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볼 영화만 09
감독: 웨스 앤더슨 (Wes Anderson)
각본: 웨스 앤더슨 (Wes Anderson)
출연: 레이프 파인스 (Ralph Fiennes), 머래이 아브라함 (F. Murray Abraham)
웨스 앤더슨 (Wes Anderson) 감독의 영화는 특별하다. 화면에서 잠시도 눈을 뗄 수가 없다. 각 장면이 수채화나 유화작품이다. 조금만 지나치면 자칫 유치해질 수 있는 한계를 절묘하게 넘어가지 않는 절제가 있다. 집착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화면 속 등장인물과 소품의 좌우 대칭과 균형을 강조한다. 대충 넘어가는 법이 없다.
스크린 위에 정교하게 설계된 '어른들을 위한 동화책'이다. 대칭 구도와 특유의 파스텔 색을 보고 있으면, 현실과는 관계없지만 그래도 어디선가는 본 듯한 세계에 발을 들인 기분이다. 정돈된 화면 속에 흐르는 인물들의 고독과 노스탤지어는 아름다운 영상미와 절묘한 대비를 이룬다.
앤더슨 감독은 디지털 기술이 아닌 아날로그적인 수작업을 고집하면서 작품에 생명력을 불어넣으며 아득한 노스탤지어가 시작 된다.
웨스 앤더슨을 향한 동료 감독들의 평가는 극과 극을 오간다. 일부 비평가들은 그의 작품이 스토리보다 시각적 스타일에 치중한다고 비판하지만, 앤더슨은 정교하게 설계된 미장센을 통해 현대 영화에서 점차 사라져 가는 고집스러운 작가 창의성의 가치를 가장 선명하게 증명하는 감독이다.
앤더슨은 대박 흥행을 기록하는 감독은 아니지만 정말로 좋아하는 팬심이 단단하며 어떤 영화를 개봉해도 그 팬들은 따라다닌다. 또 그 영화에만 단골로 기꺼이 일부러 시간을 내어 출연하는 배우들이 정해져 있을 정도다.
웨스 엔더슨이 만든 영화에는 가슴 한편이 먹먹해지는 노스탤지어가 담겨있다. 사실 노스탤지어는 내가 겪었던 과거의 일을 그리워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내가 아직 겪지는 않았어도 어딘가에는 있는 현상이나 사물에 대한 설명하기 어려운 막연한 그리움을 묘사할 때도 사용한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이런 노스탤지어를 제대로 자극하는 영화다.
세계적 기독교 이론 학자인 C.S. 루이스 (C. S. Lewis) 에게 과거에 대한 향수, 즉 '노스탤지어'는 단순한 그리움을 넘어 영원을 가리키는 신성한 신호등과 같다. 루이스는 이를 세른슈트(Sehnsucht)'라 부르며, 우리가 과거의 특정 순간이나 장소를 갈망하는 것은 사실 그 대상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투영하고 있는 '궁극적인 아름다움'을 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이 우리 내면에 존재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이 세계가 아닌 다른 세계를 위해 창조되었다는 증거라는 것이 루이스의 핵심적인 통찰이다. 결국 그에게 향수란 단순히 지나간 시간을 그리워하는 퇴행적 감정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돌아가야 할 고향, 우리가 행복하게 살다가 내몰린 본향이 있음을 알려주는 고귀한 이정표라는 것이다.
이 영화에는 사라지고 있거나 잊혀가고 있는 옛 유럽의 노스탤지어가 스며있다. 영화의 이름에 헝가리의 수도인 부다페스트 (Budapest)가 들어가 있는 것도 그 증빙이다.
이 영화를 보다 보면 1940년 7월 일제 강점기 시절 김광균 시인이 발표한 추일 서정(秋日抒情)의 시작 부분이 생각난다.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
포화(砲火)에 이지러진
도룬 시의 하늘을 생각케 한다.
길은 한 줄기 구겨진 넥타이처럼 풀어져
일광(日光)의 폭포 속으로 사라지고
조그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새로 두 시의 급행열차가 들을 달린다.
일제 강점기 시절 희망 없는 세상에서 무력한 지식인으로 살아가는 일도 쉽지 않았을 일. 답답한 마음을 멀리 있는 독일 나치에 점령당한 동유럽의 한 나라 폴란드의 망명 정부에 담아 동일시해 보려고 애쓰던 시인의 아련한 노스탤지어가 느껴진다.
이 영화를 만들면서 웨스 앤더슨는 오스트리아 소설가 슈테판 츠바이크 (Stefan Zweig, 1881-1942)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섬세한 감수성의 뛰어난 소설가이며 동유럽을 사랑했던 츠바이크는 독일 히틀러에게 저항하다가 1940년 브라질로 피신한다.
2년 후 부인과 함께 수면제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그는 유럽을 그리워하며, 사라져 가는 유럽의 문화와 아름다움을 전하려 애썼다고 전해진다. 앤더슨 감독은 영화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대사를 남겨 슈테판 츠바이크를 기억한다.
Young Writer: A week later, I sailed for a cure in South America, and began a long, wandering journey abroad. I did not return to Europe for many years. It was an enchanting old ruin... But I never managed to see it again.
젊은 작가: 일주일 후에 나는 치료를 위해 남미로 출발해 길고도 정처 없는 여정을 시작했다. 나는 수년간 유럽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유럽은 파괴되었지만 마음을 사로잡는 곳이다. 그러나 다시는 돌아갈 수 없었다.
영화의 주요 인물은 다 음 두 사람이다. 성격은 괴팍하지만 호텔을 사랑하고 손님들에게 최선을 다하며 호텔의 존재 이유 (raison d'être )를 지키기 위해 애쓰는 구스타브 (Gustave, 레이프 파인스, Ralph Fiennes). 호텔에서 로비 보이 (심부름꾼)으로 일하다가 결국 호텔을 물려받는 제로 무스타파 (Zero Moustafa, 머래이 아브라함, Murray Abraham). 이 인물이 호텔의 전성기와 전쟁, 쇠퇴기를 겪어나가며 호텔을 살리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 생생하게 묘사된다.
호텔을 물려주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M. Gustave: If I die first, and I almost certainly will, you will be my sole heir. There's not much in the kitty, except a set of ivory-backed hairbrushes and my library of romantic poetry, but when the time comes, these will be yours.
구스타브: 내가 먼저 죽거든, 거의 틀림없이 그렇게 될 것이니, 호텔은 네 소유야. 돈은 얼마 남아있지 않을 거야. 머리빗과 낭만주의 시집 정도나 있겠지. 어쨌건 시간이 되면 호텔을 넘겨줄게.
영화에서 무스타파는 젊은 작가에게 구스타브를 회상한다.
Mr. Moustafa: [on M.Gustave] There are still faint glimmers of civilization left in this barbaric slaughterhouse that was once known as humanity... He was one of them. What more is there to say? To be frank, I think his world had vanished long before he ever entered it. But I will say, he certainly sustained the illusion with a marvelous grace.
무스타파: [구스타브에 관해 말하며] 이 험한 세상에도 한때 사람 사는 세상이라고 알려진 문명의 희미한 잔상이 아직 남아있죠. 구스타프는 그런 사람이지요. 무엇을 더 말할 수 있을까요? 솔직히 말하면 사람 사는 세상다운 세계는 그가 들어오기도 전에 사라졌어요. 하지만 구스타프는 남에게 베풀면서도 세상은 아직 아름답다는 환상을 몸으로 버티고 있었지요.
유럽을 사랑하는 웨스 앤더슨 감독은 구스타브를 통해 사라져 가는 유럽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표현하고자 애썼던 소설가 스테판 츠바이크의 생각을 그리기 위해 노력했다. 미국에서 사는 동안 많은 백인 미국인들이 자신들의 고향이며 문화의 시작점인 유럽을 그리워하고 유럽사람들을 쉽게 대하지 않는 장면을 많이 보았다. 적어도 교양 있는 백인 들이라면 그랬다. 미국이 현재 경제, 군사적으로 세계를 이끌고 있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문명과 문화의 뿌리가 유럽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고 또 그리워하는 현상은 낯 선 광경이 아니었다.
그러다가 몇 달 전에 아래 사진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 처음에는 가짜 사진인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더 놀란 사실은 이 사진이 미 백악관 공식 사진이라는 점이었다. 미국 대통령이 유럽의 국가수반과 유럽연합 (European Union) 의장을 자신의 집무실 의자 앞에 앉게 하고 자신은 책상 의자에 앉아 부하에게 업무 지시를 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유럽의 전성기가 지났고 미국의 세상이라고 해도 자신들의 정신과 문명의 모태인 유럽을 이렇게 대해도 되는 것인지 착잡했다. 앤더슨 감독은 이 사진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하다.
영화 중에 다음 대사는 예의와 교양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미국 대통령에 대한 평가 같기도 하다.
M. Gustave: Rudeness is merely an expression of fear. People fear they won't get what they want.
구스타브: 예의가 없다는 말은 겁에 질려 있다는 말이야.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겁이 나는 법이거든.
아름다운 영화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며 옛 유럽의 노스탤지어에 한 번 빠져 보기를 적극 권한다.
https://www.youtube.com/watch?v=hgGXL5lJ-6g&t=3s
https://www.youtube.com/watch?v=mXRztrOK47I
https://www.youtube.com/watch?v=xoAQRpGObf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