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도 그때의 북촌을.기억한다.
나는 아직도 그때의 북촌을 기억한다. 나는 아직도 그때의 인사동을 기억한다. 회사에서 일할 곳을 북촌으로 배정해주어 가보니, 서울 중심에서 약간 더 북쪽에 위치한 그 곳은, 역시 오랜 역사를 지닌 부촌이었다. 바로 아래 인사동이 온갖 국적의 외국인들과 그들을 맞이하는 상점으로 붐벼 활기가 가득했다면, 북촌 역시 관광객들이 적지 않았으나, 오랫동안 그 곳을 지켜온 기품있는 주민들이 있어 나름대로의 고즈넉한 품격을 지킬 수 있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간식이나 식료품을 사러 오는 여러 배우, 가수, 시인, 영화 감독 등 다양한 예술가들을 볼 수 있어 좋았다. 그러나 무엇보다 좋았던 점은 말벗할 너가 가까이 있었다는 게다. 북촌에서 인사동을 넘나들면서, 면허가 없던 나는 사무일을 보다 가끔 자전거를 타고 언덕배기를 오르내리며 채소와 고기를 나르기도 했고, 북촌의 유명 명물 인사들과 수인사를 하기도 했으며, 때 되면 너가 있는 까페에서 커피 한두잔 마시다가, 퇴근 후에 슬쩍 만나 소주 곁들여 먹은 감자탕 뼈만 헤아려도 소 한두 마리는 족히 만들지 않았을까 싶다. 북촌과 인사동은, 그렇게 내게 낭만을 간직했던 청춘의 마지막 순간이었고, 북촌과 인사동을 떠나면서, 내 청춘의 낭만도 끝을 고했던 기억이다.
그 낭만은 잠시 헝클어진 적이 있엇는데, 몇 대 전의 우리 나라 최초 여성 대통령께서 종교와 사생활을 비롯한 갖가지 구설수에 올랐을때였다. 안국역 2번 출구에는 헌법재판소가 있다. 나 역시 전경 출신이기에 경찰차로 성벽 쌓듯 포진을 해두고, 젊은 기동대 경찰들과 전의경들이 함께 모여 시위대와 대치하는 모습이 남일 같지 아니했었다. 탄핵안이 가결되던 날, 지금도 나는 그때 그 고함소리를 기억하는데, 뉴스를 틀어놓고 있다가, 북촌 저 아래 멀리로부터 와아아아아 하는 사람 함성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TV 속 뉴스에서가 아니라, 정말로 메아리처럼 저 멀리서부터 올라오는 소리였다. 시위대가 경찰의 방벽을 뛰어넘어 돌진하는 바람에 돌아가신 분도 있고, 다친 이들도 여럿이었다. 그때까지 고전적인 멋을 지닌 북촌 동네는 갑자기 소슬하고 아스라한 분위기의 무법천지가 되어버렸다. 관광객들은 즉시로 줄었고, 주민들도 거의 나오지 않았으며, 한복을 입은 어린 중국 소녀들만 가끔 뜨문뜨문 보였다. 경찰들은 조를 짜서 낮밤없이 순찰했는데, 격앙된 시위대들 역시 몽둥이와 쇠파이프 등을 들며 떼지어 다녔고, 그들 중 상당수가 취해서 지분거렸다. 그들은 시빗거리만 보이면 가리지 않고 덤벼들어, 가게 창문을 깼고, 쓰레기를 버리고, 소리지르고 사람들을 위협했다. 나는 지금도 그들을 제지하는 경찰에게 소리치던 어느 중년 사내의 말을 똑똑히 기억한다. '빨갱이 잡으라고 준 칼로, 감히 국민을 찔러?' 본인이 하는 짓과 위세에 비해 대단히 어울리지 않는 정의였다. 내 몸에 어설피 배어 있었던 종합격투의 스탠딩 레슬링이라거나 원투 로우킥이라거나, 몇 가지 기술들로 겨우 몸을 지켰던 때도 그 때가 마지막이었다.
지금도 문장을 두드리며 생각해보지만, 나는 이제 무법천지가 싫어졌다. 한때 황량한 무법천지가 낭만이라고 생각하고 살던 시절이 있었다. 나는 부천역 남북부를 가리지 않고, 취해 있었고, 배운 기술을 써보고 싶어 늘 근질근질했다. 서너 시간 자는 잠을 기점으로, 나는 낮에는 훈련하고 공부했고, 밤에는 술 팔고 보드게임 가르치고, 팔다 남은 술을 마시며 책을 읽었다. 그떄의 나는 하늘 높은 줄 몰라 자신만만했고, 먼저 시비는 아니 걸되, 거는 시비는 참는 법이 없어 늘 자주 싸웠다. 그때는 철없이도 그게 낭만인 줄 알았는데, 지금 다시 돌이켜보니 그때의 그 북촌 시절 이후로 이제 나는 평온하지 않은 삶이 아주 싫어져버렸다. 밥잘하는 유진이, 털보 큰형님과 함께 지내던 인사동 시절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그 당시는 식당 예약이 모두 끊어지고, 우리는 한순간에 유령도시처럼 변해버린, 인사동의 밤불빛을 보면서 이게 무슨 일인가, 쓸쓸해하곤 했다. 시대의 뒷그림자들은 그렇게 서민들에게도 깊게 영향을 미쳤다.
광화문을 중심으로 자기가 정의라고 우기며 내세우는 자들이 득세한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 결국 폭력이 우세하게 된다. 한나라가 무너질 무렵 황건적이 득세하고, 로마가 흔들릴때 훈족이 국경을 넘나들었다. 나라가 똑바로 서 있었다면 언감생심 있지 않았을 일이다. 철없을 때, 나 역시 내가 정의인양 누가 시키지 않아도 촛불과 논어를 무기인양 싸들고 가서, 밤새 내내 사람들 뜯어말리며 다녔다. 겉보기엔 폭력에 도취돈 이들을 말리고 싶어서였겠지만, 사실 그런 나조차 알량한 정의감과 의협심을 명분삼아 내가 배운 기술을 써보고 싶었던 무뢰배에 지나지 않았다. 아주 위대한 영웅이 아니고서야, 많은 이들이 대부분 다 그러한 테두리에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이십년의 세월을 보내고서야, 사회의 기반이 없는 공간이 얼마나 위험하고 취약한 것인가를 몸소 깨달았다. 그때의 북촌, 인사동은 내가 알던 동네가 아니었다. 이번 대통령의 거취가 최종 결정됨에 따라, 나라의 치안 또한 어찌될지 모르겠다. 각종 매체에서는 자기가 가장 정확히 알고 있다며 검증되지 않는 정보를 쏟아내고, 거리에는 풋익은 완력과 무기를 지닌 이들이 관공서를 습격하고, 사람들을 겁박하려 들고 있다. 청와대따라 역시 대행체제로 운영중인 경찰청에서는 가용 경력을 모두 동원하겠다 했다. 세상이 무섭다. 나는 그래서 오래 전의 북촌과 인사동을 떠올렸다. 나는 그때의 서늘함을 아직 잊지 않았다.