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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땅히적을곳이없어서!(사는이야기)

멈추지 않아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by Aner병문

어느 지역마다 관공서를 중심으로 퍼지는 골목길 곳곳을 살펴보면 낮부터 이미 여는 술집들이 많았다. 나는 소리나 향기로 도시를 읽어낼 수 있다면 어떨까 생각했다. 돈 없는 시간만이 널브러지는 젊은 시절, 나는 시덥잖은 밥을 먹고 오래 걸었다. 눈과 비는 때때로 나뭇잎에 매달려 있었다. 도복과 책과 커핏병에 눌려있던 우산의 가장자리 살이 부러져 애처로웠다. 나도 모르는 새 우산은 눌려 오래 아팠을 터이다. 가끔 나는 오래된 전화기의 유선 이어폰을 챙기지 못했고, 그래서 나는 모처럼 막히지 않은 귀로 도시가 내는 소리를 들으며 뱅뱅 걸었었던 적도 있다. 그때 내가 걷는 길들은, 마치 한 무리의 교향악단처럼, 각종 소음을 차곡차곡 쌓아 협주처럼 들려주곤 했다. 내가 걷던, 도시의 혈관같던 골목들은 당연하게도 지역마다 모습과 향취가 달랐는데, 서울역부터 종로를 거쳐 인사동까지는 오래되어 늙은 벽 사이조차도 놓치지 않고, 항상 외국인들과 그를 맞는 가게들이 많아 부산스러웠고, 오히려 북촌이나 성북동의 고급스러운 민가들은 조용하고 호젓했으며, 우리집 주변 골목에는 항시 중국식 향신료와 기름 향이 밴.채로 소란스러웠다. 한때 일산이나 강남 거리를 걸었던 때도 있었는데, 잘 정비된 바둑판 같은.길과 고층건물이 말그대로 콘크리트.숲과 같아, 깔끔함에 경탄하면서도 좀처럼 정들지는.않았던 생각이 난다. 그 시절의 나는 돈도, 갈 곳도 없이 오로지.시간만 있어 오래된 구형 전화기에 음악과 라디오 방송.녹음본을 가득 담아 그저 반복적으로 가던 길을 되짚어 몇번씩 왕복하곤 했었다. 어느 계절에서건, 침잠하여 버티던 시절이었다.



결혼하고 나서는, 아이 보내고 돌보는 사이 출퇴근하고, 도장 다니기도 바빠 여유롭게 어딘가를 걸을 시간조차 없어졌다. 너와 잠시 얘기하다, 시간 있을땐 돈이 없고, 돈이 있으니 시간이 없으며, 둘다 있으니 건강이 없다는 말을 듣고 쓰게 웃었던 적이 있다. 잠시 걸을 떄가 있다면, 아내의 직장이나 처가로 찾아가, 처자식이 다같이 늦잠을 잘때, 나는 비로소 칠곡의 어느 산길을 걷거나, 혹은 포항의 도로가를 걸으며 그 곳을 두리번거린다. 칠곡의 산길들은 늘 조용히 곁을 내주고,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수없는 바퀴들을 온 몸으로 받아낸 포항, 혹은 울산의 길들은, 패인 흉으로 가득해서, 나는 무심코 아침 달리기를 하다가 발목을 접질려 삔 적도 있다.



어느 길이건, 어느 지역이건, 어느 도시건, 가야만 비로소 닿는다. 그러나 닿았던 곳을 생각해보려 할때, 나는 이미 닿은 곳을 지나 있다. 그러므로 돌아볼 여유를 가지고, 다시금 겪으려 할때, 이미 나는 그 장소가 없거나, 혹은 다시금 그 장소에 돌아왔다 한들 당시의 내가 아니던 나날들을 너무 많이 겪었다. 후회란, 그 상실의 순간들을 되찾을 수 없어 단지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라깡은, 내가 존재하는 곳에 사유할 수 없고, 사유하는 곳에 존재할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저 살아나갈 뿐이다. 악착같이 버텨나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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