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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er병문 Jun 27. 2024

마땅히적을곳이없어서!(짧은끄적임)

ITF 번외편 ㅡ 축적 蓄積 : 쌓아야만 하는 것

나중에 소은이의 글씨 공부에 대해서도 얘기하겠지만, 하루 마치고 잠들기 전, 매일 아비와 조금씩 책 보고 글쓰는 시늉을 해서 그런가, 요즘은 잠들기 전, 제법 먼저 텔레비젼을 끄고 아빠, 우리 공부할까요? 라며 책과 볼펜을 가져온다. 제 고모가 글씨는 가나다 순으로 알려주는게 아니고 무조건 제 이름이 우선이라며 가끔은 야밤에도 영상통화를 걸어 참견 아닌 참견을 하기도 하는데, 공은 꽤 그럴듯하게 쓰고, 전 은 위태하게 쓰다가 ㅅ 까지는 쓰고 으으으음 숙고하다 ㅗ 대신 ㅜ 를 써놓고는 저도 머쓱하여 이히히 웃는다. 수 는 기왕지사.잘 썼응게 그럼 소은이 좋아하는 수박 써봐야? 하면 ㅂ 까지는 또 잘 쓰고 ㅏ 를 ㅂ 오른쪽에 안쓰고 왼쪽에 쓰고는 이게 맞아! 하며 우긴다. 양말의 양 은 잘 써놓고 말의 마 까지는 어찌어찌 쓰다 ㄹ 은 아무래도 어려운지 2를 쓰거나 3을 쓰거나 해버린다. 손을 잡아주고 하나둘셋넷다섯, 숫자로 짚어주며 획순을 익히는데 신경써준지 며칠 되었다. 첫 술에 배부를수 없으니 이런 나날들이 쌓여 소은이도 말과 글을 능란히 쓰도록 클 터이다. 이미 제 자리를 스스로 정리할 정도로 컸다.



내가 처음 ITF에 입문하여 흰 띠를 맨 십년 전 봄에 이렇게 오래, 끈질기게 하거나 혹은 3단 띠를 받아 부사범까지 어찌어찌 하리라고는 나조차도 믿지 않았다. 타고난 약한 몸은 무릎 연골이 닳고 발목 인대를 꿰매어 붙여 비오는 날이며 절었고, 골반이 좁고 굳어 발차기를 오랫동안 제대로 차지 못했다. 내게 킥복싱을 알려주셨던, 어르신 관장님은 미들도 차지 말고.무조건 가드 굳히고 로우킥만 차라 했을 정도였었다. 주로 써오던 종합격투나 주짓수의 관절기는 당연하지만.태권도의 맞서기에 쓸 수 없었고, 그나마 오래 늘 쓰던 권투의 주먹만으로는 태권도를 하기에 부족했다. 남들이 빠르게 색깔 띠를 연달아 받을 때 나는 봄 여름 가을 동안 내내 흰 띠의 기본기를 연습했고, 다섯달이 지나서야 첫 승급을 했다. 그 이후로도 누가 뭐라건, 소은이가 아주 어릴때의 여덟 달을 제외하고, 나는 도장 안팎에서 꾸준히 주먹에 못이 박히고, 발바닥이 몇번이나 찢어지게 연습했다. 나보다 승급, 승단이 빠르거나 둔한 나를 비웃던 이들은 도장에 없다가 뒤늦게 돌아와 3단 띠를 맨 나를 보고 놀랄 때가 종종.있다. 그렇게 십 년을.보냈고 앞으로도 심신(가수 말고) 이 허락하는 한 그럴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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