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쉬는 청년의 무쓸모적 생각
내가 원하는 완벽한 섬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천혜의 자연환경일 것 (아름답지만 자연재해나 위험한 야생동물은 없을 것)
2. 원하는 모든 자원을 손쉽게 구할 수 있을 것 (천연자원, 공산품 및 각종 서비스를 포함)
3. 원하는 가족/친구가 있고 필요한 외부인도 종종 들를 것 (그들이 새로운 질병을 퍼뜨리지 않아야 함)
4. 하기 싫은 일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경향신문이 통계청 ‘경제활동인구 청년층(15~29세) 부가 조사’ 마이크로데이터를 17일 분석한 결과, 쉬었다고 답한 청년층(재학·휴학 제외) 중에서 기간이 1년을 넘긴 비중은 지난 5월 기준 45.7%였다. 이는 전년(44.2%)보다 1.5%포인트 증가한 규모다. ‘쉬었음’ 인구는 통계청 조사에서 육아나 학업 등 이유를 들지 않고 “그냥 쉰다”고 응답한 경우로, 취업자나 실업자를 합친 경제활동인구에 포함되지 않는다.
- 2024.11.17 경향신문 <‘쉬었음’ 청년 절반, 1년 넘게 취업도 구직활동도 안 해···장기화 우려> 중
그냥 쉬었음. 세상에 그냥이라는 게 있나? 그냥일 수도 있지. 그냥 쉬기도 하고, 그냥 사랑하기도 하고, 그냥 헤어지기도 한다. 세상에는 그냥 그럴 수 있으니까 일어나는 일도 있다. ‘그냥 쉬고 있는 청년’인 나, 그냥 쉰 지 첫 몇 달은 2년 간 출근을 준비하는 시간이던 6시에 눈이 떠졌다. 그러고는 금세 다시 잤다. 몇 달이 더 지나자 8시, 그 이후에는 10시를 넘어서까지 자버리는 일도 있었는데 지금은 8시에는 일어난다. 그냥 쉬는 청년이라도 그냥 일어나야 하는 법이다. 어쩌다 그냥 일어나 버린 하루를 다시 살아가본다.
오늘의 날씨는… 맑음. 맑은 날에는 피크닉을 해야지. 이렇게 맑은 날은 맑은 날을 바라는 사람에게는 흔히 오지 않는다. 오늘 6월 1일은 내 일생 중에서 한 80번쯤 될 6월 1일 중 하나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오늘 하루가 소중해진다. 성인이 된 후부터 나이가 들어 몸을 쉬이 일으킬 수 없게 되기 전까지,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날들만을 가정한다면 한 60번쯤 되는 날들 중 하루. 물론 이건 80세까지 산다는 가정 하의 일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나가야만 한다. 가만히 있을 순 없다. 일기예보는 오늘도, 내일도, 모레도 맑음을 예고한다. 하지만 날씨를 낭비하는 기분이 싫고 그런 기분이 드는 내가 싫다. 눈앞에 바로 닥친 일들을 생각한다. 삶의 불확정성에 지쳐있는 사람에게 ‘10년 뒤 자신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는 면접 질문은 갈 곳을 잃는다.
일을 쉬게 된 데에는 나의 선택과 여러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는데, 그러다 보면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나비 효과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지구와 공동체라는 실제와 가상의 테라리움 안에서 모두가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서로 다른 가치와 목적을 가지고 똑같은 시간을 살아간다. 이 모든 서로서로가 연결되어 있다는 점이 가끔은 끔찍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한 사람의 선택으로 다른 사람의 하루를 망쳐버릴 수도 있는 법이다. 한 사람의 이득은 누군가에게는 손해가 되기도 하는데, 한 사람의 불행이 누군가에게는 행복이 되는 걸까? 카페에서 방금 받아온 커피를 엎질러버린 사람의 작은 불행은 나를 약간 불행하게 한다. 테라리움의 균형은 이미 무너지고 있다.
주식과 코인, 부동산으로 노동의 가치가 땅에 떨어져 버린 세상에서 일의 가치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아파트는 돈이 생기는 대로 빚을 얻어서 갭을 끼고 사야 하고, 코인이나 주식 같은 재테크를 하지 않으면 바보이고, 익명의 베스트셀러 작가는 젊은 이들에게 호통을 치며 성공을 위한 가르침을 준다. 의미가 있는 일을 찾고 싶어 하면서도 이를 찾는 행위 자체의 무의미함을 느낀다. 내가 좋아하는 모 예술가는 (자조적인 의미에서) ‘왜 사는지를 고민하는 것은 정신병자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돈이 떨어지면 일은 그냥 해야 하는 것이다. 살아있으면 일을 하지 않고서는 살 수 없다. 모든 것이 완벽한 섬에서 집 짓고 수렵 생활을 할 수 없게 사회가 만들어졌기 때문에. 그렇게 오늘도 어쩔 수 없이 일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일하는 사람들로 사회가 굴러가고 있다. 그리고 오늘도 이렇게 ‘그냥 놀았음’ 청년 실업자는 무의미한 생각을 하며 무가치창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냥 노는’ 날이 곧 그리워질 것을 예감하면서.
2025. 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