로원파를 꼼짝 못하게 못박아두었던 기원전 58년과 달리,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 2년째인 기원전 57년은 원로원파가 반격에 나선 해가 되었다. 원로원파에게 반격을 허용한 요인은 몇 가지가 있다.


1. 폼페이우스의 소극적인 처신


그해 폼페이우스는 49세에 불과했다. 사랑하는 젊은 아내 율리아와의 생활에 완전히 만족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의 자기기만에 불과했다. 사실 그는 은둔하고 싶은 심경에 빠져 있었다. 로마에 나오는 일도 드물었다.


그래도 아내의 친정아버지라는 이유 때문에 노골적으로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삼두정치’로 누구보다도 이익을 얻는 것은 카이사르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 고개를 쳐들었다. 기원전 57년을 담당할 집정관 선거에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해 집정관은 원로원파 인물인 렌툴루스가 당선되었다.


2. 호민관 클로디우스의 폭주


키케로를 추방하여 원한을 푼 클로디우스는 카이사르가 지시한 것 이상의 일을 시작했다. 원로원을 못박아두는 정도가 아니라 원로원을 무시한 과격한 정책을 잇따라 성립시킨 것이다. 대중은 열광적으로 환영했지만, 이 세 가지 정책은 모두 10년 뒤에 독재관이 된 카이사르에 의해 폐지된다.


또한 호민관 취임 후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해 자비로 사경단(私警團)까지 조직했다. 이러한 클로디우스의 폭주에 폼페이우스는 눈살을 찌푸렸고, 온건하고 양심적인 이들은 등을 돌렸다. 그 결과 원로원파가 이득을 보게 되었다.


3. 카토의 귀국과 키케로의 추방 해제


카토가 키프로스에서 귀국한 것뿐이라면 원로원파를 재건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의 증조부인 대(大)카토는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를 탄핵했을 만큼 날카로운 논객으로 유명했고 유머가 풍부해서 청중을 사로잡는 능력도 뛰어났다. 그런데 소(小)카토는 필설은 날카로웠지만 유머 감각은 전혀 없었다.


49세가 된 키케로의 추방이 9개월 만에 해제된 것은 우선 그를 추방한 클로디우스의 평판이 떨어졌기 때문이고, 키케로를 만나려고도 하지 않았던 폼페이우스가 반년이 지날 무렵부터 후회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또한 기원전 57년 집정관 렌툴루스가 친구 키케로를 위해 적극적으로 운동을 벌였기 때문이다.


기원전 57년 8월 초, 민회는 집정관 두 명의 공동 발의 형태로 제출된 키케로의 추방 해제안을 가결했다. 키케로는 브린디시에 상륙한 뒤 아피아 가도를 거의 달리듯이 지나 로마로 북상했다. 그리고 9개월 만에 수도로 귀환한 날, 키케로는 시민들의 환호에 휩싸여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것 같았다.


배우는 모두 갖추어졌다. 기원전 57년의 원로원파는 ‘삼두’에게 바로 반격하는 것이 아니라 ‘삼두’ 사이, 특히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의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했다. 원로원파가 보기에,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보다 원로원파에 더 가까웠다. 카이사르는 위험한 존재였지만, 폼페이우스는 그리 위험한 존재가 아니었다.


키케로는 앞으로 5년 동안 수도 로마와 이탈리아에서 필요한 식량 확보를 폼페이우스에게 일임한다는 법안을 발의했다. 로마가 곡물을 수입하는 곳은 모두 해상 수송에 의존해야 하는 해외 속주와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식량 확보의 최고 책임자는 로마 해군의 최고 책임자를 겸하게 된다. 필요하면 상선까지 징발할 수 있었다.


이 법안이 가결되면, 폼페이우스는 자기가 원할 때 해군을 조직할 수 있는 유일한 로마인이 되는 셈이다. 이것은 50세를 앞둔 폼페이우스의 자존심을 부추겼다. 키케로가 제출한 법안은 성립되었다. 폼페이우스는 중책을 완수하도록 애쓰겠노라고 감격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면서, 로마 역사상 최초의 대권을 받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클로디우스에 의해 몰수당한 키케로의 재산을 반환하고, 불태워진 팔라티노 언덕의 저택 부지도 돌려주고, 그 부지에 저택을 신축할 비용도 국가가 변상하기로 결정하는 것도 간단한 문제였다. 키케로는 수도 로마의 최고 실력자 자리로 다시 화려하게 복귀한 것이다.


폼페이우스도 기운을 되찾았는지, 오리엔트 원정 당시부터 꿈이었던 로마 최초의 상설 극장 건축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폼페이우스 극장’(테아트룸 폼페이)이라고 불리게 되는 이 대건축물은 로마 성벽 밖에 펼쳐져 있는 ‘마르스 광장’(캄푸스 마르티우스)에 건축되기 시작했다.

기원전 57년에는 매사가 원로원파의 뜻대로 돌아가고 있었지만, 원로원파가 딱 한 가지 실수를 저질렀던 것 같다. 클로디우스가 조직한 사경단에 대항하기 위해서였다지만, 밀로라는 천박한 남자가 폭력단을 조직하도록 용인한 것이다.


수도 로마의 도심에서는 폭력사태가 일상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이것이 전쟁을 수행하면서도 수도 로마의 정보를 빠짐없이 듣고 있던 카이사르에게 반격의 구실을 주었다. 수도의 치안조차 유지하지 못하는 것은 ‘원로원 체제’의 통치력 결여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증거였다.


루카 회담


오늘날의 이탈리아 북부는 고대 로마 시대에 ‘갈리아 키살피나’(알프스 이쪽의 갈리아)라고 불리는 속주였는데, 이 땅의 통치와 방위를 담당하는 총독의 관저는 라벤나에 있었다. 기원전 56년 3월, 카이사르는 ‘삼두’의 일원인 크라수스를 라벤나에 초청했다.


그리고 3월 말, 두 사람은 함께 라벤나를 떠났다. 그들은 아이밀리아 가도를 따라 북서쪽으로 가서, 로마군 기지로 건설된 도시 모데나에서 아펜니노 산맥을 넘었다. 산맥을 남쪽으로 넘어 도착한 도시가 루카였다. 회담 장소를 루카로 결정한 것도, 회담 시기를 4월 초로 잡은 것도 피차의 형편을 고려한 결과였다.


‘식량청 장관’이 된 폼페이우스는 로마의 밀 수입처 가운데 하나인 사르데냐섬을 시찰하러 갈 예정이었고, 해상 여행이 시작되는 4월에 사르데냐섬으로 건너가기 위해 출항지도 피사로 정해놓고 있었다. 피사에서 루카까지는 평탄한 길을 따라 북쪽으로 20킬로미터만 가면 된다.

[루카 전경 출처 구글 이미지]

이때 토스카나 지방의 소도시 루카에 모인 집정관 호위병의 수가 무려 12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삼두’ 외에도 많은 요인이 참석했기 때문이다. 원로원 의원만 해도 200명이나 루카에 와 있었다. 명실상부한 정상회담에 어울리는 규모였을 것이다.


‘루카 회담’에서 합의된 사항을 그 후의 정세 변화에서 추측하면 다음과 같다. 그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43세의 카이사르가 발의하고 49세의 폼페이우스와 57세의 크라수스가 동의해서 결정되었으리라는 데에는 연구자들의 의견이 일치해 있다.


1. 기원전 55년 집정관 선거

이 선거에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둘 다 출마한다. 이를 위해 카이사르 휘하의 군단병들에게 휴가를 주어 로마로 보내 투표에 참가시키기로 결정했다. 이런 방식으로 로마 최고의 관직인 집정관 자리에서 원로원파를 몰아내자는 것이다.


2. 전직 집정관의 임지와 임기

집정관은 1년 임기가 끝나면 이듬해에는 전직 집정관 자격으로 속주 총독에 부임한다. 가이우스 그라쿠스가 만든 ‘셈프로니우스법’은 집정관의 이듬해 부임지를 집정관이 선출되기 전에 미리 원로원이 초안을 만들고 민회가 결정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루카 회담’에서는 ‘삼두’가 그것을 결정했다.


기원전 55년도 집정관을 지낼, 그러니까 기원전 54년에는 전직 집정관이 될 폼페이우스의 임지는 ‘먼 에스파냐’(히스파니아 울테리오르)와 ‘가까운 에스파냐’(히스파니아 키테리오르)라는 2개 속주, 즉 현재의 에스파냐 전체. 크라수스가 담당할 속주는 시리아. 현재의 시리아와 팔레스타인 지방에 해당한다.


게다가 두 사람의 임기는 역시 관례를 무시하고 처음부터 5년으로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갈리아 총독인 카이사르의 임기도 두 사람의 임기가 끝나는 기원전 50년 말에 맞추어 4년 더 연장하기로 했다.


루카 회담의 의미


기원전 60년 당시의 ‘삼두정치’는 폼페이우스의 군사력과 크라수스의 경제력에 카이사르의 인기(민중의 지지)를 합친 것이었던 반면, 기원전 56년의 ‘삼두정치’는 세 사람이 모두 군사력을 가짐으로써 군사동맹의 색채가 짙어졌다.


하지만 이것도 카이사르로서는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 5년이나 되는 임기, 10개 군단이나 되는 대병력은 로마의 방어선을 확립하는 데 꼭 필요한 요소였다. 세 명의 강자가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므로, 세 사람은 모두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했다.


‘루카 회담’에서 결정된 세 번째 사항은 ‘언론 대책’이다. 망명지에서 돌아온 이후, 키케로는 카이사르에게 친구와 친지들을 소개하는 편지를 보내어 그들을 갈리아에서 기용해달라고 부탁하는 일이 많았다. 카이사르는 항상 이 부탁을 흔쾌히 들어주었다.


카이사르의 키케로 대책 가운데 가장 결정적인 것은 키케로의 동생인 퀸티우스를 막료로 임명하고, 군단장이라는 중책을 맡긴 것이었다. 당시 카이사르 밑에서 싸우고 싶어 하는 젊은이들이 상류층 자제들 중에서도 계속 늘어났다. 갈리아 전쟁 참전은 일종의 유행이 되어가고 있었다.


로마의 양반집 젊은이들이 모여든 갈리아 전선에서는 겨울철이면 그리스 비극을 상연하고, 갈리아인들을 초대하여 연극을 구경시켰다고 한다. 어쨌든 갈리아 전선에 키케로의 동생이 참전한 데에는 카이사르의 냉정한 계산도 깔려 있었다. 그것은 키케로의 비위를 맞춘다기보다 실질적으로는 동생을 볼모로 잡아둔 것이다.


루카 회담의 성과


‘루카 회담’의 성과는 이런 합의 사항들이 실천에 옮겨지기 전부터, 즉 회담이 끝난 지 한 달도 지나기 전부터 확실해지기 시작했다. 태도가 불투명했던 원로원 의원들이 ‘삼두’ 쪽으로 돌아섰다. 집정관은 2명 모두, 법무관도 8명 전원, 호민관은 10명 가운데 8명을 ‘삼두’파가 차지했다. 그리고 ‘언론’도 침묵했다.


키케로는 총독에 부임한 친구 렌툴루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루카 회담’ 이후 수도 로마의 정세를 이렇게 푸념했다. “군사력과 재력을 가진 저들이 로마인의 윤리까지 지배하게 된 것은 그들의 힘이 막강해서라기보다는 그들의 적이 나약하고 저능한 탓일세. 그들은 원로원에서 거의 반대도 받지 않고 원하는 것을 얻었네.“


기원전 56년과 기원전 55년은 ‘루카 회담’의 그림자가 로마를 뒤덮고 있었기 때문인지 무척 평온하게 지나갔다. 카이사르도 수도의 정세 변화를 걱정할 필요 없이 갈리아 전쟁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무렵 카이사르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받게 된다.


갈리아 전쟁 3년째
(기원전 56년, 카이사르 44세)


[갈리아 전쟁 3년째 카이사르 경로 출처 본문]

기원전 56년의 정복을 다룬 제3권을 카이사르는 알프스 산악 부족에 대한 제압부터 기술하기 시작했다. 그는 겨울철 숙영에 들어가기 전에 막료인 갈바에게 알프스 산악 부족을 제압하라고 명령해두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알프스를 넘나들며 이루어지는 이탈리아와 갈리아의 통상을 자유롭고 안전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그는 그에게 설명했다. 이들 산악 부족은 상품을 강탈하거나 높은 통행세를 강요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남쪽의 제노바에서 이탈리아로 들어가는 길과 토리노 서쪽을 지나는 길 등 기존의 두 통로 외에, 이번에는 토리노 북쪽에서 알프스를 넘는 세 번째 길을 이탈리아와 갈리아를 잇는 새로운 통로로 개척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토리노 출처 구글 이미지]

단기적으로 보면 이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갈바가 이끄는 제12군단은 산악 부족을 제압하는 데 일단은 성공했지만, 현지에서 겨울철 숙영에 들어가자마자 3만 명이나 되는 산악 부족의 공격을 받고 철수했기 때문이다.


대서양


카이사르는 복종을 서약한 부족들이 살고 있는 갈리아 서부(오를레앙 근처)에 겨울철 숙영지를 설치하고, ‘삼두’의 일원인 크라수스의 맏아들 푸블리우스 크라수스에게 이곳을 맡겼다. 아버지와는 달리, 푸블리우스 크라수스는 솔개가 매를 낳았다는 말을 들을 만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늠름한 청년이었다.

[오를레앙 출처 구글 이미지]

겨울철 숙영의 가장 큰 문제는 식량을 어떻게 조달하느냐 하는 것이다. 제7군단과 함께 겨울철 숙영지를 맡고 있는 청년 크라수스는 휘하 부대장들을 주변 부족들에게 보내어 밀을 사들이게 했다. 그런데 베네티족에게 보낸 두 사람이 포로로 붙잡혀버렸다.


베네티족 해전


베네티족은 오늘날 브르타뉴 지방에 사는 부족으로서, 뛰어난 항해술로 대서양 일대에 위세를 떨치는 한편 브리타니아(오늘날의 영국)와도 교류를 하고 있는, 이 일대에서는 강력한 부족이었다.


그러자 다른 부족들도 밀을 사러 온 로마 병사들을 포로로 잡았다. 베네티족은 주변 일대에 사절을 보내 로마군에 대해 공동보조를 취하자고 호소까지 했다. 그렇게 해놓고 청년 크라수스에게 사절을 보내 단체교섭으로 인질을 교환하자고 요구한 것이다.


그들은 로마군이 군량 확보가 어려워 조만간 철수할 것으로 예측했지만 그들의 도전을 받아들인 카이사르의 결의는 더욱 강력했다. 카이사르는 8개 군단 5만 명이 채 안 되는 병력을 다섯 방면으로 나누어 전선에 배치했다.


1. 부장 라비에누스에게는 기병대를 주어 갈리아 북동부로 보낸다. 라인강과 모젤강 사이에 있는 트레베리족 영토가 목적지이나, 가는 도중에 로마의 동맹 부족인 레미족의 충성을 확인하고, 게르만인들이 이 틈을 이용하여 라인강을 넘어오면 그것을 저지하는 것이 임무였다.

2. 젊은 크라수스에게는 보병 12개 대대 7천여 명과 나머지 기병을 전부 주어 남쪽의 아퀴타니아(아키텐) 지방으로 파견한다. 이 지방의 갈리아 부족들이 대서양 연안을 따라 북상하여 베네티족을 지원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3. 막료 사비누스에게는 3개 군단을 주어 북쪽으로 파견한다. 오늘날의 노르망디 지방에 사는 베넬리족을 제압하기 위해서다.

4. 카이사르가 깊은 애정을 담아 ‘젊은 브루투스’라고 기록한 데키우스 브루투스는 선단을 이끌고 바다 쪽에서 베네티족을 공격하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5. 카이사르 자신은 나머지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육지 쪽에서 베네티족을 공격한다.


5개 방면의 전선 가운데 적과 싸우는 일이 가장 적었던 것은 카이사르가 이끄는 보병 군단이다. 현지에 도착한 뒤 조사한 결과, 적이 틀어박혀 있는 요새에 육지 쪽에서 접근하기는 거의 불가능하고, 해군이 도착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브루타뉴와 생말로(위) 몽생미쉘(아래) 출처 구글 이미지]

여름이 끝날 무렵에야 이윽고 카이사르 앞에 로마 해군이 모습을 나타냈다. 로마 해군은 지중해 항해에나 적합한 갤리선이었다. 반면에 베네티족의 배들은 높고 튼튼해서, 로마 선박이 부딪쳐도 꿈적하지 않았다. 하지만 갈리아 선박들은 범선이어서 돛이 생명이었고, 28세의 젊은 지휘관은 여기에 과녁을 좁혔다.


적군은 대형 선박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면서 높은 곳에서 화살을 쏘아대는 반면, 로마 해군은 적선과 부딪치면 자기 배가 파괴되기 때문에 접근조차 마음대로 못하는 형편이었다. 하지만 결사적으로 접근한 로마 선박에서 투척된 신병기가 활약하기 시작하자 전황은 일변했다.


그것은 길고 튼튼한 밧줄 끝에 낫을 매단 것이었다. 원래는 성을 공격할 때 성벽에 매달리기 위해 사용하는 병기다. 기원전 56년의 해전 때는 날을 날카롭게 갈았다. 적선의 돛줄을 잘라버리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로마 병사들은 적선에 접근하여 돛줄에 걸리도록 이 날카로운 낫을 던졌다.


그리고 돛줄이 잘려 꼼짝 못하고 있는 갈리아의 대형 선박을 로마의 중형 갤리선들이 둘러싼다. 적선으로 옮겨 타기만 하면 지상전이나 마찬가지다. 그다음은 카이사르의 말대로 “병사 개개인의 전투력으로 승부가 결정”되는 것이다. 일단 백병전이 벌어지면 로마 병사들은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로마가 대서양에서 벌인 첫 번째 해전은 오전 10시부터 해질녘까지 계속되어 로마의 완승으로 끝났다. 적선 가운데 도망칠 수 있었던 배는 고작 몇 척뿐이었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은 청년 브루투스를 해전 전문가로 받들었다.


이 해전 결과는 베네티족의 전투력을 뿌리째 뽑아버렸을 뿐 아니라 지원하러 달려온 다른 연안 부족들의 세력도 크게 약화시켰다. 그들은 전사만이 아니라 선박도 잃어버렸다. 대서양에서 북해에 걸쳐 있는 주민들이 로마에 굴복했다. 그들은 카이사르에게 사절을 보내 투항의 뜻을 전했다.


카이사르는 연안 부족들을 선동하여 공동투쟁으로 이끌고 간 베네티족에게는 준엄한 대가를 치르게 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그 이유를 “외교관계를 존중하지 않는 것이 잘못임을 야만인들에게 깨닫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카이사르는 그 부족의 장로들을 사형에 처하고, 주민들은 모두 노예로 팔아버렸다.


아키텐 지방 평정


그동안 동쪽과 북쪽으로 파견된 라비에누스와 사비누스의 군단들도 순조롭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태여 총독이 나설 필요도 없었다. 젊은 크라수스 역시 면적은 좁지만 인구가 많고 그래서 카이사르가 갈리아의 3분의 1을 차지한다고 본 아키텐 지방(중심지 보르도)에 할거해 있는 여러 부족을 차례로 평정했다.

[아키텐 지역과 보르도 출처 구글 이미지]

모리니족과 메나피족


여름이 끝날 무렵 베네티족에 대한 처리를 끝낸 카이사르는 겨울철 숙영에 들어가기 전에 한 가지 일을 마무리짓기로 결정했다. 베네티족에게 지원군을 파견한 모리니족과 메나피족을 제압하러 가기로 결심했다. 그들은 오늘날의 벨기에에서 네덜란드 남부에 걸쳐 살고 있었는데, 오직 그들만이 복종의 뜻을 전하지 않았다.


이 지방에 살고 있는 게르만계 갈리아인은 로마군이 접근해 오는 것을 알고, 재물과 주민 모두를 숲속 깊이 숨겨놓고 기다렸다. 그래서 도착한 로마군 병사들에게 적의 모습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진영 설치를 시작하자마자 어디선가 나타나 습격해왔다. 카이사르는 숲을 끝에서부터 차례대로 베라고 명령했다.


벌채된 나무들은 당장 방책을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하지만 숲속에 뚫린 길을 전진하는 로마군은 적이 숨겨둔 식량이나 가축은 손에 넣을 수 있었지만, 적병은 더 깊은 숲속으로 도망쳐 들어갈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원래 기후가 좋지 않은 이 지방에서는 당연한 일이지만, 비가 내리고 삭풍이 몰아치는 계절이 찾아왔다.


이에 카이사르는 퇴각을 결심한다. 진격이라기보다는 현지 답사에 가까운 이번 원정에서 카이사르는 한 가지를 깨달았다. 라인강 서쪽의 갈리아를 안정시키려면 아무래도 게르만인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이듬해의 전쟁으로 이어졌다.


갈리아 전쟁 4년째
(기원전 55년, 카이사르 45세)
[갈리아 전쟁 4년째 카이사르 경로 출처 본문]


기원전 55년은 루카 회담에서 합의한 대로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가 집정관을 맡는 해다. 카이사르는 예년과 마찬가지로 알프스 너머 남쪽으로 내려가 속주를 통치하며 겨울을 났지만, 여느 때보다 일찍 갈리아로 돌아갔다. 게르만 두 개의 약소 부족이 라인강을 건너 서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수에비족과 우비족


게르만인 가운데 가장 강한 부족은 라인강 중류의 동부 지역에 널리 퍼져 살고 있는 수에비족이다. 수에비족은 100개의 공동체로 나뉘어 있는데, 해마다 각 공동체에서 1천 명씩 전사를 징집하여 군대를 편성한다. 총병력은 무려 10만 명에 이른다. 이 10만 명이 국외 침공 요원이다.


라인강 동쪽의 게르만인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부족은 수에비족보다 상류에 살고 있는 우비족이다. 이 부족은 갈리아인들과 교류도 많고 수에비족보다 개화되어 있었다. 수에비족은 우비족한테도 몇 번이나 싸움을 걸었지만, 인구가 너무 많아서 쫓아내지도 못하고 해마다 공물을 받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수에비족의 침략 행위가 라인강 하류, 즉 북쪽에 집중된 것도, 남쪽의 우비족에 대한 정복을 단념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수에비족의 침공을 집중적으로 받게 된 우시페테스족과 텐크테리족이 라인강을 건너 갈리아 쪽으로 몰려든 것이다.


이런 사정을 알게 된 카이사르는 게르만인과 싸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진짜 목적은 라인강 동쪽을 제패하는 것이 아니라, 변덕스러운 갈리아인들이 또다시 변덕을 부리지 않도록 미리 손을 써두는 데 있었다. 갈리아인은 소문의 노예이기 때문에 문제가 커지기 전에 조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군단의 행군 방향이 동쪽임을 분명히 했다. 노르망디 지방의 겨울철 숙영지를 출발하여, 센강을 건넌 뒤에도 계속 북동쪽으로 나아가 벨기에를 횡단하고 네덜란드 남부를 가로지른 다음, 독일 북서부에서 라인강에 이르는 행군로다. 게르만인이 표적이라는 것은 누가 보아도 분명했다.


우시페테스족과 텐크테리족 전투


카이사르의 접근을 알게 된 우시페테스족과 텐크테리족은 카이사르에게 사절을 보내왔다. 카이사르는 자기 땅도 지키지 못하는 주제에 라인강 서쪽으로 이주하는 것은 인정할 수 없다면서, 우비족을 설득해서 땅을 나누어주도록 할 테니 거기에 살면 된다고 대답했다.


그 후에도 교섭은 두 번 더 이루어졌다. 그런데 교섭과 진격이 진행되고 있을 때, 게르만 기병대가 로마 기병대를 기습했고, 허를 찔린 로마군이 기병을 74기나 잃는 사고가 일어났다. 일이 여기에 이르자 카이사르는 화친 쪽을 포기했다.


그날 현재, 적과의 거리는 12킬로미터였다. 딱한 것은 그 이튿날 아침에 어제의 사고를 변명하고 사죄하러 카이사르를 찾아온 두 게르만 부족의 장로들이었다. 카이사르는 이들을 붙잡아두라고 명령하고, 휘하 군대를 이끌고 진영을 떠났다.


로마군의 행군 속도는 전투를 앞두지 않은 평시에도 한 시간에 5킬로미터다. 두 게르만 부족의 숙영지까지는 두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게르만 부족은 모든 점에서 허를 찔렸다. 허둥대며 달아난 자들은 라인강 쪽으로 몰려갔지만, 강을 눈앞에 두고 수많은 게르만인이 목숨을 잃었다.


게르만인 살육을 끝내고 진영으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붙잡아두었던 장로들을 석방하라고 명령했다. 하지만 자기네 부족의 운명을 알게 된 그들은 석방되더라도 주변 갈리아인들에게 보복당할 것이 두려워, 카이사르 밑에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다. 카이사르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도록 허락했다.


그리고는 쉴 틈도 없이 라인강 도하작전에 들어갔다.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로마인이 라인강을 건너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라인강 도하는 무엇보다도 게르만인과 갈리아인을 둘 다 시야에 넣고 이루어지는 선전이다. 미개인에게 선풍적인 효과를 주는 것은 바로 로마인이 가진 기술력이었다.


라인강 도하 작전


카이사르는 이때까지 아무도 생각지 않았던 도하 방법을 생각했다. 폭이 넓고 흐름도 빠른 이 강에 다리를 놓아, 그 다리를 건너 게르만인 영토로 쳐들어간다는 생각이다. 그는 이 ‘명예로운’ 도하 방법을 실현할 다리의 구조와 건설법을 마치 현장 감독이라도 된 것처럼 생생하고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라인강 최초의 다리인 이 다리가 세워진 지점은 오늘날 독일의 본과 쾰른 사이로 알려져 있다. 자재가 도착한 지 열흘 뒤에 다리가 완성되었다. 카이사르는 그로부터 2년 뒤에 다시 한번 라인강 도하를 결행한다. 그때의 도하 지점도 본과 쾰른의 중간이었다.


어쨌든 로마의 기술력을 구사하여 게르만인이 난생처음 보는 다리를 라인강에 건설하는 시위는 성공을 거두었다. 게르만인은 다리 건설을 방해하지도 않고, 숲속으로 도망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다. 라인강 동쪽으로 쳐들어간 로마군은 우선 수감브리족 땅으로 갔다.


이 시점에서 이미 게르만 부족의 대다수는 카이사르에게 사절을 보내 우호와 평화를 요청했다. 카이사르는 그 전제로 인질 제공을 요구했다. 주민들이 모두 도망쳐버린 수감브리족 땅에는 촌락을 불태우는 데 필요한 며칠밖에 머물지 않았다.


그리고 카이사르를 찾아온 우비족 장로들에게는 만약 수에비족이 공격해오면 로마군이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카이사르는 라인강 동쪽에 사는 게르만인들에 대해서도 서로 이간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카이사르는 도하 목적을 상당히 달성할 수 있었다면서, 갈리아로 돌아가기로 결정했다. 다리는 그가 건넌 뒤 파괴되었다.


도버해협


그해의 카이사르는 여름도 거의 끝나가는데 또 한 번 선풍적인 진격을 시도했다. 도버해협을 건너 브리타니아를 침공한 것이다. 이것도 역시 로마인으로서는 최초의 모험이었다. 갈리아 전투에는 항상 브리타니아의 지원이 있었기 때문에 그 지원을 차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카이사르가 설명한 브리타니아 침공 이유이다.


선단 준비가 갖추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브리타니아 부족들이 카이사르에게 사절을 보내왔다. 로마의 패권을 인정하고, 그 증거로 볼모를 바치겠다는 뜻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카이사르는 그 제의를 받아들이고, 사절이 브리타니아로 돌아갈 때 갈리아인 '콤미우스'를 동행시켰다.


브리타니아 첫 번째 원정


브리타니아에 대한 첫 번째 원정은, 병력은 제7군단과 제10군단과 기병대. 이들을 수송하기 위한 80척의 수송선의 규모였다. 그리고 18척의 수송선에는 기병대를 태우기로 했다. 이렇게 1만 명의 병력만 이끌고 간 것을 보면, 카이사르는 본격적인 원정이 아니라 현지를 조사하러 갈 작정이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카이사르는 어디서 출발했는지를 명기하지 않았지만, 고대부터 내려오는 추측에 따르면, 모리니족이 항구로 이용하고 있던 이티우스(오늘날 프랑스의 불로뉴-쉬르-메르 추정)에서 출발했을 거라고 한다. 이티우스는 갈리아(켈트)어로 내항을 의미한다.

[프랑스 불로뉴쉬르메르 항구 출처 구글 이미지]

이튿날 오전 10시, 최초의 로마 선박이 브리타니아 해안에 도착했다. 윈스턴 처칠이 대영제국의 역사는 이때부터 시작된다고 말한 기원전 55년 8월 26일이었다. 조류에 밀려 엉뚱한 해안에 도착해버린 모양이다. 좁은 해안의 배후에는 깎아지른 절벽이 솟아 있고, 그 위에서는 무장한 브리타니아인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 도버 해협의 White Cliff 출처 구글 이미지]

카이사르는 이곳에 상륙하기 적당하지 않다고 판단하고 바람과 조류가 변하기를 기다려 10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평원과 이어진 해안 앞바다에 닻을 내렸다. 하지만 병력을 태운 수송선의 밑바닥이 깊어서 해안에서 상당히 떨어진 해상에 정박할 수 밖에 없어 무거운 무기를 들고 상륙하기가 매우 힘든 상황이었다.


게다가 브리타니아인들의 방해로 군사들이 상륙을 주저하자, 제10군단의 기수(旗手)는 뱃머리에 우뚝 서서 두 손을 높이 쳐들고 큰 소리로 외쳤다. “뛰어들자, 전우들이여. 이 독수리 깃발을 적의 손에 넘겨주고 싶지 않다면, 바다로 뛰어들자. 적어도 나는 국가와 총사령관(임페라토르)에 대한 책무를 다하리라.”


이 말을 끝내자마자 기수는 바다로 뛰어들어, 군단기를 높이 쳐들고 헤엄치기 시작했다. 같은 배에 타고 있던 병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이를 본 다른 배의 병사들도 차례로 바다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브리타니아인들은 어디까지가 얕은 여울인지를 손바닥 보듯 훤히 알고 있었다. 그것을 모르는 로마군 병사들이 우왕좌왕 헤매는 것을 목격하면, 거기로 달려가 공격을 가했다.


아군이 고전하는 것을 본 카이사르는 계책을 생각해냈다. 지금까지 병기를 싣고 있던 갤리선에 병사를 태운 것이다. 이리하여 비로소 노를 저어 얕은 여울에 올라앉은 배에서 병사들이 해안으로 뛰어내리는 상륙작전이 전개되었다.


육지에 발이 닿으면 싸움은 로마군 병사들의 특기다. 당장 진형이 갖추어지고 지휘체계도 분명해진 상태에서 공격이 개시되었다. 브리타니아인들은 패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좋은 기회는 결국 활용되지 못하고 말았다. 추격에 필요한 기병대를 실은 선단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도망친 브리타니아인들은 카이사르에게 사절을 보내왔다. 인질도 바치고 명령에도 복종하겠다는 것이다. 사절과 함께 카이사르가 사전 공작을 위해 파견해둔 갈리아 부족장 콤미우스도 돌아왔다. 브리타니아에는 도착했지만 외교 교섭은 시작도 못한 채 포로로 잡혀 있다가 이제야 석방된 것이다.

[카이사르의 1차 브리타니아 원정 출처 구글 이미지]

카이사르는 강화 제의를 간단히 수락했다. 기병대를 실은 배 16척이 브리타니아 해안을 눈앞에 두고 폭풍을 만나거나 조류에 밀려 결국 돌아갔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기병대도 없이 2개 군단 1만 명과 함께 적지에 남겨진 셈이다. 게다가 비축된 군량도 적고 군량을 비축할 수단도 강구해 두지 않은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로마군의 곤란한 실정을 재빨리 알아차린 브리타니아 부족들은 복종의 맹세 따위는 휴지처럼 내던지고, 로마군이 다시는 브리타니아를 침공할 엄두도 내지 못하도록 총력을 기울여 로마군을 격퇴하자는 데 의견이 일치했다.


카이사르는 일단 심하게 파손된 배는 희생하기로 하고, 그 배에서 재활용할 수 있는 자재는 다른 배를 수리하는 데 쓰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이 작업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브리타니아인들이 로마군을 공격해 왔다. 진영을 공격한 것이 아니라 군량을 조달하러 나간 제7군단을 습격한 것이다.


하지만 카이사르가 워낙 신속하게 도착한데다, 그가 이끌고 온 제10군단의 용맹 앞에서는 브리타니아의 전차들도 대항하지 못했다. 브리타니아 병사들은 전차에 뛰어올라 도망쳤다. 하지만 기병대가 없는 카이사르는 추격할 수도 없었다. 그는 전군을 이끌고 진영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브리타니아인들은 다시금 공세로 나왔다. 이번에는 로마군 진영을 직접 공격해왔다. 카이사르는 2개 군단을 거의 다 투입하여, 진영 앞에 진을 치고 맞아 싸웠다. 적은 패주했고, 로마군 병사들은 가능한 한 추격하여 많은 적병을 죽이고 곡물 창고를 불태웠다.


마지막 승리 후 카이사르는 브리타니아인들에게 볼모를 갈리아로 보내라고 명령하고 갈리아로 복귀하기로 결정했다. 귀로는 순탄해서, 조금 남쪽으로 떠내려가 다른 항구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던 두 척을 제외하고는 모두 무사히 이티우스 항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카이사르의 이동 경로 출처 구글 이미지]

첫 번째 브리타니아 원정은 현지 답사로는 성공이었지만 원정으로는 실패였다. 하지만 라인강을 건너고 로마인이 들어본 적도 없는 브리타니아에 원정하는 등 카이사르가 이룩한 그해의 업적은 로마인들에게 충격과 흥분을 주기에 충분했다. 원로원도 전례없는 20일 감사제를 신들에게 올리기로 결의했다.


수도 개조의 첫걸음


카이사르가 거의 1년 내내 자리를 비우면서도 무난하게 속주를 통치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가진 조직력 덕택이었다. 속주에서는 현지인을 적극 등용하고, 아직 속주로 편입되지 않은 갈리아 중부와 북부에서도 그에게 복종을 맹세하고 그와 동맹을 맺은 부족들의 내정에는 일절 간섭하지 않았다. 반대로 수도 로마에서의 그의 대리인으로는 속주 출신 인재를 주저없이 등용했다.


이 개인 비서진의 대표자가 발부스와 오피우스인데, 기원전 54년에 접어들어 겨우 라벤나의 겨울철 숙영지에 눌러앉을 수 있었던 카이사르를 자주 찾아온 것도 이 두 사람이었다. 그들이 자주 찾아온 이유는, 폼페이우스가 로마 최초의 상설 극장과 거기에 딸린 대회랑을 건축한 데 자극을 받았기 때문인지, 카이사르가 포로 로마노를 확대하는 도시 개조계획에 착수했기 때문이다.


로마 정치의 중심은 포로 로마노인데, 거기에 있는 신전이나 회당들은 세월의 흐름과 함께 훌륭한 건물로 바뀌었어도, 포로 로마노 자체의 규모는 이곳을 로마의 중심으로 결정한 500년 전의 제5대 임금 타르퀴니우스 시대와 별차이가 없었다. 이래서는 ‘세계의 수도’가 되어가고 있는 로마의 중심으로는 너무 빈약할뿐더러 기능도 충분히 수행할 수 없었다. 카이사르는 그것을 북쪽 방향으로 확장할 생각이었다.

[포로 로마노 복원도와 현재 모습 출처 나무위키]

그러나 카이사르가 겨냥한 포로 로마노의 북쪽도 빈터였던 것은 아니다. 그 일대는 가게와 인가로 메워져 있었다. 카이사르는 수도에 어울리는 재개발 사업을 목표로 삼았으니까, 수부라 지구의 상점처럼 가게와 주택이 붙어 있는 복합 건물은 곤란하다. 그래서 부지 매입이라는 문제가 발생했다. 당시 그는 6천만 세스테르티우스나 되는 거금을 들였던 것으로 보인다(당시 노예값의 평균치가 200 세스테르티우스였다고 한다).


이 재원의 출처는 명확하지 않으나 카이사르가 정복한 갈리아를 ‘문명화’해서 로마 상인들에게 개방하면서 그 이권을 팔았던 것으로 보인다. 갈리아를 정복하자마자 그는 치밀한 통치체제를 만들고 세제까지 정비하여 방종한 이윤 추구에 제동을 걸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속된 말로 삥땅을 치는 짓은 그만두지 않았다.


카이사르가 이 무렵부터 이미 또 다른 공공사업을 계획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성벽 밖의 마르스 광장에 선거장으로 사용할 ‘사에프타 율리아’라는 대회랑을 건설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기원전 2세기 전반에 포에니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를 찾아왔던 공공사업 러시가 기원전 1세기 중엽에 다시 찾아오고 있었다.


어쨌든 카이사르는 강탈도 하지 않고 무거운 세금도 부과하지 않고 부자가 되는 길을 개발한 셈이다. 예술가는 위대하다. 저속한 것을 이렇게 고양시키고, 두 개의 모순되는 개념을 더한층 높은 차원에서 조화시켜 하나로 통일하는 일까지도 거침없이 해내고 있으니 말이다.


<3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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