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 지음
《정의란 무엇인가(Justice)》는 정치 철학자이자 하버드 대학교 인문과학부(Faculty of Arts and Science) 교수인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이 2009년에 내놓은 그의 대표적인 스테디셀러 명저이다.
그는 27세에 하버드 대학교수가 되고 29세에 자유주의 이론의 대가인 ‘존 롤스’의 《정의론(1971)》을 비판한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Liberalism and the Limits of Justice, 1982)》를 발표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물론 학자들 사이에서 현대 정의론의 최고 저작은 존 롤스의 《정의론》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그 책은 '자유주의' 정의론의 입장을 주장하면서 내용이 좀 방대하고 난해해서 브런치로 정리하기가 쉽지 않아 보였다;;;.
그에 반해 이 책은 '공동체주의' 입장이긴 하지만, 강의 형식으로 기존 이론들까지 체계적으로 잘 정리하면서 최근(물론 2009년 전까지이긴 하지만) 정치 상황까지 모두 다루고 있어 아무래도 이 책으로 정리하는게 좀 더 의미 있을 것 같다.
어쨌든 마이클 샌델 교수의 하버드 대학교 수업은 여전히 수강신청에 성공하지 못한 학생들까지 몰려드는 바람에 더 넓은 강의실로 장소를 옮겨야 하는 해프닝이 벌어질 정도로 학생들 사이에서 최고의 명강의로 꼽힌다고 한다.
이 책은 2009년 미국에서 출판 당시 10만 부 남짓 팔리는 정도였으나, 우리나라에서 유독 크게 인기를 끌어 2010년 7월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면서 인문학 서적으로는 드물게 100만 부를 돌파했으며, 현재까지도 꾸준히 팔려 누적 판매부수가 200만 부를 넘었다고 한다.
2010년 초판은 김영사에서 출판되었는데 2014년 출판사가 와이즈베리로 바뀌면서 여러 말들이 많았던 것 같다. 어쨌든 출판사가 바뀌면서 숭실대학교 철학과 김선욱 교수가 감수를 하며 오역을 바로 잡고 번역도 상당히 바뀌었다고 한다(이 브런치 글의 표지 사진은 2010년도에 처음 읽었던 ‘김영사판’을 올렸지만 내용은 최근에 다시 구입한 ‘와이즈베리판’을 기준으로 정리하기로 한다).
이 책은 근현대 윤리학과 정치철학에 해당하는 공리주의, 자유주의, 공동체주의를 둘러싼 여러 논쟁의 핵심을 유명한 베이비 M 사례부터 트롤리 딜레마 등의 이해하기 쉬운 사례 등을 들며 강의 형식으로 풀어놓아 철학이나 윤리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꽤 흥미롭게 볼 수 있도록 쓰여 있다.
여기에 이 책이 나올 당시 우리나라 국민들의, 경제 민주화나 여러 가지 복잡한 사회 정의에 대해 뭔가 답을 얻고 싶었던 갈망이 컸던 점이나 마이클 샌델교수의 하버드 대학 실제 강의를 온라인과 TV 등을 통해 직접 볼 수 있었던 점 등이 더해져 이 책이 그렇게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의 표지에 ‘키쿠에게, 사랑을 담아’라고 쓰여 있는데, 여기서 ‘키쿠’는 마이클 샌델의 부인이자 사회학자 겸 동화작가인 ‘키쿠 아다토(Kiku Adatto)’이다. 그녀는 사회학 박사이자 하버드 학부에서 아동 연구 책임자로 근무했으며, 2020년 11월, 그녀가 지은 동화책 《바바얀과 마법의 별》이 우리나라에 출판되었다.
마이클 샌델은 2011년 세계지식포럼 등 다양한 외부 강연 등을 하면서, 그 후로도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민주주의의 불만》, 《왜 도덕인가》, 《공정하다는 착각》 등을 꾸준히 출간하는 등 여전히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책이 나온 직후인 2010년에는 아산정책연구원에서 마이클 샌델 교수를 초청하여 서울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공개 강연을 열었고, 다시 2012년에는 연세대학교 노천강당에서 약 1만 5천 명이 참석한 가운데 또 한 번 공개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저자의 한국어판 서문에서 이 강연들이 인상 깊었다고 특별히 언급하고 있다).
마이클 샌델(영어: Michael J. Sandel, 1953년~)은 미국 미네소타주의 최대 도시인 미니애폴리스에서 유태인 집안의 첫 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1975년에 파이·베타·카파의 회원으로 브랜다이스 대학교를 졸업하고, 로즈 장학금으로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 베일리얼 칼리지에서 찰스 테일러의 지도를 받으며 박사 학위를 얻었다.
팰리세이드 고등학교 학생회장이던 시절, 마침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로널드 레이건이 이웃에 살고 있었는데, 그의 집을 찾아가 그가 좋아한다는 젤리빈 3kg를 토론회 초청장과 함께 전달했고, 결국 레이건를 초청하여 학교 강당에 2천여 명의 학생들을 모아 놓고 베트남 전쟁, UN에 대한 입장 차이, 사회보장제도, 18세 선거권 등에 대해 토론회를 개최했다고 한다.
오늘날 그는 대표적인 공동체주의자, 공화주의자이며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가로 유명하다. 현재 미국 예술 및 과학 아카데미(the American Academy of Arts and Sciences)의 특별 연구원으로 선출되어 활동하고 있으며, 미국 하버드 대학 교수로 재임 중이다.
[출처 위키백과, 나무위키]
제1장 정의란 옮고 그름을 판단하는 문제일까?*
(Doing the right thing)
* 제1장 제목의 번역은 김영사판에서는 ‘Doing the right thing’을 직역하여 '옳은 일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와이즈베리판에서는 상당히 의역하여 위와 같이 되어 있다.
2004년 여름 허리케인 찰리가 플로리다를 휩쓸었는데 이로 인해 22명의 인명 피해와 110억 달러의 재산 피해가 발생하였다. 그 직후 올랜도의 어느 주유소는 2달러짜리 얼음 한 봉지를 10달러씩 받고 팔았고, 쓰러진 나무들을 치우느라 전기톱을 사거나 지붕을 수리하려는 사람들도 크게 늘었는데 평소 250달러 하던 발전기를 2천 달러에 팔거나 모텔 투숙비가 평소 40달러에서 160달러로 오르는 등 엄청난 바가지요금을 요구하는 업자들이 나타났다.
이에 USA 투데이는 ‘태풍 뒤에 찾아온 약탈자들’이라는 문구를 헤드라인으로 장식했고, 대중들은 “다른 사람의 어렵고 불행한 처지를 이용해 한몫 챙기려는 행동은 옳지 않다”고 분통을 터트렸다.
플로리다에는 가격 폭리를 금지하는 법이 있었기에 주 법무장관실에는 2천 건이 넘는 신고가 접수되었고 법무장관 찰리 크리스트(Charlie Crist)가 이를 집행하려 하자 일부 경제학자들은 해당 법과 대중의 분노가 오해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하면서 이를 반대했다.
자유 시장 경제를 지지하는 경제학자 토머스 소웰(Thomas Sowell)은 가격 폭리라는 표현은 “감정적으로는 중요하겠지만 경제학적으로는 무의미한 표현이다. 이러한 비난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가격 수준보다 현저히 가격이 높아질 때 생겨나는데, ‘사람들에게 익숙한 가격 수준’이라는 것도 다양한 시장 상황에서 형성되는 다른 가격과 마찬가지로 “특별하거나 ‘공정한 가격’이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친시장 평론가 제프 저코비(Jeff Jacoby)도 “시장이 감내할 수 있는 가격을 매기는 것은 폭리가 아니다. 탐욕스럽거나 뻔뻔스러운 행동도 아니다. 자유 사회에서 재화와 용역이 배분되는 방식일 뿐이다.”라고 가격폭리방지법에 반대하는 주장을 폈다. "물론 가격 급등은 허리케인으로 혼란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특히 화나는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자유 시장에 대한 개입을 정당화할 수 없다."고 이야기했다.
이에 반해 주 법무장관 크리스트는 어려운 처지에 빠진 주민들을 상대로 불공정한 가격을 청구하는 상인들을 정부는 그저 구경만 하고 있을 수 없다고 하면서, 현재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현재는 자발적 구매자들이 자유롭게 시장에 들어가 자발적 판매자를 만나고, 가격이 수요와 공급에 따라 결정되는 정상적인 자유 시장 상황이 아니다. 비상 상황에서 압력을 받는 구매자들에게 자유는 없다. 안전한 숙소와 같은 생필품의 구매는 강제되고 있다.
위 논쟁은, 법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며, 사회는 어떻게 조직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이기도 하다. 곧 ‘정의’에 대한 물음이다.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정의의 의미를 알아보아야 한다.
정의에 대해 시장 논리를 앞세우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복지와 자유를 중요시 여긴다. 즉, 시장은 사람들이 원하는 물건을 공급하기 위해 열심히 일하도록 공급업자들에게 동기를 부여함으로써 사회 전체의 복지(여기서는 ‘경제적 번영’의 의미)를 증가시키며, 시장은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기 때문에 사람들 스스로 자신이 교환하고자 하는 것에 가치를 매기도록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 반대 입장에서는, 어려운 시기에 과도한 가격 인상은 사회 전체의 복지를 늘리는 데 기여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복지의 총량을 측정할 때는 비상시에 가격 폭등으로 생필품을 구매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통도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어떤 상황에서는 자유 시장이 실제로는 자유롭지 못하다는 논리를 내세운다.
한편 가격폭리방지법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대개 복지나 자유보다 더 본능적인 감정에서 비롯된다. 사람들은 타인의 절박함을 먹잇감으로 삼는 ‘약탈자’에게 분노하며 그들에게 뜻밖의 횡재를 안겨 주기보다는 처벌하고 싶어 한다. 이는 단순한 비이성적 분노라기보다는 ‘이익이 취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 폭리를 얻는다고 생각되어 느껴지는 특별한 종류의 분노, 즉 정의롭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다.
샌델은 이 논쟁은 단순히 복지와 자유에 관한 것이 아니라 미덕에 관한, 즉 좋은 사회의 기반이 되는 태도와 기질, 인격을 길러 내는 일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고 이야기한다.
이런 딜레마는 정치 철학의 중요한 문제 하나를 드러낸다. 정의로운 사회라면 시민에게 미덕을 장려해야 할까, 아니면 법이 비덕을 둘러싼 서로 다른 견해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면서 시민들 스스로 최선의 삶을 선택하도록 해야 할까?
교과서적 설명에 따르면, 이 질문을 기준으로 고대 정치사상과 근대 정치사상을 구분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 B.C. 322)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마땅히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을 주는 것이 정의라고 가르친다. 그는 법이란 좋은 삶을 묻는 질문에 중립적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반대로 근대 정치 철학자들(18세기의 이마누엘 칸트부터 20세기의 존 롤스에 이르기까지)은 우리의 권리를 규정하는 정의의 원칙은 무엇이 미덕이며 최선의 삶의 방식인가에 대한 주관적 견해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개인이 각자 생각하는 좋은 삶을 스스로 선택할 자유를 존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위 묘석의 글은 《실천이성비판》 말미의 유명한 구절이다.
“빈번히 그리고 끊임없이 생각에 깊이 잠길수록 두 가지가 더욱 새롭고 점점 커지는 경탄과 외경으로 내 마음을 채운다. 그것은 내 머리 위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다.”
(영어 번역: "Two things fill the mind with ever new and increasing admiration and awe, the more often and steadily we reflect upon them: the starry heavens above me and the moral law within me.")
하지만 샌델은 이런 식의 이분법적인 대조는 오해를 불러올 수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정치를 움직이는 정의에 관한 주장들은 보다 복잡하기 때문이다.
우리 대부분은 겉으로는 경제적 풍요와 개인의 자유를 존중하지만 그 이면에는 명예와 포상을 누릴 미덕이 무엇이며 좋은 사회가 장려해야 할 생활 방식이 무엇인가를 판단하고자 하는 일련의 또 다른 신념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두 가지 견해는 때때로 서로 경쟁한다.
어떤 주제들은 미덕과 명예의 문제임이 너무 확실한 경우가 있다. 1932년 이래 미군은 전투 중 적의 군사 행동으로 다치거나 사망한 군인에게 훈장을 수여해 왔다. 이 훈장을 받은 사람들은 명예뿐만 아니라 재향군인병원을 이용할 수 있는 특전을 얻게 된다.
그런데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진단을 받아 작은 악몽, 심각한 우울증, 자살 시도 등으로 치료를 받는 참전 용사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이들에게도 상이군인 훈장을 수여해야 하는지에 대해 논쟁이 있다.
미 국방부는 이 문제를 연구한 뒤, 상이군인 훈장 대상은 신체적 손상을 입은 군인으로 한정한다고 2009년에 발표했다. 이들은 정부가 지원하는 치료와 장애 보상은 받을 수 있지만 훈장은 받지 못한다.
국방부가 내세운 이유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적이 군사 행동을 통해 의도적으로 일으킨 것이 아니며, 객관적으로 진단하기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논쟁이 확산되면서, 훈장의 의미와 훈장이 기리는 미덕이 문제의 핵심이 되었다. 상이군인훈장협의회(Military Order of Purple Heart)는 훈장 대상을 정신적 부상까지 확대할 경우 훈장의 영예가 빛바래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즉 ‘피를 흘린’ 것이 훈장의 자격 요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외상 후 스트레스를 일종의 나약함으로 여기는 군대의 뿌리 깊은 사고를 반대 의견의 원인으로 지적하는 견해도 있었다. 결국 이 논쟁의 핵심에는 도덕과 군인의 용맹이라는 서로 다른 생각이 다투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정의와 관련된 대부분의 논란은 번영의 열매나 고난의 짐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지, 그리고 시민의 기본권을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2008~2009년에 발생한 금융 위기에 대한 대중의 분노가 그러한 예이다.
2008년 10월 주택 가격의 거품이 꺼지면서 월스트리트의 은행 및 금융 기관들은 주택 담보 대출에 기반한 복잡한 투자를 해 왔기 때문에 벼랑 끝에 내몰렸다. 그로 인해 일반 미국인들까지 은퇴 자금 대부분을 날리는 등 큰 피해를 입었다.
이에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은 대형 은행과 금융 기업들을 구하기 위해 7천억 달러의 구제 금융 승인을 의회에 요청했고 납세자의 돈으로 그들을 도와주는 것이 부당해 보였지만 이들이 무너지면 금융 시스템 전체가 무너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결국 의회는 구제 금융을 승인했다.
그런데 이후 지원 자금이 풀리기 시작하고 어라 안 되어, 공적 자금을 지원받은 일부 기업들이 임원들에게 수백만 달러의 보너스를 지급했다는 뉴스가 보도되었다. 특히 AIG그룹의 경우 총 1730억 달러의 공적 자금을 지원받아 되살아났음에도, 위기를 초래한 그 부서의 임원들에게 보너스로 1억 6500만 달러를 지급했고 그 밖에 73명의 직원들도 100만 달러 혹은 그 이상의 보너스를 받았다.
이에 대해 사람들의 거센 항의가 일자(AIG를 "Ain't I Greedy?"라고 조롱하기도 했다), 재무장관 티머시 가이트너(Geithner)가 AIG 최고 경영자에게 보너스 지급을 철회해 달라고 호소했으나 그는 이를 거절하면서, ("구제금융을 받기 전 이미 해놨던 약속이어서 이행하지 않으면 소송을 당하는 데다가 전체 지불금 4억5000만 달러의 일부에 불과하다": 이 부분은 책에는 없지만 당시 기사에 나온다) 만약 그 요구를 받아들이면 ”똑똑하고 능력 있는 인재들을 끌어오고 또 유지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변명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시민들의 반응은 격렬했고 미국 하원은 그들의 보너스의 90퍼센트를 세금으로 환수하는 법안을 통과시키기도 했다. 그러자 이러한 압력에 못 이겨 AIG에서는 가장 많은 보너스를 받은 20명 중 15명이 보너스를 반납하여 5천만 달러가 회수되었다고 한다. 이후 사람들은 금융권이 저질러 놓은 혼란을 정리하는 데 더는 돈을 쓰려하지 않았다.
구제 금융을 둘러싼 분노의 밑바탕에는 도적적 자격에 대한 판단이 자리 잡고 있다. 보너스를 받은 임원들은 그것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판단이 있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탐욕스럽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탐욕 비판의 문제점은 금융 위기 때 구제 금융으로 부여받은 포상과 경기가 좋았을 때 시장으로부터 부여받은 포상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즉 그들이 몇 해 전 경기가 달아올라 더 많은 포상을 받았을 때보다 더 탐욕스러워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분명한 차이점은 좋았던 시절에 받았던 보너스는 회사의 수익에서 나온 반면, 구제 금융 보너스는 납세자들로부터 왔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보너스가 납세자로부터 나온 이유는 그 기업이 실패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탐욕보다 실패에 더 엄격하다.
오바마 대통령은 구제 금융을 지원받은 기업 임원들에 대한 보수 제한 조치를 발표하면서 구제 금융을 둘러싼 분노의 진짜 원인을 잘 드러냈다.
여기는 미국입니다. 우리는 부를 폄하하지 않습니다. 성공한 사람을 탐탁하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성공은 포상받아야 한다고 확신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분노하는, 또한 마땅히 화를 내는 이유는 경영진들이 실패하고도 포상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 돈이 미국 납세자들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 대형 은행 및 투자 기업의 CEO와 고위 임원들은, 자신들은 가능한 한 모든 정보를 동원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고 주장했으며, 금융 산업의 경제적 손익이 전적으로 자신들의 노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힘에 좌우되기도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 말이 옳다면 호시절에 지나친 포상을 요구하는 행위도 제지해야 할 이유가 될 수 있다. 냉전 종식, 무역 및 자본 시장의 세계화, PC와 인터넷의 등장 등 수많은 요인이 1990년대와 21세기 초 금융 산업의 발전에 분명 기여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회가 정의로운지 알려면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소득과 부, 의무와 권리, 권력과 기회, 공직과 명예)을 어떻게 배분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정의로운 사회는 이러한 것들을 각각 자격 있는 사람에게 배분한다. 어려운 문제는 누가 무슨 이유로 그러한 자격을 갖는지 따져 보는 것이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재화를 배분하는 세 가지 접근 방식은 복지, 자유, 미덕이다. 이들은 각기 정의에 대한 서로 다른 사고를 제안하는데, 이 책은 정의에 관한 세 가지 견해의 장단점을 살펴본다.
먼저 정의란 복지의 극대화라고 생각하는 주장이다. 분명한 것은 사람들은 개인적인 차원에서나 사회적인 차원에서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삶이 더 좋은 삶이라고 생각한다. 공리주의는 복지를 극대화해야 하는 이유와 방법, 혹은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구하는 가장 영향력 있는 견해이다.
그 다음으로는 정의를 자유와 연관시키는 일련의 이론들이 있다. 이들 이론은 공통적으로 개인의 권리 존중을 강조한다. 이 접근법에는 여러 유파가 있는데 가장 치열한 정치 논쟁은 자유방임 진영과 공정성 진영에서 일어난다.
마지막으로 정의가 미덕, 좋은 삶과 연관되어 있다고 보는 이론이 있다. 이 견해는 오늘날 정치에서 문화적 보수주의, 종교적 우파로 간주된다. 이러한 발상은 이데올로기 스펙트럼 상의 다양한 정치 운동 및 주장에 영감을 불어넣었다(탈레반, 노예제 폐지론자와 마틴 루터 킹 등).
구체적인 상황에서 내리는 판단으로부터 모든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정의의 원칙을 어떻게 추론해 낼 수 있을까에 대해 두 가지 상황을 살펴보기로 한다.
사례 1: 폭주하는 전차
당신이 전차 기관사이고, 전차가 시속 100킬로미터로 철로 위를 폭주하는데 저 앞에 5명의 작업자가 서 있는 것으로 발견하였다. 하지만 브레이크가 작동하지 않는다. 이때 오른쪽으로 갈라져 나간 측선 철로가 있음을 발견했는데 그곳에는 작업자가 한 명뿐이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만약 당신이 기관사가 아니라 다리 위에서 철로를 바라보던 구경꾼이라면, 다섯 명을 구하기 위해 옆자리에 있는 덩치 큰 남자를 밀어서 철로 위로 떨어뜨려 전차를 멈추게 한다면 그 행위가 옳은 것일까?
만약 다리 위에서 위 남자를 밀지 않고 당신이 핸들만 돌려 이 남자를 철로로 떨어지게 할 수 있다면 이 경우 전차 기관사가 핸들을 틀어 방향을 바꾸는 행위보다 도적적으로 더 문제가 있는 것일까?
이러한 상황에서 도적적 신념들이 충돌하며 도덕적 딜레마가 생긴다. 좀 더 많은 생명을 구해야 한다는 원칙이 적용되는가 하면, 아무리 의도가 좋아도 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잘못이라는 또 다른 원칙이 적용되기도 한다. 상황에 따라 무엇이 더 중요하고, 무엇이 더 적절한지 가려내야 한다.
사례 2: 아프가니스탄의 염소 목동
2005년 6월, 미 해군 특수 부대 실(SEAL) 소속의 마커스 루트렐 하사관과 부대원 세 명이 오사마 빈 라덴의 측근 탈레반 지도자를 찾기 위해 파키스탄 국경 인근 아프가니스탄에서 은밀히 정찰 활동에 나섰다.
이때 염소 100마리를 몰고 가는 아프가니스탄 농부 두 명과 열네 살가량의 남자아이 한 명이 지나갔는데, 네 명의 병사는 이들을 죽일 것인지 풀어줄 것인지 고민하다가 루트렐은 양심상 그들을 죽일 수 없어 그들을 풀어주었다.
이후 한 시간 반쯤 지나 이들은 무장한 탈레반 병사들에게 포위되어 세 명이 목숨을 잃고 그들을 구출하러 온 미군 헬기 한 대까지 격추되어 군인 열여섯 명이 모두 목숨을 잃었다. 여기서 간신히 살아남은 루트렐은 염소 목동들을 풀어준 것을 후회했다(*이 사건은 이후 ‘론 서바이버’라는 영화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만약 당시 루트렐이 염소 목동들을 죽였다면 이는 위 전차의 예에서 기관차의 방향을 돌리는 것보다는 남자를 밀어 떨어뜨리는 경우에 가까울 것이다. 하지만 염소 목동들을 죽여야 한다는 주장은 결과를 놓고 보면 남자를 다리에서 밀어뜨려야 한다는 주장보다 설득력이 있다. 그들은 죄 없는 구경꾼이 아니라 탈레반에 협조하는 사람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만약 염소 목동들이 자신들에게 해를 끼칠 사람들은 아니지만 탈레반의 고문으로 미군의 위치를 발설하리라고 확신하고 염소 목동들을 죽였다면, 염소 목동들이 탈레반을 돕는 염탐꾼이었을 경우보다 더 비통했을 것이다. 그리고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되었을 것이다.
민주 사회에서 살다 보면 옮고 그름, 정의와 부당함에 관한 이견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낙태 허용, 부자 세금, 대학 입시의 소수 집단 우대 정책, 테러 용의자 고문 등이 그 예들이다.
선거에서는 어떤 견해를 지지하느냐에 따라 당락이 결정되기도 하는데, 이를 둘러싸고 소위 문화 전쟁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러한 논쟁을 벌이는 모습을 보면 도덕적 신념이 이성의 범위를 넘어 가정교육이나 신앙으로 인해 이미 정해졌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하지만 때로는 어느 한쪽의 주장에 마음이 바뀌기도 한다.
우리는 어려운 도덕적 문제에 맞닥뜨렸을 때, 흔히 옳은 행위에 대한 견해나 확신(‘전차를 측선 철로 쪽으로 틀어라’)에서 시작해서,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를 생각하며 근거가 되는 원칙(‘한 명을 희생시키더라도 여러 명의 목숨을 구하는 게 낫다’)을 찾는다. 그다음 그 원칙에 반하는 상황(‘그렇지만 남자를 다리 아래로 미는 행위는 잘못인 것 같다’)을 맞닥뜨리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혼동되는 상황을 생각하고 이를 정리해야 한다는 압박을 느끼는 것이 바로 철학으로 가는 기폭제다. 이러한 긴장에 직면했을 때 옳은 행위에 대한 판단을 재고하거나 애초에 옹호하던 원칙을 재검토할 수 있다. 그러면서 행동의 세계에서 이성의 영역으로, 다시 이성의 세계에서 행동의 세계로 마음을 돌리는 것이 바로 도덕적 사고의 근간을 형성한다.
그런데 가령 도덕적 직관과 원칙에 입각해 평생을 헌신하더라도 그것이 그저 되풀이되는 편견의 타래에 머물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확신할 수 있을까? 이에 대해 샌델은 "도덕적 사고란 홀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럿이 함께 노력하는 것"이라고 답하면서, 자기 성찰만으로는 정의의 의미나 최선의 삶의 방식을 찾을 수 없다고 한다.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일반 시민을 동굴에 갇힌 포로에 비유한다. 소크라테스는 태양을 본 철학자만이 동굴에 사는 사람들을 지배할 적임자라고 주장한다. 이는 정의의 의미와 좋은 삶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편견과 틀에 박힌 일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뜻이라고 플라톤은 지적한다.
샌델은 이 책의 목적은 정치 사상사를 다루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로 하여금 정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정립하고 비판적으로 검토하도록 만들어, 자신이 무엇을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알도록 하는 데 있다고 이야기하며 이 장을 마무리한다.
<2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