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 회사의 분기 Board meeting이 있었다. 내가 참석하는 회의중 가장 크고 중요한 이 회의를 준비하느라 정신 없던 시간이 마무리 되나 싶었던 미팅 전날 오후, HR을 통해서 Announcement라는 제목의 메일이 회사 전체에 뿌려졌다. 신경쓰지 않고 있었는데 한명의 director가 내 사무실을 노크하고 들어와서는 내게 메일을 읽어봐야 할 것 같다며 걱정스러운 눈빛을 던졌다. 무슨 일인가 싶어 봤더니 본문에는 아무런 설명 없이 하나의 첨부 파일을 갖고 있는 메일이었는데 그 첨부 파일은 현 CEO의 퇴임을 알리는 Chairman의 letter였다.
회사 전체에 일순간 정적이 흘렀다. 아니, 흘렀다고 생각한다. 내 사무실 문을 열고 나가 큐비클에 앉아 일하고 있는 다른 직원들을 살펴본건 아니었지만 분명 그 순간 회사 전체가 약속이나 한 듯 모든걸 멈췄다는 느낌을 받았다. 굳이 사무실을 나가보지 않았다. 무엇보다 나 역시 전혀 알지 못했던 일이라 팀원들이 내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봤을때 할 말이 없었기 때문.
모든 정황은 '경질' 이라는 단어를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렇게 의도된 통보 방식이라는 것도 알 수 있었다. CEO의 퇴임 자체가 아무리 미리 정해졌다 하더라도 형식적으로는 Board meeting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하는게 맞다. 그리고 CEO가 경영진들에게 사실을 알린 뒤 직접 전사 공지하는게 합리적인 수순이고. 하지만 Board meeting 전날, CEO가 경영진에게조차 이야기할 시간도 없이(그러니까 경영진도 모르는 상태에서) 전사 공지를 Chairman 이름으로 내보냈다는건 누가 봐도 경질이었고, 어느 누구도 그 사실을 오해하지 않기를 바라는 의도가 느껴졌다.
현 CEO 자리가 조금은 위태해 보였던건 맞다. 펜데믹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 회사의 실적이 몇해째 경영계획을 달성하지 못하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몇몇 핵심 경쟁사들은 우리 회사보다 더 잘 하고 있었으니까. CEO 개인의 잘못이냐 하면 꼭 그렇지는 않지만 결국 그 자리는 모든걸 책임지는 자리였으니 위태하다고 생각했었다. 다만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얼마전 조직 개편을 하고 새로운 전략을 수립하고 움직이기 시작한 시점이었기에 이런식의 발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Chairman의 letter를 통해 알 수 있는건 오래 전부터 준비했던 일이고 새로운 CEO도 정해진 상황이라는 것.
제일 먼저 든 생각은 후폭풍이 있을거고 분명 다시 조직 개편이 있겠구나 하는 거였다. 단지 업무 조정 수준이 아니라 경영진들중 누군가는 회사를 떠나야 할 수도 있는 규모의 조직 개편. 이날 오후 잠깐 Chairman을 만나 이야기 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는 CEO를 제외한 다른 경영진에 큰 변화는 없을거라는 식으로 이야기 했다. 하지만 그게 어찌 가능할까. 나를 포함 현재의 경영진들은 예외 없이 현 CEO가 뽑았거나, 그의 결정으로 내부 승진해서 그의 staff이 된 사람들이다. 누구나 조직을 맡으면 자기가 원하는대로 팀을 꾸리고 싶은게 인지상정인데 새로 오는 CEO라고 예외일리 없다.
Board meeting 전날이면 항상 있었던 Board member들과 경영진들의 저녁 식사는 이번엔 취소가 됐다. 집으로 오는 길에 와인 한잔이 간절했는데 다음날이 Board meeting만 아니었다면 한 병 땄으리라.
어색하기 그지 없는 Board meeting이 끝나고 다음날, 내 사무실을 찾아 온 CEO 와 여러 이야기들을 나눴다.
개인적으로 그에게 어떤 특별한 loyalty를 갖고 있는건 아니었다. 그도, 나도 pro 였고 각자의 일을 하면 되는 사이였다. 하지만 5년간 함께 일했고 내 평상 가장 빠른 승진을 이뤄낸 시기 내 보스였던 사람이기에 애틋함 비슷한 감정은 있다. 한편으로 펜데믹 시기를 함께 헤쳐온 팀의 일원으로 느끼는 전우애 비슷한 느낌도.
어쨌든 어제 내 사무실에 앉아 그와 이야기를 하며 CEO인 그와 Chairman 사이에 있었던 갈등에 대해 아주 두리뭉실하게 들었다. 상대가 누구든 내 상사와의 갈등을 내 staff 에게 이야기 하는게 적절하지 않다는 건 나도 알고 그도 안다. 하지만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은듯 보이는 그를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한번 내가 새소리와 꽃향기가 없는 정글, 그러니까 빌딩으로 뒤덮인 정글에 있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 기분을 알려주자 ChatGPT가 그려준 이미지. 고소 공포증이 있는 난 실제로 이런 사무실에서는 일을 못하겠지만, 내 기분은 잘 표현했다. 똑똑해라.
주말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어제 와인을 한 병 열었다. 생각이 많을땐 자전거를 끌고 나가는게 최고인데 평일 저녁에 장거리 그래블 라이드를 나갈수 없으니 택한 차선책이었다.
지금 회사에 입사한지 5년이 됐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하지만 그 안에서의 삶은 퍽퍽했다. 입버릇처럼 이야기 하는 스트레스 총량 보존의 법칙은 미국에서도 동일했다. 한국에서 받았던 스트레스와 종류가 다를뿐 일에서 받는 스트레스의 총량은 결국 같았다. 여기에 습득한 영어가 아닌 공부한 영어를 쓸 수 밖에 없는 이민자라는 패널티까지 감당해야 했으니 어쩌면 한국에서보다 좀 더 힘들었다고 해도 되지 않을까.
Senior Engineering Manager로 회사에 입사한지 반년만에 펜데믹을 맞이했고, 그와 함께 크게 개편된(..이라고 쓰고 많은 이들이 lay off 되었다고 읽어야 하는) 조직 변화의 물결을 타고 개발 책임자인 Engineering Director가 됐다. 원하던 승진이 아니고 몇번 거절을 했었는데 결국 끝까지 버티지 못했다. 머리 위로 해고의 칼날이 날아다니고 내 바로 위, 바로 아래, 동료들이 순차적으로 lay off 되는 분위기 속에서 승진 제안을 거절하면 다음 lay off 차례는 내가 될 것 같다는 불안감을 이겨내지 못했다. 찾아보니 내 글에 이 시기에 대한 이야기를 적은 브런치 포스팅이 있다. 그가 살짝 등장했고.
개발 책임자가 되고 2년의 시간이 흐른 어느 시점, 회사의 주요 TF를, 개발TF도 아닌 전혀 엉뚱한 TF를 성공시킨 공을 인정받아 Vice President of Operations 로 승진을 했다. 사실 이때 모두가 외면했던 그 TF의 리더 자리에 자원했던건 회사를 그만두기전 마지막으로 뭔가 회사에 하나 정도는 안겨주고 나가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서였다. 그런데 날벼락같이 TF 가 종료되기 직전 회사의 Chairman이 전화를 걸어 OPs VP가 되어줄 것을 부탁했다. 이 변화를 놓고는 개발책임자로 승진할때보다 몇곱절은 더 망설였다. Chairman과 CEO 모두가 내게 변화를 권했는데 이 당시 느낌으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선택을 하는 심정이었다. Engineering에서 Operations로 가는, 완전히 다른 영역의 업무였으니까.
일주일을 고민했는데 결론은 '한번 해볼 수 있을것 같다' 였다.
그렇게 개발과는 완전히 다른, 회사 운영을 담당하는 VP가 되어 보낸 1년반은 지금 회사에 입사한 뒤 가장 폭풍같은 시기였다. 일도 힘들었고 미국에 온 이후 전혀 신경쓸 필요 없었던 사내 정치의 세계에 어쩔수 없이 발을 담가야 하는 것도 힘들었다. (더군다나 '아' 다르고 '어' 다른 미묘한 언어 유희를 통해 이루어지는 정치를 영어로 해야 했다)
정말 벼라별 일이 다 있었다. 팀의 핵심 director 한명이 나와는 일을 못하겠다며 사표 내고 나간 일도 있었는데 그 때 굳건하게 내 편을 들어주고 노이즈가 나지 않게 지지해준 사람이 현재의 CEO였다. 아이러니하게 올해 들어 나와 가장 많은 의견 대립을 했던 사람도 현재의 CEO였고.
그래서 그가 해임되는 과정을 보는 마음이 참 복잡했다.
금요일인 오늘. 그와 점심을 같이 했다. 이제 마음이 좀 편안해 진 듯 훨씬 웃음기 있는 얼굴로 대화를 하는 그를 보니 그래도 대단한 멘탈이구나 싶었다. 혹은 자존심이 정말 강하거나. 그는 회사의 공식 작별 파티와는 별개로 뉴욕주에 있는 그의 별장으로 그와 동고동락했던 경영진들만 초대해서 따로 파티를 갖겠다고 했다. 항상 말로만 듣던 호숫가 별장에 드디어 가보는 거냐며 같이 웃었다.
분명한건, 복잡 미묘한 감정에도 불구하는 그는 내 롤모델이었다. 가진것 없는 집에서 태어나 성실하게 평생을 살고 월급쟁이 생활 끝에 한 회사의 CEO까지 올라서고 제법 큰 부를 이룬 그는, 내 입장에서 내가 미국에 살며 거두고 싶은 성공 그 자체였으니까. 아직 60대 초반인 그가 다른 회사의 CEO자리에 갈 것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잠시의 쉼은 있겠지만 분명 또 다른 자리를 찾으리라 확신한다.
나는 어떻게 될까? 새로운 CEO가 오더라도 그가 업무 파악을 할 때까지는 아마 큰 변화는 없겠지만 종국에는 변화가 있으리라고 예상한다. 그 변화의 끝이 내게 더 큰 기회로 다가올지 아니면 여러모로 힘든 상황으로 올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