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지상과 천상의 하모니 - 천문학, 프톨레마이우스, 케플러, 뉴턴
제3장 지상과 천상의 하모니
사람과 다른 피조물이 맞게 되는 안녕과 재앙은 하나같이 일곱과 열둘의 조화에서 오는 것이다. 황도 12궁은 종교에서 이야기하듯 광명의 편에 서서 세상을 다스리는 열두 명의 장군을 일컫는다. 그리고 일곱 행성은 암흑의 편에 있는 일곱명의 장수라고 한다. 일곱 행성은 모든 피조물을 박해하고 그들을 죽음과 죄악의 구렁으로 몰아넣는다. 황도대의 열두 별자리와 일곱 행성의 조화가 세상의 모든 운명을 결정하는 것이다. - 조로아스터, 《메노크 이 크라트(‘지혜의 정신’)》
왜 인간이 하늘의 비밀을 헤아려 보려고 골머리를 썩이는지 궁금해할 필요가 없다. 자연의 현상은 다채롭기 이루 말할 수 없고, 하늘은 숨겨진 보물로 가득하다. 이는 오로지 인간의 정신이 새로운 양분을 취하는 데 모자람이 없게 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 요하네스 케플러, 《우주 현상의 신비》
칼 세이건은 다음과 같이 이 장을 시작하고 있다.
“밤하늘은 장관을 연출한다. 별들이 몇 개 모여서 하나의 모양을 이룬다. 같은 별들의 배열이지만 문화권에 따라 아주 다른 모양의 물체를 상상하고는 한다. 그 그림들은 우리가 상상해 낸 것들이다. 현대인들은 그들의 조상과 마찬가지로 별들 사이에 인류의 희망과 근심을 그리면서 바람직한 내일을 소망한다."
북두칠성을 북아메리카에서는 ‘큰 국자(The Big Dipper)’, 프랑스에서는 '캐서롤(Casserole, 찜냄비)'(01), 영국사람들은 '쟁기(The Plough)'라고 부르며(02), 중국인들은 '천상의 고위 관료'를 생각해냈다(03). 중세 유럽인들은 ‘찰스의 마차’를(04), 고대 그리스인들과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큰 곰을 연상했으며(05, 현대의 공식 명칭은 ‘큰곰자리’이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황소와 사람’(내지 신) 그리고 ‘악어를 업은 하마’의 행렬로 보았다(06).
천문학의 유적
태양과 달과 별의 움직임은 어느 정도 규칙성을 가지고 있어 별의 출몰 현상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수년에 걸쳐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다면 그 사람은 계절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하늘에는 달력의 역할을 훌륭하게 하는 표지들이 걸려 있는 셈이다.
인류의 조상은 계절의 흐름을 알아낼 수 있는 기구나 장치들을 만들어 세웠다. 뉴멕시코 주의 차코 협곡에는 11세기에 만들어진 지붕 없는 거대한 의식용 키바(Kiva), 즉 사원이 있다.
여기에는 자칭 “예스러운 사람들”이라며 자만하는 아나사지 족(Anasazi) 사람들이 태양과 달과 별의 천체 운동을 면밀하게 관찰했던 흔적이 있다(키바 높은 곳에 스물여덟 개의 벽감을 만들어 달이 별자리들 사이를 움직이다가 제자리에 돌아오는데 걸리는 일수를 계산한 것으로 보인다).
태양과 달과 별의 천체 운동과 주기를 관찰하는 개념의 기구들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 영국의 스톤헨지 유적, 이집트의 아부 심벨, 멕시코의 치첸 이차 같은 곳에서도 만나 볼 수 있다.
왜 세상 사람들은 이처럼 천문학을 배우려 했을까?
칼 세이건은 "사냥과 농업, 목축을 위한 현실적인 필요성뿐만 아니라 자연의 순환 현상을 통해 우리 조상들은 죽음 너머의 또 다른 삶을 짐작했으며, 저 높은 하늘을 영생불사의 암시로 받아들였던 것이다."라고 대답하고 있다.
점성술의 등장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신비주의와 미신이 과학의 영역을 치고 들어온다. 해와 별은 계절, 식량, 기후를 다스리고 달은 바다의 조수간만과 여러 동물의 생활 주기 그리고 인간의 월경 주기를 다스린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이러한 하늘의 여러 천체들이 모두 인간의 삶에 심오한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여겼고 점성술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점성술의 역사가 얼마나 긴지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여러 단어에서 알아볼 수 있다. 재해의 'disaster'는 그리스어로 ‘나쁜 별’, 유행성 감기의 'influenza'는 이탈리아어로 별의 ‘영향’을 뜻하는 ‘influence’에서 온 말이고, 건배를 뜻하는 ’mazeltov’는 히브리어로 ‘좋은 별자리’다.
플리니우스(Plinius)의 주장에 따르면 로마에는 ‘sideratio’라 하여 '행성에 얻어맞은'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consider'는 '행성과 함께'라는 뜻이므로 진지하게 생각할 때에는 반드시 행성을 고려했어야 했나 보다)
실제로 영국 런던의 1632년도 사망자 통계자료에 의하면 '빛의 반란'(Rising of Lights, Lights는 Lungs 폐를 뜻함)이나 '임금의 악마'(King’s Evil)와 같은 희한한 병으로 죽은 사람들도 보이고, 총 9,535명 중 13명이 행성(Planet)에 맞아 죽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은 암(Cancer, and Wolf 10명) 보다 더 높은 사망률이다;;;
칼 세이건은 ”지구 국가의 국기들 중 절반은 별, 초승달 등 천문학적 상징물들이 들어가 있다. 이것은 문화권을 초월하고 사상을 넘어서 전 세계적으로 볼 수 있는 공통적인 현상이다. 우리 시대에 한정된 현상도 아니다. 저마다 하늘의 힘과 영원무변함을 현 국가 체제에 빗대어 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프톨레마이우스의 천동설
현대인들의 점성술 풀이의 기원은 클라우디우스 프톨레마이오스(Claudius Ptolemaeus)에까지 올라간다. 그는 2세기에 알렉산드리아 대도서관에서 일하던 대학자였는데, 바빌로니아 시대부터 내려온 점성술 전통을 체계화하여 점성술 책 《테트라비브로스(Tetrabiblos)》를 저술하였다.
그는 천문학자로서, 별들에게 이름을 붙여줬고 그들의 밝기를 기록하여 목록을 만들었고 지구가 왜 구형인지 그럴듯한 이유를 제시했으며 일식이나 월식을 예측하는 공식을 확립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아마도 행성들의 이상한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우주의 모형을 제시한 것이다.
그는 하늘을 연구하면서 일종의 희열을 느꼈음에 틀림이 없다. 그는 그것을 “나는 한갓 인간으로서 하루 살고 곧 죽을 목숨임을 잘 안다. 그러나 빽빽이 들어찬 저 무수한 별들의 둥근 궤도를 즐겁게 따라가노라면 어느새 나의 두 발은 땅을 딛지 않게 된다.”라는 기록으로 표현해 놓았다.
그는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며, 태양과 달과 별들이 지구 주위를 돈다고 믿었다. 또한 그는 ‘화성의 역행’에 관하여 이를 재현할 수 있는 기계 모형을 제작할 수 있었다. 아래 그림은 당시 그가 이해한 바에 따라 화성의 역행 현상의 원리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또한 당시 사람들은 행성은 투명하고 완벽한 구의 벽면에 붙어서 지구 주위를 돈다고 상상했으나 프톨레마이오스의 모형에서는 행성이 구에 직접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회전축과 중심점이 어긋난 바퀴 비슷한 장치에 붙어 간접적으로 투명구에 부착된 형태였다.
아래 그림들은 중세 유럽의 달력과 천문도들 및 일식과 월식을 계산하는 종이 컴퓨터들이다.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
프톨레마이오스의 모형은 중세의 암흑시대에 교회의 지지를 받았고 그로부터 1,000년 동안 천문학의 진보를 가로막는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마침내 1543년 폴란드의 가톨릭 성직자였던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holaus Copernicus, 1473~1543)가 행성의 겉보기 운동을 설명하는 아주 색다른 가설을 내놓았다. 그 가설의 가장 대담한 제안은 지구가 아니라 태양이 우주의 중심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심기가 불편해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드디어 1616년 가톨릭 교회는 코페르니쿠스의 저술을 금서목록에 포함시켰다(마르틴 루터는 그를 “벼락출세한 점성술사”라고 폄하하였다고 한다).
코페르니쿠스의 원래 이름은 미콜라이 코페르닉이었다.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는 독일어 이름이었다. 1473년 폴란드 토룬에서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천문학, 수학은 물론 종교법, 경제학, 의학, 정치학 등 다양한 학문을 배웠다.
이탈리아에서 10년 동안 공부한 그는 귀국해 바르미아 주의 프롬보르쿠로 갔다. 거기에서 정치인, 경제인으로 활동하면서 한편으로는 천문학을 계속 연구해 지동설의 기초를 닦았다.
로마 교황청에 끌려가 고문을 당하거나 일찍 죽을 생각이 없었던 그는 지동설을 담은 책을 사후에 발표하기로 했다. 전설에 따르면 코페르니쿠스는 죽기 직전 지동설을 담은 책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 첫 인쇄본을 건네받았다. 그는 유작에 입을 맞춰 작별인사를 한 뒤 유언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1543년 5월 24일, 그의 나이 70세였다.
코페르니쿠스는 ‘내 무덤이 어디에 있는지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게.’라고 유언을 남긴 까닭에(나중에 지동설이 탄압을 받는 시대가 올 것이며, 그때에는 교황청이 그의 시신을 파내 훼손시킬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그의 시신이 어디에 묻혀있는지 아무에게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의 유해가 발견된 것은 500년 가까이 지난 2005년이었다. 바르샤바 북쪽 푸우투스크 고고학 연구소의 제르지 가소브스키 소장은 2004년 프롬보르쿠 성당의 자섹 제지에르스키 주교로부터 “코페르니쿠스는 우리 성당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틀림없이 성당 지하에 그의 무덤이 있고 유해가 묻혀 있을 겁니다.”라는 전화를 받았다.
이후 그는 1년 가까이 곳곳을 뒤진 끝에 성당 바닥 아래 깊숙한 곳에 숨겨진 사람 유해를 발견하여, 컴퓨터를 이용해 두개골의 얼굴을 복원하고, 스웨덴 웁살라 대학교에 보관된 코페르니쿠스 머리카락의 DNA 자료를 제공받아 그의 유해에서 채취한 DNA와 비교했는데, 결과는 ‘100% 일치’로 나타났다.
2010년 5월 22일 폴란드 정부는 코페르니쿠스 장례식을 새로 성대하게 거행했다. 장례 미사는 전직 폴란드 주재 교황대사였던 주제프 코발칙 폴란드 대주교가 집전했다. 유해는 다시 프롬보르쿠 성당에 묻혔다. 지금 그의 무덤 앞에는 지동설을 발견한 사람이라는 내용을 담은 검은색 화강암 묘비석이 서 있다. [출처 위키백과]
요하네스 케플러
중세의 과학의 암흑 시기에 한 사람의 용감하고 고독한 분투 덕분에 현대 과학에 혁명의 불이 일기 시작했다. 그는 바로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이다. 케플러는 1571년 독일에서 태어났고 소년 시절 개신교 신학교에 들어가 성직자가 되는 교육을 받았다. 그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배우면서 완전한 형상과 코스모스의 영광을 엿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때의 심경을 “기하학은 천지 창조 이전부터 있었다. 기하학은 신의 뜻과 함께 영원히 공존한다. 기하학은 천지창조의 본보기였다. 기하학은 신 그 자체이다”라고 적어 놓았다.
케플러는 1589년 성직 공부를 더하기 위해 튀빙겐 대학으로 갔고 그곳에서 사고의 자유와 해방을 만끽했다고 한다. 그중 한 교수가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에 내포된 위험한 신비를 케플러에게 알려주었고 공부를 끝내고 그는 성직자가 되기를 포기하고 오스트리아의 그라츠로 가서 중등학교의 수학교사가 되었다.
케플러 시대에 알려진 행성은 지구를 포함하여 모두 여섯 개뿐이었는데(수성, 금성, 지구, 화성, 목성과 토성), 케플러는 행성들이 홰 하필 여섯 개뿐이어야 하는가 하고 깊이 고민했고, 행성 사이의 간격이 정다면체의 수학적 특성과 연관돼 있으리라고 추측했다.
정다면체는 소위 ‘플라톤의 입체’로 알려진 다섯 가지밖에 없는데 케플러는 행성이 여섯 개밖에 없는 ‘까닭’은 가능한 정다면체가 다섯 가지뿐이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정다면체는 다른 정다면체 안에 꼭 맞게 들어갈 수 있고 그러한 관계가 태양과 행성들 사이의 거리를 결정한다고 생각하면서 이를 확인할 투명 구조물을 찾아냈다고 확신했다. 그는 이것을 ‘코스모스의 신비’라고 불렀다.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계산해도 정다면체와 행성의 궤도는 서로 일치하지 않았고, 그는 코페르니쿠스가 찾아낸 행성 간 거리가 잘못된 값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그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 당시 정확한 천체 관측 자료를 다루는 딱 한 사람인 튀코 브라헤(Tycho Brahe)를 만나기 위해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수도였던 프라하로 향했다.
튀코 브라헤
튀코 브라헤는 고국을 버린 덴마크의 귀족으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루돌프 2세의 황실 수학자로 일하고 있었다. 그는 망원경이 발명되기 35년 전부터 우주의 정확하고 질서 정연한 움직임을 측정하는데 모든 것을 바친 인물이었다.
튀코는 '인간 천문대'로 불릴 정도로 엄청나게 시력이 뛰어난 걸로 유명하다. 망원경이 없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그는 우르니보크 천문대에서 이 시력을 통해 어마어마한 양의 정밀 관측을 할 수 있었고 덕분에 천문학자로 대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래 그림과 같은 것을 만들어놓고 의자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관찰하는 것이 그 시대의 관찰 방법으로, 보는 사람과 각도를 불러주는 사람, 계산하는 인간 컴퓨터가 각각 따로 존재했다고 한다.
성격은 매우 급해서 한 번은 파르스베르크와 수학공식을 두고 서로 자신의 말이 옳음을 증명하지 못하여 결투를 벌이다 코가 날아가서 금과 은으로 만든 인조 코를 풀로 붙이고 다녔다고 했다.
케플러와 튀코는 가깝지만 호의적인 관계는 아니었는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튀코가 죽을 때까지 싸우고 화해하고를 밥 먹듯이 반복했다. 튀코는 잠재적 경쟁자인 케플러에게 조금씩 볼 수 있도록 해줬을 뿐 쉽게 자료 전체를 넘겨주려고 하지 않았다고 한다.
튀코 브라헤는 케플러를 만나고 18개월밖에 더 살지 못했다. 그는 로젠버그 남작의 만찬에 초청되었는데, 오줌이 마려웠으나 체면 때문에 오줌을 너무 오래 참다가 너무 많이 참은 나머지 오줌을 쌀 수 없을 정도의 상황으로까지 악화되어 급성 방광염에 걸려 버렸고, 이게 악화되어 11일 후인 1601년 10월 24일에 죽고 말았다.
튀코 브라헤는 숨을 거두기 전에 자신의 관측 자료를 케플러에게 물려준다고 유언했다. 그리고 마지막 밤은 가벼운 혼수상태에서 시를 짓는 사람처럼 다음의 독백을 되풀이했다. ‘내 삶은 헛되지 않게 하소서. 내가 헛된 삶을 살았다고 하지 않게 하소서!’ 그가 죽은 뒤 케플러는 황실 수학자의 자리를 물려받았고, 브라헤가 살아생전에 보여주지 않아 그토록 갈망하던 관측자료를 손에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케플러의 법칙
이후 케플러는 3년에 걸친 긴 분석 끝에 지구도 하나의 행성이고 행성들이 원이 아닌 타원곡선을 그리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고(케플러 제1법칙) 이후 제2법칙, 제3법칙을 발견하게 되었다. 케플러의 세 번째 법칙은 1619년 《세상의 조화들(The Harmonies of the World)》이라는 자신의 책에서 설명하고 있다(그래서 ‘조화의 법칙’이라고도 부른다).
행성운동에 관한 케플러의 법칙은 자연 현상에서 직접 찾아 낸 경험 법칙이었다. 그는 한발 더 나아가 더 근본적인 행성 운동의 원인을 찾고자 노력했다. 케플러는 행성 운동의 근본 원인이 자기력의 작용과 유사한 성격의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는 놀랍게도 중력 또는 만유인력의 개념을 예견했던 것이다.
여기서 내가 의도하는 바는, 천체의 작동 기제를 논함에 있어 신이 생명을 부여한 신성한 유기 생물보다 태엽이나 추 같은 동인으로 작동하는 시계 장치 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계의 운동이 시계추 단 하나에서 비롯되듯 천체들의 온갖 움직임의 거개가 극히 단순한 이 자기력 하나로 인하여 구현되는 것이다.
케플러는 지구에 적용되는 측정 가능한 물리 법칙이 천체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점을 간파했던 것이다. 그의 생각으로 말미암아 인류사에서 최초로 천체의 운동을 설명하는 데에서 신비주의가 배제되었다. 케플러는 역사의 한 꼭지점에 서서 “천문학은 물리학의 일부이다”라고 단언했다.
케플러는 자신의 업적을 겸손하게 내보일 성격의 인물이 아닌지라, 다음과 같은 말로서 자신의 발견을 평가했다.
이 소리들의 화음으로 인간은 영원을 한 시간 안에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적게나마 지극히 높으신 신의 환희를 맛보게 되었다. …… 이제 나는 이 거룩한 열광의 도가니에 나 자신을 고스란히 내어맡긴다. …… 주사위는 이미 던져졌고, 나는 펜을 들어 책을 쓴다. 나의 책을 요즘 사람들이 읽든 아니면 후세인들이 읽든, 나는 크게 상관하지 않으련다. 단 한 사람의 독자를 만나기까지 100년을 기다린다 해도 나는 결코 서운해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의 신께서 당신을 증거할 이를 만나기까지 6,000년을 기다리지 않으셨던가.
케플러가 세 번째 법칙을 발견한 지 8일째 되던 날 ‘30년 전쟁’의 도화선이 된 사건이 프라하에서 일어났고* 전쟁의 격동 속에서 가족을 모두 잃고 자신도 루터파로부터 파면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 1618년 5월 23일 가톨릭을 강요하려는 합스부르크 왕가에 저항한 보헤미아의 귀족들은 오스트리아 빈에서 온 가톨릭 사절 3명을 프라하 성의 창문 밖으로 내던졌으며, 독립 정부를 수립했다. 이 사건은 30년 전쟁이 벌어지게 된 주요 원인 중의 하나였다.
게다가 자신이 지은 ‘꿈(Somnium)’이라는 책(최초의 공상 과학 소설이라고 할 만한 책이다)이 그의 어머니 카타리나 케플러가 마녀라는 증거물로 채택되어 화형에 처할 위기에 처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동분서주하며 어머니를 구명하였으나, 이후 재정 지원처를 모두 상실하고 슐레지엔 지방의 한 마을인 사간(Sagan, 현 폴란드 자간)에서 생의 마지막 나날을 보냈다.
케플러가 스스로 지은 비문은 “어제는 하늘을 재더니 오늘 나는 어둠을 재고 있다. 나는 뜻을 하늘로 뼏쳤지만, 육신은 땅에 남는구나”였다고 한다. 그러나 30년 전쟁으로 그의 묘마저 사라졌다.
칼 세이건은 “그는 미래의 하늘에는 “천상의 바람을 잘 탈 수 있는 돛단배들이” 날아다니고 우주 공간은 “우주의 광막함을 두려워하지 않는” 탐험가들로 그득할 것이라 했다고 한다. 그의 평생에 걸친 수고로 그는 발견의 환희를 맛보았고 우리는 우주의 이정표를 얻었다.”고 그를 찬양하고 있다.
아이작 뉴턴
요하네스 케플러가 자신의 일생을 바쳐 추구한 목표는, 행성의 움직임을 이해하고 천상 세계의 조화를 밝히는 것이었다. 이러한 목표는 그가 죽고 36년이 지난 후에 결국 인류 역사상 제일가는 과학의 천재였다고 인정받는 아이작 뉴톤(Isaac Newton, 1642~1727)의 연구를 통해 결실을 맺게 된다.
1663년 스투어브릿지에서 박람회가 열렸다. 당시 스무 살이던 뉴턴은 그곳에서 “안에 무엇이 씌어 있는지 궁금해서” 점성술 책을 한 권 구입했다고 한다. 그는 그 책을 읽다가 삼각법을 몰라 도면을 이해할 수 없자, 삼각법에 관한 책을 사서 읽기 시작했고, 이번에는 기하학의 논의를 따라갈 수 없어 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론》을 구해 읽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2년 뒤에 뉴턴은 미적분학을 발명하기에 이른다.
1665년 뉴턴이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학생이 되었을 때 흑사병이 돌았고 그래서 뉴턴은 학업을 할 수 없게 되자 자신이 태어난 외딴 고향 마을인 울즈소프(Woolsthorpe)에 내려가 1666년 1년의 세월을 편히 보냈다.
그 1년 동안에 미분과 적분을 발명했고 빛의 기본 성질을 알아냈으며 만유인력의 법칙의 기반을 구축할 수 있었다고 한다(물리학의 역사에서 이와 비슷한 해를 찾는다면 아인슈타인의 기념비적 논문 세 편이 연달아 발표되어 ‘기적의 해’라고 불렸던 1905년뿐이다).
뉴턴은 관성의 법칙을 발견했고 ‘만유인력의 법칙’이라고 불리는 중력의 법칙을 통해 행성 운동에 관한 케플러의 세 가지 법칙을 유도해 낼 수 있다. 뉴턴은 《프린키피아(정식 제목: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만유인력의 법칙을 설명하기에 앞서, "나는 이제 세계의 기본 얼개를 선보이겠다."라고 자랑스럽게 선언한다.
케플러와 뉴턴은 인류 역사의 중대한 전환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이 두 사람은 비교적 단순한 수학 법칙이 자연 전체에 두루 영향을 미치고, 지상에서 적용되는 법칙이 천상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며, 인간의 사고방식과 세계가 돌아가는 방식이 서로 공명함을 밝혔다.
그들은 인간이 코스모스를 대단히 깊은 수준까지 이해할 수 있다는 확고한 증거를 제시했다. 오늘날 세계화된 우리의 문명, 우리의 세계관 그리고 현대의 우주 탐험은 전적으로 그들의 예지에 힘입은 것이다.
뉴턴은 자신이 발견한 것을 남에게 빼앗길까 늘 전전긍긍했고 동료 과학자들과 무서울 정도로 경쟁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연의 장대함과 복잡 미묘함 앞에서 뉴턴은 프톨레마이우스와 케플러와 마찬가지로 명랑하면서 또 정감 어린 겸손을 보일 줄도 알았다.
죽기 바로 전 뉴턴은 이렇게 썼다. “세상이 나를 어떤 눈으로 볼지 모른다. 그러나 내 눈에 비친 나는 어린아이와 같다. 나는 바닷가 모래밭에서 더 매끈하게 닦인 조약돌이나 더 예쁜 조개껍데기를 찾아 주우며 놀지만 거대한 진리의 바다는 온전한 미지로 내 앞에 그대로 펼쳐져 있다.”
[참고]
뉴턴 운동 법칙(Newton's laws of motion)
뉴턴 운동 법칙은 1687년에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제1권에 처음 서술되었다. 뉴턴은 이 책에서 만유인력의 법칙과 뉴턴 운동 법칙을 사용하여 케플러 법칙을 비롯한 당시 알려진 모든 천체역학을 수학적으로 유도하였다.
제1법칙: 관성의 법칙('갈릴레이 법칙'이라고도 한다)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빗면을 따라 공을 굴리는 실험을 통해 만약 마찰력이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작다면 외부 힘이 가해지지 않는 모든 물체는 일정한 속도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증명하였다. 즉, 가만히 있는 물체는 (외부 힘이 가해지지 않는 이상) 계속 가만히 있고,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는 물체는 계속 그 속도로 움직이게 된다.
제2법칙: 가속도의 법칙
물체의 운동량의 시간에 따른 변화율은 그 물체에 작용하는 힘과 (크기와 방향에 있어서) 같다. 다시 말해, 물체에 더 큰 알짜힘이 가해질수록 물체의 운동량의 변화는 더 커진다. 한 물체 A가 다른 물체 B에 힘을 가하면 이에 따라 B의 운동량을 바꿀 수 있다.
제3법칙: 작용과 반작용의 법칙
물체 A가 다른 물체 B에 힘을 가하면, 물체 B는 물체 A에 크기는 같고 방향은 반대인 힘을 동시에 가한다.
전통적으로, 제3법칙은 "모든 작용에 대해 크기는 같고 방향은 반대인 반작용이 존재한다"라고 쓴다.
<4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