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말, 첫째가 오후 2시에 학교 친구집에 모여서 Table Talk RPG 를 하기로 했다며 내게 라이드를 부탁했다.
첫째가 참여하는 이 TRPG 그룹은 1년 이상 모인 그룹인데 한달에 두 번 정도 주말에 모여서 이렇게 TRPG 를 즐긴다. 모두 학교 친구들이고(그러니까 10학년이다. 한국으로 치면 고등학교 1학년), 학교에서 어울리는 좀 더 큰 무리에 다 같이 포함되어 있다. 이 무리에서 유독 TRPG 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따로 모이는 것. 아무래도 TRPG는 여럿이 필요하고 캐릭터를 정해서 각자의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한명이라도 빠지면 플레이 하는데 어려움이 있는데다 보통 하나의 스토리 모듈을 플레이 하는데 수십 시간이 필요하다보니 한번 모여서는 게임을 끝낼수 없어 몇달에 걸쳐 모듈을 끝낸다. 그 결과 이 아이들 사이의 결속력은 놀라울 정도로 강하다.
나는 이 모임을 좋아하고 아이가 참여하는걸 적극 지원해주고 있는데 휴대폰 보면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게 아니라 주사위를 굴리고, 캐릭터 sheet 를 쓰고 지우며 직접 환경을 만들고, 자기들끼리 열띤 토론을 해가며 상상속의 세계를 탐험하는.. 그러니까 살아 숨쉬는 스토리를 만드는 그 모든 행위가 아이들이 참 건강하게 어울린다는 느낌이어서 그렇다. 모이는 아이들은 인종과 성별은 굉장히 다양한데, 내가 아는 한 성별과 인종이 겹치는 아이들은 없다. 이 역시 내가 좋아하는 부분.
딱 한가지만 빼고.
그리고 그 한가지가 지금 이 글을 쓰는 이유다.
저녁 7시가 되어도 연락이 없는 첫째에게 문자로 몇시까지 놀건지 물어보니 9시 30분까지 놀겠다는 답이 왔다. 이 모임이 있는 날은 좀 늦는 경우가 많았으나 9시 30분은 처음이었다. 평소 7시까지 놀아도 좀 늦는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들던 터라 9시 30분은 약간 놀라움이었다.
제일 먼저 들었던 생각은 '이렇게 늦게까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 집 부모에게 괜찮은가 하는 부담과 함께 아이가 엄마나 아빠 없이 혼자 다른 집에,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있게 해도 되나 하는 걱정.
약간 늦는거 아니냐고 물어보니 자기는 이미 9시 30분까지 논다고 이야기 했단다. 아마 이야기 했는데 내가 무심코 흘렸겠지. 그건 그거고 이제 아이에게 뒤늦게라도 안된다고 할지 허락해야 할지를 결정해야 했다. 쉽지 않은 문제인게, TRPG 특성상 우리 아이에게 그만하라고 하는건 다른 모든 아이들에게도 그만하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기 때문. 고민하다 아이에게 답장을 하기 전에 ChatGPT 에게 물어봤다. 그리고 조금 놀랄만한 답을 받았다.
아내에게 물어보니 아내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문화권에서는 다들 껄끄러워 하는데 그렇지 않은 가정들은 괜찮아 하더란다. 아, 나만 몰랐구나. 어쩐지 침착하더라니. 다른 아이들이 모두 거기에 있다는건, 그 아이들의 부모들은 모두 허락했다는 의미가 된다. 아이에게는 "ok" 라고 짧게 회신을 보내고 폰을 덮었다.
이날 또 한 번 깨달았다. 부모는 한국계 이민자로 늙어가고 아이들은 한국계 미국인으로 자란다.
어제는 온 가족이 저녁 외식을 했다. 그 때 첫째와 둘째에게 summer job 에 대해 이야기 했다. 이제 16살인 첫째는 어지간한 모든 곳에서 파트타임으로 일을 할 수 있고 여름 방학이 이렇게 일을 해보기에 가장 좋은 시간이 될 터였다. 첫째는 작년에 YMCA summer camp에서 CIT(Counseler In Training) 로 합류했었기 때문에 원한다면 다른 summer camp에 공식 카운셀러로 등록해서 일을 할 수 있다. 당연히 pay를 받으며 세금도 보고해야 한다. 둘째는 이번 여름에 타운십의 CIT 로 등록하기로 확정했고 첫째는 어디서 일할지 고민중. 첫째에게는 여름 방학동안 번 돈으로 나쁜짓이 아니라면 뭘 하든 네 자유라고 했다. 돈을 모아서 차를 사도 되고(마일리지 큰 중고차라도 차를 사려면 아마 2년 정도는 모아야겠지만. 어쨌든 보험료는 내주겠다고 했다), 옷이나 신발을 사도 되고, 게임기와 게임을 사도 된다고 했다. (안그래도 닌텐도 스위치2 를 사달라며 노래를 부르고 있던 막내가 이 말을 듣더니 '형아야~!' 하면서 눈을 반짝였다)
여름 방학이면 SAT 학원을, 심지어 한국에 가서 방학동안 한국 SAT 학원에서 아이가 시험 기술을 익히도록 해주는 가정도 많다. 실제로 이런 부분이 성적 향상에 도움이 된다는 이야기도 자주 듣는다.
이제 대학 입시를 준비해야 하는 시기가 되었기 때문에 우리 부부도 그 고민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나, 우리는 아이들을 아이들이 자라고 있는 땅의 문화에 녹아들도록 키우기로 했다. 첫째가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 summer job을 해보고, 인턴을 해보거나 평소 원하던 animal shelter 봉사 활동을 다닐수 있는 기회를 주기로 했다.
한국계 이민자는 한국인지만 한국계 미국인은 미국인이니까, 아이들은 미국인으로 키워야 한다는게 우리 부부의 생각이다. 언어적으로가 아니라 문화적으로.
한 번 허락했으니 아마 이제 주말이면 아이는 종종 늦은 시간까지 친구들과 어울리며 시간을 보낼테고 아마 자기들끼리 summer job 에 대해 이야기를 하겠지 싶다. 어쩌면 이번 여름이 아이가 어른으로 성장하는 중요한 분기점이 되지 않을까.
나는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